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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2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 이 귀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 시에서  취급하려는 주제,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래도록 자기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파렴치함과 잔인함을 묵과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그들에게 향하는 복수를  일으켜서 단지 손을 내미시는 것만으로도 교회를 지키실 수 있다는 진리를 마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이 잘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상이 모세에게서부터 온 것이라고 본다(민 10:35). 그러나 민수기에 나오는 기도 형식을 그대로 반복했다고 하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시인은 모든 후손들에게 교훈과 위로를 주려는 안목이 있었고, 주님의 백성들에게 신적(神的) 임재의 가시적(可視的)상징인  언약궤에 있는 안전함에 신뢰하도록 확고하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께 한 말은 기도였으나  다윗은  매일매일 자기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만족하고 기뻐서 그 기분을 표현한 것이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라고 읽지만, 그러나 그들은 시인이 의도하는 바를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인이 의도하는 것은 모세가 오직 하나님
께서 일어나시면 그의 불가항력적인 능력 앞에 원수들이 흩어지게 되므로 하나님의 필요성을 선포하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다르게 읽는 것에 대해서 방금 아야기한 것과 같은 생각이고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쳐부수고자 하실 때 아무런 준비도 할 필요가 없고 한번 숨을 내심 만으로도 흩어버리실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기만 한다면 이렇게  읽는 것에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다. 우리는 원수들이 한때 세력을 쥐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시기 때문이요, 저들이 격분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실 때에 아직 이르지 않았으므로 오직 그의 허락하심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원수'라고 부른 사실에서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실 때 그는 우리가 손해를 당하면 자신의  신적 엄위가 훼손 당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신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들이 음모를 얼마나 용이하게 던져 버리시는가를 '바람에 연기가 밀려감같이' 또는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라는 말로 비유해서 그 현저한 모습을 설명한다. 우리는 그렇게 무서운 원수들의 세력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된다는 표현이 도저히 문자 그대로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이러한 우리의 육적인 생각을 꾸짖으신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큰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 즉 우리들은 원수들이 피운 연기로 우리의 눈이 가려지는 것을 허락하고 원수들이  드러내 보이는 크고 굳센 저항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속아 진리를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 그리고 원수들의 강한 산(山)들이 주님이 계신 앞에서는 안개처럼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68:3
 의인은 기뻐하여 -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자신을 무서운 존재로 나타내실 때에는 자기의 교회를 안전하게 구하고자 하는 뜻도 포함하신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다윗은 사울의 통치 밑에서 잘 훈련된 자들에게 당했던 압제와 슬픔을  이제는 회상하며 말할 수 있는 기쁨을 간접적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일시적인 고통의 때가 위로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다윗은 우리에게 한 가지 기쁨의 근거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며 스스로 그들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      (밉네)와 *      (립네)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시편 기자가 이 둘을 서로 구분한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는 자기들에게 공포를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도망하지만 의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가까이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한다. 우리는 시편 18 편 26 절  주석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왜 어떤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이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라는 이 한 가지 표현에서 시인은 또 다른  표현, 즉 주의 백성들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이며 자기들의 성품에 이 기쁨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자리잡게 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게 된다.

68:4,5,6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그를 높이고 - 칼빈  사역)......대로를 수축하라 - 다윗은 이제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암시했듯이 그는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할 일반적인 이유를 지적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다윗은 모든 세상이 그의 능력과 통치 아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그가 자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우리 인생의 가정  가운데에서도 가장 천하고 미천한 상태로 내려왔다고 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그가  '구름을 탔다'혹은 하늘이라고 한 말 속에 언급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습은 그가  만물들 위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으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모든 땅에 있는 것이나 썩어질 것들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없애 버리기를 바라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의 생각이  그의 능력의 위대하심으로 강한 인상을 확실히 받아서 그에게 온전한 경배를 드리고 우리의
모든 찬양을 드린다 해도 그의 영광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하늘과 땅을 비교해 보려는 헛된 노력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과 땅보다도 더욱 위대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는 귀절이  곧이어 나오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의  전치사 *  (베트)는 때때로 우리는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여호와 안에 그의 이름이 있다'라고 번역하지만 내가 택한 번역이 아니라고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의 의도하는 바가 명백히 나타나고 있으므로 단어를  어떻게 분해해야 할 것인가는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 당시 온 세상이 이방의 헛된  우상들로 가득 차 있던 때에 저자는 하나님을 부르짖었고,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우상들은 물러갔다. 따라서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애원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악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떠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억눌려 있다. 다윗은 주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그리고 재빨리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그는 '고아'와  '과부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선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가장 낮고 미천한 심연에서 더 이상 머물도록 방치해 두지 않고 계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아와 과부들은 외모로 보기에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이름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흔히 어떤것을 취하고  가난한 자들은 멸시하거나 등한시 한다.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천국 또는 성전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둘중에 어느  하나가  문맥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안일에 빠져 하늘에 거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늘이란 세상을 심판하게 될 그의 보좌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함께 거처를 정하시고 그들이 거하는 곳에 친밀하게 찾아오신다는 사실은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멀리 떨어져 계심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기쁨과 용기를  가져다 준다. 다음 절에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실례가 언급되고 있다. 즉 빼앗긴 자와 갇힌 자에게 형통케 하여 주시고 사로잡힌 사슬을 풀어 주신다.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을 불경스럽게 멸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주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바라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게 해 준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슬픔을 녹여 주시며 모든 매임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고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위로를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그들이 번창할 때에는 축하할 만할는지 모르나 분명히 그들에게 죄악의 대가가 임하게 된다.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 이 말의 뜻은 실제로 광야에 내쫓기는 것,  즉  아버지 같은 자비로 주시는 축복을 빼앗기고 그만한 형벌을 당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68:7,8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진동하였나이다. - 시인은 이제 나아가 주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선(善)이 잘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서 선정하신 이 교회 안에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귀절은 주님으로서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막 이루어졌던 사실들을 생각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덧붙인 것이 분명하다. 시인은 족장 시대에 하나님께서 족장들을 택함으로써  확증하셨던 바 애굽에서 구출된 사건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언약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고 최후의 것이었음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그는 이 괄목할 만한 출애굽 사건이 앞으로 계속될 모든 시대의 교회를 사랑으로 품고 계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도 많은 이적들이 행해졌던가? 왜 하늘과 땅이 요동했던가? 왜 산들이 떨었던가?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시인은 하나님을 앞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지도자가 되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홍해에 대해 언급한 귀절에서 뿐만  아니라  광야를 방황했던 모든 여정(旅程)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시인이 "땅이 진동하며"라는  말에서 의도하려고 한 것은 율법의 선포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과정 전체,  즉 자연의 과정이 반복해서 바뀐다는 사실을 마치 그 근본 요소들이 주 앞에서 떠는 것으로 말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하신 능력을 두드러지게 행사하신 것은 시내산에서였다. 우뢰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으며, 그때 공중은 빛으로 가득 찼었다. 따라서 그 사실이 여기에서는 이름을 통해서 이전에 본 일이 없었던 하나님의 위엄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어떤 자들은 이 귀절을 *   (제)라는 대명사가 여기에서는 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시내산'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 번역보다는 다음 귀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을 볼 때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윗이  말하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탁월하심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참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했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사  25:9)라는 말씀같이 종교는 그 율법 속에 미혹되지 않는다. 사실상 다윗은 주의 백성들을  믿음 가운데 세우기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는 또한 그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같은 모호한 불확실에 처해 있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버리고 세상의 상상적 신, 형상, 곧 나무, 돌, 금,  은으로 된 우상을 만드는 일을 간접적으로 책망하고 있다.

68:9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 여기에서 말하려는 것은 이들이 처음 약속된 땅에 들어갔을 때부터 계속 하나님의 은총이 백성들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자녀들에게 넘겨 주게 되어지므로  '하나님의 산업'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절에 나오는 산업을 '교회'라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뒤에서 말하기를 그곳은 교회가 거하는 곳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곳은 하나님께서 산업의 권리를 그들에게 주셨던 가나안 땅이라고  함이 옳다. 다윗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곳에 처음 정착했을 때부터 결코 그들에게 아버지로서의 친절한 공급을 그치지 않고 그들의 음식을 준비하기에 적절한 때에 비를 보내셨다는 점이다. "흡족한 비"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거저 주시는 비'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윗이 값없는 은총의 역사로 임한 축복을 암시했으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모든 부족한 것들을 예비해 주시는 영구적인 선을 가지신 분임을 암시했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과 뜻을 같이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욕망을 채울만한 비'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방해없이 혹은 차분하게 내리는 비'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택할 만한 번역이 못된다. 혹자는 '풍성한' 혹은 '흡족한 비'라고도 번역하는데, 이미 언급한 대로 나는 이 의미가 가장 적절한 번역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철을 따라 소나기를 내려 땅에 물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증거한 것이다. 하늘의  이슬과  비를 가진 비옥한 유다의 집에 대한 명백한 귀절이다. 다윗은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와 동일한 실례를 암시한다. 이유는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곳에서 살도록 해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곳을 축복하신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교회와 백성이 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무감을 더욱 강하게 심어 주기 위해 그들을  자기들의 일용할 양식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수금된 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고급 밀가루를 주셨고 포도주와 꿀을 주셨으며 풍성한 기름을 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항상 무언가를 바라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그의 자비하심의  교통을  나누어 주신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대신에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풍성한 음식을  준비하셨나이다'로  번역한다.
나는 그보다는 다윗이 이 상황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기 위해 전혀 자신의 선한 뜻에 의해서 하셨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68:11,12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그의 능력을 현저하게 행사하심에 대해서 말한다. 다윗은 원수를 짓밟고 평화를 회복시킨 것과  나라의 경계를 넓게 한 일을 직접 악기로 연주했다. 그러나 자기가 연주한 모든 찬양을 전쟁의 전략과 상담자가 되셨던 하나님께로 돌린다. 다윗은 하나님을 승리의 노래를  부르도록 명하신 분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이 전쟁에서 승리의 결과를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비유하여 설명한다. 군대에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라는 말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소고(小鼓)를 잡고 하나님을 노래했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팔레스틴으로 돌아올때도 여인들이 수금으로 다윗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 귀절의 승리의 노래에 대해서 시인이 의도하려는 것은 내가 이미 언급한 대로 승리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진리를 백성에게 알리고자 함이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마땅한 감사를 드릴 의무가 그들에게 남아 있음을 넌지시 말한다.
   우리는 다음 귀절을 볼 때 원수들이 교회를 파괴하고자 가장 큰 힘을 준비한  것도 뒤집히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시인 자신의 인품을 말한  것으로, 또는 앞에서 말한 여자들의 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이 전에는  그들의 세력 앞에 설 수 없었던 가장 무서운 왕들이 도망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좋은 예증이 되었다. 자기들의 힘으로 세상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그 왕들이 자기들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멀리 도망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항하는 분으로서 분명히 앞서 계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라고 히브리어의 동사가 반복된 것은 원수들의 공격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번, 그리고 또다시 격퇴를 당한 것을 의미한다. 탈취품이 많았던 것은 집에 거한 여자들까지도 나누었다는 말로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많은 전리품을 갖고 돌아와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여자들도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68:13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너희가 비록 항아리 가운데 눕는다 해도 - 칼빈  사역) -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백성의 편에서 싸우시는 분이라고 말한 후에 그들이 어둠 가운데 누울 때일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분명히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이 사울의 통치 아래서 약화된 민족을 비참하고 고통 당하는 상태로 본  것은 약간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미 탈피한 비애를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한 해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본문은 이보다 더 많은 교훈을 준다. 이 귀절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그리고 신비스러운 능력에 의해서 고통 중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지 않는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를 받는다는  일반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본문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그들이  불결하고 어두운 곳에 누울 때에도 빛이 난다는 의미이거나,그들이 환난에서 벗어날 때  걸렸던 더러움을 쫓아 버린다는 의미 중의 어느 하나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간에  신자는  결코 고통에 지배당하지 않고 평안으로 구출을 받는다는  진리가 들어 있다. 비록  항아리에 누웠을지라도 자연미(自然美)를 지녔고 날개가 더럽혀지지 않은 비둘기를 통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는 항상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땔대로 봉해진 어두움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며 재난에  빠지지만 않으면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회복케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68;14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 이 말은 '열왕을 확대하다,'  혹은 '나누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렇게 번여가게 되념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승리하도록 인도하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앞에서 그들이 도망하였다고  한  말과 관련시켜 볼 때에는 '흩으시다'하는해석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그러나 하반절의  해석은 더욱 난해하다. 얻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살몬에 눈"이라고 번역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사를 2인칭으로 볼 수도 있는데, 이때는 '하나님이여! 주는 그것을 눈 덮인 살몬산과 같이 순결하고 희게 만드셨나이다'라고 번역된다. 이 두 번역의 뜻이 같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중 어느 하나를 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다윗이 앞에서 소개한 대로  은(銀)의  흰 모습을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 백성들이 실제로는 원수들이  혼란으로  인해서 더럽혀지고 훼손을 당한 처지에 있었지만, 다윗은 이제 그 백성이 항상 눈 덮인  산으로 잘 알려진 살몬 산의 모습과도 같이 순결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살몬은 지명이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를 의미하는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번역을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어원적(語原的)인 의미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몬이란 말은 그림자란 뜻을 가지고 있는 *      (첼렘)에서  왔기 떠문이다. 살몬산은 그 모습이 검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여기에서  보다 뚜렷한 비유로 나타나는 것은 흰 눈이 이 검은 산을 희게 한 것처럼 원수들의  압제를 당하는 동안에 백성들에게 내려졌던 어두움을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에 백성들이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며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68:15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 다윗은 여기서 자기의 궁전과 성전의 장소로  시온산을 택한 실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모든 자비하심의 근원과 원천을 말하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축복들이 백성들에게 나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다윗에게  이루어진 일들에 대한 신적(神的) 선언과 시온산을 가리켜 사용한 이 뛰어나고도 장엄함은 그가 왕이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며, 그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합법적인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처가 그 산에 있다는 사실과 다윗이 백성들을 다스리는 보좌에 앉았다는 사실과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산은 그 유사한 점에 있어서 바산산(山)과 비교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또는 바산산과 대립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전자의 해석을 취하는데, 바산은 비옥한 산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시온은 그것을 능가했다고 한다. 우리가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별로 중요한 문제는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바산이 그 자랑했던 크기에 있어서 후에 그 우위를 양보하게 된 것으로 생각함인데, 이는 마치 다윗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곧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작정으로
성별하셨던 산은 오직 하나뿐이요, 비록 바산이 그 높이와 비옥함에 있어서  유명했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시온산과 동등하게 높여질 수 없는 다른 산들과 같이 취급되어야 함이 마땅하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가 전자의 경우와 같이 이 귀절이 철저하게 시온산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본다면 시편 기자가 그 산을 칭찬한 것은 그 높음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점이요, 이 사실로부터 다른 여러 민족들과 유대백성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68:16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 이 귀절에는 애매모호한 점이 없다. 다윗은 온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산은 오직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뛰어난 최고의 산이라고 부른다. 그가 바로 앞절에서 바산을 반복해서 복수형으로 말한 것을 볼 때 이 귀절은 나로 하여금 앞절이 바산이나 또  다른 모든 높은 산들이 일반적으로 시온과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는 산들이 비유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내시기 시작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의 영광스러운 것으로 알려진 모든 것들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위대한 진리를 비유해주고 있다. 시인은 세상의 교만한 자랑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육적이고 경건치 못한 인격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에 수치를 느끼게 하고, 자기들의 쾌락과 부귀를 위해서는 시간을  바치면서도 영적인 축복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을 책망한다. 가장 사소한 일이지만 인간의
헛된 교만이 나타날 여유를 주면 또 다른 큰 교만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이 교훈은 보다 유익하고 필요한 교훈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만해질 한한 근거가 없는 자들이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많은  재산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오만함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주의 백성들은 스스로  자기 만족의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이 처소를 자기들 가운데 택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특권으로 만족을 누린다.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한 오직 이것을 자기들의 유일하고 충만한 행복으로 알고 자기들의 운명에 대해 추호도  불평하지  않는다.  

68:17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임재를 등한시하기 쉽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높이기에  적합한 표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불신앙적인 마음을 가질 때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위험이 하나님의 능력보다도 우리에게 더욱 크게 느껴진다.  우리가 극히 사소한 어려움에 처할 때도 떨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어버리거나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다윗은 하나님의 휘하에 셀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을 지적해 준다. 이  말씀은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악과 더불어 잘 싸울 수 있도록 해준다. '천천만만'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를 돕도록 명령을 받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가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어떤 고난과 역경 중에 처했을 때라도 위로를 갖도록  해준다.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라고 한 것은 시인이 계속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에
포함되어 있는 견해를 나타내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문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천사들이 그의 뜻에 복종한다고 함으로써 가장 잘 드러냈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개념을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 한 분이 모든 천사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수 있는 한 예가 되기도 하다. 시인은 이러한 생각을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펼쳐 보인 곳인 "시내산"을 우리에게 기억시키고 있다.  결론은 아직도 하나님은 '그 성소에 계신다'고 하는 포괄적인 내용이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같은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나타나셨던가?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후손 사이에 맺어진 연합의 거룩한 연결을 이루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모세는 말하기를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신 30:12-14)라고 했다. 따라서 다윗이 시내산을 말한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는 확고한 믿음으로 다져지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분명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 이 말들을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의 수하에서 고생하던 상태를 바꾸어 보좌에 오르도록  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증거로써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보는데는 약간 의문이 있다.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라는 말 속에는 이전에는 낮은 존재였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며 나라가 암담한 혼란 상태하에서는 이전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현저하게 역사하는 일이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처음부터 정죄를 받아야 할 방법으로  시작했던 사울의 통치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떨어질 운명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은총이 다윗에게는 회복되어졌는데, 이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은 그의 통치가 좋은 징조로서 시작되므로 그가 하나님의 선택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윗은 비록 자기가 전쟁에서 용기를 가지고 싸웠을지라도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원수를 사로잡고 선물을 바치게 하며, 보다 사납고  패역하는 자들을 복종시키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         (쏘레림 ;  패역자,  반항자
혹은 반역자)라는 말로써 다윗은 사로잡힌 자라고 한 자들이 다른 원수들과 구별된 정도의 사람들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틀림없다. 이 말은 항거하는 모험을  하지  않고 항복한 자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굴레를 씌었고, 남보다 더 교만하고 지배를 당하지 않던 자들을 복종케 만들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말이 나타내려는 결론은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을 보호하는 전능하신 보호자이심을 나타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은 이 귀절이 그리스도에게 더욱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엡 4:8),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와 목표에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다윗이 오랜 옛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린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의 시작을 미리 보여준 것임은 논쟁할 여지없는 분명한 진리이다. 이 사실은 다윗에게 결코 쇠함이 없는 기업이 약속되었다는 것과 그 확증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행하시어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구할 수 있도록 높이신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독생자에게  확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 두 유추가 옹호될 수 있는지 더욱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는 높임을 받으시기 전에 자기의 영광을 스스로 비우시고  단지 종의 형체를 입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 모습
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를 보라. 다윗이 예언하기를 그가 치욕 중에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쫓기고 아버지의 우편에 들리워지기 전에는 억눌려 무시당했다고 한 말(시 22:7)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바울은 깨우쳐 준다. 승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그 결과와 얽매인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그가 전에  원한이  깊었던 원수들을 쳐서 복종시키고 선물을 바치도록 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만과  오만을 버리게 하고 자신을 높이는 모든 교만한 사상을 낮추게 하며, 인간적인 의식과 행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복음의 효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귀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악의에 찬 오만으로 반역과 폭동을 일으키도록 충동받는 자들을 하나님은 은밀한 통치로 붙잡으시어 계획된 멸망에 처하지 않도록 하신다. 과연 이 비유는 완전하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신' 분이라고 말할 때 여기 언급
된 것과 전혀 불일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식한 독자들에게 알맞도록 헬라어 번역을 따르면서 단어들을 취사선택했다. 원수들의 탈취물로 부요케 하신 것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찾으시고 구하시는 것도 역시 자신이  영달을 위함이 아니라, 원수들에게 선물로 바치게 하여 그 탈취물로 그의 교회를 단장코자 함이었다. 머리와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연합에서 볼 때 하나님이 사로잡힌 자들에게서 선물로 받으신 그 육체 안에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말은 그가  그것들을 그의 교회에 분배하신다고 하는 말과 같다. 여기서 이 귀절이 말하려는  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그가 승리를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는 말이다. 비록 그는 떠나가셨지만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없어지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한 대로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엡 4:10)이었다. 그가 하늘로 올라가시므로 그의 신성한 영광이 더욱 영화롭게 나타나게  되었으며, 비록 육신으로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영은 그의 몸과 피로 인해서 영적인 영양을 공급받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장소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의 몸을 먹는다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68:19,20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보다 특별한 구원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보호하심으로 그 안정성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앉도록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는 "날마다......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하나님에게서부터 매우 풍성한 모든 축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짐을 옮기시는 주'라고 번역하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번역을 택하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윗이 나타내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비하심에 대한 끊임없는 증거를  나타내신다는것과 그 실례들을 새롭게 보여주시기에 지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이 귀절의 둘째 부분에 나오는 히브리어 접두사 *  (헤)라는 문자를 "주"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때때로 지시대명사의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은 마치
하나님을 그들의 신뢰를 마땅히 받으셔야 할 분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말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을  읽을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한 것이 바로 다음 절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라고 한 말 속에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사람들이 피하려는 경향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없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삶을 멸망으로 그르치는 악한 자와는 달리 계속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깨달을 수  있는 택함을 받은 자에게 특별한 것임을 적절히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20 절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복수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죽음이 항상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를 억누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보호책을 쉽게 마련하실 수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는 한번 우리에게 임했던 그와 똑같은 긍휼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이 하반절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를 말하기를 주님께 '죽음의 문제가 달려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문제'라고 번역하고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고 그를 멸하시는 데 어려움이 없으심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 해석이다. 보다 자연스러운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신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백성 전체를 일반적으로 죽음에서 면케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타락을 허락하신 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그들을  구하신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특별한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유의할 가치가 있는 진리로서, 하나님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심판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가 아무리 환난 가운데 빠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사역으로써 사람이 결코 보지 못하는 길을 열어 주시기 때문이다.    

68:21
   그 원수의 머리......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 교회에 대한 원수들은 사납고 무섭기 때문에 강력한 보호를 받지 않고서는 원수들의 공격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우리들로 하여금 그 보호를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윗은 하나님을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 무시무시한 능력으로 무장하신 분이라고 표현한다. 이 귀절은 다음 절과  내용이 연결된다. 우리는 히브리어 관사 *    (아크)를 '그런고로' 혹은 '그렇기 때문에'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단순한 긍정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부당하게 핍박하는 자들을 모든 자기의 원수들로 여기고  계시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임재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힘차게 나타내기를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괴롭히는 자들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치료될  수  없는 부상을 가하실 것을 말해 준다. 이 사실은 바로 다음 귀절에서 더욱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심판을 감행하시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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