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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권고 방법에 대한 교훈(디모데 전서 5:1,2)

위의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와 그를 통하여 또다른 복음 사역자에게도 책망하는 일에 대한 규칙을 말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직분상 꾸짖는 사람이다. 징계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사역자의 직무의 일분야를 이루고 있다. 복음 사역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책망하고 꾸짖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딤후 4:2). 우리가 경계할 때는 책망받을 사람의 나이와 성품과 기타 조건에 따라서 요령있게 해야만 한다. 나이 많은 분들에게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같이 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어떤 의심하는 자들은 긍휼히 여기라"(유 1:22)고 하였다. 그 규칙은 다음과 같다.

1. 늙은이, 즉 나이 많은 분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꾸짖을 때는 부드럽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나이와 직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한다. 즉 날카롭게 꾸짖거나 전제 군주와 같은 고압적 자체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 자신이 복음 전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아버지와 같이 대하여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이끌어 주고 설득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2. 젊은이들은 형제와 같이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잘못의 드러내어 싸움을 일으키려는 욕망으로가 아니라 그들을 가장 사람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책망해야 한다. 책망받을 사람을 책망하기는 하되 책망은 마음을 써서 부드러움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나이 많은 여인이 꾸짖음을 받아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는 어머니를 대하듯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호세야 2장 2절에 "너희 어미에게 간청하고 간청하라"고 하였다(역주: 한글 개역과 다소 틀림).

4. 젊은 여인을 꾸짖을 때는 "자매에게 대하듯 일절 깨끗함으로"대하여야 한다. 디모데가 이 세상과 육신과 정욕에 대해 그렇게 금욕적인 사람 이였는데도 이와 같은 주의가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훨씬 더 필요하다.

 

5:2 없음.

 

5:3

과부들에 관한 지시(디모데 전서 5:3-16)

본문에서는 교회에 속하여 있고 교회가 부양하고 있는 많은 수의 과부들에 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있다. 먼저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3절)고 하였다. 그들을 경대하라는 것은 그들을 도와주고, 직분을 주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 당시 교회에는 과부들이 종사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그 직책은 집사들의 지시에 의하여 병든 자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촐 교회가 형성되던 때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던 것을 직접 읽어볼 수 있는데(행 6:1) 그곳에 보면 헬라파 교인들이 자기의 피부들이 매일 구제받는 데서 제외되는 것을 보고 히브리 사람들을 원망했다고 하였다. 과부들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은 참과부를 경대하여 그들을 돌보아 주고 존경과 친절함으로 구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Ⅰ. 열락을 좋아하는 방종한 과부가 아니라 경건하고 헌신한 과부들만을 교회가 구제하도록 명하였다(5,6절). 홀로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자라야 참과부로 인정되며 교회의 부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홀로 된 의무요 또 위안인 것임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가끔 의지할 것이 없는 그러한 곤경을 당하도록 그의 백성들에게 시련을 내리신다. 그런데 이는 주님을 더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과부는 외로운 신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네 과부들은 나를 의지할 것이라"(렘 49:11)라고 하였고 의지할 하나님이 계시므로 그들을 기뻐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과부들은 "기도를 계속하여야 하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기도는"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그의 인도하심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안나는 참과부였는데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눅 2:37) "금식하며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봉사하였던 여자였다." 그러나 연락으로 살거나 방종하게 사는 여자는 참 과부가 아니다(6절). 쾌활을 탐하는 과부는 과부가 아니며 교회의 도움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러한 여자들은 교회의 살아있는 일원(一員)이 아니라 교회 안에 시체와 같고 또는 교회를 망신케 하는 일원(一員)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좀더 넓게 적용시켜 보자. 일락을 좋아하는 사람은 살아 있으나 허물과 죄로 죽어 있도록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목적이 없이 이 세상에는 사는 자들이요 인생의 참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로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Ⅱ. 바울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과부들의 생계를 교회가 돌보지 아니하도록 또다른 규칙을 세워 주었다. 이것은 여러 번 언급되었다(4절), "만약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즉 그들에게 자녀들이나 가까운 연관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그 과부들을 도와 주고 교회에 짐이 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16절). 교인들은 먼저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의 가족에게 신앙의 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돌보아 드림으로써 나타내는 효를 본문에서는 신앙의 행위로 취급하였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아무리 부모를 공경한다 할지라도 부모들이 자녀들을 돌보아 주고 갖은 고생을 한 것에 비해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부모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자녀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이다. 만약 부모를 돌보아야만 하며 자녀가 부모를 봉양할 능력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여 봉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하며 받으실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가련한 부모들을 봉양하는 것보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이 더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일이라고 가르쳤다(마 15:5). 그러나 "번제나 희생을 드리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더욱 하나님께 용납받을 말한 일이다"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다시 말하기를 "만약 누구든지 자기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라고 하였다(8절). 만약 어떤 남자나 여인이나 자기에게 속한 불쌍한 가족이나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모세의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였는데 특히 다섯 번째 계명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그는 중히 여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섯 번째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자와 더욱이 자기의 몸의 일부와도 같은 자기 아내나 자녀들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하는 자인 것이다. 만약 자기의 가족을 돌보는 수고를 게을리 한다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된다. 가나한 친척을 돌볼 수 있을 만큼 여유있는 사람이 그 친척을 돌보고 교회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하는 한 가지 이유는(16절) 교회가 구제받지 않을 사람은 구제하고 더 많은 참과부를 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정작 구제받을 사람을 방치하는 것은 구제의 본연의 목적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구제를 베풀어 부는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서 조심성 있게 해야 하는데 그것은 동정받기에 적합한 사람이 제외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받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Ⅲ. 바울은 교회의 구제를 받을 만한 과부들의 특징에 관하여 지시하였다. 즉 60세 이하여서도 아니 되며 남편과 이혼을 하였거나 이혼하였다가 다시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남편의 아내였으며, 가정의 주부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능력이 있을 때 남을 위하여 선행을 한 사람은 늙어서 힘이 없을 때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여기 주부들이 행하기에 적절한 선행의 몇 가지 실례가 열거되어 있다. 먼저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라고 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녀를 출산하며"라고 말하지 않았다(어린이는 여호와의 뜻에 의하여 출산되는 것이지 사람이 잘나서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출산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여인이 자신의 자녀를 낳지 못하였어도(남의 자녀라도) "자녀를 양육하며"이란 말씀이라고 하겠다. 또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음 씻기며"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10절)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여행 중에 있을 때 그들을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들의 친구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환영을 표하는 한 방법이 된다. 혹은 "환란당한 자를 구제하며"라고 하였다. 결국 본문의 요지는 피부가 능력이 있을 때 이러한 모든 선한 일을 행했으면 이제 그녀가 힘이 없을 때 그녀를 쉽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인 것이다. 궁핍할 때에 자비를 입은 자는 자기가 풍성할 때에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Ⅳ. 바울을 신빙할 만한 점이 없는 과부들을 참과부의 서열에 들여 놓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11절). 이에 대해 본문은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고 했다. 그들은 교회에서의 맡은 일에 싫증을 낼 것이며 그들이 행하여만 하는 규칙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집가고자 하여 그들의 처음 가졌던 믿음을 저버릴 것이다. 우리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계시록 2장 4절에서 읽어 볼 수 있고 처음 믿음을 저버렸다는 것은 여기 본문에서 읽어 볼 수 있다. 즉 처음 믿음이란 선행을 하기로 교회에 맹세하고 교회는 그것들을 신임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믿음이란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서약을 의미하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항목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만약 그들이 서약한 것을 깨트릴 염려가 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젊은 과부들은 결혼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휘트비 박사는 "만약 이 처음 믿음이 교회에 결혼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서약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처음 믿음이라고 불리울 수 없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 또 본문은 젊은 과부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나면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한다"(13절)고 지적하였다. 게으른 사람은 단지 게으른 것으로만 그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은 망령된 폄론을 배우게 되고 일을 만들며 이웃간에 불화를 만들고 형제간에 불화를 조성한다. 교회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위엄있게 처신하지 못하므로 집사직을 맡길 수 없는 사람이라면(또는 교회의 구제받을 과부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없다면) 본문은 그들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낳도록 하라"(14절)고 권하였다. 만약 주부가 가사를 돌보는 일에 전념하지 않고 망령된 폄론을 한다면 15절에 나타나는 대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비난하는 기회를 주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배워야 한다.

1. 초대 교회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돌보고 그들을 위하여 양식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는 최선을 다하여 초대 교회의 좋은 본을 받아야 한다.

2. 교회의 구제의 분배에 있어서는 가장 필요하고 가장 자격있는 사람들에게 공적(公的)으로 나누어 주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초대 교회는 자기를 돌볼 만한 친척이 있는 과부들과 선한 행실의 증거가 없는 자나 일락으로 사는 피부들을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11절).

3. 교회의 공신력과 신앙의 신빙성은 교회에서 직분을 맡는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러한 사례는 교회의 높은 직분을 받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집사직과 같이)낮은 성격의 직책을 맡거나 교회의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제직들이 행동을 조심해서 하지 않고 폄론이나 하며 일만 만들고 다니면 교회를 싫어하는 자들에게 비난의 꼬투리를 제공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성도들도 하여금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도록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난한 과부를 도와주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자녀나 조카나 손자 등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곤란한 이웃들을 부유한 이웃 사람들이 돌보지 아니하므로 교회가 그들을 돌보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부유한 이웃들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5:4 없음.

 

5:5 없음.

 

5:6 없음.

 

5:7 없음.

 

5: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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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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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장로들에 관한 지시(디모데 전서 5:17-25)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시되고 있다.

Ⅰ. 복음 사역자들을 돕는 일에 관한 지시. 잘 다스리는 자들은 돌보아야져야 한다(17절), 그러므로 "잘 다스리는 장소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즉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함으로 더 존경할 자로 알라는 말씀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사람을 치리하는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다 같은 한 사람에 의해 수행 되었다. 어떤 주석자는 사도 바울의 "잘 다스리는 장로"라는 말씀은 말씀을 가르치지는 않고 교회를 다스리는 일만을 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말씀과 성례를 집행하는 문제는 관여하지 않고 교회 처리만을 주로 맡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얼핏 본문을 보면 그런 견해가 타당성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보았겠느냐 하는 데는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세례를 베푸는 것보다도 복음 전하는 일을 우위에 두었고 따라서 그가 복음 전하는 일을 교회 처리하는 일보다 월등한 것으로 여겼으리라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교회 치리자들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언급하였으면서 복음 전도자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이상스러운 일인 것이다. 따라서 앞서 말했듯이 초대 교회에서는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스리고 가르치고 하였던 것이다. 다만 다름 사람들보다도 더욱 말씀과 가르침에 힘을 쓴 사람들을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1. 목회자의 할 일. 그것은 주로 두 가지로 구성된다. 즉 잘 다스리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그 두 가지 일이 장로들이 맡은 바 주된 직분이었다.

2. 게으르지 않고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에 수고한 자들이 의당 받을 존경. 그들은 배나 존경할 만한 자들인 것이다. 즉 그들은 존중되어야 하고 또 생계비를 지급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부양하도록 하는데 관한 명령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 구절은 복음 사역자를 부양하는 일이 모세의 율법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 준다. 즉 그 내용은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는 것이었다. 타작 마당에서 일하는 짐승에게는(유대인들은 짐승을 부려서 탈곡하는 일을 하였다) 그것들이 일하는 동안 곡식을 먹는 것을 금하지 않았는데 이는 곡식을 먹고 일을 더욱 잘하게 하기 위하여서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의 생계를 충분히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다시 이르기를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마 10:10). 이같이 복음 사역자가 그 수고의 대가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배울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율법 아래에서나 복음 아래에서나 자기의 사역자들이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황소를 돌보시는데 하물며 주의 종을 돌보시지 않을 것인가? 황소는 오직 썩을 양식만을 위하여 곡식을 떨지만 목회자는 영원히 지속하는 생명의 양식을 탈곡하는 것이다.

(2) 교회는 복음 사역자들이 생계 문제로 염려하지 않도록 적절한 배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살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례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보수를 받는 것처럼 목회자들도 당연히 보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복음 사역자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충분할 정도의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Ⅱ. 목회자들에 대한 송사에 관한 지시.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다"(19절). 본문은 장로들이 무슨 죄가 있어 송사를 할 필요가 있을 때의 성서적인 절차 방법을 말해 주고 있다. 다음을 명심하자.

1. 먼저 소송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불확실하게 떠다니는 소문이 아니고 확실한 증인이 있는 소송이어야만 한다. 더욱이 부당한 재판 방법에 의해 그를 재판해서도 안 된다. 현대적인 소송절차에 의하면 죄의 유무에 따라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바울의 권고에 따르면 장로에 대해서는 반드시 먼저 "고소"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였다.

2. 이 소송은 두세 사람의 확실한 증인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송사는 증인들이 직접 참석해서 증거해야 접수가 된다. 즉 피고와 원고가 맞대면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위신이 관계되는 문제는 특별히 조심히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나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비난하는 일을 하기 전에 정확히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만 하며 추측으로 비난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범죄한 사람은 모든 사람 앞에 꾸짖으라"(20절)고 했다. 즉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그들의 체면을 염려 할 필요없이 공중 앞에서 그들을 꾸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 앞에 죄를 지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는 것은 상처난 자리를 다 반창고로 바르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책망은 범죄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고 하였다. 다음 사항을 명심하자.

(1) 공공연한 추문을 일으킨 죄인들은 공중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가 공중에 대한 것이며, 또 많은 사람 앞에서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또는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 꾸짖음 공적(公的)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한다.

(2) 공적(公的)인 책망은 책망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외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인 것이다. 즉 그들도 두려워하게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범죄한 사람은 공적으로 처벌하라고 명령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모든 이스라엘의 이를 보고 두려워하고 더 이상 악을 행치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Ⅲ. 복음 사역자 임명에 관한 지시(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본문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성직을 수여하는 일에 대한 권고의 말씀으로 보여진다. 즉 성직 수임은 그 당해자의 받은 은사나 은혜를 시험해 보지 않고 또 그들이 능력이나 자격을 시험해 보지 않고 경솔하고 분별없이 행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보인다. 또 어떤 해석자는 이 구절을 죄에 대한 사면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누구에게든지 조급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말을 책망받는 사람의 회개와 성실함이 증명될 때까지는 교회의 징계를 사면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본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란 말을 "교회가 내린 책망을 쉽게 용서하여 준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죄를 대담하게 행하도록 선동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들로 죄를 감행하게 하는 것이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즉 본문은 다음과 같은 뜻인 것이다. "순결을 보존하라. 당신 자신이 그 같은 죄를 짖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남의 죄를 어떤 길로도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같이 볼 때 본문에 대해서는 위의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다음 사실을 고찰하자.

1. 경솔히 성직자들을 세우거나 또는 교회의 견책을 받은 사람에 대한 성급한 용서를 조심하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본문에는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2. 무슨 일이고 경솔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3. 만일 우리가 흠없기를 바란다면 스스로 흠없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정결케 하고 보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 또한 우리 자신의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Ⅳ. 사면에 관한 지시(24,25절). 본문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난다." 목회자들은 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범죄자와 범죄의 경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대단한 지혜를 필요로 한다. 어떤 사람의 죄는 너무도 평범하고 명백하면서 은밀히 찾지 않아도 찾아 낼 수 있다. 그들은 교회가 책망하는데 아무런 논쟁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죄는 재판 전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난다." 즉 그들의 악은 당장에 드러나지 않고, 그 일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한 연후에야 드러난다는 말이다. 또는 본문은 어떤 사람이 주장하는 대로 "어떤 사람들의 죄는 견책을 받은 후에도 계속된다. 그들은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아니한다. 그런 사람은 결코 사면될 수 없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다. 회개한 증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즉 "착한 행실도 속히 드러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아니한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쉽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들의 회개하지 않은 죄는 결국 알려지는 것이므로 누구를 용서하고 누구를 용서하지 말 것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

1. 죄에는 은닉된 죄와 드러난 죄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의 죄는 미리 밝히 들어나므로 금방 심판에 붙여지고 어떤 사람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나는 것이다.

2. 교회에서 죄인들을 다룰 때에는 특별히 구분하여 다루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역주: 여기서는 교회법을 특별히 어긴 특수 죄인을 뜻하고 있다).

3. 교회의 견책을 받을 결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일로 인하여 겸손하여지며 회개하게 되고 따라서 개준의 빛이 밝히 들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4. 중죄는 숨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겨진 일들을 밝히 들어내시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의 생각을 밝혀 들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Ⅴ. 디모데 자신의 문제에 관한 지시.

1.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21절)고 하였다. 목회자가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세속적인 이해 관계 때문에 이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명심하자. 바울은 충심으로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편벽된 일을 경계하라"고 명하였다. 목회자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수행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 또 그 일들을 어떻게 행하였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들이 세속적인 수단에 의해 사역을 편벽되이 한다면 그들에게 화가 주어진 것이다.

2. 바울은 디모데에게 건강을 유의하라고 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23절). 디모데는 세상 쾌락에 대해 금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물을 마시고 술 같은 것은 마시지 않았다. 또한 그는 건강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가 위장의 건강을 도웁고 신체의 허약함을 회복하기 위하여 포도주를 쓸 것을 권하였다. 여기 "조금씩 쓰라"고 한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복음 사역자들은 많은 술을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셔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포도주를 기억하자.

(1) 인간들이 자기의 몸을 주의 깊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체를 자기의 주인처럼 섬겨도 안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봉사하는데 가장 유의하도록 몸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2) 포도주는 병들고 허약한 사람에게 좋은 치료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위장 장애가 있거나 허약한 체질에 좋다. 그래서 잠언서에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 31:6)라고 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정도에서 들어야 하며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건강에 해롭도록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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