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디모데 전서 1:1-4)
Ⅰ. 이 서신의 서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우리 구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사도로 세움을 입은" 바울이었다. 바울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위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았으며 우리 구주 하나님에게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의 사역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의 소망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인 것을 명심하자. 우리의 소망은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안에 거하신 영광의 소망이시다(골 1:27).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의 회심을 도운 사람이었고 디모데는 바울을 위해 봉사하고 복음을 위해 일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빌 2:22). 디모데는 바울에 대한 아들의 의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부족이 없었고 바울은 아버지로서 디모데를 돌보는 친절과 다정함에 부족이 없었다.
Ⅱ. 축복의 말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절). 어떤 사람은 교회에 보내는 모든 서신들에서 사도의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고 디모데에게 보낸 두 서신과 디도서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고 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마치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는 좀더 은혜를 필요로 한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자비를 필요로 한다. 만약 그렇게도 뛰어난 목회자인 디모데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였고 또 그것을 더욱 많이 계속 받았어야 했다면 그의 탁월한 정신에 너무나도 못미치는 우리 현대 목회자들에게는 얼마나 필요하겠는가?
Ⅲ.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일에 그를 임명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고 한 것은…"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가려고 하였다. 그리고는 바울의 보호 아래서 떠나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여러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필요했다. 내가 너를 권하여라고 바울은 표현하였다. 비록 바울이 자기의 권위로 할 수 있다고 하여도 사랑 때문에 디모데에게 권고하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디모데의 할 일은 목회자들과 교회의 성도들 양자 모두를 확고하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도록 하며" 즉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기독교 교훈에 다른 어떤 교훈을 더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며 복음을 발전시킨다는 구실이나 그 결점을 보완한다는 구실로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들이 복음을 변경시키지 말 것과 그들에게 주어진 그대로 구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음을 명심하라.
1. 전도자들은 복음의 참된 교훈을 전하여야 할 뿐 아니라 다른 교훈을 전하지 아니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고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2. 사도 시대에는 기독교를 방해하려는 공격을 많이 받았다(고후 2:17). 그렇지 아니한다면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러한 명령은 쓸 데 없는 염려가 되기 때문이다.
3. 디모데는 다른 교훈을 전하지 아니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복음 위에 다른 사람의 다른 교훈을 첨가하지 못하게 하며, 그 다른 복음에서 아무것도 취하지 못하게 하며, 다만 그들이 복음을 순수하게 방해받지 아니하고 전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가르치지 않고 어리석은 변론을 삼가야 했다. 이 말씀은 디도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디모데 전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딤전 4:1; 6:4; 딤후 2:23 을 보라).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 교훈에 유대 교훈을 도입한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 가운데서 기독교 교훈에 이교도의 교훈을 도입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라. 아니면 그러한 교훈들은 너희의 믿음을 방해하고 헛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도자들에게 이로움을 주기보다 변론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바울은 말하였다. 그것들은 의심에 가득 찬 혼란을 주기 때문에 교회를 건설하는데 유익하기 보다는 오히려 파괴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꼭같은 이유로 나머지 다른 일에 있어서도 목회자들의 의심은 거룩한 덕성을 감소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계승되어 온 감독자들의 배열과 목회자들의 성례의 타당성이나 유효성에 대한 견해는 유대인들의 신화나 끝없는 족보를 따지는 것만큼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어려움으로 되어 단지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기초를 흔들리게 할 뿐이며 그의 마음에 복잡한 의심과 두려움을 가득차게 해줄 뿐이다. 거룩한 덕성은 목회자들이 그들의 모든 분야에서 목적하여야만 할 최종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을 연습하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점점 닮아가는 것이다. 경건의 연습은 믿음 안에서 있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복음은 우리가 그 위에 서야만 할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먼저 나아오는 것은 오로지 믿음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히 11:6). 또한 꼭 같은 믿음의 원리대로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경건의 연습을 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은 논쟁을 피하여만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의 실제적인 점들은 논쟁을 일으킴 없이 잘 가르칠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대하고 필수적인 진리에 관한 논쟁은 기독교의 주요한 교훈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의 생동감을 잠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종교의 생동감은 믿음 안에서처럼 실천하며 순종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불의 가운데서 진리를 잡을 수는 없다. 오직 순수한 양심 안에서 믿음의 비밀을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의 역할(디모데 전서 1:5-11)
여기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떻게 유대인 선생들을 경계하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복음에다 섞는 자들을 어떻게 경계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바울의 율법의 용도와 복음의 영광을 가르쳐 주고 있다.
Ⅰ. 바울은 율법의 목적과 용도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사랑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되기 때문이다.
1. "율법의 목적은 사랑를 이루는 것이다"(롬 13:8). 하나님의 율법이 뜻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여 인간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계명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며 또 우리를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어 주라(마 5:44)는 것을 요구하는 복음이 계명(계명의 목적 역시 사랑인데)을 무시한다거나 계명을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인 것이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모든 좋은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고전 13:1). 또 이르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고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그 지식을 복음의 전도를 방해하는 구실로 사용하는 자들은(이들은 율법에 대해 열심을 낸다는 미명 아래 교회를 분리시키며 혼란시킨다)계명의 참 목적 곧 사랑을 파괴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첫째, "청결한 마음" 즉 믿음에 의해 정결하게 되어 더러운 정욕의 때가 묻지 않은 양심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거룩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죄에 대한 사랑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둘째, "선한 양심"에서 즉 죄가 없는 양심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따라서 선한 양심을 보존하는 사람들은 계명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참된 믿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셋째, 이 사랑은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이같이 본문에는 놀라운 은사인 사랑의 필수적인 부수물로 세 가지가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된다. a. 그것은 청결한 마음이다. 사랑은 청결한 마음이 있어야 거기서 사랑이 우러나올 수 있는 것이다. b. 다음은 선한 양심이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매일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 나갈 수 있다(행 24:16). c. 사랑에 수반되는 또 한 가지는 거짓없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랑은 위장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랑에 의해 역사하는 믿음도 위장이 없이 순수하며 성실한 데서 솟아 나와야 한다. 그런데 율법의 선생이라고 자칭하는 몇몇 사람은 계명의 참 목적에서 빗나가고 있다. 그들은 율법의 수호자인 체하지만 그들의 변론은 무익한 말다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선생이라고 자칭하였지만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체할 뿐인데 불과하였다. 오늘날도 교회가 그런 선생들에 의하여 썩어져 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도 이상히 여길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때부터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1) 사람들 특히 전도자들이 계명의 목적인 위대한 사랑의 법으로부터 빗나갈 때 그들은 무익한 말다툼만 일삼케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목적지와 위치를 잃어 버리게 되면 가면 갈수록 정로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닌 것이다.
(2) 말다툼 특히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의 말다툼은 무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선한 모든 일에 있어서 부적당하며 불필요한 것이다. 말다툼은 대단히 악한 것이며 해로운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믿는 많은 사람들이 무익한 말다툼만 일삼는 것을 볼 수 있다.
(3) 무익한 다툼을 일삼는 사람은 남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기를 좋아하며 선생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르치는 직책을 원한다(즉 열망한다).
(4)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이므로써 사역자의 직책을 침해하는 경우가 허다히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확언하는 것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무지를 가지고 자기들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려고 한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2. 율법의 바른 사용법. 본문에 보면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8절)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한 동력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기 위한 구실로 사용하였다. 그들이 율법에 내세운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불법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율법을 제켜 놓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옳게 사용함으로 죄를 억제해야 하는 것이다. 율법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계명의 악용될 때는 바른 사용법을 깨우치고 악용하는 관습을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직도 생활의 규범으로써 대단히 유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언약의 사업 아래 있으나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의무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데 대단히 유익한 것이다. 율법의 의인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즉 율법은 준수할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었다면 율법에 의하여 의롭게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갈 3:21). 그러나 율법은 악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을 억제하고 금하고 악과 더러움을 그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율법의 공포는 그들의 손을 묶어 놓고 그들의 혀를 금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의로운 사람은 사악한 자들에게나 필요한 이러한 제제를 원치 아니한다. 따라서 율법은 원칙적으로, 기본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오로지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저지른 갖가지 죄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9,10절). 죄인들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 바울이 특별히 언급할 것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즉 제 5계명과 6계명을 어기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자들과 살인자들, 제 8계명을 어기고 도둑질하며, 제 9계명을 어기고 거짓말하여 거짓 맹세한 자들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그러한 죄명을 든 후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10절) 어떤 주석자는 위의 말씀을 정권자들에게 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정권자들에게 위의 지정된 죄인들을 처형하는 법을 제정하고 또 그 법을 집행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말씀이라고 본다.
Ⅱ. 바울은 복음의 영광과 은혜를 보여 준다. 본문에는 바울의 특징들이 나타나 있고 표현되어 있다. 자주 이런 구절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좇음이니라"(11절)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배울 수 있다.
1. 그가 하나님을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족하심과 완전하심을 통하여 누리시는 복을 말하는 것이다.2. 복음을 영광스러운 복음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많은 영광이 창조와 섭리에서 나타나지만 더 많은 영광이 복음 안에 나타나며, 그 복음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친 때문이었다. 바울은 이 영광스러운 복음이 자기에게 위탁되었음을 큰 영광이요 큰 은혜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 성격상 이 세상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은 확실히 실현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이 하실 일이다. 그러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하는 것은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다음의 것을 명심하시오.
(1) 목회는 위임(trust)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복음이 바울에게 위탁되었던 것이다. 복음 사역은 능력의 직분인 동시에 위임되는 직분이다. 그리고 전자의 의미보다는 후자의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목회자들이 청지기라고 불리우는 것이다(고전 4:1).
(2) 목회는 영광스러운 위임이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위임된 복음은 영광스러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위임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사역자들의 사역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신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놀라운 직분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우리가 이 위대한 위임에 신실하기 위해서는 많은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울의 감사(디모데 전서 1:12-17)
여기서 사도 바울은
Ⅰ. 자기들 전도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감사를 드리신다.
1. 인간들을 도전자로 삼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행 26:16, 17).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말씀으로 유대인들 가운데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셨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이 달려갔고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이 예언하였다"(렘 23:21).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을 목회자로 만들 수는 없다. 더욱이 자기 자신을 목회자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의 왕과 머리가 되시며 선지자와 선생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주어진 권한이기 때문이다.2. 주께서는 자신의 목회자로 삼의시는 아들에게 또한 그 일을 합당하게 감당할 능력도 주신다. 주님은 택하시고 또 그 택함을 입은 사람에게 자격도 부여하신다. 비록 다른 은사와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사역에 적합한 자격이 없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역량도 없는 목회자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목회자가 아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전도자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신 뿐만 아니라 충성심을 주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주께서 신실하게 만드신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신실하게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목회자들은 신실한 종들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같이 크고 참된 위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4.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크나큰 은총이다. 그러므로 그것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나를 목회자로 만들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리나이다"라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Ⅱ. 목회자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찬양하기 위하여 바울은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 회심이기 이전에 바울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을 대적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그는 교회를 잔멸하였다(행 8:3). 그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였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자였고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유해한 자였던 것이다. 위대하고 훌륭한 봉사를 하고자 계획된 사람들이 회심하기 전에는 대단히 사악하였었던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비로 그들을 용서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 들어나고 그들의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들어내고자 해서인 것이다. 아무리 큰 죄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용되는데 방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을 명심하자.(1) 훼방이나 핍박이나 포행이 대단히 흉악한 죄이며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은 바로 하나님에서 큰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박해하는 것은 측면을 통하여 하나님을 해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포행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 사람을 대적하였고 또 모든 사람이 대적하였던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일들을 하나님의 특권을 침입하고 동료 피조물들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
(2) 선한 목적을 위하여 봉사하고자 참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예전 상태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위대한 사도 바울까지도 자기의 이전 생활에 대하여 자주 고백하였던 것을 명심하자(행 22:4; 26:10, 11).
2.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푼 크나큰 은총, 이에 대하여 바울은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커다란 은총이며 축복이었다. 그렇게 악명높은 반역자가 그의 임금으로부터 긍휼을 입게 된 것이다.
(1) 만약 바울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을 고의로 박해하였다면 아직도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지와 불신으로 인하여 이같이 하였기 까닭에 바울은 긍휼을 얻었던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자.
[1] 우리가 알지 못하여서 행한 것은 알고 행하는 것보다는 가벼운 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무지의 죄도 죄는 죄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를 저질렀다면 채찍을 맞더라도 적게 맞게 될 것이다(눅 12:48). 어떤 경우에 있어서 무지는 비록 죄를 없이 할 수는 없으나 죄를 가볍게는 할 수 있을 것이다.
[2] 죄인들이 알지 못하여서 저지르는 죄의 밑바닥에는 불신이 도사리고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두려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여야 할 것을 못하는 것이다.
[3] 바울이 긍휼로 얻은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도리어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13절)고 말한다.
[4] 훼방자들과 핍박자들과 포행자들에게도 긍휼이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나는 훼방자였음에도 도리어 긍휼을 입었다"고 말한다.
(2)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설명하였다(14절). 크나큰 죄인의 회심과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풍성한 자비를 힘입음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영광된 복음 가운데 나타난다(15절). 그러므로 그는 "미쁘다. 이 말(복음)이여"하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체 복음이 요약되어 표현된 말씀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들의 본성을 입으시고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가하셨다(요 1:14). 또한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은 회개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마 9:13).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서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눅 19:10). 따라서 바울의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라는 말은 이것을 인정하는 말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한 좋은 소식인 것이다. 또한 좋은 소식일 뿐 아니라 진실한 소식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틀림 없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실한 말씀이므로 믿는 자의 가숨에 품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은 앞의 단원에서 취급하였다. 거기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 안에서 풍부하게 됨이 말씀되고 있다. 이 구절의 끝에 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일급의 죄인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그러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전에 주의 제자들을 향하여 위협과 살기가 동등하였었기 때문이었다(행 9:1, 2). 박해자들은 죄인중의 가장 악한 죄인들이다. 바울도 그런 사람이었다. 본문의 말씀은 "내가 용서받은 죄인 중에 괴수니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위대한 겸손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모든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였고(엡 3:8) 여기서는 자신을 죄인들 중에 괴수라고 말하였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가 오시리라고 한 예언은 이제 성취된 것이다.
[2] 주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주께서는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3] 훼방자들과 박해자들은 죄인들 중에 괴수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그렇게 취급하였던 것이다.
[4] 죄인들 중의 괴수도 성도들 중 가장 큰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그러한 사람이였다. 왜냐하면 바울은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아니한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괴수를 구원하려 오셨기 때문이다.
[5] 이것은 위대한 진리이며 신실한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의지할 만한 진실하고 신실한 말씀이다.
[6] 그것은 우리의 위로와 용기가 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받아드리고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3) 바울은 그가 회심하기 이전에 대단히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1] 그는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고 하였다. 바울이 그렇게 대단한 박해자였음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참으셨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는 본보기인 것이다. 즉 바울에 대한 참으심은 가장 큰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표본이었던 것이다. 다음을 기억하자. 첫째, 사도 바울은 기독교로 돌아 온 가장 첫 번째의 큰 죄인 중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바울이 회개하고 긍휼이 여김을 얻게 된 것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죄인들도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이다. 넷째, 긍휼을 얻은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히 11:6). 다섯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가 영원히 사심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영혼의 구원을 믿어야 한다.(히 10:39).
[2]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은 긍휼에 대하여 언급한 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는 선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뜻을 표하지 않고는 이 편지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기록하기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7절)이라고 하였다. 다음을 명심하자.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 주신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하여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돌려야 한다. 본문은 그 하나님에 대하여 "만세의 왕,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이라는 표현으로 찬송을 돌리고 있다. 둘째,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분의 위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친절하심은 그의 위대하심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 증가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당신과 교통하도록 하시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주를 "만세의 왕"이라고 칭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운 돌보심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찬송하는 찬송을 우리 속에 충만케 한다. 하나님은 시작한 날이 없으시며, 끝이 없으시며, 변하시지 않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고대로부터 계셨다(단 7:9). 그는 썩지 않으시며 불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주님은 죽지 않으시기 때문에 오직 그 분만이 불멸의 존재이신 것이다(딤전 6:16). 거하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에는 보이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아무도 주를 볼 수도 없으며 본 적도 없다(딤전 4:16). 또한 그는 "유일하신 지혜의 하나님이다"(유 1:25). 오직 그만이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모든 지혜의 근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말한다. 즉 "나로 하여금 천천의 무리가 한 것처럼 영원히 주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하옵소서"(계 5:12, 13)라는 말이다.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경계의 말씀(디모데 전서 1:18-20)
바울은 위의 구절에서 디모데에게 확고하게 그의 일을 한 것을 경고하였다(18절). 여기서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즉 복음은 목회자들에게 위임된 명령이다. 복음은 전도자들의 신실함에 위임된 것이다. 즉 그들에게 복음의 의미와 뜻을 따라 또한 복음을 주신 이의 뜻을 따라 복음이 적당히 사용되도록 살필 책임이 위임된 것이다. 이전에 디모데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었던 것 같다. 즉 그가 복음 사역에 종사하게 될 것과 또 그 일을 위해 그가 크게 기여하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의 사역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사역은 하나의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죄와 사탄에게 대항하는 선한 싸움인 것이다. 또한 사역자들은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실 주 예수의 군기 아래서 주를 위하여 그의 대적자들과 결전하는 특별한 일을 위하여 고용된 사람들이다.2. 목회자들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며 온갖 반대와 좌절케 하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용기있게 그들의 직책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3. 이전에 디모데에게 주어졌던 예언이 디모데로 하여금 자기 의무를 활기있고 양심적으로 수행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다시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타인들의 우리에 대한 격려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무에 열중하게 하여 준다. 그러므로 본문에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하였다.
4. 우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 이 두가지를 다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문 19절에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였다. 선한 양심을 버린 사람의 믿음은 곧 파선당해 버린다. 우리는 새로워진 양심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하며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켜야 하며(행 24:16) 양심이 악덕과 죄로 더렵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흠없이 보조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양심을 지켜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비밀은 순수한 양심 가운데서 보존되기 때문이다(3:9). 믿음이 파선된 자들에 대하여 바울은 두 사람을 보존되기 때문이다. "후매네오와 알렉산더"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이었으나 그 고백을 저버린 자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고 또 그들이 사단의 왕국에 속하였음을 선언하였다. 또한 바울은 어떤 주석자의 말과 같이 특별한 권능으로 그들을 사탄에 의해 괴롭힘을 받도록 내어 주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훼방하지 않게 하려고 즉 그리스도의 교 과 주의 선한 길을 욕하고 부정하지 않게 하게 위해서였다. 초대 교회에서 출교한 주된 목적은 그 이상의 죄를 막고 죄인들을 교정하기 위한 높은 뜻에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러한 징계는 육신을 파괴하여서 영혼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5:5). 다음 사실을 명심하자.
(1) 사탄의 일이나 사탄에게 봉사하기를 즐기는 자는 사탄의 권세에 내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저들을 사단에게 내어 주었다"고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처벌을 통하여 그 반대의 효과를 거두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 보면 후매내오와 알렉산더는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훼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의 상식대로 이 말씀을 판단한다면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면 훼방하는 것을 더 배울 것으로 생각되는데 하나님의 섭리는 그렇지 않으신 것이다.
(3)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사람은 어떤 일에도 꾸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훼방하는 일까지도 그들은 꾸준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우리가 훼방하지 않으려면 선한 양심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번 이것들을 놓치면 다시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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