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6:1

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무(에베소서 6:1-9)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여러 가지 의무에 대한 다른 지시들을 대하게 된다. 바울은 인간 상호관계를 매우 상세히 기술하였다.

Ⅰ.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의무. 구약에 이르기를 "너희 자녀들아 내게 와서 귀를 기울이라.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 두려운 말씀이 정한 바를 가르치리라"고 하였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자녀들에게 교훈한다. 자녀들이 지켜야 할 가장 큰 의무는 자기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를 굳게 하여 준 분이며, 하나님과 자연의 법칙이 부모에게 하나님 안에서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만약 자녀들이 자기의 경건한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부모들과 같이 경건하게 되는 올바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외적인 표현과 행동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존경을 포함한 행동을 말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 하였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생략된 문장으로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님께 대한 너의 의무와 일치하는 한 순종하라." 우리는 지상의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이유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불순종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 우리의 의무는 모든 다른 것보다 우선적이며 우월한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를 위하여 또 주를 바라고 부모에게 순종하라." 또는 본문의 말씀은 원칙적인 의무를 보다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특히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관하여 권고할 때 그리하라. 부모는 너희에게 선한 습관을 가르친다. 이에 대하여 너희는 부모에게 순종하여야만 한다. 부모는 너희에게 무엇이 건강에 좋은가를 가르친다. 이에 대하여 너희는 부모에게 순종해야만 한다. 그러나 너희가 순종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주께 관계되는 일에 대한 저희의 명령이다." 믿음이 깊은 부모는 자기의 자녀들이 주의 법도를 지킬 것을 명령한다. 창세기 18장 19절을 보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법을 알도록 명하여, 젊은 시절에 저지르기 쉬운 죄에 대하여 경계한다. 이 모든 말씀 가운데 그들은 자기들이 복종해야 하는 이유를 볼 수 있게 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의 보편적인 이유를 들고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옳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는 보편적 정당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 대한 자녀들이 순종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해 주는데 비록 그것이 하나의 어려운 말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의무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과 그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이 행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는 자들이 행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십계명의 제 오계명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지하거나 취소하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완전케 하려고 오시었다. 이 사실을 주님은 마태복음 15장 4절에서 친히 밝히셨다. 또한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2절)고 하였다. 그 공경은 존경, 순종, 위로, 부양의 뜻을 지닌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고 바울은 덧붙인다. 여기서 약간의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내에서의 신상의 조각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천주교)은 우리가 둘째번 계명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증거로 본문을 제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근거성이 희박하다. 둘째번 계명은 특별한 약속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칙의 선언으로써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시는 전체의 율법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또한 본문에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고 해서 이것이 언약을 가지고 있는 본래의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중요한 계명이다. 그것은 언약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두 번? 단원(인간에 관한 말씀)의 첫번째 계명이다. 그것은 언약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언약은 이는 데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이다"(3절). 십계명의 언약은 가나안 땅을 가르치는 말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구약에서 보게 되는 가나안 땅에 대한 여러가지 언약을 좀 더 일반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는 제 5계명에 의하여 하나님께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 오로지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이 말씀을 해석한다. 즉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네가 잘 되리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외적인 풍요함과 장수는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이다. 우리가 잘되는 길은 우리가 바로 이 법을 지키는 것이다. 또 사실 순종하는 자녀는 흔히 외적인 풍요함을 보상으로 자녀들이 일생을 살 동안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순종은 이와 같은 보상을 받고 또 외적인 풍요의 보상이 없을 때에는 좀 더 좋은 것으로 받게 되는 법이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

1. 복음은 영적인 약속뿐 아니라 세상적인 약속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2.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우리가 의무를 행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게다가 상까지 우리에게 약속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비록 그 약속 가운데 세상적인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여도 그것마저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고 또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Ⅱ. 부모들이 지켜야 할 의무, 이 내용은 "또 아비들아." 다른 말로 "부모들아"라는 말로 시작된다(4절)

1.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즉 "비록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자녀에 대한 권세를 주셨으나 너희는 그 권위를 남용해서는 안된다. 특수한 방법을 통하여 자녀들이 자신의 분신임을 기억하고 넓은 사랑과 애정으로 다스려야 한다. 자녀들에게 회를 내지 말 것이며 까닭없이 혹독히 대하지 말고 가혹한 벌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그들을 훈계할 때나 그들을 가르치고 꾸중할 때는 그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한에서 그리하도록 하라. 이 모든 경우에 너희는 그들을 신중하고 이해심을 가지고 대할 것이며 그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는 말씀이다.

2.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다. 즉 부모들은 적절하며 성심성의를 다한 지도로써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의무를 깨닫게 하고 또 이 지도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어야 한다. "자녀들을 훌륭히 양육하도록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자녀들은 기르는 데 성의를 다한다는 것은 부모들의 가장 큰 의무이다. "짐승이 하는 것처럼 이 자녀에게 먹을 것이나 주어 기르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모는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써 이성적인 본성에 맞는 방법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또한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써 하나의 인간으로 키울 뿐 아니라, 주님의 명령대로 하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키워야 한다. 자녀들에게 신앙적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그들을 교훈해야 하며 하나님께로 향한 모든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자녀들을 깨우쳐 주고 격려해야 한다.

Ⅲ. 종들은 의무. 종이 지켜야 할 의무는 "순종"이라는 한 마디의 말로 요약되어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말씀이 대단히 필요하기나 한 듯이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다. 본문의 종들은 일반적으로 노예를 가르키고 있다. 사회에서는 예속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에게는 노예가 되었다 할지라도 주님의 자유인이 될 수는 있는 것이다. 본문에 "육체의 성전에게"라고 말씀한 것은 "그들이 네 육신을 명할 수 있으나, 네 영혼과 양심에 명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과 양심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데 뜻이 있었다. 바울은 종들에게 다음의 것을 권고하였다.

1.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하라고 하였다. 종들은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존경해야 한다. 그들을 노하게 할까 두려워해야 하고 주인의 분과 노를 입을까 조심해야 한다.

2. 종들은 신실함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실한 마음으로" 그리하라고 하였다. 즉 속으로 불순종하면서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지 말고 신실함으로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이다.

3. 그들은 주인에게 행하는 봉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께 하듯 하며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5-7절). 즉 인간에게 하듯이 또는 의무적으로 겨우 하지 말라는 뜻이다. 종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의무를 수행할 때에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겠고, 그렇게 하면 그들의 복종이 자랑스럽게 여겨질 것이고 또 기꺼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하는 마음으로 지상의 주인에게 봉사할 때 주인은 그를 흡족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고 계시며 그가 자기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며, 주님의 권위가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의무를 신실하고 양심적으로 수행하도록 명령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실이다.

4. 종들은 주인을 "눈가름으로"(6절) 섬기지 말아야 한다. 즉 주인이 그들을 보고 있을 때만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종들은 마땅히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주인이 부재중일지라도 양심적으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쁘게 하는 것과 그에게 인정받는 것은 나중에도 없는 듯 다만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자"처럼 행동을 하여서는 안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품을 때 인간들은 어떤 삶의 정황 가운데서도 신실하고 성실하게 될 것임을 기억하자.

5. 그들이 일할 때는 기쁘게 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말씀하였다.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바라듯이 주인을 섬기며, 마지 못하여 하거나, 불평으로 하지 말며 다만 주인과 주인의 관심사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섬기라는 말이다. 또한 "선한 뜻을 갖고 섬기라"고 하였다(7절). 이러한 태도는 주인을 기쁘게 함으로 스스로도 일에 쉽게 임할 수 있게 해 주며, 주 그리스도께 용납받게도 되는 것이다. 종들은 그들의 주인에게 "선한 뜻을" 갖고 대해야 될 것이며 또한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는 선한 뜻을 품고 임해야 하는 것이다. 섬김은 비록 그 대상이 불의로운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또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주어진 섬김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도록 되어야 함을 기억하자.

6. 신실한 종들은 자기의 의무를 두려움으로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에 보상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즉 그 선이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아무리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 알기 때문이다"(8절). 다시 말해서 비록 세상에서의 주인이 그에게 보상을 하는 대신 그를 무시하거나 조롱하더라도 그는 반드시 주 그리스도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가 종이거나 자유하는 자나, 불쌍한 노예이거나, 자유민이거나, 주인이거나 간에 앞에서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의 인간의 신분의 차이를 중시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결코 그것을 구별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혹자는 "왕이나 위정자나, 목회자는 이 세상에서 그가 행한 임무에 따라서 하늘 나라에서도 틀림없이 보상을 받을 것이나 나같은 보잘 것 없는 종이 하나님의 은총을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천만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명감에서 또 하나님을 바라보고 수행할 가장 적은 일에 대하여도 틀림없이 보상을 하신다. 종들도 자기의 의무에 대하여 용기를 갖도록 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 이에서 더 무엇이 있겠는가?

Ⅳ. 주인의 의무. 이에 대하여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같이 하고"(9절)라고 말씀했다. 즉 "너희도 저희와 꼭 같은 방법으로 행동하라. 너희가 종들에게서 기대하는 바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꼭같이 행하라. 종들에 관하여 그들과 같은 선한 뜻을 보이고, 이 일로써 하나님이 너희 자신을 인정하시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종들이 주인에게 순종하고 의무를 수행하여야 하는 것과 같이 주인도 종에 대하여 자기의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엄격한 명령을 받았음을 명심하자. 또한 "공갈을 그치라"고 하였다. 즉 "위협을 avuie,ntez-즉 절제하고 너희가 꾸짖어야만 할 저들의 잘못을 용서하라. 네 종들도 너와 같은 형상으로 빚어진 사람임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전제적이나 폭력적으로 대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는 줄을 아는 까닭이다"는 뜻이다. 어떤 사본에는 "너희와 저희의 상전"이라고 되어 있음을 참고하라(역주: 한글 개역이 그러함). 이 사본의 뜻에 의할 때 다음과 같은 뜻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너희도 너희에게 복종할 의무를 주신 주인을 모시고 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의 종들도 그리스도 앞에서 볼 때는 다 같은 그의 종들인 것이다. 너희가 의무에 태만할 때, 또 그 의무와는 상반된 행동을 할 때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보잘 것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총을 얻고자 기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을 얻고자 기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베풀라. 만일 너희가 아무리 종들에게 심하게 대한다고 할지라도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갚으실 극심한 갚으심의 상대가 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고 하셨다. 즉 비록 그가 부자요 돈이 많고 존귀한 주인이라 할지라도 만약 그가 불의하고, 부당하며, 학대하는 자라면, 그의 부와, 풍요함과 명예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인이나 종이나 그들이 서로에게 행한 바대로 공정하게 판단하시며, 주인들의 세상에서 열등하고 약한 때문에 혹독하게 대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주인이나 종이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와 그에게 사실대로 고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은 서로에 대한 자기의 의무를 좀 더 성실히 수행하려고 할 것이다. 사도는 이와같이 인간의 상호적으로 지켜야 할 여러가지 의무에 대하여 권고함으로 결론을 맺었다.

 

6:2 없음.

 

6:3 없음.

 

6:4 없음.

 

6:5 없음.

 

6:6 없음.

 

6:7 없음.

 

6:8 없음.

 

6:9 없음.

 

6:10

영적 싸움(에베소서 6:10-18)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갈 길을 꾸준히 걸을 것과 그리스도인의 싸움에서 용기를 가질 것을 권고한 말씀이다. 인생이란 하나의 전투가 아닌가? 확실히 그렇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 생활의 일상적인 재난과 더불어 늘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더욱 큰 싸움이 아닌가? 정말로 싸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둠의 권세에 대항하고, 우리를 하나님과 하늘나라로부터 떼어 놓고자 하는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대적해 싸워야 할 원수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으로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전투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다. 본문에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10절)라고 하였다. 이 말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너희 사명과 의무를 위하여 스스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의미 말씀이다. 병사에게는 강한 마음과 훌륭한 무기로 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가 되려면 다음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Ⅰ. 그들은 자기들이 굳센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 살펴 보아야 한다. 이 내용이 본문에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의 힘으로 강건하여지고"(10절)라는 말씀 속에 표현 되어 있다.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싸워야 할 많은 싸움을 가지고 있고 가는 곳마다 검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에 부딪칠 사람들은 대단히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강건하여져야 한다." 섬김에 있어서도 강해야 하며, 고통에 대하여서도 강해야 하고, 싸움에서도 강해야 한다. 만약 병사가 아무리 외적으로는 잘 무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 굳센 마음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의 좋은 무장이 그를 지키는데 하등의 도움도 못될 것이다. 영적인 능력과 용기는 우리의 영적인 싸움에서 대단히 필요한 것임을 기억하자. 또한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라 했다. 즉 그를 위하여 강건해지라는 말이요, 또는 주의 능력으로 강하여지라는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의 본래적인 용기란 완전한 겁쟁이의 용기와 같은 정도일 뿐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은 철저한 약함과 방불한 것이다. 다만 우리의 모든 풍성함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임무와 싸움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그의 능력의 전능하심에 의지함으로 용기를 얻어 유혹에 항거할 수 있는 것이다.

Ⅱ. 그들은 잘 무장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11절)고 하였다. 즉 "사탄의 유혹과 책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모든 무기와 온갖 적절한 방어책을 사용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 즉 전신갑주를 얻고 또 자꾸 입어 봄으로 전신을 무장하여 적에게 노출되고 벗어진 부분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참된 은혜를 지닌 것을 스스로 입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든 은혜 즉 전신갑주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갑주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은혜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수여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의 때를 당하여 견뎌낼 수 있는 갑주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님의 갑주 이외에는 우리를 지켜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갑주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입어야 한다. 즉 우리는 은혜를 간구해야만 하며 또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사용하여야 하며 때가 오면 그 은혜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무장하여야 하는 까닭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인 것이다." 즉 ·····무력 또는 거짓을 통한 모든 공격과, 우리에게 씌우는 협잡과. 우리를 위해 파놓은 모든 함정과 우리를 대적하려는 모든 음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기고 쳐부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다음 같이 확대하여 설명한다.

1. 우리가 대적할 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우리가 위험한지도 알 수 있으며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필요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원수는 누구인가. 그것은 어둠의 모든 권세와 사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12월)고 본문에 말씀되어 있다. 우리가 위하여 예비해야 하는 싸움은 평범한 인간들도 이루어진 적이 아니다. 즉 "혈과 육"으로 이루어진 인간 또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에 대적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다스리는 권한을 쥐고 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탄에 대항하는 것이다.

(1) 우리는 교묘한 적 곧 간계와 책략을 사용하는 원수와 겨루어야 한다(11절). 사탄은 불안정한 영혼을 속이는 수천가지의 방법을 알고 있다. 이 간교함 때문에 사탄은 뱀이라고 불리우며, 또 유혹하는 기술을 습득하였으므로 옛 뱀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2) 사탄은 강한 원수이다. 그들은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은 수없이 많고 활동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어두움 가운데 있는 이방의 나라를 가운데서 다스린다.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들을 사탄의 왕국이 자리잡은 곳이다. 실로 그들은 아직도 죄와 무지의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왕권을 찬탈하여 지배하는 자들이다. 사탄의 나라는 어두움의 왕국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나라는 빛의 왕국이다.

(3) 그들은 영적인 원수들이다. 이를 가리켜 본문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하였다. 사악한 영들을 말한다. 악마는 하나의 영이다. 그러나 사악한 영이다. 우리의 위험은 우리의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또한 우리가 그들을 알아 챌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또 마귀들은 사악한 영들이다. 그들은 영적인 악함과 교만과 질투와 편견으로 주로 성도들을 괴롭히며, 성도들에게 대적한다. 이러한 원수들은 "하늘에" 또는 높은 곳에 있다고 하였다. 또는 땅과 별 사이에 있는 공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다.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장소가 바로 공중인 것이다. 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라고 하겠다. 즉 "우리가 하늘나라의 처소 그리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놓고 마귀와 씨름한다"는 말로 볼수 있겠다. 어떤 고대 교부는 그렇게 해석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게 하며,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하며, 하늘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에 속한 것들을 중점으로 공격하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마멸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믿음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쳐부셔야 할 영적인 원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위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2. 우리의 의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원수에 대적하여 견고히 서있는 것이다.

(1) 우리는 "대적하여야 한다"(13절). 우리는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 굽히지 말고 대적해야 한다.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여 섰다"고 말씀되었다(대상 21:1). 만약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여 섰다면 우리도 그를 대적해서 서야만 한다. 우리는 사탄에 대적하기 위하여 방책을 세우고 주의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사탄은 사악한 자이며 그의 나라는 죄의 왕국이다. 사탄에 대적하는 것은 곧 죄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는 "악한 날" 곧 유혹의 날과 심한 고통의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인 것이다."

(2) 우리는 굳게 서야 한다. 본문에 "이는 모든 일을 행한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사탄을 대적하라. 그러면 그는 도망가리라. 그러나 우리가 등을 돌리면 그는 버티어 설 것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입장과 우리의 지도자와 갑옷을 불신한다면 사탄에게 이점을 안겨 주는 결과가 된다. 우리의 현재의 사명은 악마의 공격에 대적하고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사에게 맡겨진 이 모든 일을 수행하면 우리의 싸움을 잘 이루어질 것이요, 마침내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무장을 하고 서야 한다. 이 사실이 본문에는 특별히 상세히 취급되었다. 여기에 완전무장한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의 무장은 하나님이 주신 무장이다. 고로 " 하나님의 전신 갑주" 또는 "빛의 갑옷"(롬 13:12), "의의 병기"라고 했다(고후 6:7). 사도는 이 무장에 대하여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것은 전쟁용 각반과 흉배, 신발(또는 군화), 방패, 투구와 검이다. 여기에 있는 것들 가운데 등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주의하도록 하자. 따라서 만약 우리가 돌아선다면 우리는 적에게 자신을 노출시키게 될 것이다.

[1] 진리와 신실성이 우리의 허리띠이다(14절). 구약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되기를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하였다(사 11:5). 그리스도가 띠신 허리띠는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띠어야 할 띠이다. 하나님은 내면의 진리 즉 성실성을 요구하신다. 진리가 우리의 허리의 힘이 된다. 허리띠는 다른 갑옷의 위에 띠는 것으로 제일 먼저 언급하였다. 신실함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는 허리띠를 복음의 진리에 대한 교훈으로 이해한다. 복음의 교훈은 허리에 매는 띠처럼 우리 가까이 붙어 있어야 한다(렘 13:11). 이것은 허리띠가 우리의 몸에서 하는 역할과 같이 방자함과 방탕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준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인으로의 병사의 허리띠이다. 이것으로 띠를 띠지 않을 때, 그는 축복받지 못한다.

[2] 의가 우리 가슴의 흉배가 되어야 한다. 흉배는 우리의 제일 중요한 급소를 보호하고 방패는 가슴을 지켜 준다.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흉배가 된다. 또한 우리에게 뿌리를 내린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공격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을 보호하는 흉배가 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에 이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입으라"고 하였다. 믿음과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은혜를 포함시킨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사랑으로 형제와 연합하는 까닭이다.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부지런히 살피게 하며, 모든 의와 진리와 사랑의 사명을 행함으로 인간에 대한 의로운 행동을 부지런히 행하게 한다.

[3] 결심은 우리의 발의 신발과 같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의 신고"(15절)라고 말씀하였다. 구두 또는 동제(銅製) 신발은 군인이 갖출 장비 중에 중요한 부분이다(삼상 17:6).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적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길에 몰래 뿌려 놓곤 해서 걸리게 하는 덫이나 날카로운 송곳으로부터 발이 보호된다.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란 말씀은 복음에 집착하고 복음을 준수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마음의 자세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가운데서 만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을 감에 있어서 착실히 나아가도록 하게 해 줄 것이다. 그것은 "평안의 복음"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종류의 평안 곧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 타인들과 더불어 평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또한 본문은 복음을 받아 드리려는 준비 단계로써 즉 회개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신을 신어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 생활의 삶으로써만 우리는 죄의 유혹과 우리의 대적의 계획에 대적하여 무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휘트비(Whitby) 박사는 이 말씀의 뜻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너희가 싸움을 예비하고자 하면 평화의 복음으로 신을 신고 복음이 요청하는 평화롭고 조용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라. 쉽게 노하지 말며 논쟁하고자 하지말라.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음과 상냥함을 나타내라. 이것은 마치 동제(銅製) 신은 병사가 덫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과 같이 너희를 많은 유혹과 박해로부터 보호하여 줄 것이다."

[4] 믿음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16절)고 하였다. 믿음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다. 믿음은 유혹의 때를 당했을 때 모든 것 가운데서 전부가 된다. 흉배는 심장만을 보호한다. 그러나 방패로는 사방을 다 방어할 수 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진노에 대한 진리의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야 말로 유혹을 물리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을 생각하자. 이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의 유익을 받아들이며 그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은 어디나 방어할 수 있는 방패와 같다. 우리의 원수 마귀는 본문에서 "악한자"라고 불리운다. 마귀는 그 자신이 악하므로 우리로 하여금 악하게 만들고자 애쓴다. 그의 유혹을 "화전"이라고 불렀는데 그 까닭은 날쌔고 예측할 수 없는 신속함과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 깊은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화전"이라 함은 독묻은 화살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상처를 입으면 그 부분에 불이 붙는 것처럼 독이 퍼지는 것과 마찬가지 뜻이다. 영혼을 지옥의 불에 잡아 넣는 격렬한 유혹은 사탄이 우리에게 쏘는 화전이다. 믿음은 이러한 화전을 막는 방패이다. 이 방패로 화전을 받아내면 그것들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그 화전이 우리를 맞히지 못할 것이며, 우리를 상케하지도 못할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행하고, 그 말씀대로 살며 그 은혜를 활용할 때 유혹의 화전은 맥을 못추고 말 것이다.

[5] 구원이 우리의 투구가 되어야 한다(17절). 즉 이 말은 "소망"의 대상이 구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8절을 보라. 투구는 머리를 보호한다. 기초가 잘 닦여지고 잘 설립된 구원에 대한 좋은 희망은 우리의 영혼을 성결케 하며, 사탄에 의해 그것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영혼을 지켜 줄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도록 지켜 준다.

[6]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 검은 병사에게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또 그 싸움에서 승리를 이룩하는데 대단히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것은 "성령의 검"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이 검은 성려의 만드신 것으로 양쪽에 날이 날카로운 검보다 더 힘이 있고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골리앗의 검이 당대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것이었듯이 성령의 검도 그러하다. 이 검을 가지고 우리는 대적자들을 공격해야 한다. 성서를 잘 아는 것은 유혹을 격퇴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기록된 바"로 시작된 말씀 인용으로 사탄의 유혹의 물리치셨다. 마태복음 4장 4,6,7,10절을 보라. 이 검은 마음 속에 숨어 있으면서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시 119:11)주고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 정욕과 더러움을 정화하고 근절하여 준다.

[7] 기도는 우리의 기독교적인 무장 가운데서 혁대장식 구실을 한다(18절). 이 모든 은혜들을 기도로 한데 묶어야 한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협조를 간구함으로 이들 영적인 원수들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때와 장소를 따라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다른 의무들이 있고 각자의 정황에 따라 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여러가지 형편에 따라 기도해야 하며 우리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필요에 따라 자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마음을 두어야 하며 다른 여러가지 의무를 행하며 동시에 절규하는 간구를 행해야 할 것이다. 비록 정해지고 엄격한 기도가 때때로 수행하기에 곤란한 경우가 있을지라도(다른 의무들을 그 시간에 수행해야 되기 때문에) 경건한 절규는 결코 무용하지는 않다. 우리는 "모든 기도와 간구로" 즉 온갖 일을 당할 때마다 기도해야만 한다. 공적 기도, 개인적인 기도, 은밀한 기도, 통성 기도, 단독 기도, 규칙적인 기도, 돌발적인 기도, 참회 기도, 자비에 대한 간구 기도, 은총에 대한 감사 기도등 온갖 종류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기도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이 의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깨어서 있어야" 한다. 즉 기도하는 일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며 또 우리의 기도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모든 사건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의 의무를 행하기 위하여 우리 마음의 모든 동작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얼굴을 찾으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시 27:8). 우리는 간구하되 "항상"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특별한 기도의 기회도 마련해야 한다. 특별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기도할 시간이 있을 때, 또 우리의 입장이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의 실망이나 패배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간구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를 위하여" 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각 지체가 되는 까닭이다. 이 세상에서 성도란 흔치 아니하고 또 만족할 만한 생활을 누리는 사람도 흔치 않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기도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는 이제 에베소서의 결론 부분을 도입한다.

 

6:11 없음.

 

6:12 없음.

 

6:13 없음.

 

6:14 없음.

 

6:15 없음.

 

6:16 없음.

 

6:17 없음.

 

6:18 없음.

 

6:19

결론(에베소서 6:19-24)

Ⅰ.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한 에베소인들의 기도를 구하였다.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한 후" 자기도 기도가 필요한 자임을 말하였다. 우리는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그는 본문에서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널리 전해지고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한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기억해 두자. 그는 또한 내게 "내게 말씀을 주시도록"기도해 주기를 바랐다. 즉 "내가 속박에서 풀려나와 자유로이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오. 그리고 내게 합당하고도 적절한 태도로 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도록 구하기요. 또한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시오, 즉 내가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나 편견이 없이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요"라고 부탁한다. 본문의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해 달라"는 말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 말씀이 이제까지는 비밀로 숨겨졌던 내용 즉 이방인을 부르시는 데 관한 복음의 한 부분만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전체의 복음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기까지는 신비였다. 그리고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의 사명인 것이다. 바울은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받았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바울을 머큐리신(역주: 희랍 신화에 나오는 전언의 역을 맡은 신)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바울이 주로 말하는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이었다(행 14:12).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그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을 주실 것을 구하도록 청하고 있다. 바울은 담대한 사람이었고, 자주 자기를 그렇게 묘사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에베소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담대함을 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바울은 사람에 따라서 무엇을 말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에베소인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하되 "자기가 할 말을 하게 해 달라고"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가 이렇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근거는 그가 복음을 위하여 "사슬에 매인 사도가 되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계속 그리스도에 의하여 위임된 사도였고 또 복음을 전할 것을 고집하였다.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구속을 당하는 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갇혀 있으면서도 담대히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3. 가장 유능하고 탁월한 사역자로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며 그 기도로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를 열심히 구하여야 할 것이다.

Ⅱ. 그들이 기도해 줄 것을 간구한 후 바울은 두기고를 에베소인들에게 추천하였다(21,22절). 바울은 이 서신과 함께 두기고를 보내었으며, 그것은 그가 다른 교회에도 알리었던 사실들 즉 그가 어떻게 행하고, 무엇을 행하였는가에 대해 두기고를 통해 그들에게 알리고자 해서 였다. 다시 말해서 그가 옥에서 어떻게 로마인들에게 알리고자 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가 옥에서 어떻게 로마인들에게 대우를 받고 있으며 그의 현재의 상황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를 알리고자 함이었다. 선한 사역자들이 성도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친구들의 상태에 대하여 알리고자 하는 것을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두기고를 보낸 이유는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한다. 즉 자기의 고난을 알림으로써 또 그 고난의 원인과 고난을 받는 그의 심정과 고난 아래서의 그의 행동을 알림으로써 그들이 그의 시련당함 때문에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또 그들에게 기쁨과 감사를 넘치게 하려고 두기고를 보낸다.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이라"고 말하였다. 두기고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며, 그러므로 주 안에 서 한 형제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하는 신실한 사역자였고 바울에게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친구를 더욱 그가 함께 있어 바울에게 동무가 되어 주고 대화의 대상으로 기쁨을 줄 수 있을 때 에베소인들을 위하여 두기고를 보냈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을 실증해 주는 사실이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은 자기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더 소망하는 것이다.

Ⅲ. 바울은 에베소인들을 위한 기도와 소망으로 끝을 맺고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형제를 위하여 축원하였다(23,24절). 그의 관례적인 축복은 "은혜와 평강이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였다. 평안이란 말에는 온갖 종류의 평안이 다 포함된 말이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 양심의 평화, 대인관계에서의 평화 등의 여러가지 평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모든 외적인 번영이 이 말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마치 그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불 수 있다. "나는 여러분들의 모든 행복이 지속되고 증가하기를 소망한다." 또 "믿음을 겸한 사랑"은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음 구절에서 나오는 은혜라는 용어에 의하여 그가 무엇을 뜻하려 한 것인지 부분적으로 설명이 된다. 즉 은혜, 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샘솟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로부터 흘러 나오는 성령의 은혜,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을 포함한 믿음과 사랑이 냇물처럼 흘러가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다른 말로 에베소인들에게 이미 시작이 된 그 모든 은혜가 더욱 더 증가되고 계속되글 소망할 것이다. 연이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라고 하였다. 모든 은혜와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성도에게로 임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와 공적에 의한 것이다. 마지막 축복의 대상은 앞의 축복의 대상보다 더욱 넓혀감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참 믿음을 가진 자들과 다른 모든 곳에 있는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신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이다. 진실로 사랑에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한 아무리 인간이 사랑을 가장한다 하여도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변함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성도들은 어떤 미끼나 유혹에 의하여 사랑에서 떠나게 되지 않기 위하여 계속 꾸준히 사랑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와 상반되는 욕망에 의하여 또는 그가 기뻐하지 않는 일을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부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은혜는 곧 하나님의 은총이며, 모든 좋은 것(영적이고 세상적인)은 은혜의 산물로 이 두가지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가 모든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바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아멘. 그대로 이루어지이다.

 

6:20 없음.

 

6:21 없음.

 

6:22 없음.

 

6:23 없음.

 

6:24 없음.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