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있는 신앙(에베소서 4:1)
위의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일반성을 띤 교훈이다. 바울은 그때 로마에서 죄수로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주를 위하여" 또는 주 안에서 갇힌 자가 되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한 주를 위한 자라는 뜻을 의미 한다. 이에 대하여서는 3장 1절을 참조하라. 바울은 자기가 갇힌바 된 것을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는 그가 자기의 갇힌 바 된 것을 부끄러워 아니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가 행악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갇힌 것을 반복하여 말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그들에게 쓴 내용을 부드럽게 또 설득력 있는 입장에서 추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복음의 교훈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도 복음을 가치있게 여기고 진지한 경의 표하고 충성스럽게 지킬 것을 확신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된 한 가련한 죄수의 간구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1절)라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또 어떤 자리로 너희를 부르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열심히 구하노니(내게 가련한 조수들이 흔히 그들의 친구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은 무슨 위문품으로 보낸다거나 또 나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말고) 선한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하고 너희 신앙과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살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에게 가져다 준 복된 삶에 부끄럽지 않게 거기에 일치하고 적절하게 행하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이교도의 자리에서 기독교도로 부리신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의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복음과 그것을 위하여 자기들이 불리움을 받은 영광에 합당하도록 살아야 함을 명심하자. 이 둘이 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와 영광을 마음에 두고 그 나라와 영광의 상속자답게 행해야만 한다.
일치에 대한 교훈(에베소서 4:2-16)
위의 말씀에서 바울은 좀더 각별한 권고를 하였다. 바울은 4장 안에서 두가지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 하나는 일치와 사랑이요 또 다른 하나는 순결과 거룩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지하게 탐구해야 할 과제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성도들에게 신실한 동료가 되지 못하거나 또는 모든 죄에 대하여 시원한 원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하고 있는"것이 된다. 위의 단원은 상호간의 사랑과 단합과 일치에 대한 권유가 포함되어 있고 또 이러한 요소들을 증진시키는 적절한 수단과 동기들이 취급되고 있다. 성경 안에서 위의 사실만큼 우리에게 열심히 강조된 말씀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그리스도 왕국의 율법이며 그리스도 학교의 과목이며 그리스도 가족들의 제복이다. 다음을 생각해 보자.
Ⅰ. 일치의 방법. 그것은 "모든 겸손과 온유하고 오래 참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2절). 낮아짐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 즉 자기를 즐겨 낮추어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교만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온유함을 통하여 우리는 그것이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지 않고 타인들의 결점을 쉽게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인간 영혼의 가장 뛰어난 성품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온유함은 진노한 원한과 격분에 반대되는 성향이다. "오래 참음"은 복수를 하려함이 없이 해 받음을 인내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하여 타인의 약점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란 서로 용납하며 서로 상대방을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풍성한 은혜는 고무하나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자를 말한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많은 요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죄를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치게 나쁘게 여기지 말고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는 것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행위가 없이는 일치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일치를 위한 첫 걸음은 겸손이다. 겸손함이 없이는 온유함이나 오래 참음이나 용서가 있을 수 없으며 이 모든 것이 없이는 일치란 있을 수 없다. 교만과 격정은 화평을 깨뜨리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한다. 겸손과 온유함을 화평을 회복시키며 그것을 유지하여 준다. "교만과 논쟁을 일으키고" 겸손은 사랑을 가져 온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더욱 더 일치감이 형성된다. 만약 우리가 온유함과 겸손한 마음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 의하여 부름을 받고 그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그분은 뛰어나게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또 그가 우리에게 자기를 배우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Ⅱ. 바울이 표현한 일치의 특성. 그것은 "성령이 주신 일치"이다(3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되는 자리는 마음과 영혼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됨이란 생각의 일치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예배의 형식과 모양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합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과 사랑의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일치는 성령에 의해 와지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일치됨을 보존하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문 "힘써 지킴"이란 단어는 복음적 용어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와 다투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거나 미워하지 아니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본문의 "평안의 매는 줄"이 있다. 이 말은 평화가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고 서로서로 친교를 갖고 살도록 매는 줄이란 뜻의 말이다. 평화로운 성격과 행동은 그리스도인을 하나가 되게 한다. 반면에 불일치와 논쟁은 그들의 마음과 사랑의 결속을 해치고 분열을 초래한다. 약한 줄이 많이 모이어 꼬여지면 강하게 된다. 평화의 결속은 사회의 힘이 된다. 모든 선한 사람들과 그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꼭 같은 길이와 꼭 같은 정서와 꼭 같은 판단을 하게 되는 사회가 와진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결속이란 그들 모두의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하나가 되게 한다는 말이다. 여러 나뭇가지를 한 데 묶은 것처럼 거기에는 길이가 다르고 강도가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로 묶이고자 노력 할 때 그들은 그 주의 가장 굵고 강한 것보다 더욱 덩 강한 힘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Ⅲ.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증진시켜 주는 여러 가지 동기들. 바울은 우리를 설득하기 위하여 몇 가지를 역설하였다.
1.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는 기쁨과 영광이 되고 있는 많은 일치된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4절). 하나의 몸에 두 개의 마음이 있다면 이는 괴물일 것이다. 몸이 하나이라면 그몸에 속한 모든 것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보편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한 한 몸이며 훌륭한 그리스도인라면 누구나 한 헌장 아래 규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 헌장은 복음의 헌장으로 그의 선물과 은혜에 의하여 이 몸을 소생시키고 생기있게 하고 하나의 계약은 복음의 다스리는 성령에 의하여 활력있게 역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다면, 우리는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활력을 공급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리라"(4절)고 하였다. 소망은 본문에서 소망해야 할 대상, 소망해야 할 것, 곧 하늘 나라의 유업을 지시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리는 불리움 받은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동일한 소망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이 모두가 소망을 두는 한 분, 그리스도가 있고 그들 모두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하나의 하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든 성도들은 직접적으로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또한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복음의 의미하는 말이다. 또는 이 말은 이로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은 믿음(그리스도를 믿음)이란 동일한 은혜를 말하는 말씀이다. 또한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 바로 그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례란 이로 인하여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와 관계 짓는 같은 성례적인 계약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다"(6절)고 하였다. 이 한 분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진실된 회원들을 그의 자녀도 삼으시는 바로 그분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에 의하여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신 것처럼 이제는 특별한 관계에 의하여 보든 교인 아버지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만유 위에 계시다"고 했는데 그는 그의 본질상 만유 위에 계시며 그의 품격이 영광스럽게 흠없이 완전하다는 점에 있어서 만유 위에 계신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특히 주의 교회를 섭리로 다스림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물을 통일하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섭리에 의하여 만유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심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의 성령과 특별한 은총에 의하여 성전에 거하시는 것처럼 모든 믿는 자들 가운데 계심을 뜻하는 말이다. 이 같이 많은 "하나됨"들이 있는데 한 가지 곧 "마음의 하나됨" 또는 "영혼의 하나님"만이 없다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2.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여하신 은사의 다양성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본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을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라고 하였다.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회원들이 그렇게 많은 점에 일치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몇 가지의 다양성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다양성이 그들 가운데서 차별 의식을 가져 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모든 다양한 은혜는 같은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고 동일한 풍성한 주재자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 즉 은혜의 선물이 주어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더 큰 은사가 다른 사람에게는 좀 덜한 은사가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은 다양한 은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그 은사에 따라 어떤 사람은 바울을 위하였고 다른 한편은 아볼로를 위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문제에 관하여 다툴 필요가 없음을 보여 준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덕성을 위하여 함께 각각의 임무에 쓰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게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기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은사를 주셨다. 모든 사역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의 일원들을 그들이 소유한 은사와 은혜에 대하여 그의 덕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의 은사들을 내려 주신 모든 사람들은(비록 이 은사들이 규격이 다르고 명칭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더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는 이 경우를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신 몇 가지 은사에 특별히 적용시킨다. 먼저 사도는 이 은사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음을 다윗의 말을 통하여 밝힌다.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그가 은사를 주실 것을 예언했었다(시 68:18). 그는 이렇게 인용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기를" 즉 시편 기자가 말하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인용한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말씀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 속에서 본문에서 이 말씀에 대하여 이후에 나오는 세 절의 말씀 속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먼저 "그가 올라가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승천하신 곳, 즉 가장 높은 하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또한 이 말을 통하여 사도는 그가 올리움을 받은 상태, 즉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시고 특별히 영광을 입으신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마음을 쏟아 보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는 하늘 나라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완전한 증거가 된다. 위대한 정복자가 개선 행진을 할 때에는 자기 포로 중에 뛰어난 자들을 사슬에 매달고 군사들과 관중들에게 상금과 전리품을 뿌려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정복자로 하늘에 오르셨을 때 "사로잡힌 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구약에서 이 말씀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던 바로 그 강한 적들이 정복되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여졌다(삿 5:12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 사로잡음은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영적인 적들을 사로잡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우리를 정복하였던 자들을 정복하셨다. 즉 죄와 사탄과 죽음 같은 것들을 정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다. 그러나 그 승리는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완성되었다. 즉 그가 만유의 주가 되시고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그의 손 안에 쥐셨을 때 그의 승리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가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역주: 한글 개역과 틀림, 한글 개역은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다로 되어 있음).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받으신 것은 인간들에게 은혜와 은사의 막대한 분량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은사로써 그의 제자들을 풍성하게 하셨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먼저 언급한 후 먼저 "그가 내리셨음"을 말한다(9절). 바울의 이 말을 한 의도는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의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하여 말했 때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겸손하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바울은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승천하셨다는 것은 그가 먼저 아래로 내려 왔음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즉 그의 승천은 지상에서의 그의 겸비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보고 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음을 말한다. 이 말씀은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제가 주의 앞에서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시 139:15)라고 한 다윗의 시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성육신을 뜻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는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시 63:9)라는 말씀에 따라 그의 장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그의 선조물이 말하였드시) "땅의 깊은 곳에 들어가심"이라고 불렀다. 그는 육신을 입으심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다. 또한 그는 장례되어 땅 아래로 내려 가셨다. "요나가 고기의 뱃 속에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낸 것처럼 인자도 땅 속에서 사흘을 거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다음에 사도는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10절)고 말씀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보이는 하늘인) 별과 공기가 있는 하늘 훨씬 위 즉 제일 높은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적합한 은사와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주께서는 먼저 자기를 겸손히 낮추심으로 높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는 먼저 내려오셨고 그 다음에 올라 가셨다. 바울은 다음에 승천할 때에 그리스도가 주신 은사가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한다.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써 "그 중의 얼마를 사도로" 세우셨음을 말한(11절).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이미 그들 중 몇 명을 사도로 보내셨었다(마 10:1-5). 그러나 그후 다시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행 1:26). 그들 모두에게 주님께서 특별한 방법과 분량의 성령을 볼 수 있게 부어 주심으로 그들은 더욱 확고히 무장되게 되었고 부끄러움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때에 교회에 부으신 은사는 화평과 화해의 사역의 은사였음을 기억하자. 사역은 은사는 그리스도 승천의 결실이다.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았는데 이 은사는 주 예수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주신 두 종류의 사명이 있다. 그 하나는 "특별한" 것으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들"과 같이 교회에서 상위를 점하는 직분을 가리킨다. 그 중에 사도가 으뜸이다. 이들 사도들을 그리스도는 직접 부르셨고 특별한 은사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그리스도의 진리를 빠짐없이 전하는 사명으로 무장시키셨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과 복음의 소명을 이미 받았으므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도록 그는 그들을 보내셨다. 또 선지자라 함은 여기서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복음 전하는 자는 안수받은 자들로(딤후 1:6) 바울이 전도 여행에 데리고 다닌 사람들이며(갈 2:1), 사도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보내졌으며(행 19:22) 한 군데에서 정착하여 있지 아니하고 언제든지 다시 부름을 받으면 옮겨갔다(딤후 4:9). 또 다른 하나는 보통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목사와 교사들과 같이 좀 낮은 위치에 속하고 또 좁은 범위에서 활동하도록 선택된 자들을 가리킨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가지 명칭이 한 직분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이 두 명칭은 각각 구별된 직분을 말하는데 둘 다 교회 안에 있으며 일반적인 직분이라고 설명한다. 목수들이 개개의 교회 안에서 제일 우두머리로 정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방법에 따라 성도들을 인도하고, 교훈하고, 말씀으로 먹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자주 사제나 장로라고 불리웠다. 교사들도 교훈을 통하여 성도들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안에서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직분을 정하고 또 그 직책에 합당한자들을 세우시는 것이 그의 대권임을 알게 된다. 교회 안에 처음에도 이렇게 여러가지 직책이 있었고 지금까지 여러 은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교회의 부요함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친절하신가! 또한 그는 그의 교회와 교회의 개발을 위해 얼마나 주위를 기울이시는가! 그가 승천하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은사를 부어 주셨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좀더 크고 어떤 것은 분량이 적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다음의 내용에 기록되고 있다.
3.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그리스도의 대 목적과 계획. 그리스도의 은사는 그의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며 그의 나라와 유업이 인간들에게 있어지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 모든 은사가 이러한 보편적인 목적을 위하여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사람의 은사를 시기하지 아니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은사는 "성도들은 온전케 하려 하심이다"(12절). 즉 이전에는 죄로 인하여 분리되어 있고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질서있게 영적인 자리로 나아오게 하며 또한 그 안에서 좀 더 강해지고 확고해지도록 하며 앞으로 나아오게 하며 그러므로 각자가 각자의 고유한 위치와 기능 가운데서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헌하게 하기 위해서이라는 말이다. 또한 "봉사의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즉 그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며 그들의 목회적 기능의 분야를 성공적으로 감당하게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13절)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교인들의 받은 은사를 증가시키고 새로운 성도를 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이 되는 교훈를 세우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에 "우리 모두가 ~에 이르기까지"라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말씀되어진 은사와 직분들은 성도들이 완전해질 때까지 교회 안에서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 은사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과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될 때까지(즉 모든 참된 신자들이 같은 귀중한 믿음에 의하여 함께 모일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또한 이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위대한 중보자가 되심을 사변적으로 알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랑으로 그를 인식하게 되며 모든 마땅한 영예와 신뢰와 복종을 그에게 바치게까지 되는 것이다. 또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라고 하였는데 이는 우리에게 은사와 은혜가 충만하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속된 것과 같은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함을 벗어버리도록 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 안에서 무르익고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하신 그리고 그의 신비한 몸을 완성시키신 그 장성함의 분량에까지 성도들이 이르게 됨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세상에 갈 때까지는 결코 온전한 인간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충만함이 있고 이 충만함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충만으로의 성장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는 그 충만한 분량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장한다. 라이트푸트(Dr. Lightfoot) 박사는 사도가 여기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믿음과 지식에 일치가 되어 결합함으로 그들이 완전한 인간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그의 거룩한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제도들이 우리에게 주는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즉 그가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세우신 뜻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한다.
(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않게 위해서 이다"(14절). 이 말씀은 우리가 지식에 있어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되거나 믿음이 약하여지거나 우리의 판단력이 일관되지 못하거나 쉽게 모든 유혹에 굴복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의 비위나 맞추려하고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어린 아이들은 쉽사리 강요당한다. 우리도 이런 것을 주의하여 중심이 안잡힌 배와 같이 또는 공중의 구름과 같이 진실함도 없고 견고성도 없으면서 바람처럼 넓게 펴져있는 교훈에 의해 이리저리로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하여야겠다. 또한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도박으로부터 취해진 비유이며, 악한 자들의 간교한 행악함을 의미한다. 또한 "간사한 유혹에 빠져"라 하였는데 이는 유혹을 하고 또 속이는 길을 찾음에 있어서 재주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는 그 다음에 "속이려고 기다린다"는 말을 통하여 그 간교함의 실태가 드러난다. 즉 약한 자들을 유혹하여 그들을 진리로부터 끌어내기 위하여 숲 속에 기다리는 것처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거짓된 교훈과 죄에 이르도록 유혹하여 속이는 자들은 대단히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음을 기억하자.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람들이 이를 위하여 궤술과 간사함을 사용하는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최선의 길은 거룩한 진리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성령의 빛과 은사를 얻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진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하며 그 진리 안에서 확고히 설 수 있게 되어야 한다.
(2) 이는 우리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15절). 또는 사랑 안에 있는 진리를 따르며 또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는 일에 신실하게 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우리가 진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추종한다고 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라와 더불어 진리를 보존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또한 진리도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 가운데서 전하며 다툼으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 된다. 진리와 화평 이 두가지는 함께 공존해야 한다.
(3) 우리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더욱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범사에 즉 새로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와 사랑과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숙함을 향하여 성장해야 한다. 성숙함은 어린 아이와 상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의지할수록 더욱 모든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머리이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하여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이다.
(4) 우리가 한 몸의 지체처럼 서로 돕게 하기 위해서이다(16절). 여기서 바울은 자연적인 몸과,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물론 이 신비한 몸의 머리되시는 이는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의 각 지체가 각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상호간에 교통하며 연합하여야 하듯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은혜 안에서의 영적인 발전과 심장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일치해야 하며 각각의 은사의 열매들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그에게서(즉 각 지체에게 지시를 하며 자양분을 전달하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부터)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각 부분이 일치하여 신체를 도움으로 또는 몸의 동맥과 정맥과 같은 성령, 믿음, 사랑, 성례전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또한 동료 지체인 각 사람들과 서로 일치하게 도움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그들이 질서있게 또한 확고하게 일치하며 각자가 자기의 자리를 지킴으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즉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그리고 각 지체가 몸 안에서의 제각기의 위치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함에 따라 역사함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각 지체에게 충분하시다고 판단할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큰목적, 즉 그 몸을 자라게 하기 위하여 정하신 방법들로 효과있게 하려고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머리로서 각 지체를 명령하고 소생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따라" 서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다. 또는 각 지체의 "효율적인 역사에 따라"서란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즉 각 지체가 자기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각 지체에게 맡겨진 대로 모두에게 자양분을 공급하므로 한 말씀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몸을 자라게 한다. 이러한 자람은 몸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로써 몸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것이다"(16절). 우리는 이 말씀을 다음 두 가지 내용 중 한 말씀이든지 또는 말로써만의 그리스도와 타인들에 대한 사랑에게 행동으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든지 일 것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상호간 사랑은 영적인 성장을 가져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육신의 덕을 세우는 것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반면에 "서로 분열하여 싸우는 나라는 서지 못하리라."
순결과 거룩에 대한 교훈(에베소서 4:17-32)
바울은 앞의 구절에서 상호간의 사랑과 연합과 일치를 권고하였다. 계속하여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활에 있어서의 성결과 거룩성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본문 전반부에서는 일반적인 원칙을 얘기했고 (17-24) 후반부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었다(25-32절). 본문의 말씀은 엄숙한 어조로 도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17절) 다시 말한다면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통하여 너희가 그러한 은혜의 동참자이며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이 알았으니 이제 나는 너희의 양심에 호소하여 주의 이름 안에서 너의 의무에 대하여 증거하노라. 또한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위의 덕을 힘입어 증거하노라."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Ⅰ. 마음과 생활의 성결과 거룩성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권고.
1.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즉 다시 말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무지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방인들같이 생활하며 행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헛된 일과 우상 섬김과 그들이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들의 기대를 기만하는 세상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비록 회심한 사람들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틈에서 산다고 하여도 그들과 같은 형식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1) 바울은 때때로 이방 세계의 악함에 대하여 설명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볼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 등걸과 같이 악한 이방 세계에서 끄집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방인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저희의 총명은 어두워졌다"(18절). 그들은 모든 구원의 지식을 피하였다. 본성의 빛이 그들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하여 그들은 무지하였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었고, 그것을 그들은 빛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의 무지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삶으로부터 멀리 떠난 삶을 살았으며 거룩한 생명을 싫어하고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며 만족하게 여기시는 생명의 길이며 이 삶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진리와 선하심을 닮는 것이다. 그들이 사악한 무지는 빛과 지식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그들이 멀리 떨어진 까닭이다 천박하고 부자연한 무지는 신앙과 경건에 파괴적인 영향을 준다. 그들이 이와 같이 무지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저희 가운데 있는 마음의 어두워짐과 굳어짐으로 말미암은"(18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도록 하시지 않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거룩한 빛으로부터 나오는 교훈적인 광선을 받아들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무지했다. 그들이 무지함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한 데서 기인한 것이며 빛과 지식을 아는 여러 가지 방법을 거부하고 빛에 대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생겨진 것이다.
[2] 그들의 양심은 타락하고 무감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저희가 감각없는 자가 되어"라고 하였다(19절). 그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인식을 할 수도 없으며 죄로 인하여 생긴 그들의 처지를 위험과 불행에 대하여도 인식할 수도 없었다. 이 까닭에 "그들은 자신을 방탕하게 방임하였다." 그들은 자기의 더러운 욕망에 탐닉하였고 이들 욕망의 지배에 자신을 맡겼다. 그들은 더러운 것은 욕심으로 행하므로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욕망으로 모든 종류의 더러운 죄와 심지어는 가장 괴상하고 기괴한 죄를 자행하는 것을 다반사로 삼았다. 인간의 양심이 한 번 무감각하게 되면 그들의 죄를 끝이 없게 됨을 명심하자.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곳에 집중할 때 가장 혐오할 만한 권능과 방창 이외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들의 무서운 범죄 행위가 더욱 늘어나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방인들의 특징이었다.
(2) 그러나 회개한 이방인들도 반드시 자신을 이러한 이방인들과는 마땅히 구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절)고 하였다. 이 말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너희는 저희와 같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하고 있는 어둠과 악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태도로 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은 죄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라! 배우라니? 그러면 그리스도가 책이며, 학과목이며, 길이며, 무슨 사업이란 말인가? 그 뜻은 이러하다. 너희는 이같은 기독교를 배우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여 주신 생활의 규범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하지 않도록 하라.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21절) 즉 우리가 전하는 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을 듣고 또한 그 안에서 즉 그의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효과적으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21절) 그렇게 하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배움의 대상이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배워야만 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또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이"(21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 자신이 지니신 것과 같은 참된 진리를 그의 가르침과 그의 생애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씀이든가 혹은 "그 진리는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것처럼 나타날 때, 그 아름다움과 권능을 드러낸다.
2. 또 다른 부류의 원칙적인 교훈. 이 원칙적 교훈은 "너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22-24절)로 시작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것은 너희가 가르침을 받고 이미 배웠던 교훈의 중요한 일부이다." 바울은 여기서 옷을 벗어 버린다는 비유를 써서 자신을 표현한다. 인간의 생명에 구원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혼의 원칙 기질이나 습관이 변화를 받아야만 한다. 다음의 두 가지로 구성되는 성화가 있어야만 한다.
(1)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만 한다. 여기서 타락한 본성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타락한 본성도 인간의 신체와 같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로 도우며 힘을 주고 받기 때문이다. 타락한 본성은 옛 사람이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이 타락한 본성을 물러 받았다. 이 타락한 본성은 몸 안에서 성장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본성과 함께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것은 옛 사람처럼 간교하다. 그러나 타락한 본성은 하나님의 모든 성도를 안에서 옛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쇠하고 시들어 없어져 간다. 또한 이 옛 사람은 썩어져 가는 것이라고 말씀되고 있다. 왜냐하면 영혼 안에 있는 죄는 영혼의 기능을 침식하기 때문이다. 죄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 죄가 날마다 더욱 악화되어 결국은 그를 파멸시킨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라고 말씀하였다. 죄를 향한 성향과 욕망은 곧 유혹의 욕심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더욱 불행 가운데로 인도하며 만약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억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를 배신하고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욕심을 입으면 우리가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추한 낡은 옷과 같이 벗어 버려야한 한다. 그 모든 욕망은 억제되고 극복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욕심은 그들로 하여금 "구습"으로 즉 회개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던 상황으로 돌아가게 한다.
(2) 새 사람을 입어야만 한다. 타락한 습관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은혜로운 습관을 따라 행해야만 한다. 우리는 은혜로운 습관을 포용하고 지지하며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악행하기를 그친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본문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였다. 즉 "날마다 더욱 더 새로워진 심령을 갖기 위하여 전술한 합당한 수단들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또한 "새 사람을 입으라"(24절)고 하였다. 새 사람은 새로운 본성,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한다. 새로운 본성은 새로운 생활 원리와 소생시키는 은혜에 의하여 활력화되어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을 살게하여 주며 기독교가 요구하는 거룩과 의로운 생활에 이르게 하여 준다. 이 새 사람은 그의 솜씨가 참으로 탁월하시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혼돈과 공허로부터 창조 또는 만들어진 것이다. 또 "하나님을 따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고 그의 위대한 본과 원형을 따라감을 말한다. 인간 영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을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과 죄됨을 나타내 준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이 모습을 닮았다함은 새로운 피조물의 아름답고 거룩하고 복됨을 말한다. 이 새 사람은 "의왕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의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5계명에서 10계명까지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 인간을 향한 태도를 말함이요. "거룩함으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제 1계명에서 4계명까지의 계명에 신실하게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말함이요,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의식적이고 외면적인 거룩함과 반대되는 태도롤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하여 신의 속성을 애써 추구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마음과 생활의 정결함과 거룩성에 대한 더욱 원칙적인 교훈이라고 하겠다.
Ⅱ. 바울은 좀더 상세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왜냐하면 원칙적인 권유는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관계로 여기서는 극복하여야 할 옛 사람의 지체가 무엇인지 또 벗어버려야 할 옛 풍습의 더러운 누더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기독교 신앙으로 장식하여야 할 새 사람의 특별한 장식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되고 있다.
1. 거짓을 경계하고 항상 진리를 말하고자 힘쓰라고 한다(25절) "그런즉 너희가 이미 너희의 의무에 대하여 잘 교훈을 받았으며, 그것을 수행해야 할 책임 아래 있으므로 앞으로의 너희의 행동에서 너희 가운데 진정하고 위대한 변화된 점을 보이라. 특별히 거짓을 버림으로 그리하라." 이방인들은 특히 이 죄를 많이 범하였다. 그들은 유익이 되는 거짓말은 상처를 주는 진리보다 더욱 좋은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거짓 즉 진리에 위배되는 모든 일을 그치도록 경고하였다. 이것은 벗어 버려야만 하는 옛 사람의 일부이다. 또한 거짓에 반하여 우리가 입어야만 하는 새 사람의 습성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는"것이다.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감히 거짓을 말하러 생각조차 않으며 거짓말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이다.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이익과 유익을 위하여 거짓을 말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해야 하는 이유는 본문에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는"까닭이다. 진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지고 있는 빛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거짓을 말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우리는 서로 거짓을 말하거나 배신하지 앓을 것이다. 우리는 다 같이 사회 또는 단체에 속하여 있다. 그런데 거짓은 그 사회를 와해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을 피하고 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을 대단히 중한 죄요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책임에 대한 특별한 침해이며 기독교 사회에 대하여 대단히 해로운 것임을 명심하자.2. 분노와 무절제한 격정을 경계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26절). 이 구절은 칠십인역의 시편 4장 4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그 원문은 "두려움을 품고 범죄치 말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을 명령으로써 보다는 권유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을 내어도"(26절)라고 말씀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눈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충분히 아신다. 그러나 우리가 분을 억제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죄를 범하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만일 너희가 화를 내야 할 입장에 직면하게 되면 죄가 되지 않도록 지나친 분노는 삼가도록 하라"고 하신다. 만약 우리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아니하려 한다면 죄 이외의 것에 대하여는 그 어떤 것에게도 분을 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이나 명성을 얻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 분을 내는 가운데 짓기 쉬운 크나큰 죄는 분노가 불타오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분노에 대한 경계를 주고 있다. "만약 너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면 저녁이 되기 전에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도록 하라"는 말이다. 비록 분노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주의깊게 경계하지 않고 또 빨리 분을 가라 앉히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될 가장 큰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지혜로운 자의 마음 속에도 분이 치밀 수가 있지만 그것은 곧 사라져 버리고 다만 분노는 "어리석은 자의 마음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27절)고 하셨다. 죄된 분노와 진노를 품고 있는 자는 자기의 마음 속에 마귀를 불러 들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자신들을 주장하게 함으로 사탄을 그들 속에 악덕과 악한 음모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비방하는 자 또는 거짓 항소자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이 말씀은 은근히 속삭이는 자와 이야기를 꾸며내는 자와 중상 모략하는 자에 대하여 "귀머거리 노릇을 하라"는 말씀이다.
3. 다음으로 우리는 제 여덟번째 계명이 되는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정직 근면하며 자비를 베풀라는 충고를 대하게 된다. 본문에 "도적질하는 자도 도적질하지 말고"라고 하였다(28절). 이 말씀은 무정한 수단이나 강제에 의하여 악을 행하는 모든 태도에 대한 경고이다.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이러한 흉악한 행동을 하였으나 이제는 더이상 죄를 짓지 말라."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죄와 반대되는 의무를 풍성히 행하여야 할 것이다. 도적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게으름이 도적질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to.ga.r kleptin avrgi,aj evsti,n-즉 도적질은 게으름의 결과이다라고 말하였다. 일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구걸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 도적질에의 유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어떤 불법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부르심 안에서 부지런하고 근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 정직한 일에의 근면은 인간들로 잘못을 저지르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지런해야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할 수도 있게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28절)서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정직하게 영위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빈궁함을 도와 주기 위하여서도 노력해야 한다. 노동으로 겨우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의 수고한 중에서 얼마간으로 자비를 베풀어야함을 명심하자. 노동자이거나 종이거나 적은 것밖에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며 소량이라도 하늘 창고에 보관해 드리는 것은 필요하고 의무가 되는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구제는 불의와 도적질도 얻은 재물이 아니라, 정직과 근면으로 얻은 소산물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도적질한 것을 속죄제로 바친 것을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4. 우리는 본문에서 더러운 대화를 경고하는 말씀을 대하게 된다. 그리고 유용하고 덕스러운 대화를 가지라는 지시를 받는다(29절). 추하고 더러운 말과 논설은 썩어 냄새나는 고기와 같이 독이 있고 다른 사람까지 오염시킨다. 더러운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며 또한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더러운 것이 있음을 증명해 주며 그 말을 듣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에도 악한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언동을 삼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격정과 욕망을 자극하기 위하여 더러운 말을 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러운 대화를 버릴 뿐만 아니라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는 선한 말을"하여야 한다. 대화가 지닌 가장 유용한 점은 그것으로 우리가 상대방을 교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유익한 대화를 증진시키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는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려 함이다"(29절). 지식의 제공, 의견의 제안, 적절한 권고 등은 듣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며 또 말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그에게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타인들이 유익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언행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크나큰 의무임을 명심하자.
5. 본문에 노와 분냄에 대한 또 다른 경고가 있다. 이 말씀과 함께 상호간의 사랑과 친절을 나눌 것이 충고되고 있다(31,32절). "악독과 노함의 분냄은" 다른 사람에 대한 내면적인 원한과 불쾌함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떠드는 것" 즉 말이 많음, 큰 소리의 협박 절제없는 말에 의하여 악독과 노함과 분냄이 드러나게 된다. "훼방하는 말"은 우리가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온갖 비난, 중상, 욕설을 퍼붓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악의"라는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타인들에게 해를 가하도록 음모를 꾸미게 하며 또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뿌리 깊은 분노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것과 반대되는 사실들이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이 말씀은 마음 가운데 사랑의 원칙을 세우고 친절하고 겸손하며 공손한 행동으로 이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책임의 법도를 배웠고 또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서로 인자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불쌍히 여기며"라 하였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연민과 가여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서로 용서하라"고 하였다. 때때로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의견의 차이가 생긴다. 그러므로 "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곳에 용서가 있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용서하고 또 그리스도가 신의 공의를 이루신 구속 때문에 용서하셨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하는 심령을 지니게 되며 하나님이 신실하고 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영원히 신실히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이렇게 사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그들의 기도를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지금까지 권고한 구체적인 실례들이 인간들에 대한 십계명을 후반부에 속한 내용들과 같음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을 후반부에 말씀을 실행할 절대적인 의무가 있음을 여기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이 말씀들을 수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가장한다고 해도 결코 참되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또 두려워할 수도 없는 것이다. 위의 권고와 경고 가운데 바울은 원칙적인 말씀을 삽입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지 말라"(30절)는 말씀이다. 전후 문맥을 살펴 봄으로써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이 성령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30절 앞의 구절들에서는 모든 추악한 생각과 더러운 욕망을 일으키는 더러운 대화들과 호색, 추악함, 거짓이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30절 뒤에 따라 나오는 구절에서 보면 모든 타락된 격정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복되신 성령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슬퍼하시며 성내심을 알 수 있다. 본문의 권고의 목적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슬퍼하게 하며 불안하게 만들지 아니함으로 성령을 거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성령의 거룩한 본성과 뜻을 거스리는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뜻하심을 듣기를 거절하거나 성령의 다스림을 반대하여 기억하여서도 안 된다. 이러한 일을 하면 성령을 노하시게 하므로 마치 사람들이 자기들을 불쾌하게 하고 노엽게 하는 자들에게서 떠나고 그들에게 요구되는 친절을 거두어 버리며 적들에게 그들을 내버려두듯이 성령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되신 성령을 격동하여 그의 현존하심과 은혜스러운 영향력을 너희에게서 거두어 가시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성령을 거스리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은 우리에게 구원의 날에 인치심을 주시기 때문이다." 앞으로 구원의 날이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은 부활의 날에 무덤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죄와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듯이 또한 죄의 결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무덤에서 나올 때까지는 우리는 죄와 고통에서 자유할 수 없다. 그 후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하고 충분한 행복은 시작된다. 모든 참신자들은 그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시고자 그들에게 표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환희와 영광의 부활에 대한 조건와 보증을 주신다. 하나님의 성령이 바로 그 보증이시다. 복된 성령이 거룩하게 하는 자로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그는 구원의 날의 모든 환희와 영광의 표정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성령을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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