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고린도전서 0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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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바울의 사도직에 대하여(고린도 전서 9:1,2)

신령한 바울이지만 그의 사역동안에 외부로부터 반대를 당하고 또한 내부로부터 실망을 당해야 했다. 그는 비난을 받았다. 거짓형제들은 그의 사도직을 의심했다. 그들은 바울의 인격과 명성을 저하시키기에 열심이었다. 특히 바울이 오랫동안 많을 선을 행한 장소였으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고린도 교회에서 그러했다. 그들 중에는 바울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가 사람들에 대한 선의와 부지런하고 성실한 봉사에도 불구하고 매우 불친절한 보답을 받는 것은 이상하거나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하였다. 그들의 불평에 바울은 여기서 답한다. 그는 전장에서 추천한 남을 위하여 자기를 부정하는 그런 본보기로써 자기를 설명한다.

1.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사명과 자격을 주장한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는 것이 사도직의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바울은 말한다. "비록 내가 주의 부활 이후에 즉시는 아니지만 승천 이후에 주님을 보지 못하였느냐"(4:8 참고).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다른 사도들과 같이 같은 사명 부탁 능력을 받지 않았느냐? 다른 사도들이 요구하는 존경과 부양과 명예를 내가 받을 자유가 없겠는가? 복음으로 살 권리가 없어 자기의 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유 때문이다.

2.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증거로써 그의 사역의 성공과 그들에게 준 유익을 든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나의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너희 중에서 내가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였나?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너희의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나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확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으로 사도의 증거로 세우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3. 바울은 교인들의 무례에 대하여 책망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2절), 내가 그렇게 오래 너희 가운데서 성공적으로 일하였으니 너희가 나의 사도됨을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며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충실한 사역자들이 가장 좋은 대접 대신에 가장 나쁜 대접을 받는 것이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사명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많은 존경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알도록 하였다. 거의 2년 동안 그들과 함께 일했다. 많은 유익을 주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가지시게 되었다"(행 18:10, 11 참고),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것을 배은망덕의 태도이다.

 

9:2 없음.

 

9:3

바울이 가진 사도의 권리와 희생(고린도 전서 9:3-14)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주장한 후에 그의 직책에 따를 권리를 말하며 특히 부양 받을 권리를 말한다.

Ⅰ. 3-6절에서 이들을 말한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즉 나의 권위를 조사하며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의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인 나로서의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혹은 부양의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 이 없겠느냐.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부양받을 권이 없겠느냐." 바울은 독신이였지만 원하면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아마 바나바는 아내가 있었다. 여기에 아내는 자매된 여자(aselfh.n gunaika)로서 사도도 아내가 아니면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부적합함을 의미한다. 이 말을 아내와 종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부양의 권리를 바울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먹기 위하여 일한 사도들은 종을 사서 동반시킬 능력이 없었던 것 같다. 바울은 다른 사도과 같이 결혼할 권리가 있으며 아내와 자녀들의 부양을 교회로부터 요구할 권리도 있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손으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6절). 간단히 말하여 바울은 자기와 가족에 대한 부양의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Ⅱ. 바울은 몇 개의 논술로 그의 주장을 입증한다.

1. 인간의 일반적인 사례와 기대로써 증명한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 일로 살아간다. 군인은 군대에서 먹고 산다. 농부와 목자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살아간다. 포도를 심고 재배하면 그 열매를 기대한다.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그것으로 먹고 입는 것이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9절). 다음을 주목하자. 사역자들이 그들의 노동으로 먹고 사는 것은 타당하고 자연스럽다.

2. 바울은 유대 율법으로 증명한다.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8절). 이것은 다만 상식적인 일뿐이냐? 그렇지 않다. 유대의 법에도 상부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곡식을 밟을 때에 먹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셨다. 이 율법은 소에 대한 생각에서가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어진 명령이다. 수고하는 사람들은 그 수고의 열매를 맛 보아야 한다.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다"(10절). 율법은 우리를 위하여 소에 대하여 말하느니라.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의 입을 씌우지 말고 먹을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

3. 일반적인 사리로 논술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들이 뿌린 것은 기대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다. 그들은 영생의 길을 가르쳤고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도록 노력했다. 이 일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므로 이생의 부양을 기대하는 것이 과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신령한 은혜를 전하는 도구였다. 먹고 살 육신의 양식을 기대하지 않으랴? 영적인 이익을 받는 사람은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불평없이 부양해야 한다. 참다운 이익을 얻었으면 이 일을 불평할 수 없다. 그렇게 큰 유익을 얻고 그렇게 작은 일도 하지 않겠나. 이것이 옳은 일이랴?

4. 바울은 다른 사람을 부양하는 일에서 주장한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자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너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권을 주거니와 나 같은 이가 고린도 교회로부터 부양을 요구하지 못할까? 누가 사도의 사명을 더 나타내었나? 누가 너희에게 유익을 더 주었느냐? 다음을 주목하자. 사역자들은 그들의 가치에 대하여 평가되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함이로라.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복음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곤경을 당하였다." 권리를 주장하여 목회를 실패 시키는 것보다 그 권리를 바울은 포기하였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였지만 목회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하여 그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바울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너그러운 사역자들을 위하여 변명하는 것 같다. 바울의 말은 자기 사랑이 아니고 공정을 원리로 삼는다.

5. 바울은 옛 유대의 제도에서 말한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13절). 만약 유대인의 제사장이 성전에 바쳐지는 거룩한 것으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 사역으로 살아가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운 법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4절). 비록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권리는 가지고 있다. 비록 모든 목사가 부양을 받아야 함이 의무는 아니더라도 이것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다. 바울과 같이 포기할 수도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살 권리가 있다. 사역을 받고 사역자를 부양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가진 의무를 어기는 사람이다.

 

9:4 없음.

 

9:5 없음.

 

9: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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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없음.

 

9:9 없음.

 

9:10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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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없음.

 

9:13 없음.

 

9:14 없음.

 

9:15

복음을 전하는 태도(고린도 전서 9:15-18)

바울은 여기에서 자기의 특권을 포기한 것과 그 이유를 밝힌다.

Ⅰ. 지난날 바울은 그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않았고"(15절) 바울은 그들의 비용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고 그들이 부양할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고 살기 위하여 일하는 것을 그만 두지 않았다. 어떤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더라도 고린도 교인들로부터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그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이것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만 그들을 위하고 복음을 위하여서 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Ⅱ. 자기를 부인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대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15절). 이 영광은 자랑이나 교만이나 칭찬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고 길은 차원의 만족과 위로이다. 부담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즐거움이었다. 그들 중에서 이 즐거움을 상실하지 않도록 그는 결심했다. 복음을 위하는 일이 그의 영광이요 자기의 권리와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다.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그의 일보다 삯을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복음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할 각오가 서 있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목사가 자기의 유익보다 목회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범위 안에서 행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고상한 원리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추천하는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는 못한다.

Ⅲ. 바울은 자기 부인이 명예로우며 더 많은 만족과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16절). 그것은 나의 할 일이요, 내가 사도가 된 이유이다(17절). 나에게 부과된 의무이다. 자유의 일이 아니다. 부득불해야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며 거짓되고 불충실한 청직이며 분명한 명령을 어기는 일이다." 사역을 위하여 선택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다. 무료로 전하는 일은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렇게 기록되지는 않았다. "복음을 전하며 스스로 살아가지 않으면 화가 있을지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더 자유롭다. 어떤 때와 환경에서는 부양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권리가 있다. 사역하는 사람들로부터 부양을 기대할 수 있다. 복음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 권리를 포기할 때에 책임 이상의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특권과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부양을 요구하는 것이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때로는 자기의 권리를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버리는 것이 신앙의 높은 수준이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상을 받을 만하다.

Ⅳ.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운 보답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에서 알린다. "내가 이일 곧 복음을 전하고 보수를 받지 않으면 즐겁게 하여 보답을 받는다.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기쁘게 하는 봉사이다. 단지 의무를 하는 것이 아니고 충심으로 하는 것이다. 즉 기꺼이 그리고 자원하여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보답하시기로 약속한 일이다. 마음에 없는 일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 신앙의 정신과 생명이 없는 송장이다. 하나님에게 용납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원하여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성가신 일로 여기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부양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은 기쁘게 하여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사역의 수행을 기쁘게 하든지 마지못해 하든지 충심으로 하든지 형식으로 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책은 책임을 져야 한다. 사역자들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청지기(oivkonomi,a)의 일이다(눅 16:2).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은 충성과 정열과 열심에 따라서 보답을 받는다. 게으르고 억지로 하는 종은 회계를 해야 한다. 그의 이름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의 법정에 서서 회계를 해야 한다. 게으른 종이 얼마나 슬픈 회계를 받을까!

Ⅴ. 바울은 그의 현저한 자기 부정의 사역에 대한 큰 보답의 소망을 제시하면서 종결짓는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18절).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보답이 무엇일까?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혹은 "내 직책의 목적과 뜻을 파괴할 정도로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나의 권리를 버리는 것이다." 주어진 목적에 위반하여 사용하면 권력의 남용이다. 바울은 목적에 배치되도록 그의 권력이나 부양을 받을 특권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흔쾌히 자기를 부인하기를 원했다. 바울의 본보기를 따르는 목사는 좋은 보답을 기쁘게 기대할 수 있다.

 

9:16 없음.

 

9:17 없음.

 

9:18 없음.

 

9:19

영혼을 위한 자유의 포기(고린도 전서 9:19-23)

바울은 여기에서 전에 언급한 말에서 더 나아가 자기의 부인과 남을 위하여 그의 자유를 포기한 예를 든다.

Ⅰ. 그는 그의 자유를 주장한다(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그는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로마의 시민이며 그는 아무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살기 위하여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을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그는 종처럼 행했다. 아무 특권이 없는 것같이 행동했다. 이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자유하게 위하여 자기는 종이 되었다.

Ⅱ.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특별한 예를 상술한다.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자기를 적응시켰다.

1. 유대인과 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유대인이 되었다. 그들을 얻기 위하여 법 아래 있었다. 의식적인 율법을 그리스도로 벗었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경우에 있어서 율법에 복종하여 유대인들이 편견을 버리고 복음을 듣도록 설득시켜 그리스도를 믿게 했다.

2.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없는 자같이" 즉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하였다. 죄없는 일에 있어서는 그들의 기질과 습관에 적응했다. 철학자와는 토론하기를 원했다.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는 그가 주장한 것처럼 유대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것같이 행동했다. 그러나 법없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법에 매인 자이다. 바울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를 얻기 위하여 허용되는 한 모든 사람에게 적응하였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래서 유대인과 같이 되는 것이 필요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얼마를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그들의 법과 관례에 따르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였다. 이방인들에게 가진 권위가 있었으나 무죄한 범위 내에서 그들의 사고에 적응하였다. 유익을 주는 것이 그의 생할이었다. 특권이나 형식을 주장하지 않았다.

3.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2절). 최대한 사람을 이용하였다. 그들을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되었다. 그들을 위하여 자유를 쓰지 않고 그들에게 걸림돌이 안 되도록 주의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연약하고 고집으로 넘어지고 복음에서 떠나 이방 우상으로 갈 것같으면 자기의 모든 것을 삼가하였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 영혼을 구원하도록 자기를 부인했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기꺼이 자기를 부인했다.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남들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였다.

Ⅲ. 자기의 행동 이유를 제시한다(23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즉 복음의 주인인 그리스도의 명예와 복음의 대상인 영혼의 구원과 복음의 특권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특권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겸비하고 자유를 포기하고 그들과 어울리고 적응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에 대한 정열과 사람의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은 자기의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덕이나 파괴를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은 복음의 권리를 남용하는 사람이다.

 

9:20 없음.

 

9:21 없음.

 

9:22 없음.

 

9:23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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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러운 면류관(고린도 전서 9:24-27)

이 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가진 격려를 암시한다. 그는 영광스러운 상과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보고 있었다. 이 제목에서 바울은 자기를 경주하는 자와 싸우는 투사에 비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고린도 지협 경기를 잘 알고 있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24절). 너희가 경기에서는 다 달려도 한 사람이 이겨서 상을 받지 않느냐.

Ⅰ. 그들의 의무를 촉구한다.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여라."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너희의 경주와는 다르다. 너희들은 모두 상을 받기 위하여 달린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열심히 힘껏 달릴 필요가 있다. 모두가 상을 받을 여지가 있다. 잘 달리면 꼭 얻는다. 고상한 경쟁심은 있어야 하고 서로 앞서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일등을 획득하여 신령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상을 받으면 영광의 경주가 된다. 나는 달릴 목표를 세웠다. 너희도 그렇게 하라. 나를 따라서 달려라." 영원한 상을 위하여 목사들을 따라서 달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교인들을 인도하는 것은 목사의 명예요, 의무이다.

Ⅱ. 바울은 온유를 통하여 자기의 본보기를 그들 앞에 분명히 제시한다.

1. 경주를 하는 사람은 먹는 것에 규칙적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너희의 운동에 있어서 투사와 레슬링 선수는 음식과 훈련에 엄격하다. 그들은 철저하다. 음식을 삼가하고 자유를 제한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앞에 놓인 상을 위하여 그리고 그렇게나 영광스러운 경주를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제한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경주와 싸움을 위하여 엄격한 음식과 극기를 한다. 너희도 나와 같이 훈련을 하여라. 이방인의 제물을 삼가하지 못하면 하늘의 면류관을 얻기 어렵다.

2. 그들은 절제할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적응한다. 연습에서 싸우는 사람은 허공을 치면서 팔을 휘두르면서 접근전의 구타를 연습한다. 그리스도인 전투에는 그런 연습이 없다. 항상 접근전을 한다. 원수가 항상 목전에 있어서 공격한다. 이 때문에 싸움을 쉬거나 군기를 내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허공을 치는 그런 싸움을 하지 않고 전력으로 접전해야 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하는 원수는 육체이다. 마치 권투시합에 있어서와 같이 이 육체는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이 육체는 육적인 경향과 기호이다. 이것들을 바울은 제어하고 정복하려고 하였다.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을 따라와야만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영혼의 유익을 원하는 사람은 육체를 쳐서 눌러야 한다. 육적인 정욕을 싸워 이겨야 한다. 형제의 영혼을 위험하게 하면서 탐욕적인 식욕이나 이방인의 제물로써 그들의 육욕을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몸은 마음에 봉사하여야 하고 마음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Ⅲ. 바울은 그의 충고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촉구한다.

1. 그들은 모든 어려움과 수고를 다 겪으며 연습한다.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경기에서 이긴 그들은 시들게 되는 올리브 나무 가지나 잎으로 만든 월계관을 쓴다. 그러나 그리스도은 하늘 나라에 예비되어 있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목적에 두고 있다. 경주에서 패배하겠는가? 많은 군중과 혹은 시드는 풀잎의 관을 위하여 그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달리며 고난을 당하는가? 권능의 재판장의 인정과 영원한 왕관을 받을 그리스도인이 육체의 경향과 죄의 얽매임을 풀기 위하여 열심히 달리지 않겠는가.

2. 세상의 경기는 불확실하다. 모두가 달리나 한 사람이 상을 받는다(24절) 모든 경주자는 수상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주자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받도록 달려야 한다. 규칙대로 달려야 한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방향없는 것같이 아니하고"(26절) 규칙대로 달리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면류관을 받는다. 다만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규칙대로 끝까지 달리는가? 경주가 끝날 때 다 상을 받을 그리스도들이 더 열심히 달리지 않을까?

3. 바울을 육욕에 복종하는 위험성을 나타내 보인다. "내가 내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7절). 즉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절되는 것이다. avdokimoj 는 경기의 심판자가 면류관을 주지 않는 자이다. 이 경기에 대한 은유가 전 문장에 흐르고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구원의 전도자가 면류관을 놓칠 수가 있다. 남들은 천국으로 인도하나 자기는 도착하지 못한다. 바울은 이것을 막기 위하여 육체의 소욕을 정복하는 데 그렇게나 큰 고통을 겪는다. 남에게 전도한 후에 최후의 심판자에 의하여 버림을 받지 않도록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경외함이 사도에게 필요하다. 충성을 지속시키기 위함이다. 평민이야 얼마나 더 필요할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불신앙과 최후의 버림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안전책이다.

 

9:25 없음.

 

9:26 없음.

 

9:27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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