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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본서의 제명 (나훔 1:1)

이 제명에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여호와의 말씀의 선포 대상이 되는 큰 성읍. 이것은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다. 즉 중대한 예언일 뿐만 아니라, 목에 매달린 맷돌처럼 니느웨에게 치명적이고 무거운 예언이다. 니느웨는 앗수르 나라의 왕도였다. 요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 100년 전에 이 큰 성읍의 임박한 몰락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그 때는 니느웨인들이 회개를 했기 때문에 그 포고가 "효력을 발생하지 않고" 보류되었다. 니느웨인들은 그 때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유익한가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성읍을 구해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자기들의 길로 돌이켜, 더욱 더 약해졌다. 그리하여 "피의 성읍" 이며 "거짓과 도적으로 가득한" 성읍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회개를 후회했고, 개가 그 토한 것을 먹듯이, 다시 돌이켜, 마침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악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같은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내지 않고, 이 예언을 보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재앙을 선고하게 하였다. 회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재앙의 유예도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만일 사람이 처음 시작했던 선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께서도 보이시려고 했던 은혜로부터 반드시 돌이키시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2.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게 되는 딱한 예언자. 이것은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길이라" 고 했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는 예언자가 환상 속에서 명백히 예견했던 것으로서, 기록으로 남겨두어 그의 사후 그 사건이 본 예언과 비교되어 부합됨을 확인하게 한 것이었다(그것은 "묵시의 책" 이다).

그 예언자 본인에 대한 설명은, 그가 엘고스 사람, 제롬(Jerome)의 말대로 갈릴리에 있던 엘고스라고 불리우던 고을의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보통 예언자 자신들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신앙이 그들의 권위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예언을 쓴 성령의 거룩한 권위에 서도록 한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1:2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나훔 1:2-8)

니느웨는 하나님, 특히 그와 쟁론하시는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분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진술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에 관해 말하는 것, 즉 사악한 자에게 임하는 큰 공포와 선한 자에게 임하는 위로는 우리 모두에게 합당하다. 왜냐하면 불기둥과 구름 기둥 같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영예로운 묘사를 보면, 이스라엘에게는 찬란한 측면이요 애굽에게는 어두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 그로부터 자기 분량을 취하게 하라. 죄인들은 그것을 읽고 떨며, 성도들은 그것을 읽고 승리를 기뻐하게 하라.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그들의 원수들에게 나타나며 그의 은혜와 긍휼은 그의 신실되고 충성스러운 백성들에게 확신되고, 그의 전능하신 권능은 그의 진노를 매우 무섭게 하며, 그의 은혜를 매우 바람직하게 한다.

Ⅰ. 그는 불변의, 정의의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그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다. 니느웨로 하여금 이 사실을 알고 그의 앞에서 전율하게 하라. 그들의 우상들은 하찮은 것들이니, 그들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크게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왜냐하면,

1. 그는 그의 살아계심과 완전하심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대항하여 다른 신들을 세우고, 그의 율법을 파괴하며 그의 판결을 규탄하며 그의 말씀을 비방하며 그의 백성을 학대하는 자들에 의하여 자기에게 가해진 모욕과 멸시를 분개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로 하여금, 진실과 생명의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이심을 알게 하라. 그는 자기를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영예에 불충성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시며, 경쟁 상대를 참지 않으신다. 또 그는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의 평안, 그리고 "자기의 땅을 위하여 질투하시는" 분이시다(욜 2:18). 그들이 피해입는 것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보복하시는 분이시며,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사람과 같지는 않으시니 사람은 억제하지 못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노함이 없나니" 라고 했다(사 27:4). 그는 의로우신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공의를 세우고,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자들에게 그 의를 더욱 두렵게 하기 위해서 분노하신다.

그는 "진노하시는 주(主)" 이시다(원문의 뜻은 그러하다). 그는 노를 품으시나 그 진노를 다스려 통제하신다. 우리의 분노는 흔히 우리를 다스려, 마치 "자신의 영혼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의 진노와 같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노를 치도(治道)하시는" 여호와이시다(시 78:50).

2. 그는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게 심판을 가하시기로 결정하신다. 여기서는 그가 보복하시는 분이라는 말뿐만 아니라, 그가 "보복하시리라" 는 말을 듣는다. 그는 하실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 의지를 맹세하셨다(신 32:40, 41). 그는 그의 원수와 대적 모두로 하여금 자기의 격분을 알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에 대한 판결이 신속히 집행되지는 않지만, 그들에 대한 노를 보류하셔서 진노의 날에 그 노를 베푸시려고 간직해 두신다. 회개하여 그의 앞에 겸손히 머리숙인 자기 백성에 대하여는 "그의 노를 영원히" 계속하지 않으나, 그의 원수들에 대하여는 영원히 노를 발하실 것이다. 그는 죄를 짓고도 그 죄를 고집하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3절). "악하게 그들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결코 돌이키지 않으며(시 18:21),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겸손히 애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것이지만 거만한 애걸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맞이할 것이다. 긍휼의 문은 간절한 소리로 끝까지 "여호와여, 여호와여" 하고 부르는 자에게 열릴 것이다.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이러한 발현은 니느웨에게 적용되며(8절), 범죄를 계속 답습하는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넘쳐 흐르는 홍수로 그는 그 처소를 망하게 하리라." 갈대아인의 군대가 앗수르인의 온 땅을 짓밟아 황무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단 임하게 되면, 모든 사람에게 대홍수처럼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것을 연기하거나 대항할 수 없다. "흑암이 그의 원수들을 추적하리라." 공포와 환난이 그들이 가는 곳마다 쫓으며, 완전한 암흑으로까지 쫓을 것이다. 그들이 쫓아오는 흑암으로부터 도망하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들 앞에 있는 흑암에 빠지고 말 것이다.

Ⅱ. 그는 막강한 권능의 하나님이시며, 원수들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아무리 힘셀지라도, 아무리 강건할지라도 물리칠 수 있으시다. 그는 "권능이 크시다" (3절). 따라서 그를 우리의 친구로 삼는 것이 좋으며, 그를 원수로 삼는 것은 불행임이 분명하다.

1.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자연계 속에서도 입증된다. 우리는 자연 과정 속에서 늘 그의 영향력을 볼 수 있으며, 때로는 급작스러운 자연의 변이 속에서 하나님의 영향력을 발견할 수 있다.

(1) 우리가 대기를 주목한다 하더라도, 거기서 그의 권능의 증거를 발견할 것이다. 이는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시는 길마다 회리바람과 광풍을 동반하니, 이것이 그의 원수들에게 공포가 된다(시 18:9 등). 그리고 회리바람과 광풍이 있는 곳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명령하시고 제어하시며 그것을 통해 나아가시며, 그것에 의해 자기 목적을 이루신다. 그는 회리바람으로부터 욥에게 말씀하셨으며, "광풍도 그의 말씀을 성취한다." 그는 "회리바람 속에서 길을 가신다." 곧 그는 아무도 모르게 가시며 그의 섭리의 길은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그의 길은 바다 가운데 있도다" 라고 했다.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그는 구름을 밟고, 그 위로 걸으시며, 사람이 발로 먼지를 일으키는 것처럼 그가 원하실 때는 구름을 일으키신다. 악마가 공중의 권세를 잡게 된 것은 허락을 받았거나 오히려 강탈해서 잡은 것이니, 그 권세는 하나님의 손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2) 우리가 깊은 심연에 눈을 돌리더라도, 거기서 바다가 그의 것이요 그가 바다를 만드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하나님은 자기가 원하실 때면, "바다를 꾸짖어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강은 바다를 끊임없이 채운다. 그가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실 때, 그의 권능의 증거를 보이셨으며, 그가 원하실 때마다 다시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3)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리 주위를 주목해 보더라도, 우리는 그의 권능의 증거를 찾게 된다. 여름의 무더움과 가뭄, 또는 겨울의 냉기와 서리로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 때 가장 잘 선택되고 강한 꽃도 쇠하게 된다. 그의 권능은, 흔히 산들을 진동시키고(5절), 언덕들을 녹이고 낮춰, 광야와 같게 하는 지진으로 나타난다. 그가 원하실 때, 태양의 타는 듯한 뜨거움에 의해 "그의 앞에서 땅이 불타오른다" (한글 개역과 다름). 그리고 그는 소돔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땅을 태울 수 있으며, 종말에는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을" 태울 것이다. 땅과 그 가운데 거하는 모든 업적들이 타버릴 것이다. 이리하여 "여호와는 크시며," "큰 권능을 가지신" 분임이 드러난다.

2. 이것은 특별히 그의 진노에 적용되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심 앞에 설 수 있겠느냐?" 고 추리할 수 있다(6절). 니느웨인들은 한 때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것으로 알아(그가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경험했던 긍휼을 이용하여 하나님께 대담하게 나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은혜스러우실 뿐만 아니라 공의롭고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니, 그는 그의 진노의 공의를 보이신 다음에 그의 권능을 보이시고, 그와 쟁론하려는 원수들의 전적인 부족함을 나타내신다. 완고하고 강퍅하기 짝이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권능에 대하여 맞서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1) 여기서 무시무시하고 전능하신 "타는 불" 로서의 하나님을 주목하라. 여기에 죄에 대한 그의 분노와 "그의 맹렬한 진노" 가 있으니 그의 맹렬한 진노는 물과 같이 쏟아지지 않고, 소돔에 퍼부어진 불과 유황같이, "불처럼 쏟아졌다" (시 11:6). 지옥은 하나님의 분노의 불꽃이다(계 16:19). 하나님의 분노는 매우 맹렬하여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쳐서 넘어뜨린다.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이 바위들은 요동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위들도 가끔 땅 속에 있는 불의 분출로 인하여 깨어진다. 이것은, 그 마음이 바위와 같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하심과 다소 흡사하다.

(2) 여기서 약하고 무력하며 하나님의 진노에 조금도 필적할 수 없는 불 앞의 그루터기 같은 죄인들을 보자.

[1] 그들은 전적으로 그것을 감당하여 버티어내거나 진노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심 앞에 서리요?" 가장 교만하고 가장 담대한 죄인도 설 수 없고, 경건치 못한 세계도 설 수 없으며, 범죄한 천사들도 설 수 없도다.

[2] 그들은 전혀 그 진노 아래에서 견딜 수 없어서, 정신을 차리거나 더 이상 그들 자신을 계속 즐길 수 없다. "누가 능히 그 진노를 담당하랴?" 그 진노는 저항할 수 없듯이 또한 견디어 낼 수 없다.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진노가 그의 영혼을 즉시 잡는다면 누가 "그의 분노" 를 감당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 앞에서 두려워" 하자. 또 "두려운 마음으로 그의 앞에 서서 범죄하지 말자."

Ⅲ. 그는 무한한 긍휼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모든 분노 중에서도 긍휼이 기억된다. "시온에 있는 죄인들로 두렵게 하라." 이는 그들이 아직도 허물 중에 있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로 그 앞에서 떨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1. 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3절), 쉽사리 격노하지 않으며, 그를 비방한 자들에게도 기꺼이 긍휼을 보이시며, 그들이 회개하면 곧 은혜로써 영접하시기 때문이다.

2. 악한 자들에 대한 그의 진노의 징표가 널리 퍼질 때, 그는 그의 친 백성의 안전과 평안을 돌보신다(7절). "여호와는" "선한" 자들에게 "선하시며," 그들에게 있어서, "환난 날에 요새가" 될 것이다. 악한 자에 대한 공포와 파괴를 일으키는, 바로 그 전능하신 힘이 그의 친 백성의 보호와 만족을 위해 쓰여지고, 또한 앞으로도 쓰여질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킬 수도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하여 만유를 황무케 할 때, 즉 모두에게 임하는 환난의 날에도, 그는 믿음을 가지고 그의 보호 아래로 피한 자들, 그를 신뢰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자들, 그를 의지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삶을 영위하는 자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알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형편을 아시고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시며 그들을 구원해 낼 가장 효과적인 길을 모색하실 것이다. 그들이 하찮은 세상에서는 알려지지 않고 하찮은 자로 여겨지겠으나, 여호와는 그들을 아신다(시 1:6)

 

1:3 없음.

 

1:4 없음.

 

1:5 없음.

 

1:6 없음.

 

1:7 없음.

 

1:8 없음.

 

1:9

앗수르 군대의 멸망 (나훔 1:9-15)

이 대문은 산헤립이 거느리는 앗수르 군대의 파멸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의 무거운 경고의 일부와 향후 백 년에 니느웨 자체의 멸망에 대한 증거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예언자와 아마도 동시대인이었을 이사야가 많이 이야기한 사건이다. 이제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Ⅰ. 앗수르인들이 공의롭고 질투하시는 하나님께 일으킨 큰 격분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나," 이에 대해 보복하신다(11절).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온다" 고 했다. 이는 산헤립과 그의 대사 랍사게를 가리킨다. 그들은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악한 글과 말을 작성했으니, 그를 이방신과 똑같이 생각하여 그의 예배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백성들로 그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며, 오히려 그들로 "위대한 왕인 앗수르 왕" 의 보호 아래 들어오라고 채근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질을 바꾸어, 더 이상 여호와의 성읍, 즉 거룩한 성읍이 되지 않게 하려고 하였다.

니느웨로부터 나오는 이 강한 자는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고 "여호와를 대하여 악을 꾀하여," 니느웨에 이 짐(심판)을 초래한 것이다. 하늘과 땅의 영광스러운 대주재가 산헤립에 의해서처럼 그렇게 무엄하고도 참람되게 비방을 받았던 적은 없었다. 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호에 실망하여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고 히스기야의 개혁에 대한 신뢰로부터 그들을 좌절시키려고 꾀하였던 "악한 모사(謀士)" 였다(사 36:7).

예언자는 여기서 이 사악한 모사에게 충고한다. "너희가 여호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마치 네가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하고 전능자 신을 압도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짓이냐!" 여호와와 세상에 있는 그의 왕국의 유익에 거슬려 지옥의 문(권세자)들이 꾀하는 바는 매우 크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 로 증명될 것이다(시 2:1, 2).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 가 자기를 거슬러 헛되이 꾀한 모략을 비웃으시며, 그들의 간계가 도리어 그들에게 떨어지게 할 것이다.

Ⅱ.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실 큰 멸망을 보자. 이는 즉시 전 왕국에 임하지 않고(파멸은 그들의 범죄의 분량이 찰 때까지 연기되었다),

1. 그 군대에게만 임했다. 하나님께서 그 군대를 "온전히 멸하시리라." 그것은 온전히 훼파되며 일격에 멸망될 것이다. 멸망시키는 천사의 치명적인 일격이 그들을 그곳에서 사멸하게 할 것이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니" 이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급속히 역사하사 단번에 그들의 행사를 끊으신다. 하나님의 보복은 일정한 법칙이나 방식에 의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방법, 즉 급성병이나 만성병에 의하여, 그리고 점차적인 죽음이나 질질 끄는 죽음에 의하여, 그에 대해 계속 허사를 꾀하는 모든 원수들을 "온전히 멸하시리라."

우리는 앗수르 군대 모두가 그들의 대장과 거의 같은 생각과 말을 썼으리라고 생각할 말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비록 배운 대로 말했으나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행동과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빠지게 될 것이다(10절).



(1) 그들은 서로 얽히고 "엉크러진 가시덤불 같다." 그들은 서로를 악화시키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대하여 더욱 고질적 존재가 되며, 서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서로의 손을 자기들의 불경건을 위하여 강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농부가 헤칠 수 없는 가시덤불을 헤치듯이 그들을 함께 불 속에 던질 것이다.

(2) 그들은 교만과 분노에 도취된 "술취한 자들 같을" 것이다. 그와 같음으로써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이 파멸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넘어져 모욕당하고 조롱받는 것이 당연한, 술주정뱅이 같을 것이다.

(3) 그들은 저항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마른 지푸라기 같이 다 탈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을 그루터기처럼 만드는 자들에게 삼킬 듯한 불과 같도다. 또한 이 큰 군대에 관해서 이렇게 경고된다(12절). 즉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하여" 매우 안전하며, 그들을 포위한 자들 밖으로의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은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풀과 곡식은 약간의 수고로도 잘리우듯 분명히 멸절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나갈 때" (한글 개역과 다름) 즉 멸망시키는 임무를 맡은 천사가 지나갈 때 그리되리라. 죄인들의 방심과 그들 자신의 힘에 대한 신뢰는 다가오는 파멸의 전조라는 점을 명심하자.

2. 왕에게도 닥친다. 그가 "여호와를 대하여 악을 꾀했으니"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14절).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하였나니" 그 명령은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는 것이다. "네 기억은 쇠하여지고, 사람들이 예전처럼 너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게 되며, 너의 강한 역사에 대한 소문은 명성의 날개를 타고 그의 나팔과 함께 흩날리게 될 것이다."

산헤립의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 통치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얼마 후에 있을 앗수르 제국의 정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여호와를 대하여 악을 꾀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 위에 악을 초래하고, 자신의 가족과 이익에도 그리며, 또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이름을 파멸시킨다는 점을 명심하자.

계속하여 경고된 바에 의하면,



(1) 그가 숭배하던 우상들은 그들의 신전에서 박멸될 것이며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은 그 신들의 집에서" 멸절할 것이다. 이것은 산헤립이 "그의 신 니스록의 집에서 예배하고 있을 때 그의 두 아들" 에 의하여 살해당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야만스러운 부친 살해로 인해서, 그 신전은 독신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악용되었고, 신상은 박멸되었으며, 그 신상을 숭배하던 자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예배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또는 이것은 앗수르의 전적인 타락을 일반적으로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원수의 군대는 모두 황무하게 될 것이요, 그들 신들의 신상들까지도 남지 않을 것이니, 이로써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론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그들의 우상 숭배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2) 산헤립의 무덤이 그곳(어떤 이들은 그의 신이 거하는 집에서라고 생각한다)에 만들어질 것이다. 그는 거기서 살해되고, 바로 거기서 장사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사악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영원한 치욕의 표적 아래 놓여 있으니, 그의 두 아들이 그를 살해함으로써 자녀로서의 본능적 애정까지 상실하였다.

또는 이것은 앗수르 군주국 자체의 굴욕스러운 몰락을 뜻하는 듯하다. 이 나라의 멸망을 딛고 바벨론 제국이 흥기하였다. 한때 견고하였으나 이제는 멸절한 나라의 무덤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논란이 행해졌는가 하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겔 31:3, 11, 15, 16). 하나님께서는 추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을 수치스러운 징벌에 의해서 하찮게 만드신다.

Ⅲ.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불리워진 백성과 성읍을 위하여 행하실 큰 구원이 분명해진다. 교회의 원수들의 파멸이 교회의 구원이니, 곧 산헤립 군대의 전복이 예루살렘에게는 그 큰 구원이었다.

1. 이리하여 그 포위가 벗겨질 것이다.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리니, 그로 인해 네가 종살이하던 곳에서 해방되며, 너의 결박을 끊으리니, 그 결박은 앗수르의 진노에 너를 묶었던 것이니라." 그 큰 승리에 찬 군대는 유다의 모든 지역을 강제로 자기들의 진영으로 만들고, 거기서 마음대로 살았고, 그것이 그들에게 멍에와 굴레가 되었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그 성읍은 그에 의하여 묶여져서 속박되었다. 그러나 멸망시키는 천사가 그의 역사를 행했을 때, 예루살렘의 굴레는 깨어졌고 다시 자유로와졌다. 이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바 예루살렘이 진실로 해방된 그 큰 구원의 표적이었다.

2. 원수는 약화되고 사기를 잃어서 다시는 그와 같은 침략을 감행하지 못할 것이며, 이 환난의 종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잘 이루어져서 그와 같은 극심한 징계의 기회가 더 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예루살렘을 상해치 않을 것이다. 그의 진노가 "돌이켜졌으니," 하나님은 "그것으로 족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가 이 공포로 "그의 일을 시온산에 다 행하셨고" (사 10:12). 따라서 "전에는 내가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와 환자의 형편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그 쓰라린 운명이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괴롭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2) 원수가 다시는 감히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15절). 산헤립이 승전하고 자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해치우고 있을 동안에는, 매일매일 괴로운 소식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그는 산 위 멀리서, 발이 힘닿는 대로 달려온다. 욥의 사자(고난의 사자)를 수없이 많이 영접한 후에, 다시 한 번 평화의 사자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광경이랴!

우리는 이 구절이 다른 예언자가 바벨론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시는 긍휼하심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는 것임을 발견한다(사 52:7). 이는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해서가 아니라(렘 23:30 에 나오는 자들처럼),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말함으로써 흔히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까닭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바른 말의 같은 형태를 되풀이 함으로써(딤후 1:13) 건전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일치성을 증명하는 것이(딤전 6:3) 유용할 것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와 나훔으로부터 다시 바울 사도에 의해서 인용되어, 우리 주 예수에 의하여 우리에게 행하여진 크신 구원과 영원한 복음에 의하여 그것에 세계에 전파된 사실에 적용된다(롬 10:15).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아름다운 소식의 전달자들이니,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화평을" 전파한다. "전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죄 때문에 불행과 위험에 직면한 자들에게 그들의 전언은 얼마나 반가운 것이겠느냐! 그리고 이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온 자는 그와 함께 유다에게 "그의 엄숙한 절기를 지키고 그의 맹세를 수행하라고" 부르는 명령을 가지고 온다. 환난 중에는



[1] 평상적 절기가 중단되었다. Inter arma silent leges-즉 율법의 소리는 전쟁의 고함 중에는 들릴 수 없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에 그들은 더 이상 그곳으로 가서 예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억류가 풀어졌으므로, 그들은 돌이켜 그들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절기는, 그의 백성이 잠시 동안 그것의 유익을 강탈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다시 그 기회를 회복하실 때 그 백성에게는 갑절로 즐겁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그 긍휼의 결핍에 의하여 그 가치를 배웠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 비탄으로부터 자기들을 건져내신다면, 그의 예배와 명예에 있어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서원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이루어졌으므로 그들의 서원을 수행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때 그들이 맺었던 약속은 이제 실현되어야만 하리니, "서원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인이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라" 는 그 말은, 히스기야가 시작했던 선한 개혁사업의 완성에 대한 약속으로 볼 수 있다. 악인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아무 데도 다니지 못할 것이니, 진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더 위험한 원수인 집안의 악인이 회개할 때에, 나라 밖의 원수까지 전멸된다면, 그것은 진실로 그 나라에 큰 긍휼이다.

 

1:10 없음.

 

1:11 없음.

 

1:12 없음.

 

1:13 없음.

 

1:14 없음.

 

1:15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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