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의 죽음 (이사야 57:1,2)
바로 전 장 끝에서 선지자는 그들의 무지와 술주정 때문에 파수군들을 비난했다. 여기서 그는 자기 백성들의 전반적인 어리석음과 무감각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백성을 일깨워야 할 파수군들이 그러할 때 백성들이 무사려했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시할 수 있다.
Ⅰ. 하나님의 섭리는 선한 사람들을 이 세상 밖으로 속히 옮기신다. 이 세상에서 "의인" 은 "망한다" ("죽는다"). 그들은 사라지고, 그들의 처소도 이 이상 더 그들을 알지 못한다. 경건하다 해서 죽음을 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아니, 가장 의로운 자가 박해 시대에는 가장 해를 입기 쉽다. 첫번째로 죽은 자는 무죄한 아벨이었다. 의는 사망의 쏘는 것에서는 구원받으나 사망의 치는 것으로부터는 구함을 입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완전히 옮겨가기 때문에 "망한다" (한글 개역:" 죽는다")고 표현되고 있다. 의인이 죽으면 이 세상이 큰 손실을 입는다고들 한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 자신의 파멸이 아니라 그들이 쓸모있게 살던 그 장소의 피해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자비한 자들조차 취해감을 입는다." 자비한 자는 의인과 구별되는 선한 자들이다. 선인을 위해서는 "용감히 죽는 자가 가끔 있다" (롬 5:7). 그러나 살려둘래야 살려둘 수 없는 자들이 데려감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즉 열매 많은 나무는 죽음으로 절단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여전히 남아서 땅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자비로운 사람들은 왕왕 악인의 손으로 취해감을 입는다. 자비로운 사람은 선행을 많이 쌓는다. 그러나 그런 선행 때문에 그들은 돌에 맞아 죽는다. 아마도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선한 자들의 죽음이 항용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선한 사람들이라고는 거의 남지 않았다(렘 5:1).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시 12:1).
Ⅱ. 무관심한 세상은 이런 신의 섭리를 경시하며 눈여겨 보지 않는다.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깨닫는 자도 없도다." 그것을 공공의 손실로 애통해 하거나 대중에게 대한 경고로 주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선한 사람의 죽음은 보통 사람의 죽음보다 더 골똘히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재료이다. 이 경우 우리는 진지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다투시는가? 그런 섭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선한 교훈은 무엇인가? 사라진 자들의 공백을 채우고 그 틈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런 사건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채찍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징계의 의도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노하시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하물며 땅에 거하는 자들이 두 증인이 살해를 기뻐하였듯이(계 11:10), 이런 일을 기뻐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겠는가? 선인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훌륭한 축복 중 하나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이런 축복과 헤어진다는 것은 실로 그 축복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무사려함에 대한 증거이다. 작은 아이들은 자기 부모가 죽어도 슬퍼할줄 모른다. 이는 부모를 여의는 것이 어떤 손실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Ⅲ. 옮겨감을 당하는 의인의 행복.
1.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는다." 재앙이 도래하기 전 아니, 재앙이 오고 있을 때 의인이 취해감을 입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1)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심. 이는 의인들이 재앙을 눈으로 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왕하 22:20). 즉 재앙을 휩쓸리거나 재앙으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대홍수가 닥아올 때 그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오도록 부름을 받으며 하늘 아래 도피처가 없을 때는 천국에서 피난처와 안식처를 얻게 된다.
(2) 세상에 대한 진노하심에서. 세상은 의인과 자비로운 자에게 온갖 피해를 입혔다. 의인이 취해감을 입는 것은 이들을 벌하기 위해서이다. 의인과 선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기 위해 그 틈바구니를 막고 있었다. 이런 자들이 치워지면 홍수밖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사자들을 보내 오히려 국으로 소환하실 때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는 표시이다.
2. 의인과 자비로운 자는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빠져나가 평안을 누린다. "의인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정로로 행하는 자" 이다. 그는 죽으면 "평안에 들어가 자기 침상에서 편히 쉰다." 다음 사실에 주목하자.
(1) 정직한 중에 행하다가 죽을 때 히스기야처럼 "내가 행한것을 기억하옵소서" (왕하 20:3)라고 호소할 수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이익이며 안식이며 축복이다.
(2) 정직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과 끝까지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죽어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평안으로 들어가며 평화의 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그것은 평화가 완전해지고 아무 고통도 없는 세계이다. "너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마 25:21). 그들의 몸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쉰다. 무덤은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안식의 침상이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그들은 거기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된다(계 14:13). 그리고 그들이 피곤하면 할수록 그 안식은 그들에게 더욱 즐거울 것이 될 것이다(욥 3:17). 이 침상은 흑암 중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침상은 더욱 고요하다. 그 침상은 부활의 아침에 상쾌하게 일어날 침대이다.
백성에게 대한 질책 (이사야 57:3-12)
Ⅰ. 여기에는 그들의 일반적 특징, 또는 명칭과 칭호가 규탄되고 있다(3절). 그들은 가까이 와서 고소 내용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은 법정에 회부되어 거기서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라고 기소당한다. 즉 그들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런 인간이 될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도 그랬다. 간음과 무속(무속)은 죄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악마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순종의 자식들" 이었다. "오라, 이리로 가까이 오라. 그러면 나는 네게 네 파멸을 알려 주겠다. 즉 의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평안과 안식을 가져오지만 너희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겠다. 너희는 패역의 자식이며 궤휼의 종류다(4절). 너희는 천성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뒷걸음질치며 너희 본성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배반심이 들어 있다(사 48:8)" 고 선지자는 말한다.
Ⅱ. 힐난받은 그들의 구체적 범죄.
1.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조소. 그들은 조롱하는 세대였다.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4절) 너희는 너희 조롱이 불쌍한 선지자들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을 멸시하며 짓밟는다. 그러나 너희는 실제로는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언을 대신 전하는 자들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예루살렘의 죄의 양을 채우는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행한 것을 곧 자기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책망받고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았을 때 극히 무례하고 꼴사나운 몸짓이나 경멸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조소했다. 그들은 마땅히 진지해지고 겸손해져야 할 말씀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고 낄낄대며 즐거워했다. 그들은 예언자들 앞에서 입을 삐죽거렸고 모든 선한 훈육의 법을 반대하여 혀를 낼름거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반집 하인이 심부름을 와도 이 보다는 더 융숭하게 맞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들은 그토록 무례한 행동이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마땅했다.2. 우상 숭배. 이것은 유대 민족이 포로 전에 범한 가장 악명높은 죄였다. 그러나 그들의 우상 숭배는 바벨론 포로라는 환난으로 인해 치유되었다. 이사야 시대에는 우상 숭배가 만연했다. 아하스(혹자는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아하스의 죄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와 므낫세의 가증스런 우상 숭배가 그 증거이다.
(1) 그들은 주착없이 자기들의 우상을 좋아했으며 불법적이고 부자연스런 음욕으로 불타오르던 자들처럼(롬 1:27) 우상에 대해 음욕을 피웠다. 그들은 "우상에 미쳤다" (렘 50:38). 그들은 "단 주위에서 뛰놀며 그 몸을 스스로 상하던 바알의 선지들" 처럼 (왕상 18:26, 28) 우상 숭배에 대한 격정으로 몸이 불타 올랐던 것이다. 사악한 타락심은 만족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더 불타 오른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들은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서," 야외에서, 그리고 그늘진 곳에서 자기들의 우상을 숭배했다. 그러나 그곳도 그들의 격렬한 욕망의 열기를 식혀 주지 못했고 도리어 푸른 나무의 아름다운 매력은 그들로 하여금 거기서 숭배하는 우상을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본성 속의 쾌락하는 마음은 그들을 자연의 하나님께로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내었다. 거짓된 신들을 숭배하는 그들의 열정의 불꽃은 진실한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리의 냉냉함과 무관심을 부끄럽게 해 준다. 그들은 스스로를 불붙이기 위해 애를 썼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산란시키며 냉담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숭배에 있어 야만스럽고 천륜에 어긋나며 잔인했다. 그들은 자식들을 죽여서 우상 앞에 희생 제물로 바쳤다. 그들은 기괴한 우상 숭배의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한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다른 골짜기에서, 그리고 "바위 틈에서," 어두움의 일에 가장 어울리는 어둡고 외떨어진 곳에서 자녀를 죽였다.
(3) 그들의 우상 숭배는 풍성하였고 만족을 모를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리 많은 우상이 있어도 오히려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우상에게 대한 봉사나 경비를 족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리아인들은 한 때 이스라엘의 신은 작은 산들의 신이지 "골짜기의 신" 은 아니라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왕상 20:28). 그러나 이들 우상 숭배자들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산의 신이나 골짜기의 신을 다 섬겼다.
[1] 그들은 골짜기의 신을 가졌다. 그래서 물가의 낮은 장소에서 우상을 숭배했다. "골짜기 또는 시내 가운데 매끄러운 돌중에 너희의 소득이 있다" (6절). 만약 그들이 매끄럽게 새겨진 돌을 본다면 그것이 단지 이정표나 단순한 돌로 세워져 있을지라도 기꺼이 그것을 숭배하려고 했다. 그들은 돌 많은 골짜기에 자기들의 신들을 세우고 그것을 "자기들의 소득" (원의:몫, 분깃)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분깃과 제비뽑아 얻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돌 신들은 실제로 그들 가까이에 세워져 있는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들" 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위해 보다 좋은 소득도 제비뽑아 얻은 것도 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이다. 너희는 그것을 의뢰하며 기뻐한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가 제비뽑아 얻은 것으로 인해 그 소득을 잃게 될 것이며 너희 형편은 무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예루살렘의 보석과 대제사장의 에봇을 분배받을 수 있을 때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을 취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이런 우상들을 자기들의 소득과 분깃으로 취한 뒤 어떤 비용도 아끼지 않고 그들을 섬긴다. "너희는 마치 그것들이 너희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제공하기라도 한듯 전제와 소제를 그것들에게 드렸다." 그들은 우상들을 자기 자식들보다 더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상의 제단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식탁마저 약탈했던 때문이다.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삼고 있는가? 그는 우리의 소득이요, 기업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처럼 먹고 마시는 것을 폐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심으로써 그를 섬기자. 여기에는 그들의 이러한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하신 분노의 표현이 나온다.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내가 어찌" 이런 백성에게서 "위로를 얻겠느냐?" (흠정역) 이와 같이 자신이 주신 선물로 바알을 경배하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즐거움을 얻으시며 그들의 헌물을 용납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신실한 백성들에게서 위로를 받으신다. 그러나 세상의 우상 숭배를 쳐서 증거해야 마땅할 사람들 자신이 우상 숭배에 폭 빠져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어찌 위로를 받으시겠는가? 혹자는 "내가 어찌 이들을 긍휼히 여기겠느냐?" 고 해석하며 또 다른 이들은 '내가 이들에 대해 스스로 후회해야 하겠는가?" 고 해독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처럼 나를 격분시키면서 내가 그들을 살려 주며 징벌을 연기하거나 경감시킬 줄로 기대할 수 있는가?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렘 5:7, 9)
[2] 그들은 산의 신들도 역시 가졌다(7절). "네가 (높고 거룩한 자와 직접경쟁하기라도 하려는듯이, 15절 참조) 높고 높은 산 위에 네 침상 곧 네 우상 네 우상의 신전과 제단, 네 음란한 침상을 베풀었고 거기서 온갖 방종함으로 영적 간음을 하였으며 우상에 대한 사련으로 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직접 위반하였다. 그것은 산 위에 있었지만 너희는 아주 기꺼이 그리로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함에 있어서 도달한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골짜기나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우상들을 숭배할 때 약간의 수치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런 느낌을 정복했고 우뚝솟은 산 위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얼굴을 붉힐 수도 없었다.
[3] 그들은 이것들로 만족하지 않았는지 집안 신들, 즉 lares와 Penates(로마 신화에서 가정의 수호신:역주)도 두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비망록처럼 기록해 두어야 할 문과 문설주에 우상의 기념표를 세워두었다(8절). 이것은 자기들이 우상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 보다(그들은 우상을 너무나 좋아하여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그 우상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남들에게 과시하고 자기 자식들로 하여금 그 우상들을 잊지 않게 하며 똥더미 신들에게 대한 존경심으로 이들을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4] 그들은 우상 숭배에 지칠 줄을 모르고 만족을 몰랐듯이 우상으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악행으로 마음이 강팍해졌다. 그들은 우상 숭배의 죄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 벌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처럼 중인 환시리에 공공연하게 우상을 숭배했다. 그들은 과거 하나님의 전으로 갈 때처럼 공공연하게 그리고 큰 무리를 이루어 우상의 신전으로 향했다. 참 신앙을 외면하고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이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자를 위하여 몸을 드러내는 뻔뻔스런 창기" 와 같았다. 그들은 우사에게 개종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스스로 높은 곳으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침상 즉 우상 신전을 넓히기까지 했다." "네가 네 스스로를 위해 그들의 것보다 더 크게 그것을 찍어 만들었느니라" (흠정역의 난 외주에는 그렇게 되어 있음). 그들은 아하스가 다메섹에서 단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듯이(왕하 16:10) 그들의 것에서 본따서 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이토록 우상 숭배에 홀딱 빠져 있었으므로 우상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에브라임음 맹약과 사랑으로 우상과 연합되어 있었다.
첫째, 그들은 우상과 맹약했다. "네가 그들과 언약하며 우상이나 우상 숭배자들과 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며 하나님께로부터의 배신을 계속 고수하겠다는 맹세요 결심이었다.
둘째, 그들은 사랑으로 우상과 결합하였다. "너는 그들의 침상을 사랑하였다. 즉 너는 어디서 보든지간에 우상의 신전이라면 다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기 마음의 정욕에 몰두하는 것은 당연하다.
3. 그들이 책망받고 있는 또 다른 죄는 외국의 도움과 원조를 믿고 찾으며 이방의 강대국과 수교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네가 왕에게 나아갔다" (9절). 혹자는 이것을 그들이 섬겼던 우상, 특히 '몰렉" 으로 이해한다. 몰렉이란 말은 '왕'을 의미한다. "너는 그 우상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슨 짓도 서슴치 않았고 그들의 제단에 향과 향기로운 기름을 받쳤다." 아니면 이것은 아하스가 자기 궁전으로 데려갔던 앗시리아 왕이나 히스기야 왕이 그의 사신을 달랬던 바벨론 왕을 의미할런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열방의 왕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열방의 우상 숭배에 감탄하고 그들의 우상 숭배를 배우고 모방하기가 소원이었다. 그래서 이를 위해 그 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왕래하여 수고하고 그들에 대한 지식을 증진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열방의 동맹함으로써 그들과 같아지고 강대해지고자 하였다.(1) 그들이 이 웅대한 동맹을 형성하고 획득하는 데 얼마나 비용이 들었는지 살펴보자. 그들은 "기름과 향품을 가지고" 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서 극히 큰 왕의 우호를 살만큼 대단한 존재를 보이도록하려고 이 기름과 향품을 자신의 몸에 발랐거나 아니면 그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 선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들은 큰 왕의 은총을 탐했다. 선물은 인간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며 위인들 앞으로 인도해 준다. "처음으로 실시하는 값비싼 향품이 너무 약소하게 생각되었을 때 너는 향품을 더욱 더 하였도다." 이와 같이 결국 모든 사람의 판단이 하나님께로서 나온다는 것을 잊고 통치자의 은총을 구하는 자가 많다. 그들은 이방 군주들을 너무나 좋아하여 온갖 모양을 내고 인접국가의 왕들에게 직접 갔을 뿐만 아니라 아주 멀리있는 나라의 왕들에게는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사 18:2).
(2) 그들은 이로써 스스로를 아주 비하시켰으며 자기 왕권과 국가의 명예를 티끌 속에 묻어버린 셈이다(9절). "네가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도다." 그들은 우상 숭배로 자신을 비하시켰었다. 자기 공상의 피조물이요 자기 손의 산물인 우상을 신으로 경배하며 나무 둥걸에 절한다는 것은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의 자녀로서 불명예스런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적 계시의 특권을 축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헛 것과 바꾸며 자비를 거짓된 허영과 바꾼다는 것은 더 더욱 수치스런 일이다. 그들은 자기들과 언약을 맺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방 여러 나라를 존중하고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비하시켰다. 터진 웅덩이 때문에 생명의 샘을 버렸고 상한 갈대 때문에 만세 반석을 버린 자들의 수치는 최고로 높지 않을 수 없고 최저로 낮지 않을 수 없다. 죄인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낮추는 자임을 명심하자. 죄에 대한 봉사는 불명예스러운 노예 생활이다. 이렇게 음부까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들은 응당 자기들의 몫을 거기서 받을 것이다.
Ⅱ. 그들의 죄를 가중시키는 것들.
1. 그들은 사악한 길에 있는 동안 실망하여 피곤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하도다(10절). 너는 무익하고 거짓된 것에서 진실한 만족과 행복을 찾아내려는 터무니 없는 일에 착수했다. 예배 대상으로 하나님대신 우상을 세우며 희망과 신뢰의 대상으로 하나님 대신 군주를 세우고도 보다 나아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아주 먼 길로 돌아가며 결국 목적지까지 이르지 못할 자들이다. "네가 길이 많아서 피곤하도다" (혹자는 그렇게 해독하기도 한다). 유일한 정도를 버리는 자들은 수천 개의 갈래 길에서 무한히 방황하며 자기들이 찾아낸 여러 가지 발견들 속에서 스스로를 상실한다. 그들은 새로운 추구와 맹렬한 추적으로 스스로 지친다. 그들은 "문을 찾느라고 곤비했다" (창 19:11). 소돔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죄로 인한 즐거움은 곧 포만하여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죄스런 쾌락의 추구에 쉽사리 피로를 느낄지언정 그 쾌락의 향유 속에서 안식을 느낄 수는 없다. 그들은 이것을 경험으로써 발견했다. 그들이 자주 섬겼던 우상들은 그들에게 결코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이 환심을 사고자 했던 왕들이 그들을 돕기는 커녕 괴롭혔다. 그럼에도 그들은 비참하리만치 얼이 빠져서 "헛되다" (원의:" 소망이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이토록 자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으니 피조물에게 대한 신뢰와 죄에 대한 봉사로부터 만족을 이 이상 기대한다는 것은 헛되다" 고 말하지 못했다. 피조물에게서 행복 얻기를 체념하고 죄에 대한 봉사로 만족 얻기를 단념하는 일은 올바른 행복과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행복을 얻으려고 희망하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계속하려고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기초가 확실한 행복이요 만족이다. 피조물의 헛됨에 대하여 민감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창조주께로부터가 아니면 행복을 바랄 수 없다" 고 말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2. 그들은 자기들의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달았으나 그로써 감각의 쾌락과 세상적 이익을 다소 얻었으므로 스스로 그 길에 대해 섭섭히 여길 마음이 없었다. "너는 네 손의 생명을(네 손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도다." 너는 행운이 네게 미소짓는다고 자랑한다. 그러므로 너는 에브라임이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도다(호 12:8)라고 하던 것처럼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도다." 죄중의 번영은 회개를 막는 큰 방해물이라는 데 주목하자. 죄많은 쾌락 중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며 죄많은 기획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회개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혹자는 이것을 반어적으로 또는 의문 형식으로 해독한다. "네 힘은 조성되었고 너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였겠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쇠약하기는 커녕 네 악한 길로 스스로를 축복한다. 그러나 너의 소득을 한 번 더 음미하여 이익과 손해를 견주어 본 다음에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라. "너는 무슨 열매를 얻는가? 이들은 너희가 부끄러워하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일임이니라" (롬 6:21 참조).
3. 그들은 자기들의 죄로써 하나님을 무가치하게 취급했었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너무 엄위로우신 분이었으므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들은 보다 자유롭고 흉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신들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인해 놀랐기에 거짓을 행하는가?(11절) 너는 어째서 나를 거짓과 불충으로 다루었으며 나와 맺은 계약과 내게 하는 기도 가운데서조차 네 본심을 속였느냐? 내가 너를 놀라게 하여 쫓을 만한 일을 여지껏 행한 적이 있느냐? 네가 나를 거의 생각치 않고 보다 친절한 주인을 찾으러 갔는데 내가 그럴 만한 일을 네게 행한 적이 있는가?"
(2)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존중하지 않고 그를 진지하게 주시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인해 놀랐던가?(11절)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네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하나님께 자기 본심을 속이는 사람들은 그 분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너는 나를 생각지 않았다. 너는 내가 말한 것, 행한 것, 약속한 것, 위협한 것, 또 약속이나 경고의 성취 중 어느 것도 기억하지 않았다. 너는 네 마음 가운데 그것들을 두지 않았다. 만약에 네가 나를 두려워했다면 마땅히 이런 것을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의 마음속에 그분의 섭리를 간직하지 않는 사람들은 꼭 자기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로써 나타내는 셈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부주의함으로 파멸된 자는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두려워해야 옳을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한 의도가 담긴 일을 기억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도 않는다.
(3)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을 기화로 죄 가운데서 그들은 강팍해졌다. "나는 오랫동안 잠잠하지 않았느냐? 네가 이런 일을 행했지만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므로(여기에 나오듯)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결코 처벌하시지 않을 것처럼 그들은 말한다(전 8:11). 왜냐하면 그분이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죄인은 그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고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Ⅲ.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랫동안 참으셨지만 여기서 그들을 회개자리로 부르시겠다고 결심하신다. "내가 너를 책망하겠다" (시 50:21)는 말씀처럼 "내가 너의 의를 보이리라" (12절). 너는 네 의를 자랑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네 의를 과시한다. 그러나 내가 네 자신도 당황하도록 네 의가 거짓이요, 사기요, 사이비라는 것을 보이리라. 의란 그와 같이 무엇을 가장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의가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이 의가 아닌 불의였으며 너의 모든 주장 속에는 성실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탄로될 것이다. 내가 "네 소위'를 보이리라. 네가 한 일이 무엇이며 그 일로 얻는 네 소득이 무엇인지 보이겠다. 결국 "네 소위가 네게" 아무런 유익도 줄 수 없으며 "무익하다" 는 것이 나타날 것이다. 죄스런 일을 흑암의 일이며 그 안에 의가 없는 일이듯 열매와 소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유의하자. 지금은 어떻게 보이더라도 저 다른 날에는 그 본색이 드러날 것이다. 죄는 유익이 없다. 아니 그것은 파멸이요 파괴다.
우상의 허무성 (이사야 57:13-16)
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우상들과 피조물들이 예배자와 신뢰자를 구원하고 도와주기에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보여 준다(13절). "네가 고통과 고뇌 중에 부르짖으며 너의 비참함을 슬퍼하고 도움을 구할 때 네 동무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네가 동무로 모은 우상들과 네가 크게 신뢰한 동맹군들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너를 구원하게 해보라. 그들이 주는 구원 이외에 달리는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 중에 그에게 부르짖었을 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서 너희 환난 때에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삿 10:14). 그러나 그것들에게서 바라는 구원은 헛되다.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바람이다. 그 입의 기운은 악인을 살륙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겨와 같이 만들었다. 그러므로 바람은 물론 그들을 급히 불려가게 할 것이다. 그들은 헛된 존재이다. 그들은 "헛 것" (한글 개역:기운)에 불려갈 것이다. 그들은 헛 것으로 환원될 것이며 공허는 그들의 보상이 될 것이다.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는 모두가 무로 돌아갈 것이다.
Ⅳ.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신뢰하고 구하는 모든 자를 위로하고 구원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당신께 있었음을 설명하신다. 다른 조력자에게서 위로를 구하던 자들의 희망이 좌절되고 하나님께 의뢰하던 자들의 희망은 결실을 맺음으로 하여 그들의 안전과 만족은 더욱 그 농도가 짙다. "나만 오직 나만을 의뢰하는 자는 영육간에 행복할 것이며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것이다."
1. 일반적 의미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1)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속적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선하신 손길로부터 그것을 얻을 것이며 선한권리로 그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들은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시 37:3).
(2)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자들은 신성한 이익을 획득하는 데 가장 좋은 길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 (13절). 그들은 세상에서 교회의 특권을 누릴 것이며 마침내는 천국의 즐거움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바람에도 불려가지 않을 것이다.
2. 보다 구체적 의미에서 관찰해 보기로 하자.
(1) 하나님을 신뢰하는 포로들은 해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즉 그 말씀의 사자들과 그 섭리의 모든 사역자들은 그 큰 사건에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돋우고 돋우어 길을 예비하라(한글 개역:수축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이를때에는 길이 평탄해지고 장애물은 제거되며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어려움들도 쉽사리 극복될 것이며 만사가 그들의 귀환을 가속화하고 용이하게 하도록 되어질 것이다(40:3, 4 참조). 이것은 복음과 복음의 은혜를 암시한다. 복음의 은혜는 우리가 이 세상을 통과하여 보다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 경건한 신앙의 길은 이제 돋우어져 있다. 그것은 대로이다. 목사들의 업무는 사람들을 그 큰 길로 인도하고 그들이 당면하는 좌절을 극복하도록 도와 주는 일이다. 이것은 그들이 그 어떤 것에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 "하나님을 신뢰하는 통회자는 소생할 것이다" (15절). 우상들과 피조물들을 신뢰하여 도움을 구하던 자들은 "기름과 향품" 을 가지고 갔다(9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자는 세상의 환락물과 감각적 쾌락물을 가지고 있지 못한 자들, 스스로 그런 것과 멀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음에서 밝히 드러난다.
[1] 그의 위대함과 위엄 속에서 나타난다. "그 분은 지존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시다" (15절). 이로써 우리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아주 높고 명예스럽게 고취시키도록 하자.
첫째, 그의 존재와 온전하심은 이 모든 피조물 보다 무한히 높은 찬양의 대상이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소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품을 수 있는 상상 이상으로 높으시다. 그는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난 분이시다" (느 9:5). "그분은 지존무상한 분이시다" (15절). 피조물 중에 그 분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 분과 견줄 만한 것도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이 표현은 만유에 대한 그의 절대적 지배권과 모든 것에게 명령과 심판을 내릴 수 있는 명백한 권리를 암시하고 있다. 그는 극히 높은자보다 더 높은 자이시며(전 5:8) 극히 높은 하늘보다 더 높은 자이시다(시 113:4).
둘째, 그에게는 날이 시작도 없고 생명의 종식도 시간의 변화도 없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분이시며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딤전 6:16). 그는 스스로 불멸성을 지니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불멸성을 영원히 지니신다. 그는 불명성으로 쭉 거하시며 불멸성을 박탈당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얼마동안 있다가 영원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속에서 사신다.
셋째, 그의 본성에는 무한한 정직이 있으며 그는 자신과 정확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고 자신의 모든 행위 속에서 영광을 꾸준히 의도하신다. 이것은 그가 이제까지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것에서도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분의 이름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과 알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분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네째, 그 분의 영광을 위한 특별한 장소와 표현은 빛과 축복의 저택 속에 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산다(15절). 나는 이것을 모든 세상 사람에게 알게 하겠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늘에 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관한 이런 위대한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경외하게 하며 그 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격려하고 그의 긍휼한 겸손을 찬양하게 한다. 비록 그는 이와 같이 높지만 비천한 자들도 존중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늘을 올라타고 계신 분이 "가난한 과부와 고아" 를 위하여 몸을 굽히신다(시 68:4, 5).
[2] 그는 은혜와 자비로써 비천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의 모습을 똑 바로 주시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품으신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세상에서 비록 천하고 가난하며 사람들에게는 멸시받고 짓밟힘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간과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들의 마음의 특질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는 환난 중에서 자기들 스스로 환난에 순응하여 마음 밑바닥에서 고통을 느끼는 자들을 자비심으로 존중하실 것이다. 아무리 천하고, 아무리 슬프고 심하게 다쳤을지라도 참으로 죄를 통회하며 죄 때문에 남몰래 애통해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이런 죄로 하나님께 역겨운 존재가 되었다면서 그의 모든 책망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은혜스럽게 그들을 아문하실 것이며, 말씀과 영으로 그들과 친숙하게 교제하실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과 대화하듯이 하실 것이다. 그분은 항상 그들 가까이 계실 것이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가장 높은 하늘에 사시는 분이 가장 낮은 마음 가운데 사시며 확실한 영원 속에 거하시듯 확실한 신실성 속에 거하실 것이다. 그는 이런 자들을 즐거워하신다.
둘째, 그분은 그들의 마음과 영을 소생시킬 것이며, 그들에게 그점을 말해 주실 것이며 말씀과 은혜의 영으로 그들 속에 역사하실 것이다. 말씀과 은혜의 영은 기절해가고 있는 사람에게 강심제처럼 그들을 소생하게 할 것이다. 그분은 그들의 영혼에 상처를 준 모든 슬픔과 두려움을 매꾸기에 충분한 기쁨과 희망으로 소생시켜 줄 것이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거한다. 그의 임재는 소생시키는 현존이다.
(3) 그와 다투는 자들도 만약 그를 신뢰한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며, 그의 은총 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분은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다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16절). 하나님의 다툼만큼 한 영혼을 많이 통회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논쟁을 그치시는 것보다 소생을 많이 시키는 것도 없다.
[1] 여기에는 은혜의 약속이 나오고 있다.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노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는 그를 노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그들과 절대로 다투지 않으신다는 약속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그가 그들과 절대로 다투지 않으신다는 약속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계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그가 영원히는 다투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항상 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는 쉽사리 화내는 분이 아니듯이 그 화가 오래 가지 않는 분이시다. 그는 항상 꾸짖지만은 않으실 것이다. 비록 그분이 죄에 대한 자각을 위해 그들과 다투시지만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굴종시키는 정신 대신 양자로 삼는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찢으셨으나 징계가 항상 지속할 것은 아니며, 오래 계속되지도 않을 것이고 필요 이상으로 오래 계속하지도 않을 것이며(벧전 1:6)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계속되지도 않을 것이다. 징계 업무가 끝날 때까지만 계속될 것이다. 비록 그들의 전 생애가 비참할지라도 그들의 종말은 평안할 것이며 그들의 영원도 그러할 것이다.
[2] 매우 동정적인 고려가 나온다. 약속은 아주 동정적 정실 참작을 근거하고 있다. "만약 내가 영원히 다툰다면 비록 내가 그 영을 만들었을지라도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16절). 다음을 주의해 보자.
첫째, "하나님은 모든 영의 아버지시다" (히 12:9). 그분이 항상 다투지는 않으시겠다는 사람들은 그분이 만든 영혼들이며 창조로써 그 존재를 부여하시고 갱생으로써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영혼들이다.
둘째, 여호와께서는 몸을 위해주시기도하시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자기 백성의 영혼에 있으시다. 영혼이 곤비하지 않고 은혜와 위로 가운데 있도록 관심을 가지신다.
세째,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할 때 선한 사람들의 영혼조차 타락하기 쉽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혹한 분이라는 생각에 시달리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 헛된 것으로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포기하기 쉽고 또한 구원을 절망하기 쉽다. 바로 그때 영혼은 곤비하게 된다.
네째, 하나님이 영원히 다투지 않으시는 것은 이 점을 고려하시고서이다. 그는 자기 손의 일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며 그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헛되이 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허약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육체이며 육체는 약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시 78:39).
하나님의 크심과 겸손하심 (이사야 57:17-21)
이스라엘 백성은 여기서 특정 개인으로 지칭되고 있다(17,18절). 그러나 이것은 둘로 구분되어 서로 다르게 취급되고 있다. 한 경우는 평강이 약속되는 평강의 아들들로 언급되고(19절) 다른 경우는 평강과 관계없는 악인으로 언급된다(20,21절). 다음을 살펴보자.
Ⅰ. 이 백성이 죄때문에 당하는 정당한 질책.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다" (19절). 탐심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행해지는 죄였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다 탐나함이니라" (렘 6:13). 우상을 숭배하지 않던 자들도 영적 우상 숭배에 도취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것이 탐욕이다. 탐욕은 돈을 신으로 만든다(골 3:5). 이스라엘 파숫군들의 탐욕이 널리 알려진 때 백성의 탐심쯤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56:11) 그들은 비록 탐욕스러웠지만 우상을 섬기는 일에는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6절). 그러나 그들이 우상 숭배에 낭비한 것과 모든 것에 탐욕을 품었다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을 더 노엽게 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하여튼 하나님께서는 다른 죄보다 이 불의 때문에 그들을 노여워하셨고 그들에게 이런저런 심판을 내리시다가 급기야는 갈데아인에 의한 멸망을 보내신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분개하시고 좋지않게 생각하신 점은 자기에게 구별되고 바쳐진 백성이 완전히 세상에 빠져서 세상을 자기 분깃으로 택했다는 것이었다. 탐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매우 분노케 하는 죄악이다. 탐욕은 마음의 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신다. 그리고 그것을 미워하시며 질투로써 그것을 바라보신다. 왜냐하면 탐욕은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경쟁자를 옹립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탐심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를 축복하는" 죄이며(시 49:18) 그들의 이웃이 축하하는(시 10:3) 죄다(시 10: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혐오하신다.2. 하나님께서는 그를 쳤고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탐심을 책망하셨으며 섭리로 그를 징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탐닉하고 갈구하고 탐하던 대상으로써 그들을 징벌하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노여워하시는 자들을 치신다. 탐욕은 특별히 사람들을 하나님의 분노의 표적 아래 두는 죄이다. 이 세상 재물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바로 재물에서 실망을 느낄 것이며 재물로 쓰라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길을 방해하거나 저주로 변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러한 질책 아래에 처해 있을 때 그로부터 자신을 숨기셨다. 그러나 그에게 계속해서 노하셨다. 만약 우리가 채찍으로 징계를 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낸다면 우리는 보다 잘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치시고 우리로부터 자신을 숨기시며 선지자도 보내시지 않으시며 우리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씀도 주시기 않고 우리들에게 선을 위한 어떤 표시로 보여 주지 않으시며 "그분이 찢고 멀리 가버렸다면" (호 5:14) 우리는 아주 비참한 존재일 것이다.
Ⅱ. 이런 질책 하에서도 그들은 완고하며 징계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17절). 그는 자기의 악한 길로 갔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노여움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회초리의 아픔을 느꼈으나 그 회초리를 쥔 손은 전혀 주시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것의 추구에서 장애를 느끼면 느낄수록 더욱 더 열렬히 세상 것을 원하였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보려고 하지 않거나 아니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탐심은 그 마음의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이었고 열중하는 것이었다. 그는 개심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려 했다" (대하 28:22).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분노에도 불구하고 제길을 가려는 타락한 마음과 죄의 능력을 유의하라. 만약에 하나님의 은총조차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환난 역시 인간들을 개조시키기에는 여간 부족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자.
Ⅲ.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자비로 그들에게 돌아오신다.
1. 그들 중 대다수는 계속 패역한 길로 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완고함을 애도하던 자들도 약간 있었다. 이 소수의 사람을 의식하셔서, 아니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실 것을 결심하신다. "사특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자신의 거스림을 보일 것이며" (시 18:26).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도 대항하실 것이다" (렘 26:24). 여기서 이 죄인이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어야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나는 그의 길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그를 멸망시킬 것이며 포기할 것이며 영원히 더 이상 그와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자비와 은총은 너무나 풍부하여 심판을 이기고 이렇게 기뻐할 정도다.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람의 악함을 이용하여 그 인자를 더욱 혁혁히 드러내신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는 더욱 풍성하다. 하나님이 자비로와야 한다는 논리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우리에게서는 노엽게 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길들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를 고쳐 줄 것이다" (18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얼마나 악한가를 아셨지만 그들을 버리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 방법을 관찰해 보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며 그 다음에는 평화를 주실 것이다. "나는 그의 길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스스로는 결코 나에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돌아서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쌓아두신다. 이는 즉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능한 한 빨리 빠져나오려고 했던 그 자비를 예비하시고 그들로 그 자비를 받기에 합당하도록 만드신다.(1) 하나님께서는 그의 타락과 사악한 성질을 치료할 것이다. 또한 비록 탐심이 가장 마음속 깊이 뿌리박히고 그의 마음은 욕심많은 행동을 너무나 오랫동안 해왔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탐심을 치료할 것이다. 전능하신 은혜가 정복하지 못할 영적 고질병은 없다.
(2)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악을 그만 두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있는 것을 고칠 뿐만 아니라 건전한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그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지시하신다. 그는 사울과 같이 패역한 길로 간다. 그는 위협과 살륙의 숨을 헐떡이며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마음을 주셔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몰수되고 잃어버렸던 그러한 위로들도 그에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그는 자기가 그토록 예비해 두었던 자비와 위로를 돌려주실 것이다. 바벨론 포로들에게는 놀랄 만한 개혁이 있었다. 또한 그들을 위해 이루어진 놀랄 만한 구원이 있었다. 그것은 애도자들 즉 그들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와 예루살렘 성전의 폐허에 대하여 울었던 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 애도자들에게는 자비가 가장 안락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성취하심에 있어 이들 애도자들을 의식하신 것이다.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위로는 그들에게 속하는 것이며 그들은 위안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갈 때 일부는 선한 무화과 극히 좋은 무화과였으나 다른 자들은 극히 악한 무화과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포로 생활은 그에 따라 자기의 유익이 되거나 해가 되었다(렘 24:8, 9 참조). 그들이 포로에서 풀려 나왔을 때 그들 중 약간은 선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악했다. 그러므로 구원(해방)도 그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유익이 되나 다른 이들에게는 해가 되었다.
(1) 선한 자들에게는 포로 후의 귀환이 평강이었다. 그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실 평강의 예표요 증거였다. "나는 입술의 열매를 지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1] 하나님께서는 찬미와 감사의 제목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입술의 열매이기 때문이다(히 13:15). 또한 그것은" 입술로 대신한 수송아지다" (호 14:2). "나는 입술의 열매를 창조했다(원의:창조하다)." 창조란 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는 자를 위해 찬송거리를 만들어 주시는 것은 실로 무(무)보다 더 못한 것에서 창조하시는 셈이다.
[2] 이것을 위해 평화가 반포될 것이다.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19절).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말한다. 그는 비록 그들과 다투었을지라도 화해를 하실 것이며 논쟁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 양심의 평화를 말해 준다. 포로 생활 중에 받던 여러 가지 양심의 가책과 정신적 동요 대신 경건한 안전감과 마음의 평정이 올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열매와 새로이 감사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신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우리는 그 분에 대한 찬양을 말해야 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것이다. 오직 그 분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평강은 그 입술을 열매다. 그 분이 그것을 명한다. 평강은 목사들의 입의 열매이다. 그 분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사 40:1). 그것은 설교하고 기도하는 입술의 열매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입술의 열매다. 그의 입술은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는 먼 데 있는 자에게 오사 평안을 전하셨다(엡 2:17). 그는 가까이 있는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그 당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자들에게도 그 당시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시간적으로 멀리 있는 자들에게도 평안을 전하셨다.
(2) 사악한 자들은 나머지 사람과 함께 돌아올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평강이 없을 것이다(20절). 악인은 바벨론에 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어디 있든지간에 자기 자신의 불안을 안고 다닌다. 그는 마치 요동하는 바다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평강을 선포하신 자들을 고치셨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19절).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될 것이며 바로 놓일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위로의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폭풍 속에 있는 바다와 같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극복되지 않는 부패심을 갖고 다닌다. 그들의 부패한 마음은 치료되지 않고 정복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욕과 욕망은 그들을 요동하는 바다처럼 만든다. 그들의 마음은 안정을 얻지 못하며 주위의 모든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도 불안하고 시끄럽고 위험하다. 영혼의 매서운 열기가 무례하고 욕하는 언어를 토설할 때 거친바다는 오욕과 오점을 솟구쳐낸다.
[2] 그들은 평화롭지 못한 양심을 지니고 다닌다. 그들은 죄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즐길 수 없다. 그들이 안정된 것처럼 보일 때도 실상은 불안 속에 있다. 그들이 즐거운 것처럼 보일 때도 실상은 우울에 쌓여 있다. 그들은 마치 '가인'처럼 항상 요동하는 땅에서 살고 있다. 양심의 공포는 그들의 모든 즐거움을 교란시키며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낸다. 설사 현재 이런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지자는 전에도 말했던(48:22) 것을 여기서 반복하고 있다(21절).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악인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없으며(범죄를 계속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기에) 마음속에 평정도 만족도, 어떤 진정한 이익도 없고 사망시에는 평안도 없다. 이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하나님의 말씀" 이었다. 죄를 허용하는 자에게 평강이 없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온 세상 사람들이라도 이 말을 취소할 수는 없다. 악인은 평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