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이사야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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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이스라엘의 놀라움 (이사야 22:1-7)

이 예언의 명칭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이상(異像) 골짜기에 관한 경고" 라고 했다. 모든 여건이 잘 들어 맞는다. 예루살렘은 골짜기라 불리우기에 매우 알맞다.

왜냐하면 산들이 그 둘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다땅은 비옥한 골짜기가 많았다. 그것들은 우뚝 솟은 산같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낮아질 것이다. 갈아앉고 무너져내려 골짜기처럼 음침하고 더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상(vision) 골짜기" 라 불리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알려지셨고, 그의 이름이 존귀케 되었으며, 거기에서 그 예언자들이 이상(환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고, 거기에서 그 백성들이 그들의 하나님이시며 왕이신 자가 그의 성소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벨론은 하나님께는 이방인이었으므로, 비록 부유하고 클지라도 "해변의 광야" 라 불리웠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신탁을 맡았기 때문에 "이상의 골짜기" 라 불리우고 있다. "그들의 눈은 복이 있나니, 보게 되리라." 그리고 그들에게는 선견자의 직책을 맡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복되다. 성서와 사역자들이 있는 곳이 곧 이상 골짜기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합당한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 가 있는데, 그것은 우울한 경고이다. 교회의 특권도, 그것이 이용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케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내가 지상의 모든 족속들 중에서 너희만 알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벌하리라" 고 하셨다.

이상 골짜기는 특별한 경고를 받고 있다. "너 가버나움아" (마 11:23)라고 했다.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일수록, 그들이 그 은총을 남용했을 때는 내리는 판결이 더 무거워진다.

"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 는 그 골짜기를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지 않고, 산헤립에 의한 공격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헤립의 공격에 대한 예언을 10장에서 보았다. 또 이것은 36장의 이야기와도 부합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여기에 다시 예언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앞장에서 예고된 그 많은 이웃 나라들의 황폐함은 앗수르 군대가 묵과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이것을 알게 하라. 즉 그 잔이 돌아가다가 이제는 예루살렘의 손에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에게 치명적인 잔은 아닐지라도, 전율 잔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하라.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예고되어 있다.

Ⅰ. 그 성읍은 산헤립의 군대의 접근에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라 했다. 예루살렘은 늘 소란하던 큰 상업 도시요, 사람들이 사업상 들끓었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대상업 도시는 언제나 큰 소란스러움이 있다. 또한 즐겁게 흥청거리는 성읍이었다. 인간의 분요함과 유쾌함이 있는 광장은 소음의 장소이다. "그러나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와 거래소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없어지자, 네가 지붕 위에 올라가(1절) 침묵과 고독 속에서 슬퍼하거나 그 대적으로부터 네 자신을 도사리거나, 아니면 너를 구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 오는가, 그 대적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기 위해 밖을 살피게 되리라!" 사업이나 운동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마치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처럼(두려움으로) 즐거워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거의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 그들의 쾌락에 물을 끼얹고 그들의 사업을 중지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밤을 세워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같이 되게(시 102:7)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예루살렘이 이러한 경악에 잠기는가?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은 아니다" (2절).

1. 그들은 기근으로 죽은 것이다(혹자의 풀이대로). 왜냐하면 산헤립의 군대가 그 나라를 황폐케 하고 땅의 소산을 멸했기 때문에, 양식이 딸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건강상 좋지 못한 것들을 먹지않으려 했던, 아주 가난한 빈민층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을 것이다.

2. 두려움으로 죽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비록 죽임을 당한 자가 없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매우 낙심하여 마치 그들이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두려움에 찔린 것같이 보였다.

Ⅱ. 유다 관원들이 불명예스러운 도망을 한다. 그들은 멀리 도망할 것이다. 마치 결의라도 한 듯이 각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했고(3절), 그들이 마땅히 돌보아야 할 각자의 성읍들을 앗수르 군대의 먹이로 남겨 두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다. 그 앗수르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만나지 않고서,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쉽게 취하였다" (36:1).

이 관원들은(문자 그대로 보면) "활로부터 결박당하였다." 그들은 비겁자들 같이 자기의 성읍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거기에서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극도의 혼란과 소요에 의해 손이 결박되어, 활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떨었다. 그러므로 활을 당길 수 없었다. 하나님은 얼마나 손쉽게 사람들의 기를 꺾으실 수 있으며 얼마나 확실하게 두려움이 그들의 기를 꺾는가를 보라. 그 때에, 그 두려움의 잔학성이 그친다.

Ⅲ. 이것은 그들 중에 있는 신중하고 지각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큰 근심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 예언자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이사야는 자기 생전에 그것을 보았고, 그의 백성의 자손들과 함께 그들의 슬픔을 함께 당하기로 결심했다(4, 5절). 그는 자기의 슬픔을 표명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다가 자기에게서 눈을 돌릴 것을 명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슬픔에 내어 던지고 그 속에 빠져 몰래 울 것이나, 괴롭게 울 것이며, 그 누구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은 집요한 것이며, 그는 그 고통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슬픔의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한 예언자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닐 때에는, 잃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고 역경에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슬픔은 "그의 딸 백성(영문:그 백성의 딸들)" 이 파멸함을 인한 것이다. 공적 슬픔은 우리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분요와 밟힘과 혼란의 날" 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를 괴롭히고 짓밟으며, 우리의 친구들은 당황하며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 방도를 알지 못한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 이상 골짜기와 다투고 계신다. 그 원수들은 파성추(破城鎚)로서 그 성벽을 훼파하고 있으며 우리는 헛되이 그 산들에게(원수를 막기 위해, 또는 우리에게 무너져 내려 우리를 덮어 버리게 하기 위해) 부르짖거나 산너머 우리에게로 오는 도움을 바라거나 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 같이 산에게 우리의 쟁변을 듣고(미 6:1) 우리와 우리를 해하는 이웃들 사이를 판단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Ⅳ. 거대한 수효와 힘을 지닌 대적이 그들의 나라를 침입하고 그들의 성읍을 포위할 것이다(6, 7절). 엘람(즉 바샤) 사람들은 화살이 가득한 전통과 전사들의 병거와 마병들을 이끌고 온다. 기르(즉 메대) 사람들은 그들의 무기를 검열하고 칼을 칼집에서 빼내며 모든 전투 준비를, 예루살렘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다. 그 때에 양떼로 옷입고 곡식으로 덮이곤 했던 예루살렘 주변의 정선된 계곡들은 전투병거로 가득할 것이며 성문에서 "마병은" 모든 식량의 유통을 막고 그들의 길을 강행하기 위하여 "정렬될" 것이다. 이러한 군대로 사방이 포위된 성읍의 상황은 어떻겠는가!

 

22:2 없음.

 

22:3 없음.

 

22: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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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없음.

 

22:7 없음.

 

22:8

하나님의 자비를 거역한 자들 (이사야 22:8-14)

본문 서두에 "유다에게 덮였던 것이 벗겨진다" 라고 한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유다의 울타리를 치고 있던 성읍들은 그 나라에서 덮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성읍들을 앗수르 군대가 빼앗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은신처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온 나라가 약탈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유다의 연약함, 곧 그 벌거벗음과 자기 방위에 대한 무능력이 이제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유다에게 덮였던 것이 벗겨졌다고 할 수 있다. 잠겨 있었던 그 탄약고와 창고들은 공적 일을 위해 열려졌다. 라이트 푸트 박사(Dr. Light foot)는 그것에 대한 다른 의견으로서, 유다가 처하게 될 이 환란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감추인 것을 드러내시고자(즉 그들의 위선을 털어 놓으시고자) 하셨다고 한다. 이와는 다른 경우에 히스기야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대하 32:31) 그들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보이시고자 하셨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확신(9절)과 그들의 세속적인 방심(13절)을 드러내었다. 이와 같이 어떤 방법에 의해서든,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날 것이다" (호 7:1).

그들은 이제 큰 놀라움 속에 빠져 있다. 이 놀라움을 통해 매우 잘못된 두 가지 사실을 명백히 드러냈다.

Ⅰ.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들을 돕는 하나님의 능력을 크게 명시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비난 받는 것은 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이런 행위를 하는 중에 그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사실을 주목해 보자.

1. 그들이 그들의 안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모든 이점들을 이용하는 데에 얼마나 용의주도했는가! 산헤립이 성벽이 뚫린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은 포도원에 있는 오두막 같이 홀로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때야 말로 예루살렘을 돌아볼 때라고 생각했다. 협의회, 참모 회의가 즉시 소집되었다. 그리고 나약하게 항복하지 말고 방어하자고 결의되었다. 이 결의에 준하여 그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신중한 방법을 다 썼다. 만일 위험시에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1) 그들은 그들이 무기와 탄약이 잘 저장되어 있는가를 보기 위해 탄약고와 창고를 검사했다. "그들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다" 고 했다. 이것은 솔로몬이 병기고를 위해 예루살렘에 지은 것으로(왕상 10:17), 거기에서 필요한 것을 내어다 썼다. 평화시에 전투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두는 것, 즉 무기들을 꼭 사용해야 할 때, 또 긴급한 비상 사태 때에 무기를 구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준비하는 것이 방백들의 지혜이다.

(2) 그들은 요새들, 곧 "다윗 성의 무너진 곳" 을 살폈다. 그들은 그 성벽 둘레를 돌아다녔고 적절한 때에 수리되지 않아 붕괴되거나 이전의 어떤 공격에 의해 깨어진 곳을 살폈다. 무너진 곳은 많았다. 그들이 다윗성을 소홀하게 내버려 둔 것은 다윗의 집에 대한 더 큰 수치였다. 그들은 아마도 자주 그 무너진 곳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것을 보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깊이 생각했다. 다 같이 당하는 재난을 통해서, 우리는 각성하여 우리의 "무너진 곳을 수리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좋은 기회를 찾아야 한다.

(3) 그들은 그 성읍의 물을 확보해 놓고, 포위한 자들에게서 물을 빼앗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썼다.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았도다" 고 했다. 아마도 아랫못에는 큰 저장소가 없었으므로, 물을 절약하기 위해 더욱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 같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보다 더한 필수품이 없는 것처럼, 그것보다 더 싸고 흔한 것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긍휼인가를 보라.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그것이 희귀해질 때는, 정말 불행한 때이다.

(4) 그들은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여," 집집마다 그 공공의 사업을 위해 사람들을 보내거나 돈을 기부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과 집에서 인두세로 비용을 모았던 것이다.

(5) 개인의 재산이 그 공적 안전을 위해 받쳐져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길을 방해하는 집들은 성벽을 견고케 해야 할 때에 헐렸다. 필요한 경우에 이처럼 집들이 헐리우는 것은 불이 난 경우에 폭파되는 것보다 그 주인에게 더 손해를 주지는 않는다.

(6) 그들은 그 성읍을 더 안전케 하기 위해 안팎의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옛 못의 물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고안해 내어, 자기들에게 물이 풍족하게 하고 포위자들에게는 물이 없어지게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앗수르 군대가 "와서, 많은 물을 얻지" (대하 32:4) 못하도록 하고, 따라서 더 이상 그 포위를 연장시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굶어 죽게 하기 위해서, 그 나라의 식량을 차단시키는 것이 합법적이라면, 그러한 목적으로 수로를 바꾸는 것은 더욱 합당하다.

2. 그들의 이 모든 준비에서 하나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너희는 이 일을(즉, 너희가 그처럼 방어하기에 열심인 성읍, 예루살렘을) 하신 자(maker)를 앙망하지 아니하였다." 또한 자연이 방어책으로 제공해 주는 모든 혜택 -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렀다" (시 125:2)과 자기들의 편익을 위해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그 강을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기억하자.

(1) 그 예루살렘을 만들고, 그 계획 가운데 오래 전에 구상하신 자는 하나님이시다. 이 장소와 관련해서, 유대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그가 세상을 만드셨을 때 안중에 두신 것을 의미)에 만드신 일곱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에덴 동산, 율법, 공정한 것들, 이스라엘, 영광의 보좌, 예루살렘, 그리고 메시야 왕" 이다.

복음의 교회도 하나님을 자기의 조물주로 모시고 있다.



(2) 우리가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위해 행하는 또는 행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예루살렘을 만드신 분 하나님을 주목하고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나쁘게 여기신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망을 받고 있다.

[1]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견고케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성읍이 부요한 성읍이고 자기들의 집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지, 그 성읍이 거룩한 성이고 하나님의 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교회를 방어하려는 우리의 모든 배려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권익보다는 하나님의 권익을 더욱 마음에 두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의 노력에 대한 축복을 얻기 위해 그를 의지하지 않았고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을 위해 그를 찾지 않고 그들의 힘과 계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히스기야 자신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왕하 18:5), 특히 이러한 경우에(대하 32:8) 그러하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주위에는 주요 정치가들과 군인들이었으나 거의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던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그들은 그들의 성을 견고케 함이 있어서 "옛 못의 물" 로부터 그들이 얻은 혜택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 못의 물은 기손강이 "옛강" 이라 불리운 것처럼(삿 5:21), 옛적부터 경영되었던 것이다. 자연 가운데 있는 그 어느 것이 언제고 우리에게 유용하든지 간에, 우리는 그 속에서 자연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의 하나님은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셨을 때, 그렇게 되기에 적합하게 만드셨고, "이 날까지 그의 규례에 따라서 계속되게" 하셨다. 각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대로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소용이 있든지 간에 우리는 "이 일을 경영하신 자를 존경" 해야 한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를 송축하고, 그를 위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Ⅱ. 그들과 다투시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정의이나, 그들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12-14절).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들에게 이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그들을 겸손케 하기 위한 것이요, 그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진중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곤경과 압제와 혼란이 있는 그날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으로써 "통곡하며 울라고 명하셨다." 즉 온갖 슬픔의 표현을 다하라고 했으니 심지어는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따라" 고 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죄를 탄식하고(죄가 그들의 땅에 심판을 초래했다) 그들의 기도를 시행하며(기도는 그들에게 엄습하는 그 심판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밑에서 마음의 거룩한 신실함과 온유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개혁할 마음이 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예언자들로 하여금 그의 섭리를 설명하고, 또 그들로 하여금 그의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존중하도록 일깨우는 그의 섭리로써 그들에게 이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심판을 경고하실 때에는, 사자가 부르짖으면 우리가 겁을 내듯이, 환란날에 우리에게서 우리의 자신을 당신의 전능한 손에 굴복시킬 것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거슬러 행했는가?(13절)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하도다." 유쾌히 주연을 베풀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환락과 즐거움을 누리자 하도다. 그들은 마치 그들의 국경에 아무런 대적도 없고 대적의 수하에 떨어질 위험도 없는 것처럼, 예전대로 방심 상태에서 유쾌히 지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위해 놓고 나서는, 모든 죽음과 위험들을 무시하고 무엇이든 올테면 오라는 식으로 유쾌하게 지내기로 작정했다. 애통해야 했던 자들이 "술을 즐겨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 (잠 23:20) 중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지금 처해있는 특별한 위험과 그 예언자가 주고 있는 올바른 경고를 가리키는 말이거나, 아니면 인생 자체가 보편적으로 짧고 불확실한 것이며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사신들을 조롱하고 그의 예언자들을 학대하던" 불경스러운 조롱자들이 하는 말이다.

(1) 그들은 죽는 것을 조롱했다. "그 예언자는 우리가 곧 죽으리라고, 아마도 내일 죽을 것이니 오늘 통곡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라리 우리는 먹고 마시자. 그리하여 도살을 위해 살찔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운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맞을 수 있도록 하자.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유쾌한 것으로 만들자."

(2) 그들은 죽음 저편에 있는 미래의 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조롱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러한 상태가 없다면,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으리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5:32). 죽음이 우리의 끝이라면, 우리가 살아있을 동안 마음껏 안이하게 그리고 즐겁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해 우리를 심판하신" 다면, "마음에 원하는 길과 우리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전 11:9).

현생의 뒤에 있는 또 다른 생에 대한 실제적인 불신앙이 세속적인 방심과 육욕적인 관능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러한 것들은 "홍수가 나기까지 먹고 마시던" 옛 세상 사람들에게 그러했던 것 같이, 인류 대다수가 짓는 죄이며 수치이며 파멸인 것이다.

3. 하나님은 그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그의 분개를 그 예언자에게 알리셨다. "친히 그의 귀에 들려," 그로 하여금 지붕 꼭대기에서 선포하도록 하셨다.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 죽기까지 속하지 못하리라" 고 선포해야 한다(14절). 그것은 엘리의 집의 죄악처럼, 희생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할 죄이다(삼상 3:14). 그것은 구제책이 없는 죄요, 회개라는 최고의 구제 수단을 거부하고 그것을 효력없게 만드는 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죄를 회개하거나 용서받은 것 같지는 않다.

갈대아 역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것은 네가 두 번째 사망에 처할 때까지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거슬러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슬러 행하심을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당신도 친히 거역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22:9 없음.

 

22:10 없음.

 

22:11 없음.

 

22:12 없음.

 

22:13 없음.

 

22:14 없음.

 

22:15

셉나의 멸망 (이사야 22:15-25)

우리는 여기에서 왕실의 고관인 셉나가 해고되고 엘리아김이 영예롭게 발탁되리라는 예언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동은 왕궁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실을 여기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크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사람들에 관해 예언되었던 것을 성취시킴으로써 하나님은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더 큰 사건들에 관한 예언을 확증하시려는 의도를 지니고 계셨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와 백성들에게 공공연한 대적들인 해외의 민족들과 나라들을 위한 경고를 저장해 두시는 동시에, 그들에게 거짓된 친구이며 그들을 배반하는 국내의 개개인을 위한 경고도 저장해 두신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발적인 것으로 또한 방백들의 뜻과 기분에 좌우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는 이러한 종류의 모든 사건들 속에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손에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6, 7). 이 예언은 아마 본장의 앞 대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때에 전해졌고, 산헤립의 침입 전에 이루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셉나가 "궁을 차지하고" 있으나, 그때는 엘리아김이 궁을 차지하고 있었기(36:3) 때문이다. 그러나 서서히 하락하고 있는 셉나는 그 때 서기관에 불과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Ⅰ. 셉나의 치욕에 대한 예언이 있다. 그는 재원의 관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를 맡은 자" 라 불리우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궁을 차지했다" 고 적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그의 한없는 야망이고 탐심이었으므로, 두 개의 궁궐이나 조정에서 두 개 중요 요직이 아니고서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손에 움켜쥐고 자기 직무를 태만히 하는 반면에 그 화려함과 이익만을 전적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이기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사야갸 셉나에 대해 예언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셉나의 그릇된 처리에 관한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앗수르왕과 반역적인 거래를 하고 있었고, 그 성읍을 그의 손에 넘겨 주기로 고집했다." 아뭏든 셉나는 외국인이었고(왜냐하면, 그의 조상의 이름을 결코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된 권익에 대한 원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하스가 먼저 그를 등용시켰을 것이다. 히스기야왕 자신은 탁월한 임군이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주인들은 항상 좋은 종들을 거느리게 된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왕들이 자기들이 신뢰하는 자들을 지혜롭고 올바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개혁의 시기였으나, 악한 인간 셉나는 조정에서 자기의 자리를 확보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외의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이 행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산헤립을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였다" 고 적혀있기 때문이다(10:6).

셉나에 대한 이 메시지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그의 교만, 허영, 방심에 대한 책망(16절). "네가 여기에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느냐? 너는 얼마나 요란한 소란과 법썩을 일으켰는고! 너는 여기에서 어떤 지위에 있었는가? 여기에 누구와 상관있느냐? 너와 관계있는 어떤 친척이 있느냐? 너는 천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문출신,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filius populi - 즉 단순한 서민 출신이 아니냐? 그렇다면, 네가 네 자신을 위해 훌륭한 집을 지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집은 매우 훌륭하고 정교했으므로 석공이나 목수가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조각가의 작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은 반석을 쪼아 낸 것처럼 견고하게 세워졌고, 또한 바위처럼 튼튼했다. "아니, 네가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다" 고 했다. 그것은 그의 장엄함이 그가 죽은 후에도 남도록 만들기 위해서 한 짓과 같았다. 비록 예루살렘이(느헤미야가 매우 온정을 품고 그것을 불렀던 것과 같이, 느 2:3) "그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 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그것을 자기의 성읍으로 만들 계획을 했다. 따라서 그의 생전에 그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높이 세웠다. 교만한 맘으로 자기들의 기념비를 화려하게 세우는 자들은, 외적으로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나타날지라도 그 안에는 "죽은 자들의 유골이 가득하다" 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비석이 그 무덤(의 주인공)을 잊게 된다는 일은 가엾은 일이다.

2. 그가 몰락하고 그의 영광은 훼손되리라는 예언이 있다.

(1) 그는 곧 해임되고, 면목을 잃게 될 것이라 했다(19절).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리라." 높은 직책은 미끄러지기 쉬운 직책이다. 그리고 높은 명예를 자랑하고 그것으로 우쭐거리는 자들은 마땅히 그 명예를 박탈당해야 하며, 남을 해치는 데 쓰는 그들의 권력 또한 박탈당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그는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심" 으로써(욥 40:11),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25절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지금은 단단한 곳에 박혀 있는 못이(즉, 자기 자신의 직책이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는 셉나가)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리라." 이 세상의 어떤 직위를 단단한 곳으로 생각하거나 자기 자신이 못처럼 거기에 꼭 박혀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불확실한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짐을 고정시켰던 못이 부러질 때는, 그 짐도 떨어져 나간다. 셉나가 치욕을 당했을 때, 그를 의지했던 모든 것들도 역시 멸시를 당하게 되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는 많은 사라들이 그들을 총아로 여겨 자랑하고 신임하면서 그들에게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자들에게 짐이 되며, 아마도 그들의 무게에 못 이겨서 못이 부러져 모두 함께 떨어질 것이며, 속임으로써 서로를 파멸시킬 것이다. 이것이 상대방에게 능력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과 그들의 아첨자들이 당할 공동 운명인 것이다.

(2) 얼마 후에, 그는 그의 관직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라 했다. "장수와 같은 힘으로 여호와께서 너를 맹렬히 던지리라" (17, 18절). 혹자는 그가 앗수르 사람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서는, 그 약속을 이행치 않고 오히려 그들을 대적한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앗수르인들이 그를 붙잡아서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는 아마도 히스기야는 셉나가 배반한 것을 발견하고 나서, 그를 추방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아니면, 셉나가 그 백성들에게 미움받고 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고서, 다른 나라로 물러가서 거기에서 여생을 은둔 상태에서 초라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로티우스(Grotius)는 그가 문둥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둥병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의 손으로부터 오는 재앙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미리암과 웃시야의 경우처럼 교만한 자를 벌하는 병이었다. 그리고 셉나는 이 병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공처럼 던져저" 쫓겨났다. 권세를 가졌을 때 다른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시달리게 한 자들은 그들의 날이 쇠할 때, 그들 자신이 마땅히 어지럽힘을 당하고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못처럼 든든히 박혀있다고 생각한 자들은 공처럼 던져짐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영원히 거할 도성" 이 없기 때문이다. 셉나는 자기의 자리가 자기에게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번영만을 누릴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광막한 지경으로" 보내실 것이며, 거기에서 그는 떠돌아디닐 장소를 찾게 되나, 다시 돌아올 길을 발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곳에서 죽겠고" 그의 뼈는 그 자신을 위해 그가 직접 파놓은 묘실이 아니라 거기에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 거리를 힘차게 타고 달렸으나 지금은 그와 함께 추방되어 버린 "수레도 거기" 에서 지난날의 그의 장엄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를 비참하게 해 주며, 그를 등용한 "주인의 집," 아하스 왕실의 "수치" 를 그에게 던져 줄 것이다.

Ⅱ. 엘리아김이 승진하리라는 예언이 나와 있다(20절이하). 엘리아김은 하나님의 종이며, 그는 이미 다른 일에 있어서도 그 자신이 충성된 종임을 입증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를 높은 관직으로 부르실 것이다. 낮은 자리에서 그 임무를 부지런히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책에 아주 훌륭히 등록될 것이다.

엘리아김은 셉나를 해치거나 그를 거슬러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직책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 관직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일로 부르시면, 우리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시인하시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예고되어 있다

1. 엘리아김은 이제 국고의 책임자요, 국무총리의 자리인 셉나의 자리로 승진할 것이다. 그 예언자는 셉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21절). "그(엘리아김)는 명예의 상징인 네 옷을 입을 것이며, 권력의 상징인 네 띠를 띨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네 정권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듣는 것은 셉나에게 큰 굴욕이었을 것이며, 그것을 보는 것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요직에 앉은 자들, 특히 교만한 자들은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참을 수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이 수행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런 일을 행하려는 마음을 히스기야 왕에게 넣어 주시기를 원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등용하고 해임시키는 왕들의 마음을 인도하는(잠 21:1)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 받아야 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권력 뿐만 아니라 그 하위의 권력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옷을 입히는 여호와를 인하여, 그리고 여호와를 생각하여 위정자들에게 순복해야 한다(벧전 2:13). 그리고 "정권을 그들의 손에 맡긴" 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그 정권을 집행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치리하고 "공의를 세움" 으로써 하나님을 위해 판결해야 한다(잠 8:15). 그리고 그들은 "내가 그에게 옷을 입히리라" 는 이 약속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위탁한 그 일에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믿어도 좋다.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대로) "내가 그에게 힘있게 하리라" 고 했다.

책임과 권력의 자리로 부름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직무를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아김의 승진은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둔다는 말로써 더 잘 묘사되어 있다(22절). 아마도 그는 그의 직책의 견장으로서 그의 어깨에 금 열쇠를 달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의 외투나 의복에 수놓아진 금 열쇠를 부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은 그러한 것을 시사하고 있을 것이다.

국고를 맡게 되고 옥새가 국새 상서에게 넘겨지는 것처럼 그 열쇠가 그에게 넘겨 질 것이기 때문에,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 그리고 "무기고와 보물고" 에 접근할 수 있었고(39:2), 공공 사업을 위해 그가 합당하게 생각한 대로 거기에 있는 창고들을 주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원하는 자를 하급 관리직에 두셨고, 또한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해고하셨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고,"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는 말로 우리 주 예수의 중보자의 권세가 묘사되어 있는데(계 3:7), 그것은 바로 본문과 상관된 표현이다. 천국에서 그 나라의 모든 일들을 명령하시는 예수의 권세는 절대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제어할 수 없다.

2. 엘리아김이 그 직책에서 견고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durante bene placito 즉 기분이 좋을 동안만이 아니라 평생동안 그 직책을 맡게 될 것이다(23절).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제거되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그를 견고케 하리라" 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명예는 하나님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지속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못과" 같다. 그의 나라는 흔들릴 리가 없으며 그는 언제나 동일하시다.

3. 그는 그의 직책에서 큰 축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여기에서 그에게 부여된 그 은총을 영예롭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 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창 12:2).

(1) 그는 그의 나라에 복이 될 것이다(21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왕실의 일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공적 권익을 돌볼 것이다. 주권자들은 그들의 통치 하에 있는 자들에게 아비가 되어 그들을 지혜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즉 사랑으로 다스리고, 온유함으로 잘못된 것을 고칠 것이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며, 사람이 자기 자식들과 가족에게 하듯이 백성들에게 전력을 다해야 한다. 궁정과 도성과 나라가 서로 이해 관계로 상반되지 않고 단결되어 있어서, 조신들은 참된 애국자들이고 조정은 그 나라에 복이 되는 자들을 축복하게 될 때, 그 백성은 행복하다. 그 때에는 예루살렘 곧 왕성에 대해 아비인 자들이 또한 유다의 집에 대해서도 그와 못지 않은 자들이 된다.

(2)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이다(23, 24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를 이 큰 영예의 자리에 추천해 준, 그의 완전한 지혜와 덕은 그로 하여금 그의 집안의 영예거리가 되게 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그의 집안은 전에도 매우 뛰어났을 것이다. 이제는 더욱 이름이 나게 되었을 것이다. 자손들은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에게 명예가 돌아가게 해야 한다. 경건과 그 사람의 유용성 때문에 그 가문에 돌아가는 명예는 그 가문의 이름과 칭호 때문에 얻을 수 있는 명예보다 더욱 귀중히 여겨져야 한다.

엘리아김이 발탁되자,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오히려 그에게 의존되었다(절려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호의를 표했고 그의 형제들의 화살은 그의 화살에 절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사람에게 어떤 본질적인 가치나 우월성을 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주목하자. 그것은 단지 부속물로서 그에게 걸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에게서 곧 떨어져 버릴 것이다. 엘리아김의 모든 친척들이(아마도 그 수요는 매우 많았고 그것은 그 가문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집안의 기구들의 손잡이가 못에 걸려 있듯이 엘리아김에 의존해 있다고 한 그 비유에 준하여, 엘리아김을 "단단한 곳에 박힌 못" 으로 비유되었다. 그 말은 또한 그가 관대하게도 그들 모두를 보살필 것이며, 그 무거운 걱정거리를 담당하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항아리" 뿐만이 아니라 "작은 그릇인 종지들" 곧 그 집안의 가장 미천한 자들도 그의 도움을 입게 될 것이다. 큰 책무는 많은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짐으로 안겨지는가를 보라. 그들은 만일 자기들이 자기들의 직책에 충실하기로 작정하고 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기들에게 매어달리든 거의 생각지 않는다.

다윗 집의 열쇠를 지니신 우리 주 예수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못" 같으며,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에게 "걸려있다." 즉 그것이 그에게서 나오며 그에게 의존하고 있다. 심지어 그의 교회에 속해있는 가장 미천한 자도 그에게 환영받으며, 그에게는 그들 모두의 짐을 감당하실 능력이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매달리는 영혼은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멸망할 수 없으며, 그들의 관심이 땅에 떨어질 수 없다.

 

22:16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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