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의 복 (시편 41:1-4)
이 구절 속에서 우리가 대하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Ⅰ. 빈한한 자를 돌보는 자에게는 구조와 위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1. 우리는 다윗이 이런 말씀을 다음 두 가지에 적용시키기 위해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 그가 고난에 처하게 된 때에도 자기에게 친절하였으며 자기의 입장에 매우 동정적이었던 그의 친구들, "빈한한" 다윗을 "권고해 주는 자들에게 복을"빈 것이다. 그는 그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동정하고 염려해 주며, 자기에 대한 좋은 생각을 그대로 지니고 존중해 주는 자들을 여기 저기서 만났던 것이다. 그 반면에 그의 원수들은 그에게 너무나 무례하였고 그를 매우 학대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기에게 베풀었던 모든 친절에 대해, 특히 그들 역시 고난에 처하게 될 때에 보상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서, 그들에게 축복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대적돌이 자기에게 행한 도발은 그 친구들을 그에게 더욱 더 소중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었다.
(2) 혹은 그 자신에게 그는 자기가 불쌍한 자를 돌보았으며, 궁정에서 명예와 권세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을 때 빈궁한 자들의 궁핍과 불행을 인식하고서 저희에게 원조를 제공하였다는 자기를 위한 양심의 증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에 따라 병 중에 있는 그를 강건케 하시며 위로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다.
2. 우리는 이 말씀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더욱 일반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 약속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자비로운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 사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어떤 긍휼인가? 그것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나 그 신분 상태에 있어서, 곤궁하거나 고통당하는 자를 고려해 주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알뜰하고도 상냥하게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쓰라림을 주목하고 그들의 처지를 탐색하여,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 대한 관대한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불쌍한 자들을 지혜롭게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타인들의 빈궁과 고생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본문에서 사용된 말은 우리에게 "마스길"이 되어야 한다.
(2)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이 긍휼을 베푼다면 우리에게 약속되는 자비는 어떤 것인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설사 그가 불쌍한 자들을 구원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저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대해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며, 그들을 구제함에 있어 신중하고도 분별심있게 행동한다.)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권고 받을 것이다. 그는 정직한 자들의 부활에서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어느 무엇에 못지 아니하게 생명의 약속을 많이 받으며, 그 생명은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이고 또한 현세적 축복으로 보상되고 있는 생명이다. 빈자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은 번성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도 안전한 길이다. 그와 같은 행위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의 효과적이고도 때 맞춘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을 확고히 믿을 수 있다.
[1] 모든 환난에서. 그는"재앙의 날에 저들을 건지실" 것이니 최악의 시기에도 그들은 무사할 것이며 타인들이 휩쓸려 들어가는 재난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하심의 날에 숨기우는 자가 있다면 바로"저들"일 것이다.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들로부터 스스로를 이와 같이 구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가혹한 취급을 당할 자들과는 구별하여 대우하실 것이다. 그들이 위험 가운데에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어 살려두실 것이다. 만일 가장 훌륭한 자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생명을 일천 번이나 몰수당한 자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약탈물 대신으로 받게 된다면"그것이야말로 큰 은총으로서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저희가 보다 더 애호되리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화살이 저들 주위에 빗발치듯 날아 들 때도 저들은 보호되어 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들의 원수가 그들을 위협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저들을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가장 유력한 원수라도 위로부터 받은 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의는 인간이나 마귀들을 막론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것들의 악의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 불쌍한 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구제하고 구조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선의 중의 한 몫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특히 질병에서(3절). 여호와께서 다윗이 오랫동안 아파 누워 있던 "쇠약한 병상에서" 심신 양면으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폈다." -이것은 매우 겸손한 표현으로 병자를 간호하고 보살피는 자들의 시중을 암시하는데, 특히 아픈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고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병상을 저들에게 편안하도록 손질해 주는 것을 나타낸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병상이라면 반드시 잘 만들어졌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저의 병상 전체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다 손질하셔서 어느 부분도 편하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병상을 "돌리실"것이니(그 단어는 그런 뜻이다)이는 그것을 흔들어서 아주 안락하게 고쳐 주기 위한 것이다. 혹은 그는 병상을 건강의 침상으로 바꿔 버리실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체적 고통과 질병하에 있는 저희를 강하게 하시고 편안하게 하실 것이라고 자기 백성에게 약속하셨다. 그는 저를 이 결코 아프지 않으리라고는 약속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쇠약한 채 오래도록 누워 있거나 병으로 죽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다. 그가 약속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고통을 인내로써 견디게 하실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릴 수 있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이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몸이 고통 중에 누워 있을 때에도 영혼은 편안히 거하게 될 것이다.
Ⅱ. 이들 약속에 의해 지시받고 고무된 다윗의 기도(4절). "내가 말하기를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우리가 기도문을 기록해 주는 것은 유익한 일이니, 이는 우리가 우리 기도에서 말했던 것을 우리 행위에서 철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의 겸손한 청원.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는 엄격한 공의의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 할 줄 아는 자로서 자비에 호소하고 있다. 빈한한 자들에게 긍휼을 보였던 가장 선한 성도들조차도 하나님을 그들의 채무자로 삼지 않았으며, 그의 자비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가 매 아래 있을 때에는,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친절하신 긍휼에 위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호와여, 내 영혼을 고치소서." 죄는 영혼의 질환이며, 용서해 주시는 긍휼은 그것을 고쳐 주신다. 또한 새롭게 하는 건강보다도 이 영적인 치유를 더 열망해야 되는 것이다.2. 그의 참회의 고백.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옵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은 치료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비참한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며,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눅 18:16). 이것은 어떤 특정의 대범죄 행위와 관련을 갖는게 아니라 그의 많은 나약한 죄, 즉 그가 병으로 자기 앞에 나열하였던 나약함이 죄와, 그 결과 "내 영혼을 고치소서"하고 기도하게 만든 두려움과 전반적으로 관련된 것 같다.
사악한 대적과 하나님의 위로 (시편 41:5-13)
다윗은 그가 아팠을 때에 자기를 향한 원수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종종 호소하고 있는데, 그들의 행실은 매우 야만적이어서 그에게 슬픔을 줄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가 먹고 마실 것에 독약을 넣거나 그에게 병들 만한 것을 주거나 하는 따위의 현대에나 볼 수 있는 정도의 악함에 이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가 아플때에 저들은 그에게 무례한 짓을 가하였던 것이다.(5절). "나의 원수가 내게 악담하나이다." 그들은 이로써 그의 심령을 비통하게 하고 그의 명성을 무너뜨리며 그의 세력을 몰락시킬 심산이 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찾아보자.
Ⅰ. 다윗에게 대한 그의 원수들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1. 저들은 그의 죽음을 갈망하였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을꼬," 그와 더불어 "그의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그가 누린 생활은 안락하지 못한 불편한 생활에 불과하였는데도 저들은 그것조차 못마땅하여 다윗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가 누린 생활은 비록 편하지는 못하였으나 유용한 생활이었다. 어떤 사연으로 보더라도 다윗은 자기 나라를 최대로 빛낸 보석이었으며 그 나라의 복이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다윗을 메스꺼워한 자들이 다소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저런 자는 땅에서 없애 버려라"고 소리치면서 바울을 혐오했던 것과 같다. 우리는 어떤 자의 죽음도 원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쓸모 있는 자들이 유용하다고 해서 그들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 자체에 옛 뱀의 독액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그가 획득한 이름과 명예를 시샘하였으며,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런 명성과 명예가 그와 함께 티끌 속에 묻히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오산을 했는지 보라. 즉 그는 그의 세대에게 봉사를 한뒤에 죽었다(행 13:36). 그러나 그의 이름도 사라졌는가? 아니다. 그의 이름은 성문서 속에서 오늘 날까지 살아서 활약하며 시간의 끝까지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직한 자에게 대한 기억은 복되며" 축복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2. 그들은 그를 비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주워 섬겼다(6절). "저가 나를 보러 와서는(병자를 방문하는 것은 이웃사람이 갖는 일편의 친절심으로 언제나 간주되었으므로) 거짓을 말하나이다. 그는 우정을 가장하며, 그의 볼 일이 내 병을 슬퍼하고 나를 위로하는 것인 척합니다. 그는 그토록 대단히 불편한 나를 보게 되어 매우 안됐다고 말하며 내 건강을 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은 입에 발린 아첨이며 허위입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는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불평들을 하는데 그것은 또한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해 보건데 옛날도 오늘날보다 더 나았던 것 같지도 않다. 다윗의 친구들은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그들의 심중에는 그에게 고백한 것과 같은 애정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그것 말고도 더 나쁜 것이 있었다. 즉 그들이 그를 보러 온 것은 해를 입히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들이 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불쾌한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 그를 보기 싫은 인물로, 가소로운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자신들의 논평을 곁들여서 타인들에게 묘사하고자 함이었다. "그의 중심(마음)에 간악을 쌓으며"만사를 악의로만 해석한다. 그리고는 자기 동료들에게 가서 이 일을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말 할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렘 20:10)하는 것이다.
저들은 만약 그가 자기의 병고에 대해 심하게 호소를 한다면 그의 겁약함을 들어 비난할 것이었고, 그가 전혀 불평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의 우둔함을 들어 비난할 것이었다. 만약 그가 기도하거나 좋은 권고를 한다면 저들은 그의 말을 우수개로 삼고 그것을 "공념불"이라고 할 것이었다. 또한 만일 악인들이 그의 앞에 있는데도 그가 선을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면 그들은 이제 그가 병들었으므로 자기 신앙을 잊었다고 말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자기 악의로 불의를 모아들이는 자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3. 그들은 그가 이 병에서 절대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또 자기들이 그에게 씌운 악평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으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들은" 서로의 귀에 대로 은밀히 말하면서 "다 그에 대하여 수군거렸으니," 이것은 그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면 창피하기 때문이었고, 또 그렇게 한다면 자기들이 논박당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수군거리는 자와 비방하는 자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나쁜 자들로 간주된다(롬 1:29, 30). 그들은 그를 치려는 음모가 탄로되어 실패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근거렸다. 그들의 수근거림에는 우리가 말하는 속삭임은 조금도 없고 거짓말이 있거나 아니면 진행되고 있는 모종의 위해가 있었다. 그들 수군거리는 자들은 다윗에게 해를 끼치려고 도모하였다. 저들은 그가 속히 죽을 것이라고 단정하고서 그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 놓은 모든 방편을 어떻게 하면 파괴할 수 있을까 궁리하며, 어떻게 하면 그가 만든 모든 법안의 실시를 막고 지금까지 해 왔던 그의 모든 일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까 하고 부심한다. 다윗은 이것을 "자기를 해하려고 꾀하는 것."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바라는 목적을 획득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저들이 이르기를 악한 병(벨리알의 병)이 저에게 들었다고 하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그의 이름에 덮어 씌운 비난이 그의 명성에 달라 붙어 그것과 함께 파멸하기를 소원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저들은 Fortiter calumniari, alquid adhaerebit-즉 많은 비방을 퍼부어라. 그러면 어느 것인가가 틀림 없이 꽂힐 것이다라는 근대의 격언을 적용한 셈이다. "그가 현재 걸려 있는 병은 확실히 그를 끝장내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병은 모종의 크고도 흉악한 법죄에 대한 벌인데도 그는 자기 죄에 대해서 회개치 않을 것이고, 또 그것은 외양으로는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그가 벨리알의 자손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 병은 악한 자 곧 벨리알이라 불리우는 사탄(고후 6:15)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이들이 하는 애매한 담화 방식에 따르면) 악마적 질병이다. 그러므로 그 병은 그에게 있을 것이라. 이제 저가 눕고 그의 질환이 너무 진행하여 그가 병상을 떠나지 못할 만큼 기승을 부리게 된 이상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우리는 그를 제거하게 될 것이며 그의 애호물을 노획하여 분배할 것이다." 우리는 선량한 자들이 아플 때 그들이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자들도 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그들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는 귀하게 여겨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계 11:10).4. 그가 아주 큰 신뢰를 하였던 자 중에서 그의 원수들에게 붙어 그의 원수 중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그를 학대한 자가 특히 하나 있었다(9절). "나의 가까운 친구." 아마 그는 자기와 흉금을 털어 놓던 친구이자 나라의 총리대신이었던 아히도벨을 지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윗은 그를 배반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에게 확고한 자라도 신뢰하였으며 자기 대적을 처리함에 있어 그의 의견에 많이 의존하였다. 또한 그는 "다윗의 떡을 먹었다." 즉 다윗은 그와 절친하였고 그와 식탁에 같이 앉아 먹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부양하였고 생계를 유지시켜 주어서 은혜에 있어서나 이익에 있어서 그로 하여금 자기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궁으로부터 생계를 꾸려 나가는"자들은 "왕의 수치당함을 참아보지 못하는"것으로 생각하였다(겔 4:14). 하물며 왕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일을 어찌 행하겠는가? 그럼에도 다윗의 이 비열하고도 배은망덕한 친우는 자기가 먹었던 모든 떡을 기억치 못하고 머리를 쳐들었던 다윗을 향해 "그의 발꿈치를 들었던"것이다. 그를 버리고 도주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모욕을 가했으며, 발로 차고 그를 밀쳐내고는 대신 자기가 들어 앉으려고 하였다. 자기들에게 베푼 호의나 자기들에게 둔 신뢰를 고맙게 여기지 않는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설령 그런 자들로부터 부당한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지 말자. 다윗도 그랬고 다윗의 자손도 그러했던 것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영으로, 배신한 가룟유다에 대해 말하였다. 우리 구주께서도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한 조각의 떡을 유다에게 주셨으니, 이는 "내 떡을 먹던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요 13:18, 26)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자신은 이처럼 이기심을 품고서 솔직하지 못하게 하나님을 대하며 처신한 적은 없었던가? 우리는 매일"그의 떡을 먹으면서도" "살찌매 발로 찬" 여수룬 같이(신 32:15), "하나님께 대하여 발꿈치를 들고 있다."
Ⅱ. 다윗은 자기를 향한 그 원수들의 무례하고도 심술궂은 행위를 어떻게 견디어냈는가?
1. 그는 저들의 기대가 허사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는 저들에게 일언반구의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가 내게 자비를 베풀지 않읍니다."(10절). 다윗은 자기 죄와 관련하여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4절)란 기도를 드렸었는데 여기서 다시 그의 원수들의 모욕과 관련하여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적합한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자체에 모든 불평의 호소에 대한 시정책을 내포하고 있다. "저들은 나를 넘어뜨리려고 기도합니다만 당신께서는 이 쇠약의 병상으로부터, 저들이 내가 다시는 이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이 쇠약의 병상으로부터 나를 일으키사 나로 하여금 저희의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게 해 주소서(어떤 이는 그렇게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다윗이 행동이었기 때문이다(시 7:4; 35:13). 선량한 사람은 자기에게 해로왔던 자들에 대해 자기가 아무런 원한도 품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기꺼이 좋은 일을 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원하기까지 한다. 혹은 "나를 일으키사 내가 임금으로서 저희를 나의 정당한 불쾌의 표시 아래 두고 조정에서 추방시키며 이후로는 내 상을 저희에게 금하도록 하소서." 이것은 타인에게 대한 경고를 위해 필요하고도 정당한 조치이다. 이 기도에는 그리스도의 올리우심에 대한 예언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셔서 그와 그의 백성에게 행한 모든 잘못에 대해, 특히 유대인들에 의한 잘못에 대해 그로 하여금 공정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며, 그들은 오래지 않아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이다.2. 그는 저희의 기대가 무너질 것을 확신하였다(11절).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와 내 이익을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니이다." 저희는 그의 사망을 염원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자비를 통하여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이것은 그가 회복되는 위안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1) 그것은 자기 대적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 된다. 그들은 벼슬 떨어진 닭같이 풀이 죽을 것이며 비참할 정도로 수치스럽게 될 것이므로 저희의 실망에 대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조차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일을 가지고 스스로 불평할 것이다.
비록 우리 원수의 타락을 기뻐해서는 안 되나, 우리를 해하려는 저희 계획의 좌절은 기뻐할 수 있다.
(2) 그것은 다윗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표상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주셨고 앞으로도 계속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데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
우리가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어떤 자비로운 일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식별하게 되는 때에, 그 은총은 배가되고 더 감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3. 그는 하나님께 의존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악한일에서 그를 이와 같이 건져내셨고 복받은 바울처럼 "천국에 들어가도록 그를 구원해"주셨던 것이다.(딤후 4:18). "주의 은총의 열매로 나를 총애해 주시며 내게 대한 그 은총이 계속되도록 나를 유자격자로 만들어 주시므로, 주께서 나의 완전함 중에 나를 붙드시기 위해 주의 얼굴 앞에 나를 세우시며, 주의 눈이 영원히 내 위에 있나이다." 혹은 "주께서 주의 은혜로써 나의 완전함 중에 나를 붙드시는 고로 나는 주께서 주의 영광으로 그 얼굴 앞에 나를 영원히 세우실 것을 아나이다."(1) 평판이 높은 중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게 되는 때라도 언제든지 주요 관심은 우리의 완전성에 있어야 된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우리 명성의 보존이란 문제를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맡길 수 있게 된다. 다윗은 만약 자신의 순전성을 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자기 원수들이 승리를 거둘까봐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2)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완전성 안에 붙잡아 주시는 동안만 자기 완전을 유지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져 방치된다면 우리는 넘어질 뿐만 아니라 사라져 없어지고 말 것이다.
(3)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완전함 중에 붙드실 수 있으시며, 만약 우리가 우리 순수성의 보전을 하나님께 위임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된다.
(4)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항상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완전성을 붙들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눈은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물러 있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방황하게 될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희의 완전한 중에 붙들고 계신 자들을 자기 얼굴 앞에 영영 세워두실 것이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대면하고 그를 향유하게 하여 행복하도록 만드실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4. 본 시편은 엄숙한 찬가로, 즉"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 대한 찬미로 끝맺는다(13절). 이 구절이 본 41편에 특별히 귀속하는지(만약 그렇다면 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쳐 준다. 즉 우리가 은혜를 통하여 영광에 이르도록 보존해 주시리라는 신앙적 소망은 아무리 큰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며 우리 입을 영원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으리라는 것이다)아니면 이 42편에서 끝나는 것으로 사려되는 시편 제 1권의 결론부에 부착되는지는(시편 72편, 89편, 106편에 추가되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하지 않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우리가 알파이신 하나님을 오메가로 삼을 것과 모든 선한 사업의 시작이신 그를 그 끝으로 삼을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받는 교훈은 아래와 같다.
(1) "여호와, 이스라엘이 하나님." 즉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신으로서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위대하고 인자한 일들을 행해 오셨고 더 많고 더 좋은 것들을 예비해 두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2) 영원한 하나님이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 즉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기 존재와 축복을 가지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3) "아멘, 아멘"하고 두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끝을 맺는 일에서 시사해 주는 대로 깊은 애착심과 심령의 열성으로써 이 일을 행하라는 것. 현재에 그렇게 될뿐더러 영원무궁토록 그러하리라. 우리가 그 일에 "아멘"을 말하니, 동시에 다른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아멘"을 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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