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궤의 이동(역대상 13:1-8)
Ⅰ.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것을 경건히 제의함으로써, 왕실의 성읍을 거룩한 도성으로 만들려 했다(1-3절). 이 부분의 이야기가 사무엘에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제안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찾아볼 수 있다.
1. 다윗은 그가 훌륭하게 왕위의 보좌에 오른 즉시, 하나님의 궤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3절). 이 말은 그의 두 가지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1)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징하고 있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 경의를 표함으로써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였다. 다윗은 권력을 손에 지닌 즉시 믿음을 발전시키고 격려하는 일에다 권력을 사용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들 자신의 명예로 하나님의 영예를 풍부하게 하기를 즐기고 우리의 부귀와 권력으로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을 유익하게 하는데 관심을 지녀야 할 것이다. 다윗은 "이제 내가 어떻게 거창한 일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즐거운 일을 할 것인가?" 하고 말하지 않고 "어떠한 것이 경건한 일인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2) 그는 이 신성한 궤를 유익하고도 편안한 자리에 두려고 했다. "그것을 우리에게로 가져오자.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을 더욱 신뢰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로 해서 우리에게 축복이 내릴 수 있게 하자."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이 유익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과 상의하고 그의 율법을 자기들의 규칙으로 삼기 위해 하나님의 궤를 이 세상에서 지니고자 하는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음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더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그는 이 일에 대해 그 백성의 지도자들과 상의했다(1절). 이 일은 물론 선한 일이었고 또 왕된 그로서, 이 일을 행하도록 명할 수 있는 권세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행하려 했다. 비록 그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지만 그는 오만하게 다스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우리는 하고자 하는 일을 명할 수 있으니, 이것은 왕실의 즐거움이로다. 우리가 그렇게 하라고 명한 대로 백성들은 복종하리라" 하고 말하지 않고,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이 일의 동기가 우리 주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되거든 그 일을 행하도록 명령하자" 하고 말했다. 지혜로운 군주는 독단적으로 행하려 하지 않는다. 백성의 대표자들의 협조를 얻을 수 있을 때, 백성들의 충성은 가장 견고한 것이 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이 나라는(영국) 얼마나 행복한 나라인가!
(1) 그는 정당하고 공개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충고를 듣고자 하였다. 다윗은 그 자신이 매우 지식이 많은 자였지만 그는 그의 장수들과 의논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자들과 의논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지혜를 사용할 줄 아는 자가 정말 슬기로운 자이다.
(2) 그들의 협조를 얻음으로써 나라를 위한 일이 좀더 잘 진행될 수 있었고 또 나라에 축복을 가져올 수 있었다.
3. 그는 모든 백성들을 모이게 하여, 이 일에 참석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 궤를 영예롭게 하고 그 백성들을 만족시키며 교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2절).
(1) 그는 서민을 "형제" 라고 불러, 겸손과 겸양을(그가 출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내었으며, 백성들에 대한 온화한 관심을 표하였다. 이처럼 우리 주 예수께서도 그의 백성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다(히 2:11).
(2) 그는 그 사람들을 일컬어, 달아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라고 했다.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 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서로 흩어져야 하는 섭리 밑에 있었다. 블레셋 사람과의 싸움으로 해서 또 사울의 집으로 인해서 그들의 나라는 황폐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이 끝나 주기를 원할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심판과 현재의 자비 속에서 남은 자들은 속히 하나님을 찾자.
(3)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특별히 불러 그 궤를 받들도록 했다. 왜냐하면 궤를 받드는 것은, 특별한 법식이 필요한 그들의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리자의 직책을 맡은 그리스도인은 사역자들이 태만해 있을 때, 그들을 독려하여 그들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4. 이 모든 것은 "이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는 가정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너희와 내가 선히 여겼을지라도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면, 우리는 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우리 스스로 이렇게 물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인가? 이것이 그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 그가 이 일을 용납해 주시겠는가? 그가 우리를 인정해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5. 그들이 이처럼 지난 통치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소홀히 했던 것을 보상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다.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않았으므로, 모든 일들이 이렇게 잘못되었다. 그러니 근본적인 잘못을 바로 고친 뒤라야 우리의 모든 일들이 좀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윗이 사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사울은 그가 다스리던 끝날까지도 그 궤를 전혀 거들떠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그 앞에서 묻지 않았다" 고 일반화시켜 말함으로써, 이것을 소홀히 한 죄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기 자신에게로 돌렸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우리들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 더욱 옳은 일이다. 겸손하며 선한 사람들은 민족이 죄를 범했을 때, 그들 자신의 잘못을 통탄하고 그들 스스로에게 수치를 돌린다(단 9:5 이하).
Ⅱ. 백성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4절).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겼다" 고 했다. 이 일은 매우 선하고 합당한 일이었으므로, 아무도 이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것을 nemine contradicente-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신중하게 선한 사업을 제안하고 그 사업을 지도해 가는 자들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협력을 얻게 된다. 요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영향력으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Ⅲ. 그 궤를 옮겨오기 위한 의식이 행해졌다(5절 이하).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사무엘하 6장 1절 이하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히 다음 몇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1. 하나님의 궤는 시중들기 위해 멀리까지도 갈 가치가 있다. 백성들이 그 나라 각처에서 모여들었다. 즉 남쪽 끝부분에 있는 "애굽의 강'에서부터 북쪽 멀리 있는 하맛 어귀에 있는 자들까지(5절) 와서 이 의식을 영광스럽게 해 주었다.2. 소홀히 했던 규례가 부활되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표징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도 물론 기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믿음의 불이 암흑을 비추고 공공연히 자유롭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으며, 신앙에 대한 좋은 평판이 나돌고, 그것을 방백이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장려할 때, 그것은 모든 기쁨의 표현을 동원하여 환영할 만한 일이요, 백성들에게는 행복한 전조가 된다.
3. 오랫동안 행하지 않던 의식을 재생시킬 때에는 흔히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까지도 약간의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다윗이 그 궤를 수레에 싣는(7절) 그러한 실수를 범하리라고 누가 생각했었겠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특별한 섭리로 그것을 수레에 싣고 간 것(삼상 6:12)을 알고, 그는 그들도 역시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규칙에서 벗어난 본보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정하신 것이라도 따르지 말며, 오직 규칙대로 행하여야 한다.
법궤 모독 사건(역대상 13:9-14)
웃사에게 내려진 돌발 사건은 모든 기쁨을 중단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사무엘하 6장 6절 이하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 웃사의 죄는 거룩한 것을 무례하고 경솔하고 불경스럽게 다루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를 주고 있으며(9절), 선한 의도가 악한 행위를 정당화한다고 생각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와 친밀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느 면으로 덕을 입고 있다는 건방진 생각을 품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항상 살펴야 한다.2. 웃사에게 내린 징벌은, 우리와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님은 시기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그의 죽음은 나답과 아비후의 것과 같이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다"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레 10:3)과 하나님께 경솔히 행하는 자가 가까운 자일수록 하나님은 더욱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밝히 선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감에 있어 감히 그에게 경솔한 태도를 취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와 은총의 법 아래 있는 것이지, 속박과 공포의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중에 내려진 이 절망적인 일을 기억하여, 항상 두려워 떨려 기뻐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즐거이 그를 섬길" 때일지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4. 이 일로 인한 다윗의 분노는, 우리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있을 때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대신 그와 쟁론하는 일이 없도록 삼가 조심하라는 경고를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감히 그에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5. 이처럼 의식을 중단시킨 것은, 우리로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지 우리의 의무를 이행치 않게 하려는 경고는 아님을 깨닫자. 다윗은 웃사에게 재난이 내렸을지라도 그 일을 계속하여 그 재난을 보상했어야만 했다.
6. 오벧에돔의 집에 그 궤가 머물게 됨으로 말미암아 복이 내렸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궤는 마치 누구나 원하는 손님이라고 믿는 자들처럼 우리의 집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즐거이 맞아들이라는 것을 격려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잘못을 일으키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죄악을 범하게 하는 바위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덜 귀중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복음이 어떤 자들에게는, 웃사에 대한 경우처럼, 죽음 위에 죽음을 초래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에 생명을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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