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에게 주는 격려사(신명기 31:1-8)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우면서도 작별의 인사를 해야 하는 때가 종종 있다.
모세도 지금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그 같은 심정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로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저들을 두고 떠나면 저들이 하나님을 저버릴까 두려워하여 백성들과 헤어지기 싫어한 것이다. 그는 권면과 훈계를 통하여 저들에게 말해야 할 바를 모두 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으고 격려의 말을 저들에게 준다. 그것은 특히 저들이 이제 치러야 할 가나안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그토록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모세가 사라지리라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저으기 낙심을 주었을 것이다. 비록 여호수아가 골짜기에서 저들을 위해 계속 싸우고 있었을지라도, 출애굽기 17장 10절에서와 같이, 모세가 언덕 위에서 저들을 위해 중재해 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모세는 더 이상 출입할 수 없었다" (2절). 이 말은 모세가 심신의 쇠약에 의하여 능력 상실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력은 감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4:7). 그러나 그는 그 이상 더 자기 직분을 다 할 수 없으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의 나이가 120세이니, 그것은 자기 존귀를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일이나 자기의 안식처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인 까닭이다. 모세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시 90:10) 정상적 연수가 칠 필십이던 때에 그토록 노령에 달한 그가 자기가 차용한 일생동안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함은 당연한 일이다.2. 그는 하나님의 선고를 받았다. "너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이리하여 그의 용도는 완전히 정지될 것이다. 이제껏 그는 행해야 했으며 섬겨야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명령을 하셨고, 모세는 거기에 잠자코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왜 어떤 자들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맡기신 그 기간보다 하루라도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또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 이상은 책임 질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비록 모세 자신은 건너가서 아니 될지언정,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자들을 격려하고자 애쓰고 있다.
Ⅰ. 모세는 백성들을 격려시킨다. 그 어떤 장군도 모세가 여기서 자기 백성을 격려하는 것과 같은 훌륭한 근거 위에서 자기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키지는 못 했을 것이었다.
1. 그는 하나니께서 항상 저들과 함께 계심을 저들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다(3절). 즉 너를 인도해 내시고 지금까지 너를 지켜 주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앞서 건너 가시리라." 하나님을 자기들이 심지어 인도자로 모시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들은 담대히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강조하면서 다시 반복한다(6절). "네 주 하나님 언약으로 너의 하나님인 여호와 그가, 못하지도 아니하고 다른 자도 아닌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네 앞에 건너가신다. 그는 약속에 의하여 네 앞에 가시리라는 것을 네게 확신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재에 대한 가시적 상징인 법궤에 의해서 실제로 네 앞에 가시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부연해서 되풀이한다. "그가 너를 불러 들이시기 위하여 네 앞에 먼저 행하실 뿐만 아니라 그는 도중에서 나와 네 자손과 계속 함께 하실 것이다. 그가 너를 떠나지 아니 하시며 너를 버리지 아니 하시리라. 어떤 곤경에 처한다 해도 그가 네 기대를 실망시키지 아니할 것이요, 또 네게서 관심을 저버리지 아니 하실 터이라. 그런즉 너는 그에게 항구여일하라. 그러면 하나님도 네게 그리 하시리라." 바울 사도는 이를 하나님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믿음과 소망의 격려를 주는 말씀으로 적용한다.저들과 마찬가지로 이 복음이 우리에게도 전파되었다. "그가 과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결단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히 13:5).
2. 모세는 여호수아를 저들의 지도자로 명한다. "여호수아 그가 네 앞서 건널 것이라" (3절). 여호수아의 행위와 용기, 그리고 저들 관심사에 대한 그의 참된 애착심은 그 백성이 오래도록 경험해 왔던 바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저들의 지도자로 임명 하셨으므로 의심할 나위도 없이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고 축복하실 것이며, 그는 저들에 대한 복된 일이 될 것이다(민 27:18 참조). 어떤 유용한 인물이 떠나게 될 때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해 나갈 다른 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심은 백성에게 큰 격려가 된다는 것을 주목하자.3. 그는 저들의 성공을 확실히 보증하고 있다. 가장 유리한 이점을 차지하고 있는 우수한 장군들도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는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승리가 항상 강한 자나 담대한 자에게 가는 것은 아니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불상사가 가장 확실한 것 같던 형세를 역전시킨다. 그러나 모세는 저들이 처해 있던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확신시켜 줄 보증을 하나님께로 받았던 것이다. 겁이 많은 자들은 자기가 꼭 승리자가 된다고 확신이 자기에게 있을 때에만 싸울 것이다. 그 싸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떠 맡으신다. "그가 이 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이요." 이스라엘은 다만 전리품이 분배에 지나지 않는 일만 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 땅들을 소유할 것이다" (3절)고 했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저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킨다.
(1) 저들이 이미 시혼과 옥에게 쟁취하였던 승리이다(4절). 그로 말미암아 저들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언명하신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루실 수가 있구나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가 시작하신 것은 무엇이든 성취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경험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또 다른 한 가지의 격려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가나안인들을 멸망시키라고 내리신 명령이다(신 7:2; 12:2). 그것은 여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5절).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저들에게 행할지니라"), 그 명령으로부터 저들은 만일 저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수도록 하나님이 않으면 명령하셨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저들로 하여금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도록 그들을 저희 손에 붙이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의무를 맡기셨을 때에는 능히 그 의무를 우리가 이행할 수 있는 기회와 하나님의 도움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음을 명심하자. 그와 같이 이 모든 것을 미루어 보건대 모세는 저들에게 "강하며 담대하라" 고 명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가졌던 것이다. 저들은 자기들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으로 그들의 적 가나안의 세력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Ⅱ.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북돋운다(7,8절).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여호수아는 역전의 장군이었고, 그 용맹과 결단력은 이미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어서 많은 용감한 전투로 자신의 비범함을 드러낸 자였었지만, 모세는 여호수아가 새로운 전투의 국면에 착수하려는 이상, 그에게 담대하라고 말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우리가 때때로 경험하듯 충고와 훈계를 비난과 불명예인양 비위에 거슬려하며 받아들이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자와는 달리, 이렇게 깨우침을 당한 것이 모욕이나 자기 용맹에 대한 은근한 불신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여호수아 자신은 모세가 자기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훈계했음을 아주 기뻐하고 있었다.2.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의 목적에서" 그에게 이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목적에서 그토록 엄숙히 취임하는 여호수아를 더 잘 관찰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 백성들과 같이 그에게도 베푼 이 권고의 증인들 곧 이 백성들을 향하여 그가 그 자신을 담대함의 모범으로 삼아 보이기 위하여서 이었다.
3. 모세는 백성들에게 주었던 확신과 꼭 같이 그에게도 하나님의 함께 계심과 결과적으로 영광스런 승리를 할 것에 대해 확신을 준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이며 그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기가 부름을 받아 임무를 위탁받은 영광스러운 대업을 확실히 성취 하리라는 것이었다. "너는 그들로 약속된 땅을 얻게 하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은 번영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그들은" 담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는 용약 매진하자.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우리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귀에게 저항한다면 마귀가 도망칠 것이요. 하나님께서 곧 마귀를 우리 발 아래 밟히게 하실 것이다.
율법의 낭독(신명기 31:9-13)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1:17) 그는 율법을 그 세대에 전달하여야 할 임무를 부여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차 올 세대들에게도 전하도록 위임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는 의무에 충실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Ⅰ." 모세는 이 율법을 기록하였다" (9절). 박학 다식한 패트릭 주교는 흔히 율법이라고 불리우는 모세의 다섯 책을 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는 모세가 비록 이전에 모세 오경을 대부분 기록하였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완성하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그 성서 두루마리에 마지막 손질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특히 그것이 율법의 이 중대한 요약인, 이 율법이라고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에) 이 신명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세는 이 전권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행한 그 모든 담화들을 하나님의 영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가 이 율법을 기록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그 율법을 들었던 자들이라도 가끔 그것을 다시 보고 회상시키기 위하여.2. 그 율법이 후손에게 더 안전하게 전수되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일에 관한 가르침의 교설부터와 기록으로부터 수 많은 이익을 받았다. 믿음은 들음에 의해서 올 뿐만 아니라 읽는 데서도 생긴다.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율법에 대한 보살핌과 꼭 같이 복음에 대해서도 보살핌이 취해졌다는 점이다. 복음이야말로 전파된 직후에 문자로 기록되어서 이 세상 끝에 나타날 자들에게 까지 전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Ⅱ. 율법을 기록한 후, 모세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보살핌과 보관 하에 율법서를 맡겼다. 그는 하나의 믿을 만한 사본을 제사장들에게 주어서 법궤 곁에 두도록 하고(26절), 모든 다른 사본들을 판별해야 할 표준으로서 남기도록 하였다. 또 그는 각 지파의 장로들에게도 다른 사본을 주어서 그 지파내 모든 희망자는 다 베낄 수 있도록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혹자는 제사장들과 더불어 장로들에게 이 율법을 맡긴 것은 목회자들이 그 교리에 의해서 종교를 보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정자들도 그 권력에 의하여 종교를 보존하며 율법이 파괴되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돌보아야 할 것을 표시한다고 생각한다.
Ⅲ. 그는 매 7년마다 온 이스라엘의 총회에서 이 율법을 공개 낭독하도록 명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매일 자기 가정에서 율법을 봉독하였고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매 안식일마다 예로부터 회당에서 모세의 글이 읽혀졌다" (행 15:21). 그러나 율법을 더욱 찬미하고 존귀하게 하기 위하여 매 칠년마다 총회에서 봉독하여야만 했다. 비록 우리가 사적으로 은밀히 말씀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공중 앞에서 봉독되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모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1. 율법의 이 엄숙한 낭독은 그 때의 절기를 더 엄숙하게 했을 것이다. 율법 낭독은 다음과 같이 되어졌다.(1) 면제년(免除年)인 그 해에는 토지도 안식하기 때문에 저들이 예배에 참석할 여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던 때이다. 그 해에 방면된 종들과 그 해에 채무에서 해방된 가난한 채무자들은 율법의 은전을 입은 까닭에 그들이 율법에 순종해야 할 것과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바쳐야 할 것이 기대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인식하여야 했으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의 속박을 풀어 준 연고이다. 면제년은 복음과 은총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주의 기뻐 받으시는 해" 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우리의 속죄와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계명들을 지키도록 만들기 때문이다(눅 1:74, 75).
(2) 그 해의 초막절에 행해진다. 그 절기에는 저들이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 요구되는 시기이다(레 23:40). 그러므로 저들은 그 때에 율 법을 낭독해야 하였는데 이것은 저들의 즐거움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 이었던 것이니, 이로써 저들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저들의 역할을 삼고 율법을 기쁜 마음으로 읽게 하며 귀찮은 의무로 읽지 않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그것을 읽어 줄 대상자는 "모든 이스라엘" 이다. 곧 "남자들과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과 타국인들에게였다(12절). 여자들과 아이들은 다른 절기들에는 성소에 올라가 필요가 없었으나, 율법이 낭독되는 이 절기에만은 가야 되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명심하자. 율법은 모든 자에게 대한 규칙이며 따라서, 그것은 누구에게나 읽혀 들려 주어야 한다. 아마 이스라엘이 모두 한 장소에 모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들 모두에게 들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 뜰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고, 나머지는 같은 때에 여러 회당에 모였
으리라고 추측된다. 유대 학자들이 말하는 바로는 청중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준비하여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율법이 시내산에서 전수되던" 그 날과 같이 "두려움과 경외와 기쁨과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또 비록 "전 율법을 아주 훤히 알던 위대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크게 주의하여" 들어야 했는데, "낭독하는" 자는 "하나님과 말씀을 회중에게 들리도록 하는 사자" 였던 까닭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낭독과 설교를 듣는 자들도 이런 점을 유의해 주었으면 좋겠다.
3. 낭독을 하여야 하는 자. "너는 그것을 낭독할지니라" (11절)고 했다. 이런 목적으로 임명된 "오, 너 이스라엘" 이라고 불리는 적당한 인물, 또 최고 지휘관이었던 "오, 너 여호수아" 가 이것을 낭독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직접 그 율법을 낭독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수 8:34, 35). 요시아왕도 그리하였고(대하 34:30), 에스라도 그리하였다(느 8:3). 그리고 유대인들은 왕이(처들에게 왕이 있었을 때) 바로 성전 뜰에서 율법서를 낭독한 주인공이라고 하며, 또 그 목적으로 설교단이 뜰 한 복판에 설치되었고, 왕이 그 안에 서 있으면 대제사장이 율법서를 건네 주었고, 왕은 서서 그것을 받고 그것을 낭독하기 전에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공중 앞에서 율법을 낭독할 자는 누구든 기도하듯이). 그리고 나서는 그가 원한다면 앉아서 낭독해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급립 바왕이 하였듯이 (그렇게 전한다) 서서 낭독하면 더 훌륭한 일로 생각되었다. 여기서 내 추측을 하나 제의해 보기로 하자. 솔로몬은 그의 전도서에서 전도자라고 칭함을 얻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이 명령에 따라서 초막절에 율법을 공중에게 낭독한 후 백성들에게 그 율법서의 골자를 담화로써 전달하였던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4. 그 율법이 이처럼 엄숙히 낭독되어야 하는 목적.
(1) 당시의 세대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2절). 그들은 배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저들의 본분을 지킬 수" 있도록 되기 위하여 율법을 들어야만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의 목적을 살펴보자. 우리는 우리가 배우고 지식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듣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성서를 읽을 적마다 성서 가운데에서 배워지는 것은 계속 더욱 더 많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 위하여, 즉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일에 전심하기 위해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우리가 "그의 율법의 말씀들을 지키고 행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를 경외하는 척 하는 것이 헛된 일인 까닭에서이다.
(2) 자라나는 세대들이 일찌기 종교에 친숙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13절). 다소 알고 있는 자들은 더 알게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녀들도" 하나님을 경외함이 저들의 중대한 관심사요, 의무임을 적당한 시기에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배신의 예고(신명기 31:14-21)
Ⅰ. 모세와 여호수아는 희막문에서 하나님의 존전에 참예토록 부름을 받는다(14절). 거기서 모세는 자기가 곧 죽으리라는 말을 다시 듣는다. 가장 죽음에 대한 채비를 잘 해 놓고 기꺼이 죽으려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종종 죽음의 임박함을 상기해 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직접 나아와야만 하였다. 그 까닭은 우리의 교제를 향상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준비도 촉진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또한 여호수아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하였는데 이것은 그를 후계자로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임명과 임무를 부여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모세는 그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였다. 그는 자기 후계자들을 탐탐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그 후계자를 즐거워 하였던 것이다.
Ⅱ.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사 저들을 만나 주셨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늘 하던 대로 세키나로서) 장막에 나타나셨더라" 우리가 이 앞의 세 책 중에서는 가끔 그 세키나가 나타나심을 볼 수 있었던 것에 반하여, 이 책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세키나가 나타나는 기록은 이 곳에서만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은 훗날 복음적 율법 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처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리라고 기대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다 확실한 예언의 말씀에 주의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것이리라.
Ⅲ.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죽고 나면 이스라엘과 저들의 하나님간에 그토록 고심하여 체결하였던 계약이 정녕 깨어지리라고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릴" 것이다(16절). 우리가 믿어도 좋은 것은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파괴되는 경우 그 책임은 인간에게 있으니 그 계약을 깨뜨리는 것은 인간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종종 관찰해 왔듯이, 인간들이 먼저 하나님을 저버리기 까지에는 결코 하나님이 먼저 어떤 자를 버리시지는 아니하시는 법이다. 가나안인들의 잡신들을 경배하면(이 가나안인들은 그 땅의 원주민이었으나 후에는 그 땅의 이방인들로 취급되게 된다.) 그것은 정녕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니, 마치 간음과 같이 계약 파괴로 간주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넘치는 탐심으로 인하여 돈을 저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나 저들을 지배하는 색욕으로 인하여 배를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반역하는 무리들이요, 곧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신들을 좇는" (18절) 자들은 저들의 본래적 자비를 저버린다. 이러한 저들의 배신은 그들의 번영의 결과일 것으로 예언되고 있다(20절). "저들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이것은 저들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먹는 것이 저들의 목적하는 전부이고, 그리고 나면 그들은 살찌게 될 것이고, 안일에 빠져 육욕에 들뜨게 될 것이다. 저들의 태평함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외감과 하나님의 율례를 잊어 버리게 하고, 저들의 육욕은 저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로 향하게 할 것이니, 이것은 "육체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육체의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모든 악행을 명백하고도 절대 확실히 예견하고 계시며, "아주 패역하게 행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 48:8) 자들과도 종종 계약을 맺으셨으며 아주 배은망덕하게 행할 줄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들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2. 그러나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이다. 그토록 부당하게 하나님을 버린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야 한다. "나의 분노가 그들에게 불살라져서 내가 그들을 버릴 것이다" (17절). 하나님의 섭리가 저들을 버릴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해 주거나 번성하게 하지도 아니 하실 것이요, 그렇게 되면 저들은 저희 모든 이웃 족속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의 영과 은혜가 저들을 버리실 것이어서 더 이상 그들을 가르치시지도 않으시고 더 이상 인도하지도 않으실 터인즉 저들은 우상 숭배 가운데서 더욱 더 완고해지고 무사려해지며 완악해질 것이다. 이리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라" 고 했다(17,21절). 이것은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나타내는 명약관화한 중좌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재앙들이 우리에게 임함" 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는 까닭이 아니뇨?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범죄한 자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모든 화가 자기들에게 임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날에, 즉 저들의 환란과 고통의 날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리라" 는 사실이 저들의 불행을 극에 달하게 하는 점이다(18절). 만약 우리가 오직 하나님 얼굴의 광채만 대할 수 있있다면 어떤 외적인 어려움 속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편안하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기도로부터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면, 우리는 파멸이다.
Ⅳ.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노래를 백성에게 가르치도록 명령하셨다. 그 노래는 모세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지었던 것으로서, 저들에게 경고를 해 주시는 신실한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증거로 남을 것이었고, 그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들에게 불충실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고발해 주는 영원한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19절). 구체적인 예로써의 이 노래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기록된 말씀 그 자체도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리는 모든 자들을 대하여 하나님을 위한 증인이 되리라. 기록된 말씀이 증거가 되리라고 했다(마 25:14). 인간의 지혜는 선악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 허다한 방법을 고안해 내었으니, 법률이나 역사의 사실들이나 예언들이나 속담들이 그것이요 또한 노래도 있다. 거기에는 각각 다 장점이 있다. 성서 가운데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는 이 모든 것을 다 활용하시는데, 이것은 무지한 자들이나 부주의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1. 이 노래가 정당하게 활용되기만 한다면, 저들의 배반을 방지할 방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노래를 지으실 때에, "저들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어 들어가기 전" 그 당시의 저들의 상상을 염두에 두셨던 까닭이다(21절).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너무 큰 망상이 들어 있으며, 또 우상 숭배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해져 있어서 그 유혹의 불꽃이 튀면 곧 불 붙으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잘 알고 계셨다. 그런고로 이 노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마음 속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자" 이시며, 그 말씀을 통한 견책과 교화에 의해 놀랍게도 저들의 심중을 헤아리신다(히 4:12, 고전 14:25 과 비교하라).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열중하고 있는 상상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대로 그 생각들을 온전히 아신다.2. 이 노래가 저들의 배신을 방지하지는 못한다 해도, 저들을 회개시키며 그 배신으로부터 돌이키는 데는 도움이 될 수가 있었다. 환란이 저들에게 임할 때에도, 이 "노래가 잊혀지지 아니할 것이고" 저들 자신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겸손케 하며 자기들이 거역하였던 그 분께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록 자기가 예비하신 긍휼을 입게 될 자들이 실족하도록 내버려 두신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구제책을 마련하시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약품이 치료를 위해 미리 준비되어 있는 법이다.
증인이 될 언약궤와 노래(신명기 31:22-30)
Ⅰ.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명령이 여호수아에게 내려지고 있다(14절). 그것은 실제로 모세가 그에게 내렸던 명령과 동일하다. "강하고 담대하라" (23절). 당시의 여호수아는 자기가 지휘하게 될 백성들의 악함에 대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많은 말을 들었던 관계로 용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니다. 저들이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너는 네 맡은 일을 완수해 나가리니,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저들로 가나안을 소유케 할 것이다. 저들이 그 후에 저들의 죄악으로 인해 그곳에서 다시 쫓겨 나오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며 네게 불명예가 되지 아니 하리라. 그러므로 너는 담대하라" 고 말씀하신다.
Ⅱ. 율법서를 레위인들에게 엄숙히 전달하고, 그것을 법궤 곁에 두도록 하라는 말씀이 여기서 다시 언급된다(24-26절). 이것은 9절에 나왔던 말씀이다. 여기서 저들은 단지 이 귀한 원본을 비장해 두어야 할 장소에 대한 지시를 받은 것이다. 곧 법궤 안이 아니라(그 법궤 내에는 율법판 두 장이 보존돼 있을 뿐이었으나) "법궤 곁" 에 있는 다른 상자 안에 두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요시야 시대에 여호와의 전에서(이래 저래 잘못 두었던 탓으로) 발견 되었던 바로 그 책인 것 같다(대하 34:14). 그래서 아마도 그 다음에 있는 말씀 곧 "그것이 네게(거스르는) 증거가 되리라" 는 말씀은 바로 그토록 오랜 뒤에 발생했던 이 사건을 특별히 지적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로 이 책의 발견으로 인해서 요시야 왕이 직접 회중 앞에서의 율법을 낭독하는 일이 부활되었으며, 그 당시에 바벨론인에 의한 멸망이 목전에 임박했던 백성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Ⅲ. 다음 장에서 나오는 노래가 여기서 모세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다시 모세에 의해 백성에게 전해진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이 지어주시는 대로 그것을 먼저 쓰고 나서(22절). "모든 회중의 귀에 그것을 말하여 들리고" (30절), 저들에게 가르쳤다(22절). 백성들이 원본을 베껴 두어서 그 노래를 암기하게 되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던 것이다. 그 노래는 먼저 입의 말로 전하여지고 후에는 써서 전하였으니, 곧 각 지파의 대표자인 장로들과 유사들에게 가르쳐졌고, 그들에 의해 저들의 여러 가장과 문중에 전파되도록 하였다. 그 노래는 저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치명적 결과에 관한 공정한 경고에 대해서 하늘과 땅에게 엄숙한 호소와 더불어 전달되었다. 또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조금도 희망과 기쁨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곁들어 선포되었다.
1. 모세는 자기가 백성들과 함께 하는 동안에 그들로부터 얻었던 기쁨이란 얼마나 적었던가 하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27절). "내가 너희의 패역함을 아노니," 라고 말하는 것은, 일시적 격분에서가 아니라 (그가 한 때 "들어라, 너희 패역한 자들아!" 라고 무분별하게 말했듯이), 저들과의 오랜 친교의 결론인 것이다. "너희는 지금까지 여호와께 거역하여 왔도다." 그는 저들이 자기를 거역한 일에는 언급하지 않으니, 그런 일들은 그가 용서해 주고 잊은지가 오랜 까닭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반역 행위는 저들이 들어야만 하였으니, 이는 저들로 하여금 늘 회개할 수 있도록 하며 결코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 이제 그가 저들을 떠나는 마당에, 저들에게 대해 가질 수 있는 그의 소망이란 얼마나 희박한 것인가! 모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본대도 그들이 족히 실망꺼리였지만, 자기 경험에 의한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 말씀으로 비추어 보면 더욱 분명했다. "내가 알거니와, 너희가 내가 죽은 후에 부패하리라" 는 것이다. 그 백성의 배신과 파멸을 미리 내다본 이 선량한 노인에게는 틀림없이 많은 슬픈 생각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저들을 복되게 하며 저들에게 선을 베풀고자 그가 얼마나 고심 참담하였던가! 그러던 그 백성이 배반하여 멸망을 당하다니! 그러나 그에게 위안이 된 것은, 그가 자기 임무를 다 했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저들의 정착을 통해서는 못얻으신다 하더라도 저들을 분산시킴으로써 영광을 받으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도 죽으심을 얼마 앞두고서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의 일어남을 예언하셨다(마 24:24). 그러나 후대의 모든 배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옥의 문들이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는 것을 믿을 수 있으니, "하나님의 기초는 튼튼하게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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