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락이 발람을 부름(민수기 22: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디어 광야의 방랑생활이 끝나고 거기를 벗어 날 수 있게 되었다(21:18). 그리고 이제는 요단강 근처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그들은 모세의 사후에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Ⅰ. 이스라엘이 가까이 오자 모압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2-4절).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그들에게 적대심을 품지도 말라고 하신 명령을 그들이 알았다면(아마 모세가 그들에게 이것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하리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러한 말을 들었다면, 아마 그들은 그들을 쉽사리 정복하려는 속임수로만 알고 마음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옛날 아브라함과 롯이 친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압 사람들은 가능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멸망시키고자 결심하였으며, 의당 이스라엘도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결심했을 것이라고 아무 의심 없이 믿었던 것이다. 잘못을 꾸미고자 하는 자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한없는 불안은 결국 그들의 까닭 없는 적의에서 온 것이다.
그들은 아모리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의 소식을 듣고(2절), 그들의 이웃이 불길에 싸였으니 만큼 그들 자신의 집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많은 숫자를 보았다(3절). "그들은 수 가 많았다." 그리하여 만일 이스라엘의 승승장구하는 군사들의 행진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조속히 강구하지 않으면, 그들의 온 땅이 쉽사리 정복될 것이라고 추단하였다. 또한 이 거대한 대적에 감히 대항할 만한 힘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면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 (4절). 그리하여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으며, 근심하였다. 이처럼 악인들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시 53:5).
이 두려움을 그들은 이웃인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호소하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공동적인 안전을 강구해 보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압 왕국이 무너지면 미디안 공화국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모압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의 전진과, 아모리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승리를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땅의 일부를 벌써 차지하고, 나머지 땅도 정복하려고 하였던 아모리 왕 시혼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해 감사를 돌리며, 이를 기뻐할 만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우정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협조자가 될 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 롯의 신앙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진 것과 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하였으며, 정신이 혼란에 빠져 스스로 괴로와하였다.
Ⅱ.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려고 꾸민 모압 왕의 계략은 말하자면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신 하나님을 그들과 맞서는 분으로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무력보다는 자기의 재능을 더 의지하였다. 그리고 강력한 마술을 부릴 줄 아는 선지자나 또는 어떤 사람을 청해다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를 빌고 자기를 위해서는 축복을 빌게 하면, 자기가 감히 그들과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에서 나왔을 것이다.
1. 그것은 어떠한 신앙의 잔재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아들들의 문제를 다스리며 그들의 운명을 다스리는 어떤 눈에 보이는 지배력을 의지하게 하며, 이러한 힘에 자신들을 맡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 참다운 신앙이 무너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과 예배를 간직하여 비참하게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가 지키지 못한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백성들을 저주하는 그런 악행은 감히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Ⅲ. 그들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기 위하여 브올의 아들인 유명한 마술사 발람을 부르고자 하였다. 이 발람은 아브라함이 떠나왔으며 라반이 살고 있던, 그 먼 고장에 살고 있었다. 아마 가까운 곳에도 스스로 훌륭한 점복가임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발람만큼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발락은 발람이 아무리 먼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알고 있는 가장 능한 사람을 부르기 위해 그 먼 곳까지 사람을 보냈다. 그만큼 발락은 이 계획을 위해 열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발람을 데려오기 위해 발락은 이렇게 하였다.
1. 발락은 이스라엘의 거대한 숫자와 그리고 그 진영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사정을 마치 친한 친구에게 호소하듯 그에게 불평을 토함으로 발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 편에 거하였다" 고 하였다(5절).2. 발락은 발람의 말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사실 발람을 자기의 신으로 추겨 올렸다. 그는 말하기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이다" 고 하였다(6절). 학식이 풍부한 패트릭(Patrick)주교도 많은 유대교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발람에 대하여, 선악간에 그의 예언이 많이 적중하였고. 그의 기도가 응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과 잘 통하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마는, 교만과 탐욕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림으로 마술사로 전락한 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선지자" 라고 일컬어졌다(벧후 2:16). 아마 그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능력" 이란 말을 들을(행 8:10) 마술사 시몬과 같이 마술을 가지고 사람들의 명성을 사던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발설한 저주는 노아나(창 9:25). 엘리사의(왕하 2:24) 경우와 같이 놀라운 효력을 발한다. 그러나 "까닭 없는 저주는 이르지 아니한다" (잠 26:2). 그리고 더우기 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것과 같은 "그 신들의 이름으로 한 저주" (삼상 17:43)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적대하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축복하실 수도 있으며, 또 저주하실 수도 있으신 그분의 은총을 받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도 발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발락은 발람의 마음을 끌기 위해 "복술의 예물" 을 가져가게 하였다(7절). 그것은 발람이 "사랑한 불의의 삯" 이었다(벧후 2:15).
Ⅳ. 하나님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제재하셨다. 아마 발람은 매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로 그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자기는 하나님께서 축복한 백성을 저주할 수 없노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자들을 유숙하게 하고 밤새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8절). 우리가 우리를 유혹하는 자와 의논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쉽사리 유혹에 떨어지기 쉽다.
밤에, 아마 꿈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셔서,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나 발람을 통해서 그 말을 듣기를 원하셨다. 발람은 사자들이 온 용건을 하나님께 아뢰었다(9-11절). 그리고 하나님은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지 말도록 꾸짖으셨으며, 축복 받은 백성을 저주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2절).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아비멜렉이나(창 20:3), 라반에게(창 31:24) 직접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악인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불의한 일꾼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였으며,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발람은 발락에게 가지 말라는 말씀만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조만간 저주하려고 하였던 일을 그만 두라는 책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복을 받은 자" 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중요한 부분이었다(창 12:3).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 고 하나님은 축복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위험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가끔 광야에서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불법을 보응하시지 않으시기 때문" 이다. 그 죄가 가리우심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롬 4:6, 7).
Ⅴ. 사자들은 발람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
1. 발람은 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대답을 충실하게 알려주지 않았다(13절). 그는 단지 "내가 너회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셨다" 고 말했다. 그는 사자들에게 그가 반드시 전했어야 했던 말, 즉 이스라엘은 축복 받은 백성이니 만큼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때 그 계획이 무너지고 다시는 그런 요청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발람은 실제로는 그가 발락을 겸손하게 섬기고 싶다는 뜻과 그의 계획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과 또 그를 기쁘게 하여 드리고 싶다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지 못한다는 뜻을 전함으로 한편으로는 자기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시도한 바도 있다. 하나님의 금령에 어긋 행하는 일은 단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하는 것인 양 말하며, 또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행하는 것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하는 것인 듯 깎아서 말하는 사람들은 쉽사리 사탄의 표적이 된다.2. 사자들 역시 발람의 대답을 발락에게 충실하게 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전한 말은 단지 "발람이 우리와 함께 오기를 거절하더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가 더 정중한 대우와 더 많은 대접을 받기를 원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들은 발락에게 그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이처럼 큰 인물들은 주위 사람들의 아첨하는 말 때문에 잘못에 빠지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찾아내어야 한다.
발락이 다시 발람을 부름(민수기 22:15-21)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기 위하여 또 다시 발람을 데려 오려고 사자들을 두 번째로 보낸 기사가 있다. 발락이 그의 잘못된 일을 끈질기게 한 것만큼만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해 실망하지 않고 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다. 교회의 대적들은 교회를 대항하고 악행을 위해서 쉬임없이, 지침도 없이 달려든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은 저들을 웃으신다.
Ⅰ. 발락은 발람을 더욱 더 유혹하였다. 그는 발람을 효과있게 설복하기 위해 어떤 계략을 꾸몄다. 아마 그는 사자들의 손에 갑절의 돈을 주어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명예 면에서 그를 유혹하기 위하여 그의 탐욕에 대해 미끼를 던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자만심과 야심에 대해서도 유혹하였다. 우리는 옛 사람의 앞잡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날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가 ! 세상 재물과 지위 를 멸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선한 양심을 지키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발람을 유혹하기 위하여 발락은 어떤 재간을 부렸는지 보자.
1. 그는 먼저보다 휠씬 더 "높은 귀족들" 을 보냈다(15절). 발람이 전번에는 너무 숫자도 적고 보잘 것 없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보낸 것 때문에 멸시를 받은 것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마치 제왕을 대하듯이 그의 재능에 대해 존경심을 표시하며 사람들을 보냈다.2. 그 간청은 매우 다급한 것이었다. 이 권세있는 왕이 그에 대해서는 애원하는 파가 되었다. "청컨대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시오(16절). 하나님께도 양심에게도 또 죄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도 거리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3. 보다 고귀한 것을 제공하였다. "내가 그대를 모압 왕들 사이에서 높여 크게 존귀케 하리이다" 라고 말했다. 아니 그는 발람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빈칸이 들어 있는 위임장을 보냈다.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노라" 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드리며. 당신의 명령이면 무슨 말씀이든지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내게 대하여 법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17절). 이처럼 죄인들은 자기들의 사치심 또는 적개심에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얼마나 괴로움을 당해도, 얼마나 많은 것을 허비하여도,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비굴해지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덕법에 대해서 전혀 뻣뻣한 자세만을 취할 것인가? 하나님은 이를 허락지 않으신다.
Ⅱ. 발람은, 겉으로는 거절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유혹에 굴복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발람의 갈등 즉 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죄에 물드는 마음 사이의 갈등을 분간해 볼 수 있다.
1. 그의 뉘우치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바른 말을 하였다. 아무도그가 한 말보다 더 좋은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높여서 이야기하였나 보라. 그는 하나님을 일컬어 "여호와 내 하나님" 이시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닌 까닭은 하나님이 그의 "유일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동시에 말감을 가리켜 맹세한다" (습 1:5).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서 말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는 마치 그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자. 그 말씀을 조금도 가감하지 않는 자와 같이 말하고 있다. 또 그가 얼마나 이 세상의 재물을 경시하고 있는가를 보라. 그는 금 과 은을 하나님의 은혜와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불의의 삯을 탐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을 살피는 자는 알고 계신다. 악인도 좋은 말을 하며, 입으로는 경건을 표시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그의 말로 그를 판단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마음을 살피신다.2. 동시에 그의 죄에 물드는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에 거슬리게 하였다. 그는 그 유혹을 거절하는 것 같이 보였다(18절). 그러나 그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하 만국을 주겠노라고 하는 사탄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라고 하신 것과 같이, 또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돈을 주며 성령을 사려고 하였을 때 베드로가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행 8:20)라고 말한 것과 같이, 단호히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19절).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사 그로 하여금 그들을 따라가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남께서 무엇이라고 그에게 말씀하시는지 알아보겠노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 있다는 듯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지독한 경멸이다. 그는 하나님이 축복한 것을 끝내 저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하나님께서 이미 악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돌이켜 행하도록 허락을 얻을 수 있는 듯이 생각하였다. 진실로 그는 하나님을 그 자신과 똑 같은 자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임을 밝히 말한 바가 있다. 그는 다만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미 확실히 결정된 사항에 대해 다시금 그 까닭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짓도록 허락해 달라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크게 멸시하는 것이며, 그 마음이 타락으로 빠지는 확실한 증거이다.
Ⅲ.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가라고 허락하셨다(20절). 하나님께서, 아마 천사를 통해, 그에게 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그가 원하면 발람의 사자들과 함께 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셨다" (롬 1:24).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네가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가려거든 가라. 그러나 너는 알라. 네 가는 길이 네게 영광을 가져다주지 못하리라. 네가 가기는 가지마는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을 저주할 수는 없다. 너는 내가 네게 일러주는 말만 말할지니라."
하나님은 악인들을 사슬에 묶어놓으신다. "여기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올 수 있다." 그러나 허락 받은 그 이상은 안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분노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지만 동시 에 그 이상은 허락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들과 함께 가라" 고 하신 것은 노여움을 가지시고 말씀하신 것이 분명하다. 발람 자신도 그것을 그렇게 이해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가지 못하게 막았을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냐고 발람이 반박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때로는 사랑으로 거절하듯이, 때로는 악인들의 기도를 진노 속에서 들어주시는 일이 있으시다.
Ⅳ. 발람이 길을 나섰다(21절). 하나님은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갈테면 가라고 내버려두셨다. 그런데 발람은 그 길을 떠나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그 사자들이 다시금 가자고 말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자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것을 속히 챙겨 가지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원했던 바를 이루고 가느니 만큼 크게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한 사도는 이러한 발람의 죄에 대하여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고 하였다(유 11).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발람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움(민수기 22:22-35)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발람이 모압으로 가는 길을 막은 기사가 있다. 아마 모압의 귀족들은 앞서 갔든지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다른 길로 갔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그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발람이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모양으로 두 사람의 종자와 함께 서 있었다. 그는 발락의 도움으로 새삼 높은 지위를 얻어야 할 필요 가 없는 사람임을 보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Ⅰ. 발람이 그 길을 떠난 것을 하나님은 노여워하셨다. "그가 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22절).
1.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죄를 짓게 내버려두셨다 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노여우심이 조금이라도 경감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섭리 가운데서 그가 죄를 짓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고 하여서, 그 때문에 그가 죄를 짓 는 것을 승인 하셨다거나, 그를 미워하시지 않으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게도 하시지만 그 죄를 미워도 하신다.2.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 대해 악을 꾸미는 것을 가장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Ⅱ.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발람에게 당신의 노여움을 알게 하셨다. 즉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섰다." 이제 하나님은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리라" 는 약속(출 23:22)을 충실히 이행하여 주셨다. 거룩한 천사들은 죄의 반대 세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는 데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 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우리의 천사장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단 12:1, 10:21).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해 악한 시도를 꾸미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반드시 그의 거룩한 천사들을 보내사, 그들의 시도를 쳐부수며 소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해 다행한 일인가! 또 얼마나 위로가 넘치는 일인가! 한 선지자가 유다를 헤친 네 뿔을 보았을 때, 그와 동시에 그 네 뿔을 떨어뜨릴 네 사람의 공장(장인)을 보았다(슥 1:18-). "원수들이 홍수와 같이 밀려 올 때 여호와의 신아 그들을 대항하는 기치를 세우시리라."
이 천사는 발람이 그를 적대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가 되었다. 그렇지 않는 한 그들은 우리의 편이다. 우리는 천사들을 통해서 죄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타락의 길을 막을 수 있다. 천사는 그룹들의 손에 들린 "두루 도는 화염검" (창 3:24)과 같은 칼을 빼어들고 서 있었다(23절). 천사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사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자들과 싸운다.
1. 하나님은 발람에게 나귀를 통해 자기의 노여움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래도 발람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다" (23절). 그의 한 나귀가 그가 보는 것 이상의 것을 보는데, 그의 눈은 탐욕과 야망으로 맹목이 되고, 마술의 복채에 현혹된 것을 보면, 그가 스스로를 일컬어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라고 하였으며. 또 "눈을 뜬 자" 라고 한 것은 얼마나 헛된 자랑이었던 것인 가를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맞서고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 나귀는 그 주인을 알고 그의 위험을 깨달았건마는, 발람은 이를 알지 못했으며, 깨닫지도 못했다(사 1:3).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나이다" (사 26:11). 나귀까지라도 천사를 보는데, 환상이나 계시를 본다고 자랑할 것이 없다. 오히려 멸망 받을 짐승보다도 더 못한 바보스러움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귀를 탄 자는 자기에게 떨어지는 진로의 칼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려고 하였건마는 나귀는 자기를 구할 줄을 알고, 자기 자신을 구하고 자기 등에 탄 지각이 없는 주인까지도 구해 주었다.(1) 나귀는 "길에서 벗어났다" (23절). 발람은 여기서 어떤 암시를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바른 길에서 떠난 것이 아닌가고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발람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 하였다." 이처럼 고의적인 죄로 말미암아 파멸의 길로 무모하게 줄달음치는 자들은 그들의 멸망의 길을 막는 이들에 대해 화를 낸다.
(2)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다시금 보고 그를 피할 수 있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앞에 나갈 수가 없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나서야 "몸을 담에 대고" 그리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였다" (24, 25절).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려면 가서는 안된 길을 갈 때 얼마나 많은 잘못된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는 길에서 돌 뿌리를 발로 차지 않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든지 우리가 재난을 당하면 우리는 우선 우리의 길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길인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발람의 발을 돌담에 비비어 상하게 한 것은 그의 생명을 구해 주는 일이었건마는, 발람은 성이 나서 나귀를 또 다시 채찍질하였다. 이처럼 우리도 참으로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인데, 현재 당장의 괴로움 때문에 화를 내기가 쉽다.
(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또 다시 보게 되자, 이번에는 발람의 밑에 엎드렸다(26, 27절). 발람은 여기에 어떤 특별한 무엇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그의 나귀는 여태까지 한번도 그렇게 반항해 본 일이 없었으며, 또 그를 그런 식으로 섬겨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그들의 마음이 "악을 행하기로 완전히 굳어진" 사람들은 그들의 가는 길을 검토해 보게 하고 중단시키고자 하여 그들의 가는 길에다가 하나님께서 섭리로써 놓아둔 여려 방패들을 막 밀고 부수고 나간다. 발람의 나귀는 그를 천사의 칼에서 구해 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자기와 같이 엎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으며, 정말 그에게 최고의 봉사를 하였건만, 발람은 세 번째로 그 나귀를 매질하였다.
(4)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발람을 깨닫게 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나귀의 입을 열게 하여, 그에게 말을 여러번 하게 하였다.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다(28절)." 그래도 발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자연의 능력을 초월한, 그리고 인간에게 입을 만들어주시고 그리고 말하도록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 기적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을 가르쳐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이나 그의 후손은 모두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왜냐하면 우리의 말을 순전히 모방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머거리로 태어난 자는 벙어리가 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신 하나님은 원하시면 나귀도 "사람의 소리로 말을 하게" 하실 수 있으시다(벧후 2:16).
이에 대해서 에인즈워드(Ainsworth)씨는 이런 점을 관찰하였다. 즉 마귀가 우리의 첫 조상을 죄짓도록 유혹할 때는 교활한 뱀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을 깨우쳐주실 때, 속담에도 둔하고 바보스러운 짐승으로 나타나는 짐승인, 어리석은 나귀를 이용하셨다. 왜냐하면 사탄은 "공교하게 속이는 말로" 인간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고전 1:27) 때문이다. 한 마리의 벙어리 나귀를 가지고 하나님은 선지자의 광란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는 꾸짖는 자는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시고자 하시면 하나님은 돌들도 소리질러 그를 증거하게 하신다(눅 19:40; 합 2:11)
[1] 나귀는 발람의 가혹한 처사를 불평하였다(28절). 나귀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냐?" 고물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가련하고 연약한 자들을 함부로 다루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그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소리 지르게 하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이 그들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외치게 하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갓 미물 짐승도 함부로 다루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신다면, 더욱 인간을, 하나님 당신의 자녀인 기독교인들을 함부로 다루게 하시겠는가 ! 우리가 하나님께서 여기서 행하신 것과 같이 "벙어리의 입을 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벙어리를 위해서 우리의 입을 열어야" 하며 또 열 수 있다(잠 31:8; 욥 31:13).
"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는 나귀의 불평은 정당한 불평이었다. 우리가 손이나 혹은 말로 어느 누군가를 내려치고자 하는 생각이 나면, 우리는 먼저, 그가 내게 행한 바가 무엇이며, 어떤 일로 나를 화나게 하였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듣지 못할는지 몰라도, 모든 피조물은 무거운 짐을 인하여 탄식한다(롬 8:22). 발람은 그의 나귀가 말하는 것을 듣고도 그다지 놀라와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사람은(그가 마술사이기 때문에) 나귀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다지 신기로운 것 이 못되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의 저돌적인 열정은 그처럼 이상스러운 현상을 보고도 미처 그 이상함을 깨닫지 못하도록 맹목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본다. 재갈을 물리지 않은 분노 이상 인간을 정신 못차리게 하는 것이 또 없다.
화가 난 발람은 "자기 손에 칼이 있으면 그의 나귀를 죽였을 것이라" 고 말했다(29절). 그의 무력함을 보라. 그가 자기의 저주로 이스라엘에게 화가 미치리라고 생각했다면 자기의 힘을 가지고 그 나귀 한 마리를 죽일 수 없었단 말인가? 그는 할 수 없었다. 만일 할 수 만 있었다면 그는 쾌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얻은 바는 무엇이었을까? 자기의 일시적인 감정과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더 불쌍한 자로 만드는 것밖에 더 있었을까? 이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광증이다. 이에 대해서 홀(Hall) 주교는 이렇게 보았다. 즉 미물 짐승에게 자비를 베풀 줄 모르는 자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선인은 그가 기르는 짐승들의 생명까지도 아낀다.
[2] 나귀는 그에게 몇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30절). 하나님은 말못하는 짐승에게 단지 말만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할 수 있게 하여 주셨다. 나귀는 세 가지로 따지고 들어갔다.
첫째, 자기에 대한 그의 소유권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네 나귀가 아니냐" 고 말했다. 그 의미를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게 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이 사용 할 수 있도록 "그의 손에 맡겨 주겼고," 또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도록 "발 아래 두셨다" (시 8:6). 2) 하나님은 비록 악인들에게도 만물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은 좋은 일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은 악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만물의 영극이다. 그러므로 폭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발람에 대한 그의 봉사에 대해 말했다. "나는 네가 일생 타는 나귀가 아니냐" 고 말했다. 우리는 가끔 미물 짐승이라도 우리에게 매우 소용이 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세째, 나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의 보통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에게 말했다. 전에는 그의 발을 비비지도, 또 그의 발아래 엎드리지도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통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그 의미를 살펴보자. 1) 흔히 볼 수 없었던 반칙을 보면 우리는 그 반칙자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기 전에 먼저 그 까닭을 알아보아야 한다. 2) 짐승들이 보통 우리에게 보이던 순종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하며, 겸손히 자기의 죄를 고맥하여야 한다.
2. 발람은 드디어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깨닫게 되고, 깜짝 놀랐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밝혀주시자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다" (31절).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사자에 눌리고, 그의 손에 들려진 칼을 보고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만한 마음을 찢어 놓으시며 겸손하게 만드신다.(1) 천사는 그의 잔인 무도함을 꾸짖었다(32. 33절). 천사는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번 때렸느냐" 고 물었다. 우리가 깨닫든지 못하든지 하나님은 분명히 그의 피조물들을 우리가 함부로 다루면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을 따지신다. 아니, 천사는 그에게 나귀를 때리는 것보다 그 자신의 가슴을 치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얼마나 더 합당한 일인가를 보여 주었다(" 네 길이 내 앞에서 사악한 것이거늘 어찌 너는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나귀가 얼마나 그 자신보다도 영리했으며, 나귀가 비켜섰기 때문에 얼마나 그 자신이 큰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나귀가 비켜난 것은 나귀 자신보다는 그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으며, 나귀가 비켜나지 않았었다면 그는 죽임을 당했고, 나귀는 살았으리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우리의 눈이 밝아지면 우리는 죄악의 길에서 얼마나 무서운 위험에 처해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그곳을 지나올 때 얼마나 큰 도움을 받았는가를, 그리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곳을 지나올 때 우리들 생명을 구해준 이와 싸우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그러자 발람은 마음이 녹아지는 것 같아 보였다(34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이 길을 떠나온 것이 잘 못이었고. 그렇게 난폭하게 행한 것이 잘못이었나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이 그가 천사의 선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다. 이제 천사가 선 것을 보자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여 드린 것은 단지 그가 간다는 사실보다는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악한 생각을 품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하에 가도록 허락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발락을 기쁘게 하고, 그의 일에서 출세하려는 생각을 품고 간 다고 하는 사실이 더 하나님을 노엽게 한 것이었다. 그러한 그의 마음의 완악함을 그가 깨달았는지 또는 그러한 사실을 자백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가 앞으로 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달리 방법이 없으니 만큼) 그는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때 그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하는 어떤 표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손이 묶여져 있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죄가 그들을 떠났다고 하여 그 죄를 그대로 두는 수가 있다. 거기에 생의 외적인 변화는 있은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의 정화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3) 그러나 천사는 다시금 가기를 허락하여 주었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고 말해 주었다(35절). 가라, 네가 바보가 되고 발락과 모든 모압의 귀족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보려고 하거든 가라는 것이었다. "가라.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네게 일러주는 말만 말하고자 하면 가라." 이 말은 어떤 금지를 말하지 않고, 그 사건에 대한 하나의 예언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단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축복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단지 돌아가기만 하면 자기 자신의 혼란을 가져오지만 가서 이 말을 전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에게 멋진 경고를 주셨다. 그러나 그는 그 경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발락의 귀족들과 함께 갔다." 하나님은 발람의 불 의한 탐심에 대해 진노하사 그를 쳤건마는 "그는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였다" (사 57:17).
발락이 발람을 만남(민수기 22:36-41)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해 동맹하여 대적하는 발락과 발람이 함께 만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각각 그 성공에 대해서 다른 기대를 가지고 있다.
1. 발락은 그가 원했던 발람을 데리고 왔으므로 조금도 의심없이 그 일이 성공되리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발락은 발람을 맞이하려고 자기 나라의 최단 변경까지 나갔다(36절). 그것은 한편 그렇게 기다렸던 사람을 속히 보기 원하는 자기의 초조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발람의 명예를 높여 줌으로 그의 굉장한 힘을 모조리 이용하고자 하는 이유도 또한 있었다. 이방의 왕이 다만 선지자의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가장한 자에게 얼마나 많은 존명을 나타내 보였는가 보라. 그리고 그 입에 저주만을 가득 담고 온 자가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가 보라.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절들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멸시를 받으며 평화와 축복의 소식을 가지고 온 이들이 냉혹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발락은 이제 발람이 늦게 온 것 말고는 불평할 구실이 없었다(37 절). 발락은 발람이 자기의 끈질김을 알아주기를 바랬다. 그는 "내가 특별히 보내어 그대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고 말했다. 그리고 발락 자신의 뜻하는 바를 발람이 알아주기를 또한 바랬다. "내가 그대를 높여 존귀케 하지 못하겠느냐" 고 말했다. 발락은 왕으로서, 얼마든지 그의 명예를 올려줄 수 있는 왕국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발람은 발락이 주는 높은 자리를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발람이 더디 온 것은 발락이 그를 위해 마련해 놓았던 명예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어 마치 모욕을 받을 것으로 느껴졌다고 혼자 생각한 것 같다. 높은 명예는 많은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는 유혹의 미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놓아두신 명예에 이끌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빨리 가지 못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존귀케 할 수 없겠는가?"
2. 발람은 자기의 일에 대해서 의혹적인 말투로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발락에게 너무 자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였다(38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기는 왔지마는 무엇을 임의로 말할 수 있겠나이까?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입니까? 나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를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마치 산헤림이 당했던 것과 같은, 코에 갈고리를 꿰고, 턱에 재갈을 먹인 것과 같은 모습으로 괴로움을 가지고 말하는 것 같다(사 37:29).3.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 착수하였다. 발람은 밤새 고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 귀한 손님이 무사히 온 것을 환영하여, 모압의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발람은 이 제사의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아 환대 받았다(40절). 그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 다음날 아침, 발락은 발람을 그의 병거에 태우고 그 나라의 산 당으로 갔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거룩히 하고자 하는 이유와 또 발람의 복술이 크게 작용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높은 곳에 있는 산당에서는 이스라엘의 진영을 잘 내려다볼 수 있는 이점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스라엘의 진영은 이제 그가 독기를 머금은 화살을 쏘아대어야 하는 곳이다. 이제 발람은 지난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던 것 이상으로 발락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 것인가를 보자. 우리는 이렇게 날마다 기도하여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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