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1-10)
모세는 율법을 요약 정리하여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라" 고 했다(2절). 아론과 그의 자식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두 자기들의 의무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지배하는 보다 어두운(구약) 시대에 있어서 조차도 무지를 신앙의 모체라고 자랑하는 그러한 신앙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될 수 없었다. 모세는 온 회중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쳐 주어야 했고, 온 진중에 선포해야 하다. 아마 모세는 이미 율법들을 차례로 모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마침내는 점차로 모든 사람이 그 율법을 알 수 있도록 전달한 것 같다. 여기에 나와 있는 계율 중의 여러 가지는 이미 저들이 전에 받은 것들이었지만 그들이 다시 들어야 한다고 했으니, 그것은 저들이 그 율법들을 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계율들은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한다. 그것도 한줄 한줄 정확히,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조항이라도 충분히 전달되어야 한다.
Ⅰ.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 그들은 특정한 율법과 풍속으로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실제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과는 구별되도록 저들에게 가르쳐 주어, 온전히 하나님께만 헌신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율법이기도 하다(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이 율법에 복종하도록 이끄신다!). 즉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5, 16). 우리는 거룩한 예수님의 추종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껏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별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모형과 그림자에 의하여 거룩하여졌다(20:8). 그러나 우리는 "진리로 거룩하여졌다." 즉 모든 그림자의 실체에 의해서 성별된 것이다(요 17:17; 딛 2:14).
Ⅱ.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 (3절).
1. 여기에서 요청된 "경외" 는 제 5계명이 요구하는 "공경" 과 같은 것이다(말 1:6 참조). 이것은 내적인 존경심과 외적인 존경의 표현, 부모의 명령에 대한 복종, 그들을 기쁘고 편안하게 해 드리는 배려와 노력을 모두 포함하며, 그들의 마음을 슬프게나 분노케 하는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며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뜻한다. 유대 학자들은, "아버지에게 바쳐야 할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에,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반대하지 아니하며 거기에 트집을 잡지 않으며 생전이나 사후에나 간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며 '나의 아버님', '어르신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것은 아버지가 어려운 지경에 처할 때 온갖 필요한 것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라고 대답한다.2. 자녀들은 어른이 되더라도 이러한 의무에서 해방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학식 많은 자, 높은 자리에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의 부모라는 이유 때문이다.
3. (원문 및 영어 성경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어머니에 대한 의무와 아버지에 대한 의무가 다 같은 것임을 말한다. 만일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게 되더라도, 역시 어머니에게도 존경과 복종을 바쳐야 한다.
4. 또한 "그리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고 첨부되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율법으로써 우리의 부모들에게 존경을 바치라고 했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자기들의 권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존경심을 보존케 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한 존중감을 지키도록 지도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안식일을 존중케 하는 보호의 책임은 제 4계명에 의하여 부모들에게 중차대하게 위탁된 것이다.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 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의 패망은 그들이 자기 부모들과 안식일을 경솔히 여기는 데서 온다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두 가지 계율이 하나님의 법도를 요약한 그 서두에 함께 놓여 있으니, 그것은 매우 알맞은 일이다. 즉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부모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태도를 지니는 자녀들에게는 소망이 있으며 장래가 번성하리라.
5. 이 두 계율에 대한 이유가 첨부되어 있다. 즉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즉 안식일의 여호와요, 네 부모의 하나님이니라" 는 것이다.Ⅲ. 하나님만을 예배하되, 형상을 만들어 예배하지 말라(4절). "너희는 헛 것(우상)을 위하지 말라", 곧 아무런 힘도 가치도 없는 신이 아닌 신에게로 전혀 향하지 말라. 참된 하나님을 떠나 거짓 신 아직 패망케 하고, 영원히 불행으로 빠뜨릴 신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네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네 눈도 그들에게로 돌리지 말라. 너를 위하여 신을 만들지 말라. 곧 네 자신의 공상으로 피조물을 만들지 말며 깎아 만든 신으로 조물주를 예배하려고 생각지 말라. 너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작품이요, 그러므로 네 손으로 지어 만든 것으로 신을 예배하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느니라. 여기에 깎거나 새겨 만든 신들이 특기되어 있는 것은 금송아지를 주조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Ⅳ. 화목제물을 바치고는, 언제나 율법에 따라 그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5-8). 여기에 제사에 관한 어떤 특별한 이유(아마 그런 것 같다)가 주어져 있다. 화목제물은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이었고 제사장이 보는 가운데서 먹을 때 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당시에 그들이 만나를 먹고 지내는 중이었으므로(출 16-20장) 지정된 기일보다 더 오래 보관하려고 자기들의 화목제물을 저장해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러한 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화목제물에 관한 율법은 주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하자(7:16-18).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때에 그의 할 일을 하신다. 제사가 율법에 따라 드려졌더라도, 드리고 나서 그 제물을 다시 율법에 따라 먹지 아니하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했던 것이다. 사역자들이 자기의 직분을 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자기들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우리가 신령한 제사를 드리고 났을 때에도 그 제사의 혜택을 입기 위해서 우리가 다해야 할 의무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만사는 허사로 끝난다.
Ⅴ. 저들이 수확할 때는, 밭모퉁이의 이삭들은 다 줍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 두라고 했다(9, 10절). 경건의 사업을 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우리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까지 자선의 행위도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들이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모퉁이에 있는 얼마간의 곡식들은 남겨 두어야 했다.
유대 학자들에 의하면, "그 곳(남겨 두어야 할 부분)은 그 밭의 1/60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삭뿐만 아니라 포도송이도 얼마간 남겨 두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처음에는 지나쳐 버리고 행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이러한 율법이 문자적인 뜻 그대로 우리를 구속할 힘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1. 우리는 탐심을 내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모든 것에 욕심을 내서도 안 된다. 또 하찮고 소소한 일까지 권리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2. 우리가 수고한 결과로 가난한 사람들이 양식을 얻게 되고 원기를 되찾게 되는 것을 볼 때는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몫이 되지 못한 모든 것은 손해 본 것이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간 것은 낭비된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추수기와 같이 즐거운 시절이 우리에게 돌아오면 자선을 베풀기에 합당한 시절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기뻐할 때에 가난한 자가 우리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을 것이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찬미할 때면, 우리의 골육지친도 우리를 찬양할 것이다.
이웃을 네 몸같이 (레위기 19:11-18)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Ⅰ. 무엇을 행하든지 정직하고 진실하라는 것이다(11절). 하나님은 각자에게 섭리로써 몫을 지정하셨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써 각자에게 지키라고 몫을 지정하신다.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그가 지정하신 경계가 침해당하는 일이 없도록 돌보신다. 즉 도적질을 금하셨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라." 또 부정(不正) 행위를 금하셨다. "너희는 속이거나 거짓 행동을 삼가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부정직하게 생긴 것인지-그런 것으로 된 부유함은 진정한 부(富)도 아니거니와, 오래 가지도 못한다-정직하게 생긴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진실이 깃들기를 원하시는(시 51:6), 진실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에도 진실이 있기를 요구하신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즉 일상의 대화 속에서나, 거래를 할 때에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지켜지는 율법이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지켜지는 율법이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골 3:9).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진실한 말도 들을 자격이 없다. 거짓말을 범하는 자들은 당연히 그 거짓말을 되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는 금령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들더러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Ⅱ.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지극히 존중하도록 하며(12절), 그를 걸어서
1. 거짓말을 증거하지 말라고 했다. "너희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로 맹세한다는 것은 더욱 나쁜 것이다. 또2. 그의 이름을 걸어 사소한 일이나 부정(不正)한 일에 증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네 하나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곧 신앙적인 용도 외에 다른 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Ⅲ. 남의 권리를 빼앗거나 압제하지 말라고 했다(13절).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을 사취하거나, 강탈해서는 안 된다. 또 남의 권리에 속한 것, 특별히 "품꾼의 품삯" 을 압류해서는 안 된다. 품삯을 "밤새껏 네게 두지" 말라고 했다. 만약 노동자 본인이 원한다면 그들의 일이 끝나는 대로 가능한 한 즉시로 그들의 품삯을 지불하도록 하자. 품삯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것도 큰 죄이지만 그것을 연기하여 그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하나님의 복수를 부르는 죄악이다(약 5:4).
Ⅳ. 자신을 스스로 돌 볼 수 있는 자들에게 특별히 친절히 대하여 그들에게 신용과 안전을 지키라고 했다(14절).
1. 귀머거리에게 신용을 지키라. "너희는 귀머거리를 저주하지 말라." 즉 자연적으로 귀머거리여서 전혀 듣지 못하는 자는 물론이요, 당장 본인의 눈앞에 없어서 저주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대하여 분개심을 표시하지 못하며 같이 화를 내지 못하거나 자신을 변명하지 못하는 자들에게와, 마치 다윗처럼(시 38:13) 그런 말을 듣지 아니했다는 듯이 참고 견디면서 그런 말에 개의치 않으려는 자들에게도, 저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수하려 하지 않거나 또 그러한 능력이 없는 자라고 하여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라. 혹 본인들은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2. 또한 우리는 맹인들의 안전을 보살펴 주는 친절을 지녀야 한다. 그들 앞에 걸림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고통 당하는 자에게 고통을 가중케 하는 짓이요,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악용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이 금령은 맹인을 도와주라는 계율과 맹인들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치워 주라는 계율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 학자들은,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는 것 같은 야만적인 짓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말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즉 쉽사리 그런 간단한 속임수에 넘어 가서 저들에게 피해를 당하고 마는 그런 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악한 생각을 말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도 우리의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일체 삼가도록 조심해야 한다(롬 14:13; 고전 8:9). 또 그러한 죄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즉 "너희는 귀머거리나 소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무기력한 자들을 도우시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라. 하나님은 저들의 호소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으면 남에게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은 자연히 삼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Ⅴ. 재판관들이나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편파성이 없이 공정하게 판결하라고 명령하고 있다(15절). 그들이 임명에 의하여서 재판관이 되었든지, 또한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을 때에 양편의 합의에 의해서 심판관이나 중재자로 선출되었을 때이든, 그들은 양편에 모두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며, 온갖 기술을 다하여 공평의 법칙을 따라야 하며, 그 문제의 사실에만 순수히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지 결코 그 당사자들의 신분 따위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의를 그릇쳐서는 안 된다.
1. 즉 가난한 자에게 동정해서도 안 된다. "가난한 자를 두호하지 말라" (출 23:3). 가난한 사람에게 어떤 동정을 베풀어서 법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가 아닌 것을 그에게 부여해서는 안 된다. 또 과오에 대한 어떤 정당한 처벌을 가난하다는 이유로 면제해 주어서도 안 된다.2. 또한 법관들은 종종 권력자들에 대한 호의로 판단을 그릇치기가 일쑤이지만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존경한다고 하여 그릇 재판해서도 안 된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의 명령에 따라서 "법관들은 한편은 서 있는데 다른 한편은 앉아 있으라고 하는 따위의 편파적인 처사를 행하여서도 안 되며, 한 사람에게는 마음대로 말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간단히 줄여서 말하라고 해도 안 된다" 고 말한다(약 2:1-4 참조).
Ⅵ. 우리는 남의 명성에 피해를 끼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 일상적인 말에서도 그러하다. "너는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라" (16절). 비밀을 누설하고, 범죄를 가중시키고, 좋지 못한 일을 악용하고, 남의 명성을 훼손하려고 하며, 이웃간에 불화의 씨앗을 뿌리며 다니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실책을 유발하는 장본인만큼이나 나쁜 짓이다. "고자질" (개역성서:" 논단")을 뜻하는 원어는 행상꾼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자질하는 자는 나쁜 소문을 이집 저집 날라 다니며 흔히 소문을 장사하여 서로간의 중상을 물물교환하기 때문이다. 이런 죄악에 대한 비난의 소리를 들어보라(잠 11:13; 20:19; 렘 9:4, 5; 겔 22:9).2. 또한 거짓 증거를 금했다. 아무도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을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그가 결백하다면, 기록된 자들(잠 1:11-14)처럼 잔인한 자들과 더불어 동맹하여 그를 해치지 말라."
유대 학자들은 이 뜻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너희는 위험에 빠진 형제를 서서 보지만 말고, 비록 네 자신의 생명이나 신체가 위험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가서 그들을 구해주라." 또 말하기를 "고소당한 자를 결백하다고 증언해 줄 수 있는 자는 이 율법에 따라서 그렇게 증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라고 한다(잠 24:11, 12 참조).
Ⅶ. 이웃 사람을 사랑으로 견책해 주라는 명령이 있다. "너희는 너희 이웃을 지혜롭게 책망하라" (17절).
1. 네 자신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미워하지 말고, 그를 책망해 주라.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우리는 그를 보복하기 위하여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충분히 보복을 하기까지는 자기들의 분노를 감추어 두고 있듯이(삼하 13:22), 선악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돌려서도 안된다. 오히려 지혜롭고 온유한 마음으로 우리의 분개심을 제어하고, 그에게 사리를 잘 설득시켜 잘못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혐오감을 풀어 버리도록 해야 한다. 이 것이 우리의 구주께서 보여주신 법칙이다(눅 17:3).2. 그러므로 너희는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죄지은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임을 책망하여 깨우쳐야 한다. 그리하여 회개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면 그의 죄가 용서될 수 있고,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을 것이고, 그 죄로 인한 벌을 받지도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우정어린 견책을 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견책을 할 때나 받을 때에는 늘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리라" (시 141:5). "친구의 통책" (잠 27:5, 6)은 신실하고 유익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여기에 엄격히 명령되어 있는 바이다. 즉 "너희는 지혜롭게 책망하라(개역:" 책선하라"). 어떤 구실을 붙여 그런 일을 빼먹지 말라!"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견책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우리가 범하게 되는 죄가 있다. 그것은 곧 형제를 미워하는 죄와 같다고 했다. 우리는 즉시 이렇게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와 같다. 그러므로 그의 과실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그를 기분 나쁘게 할꺼야!" 하는 따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는 친절을 베풀리라" 고 말해야 한다. 사랑은 남의 죄를 덮어 준다. 그러나 죄인 자신을 두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2) 견책을 해 주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당하는 불행이 있다. 즉 "우리는 그를 인하여 죄를 당하게 된다" 는 것이다. 짐이 무거워 쓰러져 버린 원수의 나귀도 도와주어야 한다면 우리 친구의 영혼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는가?(출 23:5) "그를 인하여 죄를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그의 죄를 담당하게" (난외에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 을 견책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일에 물들게 되고, ex post facto-사후(事後)에는 그러한 일에 종범(從犯)이 된다(엡 5:11).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염려해 주어야 한다.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말하는 자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다.
Ⅷ. 또한 여기에는 모든 악의를 버리며 형제애를 옷입으라는 요청이 나타나 있다(18절).
1. 우리는 아무에게도 악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말라."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17절)는 말도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이다. 마음에 악의를 품는 것은 이미 살인이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가 우리에게 피해를 끼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되갚아서는 안 된다. 즉 복수하지 말아야 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복수심으로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고, 그의 과실을 잊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그처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모욕과 침해에 대한 분개심을 항상 품고 있고, 말로 "영영히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 (삼하 2:26 참조)은 가장 악질적인 것이요, 우정을 파멸하는 독이다.2.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지녀야 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18절).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자기의 잘못은 손쉽게 용서하며, 그런 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금이라도 덜 사랑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이런 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것을 율법의 제 2대 계명으로 삼으셨다(마 22:39). 바울 사도도 둘째 율법판의 율법을 요약하면 바로 이것이 된다고 했다(롬 13:9, 갈 5:14). 우리는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실하게 그리고 가식됨이 없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 그대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입증해 보여서, 우리의 최대한의 힘을 기울여 그의 상함을 막아 주고 그의 유익을 추구하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것 그대로(마 7:12) 이웃에게 베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그들의 마음 자리에 두어" 보아야 한다(욥 16:4, 5). 오히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유익을 부정해야 하기도 한다(고전 9:19 이하). 바로 이 점에서 복음은 율법 중에서 가장 우수한 계율까지도 능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까지도 버리심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 는 교훈을 주셨으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요일 3:16).
혼합을 금함 (레위기 19:19-29)
Ⅰ. 교잡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19절). 창조 때에 하나님은 육축을 "그 종류대로" (창 1:25)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질서가 최선의 것이요, 넉넉한 것임을 믿고 괴물이 되기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너는 그의 지으신 것에 더하거나 덜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할까 하노라" (전 4:14).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탁월하여 더하거나 덜해도 오히려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결합하신 것을 우리가 분리시켜서는 안 되듯이, 그가 분리하신 것을 결합시켜도 안 된다.
곡식의 씨앗을 섞어 뿌리는 일이나 면모교직(綿毛交織)된 옷을 입지 말라고 금했다.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지니던 미신적 풍속이었기 때문이든가, 이스라엘인들이 각별히 조심하여 이방인과 혼합되지 말것이며 이방인들의 관습과 하나님의 제 규례를 섞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에인즈워드(Ainsworth)는 이렇게 주장했다. 즉 그 율법은 이스라엘이 종교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보존키 위함이며, 율법과 복음의 모든 교의를 조금이라도 다른 율법이나 복음과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신앙이 필수적이듯이, 선행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명분 아래서 이러한 것을 혼합시키지 말라고 금지되어 있다(갈 2:16).
Ⅱ. 정혼한 여자 노예와 간음을 범하는 자에 관한 처벌법이 나타나 있다(20-22절). 그러나 간음당한 여인이 정혼한 경우가 아닐 때에는, 율법은 아무러한 처벌 규정도 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정혼한 처녀이고 그녀가 노예가 아닐 경우에는, 죽음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 그런데 정혼은 했으나 여자 노예인 처녀일 경우에는(비록 그녀의 결혼이 성립되기 전에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 했었지만), 사형만은 면제되었다.
그런데 간음의 경우에는 남녀 둘 다 벌을 받아야 했다. 또는 어떤 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벌은 여자만이 받았고, 남자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고 한다. 약혼이 맺어진 것뿐이었지만 간음의 범죄로 처벌을 받아야 했던 것은, 결혼의 영예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예인 여자를 더럽혔을 때에는, 자유의 몸인 여자를 더럽혔을 때와 같은 벌을 받을 수는 없었으니, 그것은 자유의 영예를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자유인과 종 사이에 그렇게 큰 차별이 있었다(갈 4:30).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러한 차별을 용납지 아니한다(골 3:11).
Ⅲ. 유실수에 관한 율법이 나타나 있다. 즉, 심지어 첫 3년 동안은, 만일 그 나무가 조숙하여 그 동안에 열매를 맺더라도 그 과실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23-25절).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때때로 정원사들이 그러하듯이, 자기들의 어린 과목에 열매가 맺는 것을 보면, 즉시 따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일찍이 열매를 맺는 것은 과목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는 열매가 아무리 완전히 익더라도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사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리고 제 4년에 가서 열면, 그 열매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했으며 그 중의 1/5은 제사장들에게 바치든지 여호와 앞에서 즐겁게 먹으라 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열리는 것은 모두 그 주인의 것이 되리라고 했다.
1.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저들에게 이방인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는 것을 가르치는 율법이라고 한다. 즉, 이방인들은 저들의 과실의 첫 소산을 자기들의 우상들에게 성별해 바쳤으며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모든 과실들이 상해 버린다고 믿었다 한다. 그 과실에 관한 이 율법은 동물에 관한 율법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피조물들은 난지 8일이 경과하기까지는 제물로 바칠 수 없으며 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기에게는 할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22:27 절 참조). 하나님은 저들의 나무의 첫 소산을 원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첫 3년 동안에 난 실과들은 제 8일이 채 못된 양이나 염소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셨으므로,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취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최상의 것을 가지시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그것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첫 소산이 예물로 바쳐지지 아니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안의 실과들은 무할례자들처럼 여기어야 했다. 즉 제 8일이 경과되지 못한 동물이 아무런 용도로도 사용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2. 이로써, 우리는 생활의 안락을 서둘러 취하려 해서는 아니되며, 그것을 향유할 만한 때가 되기까지 기꺼이 인내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특별히 땅의 소산을 우리 나름대로 차지하기에는 합당치 못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땅의 소산에 관한 우리의 권리는 금지된 열매를 먹어 버린 우리의 첫 조상들로 인하여 상실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의하여서" 만(딤전 4:5) 그 권한을 회복할 수 있다.
Ⅳ. 이방인들의 미신적 관습을 금하는 율법이 있다(26-28절).
1. 이방인들처럼 피를 먹거나-그들은 자기들의 희생의 제물의 피를 그릇에 모아서 우상을 위하여(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시고는 그 우상 주위에 둘러앉았던 것이다-그 고기를 피 채로 먹는 것은, 우상 숭배자들과 같은 잔치를 함으로써 그들의 귀신들과 교제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풍습을 따르지 말며, 하나님의 제물의 피는 제단에 뿌려져야 했고, 그리고 나서는 제단의 발 밑에 붓고, 그 나머지는 밖으로 내어가야 했던 것이다.2. 복술과 술수, 그리고 행운이 있는 시기와 불운이 따르는 시기를 점치는 미신적 행동을 금했다. 이런 따위의 신기한 기술은 그 당시 애굽 제사장들이 고안해 낸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기에 미혹되어 그것을 신용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인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관습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런 것을 모방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 (롬 3:2)이 마귀에게 뜻을 묻는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내신 바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짓을 한다면 그것은 더욱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이다(요일 3:8). 그리스도인들이 점을 친다든가, 운수를 물어본다든가, 병고치려고 주문(呪文)을 사용한다든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하여 무당을 이용한다든가, 별똥이 떨어지거나 토끼가 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것은 주 예수를 모독하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그런 것은 이방 종교와 우상 숭배를 지지하는 일이요, 그들 자신이나 그들의 고귀한 이름에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무엇이 나쁜가" "라고 묻는 사람들은 율법과 복음을 둘 다 무시하는 것이다. 마귀와 교제하는 자들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조금도 나쁜 짓이 아니라는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엡 4:20).
3. 몸차림에도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미신적인 관습이 있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것을 모방하면 안 된다고 했다. "너희는 머리끝을 둥글게 깎지 말라" (26절). 하늘의 성좌를 예배하는 자들은 그 성좌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의 머리를 둥글게 깎았으니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머리가 천체를 닮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풍속 자체는 어리석은 것이며 그들의 거짓 신에게 존경을 바치기 위해서 된 일이니 우상 숭배적인 것이었다.
4. 이방인들이 장례식 때 슬픔을 나타내기 위하여 표현한 의식이나 예식을 모방하지 말라고 했다(28절). 즉 그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들 몸의 살을 베거나 무늬를 그려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지옥의 신들을 달래기 위하여 그렇게 했으며 고인이 된 자기들의 친구들에게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그렇게 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수난을 받음으로써 죽음의 성질을 변화시키셨고, 죽음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참된 친구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죽은 자들을 위하여 명복을 빌 필요가 없듯이(하나님이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면 죽음도 역시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 없는 자들처럼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친히 성별하신 사람들은 이러한 엉터리 신들의 형상이나 이름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끝으로 자기 딸들을 부정하게 매음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29절). 그런 것은 아마 이방 사람들이 예배하는 그 부정(不淨)한 영들이 그렇게 가증스러운 짓을 매우 즐겨했던 것이다. 음행이 종교적 의식의 하나로 지켜지고 그들의 성전에서 감행되었을 때 그 가나안 땅에는 온통 사악한 행위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그토록 더러운 일이 성전 문에 들어서게 되자마자 마치 강력한 급류처럼 온 나라를 휩쓸게 되었고, 도덕과 정결이 라는 모든 울타리를 무너져 내리게 했던 것이다. 마귀 자체가 먼저 사람들을 그런 가증스런 짓을 하는 예배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마귀는 그러한 가증스러운 짓을 범람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을 찾고 순전한 영에게 거룩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은 당연히 헛된 애착을 버린다. 하나님께 치욕을 돌리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과 자기 가문에게까지도 치욕을 돌리고 마는 것이다.
몇 가지의 도덕률 (레위기 19:30-37)
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대한 영예를 보존하려는 율법이 있다(30절). 이 율법에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미신, 그리고 모든 부정한 교제로부터 그 시간과 장소를 보호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1.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이며 이방인들이 미신적 방식으로(26절) 정해 놓은 그러한 시간들은 일체 지켜서는 안 된다.2. 성소는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정결과 준비를 갖추어서 회막에 나가도록 철저한 배려가 기하여 져야 하며, 겸손, 정중, 그리고 지엄하신 분의 존전에 전심하는 태도로써 나아가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은 그 때처럼 회막이나 성전 같은 하나님의 제도로 규정된 그런 거룩한 장소가 따로 없다. 그러나 이 율법은 예배를 위하여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숙한 회집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의 회집은, 그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는 그리스도의 특별 임재의 약속 아래에 열리는 것이요, 거기에서는 거룩한 제 규례가 드려지는 고로 그 회집에는 마땅히 예절을 갖추고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전 5:1)
Ⅱ. 무당은 물론이요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과 일체 상종치 말라는 경고의 율법이 있다. "그들을 믿지 말며, 추종치 말라. 그들에게서 어떤 행복도 가져다주기를 희망치 말라. 그들에게 어떤 충고나 장래의 뜻을 물으려고 찾아가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너희는 그것에 속을 것이요, 하나님과 너희 자신의 양심에 가증스러움만 더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아 운명이 다한 사울 왕이 저지른 사악한 죄였다(대상 10:13).
Ⅲ. 젊은이는 연로자를 존경하라는 부탁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서 일어나라" (32절). 연륜은 영예로운 일이요 (최고의 연로자인) 하나님께서 바로 연륜에 존귀를 돌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다.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이니라" (잠 16:31). 하나님께서 장수라는 일반 축복을 내리사 존귀케 한 자에게는 우리도 정중한 예의를 바쳐 존경해야 하는 법이다. 연로하여서 지혜롭게 장수한 자는 갑절의 존중을 받을 만한 분들이다. 그러한 자들 앞에서는 단순히 일어서는 예의보다 그 이상의 존중을 바쳐야 한다. 저들의 신용과 안위를 주의하고 경청해야 하며, 저들의 경험과 관찰력에 도움을 받아야 하며, 그들의 의논을 들어야 한다(욥 32:6, 7).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체면과 풍체에 존중을 바쳐야 하는 노인이란 바로 직무상의 연장자들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발이 연령상의 연장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경우의 연장자이든, 우리는 부모에 대하듯 존중을 바쳐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두 가지 종류의 연장자들을 존귀케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한다. 신앙은 훌륭한 예의 범절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마땅히 존경해야 할 자에게는 믿는 자들도 존중을 바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어린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하게 행하는 것" (사 3:5; 욥 30:1, 12)은 그 나라가 크게 타락하고 무질서해졌다는 큰 증거이다. 연로한 자는 존중을 받아야 하고, 연소자는 존중을 바쳐야 한다. "선배(장로)들에게 순복하고 겸손히 대하는 것" 은 젊은이들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덕이기 때문이다(벧전 5:5).
Ⅵ. 외국인들에게 친절하라는 부탁이 있다(33, 34절). 하나님의 율법과 또 그의 섭리는 다른 민족보다 이스라엘 민족을 지극히 존귀케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다고 하여 다른 모든 민족을 짓밟을 수 있다고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자기 민족을 다같이 다름없이 존귀한 민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다른 민족을 경멸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서는 안 된다. 결코 안 된다. "너희는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라. 오히려 그들을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그들을 너희 민족 자체처럼 사랑하라." 물론 이 타국인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를 말하여, 할례는 받지 않았고 이스라엘인들의 의(義)에로 개종되지 못했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신앙의 문턱에 들어선 개종자라는 것이 가정되어 있다. 그러한 자가 이스라엘인들 중에 체류할 때에는, 그들을 괴롭히거나 압박하거나 거래에서 그를 속이거나 자기들의 율법과 풍속을 모른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따위의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인들은 타국인을 속이는 것을 자기 백성을 속이는 것과 똑같은 죄악으로 간주해야 했다.
(유대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은 그(타국인)가 한 타국인이라는 것은 물론이요, 예전에 우상을 숭배한 일이 있었다고 비난하는 일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타국인들은 고아와 과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었다. 무기력한 자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영예이기 때문이다(시 146:9). 그러므로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어떤 고생을 시키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타국인도 하나님의 은총에 반가히 영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하나님의 은총에로 초대해야 하며 그들의 올바른 견해에 신앙을 천거해야 한다. 나그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인류의 공통 아버지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행동이요 관대한 일이다. 다른 나라의 풍속과 언어를 가진 민족일지라도 하나의 혈통에서 모두 지음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하나 첨부되어 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었음이니라. 그 때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나그네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하며, 그 때(애굽에 있을 때에) 너희들이 대접받고 싶었던 그대로 지금 그들(나그네들)에게 대접해 주어야 하느니라. 너희는 나그네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존귀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지금 나그네들인 저희들을 업신여기기 쉽지만 저희들의 나중 형편이 어떠할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Ⅴ. 저울질에 공정을 기하라는 명령이 나타나 있다. 거기에는 결코 속임수가 없어야 된다고 했다(35절). 또 정확을 기하라고 했다(36절). 우리도 무게를 잴 때나 측량에서 공정을 기하는 체한다. 그러나 만약 거짓 측량을 하면 그것은 타락된 재판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핑계삼아 사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소매치기나 노상강탈보다 더 악한 것이다. 파는 자는 저울에 맞게 충분한 양을 달아 주어야 하고, 사는 자는 거기에 맞도록 충분한 금액을 치러야 한다. 이런 모든 상거래가 공정한 저울과 추와 도량형기도 없이 행해져서는 안 된다. "아무도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그런 일이 비록 인간에게는 숨겨질 수 있으나 "그 같은 모든 일의 복수자이신 하나님" 께는 드러나고 말기 때문이다(살전 4:6).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면서 본 장은 끝을 맺는다.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37절).
다음사항을 명심하자.
1. 우리는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행하지 못하기가 쉽다.2. 하나님의 율례를 단순히 잘 알기만 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사회 생활 속에서 양심을 지키지 않는다면 날카로운 사고(思考)를 지닌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정직한 심령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유의하느니라(시 119:6). 많은 경우에 우리의 손은 꼭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수가 많지만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법도를 항상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맞도록 의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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