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출애굽기 33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33:1

책망받은 이스라엘(출애굽기 33:1-6)

Ⅰ.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준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아직도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좋지 않은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그들이 앞으로 계속 굴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것을 그들에게 알려야만 했다.

1. 하나님은 그들의 본성을 말씀하실 때에 "목이 곧은 백성" (3,5절)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붙여 주셨다. 하나님은 "가라, 가서 그들에게 그렇게 말하라" 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들 자신보다 그들을 더 잘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은 그러하라고 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율법의 멍에 아래로 두고, 당신의 계약의 굴레 안에 있게 하려 했으나, 그들은 목이 굳어 그런 일에 굽힐(복종할)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하고 비뚤어진 저들의 성격을 고치시고 그들을 올바르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고집통이고 완고했으며, 혁신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그들의 마음의 성격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사람의 행동을 보고 알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보고 판단하신다.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나 선생에 대하여 고집부리는 것 만큼 모독적인 것이 없듯이, 목이 곧은 것 만큼 하나님을 분노케 만드는 것을 없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는 진멸하리니" (5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 벌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서 처리하셨더라면, 그들을 순식간의 파멸로 없애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는 자들은, 자기들의 죄가 마땅히 받을 벌이 무엇이며, 만일 용서받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자기들이 비참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때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욱 찬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3.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 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1절). 그들이 지금 거하는 이 시내산은 하나님의 장막을 세우고 엄숙한 예배를 드릴 곳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게다가 이것(장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지금 거기를 떠나라고 명령하심은 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즉, "그들 마음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본노하심을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4. 하나님께서는 마치 모세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백성인양 그들을 그에게 넘겨 주셨다. 그리하여 가나안까지 그들을 인도하는 일을 그에게 맡기셨다.

5. 하나님은 가나안을 주겠다고 한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실행하리라고 약속하셨지만, 아직은 지급까지 그들의 축복이 되어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그런 특별한 표시를 보이시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지휘하는 일은 저들의 왕인 모세의 일반적인 안내와 수호 천사들의 일반적인 호송 아래 맡기셨다. "너의 수호자로는 내가 천사들을 네 앞에 보내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악한 천사들이 너를 곧 멸망시킬 것이니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으리니, 내가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2,3절).

천사가 하나님보다 더 참을성 있고 자비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천사에게 무례히 행하는 것은 세키나 곧 하나님의 엄위하심 그 자체에 대한 무례 만큼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누리는 특권을 활용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닌 특권이 크면 클수록 위험도 더 크게 따라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6. 하나님은 어떻게 그들을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분처럼 말씀하셨다. 정의는 "그들을 처단하여 진멸시키라" 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는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시느냐고 말한다(호 11:8).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겠노라" 고 말씀하셨다. 즉, "너희는 참회의 자세를 가지라. 그리하여 이 쟁론이 너희에게 유리하게 매듭짓도록 하라. 그러면 자비가 심판을 이길는지도 모르리라(5절).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자비를 베풀리라는 뚜렷한 암시임을 명심하자.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기 원하셨다면, 목이 곧은 백성들에게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능히 알았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의 죽음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을 돌이켜 회개케 하라. 그리고 나서야 자비가 할 바를 알리라. 그렇지 않으면 자비도 할 바를 모른다.

Ⅱ. 메시지를 받은 그 백성은 슬픔에 잠겼다. 하나님이 저들과 특별히 함께 하는 은총은 누리지 못하리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불행한 소식이다.

1. 그러므로 "그들은 슬퍼했다" (4절). 하나님께서 분노하여 물러가시도록 만들었던 저들의 죄를 슬퍼했다. 또한 그들의 죄에 대한 이 가장 괴로운 처벌을 슬퍼했다. 이스라엘 백성 중의 3,000명이 레위족속의 칼에 단 번에 거기서 죽어 넘어졌을 때에도, 그들이 그것 때문에 슬퍼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랬다면 저들의 죄는 용서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은총을 거절하셨을 때에 그때에 그들은 슬퍼했고 괴로워했다. 죄가 가져오는 온갖 쓴 열매들과 결과들 중에서도, 진정한 참회자가 가장 슬퍼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들을 떠나가신다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들에게 임재하시지 않는 한 그것은 별로 기쁨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가나안 땅 그 자체는 조금도 기쁠 것이 없다. 저들에게 그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므로 슬퍼했던 것이다.

2. 큰 수치와 굴욕의 표시로서, 옷을 입지 않은 자들은 "그들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했고" (4절), 옷을 입었던 자들은 "그 산에서" 또는 혹자들의 말대로 "산에 멀리 떨어져서 저들의 단장품을 떼어냈다" (6절). 아마 세리와 같이 (장막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장품을 제하라" 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5절). 그러므로 그들은 그렇게 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보면, 그들의 깊은 슬픔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고, 특별한 뜻으로 보면 금송아지 만드는 데에 귀고리를 내어 주었던 자기 자신들에게 대한 거룩한 보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들의 죄악을 위한 경비를 부담하느라고 단장품(장신구)을 내어 놓은 자들은, 이제 저들의 죄에 대한 슬픔과 수치를 표하기 위하여 그들의 단장품을 떼어버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여호아 하나님께서 통곡하며 애소하고 명하실" 때에(사 22:12), 그런 때는 맛있는 떡을 먹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단 10:3), 우리의 장신구들도 제거해야 한다. 심지어 보통 때에는 매우 품위 있는 것들도, 굴욕의 날 또는 공동체 전체가 당하는 재난의 때에는 부당한 것이요, 빛을 잃고 만다.(사 3:18)

 

33:2 없음.

 

33:3 없음.

 

33:4 없음.

 

33:5 없음.

 

33:6 없음.

 

33:7

재개된 통신(출애굽기 33:7-11)

여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저들의 굴욕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분노의 징표가 또 한 가지 있다. "모세는 장막을 취하였다" 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 자신과 자기 식구들을 위해 친 장막이 아니었다. 그 장막은 모세가 그 안에서 말씀을 전하고 소송 사건들을 접수하며, 하나님께 질문했던 곳(말하자면) 그들 진의 회의소였던 것이다.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밖에,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쳤다" (7절). 이것은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장막에는 합당치 않게 되어 버렸으며, 게다가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께서 그들과 불화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셨다. 여호와는 악한 자를 멀리하신다. 마찬가지로 성전이 죄로 더럽혀졌을 때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을 떠났던 것이다(겔 10:4; 11:23).

하나님께서 그의 장막을 옮기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한 표시라는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규례는 그의 은총의 열매이며 그의 임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규례가 우리에게 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장막은 나중에 세워야 했던 그 장막의 한 설계도나 모형이었을 것이다. 즉 모세가 산에서 본 그 형을 보고 급히 그린 설계초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공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요, 얼마 동안 하나님과 모세가 공무로 만나는 회막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진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그것은, 저들이 받은 자비를 거짓된 망상 때문에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진 가운데 세워졌을 그 영광스런 집을 이제는 잃게 되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다. 자기들이 빼앗긴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저들이 알았으리라.

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화해하시라라는 희망을 많이 품고 있었다.

1. 비록 장막은 옮겨졌지만, 아직도 여호와를 찾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장막을 따르도록 허용되었다(7절). 모세는 물론 각 개인들도 이 문제에 대한 중재자로서 하나님께 청원할 수 있도록 초대되었고, 또 그럴 수 있도록 저들에게 용기가 주어졌다. 그들이 "진 밖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이 저들에게 돌아오기를 간청할 수 있는 한 장소가 지정된 셈이다. 이와 같이 에스라(제2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를 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로 몰려왔다(스 9:4).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실 때에는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신다. 우리는 그에게 구하여야 하리라(겔 36:37). 그리고 그의 이름에 감사하면, 그는 찾아질 것이며, 가장 불쌍한 사람의 중재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물론, 여호와를 찾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이 장막으로 환영되었다.

2.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중보하는 일을 담당했다. 모세는 "장막으로 나아갔다" (8절). 곧 협상의 장소로 나아갔다.

그 장막은 아마 이스라엘과 산 중간에 세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장막으로 들어갔다" (9절). 그토록 훌륭한 교섭 위원을 두었으므로, 그 일은 급속히 진행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밑에 있는) 저들의 재판관이 저들의 변호사가 되고, 율법 수여자로 지명된 자가 그들을 위한 중재에 나섰으니,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3. 백성들은 화해를 찾는 아름다운 마음과 매우 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1) 모세가 장막으로 나아갔을 때에 전에는 그를 경멸했던 백성들이 그에 대한 존경과 그의 중재에 대한 전적인 의지의 표시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 했다(8절). 이로써 그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걱정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화해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그 결말을 관심있게 주시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손으로 만들어지지 아니한 성소로 들어가시기 위하여 승천하실 때, 여기의 모세처럼 "구름이 그를 둘러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제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눈이 그를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알현하고 계신 것이다.

(2)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모세와의 회합을 의미해 주는 구름기둥을 보았을 때, 그들은 "다 일어나 각자의 장막에 서서 경배했다" (10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지엄하신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경모심이다. 그들은 영원히 그를 예배하며, 다시는 금으로 신을 만들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기쁨에 넘치는 감사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자비의 표시를 기꺼이 보이셨고 화해의 희망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려 하셨다면,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보여 주지는 않으셨을 것이며, 그들에게 모세와 같은 중재자를 일으키시거나 또 그 중재자에게 대한 마음도 주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모세와 저들의 마음이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주장하는 변호사였다. 또 이 협상이 좋은 결말을 맺으리라는 저들의 기대를 나타내 준다. 이와 같이 우리도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우리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께 경배드려야 한다.

그들이 장막 문에서 경배한 것은, 그들이 공공연히 송아지를 경배했을 때와는 달리 하나님과 모세에게 공공연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뚜렷한 증거이기도 하다.

4.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화해하셨고, 하나님 자신이 화해되기를 기꺼이 바라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1) 하나님은 협상의 장소에서 모세를 만나셨다(9절). 이스라엘 진이 우상으로 더럽혀졌을 때 그 곳을 떠나버렸던 구름 기둥이 이제는 그 진과 약간 떨어져 있는 이 장막으로 되돌아 왔다. 점차적으로 되돌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그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를 만나시려고 내려오신다.

(2)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하셨다(9절).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할 때와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1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어느 예언자보다도 더 명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빛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셨다는 것이요, 또한 그에게는 특별한 자비와 은총을 더 분명히 보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왕이 신하에게 말하듯한 것이 아니라도 "사람이" 사랑하고 친밀히 상의하는 "그의 친구에게" 하듯이 모세에게 말하셨다.

이스라엘인들이 자기들이 변호인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큰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모세가 진으로 돌아왔다" 는 사실 때문에 또 한 번 용기를 가졌을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와서 이 문제의 결말이 좋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라고 이야기해 주려고, 또 그가 오랫동안 없으면 저들이 실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속히 회막으로 되돌아가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여호수아를 회막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왜냐하면 영광의 구름이 회막의 "문 앞에 서 있는" (9절) 동안, 회막을 비워 놓는다는 것은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가 없는 동안, 만약 하나님께서 구름에서 뭔가를 말씀하신다면, 그 말씀을 들어야 하므로 여호수아가 거기 남아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33:8 없음.

 

33:9 없음.

 

33:10 없음.

 

33:11 없음.

 

33:12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모세(출애굽기 33:12-23)

모세는 장막 문으로 되돌아 왔다. 거기서 그는 두 가지 큰 은혜를 겸손하는 끈질기게 간청한다. 그는 왕으로서 하나님과 담판하여 두 가지 모두를 이루는 데에 성공한다. 여기에서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그리스도)의 말을 언제나 들어 주신다.

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그러나 모세는 가나안까지 가는 이스라엘의 남은 노정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승낙해 달라는 것을 매우 열심히 간구했다. 그 백성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했지만, 모세의 기도가 승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돌이켜졌던 것이다(32:14). 그러나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로운 임재와 그것으로부터 오는 모든 이익과 위로가 없었다. 그러므로 모세는 이것이 회복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하여, 우리는 저주를 면케 될 뿐 아니라 축복의 보증도 얻는다. 우리는 멸망에서 구원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자격도 얻게 된다.

모세가 이 사정을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히 아뢰었으며 그의 입에 얼마나 쟁론이 가득했는가를 살펴보자. 또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표현하기 위하여 얼마나 값진 말을 했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이스라엘의 복지에 얼마나 깊이 관심했었는가를 보자. 또 그는 어떻게 탄원했고, 어떻게 성공하는가?

1. 그는 어떻게 탄원하는가?

(1) 그는 하나님 자신이 자기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고 위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렇게 그는 시작한다. "여호와여, 나를 고용한 이는 바로 주 당신이니이다. 주는 나를 인정하시지 않으려는 겁니까! 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겠습니까? "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는, 하나님 자신이 필요한 것을 도와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오, 여호와여, 주는 내게 큰 일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그것을 수행해야 할 지를 모르는데도 나를 버려두십니까?" 진실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와 능력을 주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활용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리라는 은혜스런 표현을 나타내 달라고 간구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친구와 심복처럼 여기사 이름으로도 너를 안다고 하셨나이다. 또 너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내게 은총을 입었다고 하셨나이다." 모세는 또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참으로 주 앞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13절).

그는 은혜를 상실한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호의를 나타내셨겠는가 하는 것은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에 탄원의 강조점을 두었다. 이것은, 비록 모세가 그러한 은총에 불합당하게 되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은총의 권외로 쫓겨난 것은 아니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 주장했다. 즉 "여호와여, 만약 주께서 나를 위하여 뭔가를 하시겠다면 이 백성을 위해 하여 주십시오" .

이와 같이 우리의 주 예수께서도 그의 중재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계신다. 그는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시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히 불쾌해하시는 우리를 위하여 자비를 얻어 낸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 (엡 1:6 참조). 마찬가지로 공공심을 가진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과 자기들의 관계와 동시에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즐겨 활용한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내가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은 것" 을 알겠나이다고 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한 모세가 구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지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신다는 데에 대한 최상의 증거가 됨을 명심하자. 이로써, 우리의 의무를 실행하도록 우리를 지도하고 고무해 주는 은총을 우리의 마음 속에서 깨달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 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3) 그는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극히 무가치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하나님과 모종의 관련이 있다고 넌즈시 말한다. "주께서 기사를 행하시어 친히 구원하시고 주와 계약을 맺은 백성,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여, 저들은 주의 것이옵니다. 그들을 버려두지 마옵소서." 성이 난 아버지는 이렇게 하셨다. "나의 자식은 어리석고 고집이 세다. 그러나 그는 나의 자식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버릴 수 없다."

(4)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매우 중대한 가치로 여겼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리라" 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는 그 말에 달라 붙었다. 마치 그 말 없이는 살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자처럼 했다. 즉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15절).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로가 안전하지도 못할 것이며, 그들의 야영이 순조롭지 않을 것을 알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조차도 두려워하는 자처럼 말했다. "하나님 없이 가나안으로 나아가느니, 차라리 여기 광야에 누워서 죽는 게 낫습니다" 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가장 잘 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모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열심이었는가를 관찰해 보라.

그는 부정의 응답은 받을 수 없다는 듯이 간청한다. 즉 "주의 은총을 받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 여기에 머무르겠나이다" . 마치 야곱이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양보를 얻었는가를 관찰해 보라. 모세에게 주어진 자비로운 암시들은 오히려 그를 더욱 끈덕지게 졸라대도록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우신 약속과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리라는 약속은 우리의 신상에 용기를 줄 뿐 아니라, 기도의 열의를 일으켜 줌이 틀림없다.



(5)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주장한다(16절). "우리를 지켜보는 그 민족들에게 나와 주의 백성 (나의 모든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이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은 줄을 어떻게 알리이까? 구별하는 은총을 베푸사 천하 만민들과 구별하소서! 우리가 정말 영광된 것을 어떻게 나타내겠습니까? 그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아니니이까? 주의 임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이웃 민족들과 같은 수준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민족이라거나 큰 은총을 받은 민족이라는 말을 하지 마소서,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모세는 장소에 강조점을 둔다. "여기, 주께서 우리를 인도해 온 이 광야에서, 주께서 우리를 떠나신다면, 우리는 분명코 길을 잃을 것입니다." 이 광야 세상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성령과 은총을 보내시사 지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위로하심으로써 우리와 특별히 함께 하시니, 하나님의 임재야 말로 우리에게 특별하신 사랑을 보이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됨은 물론이요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더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2. 어떻게 그가 성공하는 가를 관찰하자.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증을 얻었다.

(1) 그 은총은 모세 자신에게 대한 것이었다(14절). "내가 너로 쉬게 하리라. 이 문제에는 네가 안심하도록 만들리라. 그것이 어떻게 되든, 너에게는 만족하게 될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안식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단 12:13).

(2) 모세 때문에 그 백성에게 은총이 되었다. 모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은총을 약속하는 그런 대답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약속을, 그것도 뚜렷한 약속을 얻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편할 수 없었다.

자애롭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들은 자기들만 하늘 나라에 이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친구들도 또한 그곳에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세는 이 문제에서도 또한 승리했다. 하나님은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다" 고 하셨다(17절). 모세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는 터무니없는 간청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간청할 용기를 받았다. 하나님은 모세가 구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넉넉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셨다." 기도의 힘을 보라, 기도는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눅 18:1)고 촉구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풍요함을 보라. 하나님은 이미 많은 것을 행하셨다. 그러나 기꺼이 더 많은 것을 행하실 것이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는 이것도 하리라" 고 말씀하셨다(17절). 이러한 모세의 모형 속에서, 그리스도의 중재의 승리를 깨달으라.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자를 위해 중재하고 계시며, 그가 곧 그 중재가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이시다. 중재가 성공되는 것은 전적으로 모세의 공로이다. 그에 의하여 중재되는 이스라엘인들의 어떤 공로는 전혀 아니었다. 곧 "너는 내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다" 는 그 사실 때문이다.

이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은 완전히 그들과 화해하셨고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에게 다시 시작되었고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잘 되었다. 이후로 더 이상 금송아지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나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나이다" (미 7:8).

Ⅱ. 이러한 성공을 거두고 나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 을 보기를 간청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서도 역시 뜻을 이룬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모세는 겸손히 요청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8절). 모세는 근래에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낸 바 있으며, 거기서 오랫동안 계속 머물렀으며,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좀 더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해도, 역시 하나님을 좀 더 잘 알기를 탐낸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눈으로 보듯이 분명히 알게 되기까지 한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은총을 얻어 내는 데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기도의 성공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는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구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자비를 받는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은혜를 지키고 개발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쇠는 달았을 때에 때려라.

"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나로 (그것을) 보게 하소서" (글자 대로 읽으면 그렇다). 즉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을 보게 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도 견딜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모세가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본체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모세는 지금까지는 구름기둥이나 불기둥에서 들려오는 음성만 들었으니,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신적 영광의 어떤 현상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 이스라엘이 그들 스스로를 부패케 하지 않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어떤 모습을 그들이 본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소간 보더라도 그런 위험이 없기를 바랐던 것이다. 모세가 원했던 것은 그가 이제껏 보아 왔던 것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순수하게 그의 신앙과 헌신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욕망은 비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그 욕망 안에는 인간의 결함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으로 이 세상에 걸어 가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화해를 말해 주는 표시와 그들에게 약속했던 하나님의 임재의 보증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요청한 바의 내용을 물랐다.

2. 이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응답이 있다.

(1) 하나님은 용납할 만한 것이 못되며, 모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거절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20절). 하나님의 영광을 완벽하게 본다는 것은 현 상태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며, 모세 자신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비하면 인간은 비천하다. 합당치 못하며, 연약하며, 감당할 수 없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보좌 앞을 가리우시고 그의 구름으로 펴시는" (욥 26:9)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서는 (즉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과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23절)고 하셨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원한 축복이 되도록 장래를 위하여 유보된 영예이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하며, 그것 없이 사는 것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한 세계에 있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에 대한 기쁨은 기다려야 한다. 그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다(요일 3:2).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 하나님의 높음과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바 깊음을 경배하자.

이보다 오래 전에 이미 야곱은, 그가 "하나님을 대면해 보았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 고 경탄하여 말했었다(창 32:30). 죄인은 그의 재판장인 하나님 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주의 영을 통하여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주의 영광을 벗은 얼굴로 보듯이 보리라" (고후 3:18).



(2) 하나님은 모세를 충분히 만족케 할 만한 것을 허락하셨다.

[1] 모세는 기쁜 소리를 듣게 되었다(19절).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 하나님은 그가 이스라엘과 화해하심으로써 자비를 베푸셨다는 놀라운 증거를 모세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고 있는 선한 형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샘 솟고 있는 선한 형상, 곧 "모든 선한 형상을" 모세에게 보이려 하셨다. 이것은 그의 요청에 대한 만족한 응답이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고 모세가 말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내가 네게 나의 선함을 보이리라" 고 하셨다. 하나님의 선함이 그의 영광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의 위엄의 영광보다는 자비의 영광으로 자신을 알리시고자 하신다. 우리는 "여호와와 그의 선하심" 까지도 경외해야 하기 때문이다(호 3:5). 특별히 이 하나님의 선하심이라는 영광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주권을 말한다. 곧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 주고픈 자에게 은혜를 주노니라" 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권을 쥐고 있는 주인이시므로, 하나님 당신의 뜻에 따라 선물을 다르게 내려 주시며, 아무에게도 빚진 자가 아니시다. 또한 아무에게도 계산의 책임을 지고 있지 않으시다. (그것을 가지고 그의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없겠는가?)

또한 하나님의 자비의 모든 이유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결코 그의 피조물의 어떤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다만 자신의 뜻에 따라서면 자비를 베푸신다. 그가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진노하고 싶은 자에게 진노하리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의 진노는 언제나 공정하고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은혜 주고 싶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느니라" 고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특권으로 마음대로 저주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는 당신의 특권을 쓰신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거부하시는 은혜를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게 주시므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응수하기 위하여 바울 사도는 이 구절을 인용했다(롬 9:15).



[2] 모세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으면서도 자기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문제는 모세의 생명이 안전하면서도 만족할 수 있도록 조절되었다.

첫째로, "반석 틈" 에서 안전하리라고 했다(21,22절). 그 반석 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눈부신 빛과 삼키는 불로부터 보호 받도록 되있었다. 이 반석은 물이 나왔던 호렙산의 그 반석이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니라" 고 한다(고전 10:4).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안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반석 틈 안에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진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숨기워진 자들을 친히 보호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 (합 2:14 참조)을 갖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 뿐이다. 이 반석 위에 서서 숨기워진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위로를 삼을 수는 없다.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23절). 그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보았지만 하늘에 있는 자들만큼 잘 본 것은 아니다. 사람의 위엄도 얼굴에 나타나 있다. 또 얼굴을 보아서 서로 안다. 얼굴을 보면, 우리는 그사람의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앞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의 등만 보며, 또 그 때 우리는(소위) 그를 일견(一見)했다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로 그 정도로 밖에는 볼 수 없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눈여겨 보았다는 말이 없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 보았다(개역: "뵈었는고 ")고만 할 뿐이다(창 16:13). 우리는 다만 "거울을 통해서 희미하게" (고전 13:12)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役事)을 볼 때에, 또한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대왕의 행위를 관찰해 볼 때면, (말하자면) 하나님의 등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미한 이성에 의해서는, 또 우리의 말쏨씨로는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다. 마치 우리가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때의 모세에게는 등만 볼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그러나 오랜 후에 그가 그리스도의 변화 산상의 모습을 증거할 때에는, "해같이 빛나는 그의 얼굴" 을 보았다(마 17:2).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께 관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만을 충실히 활용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더 밝고 영광스런 광경이 쉬이 우리에게 열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가진 자에게 더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33:13 없음.

 

33:14 없음.

 

33:15 없음.

 

33:16 없음.

 

33:17 없음.

 

33:18 없음.

 

33:19 없음.

 

33:20 없음.

 

33:21 없음.

 

33:22 없음.

 

33:23 없음.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