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의 추격을 받는 이스라엘인(출애굽기 14:1-9)
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행동과 숙영에 관한 지시를 모세에게 주셨다. 그 지시들은 너무도 놀라운 것들이어서, 만약 모세가 미리 그와 같은 명령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좀처럼 따르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명령에 대해서는 주저함이나 불만에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사전에 그들이 가야 할 곳을 가르쳐 주셨다(1,2절). 그들은 광야의 끝에 도달에 있었는데(13:20), 거기서 한 두 구간만 더 가게 되면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로 정해진 호렙 산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곧장 나가는 것을 금하시고 갑자기 그들을 가나안 오른편으로 돌이키사 홍해쪽으로 나아가게 하신 것이다. 그들이 주둔했던 에돔에서는 도중에 그들의 진로를 답해할 만한 바다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와 같은 시련 가운데로 직접 인도하셨고, 그리하여 그러한 시련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서 있는 한 반드시 그들을 구하여 주신다는 확신을 주시고자 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도중에 어려움을 불러 일으키시어, 그 난관을 진압하시는 영광을 취하시고 그의 백성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2. 하나님께서 내린 이 이상한 지시 가운데는 어떤 계획이 있는 가를 모세에게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어도 모세는 절대 복종해야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라도 숨기신 일이 있었는가? 없다. 모세에게는 다 알려 주셨다. 곧 다음 사실들이다.
(1) 바로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계획을 하고 있다는 사실(3절).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시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이 길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이다(4절). 바로의 명민한 판단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기진맥진해졌으므로 그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잘못 인도하여 더욱 더 큰 곤란을 주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로를 그렇게 굽게 하셨으니 그들이 필경 당혹과 위험에 빠져 있으리라고 신이 났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바로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1] 모든 인간들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는 자들에게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2]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 계획들이 오히려 교회의 적들을 종종 멸망케 한다. 교회의 적들의 교만과 악함은 하나님의 섭리가 키우고 있는 것이니, 때가 되면 필경은 멸망받는 것이다.
Ⅱ. 바로가 자신의 악의와 복수심에 도취되어서 이스라엘을 추적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자가 그에게 백성이 도망친 사실을 아뢰었다" (5절)고 했다. 아마도 바로가 그들을 떠나도록 허락했던 그 때는 너무나 놀랐던 때인지, 그 놀라움이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은 보내는 데 동의를 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보고를 접하자 이스라엘이 자기에게 모반을 일으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이 쉽사리 정당화된 것은 거기에 온갖 거짓 구실을 붙이게 되고 또 쉽사리 비난을 당하는 것이다.
1. 이리하여 바로는 그가 이스라엘을 떠나도록 묵인했던 사실을 크게 후회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떠나 보낸 일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저지른 그 일에 대해서 스스로 화를 내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그와 같이 일을 행했던고?"(1) 이스라엘는지 자유를 얻게 되고 그들은 노동 자원과 또 그 학대함으로써 오는 쾌락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격분했다. 교만한 박해자들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을 밥먹듯이 짓밟아 버리며 그들에게 "우리가 넘어 가도록 엎드려 절하라" 고 말하는 것을 다반사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자기들의 손발이 묶였다는 사실로 매우 화가 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자유는 그의 대적들에게는 매우 큰 불만이 된다(에 5:12, 13; 행 5:17, 33).
(2) 지금 생각할 때 그들이 그 일을 방해했어야 옳았다고 생각되었고, 또 그들이 끝까지 버틸지언정 항복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되므로, 그들 스스로 그 일에 찬동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화나게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시기와 분노를 그들 자신에게 대한 고통으로 변화시키신다(시 112:10).
이스라엘을 보낸 것은 잘한 일이었으며 만일 그들이 정직한 태도로 그 일을 행하였다면, 그 일을 돌이켜 볼 때 큰 위로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그 일을 행한고로 그들은 스스로를 큰 바보로 여기게 되었고, 분노하여 그 일을 원상 복귀시키고자 했다. 사람들이 저들의 선행을 후회한다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범죄적인 것이라는 점을 깨닫자. 저들은 자기들의 정의와 자선, 그리고 저들의 회개까지도 후회한다(렘 34:10, 11).
2. 바로는 가능하다면 그들을 다시 환원시키거나 복수하려고 마음 먹었다. 이 일을 위하여 바로는 그의 군대를 모으고 병거와 마병을 총동원했다(14:7). (왕의 일은 화급을 다투므로 도보로 갈 수도 없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을 다시 종으로 삼을 수는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6,7절). 지금 바로는 먹이를 빼앗긴 사자와 같이 울부짖으니 그의 격분이 얼마나 큰가를, 그리고 그의 교만한 마음이 무례와 격분으로 부풀었고 거기다 조롱으로 당황하여 그의 노여움이 어떠하며 복수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상상하기는 쉽다. 이제는 모든 재앙이 전혀 없었던 것 같이 되었다. 그는 그의 첫아들을 슬피 울면서 장사지냈던 일조차도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 단지 이스라엘이 자기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사실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 하나님도 감당할 수 없를 만큼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백성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품을 수 있었다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들 그 마음의 욕심대로 내버려 두사, 그와 같이 완악하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담대하게" 나아갔다고 했다98절). 곧 그들의 길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굽인거나 그 뒤를 추격하였다" (9절). 진심으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사탄의 유혹과 위협을 받게 될 것을 각오해야 함을 알자. 사탄은 결코 유순하게 자기의 일을 떠나려 하지 않으며, 격노를 발하지 않고는 결코 나가지 않는 것이다(막 9:26).
" 가만히 있으라" (출애굽기 14:10-14)
Ⅰ.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그들이 바로의 추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몹시 두려워했다(10절). 이스라엘인들은 그 적의 강함과 맹렬함을 알고 있었고 자기들의 약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 수효는 많았으나 모두 도보로 가고 있는 중이며 무장도 하지 않았으며 훈련도 받지 않았을뿐더러, 오랜 노예 생활로 불안해졌고 더구나 지금은 야영 생활을 하므로 도망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쪽은 바위 투성이의 언덕으로 끝이 없는 비하히롯이고, 저쪽은 애굽 변경에 있는 요새와 수비대가 주둔해 있는 믹돋과 바알스본이 있다. 그들의 이에는 바다가 있고 그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도망칠 길이라고는 위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로 거기에서 (위에서) 그들의 구원의 손길이 뻗쳐 온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며 천성을 향해 가면서 의무를 다하노라면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는" 큰 시련에 부딪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고후 4:8).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와 같은 곤경 속에서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의 조상 야곱도 그리하였다(창 32:7). 밖에 싸움이 있을 때에는 안에도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두려움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 때의 두려움은 선한 점도 있었고 악한 점도 있었다.
1.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들의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릎 꿇게 하시려고 시험을 당하게 하신다.2. 또 어떤 자들은 모세를 원망했다. 그들의 두려움이 그들로 하여금 불평을 늘어놓게 했다(11,12절). 그들은 자포자기했다. 마치 하나님의 팔이 갑자기 짧아져서 어제와 같은 기적은 오늘은 베풀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며, 구원에 대해서도 절망하고 단지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불신은 참으로 용서 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껏 하늘의 불기둥과 구금기둥으로 인도되어 왔다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전능하신 능력이 그들을 실족시킬 수 있으며, 무한히 선하신 분이 그들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상태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모세와 다투었고, 지금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였고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데 이르렀다. 애굽인들은 그들이 일찍이 해 보지 못했던 좋은 일을 해 놓고서도 스스로 화를 내었듯이, 이스라엘인들은 이제껏 베풀었던 자비 중에서 가장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었다. 불신앙의 부조리함은 그렇게 터무니 없는 것이다. 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심경을 토로했다.
(1) 그들은 지금 약간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여 자유에 대하여 천박한 경멸감을 가지고 과거의 종살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노예의 사슬에 얽매여 사느니 보다는 광야에서의 명예로운 죽음이 더 낫다" 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결코 실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의 노예로 벽돌가마 연기 속에서 사는 노예보다는 광야의 넓은 대기 속에서 하나님의 자유인으로서 살겠다" 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그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하여 그 노예의 집에서 생매장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화내고 있었다.
(2) 또한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신실한 일꾼이었던 모세에게서 배은망덕하였다. 그들은 마치 모세가 그들을 함부로, 그리고 불친절하게 취급이나 했던 것처럼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모세가 무엇을 하였든,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에 의한 것이었음은 논의의 여지가 없이 명백한 것이다. 그들은 모세와 다투었던 전과 같은 소동을 (마음의 괴로움으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다시 반복하면서 이렇게 자기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버려 두라고 애굽에서도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부당한 언사다. 그러나 그 때는 변명될 여지가 있었다. 그 때는 지금처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그렇게 많이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굽인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기적들을 경험하고도 잊어버렸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의 기적들을 체험하고도 곧 잊어버렸다. 애굽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져 자신들의 멸망을 초래하게 되었다. 애굽인들이 열 가지 재앙을 만났던 것 같이, 그들은 열 번이나 반역한 후에-이것은 그 첫 번째이었지만(민 14:22)-그들은 광야에서 죽음을 선고받게 되었다.
Ⅱ. 모세는 이 위급에 처한 그들을 때에 알맞게 격려했다(13,14절).
모세는 이 어리석은 자들을 저들의 어리석음에 따라 대응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그들의 원망도 참으시고(당연히 책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망념도 탓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두려움도 주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모세도 그들의 모욕을 잘 감수했음이 틀림없다. 그들을 꾸짖는 대신에 그들을 위로했다. 애굽의 위협이나 이스라엘의 두려움, 그리고 그들의 불평으로 인하여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오직 구원이 속히 완성되리라는 확신을 가지라고 위로 했다. "두려워 말라." 근심에서 떠날 수 없고 공포를 이길 수 있을 때에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도하고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결코 그것 때문에 우리의 신앙과 희망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요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1.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며 그들의 추격자를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성취하실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었고 또 저들도 그러한 신념을 가지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가 멸망을 받을 것이라고 모세에게 확신시키셨으며. 모세는 그가 받은 바와 동일한 위로로 그 백성을 위로했다.2. 모세는 그들에게 이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결과를 조용히 관망하도록 타일렀다. "스스로 살기 위해 싸우거나 도망칠 생각을 말고 가만히 있을지라. 우왕자왕하지 말고 너희의 인도자만을 따르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며 그것을 주시하라. 그러면 너희의 불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어 네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나님께서 이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실 위대한 구원을 화평한 마음으로 대망하라. 너희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라. 너희는 적들을 향하여 크게 외칠 필요도 없는 것이니라" (수 6:16). 그 일은 저희들의 아무런 협력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련 가운데로 인도하셨다면, 그가 친히 그들을 다시 인도하여 내실 것이다.
(2) 대단히 큰 난관이나 큰 희망에 처한 때에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요하고 침착하게 가다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행하거나 하나님의 사업을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형편에 처하기 때문이다. "네 힘은 잠잠히 있는 것이니라" (사 30:15). "애굽의 도움도 헛되고" 그 위협도 헛되기 때문이다.
구름기둥(출애굽기 14:15-20)
Ⅰ.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주어진 지시 사항이다.
1. 하나님은 모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셨다. 그는 잠시 기도하기를 멈추고 그의 일을 착수해야 했다. "어찌하여 너는 내게 부르짖느뇨?" (15절) 모세는 그가 비록 이 당면한 난관의 낙관적인 결과를 확신하였지만 기도를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무슨말로 기도하였는지 전혀 알지 못하나, 그는 자기의 심령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께서 그를 이해하시고 주시하실 말을 했음이 분명하다. 모세의 신앙적인 침묵의 기도가 두려움에서 외친 이스라엘인의 고함보다 더욱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였다(10절). 다음 사실에 유의하자.(1) 기도란,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이다. 이것은 기도가 당연한 소원과 끈질긴 소원을 아뢰는 말임을 의미한다.
(2) 또한 한나와 같이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부르짖음도 있다(삼상 1: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불쾌히 여기셨던가? 아니다.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라고 질문은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질문하신 것이다.
[1] 모세의 신앙에 의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이미(탄원이) 허락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너는 탄원하는 심정을 그렇게도 자제하고 있느냐? 충분히 알았노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느니라. 나는 너의 기도를 이미 들었노라" 는 것이다. 그 갈데아 사람은 그렇게 설명한 것이었다.
[2] 모세의 근면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모세는 기도하는 일 이외에도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무리를 지휘해야 하는데, 그 일은 지금 거기에서 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모든 일은 다 그 시기가 있는 법이다.
2. 또한 이스라엘인들에게 명령하여 하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혹자는 생각하기를 모세가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 것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는 의미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우리도 하나님과 화해함이 없이는 앞으로 편안히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모세는 그들에게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명하였었다. 이제 또 명령이 주어졌다. 아마도 그거나 왼쪽으로든 아니면 오른쪽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바다를 향해 똑바로 가라고 말하라" 고 명령하셨다. 마치 그들을 몽땅 실어 나를 수송 선단이라도 있는 듯이 말한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면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똑바로 나아가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우리는 현재의 일에 충실하면서 그 되어지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며, 노력을 다하고는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3.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라고 했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갈 수 있는 데까지 앞으로 나아가게 하자.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가르시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것이다(16-18절).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 뿐 아니라, 애굽을 멸망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가 세우신 계획은 다음과 같다.(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곧 그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물을 가르시기로 하셨다(16절). 물을 가르시던 그 권능은 그들이 넘어가도록 그 물을 열게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물을 갈라지게 하여 그들이 그 사이로 지나가는 그런 방법을 선택하셨다.
구원의 방법은 항상 가장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가축이 골짜기로 내려감 같으니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고 하는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신 것이다(사 63:13, 14).
(2) 하나님께서 바로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의 존재와 위로의 근원이 되신 우리의 위대하신 영주에게 그 은총을 감사하며 영광을 되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이것을 압류하시고 회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손해를 보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을 보라(17절)고 하는 경고가 주어진 것이다. "보라, 내가 그리 하리라." 곧 "그 일을 행하는 이는 나로다" 고 하니, 이는 그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안악해지도록 부채질하지도 말아야 하며, 또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일도 미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니, 하나님께서는 그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강퍅하게 하실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느니라" 고 하는 말은 그의 능력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전능자 외에 누가 그 마음을 강팍케 할 것이며 또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욥 23:16)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 고 하는 말은 그의 정의(正義)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오랫동안 거부해 온 자들을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삼으심은 그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그 말은 그 완고하고 교만한 반역자에 대한 승리를 내포하고 있다.
" 내가, 곧 내가 그를 낮추고는 효과적인 조처를 취할 것이니라. 굽힐 줄 모르는 자를 내가 꺾을 것이니라." 이것은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하리라" 고 말씀과 같은 표현법이다(사 1:24).
Ⅱ. 적에게 가장 노출된 이스라엘 진영에 파수를 세우심이다19,20절). 곧 "그 뒤에" 있었다고 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움직이던 "하나님의 천사" 가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진의 앞에서" 행하였으나, 거기에는 경계가 필요 없게 되자(바다를 관통해 나가는 그 길은 잃어버릴 염려도, 앞으로 나가라는 명령도 필요없기 때문에) 뒤쪽으로 옮겨가 그들과 애굽인 사이를 막는 장벽이 되었다. 뒤에는 경계가 필요했다(애굽 군대들이 이스라엘인의 제일 뒤쪽에 있는 사람들을 막 붙잡을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기둥은 이스라엘 진을 보호할 뿐 아니라 그 바다를 밝게 비추는 데에 쓰여졌다. 또 그와 동시에 애굽진은 흑암으로 혼돈케 하여 목전의 먹이를 잃어버리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는 죄악과 죄인들에게는 암흑과 어두움의 면을 보이나 참 이스라엘인에게는 광명과 기쁨의 면을 보이신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어떤 자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구원주가 되었고 또 어떤 자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구원주가 되었던 것이다.
빛과 어두움을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태초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신 그 분이(창 1:4) 지금도 그 둘을 만드시고(사 45:7) 애굽인에게는 흑암을, 이스라엘인에게는 광명을 각각 주셨다. 이것은 빛을 유산으로 받을 성도들의 유업과 위선자들이 영원히 받을 완전 암흑 사이의 영원한 구별에 대한 한 전조를 보이신 것이다.
애굽인들의 멸망(출애굽기 14:21-31)
이것은 신약과 구약에서 모두 종종 언급되고 있는 바 이스라엘 자녀들 앞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가 갈라진 기적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그 일이 가나안인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이 되었고 (수 9,10), 이스라엘인에게는 찬미와 승리가 되었던 것이다(시 114:3; 104:9; 136:13, 14). 그것은 또한 세례의 모형이 되었다(고전 10:1, 2).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했음은 사람들의 개심을 상징했으며(사 11:15), 애굽인이 그 안에서 멸망했음은 회개하지 아니하는 모든 죄인들의 최후 파멸의 상징이었다(계 20:14).
Ⅰ. 이것은 바다를 가르시고 물 가운데에 행로를 만드심으로써 자연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 주는 한 실례이다. 그 갈라진 부분은 2-3리이그(6-9마일)가 넘는 바다의 만이었다(21절). 그 사건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한 가시적 표징은 모세가 그 바다 위에 팔을 뻗치는 일이었다. 이것은 모세가 자신의 사명감에 대한 확신과 그의 민족의 은총을 위해서 드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음을 의미한다.
강한 동풍은 자연의 표징이었다. 그것은 이 사건이 바람과 바다도 복종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욥기에는 이에 대해 언급하기를, "주께서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애굽을 말함)을 쳐서 파하셨다" 고 하였다(욥 26:12).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난관이라도 그 백성이 통과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길이 없는 곳에서는 길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자연의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으시매, 그가 원하시기만 하면 그 법칙들을 파하시기도 하시니, 불이 불어도 타지 아니하며 흐르던 물도 흐르지 않게 하실 수 있다.
Ⅱ.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배푼 기적적인 은총에 대한 한 실례이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맞은편 해안에 까지 도달하였다. 왜냐하면(혹자의 생각처럼) 그들이 선회하여 다시 같은 쪽으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22절). "그들이 바다 가운데 있는 육지로 행하였다" (29절). 구름기둥 곧 "여호와의 영광" 은 그들의 "뒤" 에 있었으므로(사 58:8) 애굽군이 측면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물이 좌우로 그들에게 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아마 아무도 밟아 보지 못한 길을 맨 처음으로 앞장서서 걸어 갔을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그 뒤를 따라 갔을 것이다. 바다 가운데로 지나간 이 행군으로 훗날 있을 광야의 행군이 그들에게 겁내지 않게 느꼈을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 바다를 통과한 자들은 그가 인도하시는 한 어디를 따라가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이 바다를 지나는 행군은 밤에 있었다. 밝은 달빛도 없는 밤이었다. 만월 이후 7일을 지나서였으니 그들에게는 구름과 불의 기둥에서 비쳐지는 빛 이외에는 아무 빛도 없었다. 이것이 그 상태를 더욱 무섭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에는 또한 빛도 비추시고,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동안은 그의 위로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온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시련을 당하더라도 그를 신뢰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일어났고, 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이것을 행하신 그가 무엇을 못하시겠는가? 이 불평 많고 믿지 못하던 이스라엘인들-그러나 "그들의 조상들 때문에 사랑을 받았고" 그들 중 남은 자들을 인하여 사랑을 받았다-을 위해 이 일을 행하신 이가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아끼랴! 우리는 오랜 후에 이 승리의 행렬에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본다(시 66:6). "그들이 도보로 강을 통과했다. 우리는 거기서 주를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고 한다. 또 이 기사가 어떻게 선용되는가를 보라(시 77:11, 16, 19).
Ⅲ. 하나님의 적이요 그의 백성의 적이었던 애굽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정의와 의로운 진노의 한 실례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그들은 얼마나 얼이 빠졌던가! 그들을 추격하는 데만 정신을 판 나머지 자기들도 이스라엘인들의 뒤를 쫓아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 갔다" (23절). 그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지나난 곳을 우린들 못가겠느냐?" 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굽의 술객들은 그들의 술법으로 모세가 행한 이적을 한 두 번은 따라서 행했다. 바로는 이 사실만을 기억했지 그들이 결국은 창피를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스라엘인은 도보로 가지만, 자기들은 마차와 병거를 타고 가므로 매우 유리했었다. 바로는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고 했었다. 이것을 보아 그가 정말로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러한 모험은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먼 자들 만큼 대담한 자들은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가 그들을 그렇게 눈멀고 무분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 자신의 마음을 완악히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완악케 하시고, 저들의 평화와 안전에 속한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의 눈이 멀이지게 했다. "무릇 새가 그물치는 것을 보면 헛 일이겠거늘.." (잠 1:17) 그들은 너무나 눈이 멀어서 "빨리 그물로 들어가게" 되었다(잠 7:23). 죄인들의 멸망은 그들 자신의 교만으로 인하여 오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서둘러 함정에 곧장 빠뜨리게 하는 것임을 유의하자. 그들은 자멸하는 자들이다.2. 그들이 얼마나 혼란과 당혹에 처했던가! (24,25절). 몇 시간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이 행한 것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갈라진 바다사이로 진군했다. 곧 그들의 목표물을 획득하게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새벽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셨다" 고 했다.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 가운데서 매우 소스라칠 만한 광경을 보고 들었다. 그것은 구름기둥이 자기들에게 덮치기 전에 자기들이 파멸되리라고 전조를 준 셈이었다. 이제 이것은 악한 자의 승리는 잠깐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멸망에 던지시기 전에 먼저 놀라서 절망하게 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제왕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지상의 열왕들을 떨게 만드셨다.
(1) 그들은 세상이 자기들의 것인양 허세를 부리고 교만을 부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됐고 당황해했으며 낭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2) 그들은 기세 좋게 달려 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겁게 짓눌리어 그들 자신도 빠지며 걸음마다 곤란을 겪게 되었다. 길은 점점 깊어지고, 마음은 점점 우울해지며, 그 병거 바퀴는 벗겨지고 차축은 떨어져 나갔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추적하는 자들의 폭력을 막으실 수 있다.
(3) 그들은 사나운 매가 공포에 떠는 비둘기를 덮치듯, 이스라엘의 후미를 나는 듯이 뒤쫓아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면전에서 도망하자" 고 외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곡식단 사이의 횃불같이" 되었다(슥 12:6). 애굽인들이 전에 이스라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듯이 이제 이스라엘은 돌연히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겨 두어야 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려 하나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때늦은 뒤에서야 뉘우치려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굴던 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못살게 하고 만 것이다.
여호와께서 수천의 성도들과 함께 심판하러 오실 때에 권세있는 자들은 이스라엘왕과 "이스라엘의 찾을 피하여"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으려 하나 헛수고일 것이다(계 6:15). 욥기 27장 20절이하의 이야기와 이것을 비교해 보라.
3. 어떻게 하여 그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어 버렸는가? 이스라엘 자녀들이 모두 안전는 하게 해변가에 막 도착하자마자, 모세는 그의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이제까지 그들의 "좌우의 벽" 이 되었던 물이 다시 합쳐지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29절). 모세가 지시받은 대로 행하자 바다는 그 세력이 회복되어 모든 군대를 삼켜 버리고 말랐다(27,28절)죄로 인하여 서로 교만하던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모두 함께 빠져 죽었으니, 살아 도망한 자가 하나도 없다. 발람이 그가 꾀었던 미디안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듯이(민 31:14), 옛 전승에 의하면 바로의 술객들이었던 야네스(Jannes)와 얌브레스 (Jambres)도 그들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1)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물에 빠뜨려 죽였던 이스라엘의 장자들의 피를 그들에게서 갚으신 것이다. 도의 원리가 이자를 받은 셈이다. 즉 어린 이스라엘의 생명을 죽인 대가로 장성한 애굽인의 생명을 취하신 것이니, 두배로 보상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는 의로우신 분이시니, 그의 백성의 피는 그가 보시기에 그렇게도 소중한 것이다(시 40:12).
(2) 하나님은 당신의 사자 모세에게 대한 바로의 그 모든 교만과 무례한 행동을 셈하고 계셨다. 여호와의 사자를 조롱하고 그를 어리석다고 놀려대는 것은 구제될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심으로써(욥 40:12) "바로에게서 영화를 취하셨다." 하나님이 행하신 황폐를 와 보라!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되 잉크로 하지 말고 철필로 바위에다가 영원히 남도록 새겨두라. 여기에 창조주와 그의 요구와 경고와 심판에 도전하던 피비린내 나는 폭군이 누워 있노라!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요, 그 자신의 정욕의 노예이었다. 인간성이나 덕성이나 모든 참된 명예는 철저히 저버린 인간이었다. 그가 여기에 깊이 잠들어 있으니, 그는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영원한 기념비이니라. 이제 그는 산자들의 땅에서는 무서운 공포를 주던 자이나 지금은 지옥에 내려 갔도다. 이것이 바로와 그의 모든 부하들의 운명하였다(겔 31:18).
Ⅳ.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이 큰 일을 그들이 유의하고 잠시 동안 거기에서 좋은 감명을 받았다.
1. 이스라엘인들은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30절). 하나님의 섭리가 조수로 하여금 그 시체들을 떠밀어 올리게 한 것이니, 이유는 다음과 같다.(1) 이것은 애굽인들에게 큰 수치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먹이를 찾던 짐승들과 새들은 "장군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를 먹도록" 불러 모아졌다(계 19:17, 18). 애굽인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들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고 영원히 보존하는 일에 크게 신경을 쓰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애굽의 귀인들의 시체 위에는 지극한 모욕이 가해진 것이다. 지면에 깔려 있는 분뇨처럼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는 저들의 시체를 보라.
(2)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승리감을 더하게 하여 저들의 해방에 큰 감명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눈은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가서 나를 배반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사 66:24)라고 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아마 그 시체들의 옷은 벗겨서 전에는 그들의 이웃이었던 애굽인들에게서 보물들을 가져갔을 것이나(애굽인들은 악의에 찬 추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꺾어 버렸으므로)이후에 다시 되돌려 줄 의무는 없었다. 그들에게서 무기도 취했을 것이다. 이 무기는 혹자들이 생각하듯이 이전에 그들이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악마(Leviatham)의 머리를 파쇄하셔서 그 때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들에게 식물로" 주신 것이라고 했다(시 74:14).
2. 이 위대한 일의 광경을 보고 그들은 크게 감동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31절). 그들은 이제야 그들의 불신과 불평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쳐 회개하였으니, 하늘로부터 있는 도움을 다시는 멸시하지 않으려 했으며, 아무리 큰 시련 중에도 낙담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모세와 다투지 않을 것이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도 않으려 했다. 그들은 바다에서 모세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다(고전 10: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행하여 준 이 기사는 결과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모세의 지도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적극 따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약속에 대해서도 저들이 확실한 신앙을 갖도록 해주었다. 즉 그들이 개선가를 부르면서 출애굽하였으므로 가나안에서도 하나님과 또 하나님과 그들사이에 있는 이 중보자를 신뢰함으로써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 이러한 심정을 가진 자들은 이제도 그러한 일을 보게 되리라! 그들의 심령이 새로워졌을 때에, 하나님은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 자비를 보이사 실제적 감명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는 그러한 감명이 곧 낡아 없어지게 된다.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그 역사의 은전을 감촉하는 동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한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의 역사를 잊고 그를 경멸하게 된다. 때때로 우리가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듯, 언제나 그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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