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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창조의 개요와 배태(창세기 1:1-2)

이 구절에는 우리는 창조의 개요와 그 배태(胚胎)를 본다.

Ⅰ. 다행하게도 창조의 개요를 말해 주는 그 1절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의 첫 구절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를 찾아 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믿고 있다.

1. 이 구절에서 우리는 네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1) 창조의 결과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늘과 땅" 다시 말하면 우주 전체의 구조와 그 비품을 포함한 세계이며,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행 17:24)이다. 이 세계는 상, 하 두 층으로 되어 있는 큰집이다. 그 구조는 장엄하고 웅장하고, 한결 같으면서 편리하게 되어 있고, 각 방마다 빈틈없이 가구들이 잘 차려져 있다. 모세가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의 활동 가운데 눈에 보이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는 천사들의 창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구의 표면이 아름다운 화초로 단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는 철물과 보석들로 채워져 있듯이(비록 그것들에 대한 창조의 언급이 여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구로 하여금 단단한 존재로 만들어 유용한 것으로 만드는 데 그것들이 크게 이바지하고 있듯이), 하늘은 우리가 본문 말씀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외부를 장식하는 빛나는 광명들 때문에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며졌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빛나는 것들로 충만해 있다. 그것들은 황금이나 사파이어가 들의 백합화보다 훌륭하듯이 그 값에 있어서나 그 훌륭함에 있어서 보다 수려하며 보다 우수하다. 보이는 세계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1] 굉장한 다양성, 성질과 구조가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종류의 사물을 볼 수 있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역사는 어찌 그리 다양하시오며 그 모두가 보기에 선한 것이옵나이까!

[2] 굉장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남빛 하늘과 푸는 지구는 호기심에 가득찬 구경군의 눈을 현혹시키는데 하늘과 땅의 장식품들은 더욱 그 눈에 매혹적이다. 그렇다면 창조주 자신의 우아함이란 얼마나 더 굉장한 것이겠는가!

[3] 굉장한 정밀성과 정확함을 볼 수 있다. 현미경의 힘을 빌어 자연계의 활동을 세밀히 관찰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어떤 인간의 예술 작품보다도 훨씬 더 세련된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4] 굉장한 능력을 볼 수 있다. 지구는 주검의 덩어리이거나 정체된 물질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다소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지구 자체에도 일조의 자력(磁力)이 있다.

[5] 굉장한 질서를 볼 수 있다. 모든 존재간의 상호 의존성, 운행에 있어서의 정확한 조화, 그리고 모든 원인들 사이의 놀랄 만한 연관성을 볼 수 있다.

[6] 굉장한 신비를 볼 수 있다. 자연계에는 풀 수 없는 현상들과 헤아릴 수 없는 비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늘과 땅을 볼 때 거기서 우리는 위대하신 창조주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神性)을 미루어 살필 수 있을 것이며, 그를 찬양하여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만듦새와 위치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우리의 눈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의 발은 언제나 땅을 밝고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여 준다.

(2) 이 위대한 작업의 주인공과 원인이신 분 즉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인데,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다. 엘(El)은 "강하신 하나님" (the strong God)을 의미한다. 만일 전능하신 힘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만유를 무에서 창조해 내실 수 있었겠는가?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신격의 복수성(複數性)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마는 여럿인 것같이 말하는 히브리어의 이 하나님의 이름의 복수성은, 아마 이방인들에게는 죽음에서 나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맛을 풍기는 것이며 그들의 우상 숭배를 굳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생명에서 나와 생명에 이르게 하는 맛을 풍기는 것이며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여 주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에서는 희미하게 암시되어 있었으나 신약에서는 명백히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말씀, 그리고 아버지의 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잠 8:30). 아니,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을 우리는 많이 들었다(요 1:3, 10; 엡 3:9; 골 1:16; 히 1:2). 오! 이러한 생각은 경건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께 대해서와 또 그의 이름 안에서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위대하신 중보자에 대한 고상한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그 얼마나 형성시켜 주고 있는가!

(3) 이 작업이 이루어진 방법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 하셨다." 다시 말해서 무(無)에서부터 창조하셨다. 세상이 창조되어 나은 어떤 선재(先在)적인 물질이란 전혀 없었다. 물고기와 새들은 물로부터 그리고 짐승과 사람은 흙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흙과 그 물은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자연계의 일상적인 능력으로는 무로부터 어떤 사물을 창조할 수가 없다. 어떤 기술공이라 할지라도 일할 일감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는 무에서 어떤 사물을 창조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사연을 지으신 하나님은 자연 법칙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창조에 있어서는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물질을 가정하는 것 이상으로 영원한 정신이신 하나님의 영광에 큰 손상을 주는 것이 달리 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력의 고귀함은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영광은 그에게 돌려야 한다.

(4) 이 활동이 이루어진 그 때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태초", 즉 시계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시간은 시간으로 측정될 수 있는 사물이 생성됨으로 인해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영원히 사는 무한한 존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나님께 어찌하여 이 세상을 좀더 일찍 창조하시지 않으셨는가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식한 말로 더욱 혼란만을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 가운데는 이르고 늦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시간에 앞서 그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태초의 시간에 세상을 창조하셨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창조하신 것이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이러한 것들의 탁월성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율법, 회개, 낙원, 지옥, 영광의 보좌, 성전, 그리고 메시야의 이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초의 말씀이 계셨다" (요 1:1)는 말 한 마디면 족하다.

2.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우자.

(1) 무신론의 어리석음을 배우자. 무신론자들은 본질상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는 세상임을 알면서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승인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해 놓았다.



(2) 하나님은 비할 데 없는 권리로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군의 주 여호와이심을 배우자. 하나님의 창조주시라면 그는 천지의 주인이시며 그 소유자이시다.

(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함을 배우자. 그러므로 그를 저들의 하나님으로 모시는 백성들은 행복하며 저들의 소망이 다 그 이름에 있다(시 121:2; 124:8).

(4)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송축과 찬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며 모든 송축과 찬양에서 뛰어나심을 배우자(느 9:5, 6). 그는 세상을 지으신 분이시며, 우리의 섬김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며, 도움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다(행 17:24, 25). 하지만 그는 우리의 섬김과 도움을 요청하시며,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시다(계 4:11). 모든 것이 그의 것이면 모든 것을 그에게 돌려드려야 마땅하다.

Ⅱ. 여기에는 창조 활동의 배태기가 기록되었다(2절). 거기에는 최초의 사물과 최초의 주동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1. 혼돈이 최초의 사물이었다(정확히 말해서 땅은 셋째 날에 지음을 받았는데, 10절). 이것이 땅이란 말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후에 "땅" 이라 일컬어진 것과 가장 흡사한 것이며, 아무런 장식이 없고 무겁고 볼품이 없는 단순한 흙덩이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깊음" 이라고 일컬어졌는데, 두 가지가 다 광대하고 그리고 후에 땅으로부터 분리된 물이 그 때에는 함께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광대한 물질덩이는 그것으로부터 후에 영원하신 말씀에 의해 모든 물체와, 그리고 궁창과 눈에 보이는 하늘까지고 형성되어 나올 수 있었던 사물이었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활동을 맨 처음에 완전하게 하실 수가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그의 섭리와 은혜의 방법이 보통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려고 하셨을 것이다. 이 혼돈을 어떻게 표시하였는가 보자.

(1) 그것은 "혼돈" 하고 "공허" 했기 때문에 보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토후(Tohu)와 보후(Bohu) 즉 혼란하고 텅 빈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사용되었다(사 34:11). 그것은 형태가 없었으며,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거기에는 사는 자도, 아무런 장식이나 그림자나 조합한 사물 같은 것도 나올 만한 것이 없었으며, "사물의 참 형성이 아니었다" (히 10:1). 그런데 이 땅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신음하고 있다. 예레미야 4장 23절을 보면,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다" 고 하였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있는 자들에게는 윗 세상과 비교해서 이 아래 세계에는 아직까지도 혼돈과 공허밖에 아무런 것도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는 눈에 보이는 참다운 아름다움도 즐거움을 누릴 만한 만족스러운 충만함도 없다. 그것들은 다만 하나님께만 있는 것들이다.

(2) 비록 보일 만한 것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게 할 수 있는 빛이 아직은 없었다. 왜냐하면 "흑암", 곧 짙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재앙의 어두움을 창조하신다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마는-사 45:7). 하나님은 이 흑암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가지고 볼 만한 것이 지음을 받기까지는 아직 부족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혼돈과 공허 이외에는 아무런 볼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빛의 부족을 탄식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만일 영혼에 대한 은혜의 활동이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 혼돈이란 곧 중생하지 못하고 은혜 받지 못한 영혼의 상태를 나타낸다. 거기에는 무질서와 혼란과 그리고 모든 악한 활동이 있다. 그것은 모든 선의 결핍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두움이며, 어두움 자체이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축복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이전의 우리의 본질적인 상태이다.

2. 하나님의 신이 최초의 주동자였다. 그는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혼돈하고 공허할 지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주검과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들이 살아 날 수 있을까? 이런 혼잡한 물질의 덩이가 아름다운 세상으로 이룩될 수 있을까? 그렇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겔 37:9). 그런데 여기 하나의 소망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신이 활동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일하시는데 누가 또 무엇이 감히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그의 입 기운(성령)으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한다(시 33:6; 욥 26:13). 그리고 그와 똑같이 능력 있는 활동가에 의해 새로운 창조가 이룩되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자기 몸을 펴서 엎드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이 깊음 위에 운행하셨다. 그것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마 23:37) 그들의 위를 감돌면서 그들을 따뜻하게 하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림과 같은 것이다(신 32:11 -여기에 사용된 말이 꼭 같은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시며 활동의 원천이시기도 하다. 죽은 물질은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은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반드시 살리시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여 준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서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 낸 능력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누추한 몸을, 흑암 자체와 같은 흑암의 땅과 그리고 아무 구별이 없는 곳과 같은(욥 10:20) 무덤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영광스러운 몸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1:2 없음.

 

1:3

빛의 창조(창세기 1:3-5)

이제 여기서 우리는 첫째 날의 활동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보이는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최초의 것은 빛이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께서 빛을 가지고 보는 가운데 활동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흑암이나 광명이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가 활동하신 바와 그것들 속에 나타난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들도 빛이 있는 동안에 우리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탄과 그 종들의 활동은 흑암의 활동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며, 빛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요 3:21). 빛은 우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귀한 축복이다. 빛은 만물과 같이 모든 보이는 존재 가운데서 가장 그의 위대하신 부모 즉 하나님의 순결함과 능력과 광명과 그리고 선행을 닮았다. 그런데 하나님과 가장 유사한 것은 영이다. 그리고 빛은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빛을 가지고 우리는 다른 사물을 볼 수가 있기는 해도 그 본질은 모르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며, 또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고 "광명이 어느 길로 해서 뻗어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욥 38:19, 24). 빛의 봄으로 우리는 빛의 도움을 받아 무한하고 영원하신 빛이시며(요일 1:5). "빛들의 아버지" 시며(약 1:17) 그리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16) 하나님을 믿고 그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함을 받자. 새 창조에 있어서 맨 처음으로 영혼에 대해 작용을 가하는 것은 빛이다. 복된 성령은 깨달음을 비춰주사 뜻과 마음을 사로잡아 심령 속에 들어오시는데, 이는 도적과 강도 모양 다른 길로 넘어 들어오는 죄와 사탄과는 달리, 자기 양떼에게로 오는 선한 목자와 같이 정문으로 들어오신다. 이 세상에서 죄로 말미암아 흑암이 되었던 것이 은혜로 말미암아 빛이 된다.

2. 빛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지적하시자 곧 장 그대로 되었다. 영원한 정신 속에 있던 원래의 구상 바로 그대로의 복사판과 같은 그런 빛이 생겼다. 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시여! 그가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단지 보이기 위한 것이라든가, 한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충분하고도 영구한 것으로 이룩되었다. 그가 명하시매 속히 이루어졌다. 그에게 있어서는 언명(dictum)은 실재(tactum)이며, 말씀(word)은 세상(world)이시다. 하나님의 말씀(다시 말해서 그의 생각과 그의 기뻐하시는 뜻)은 신속하고도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말씀, 곧 근원적이며 영원하신 말씀이시다. 그로 말미암아 빛이 지음을 받았으니, 이는 그의 안에 빛이 있었고, 그는 참 빛, 곧 세상의 빛이시었기 때문이다(요 1:9; 9:5). 성결된 영혼들에게 비춰주는 하늘의 빛은 하나님의 능력에서부터 비쳐진 것이다. 그 능력은 그의 말씀과 그의 지혜의 성령과 계시의 능력이며, 이해하게 하여 주는 것, 무지와 실패의 안개를 추방해 주는 것, 처음에 "하나님께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춰라" 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는 지식을 주는 능력이다(고후 4:6).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어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지" 아니하였다면(요일 5:20), 흑암이 타락한 인생들의 머리 위에 영원히 깃들게 되었을 것이다.

3. 빛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다. 빛이 형성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셨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그것은 그가 계획하신 바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그가 계획하신 목적에 딱 알맞은 것이었다. 그것은 유용하고도 유익한 것이다. 지금은 궁전과 같은 이 세상이라도, 빛이 없었으면 토굴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며" (전 11:7).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잠 15:30). 하나님은 당신이 명하신 바를 기쁘시게 그리고 은혜롭게 여기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진정으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인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빛이 좋은 것이라면 빛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 자신은 얼마나 더 좋으신 분일까! 그분으로부터 우리는 빛을 받았고, 우리는 이를 인하여 우리의 모든 찬양을 돌리며, 빛을 통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봉사를 그분에게 드리고 있다.

4.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셨다." 그리하여 다시는 서로 합하거나 화합할 수 없도록 그들을 서로 떼어 놓으셨다.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이 서로 사귈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6:14). 그리고 또 그들 사이에 시간을 구분하시어 빛을 낮이라 하셨고, 어두움을 밤이라 하셨으며, 끊임없이 서로 규칙적으로 교대하게 하셨다. 어두움은 아제 비록 빛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기는 했어도 영원히 사라짐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오히려 빛과 교대하며 자기의 소임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어둠대로 소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의 햇빛이 그 날의 일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이, 저녁의 그림자는 밤의 안식을 가져다주며 또 밤의 장막을 우리에게 덮어주고 단잠을 자게 하여 준다(욥 7:2 참조). 이처럼 하나님은 시간을 빛과 어두움으로 구분하셨다. 이는 세상이란 혼잡한 것이며 변화무쌍한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늘에는 온전하고도 영원한 빛이 있으며, 어두움이란 조금도 없다. 한편 지옥은 완전한 흑암이며 희미한 빛조차 없다. 저 세상에는 이 양자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큰 심연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양자가 서로 엇갈리고 있으며 우리는 날마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가고 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평화와 환난, 기쁨과 슬픔 같은 성쇠를 모두 기대하도록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또 그 하나를 다른 것과 대조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빛과 어두움에 조화시키듯 그 양자에게 모두 조화시키게 하며, 그 양자를 모두 받아들이게 하고, 또 양자를 모두 잘 이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각각 다른 이름을 붙이심으로 그 양자를 구분하셨다.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칭하기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님으로서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셨다. 이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시 74:16).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또 낮과 밤의 끝장이 올 때까지 그리고 시간의 주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밤낮 쉬임 없이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낮에는 그를 위해 일하고, 밤에는 그의 안에서 쉬며, 밤낮으로 그의 율법을 묵상함으로 밤낮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6. 이것은 첫 날의 활동이었으며 가장 귀한 날의 활동이기도 하였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었다." 저녁의 어두움이 아침의 광명보다 먼저 있었다. 이는 빛이 더욱 돋보이게 하며, 더욱 보기 좋게 하여, 더욱 찬란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날은 이 세상의 최초의 날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주간의 최초의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본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계가 한 주일의 첫 날에 시작된 것과 같이, 세상의 빛되신 그리스도께서도 한 주간의 첫 날 아침 일찍이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안에서 이 세계에 여명이 높은 곳으로부터 찾아 왔다. 그 새벽별이 우리의 심정 속에 떠오른다면 우리는 진정 행복할지라.

 

1:4 없음.

 

1:5 없음.

 

1:6

궁창의 창조(창세기 1:6-8)

여기에는 둘째 날의 활동 즉 궁창의 창조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있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1. 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볼 수 있다. "궁창이 있으라" 하는 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종이가 펴지듯이, 또는 휘장이 쳐지듯이 전개(expansion)가 있으라는 명령과 같다. 히브리어는 바로 그런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지구 위에 있는 눈에 보이는 하늘, 지구, 그리고 제 3층 세계의 하늘 및 그 사이에 있는 하늘, 상·중·하로된 공간의 영역들- 천체, 그리고 광명의 세계와 그 궤도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 별들이 붙어 있는 높은 지경에서 아래로 새들이 날아 다니는 낮은 곳까지 마치고 있다. 왜냐하면 별들이 있는 곳도 "하늘의 궁창" 이라고 하고 있으며(14,15절), 새들이 나는 곳도 역시 "하늘의 궁창" 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20절).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을 때 공기를 그 광선의 그릇과 운반 기구로 지장 하셨다. 그리고 또 그것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교통의 매개체로 삼으셨다. 왜냐하면 비록 하늘과 땅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먼 거리가 있기는 하나 천국과 지옥 사이와 같은 전혀 건널 수 없는 먼 거리가 있기는 하나 천국과 지옥 사이와 같은 전혀 건널 수 없는 심연은 없기 때문이다. 이 궁창은 간막이 벽이 아니라 교통의 수단이다(욥 26:7; 37:18; 시 104:3; 암 9:6 참조).

2. 궁창의 창조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그렇게 되라고 명령만 하시고 다른 어떤 존재가 실제로 그것을 만든 것과 같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셨다" 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당신 스스로 우리 사이에서 역사 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성결함과 사랑을 명령하시는 그분은 그것들을 은혜의 능력과 말씀으로 창조하신다. 따라서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릴 만하다. "여호와여 당신께서 명하시는 바를 주옵시며, 그리고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명하소서." 궁창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만드신 것이라" 고 한다(시 8:3). 궁창의 범위가 한없이 넓은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팔을 펴시사 만드신 것을 보여 주나, 동시에 그 구성의 절묘함은 그것이 또한 그의 손가락으로 만든 기묘한 예술품임을 보여준다.

3. 그 용도와 설계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물과 물로 나뉘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구름에 싸인 물과 바다를 덮는 물, 공중에 있는 물과 땅에 있는 물로 구분하셨다. 이 양자의 차이를 신명기 11장 10,11절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자. 애굽 땅은 궁창 밑에 있는 물로 축여지고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가나안 땅은 궁창 밑에 있는 물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이 애굽 땅보다도 좋은 땅이었다. 가나안 땅에는 또 인생을 기다리지 않는 하늘의 이슬(미 5:7)까지도 궁창으로부터 내려 왔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지으신 궁창 속에 많은 창고를 가지고 계시면서 거기로부터 "땅에 물을 대어주신다" (시 104:13; 65:9, 10). 또 하나님은 "눈 곳간과 우박 창고를 가지시고 계시는데 이것은 환난 때와 전쟁과 격투의 날을 위하여 저축한 것이다(욥 3:22, 23). 이처럼 그를 섬기는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이여! 그를 친구로 삼는 자는 행복하며 그를 원수로 삼는 자는 불행하리로다.

4. 그 이름을 붙이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청하셨다." 이것은 보이는 하늘이며 거룩한 성으로 가는 포장 도로이다.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에 그의 보좌를 가지고 계신다는 말이 있다(겔 1:26).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하늘들 사이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다스리신다는 말이 있다(단 4:26). "하나님이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욥 22:12) 그렇다.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들을 응시하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를 기억하여야 한다. 하늘의 높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존하심과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생각나게 한다. 하늘의 광명과 그 순결함은 그의 영광과 위엄, 그리고 완전한 신성을 일깨워 준다. 하늘의 광대함과 또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또 땅에다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우주적인 섭리를 깨닫게 하여 주신다.

 

1:7 없음.

 

1:8 없음.

 

1:9

바다, 땅, 나무의 창조(창세기 1:9-13)

셋째 날의 창조는 위 구절들에서 보면, 바다와 마른 땅의 형성, 그리고 땅으로 하여금 열매 맺도록 하는 일과 관련되었다. 지금까지는 창조주의 권능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윗 부분에서만 위력을 발휘하여 사용되었다. 즉 하늘의 광명을 밝혔으며, 하늘의 궁창을 고정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이 낮은 세상 즉 지구로 내려오셨다. 그것은 이 지구를 인생들을 위하여 그들의 주거지로 또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곳으로 꾸며 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인생들을 위하여 식탁에 오를 수 있는 것들을 풍성케 하여 주시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Ⅰ.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마른땅이 드러나게 함으로 땅은 인간이 살 만한 곳으로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땅에는 땅과 물이 한데 섞인 커다란 물질의 덩이였던 때에 있었던 그러한 혼란 대신에(2절), 두 가지를 다 유용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불리 때문에 질서가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라고 하시매 그렇게 되었다" 말씀하자마자 곧 실현되었다.

1. 땅을 덮고 있던 물을 물러가되, 어떤 한 곳 다시 말하면, 그물들을 받아들이고 머물러 있게 할 만한 큰 웅덩이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리하여 물은 말끔히 치워졌고, 한 곳에 모아졌으며, 정해진 장소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이를 "바다" 라 칭하셨다. 비록 바다는 광대한 거리에 미쳐 있고 서로 먼 여러 지역에서 여러 해변가를 적시고 있고, 또 땅 위에도 있고 땅 밑에도 있지마는 그것들은 서로 통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바다는 물들의 저장소이며,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전 1:7). 성서에서는 물과 바닷가 때로는 불안과 환난을 뜻하기도 한다(시 42:7; 69:2, 14, 15). 하나님의 탁한 백성이라도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에서 면제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것들은 단지 하늘 아래 있는 물들뿐이다(하늘에는 그런 물이 없다). 그리고 그런 물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장소와 또 그것들에게 정해주신 한계 안에만 있다는 사실이 다행한 일이다. 태초에 물들을 한 곳에 모았고 또 태초에 그들을 한 곳에 가둔 그 같은 전능하신 손길이 어떻게 물들을 여전히 억류하고 있는가에 대해 시편 104편 6-9절에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찬양 받을 만한 일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은 큰물로 하여금 사람들이 무역과 장사에 종사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신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날마다 감사하여야 한다. 그리고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다에 문과 빗장을 채우사 정해 놓은 곳에 가두게 하시고 교만한 물결을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있음을 고백하여야 한다(욥 38:10, 11).

2. 마른땅을 드러나게 하시고, 물 속에서 나오게 하시며, 이를 "땅" 이라 청하시어, 그것을 인류에게 주셨다. 땅은 전에도 존재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물밑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많은 은사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들을 모두 드러내자. 그리하여 유용한 것이 되게 하자. 오늘날까지 이 마른땅의 은혜를 즐기고 있는 우리는(비를 그것이 한 때 홍수로 범람케 했다가 다시 마르기는 했지마는) 그의 "손으로 마른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의지하여야 한다(시 95:5; 욥 1:9).

Ⅱ. 땅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졌다(11,12절). 갑자기 이루어진 땅에서 나온 즉석의 산물로 식물이 만들어졌으며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나오자마자 열매를 맺게 되었고, 짐승들을 위해서는 풀을, 사람들을 위해서는 채소를 내게 되었다. 식물들은 앞으로 오는 날들을 위해 여러 가지 다양하고 신기한 채소들이 "각기 그 종류대로 씨를 가지게 함으로써" 이 땅 위에 사람이 사는 동안 계속해서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식물을 땅에서부터 나오게 하였다. 주님이시여!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축복하시오며, 돌봐 주시나이까! 이처럼 범죄한 이 죄많은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처럼 관심을 기울여 주시오며, 식물을 공급해 주시오며, 생명을 존속시켜 주시나이까!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주목하자.

1. 땅만이 여호와의 것이 아니다. "그 안에 가득찬 것까지고" 여호와의 것이다. 또 하나님은 땅만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시며 또한 절대적인 처분자이시다. 땅은 "공허한" 것이었다(2절).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부유로 충만해졌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곡식이며, 하나님의 포도주이며, 하나님의 양털이며, 하나님의 삼이다(호 2:9). 비록 그것들은 우리가 사용하도록 허락되었기는 했어도 그 소유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데 사용해야 한다.

2. 일반적인 섭리는 하나의 계속적인 창조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계속 일하신다" 땅은 여전히 이 명령의 효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풀이 나오고 채소를 내며, 그 열매를 맺는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계의 일반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기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계의 위대한 창조주와 주인이신 하나님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과 다함 없는 선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는 하다.

3. 하나님이 보통 때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제 2 원인의 작용을 이용하시기는 하시지마는, 그것들을 필요로 하거나 거기에 얽매이시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땅의 귀한 열매들을 보통 태양과 달의 영향을 받아 생성되지마는 (신 33:14), 여기에 이미 태양과 달이 창조되기 이전에 땅이 많은 열매를, 아마 다 익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할 기회가 오기 전에 필요한 것들을 미리 마련하여 두셨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짐승과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풀과 채소를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어질게 그리고 은혜로써 대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바보가 되거나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먹을 것을 인하여, 그리고 우리의 몸을 위하여 주신 땅의 소산물들을 통해서 받는 모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응하시고, 하늘은 땅에 응한다" (호 2:21, 22). 비록 시냇물이 마르고, "무화과 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할" 때에라도, 우리가 은혜로써 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는 그의 안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1:10 없음.

 

1:11 없음.

 

1:12 없음.

 

1:13 없음.

 

1:14

하늘의 광명의 창조(창세기 1:14-19)

여기에 기록된 것은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와 관련이 있는 넷째 날의 창조의 활동을 기록한 역사이다. 그것들은 본질상 그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지구를 위해 광명으로 봉사하기 위해 지음 받았다. 이것 한 가지만을 가지고도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 드리고 감사드려야 한다. 욥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그 신으로 하늘을 당장 하셨다" 고 말하였다(욥 26:13). 그리고 여기에는 윗 세계의 아름다운만을 위할 뿐만 아니라, 이 아랫 세상을 위한 축복도 아울러 되고 있는 장식에 관한 기록이 있다. 왜냐하면 하늘은 비록 높다고 하더라도 땅과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또 관련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늘을 광명의 창조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자.

Ⅰ. 일반적으로 14,15절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그것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있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으라" 고 명하였다. "빛이 있으라" (3절)고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다. 그래서 빛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이리저리 흩어지고 혼란 되어 있던 빛의 혼돈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빛이 정리되고 형체를 이루어 몇 개의 발광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보다 영광스럽고 보다 유용한 것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 시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리고 그는 빛이시매 모든 빛들의 아버지요 형성자(形成者)이시다. 그 광명들은 "하늘을 궁창에" 두게 하였다. 이는 그 넓은 구역이 지구를 포함하고 나가아서 만물 위에 드러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평상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기 때문이다" (눅 8:16). 그리하여 으리으리한 황금 등경인 하늘의 궁창으로부터 이 등불들이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준다. 궁창은 그 자체의 빛이 있다는 말이 있다(단 12:3). 그러나 이 빛은 지구까지 비춰 주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래서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궁창을 창조한 둘째 날의 활동에 대해서는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이 없는 것 같다. 넷째 날에 이르러 이러한 빛들도 장식될 때까지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못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2. 이 지구를 위한 그것들의 목적이 있다.

(1) 광명들을 시간,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등의 구분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들은 해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했다.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 되며, 해가 우리 쪽의 회귀선에 가까이 오면 여름이고, 다른 쪽 회귀선으로 멀리 가면 겨울이 온다. 이와 같이 "해 아래 있는 모든 목적에는 기한이 있다" (전 3:1).

(2) 그들은 활동의 방향을 지시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날씨의 변화를 나타내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농부들이 일을 하기 시작하려고 할 때 그들을 하늘을 보고 날씨가 좋을는지 또는 나쁠는지 예측하고 자기의 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한다(마 16:2, 3). 하늘의 광명들은 우리로 하여금 "걸어다닐 수 있도록 이 땅 위에" 빛을 비춰준다(요 11:9). 또 날마다 우리의 의무인 일을 하게 한다(요 9:4). 하늘의 광명들은 스스로를 위하거나 그러한 빛이 필요 없는 위에 있는 영들의 세계를 위해 비추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빛난다. "주님이시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3, 4)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이런 광명들을 주셨는데, 일할 시간에 잠자거나, 놀거나, 빈둥거린다면 그리고 또 우리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을 위대한 사명을 망각한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한 일이며 용서받지 못할 일이겠는가! 하늘의 광명들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지음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충실히 시행하며, 조금도 어김없이 철따라 비춰주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빛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을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위해 비치듯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비치고 있지 못하다(마 5:14). 우리는 우리 주님의 등불을 밝히면서도 우리 주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Ⅱ. 특별히 16-18절을 생각해 보자.

1. 하늘의 광명들을 해와 달과 별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았다.

(1) 해는 지구보다 백만 배는 큰, 모든 광명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광명이다. 해는 하늘의 모든 등불들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유용한 등불이며, 창조주는 지혜와 능력과 선과 그리고 이 아래 세상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주는 매우 귀한 축복을 보여 주는 고귀한 실증(實證)이다. 시편 1-6절에서 우리는 해를 지으신 분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해 어떻게 하면 그 이름에 합당하신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가를 배우자.

(2) 달은 보다 작은 광명인데, 여기서 큰 광명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졌다. 이는 비록 그 크기가 또 자기 스스로의 빛이 아니라 되받아 비추는 빛이란 면에서는 다른 많은 별들에 비해 못한 것이지마는, 밤의 주관자로서 그의 하는 일이나 또 지구에 대한 그 유용성에서 볼 때 많은 별들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유용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이며, 가장 좋은 은사를 받은 것이 큰 광명이 아니라, 그 맡은 바 은사를 가지고 겸손하고 성실을 다해서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 보다 큰 광명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 (마 20:26).

(3) "하나님은 별들도 창조하셨다." 그런데 비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에도 여기에 있는 기록들은 유성과 항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 수와 성질과 위치, 크기, 운행, 또는 그 영향력 등을 잘 구분하고 있지 않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성서의 기록 목적이 우리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우리를 천문학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우리를 성도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 광명들은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였는데(16,18절). 그것은 하나님과 같은 최고의 통치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통치가 모양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주관자들이다. 여기에 보면 작은 광명인 달은 "밤" 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시편 136편 9절에 보면 "달과 별들도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 고 하여 별들도 그러한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언명되어 있다. 이것은 그것들이 빛을 비추어 주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렘 31:35). 가장 영예스러운 통치 방법은 빛을 비춰주며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명령들, 다시 말해서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하신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유용한 삶을 살며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여 준다.

2. 이 모든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1) 해와 달과 별들을 예배하는 고대의 우상 숭배는 죄요 어리석은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광명들이 가지고 있는 통지와 지배에 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씨족 사회의 그릇된 인습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와 있는 기사는 분명히 그것들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또 인간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들을 신격화하고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체면을 크게 손상시키는 것이다(신 4:19 참조).

(2) 이런 모든 광명들을 지으시고, 그것들이 이처럼 우리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대해 날마다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동시에 지혜이다. 밤과 낮의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우리의 기도와 찬미의 엄숙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한다.

 

1:15 없음.

 

1:16 없음.

 

1:17 없음.

 

1:18 없음.

 

1:19 없음.

 

1:20

물고기와 새들의 창조(창세기 1:20-23)

지금까지는 우리가 다 찬양할 수 없으리 만큼 놀랍도록 고귀하고도 귀한 존재들을 매일매일 창조하셨다. 그러나 다섯째 날의 창조까지는 아직 생물의 창조에 대해서는 하등의 언급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이런 생물의 창조 기사가 나온다. 창조의 활동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점차적으로 계속되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점차 열등한 것으로부터 고등한 것으로 전진되어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완성을 향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과 최후의 작품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가르쳐 준다. 물고기와 새들이 창조된 것은 다섯째 날인데 이 들은 모두 물에서 나왔다. 물고기의 육(肉)이 따로 있고 새들의 육이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모두 다 함께 만들어졌고, 또 둘 다 물에서 만들어 졌다. 왜냐하면 제 1 원인(하나님)은 같은 제 2 원인으로부터 매우 서로 다른 결과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먼저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셨다(20,21절). 하나님은 그것들이 지음 받도록 명령하셨다. "물들은 번성케 하라" 고 명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물 자신이 어떤 생산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 속에는 물고기들이, 물밖에는 새들이 있게 하라" 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명령을 스스로 시행하셨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 따위를 창조하셨다." 다른 종류의 동물과 같이 종류도 다양하며 그 수도 많고, 그 모양이 이상한 곤충들로 닮았고 더러는 새들을 닮았다. (내 기억에) 보일(Boyle)씨는 말하기를 큰 코끼리를 보고 놀랄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개미를 보고도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자기는 놀라움을 느낀다고 하였다. 여기에 그 종류대로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와 새들이 창조되었다는 것과 또 물에 번성하도록 그 수가 많음이 특기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몸집과 힘이 다른 모든 동물들을 능가하는 큰 물고기인 큰고래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창조주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뚜렷이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모든 동물들을 제켜놓고 고래(큰 물고기)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으로 보아 욥기 41장 1절에 악어(거대한 바다 짐승-Leviathan)라고 한 것이 어떤 짐승을 가리키는 것인지 짐작하게 하여 준다. 짐승들의 육을 기묘하게 형성한 것과 또 그들의 크기, 형태, 그리고 그 성질을 각각 다르게 창조한 것, 그리고 그들이 부여받은 훌륭한 감각 기능의 능력 등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신론자들과 불신자들의 반론을 침묵시키고 부드럽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건한 심정으로 높이 찬양하게 하며 그를 높이 우러러보게 하여 준다(시 104:25 이하).

2. 그들에게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케 하셨다. 생명은 소모되는 것이다. 그 힘든 돌이 가지고 있는 힘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등불과 같은 것이다. 입으로 불어서 끄지 않아도 기름이 다하면 스스로 꺼진다. 그러므로 현명하신 창조주께서는 개체들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번식하는 길로 마련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였다(22절).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만드신 것을 축복하시며, 그것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전 3:14).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태초에 만물을 지으신 것과 같이 섭리의 능력은 만물을 보존시키신다. 생육은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며,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해마다 물고기와 새들이 번성하고 있는 것은 축복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이러한 피조물들이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번성하게 하심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욥 12:7, 9 참조). 물고기와 새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들을 지으신 이에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명상하게 하고, 아울러 그러한 금수들이 우리 인간을 경외하듯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데, 사냥이나 낚시질 그 자체는 해롭지 않은 오락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오락들이 하나님의 뜻과 금수들의 본분을 망각하고 남용되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다.

 

1:21 없음.

 

1:22 없음.

 

1:23 없음.

 

1:24

짐승의 창조(창세기 1:24-25)

여기에는 여섯째 날의 활동의 첫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전 날에는 바닷가 물고기로, 하늘이 새들도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 오늘에는 땅의 짐승들과 또 땅에 속한 육축과 가는 것들이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땅은 생물을 내라" 고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마치 땅이 이러한 동물들을 형성할 수 있는 힘이 있다거나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능력을 땅에게 양도하였다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의 뜻은 곧 "이러한 피조물들이 이제 그 종류대로 나오되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알맞도록 땅에서 나와 땅 위에 있게 하라" 고 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은 또 직접 활동하시기도 하셨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종류대로 만드셨는데, 단지 그 형태만 다양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성질과 태도와 사료와 모양도 역시 다양하게 하셨다. 어떤 것은 집에서 사육하게 하시고, 어떤 것은 야생의 것으로 만드시기도 하셨다. 어떤 것은 풀과 채소를 먹게 하셨고, 어떤 것은 고기를 먹게 하셨다. 어떤 것은 다른 짐승을 해하지 않는 것으로 만드시기도 하셨고, 어떤 것은 다른 짐승을 잡아먹는 것으로 만드시기도 하셨다. 또 어떤 것은 대담하게, 어떤 것은 겁쟁이로 만드셨다. 어떤 것은 말과 같이 그 고기를 먹을 수는 없으나 인간을 위해 일하는 짐승으로, 어떤 것은 양과 같이 일은 하지 못하지마는 고기는 먹을 수 있는 짐승으로, 또 어떤 것은 소와 같이 그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게 하셨다. 또 어떤 것은 들짐승과 같이 그 두 가지가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시기도 하셨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의 다양한 지혜를 나타내 주고 있다.

 

1:25 없음.

 

1:26

인간의 창조(창세기 1:26-28)

Ⅰ.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제일 마지막에 지음 받았다. 그것은 아마 어떤 방법으로든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도왔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그것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가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 38:4)는 물음 앞에 언제나 겸손하게 하고자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광스럽고도 은혜로운 것이다. 왜 영광스러운 것인가? 창조의 방법이 보다 불완전한 데서 보다 더 완전한 방법으로 진보하였기 때문이다. 왜 은혜로운가? 인간이 거할 궁전이 그를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준비가 되고 장비가 마련될 때까지 기다려서 비로소 그가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음을 받자마자 당장부터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피조물들을 보고 즐기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인간은 짐승들과 같은 날에 지음을 받았다. 왜냐하면 인간도 짐승들과 같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짐승들 같이 같은 땅에 고착되어 살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짐승들과 같이 육신의 정욕에 빠져서 우리 자신들을 멸망시키지 못하도록 이를 금지시켜 주셨다.

Ⅱ. 인간의 창조는 다른 피조물의 창조보다 더욱 뚜렷하고 직접적인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활동이시다. 그 설명도 어딘가 엄숙한 점이 있으며, 그 표현법도 다른 것들에 관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는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그리고 "땅과 물은 각기 그들의 생물을 내라" 는 식의 말씀만을 내리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서는 명령의 말씀이 협의하는 말씀으로 바뀌어져 이렇게 달라졌다. "우리가 인간을 만들자." 인간을 위해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들었다. 이 일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하여야 할 일이다. 먼저의 과정에서는 하나님께서 권위를 가지신 자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는 사랑을 가지신 자로서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인생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잠 8:31). 인간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원하셨던 것 같으며,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는 우리 자신이 이 일에 직접 가담하여 사람을 만들자." 인간은 지금까지 창조한 모든 피조물들과는 다른 피조물이어야 했다. 육체의 영, 하늘과 땅이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했으며, 인간은 그 두 세계와 모두 관련을 가져야만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직접 당신이 손을 대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만들기 위해 협의하는 위원회라도 소집하듯이 "우리가 사람들 만들자." 라고 표현하기를 즐겨하셨다. 삼위일체가 되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모두께 인간 자신을 봉헌하고 섬기도록 하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위대하신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그 위대하신 삼위의 이름 때문에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라고 말씀하신 그 분으로 하여금 우리 인간을 다스리시게 하자.

Ⅲ.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 여기에 사용된 두 가지의 낱말은 서로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로의 표현을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형상" 과 "모양" 이란 말들은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의 가장 닮은 모습과 그 근사성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인간은 그보다 앞서 만들어진 어떤 피조물과는 같지 않게 만들어졌으며, 오직 그를 지으신 창조주를 닮도록 지음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같은 본질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은 유리 위에 비쳐진 그림자나 동전 위에 새겨진 왕의 초상과 같이 단지 부분적인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은 다음의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1. 육체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으로서의 그 본성과 구조이다(육체적인 것이 아닌 까닭은 하나님께 육체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영광을 인간의 육신 위에 주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체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즉시로 우리의 육체에 자기 육체의 것과 같은 영광을 옷입혀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여도 그것은 조금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대우주(大宇宙)만이 아니라 소우주인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의 매개가 되었던 그리스도는 태초에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 때가 이르면 그 자신이 입을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을 옷입고 있는 것은 인간의 위대한 영이다. 영혼(soul)이란 하나의 영(spirit)이며, 지적인 불멸의 영, 감화력이 풍부한 활동적인 영이며, 여기서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영이다. 그리고 또 세상의 영이기도 하다. 인간의 영은 여호와의 등불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의 고상한 능력 즉 이해, 의지와 그리고 활동력에서 볼 때 그것은 본질상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가장 밝고도 맑은 거울일 것이다.

2. 그의 위치와 권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라고 하셨다. 인간이 하등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음으로써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그의 총독이 되었다. 하등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섬길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간을 두려워하고 섬기게 하였다. 하지만 인간이 그의 속에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다스리는 것이,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욱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다.

3. 그의 순결성과 방정함이다.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의 지식과 의와 그리고 참다운 거룩함에 있다(엡 4:24; 골 3:10). 인간은 정직하게 지음 받았다(전 7:29).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부합시키는 본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해는 하늘의 사실을 분명히 그리고 진실되게 보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지식에는 잘못이나 과오가 있을 수 없다. 그의 뜻은 쉽사리 그리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였는데, 혐오감이나 반항이 전혀 없었다. 인간의 성정은 모두 정상적이었으며 그에게는 비정상적인 욕망이나 욕정이 없었다. 그의 생각은 쉽게 떠오르며, 가장 좋은 점에 귀착될 수 있었고, 거기에는 허망함이나 난폭함이 없었다. 모든 열등한 능력은 우월한 능력의 지시와 지도에 대해 반항이나 항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맨 처음 조상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들 위에 간직함으로써 이처럼 거룩했고 이처럼 행복하였다. 태초에 인간에게 부여한 바로 이러한 영광 때문에 우리는 서로 저주해서는 안 되며(약 3:9), 서로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의 종으로 타락시켜서는 안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명기의 인간들이여! 너는 어찌하여 타락하였는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하여 훼손되었는가! 얼마나 많이 사라졌으며! 얼마나 그 파괴가 심한가! 하나님은 그의 희생적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금 우리의 영혼 위에 회복시켜 주시리라!

Ⅳ.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그들을 복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셨는데, 곧 이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는 말씀이 뒤따른다. 그는 결심하신 바를 곧 실천하셨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하는 것과 행함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먼저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하와를 그의 갈빗대로 만드셨다(2장).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많은 짝을 지으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의 남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데도, 인간의 짝은 "하나만을 지으신 것이 아닌가?" (말 2:15)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혼을 금하셨다(마 19:4, 5). 우리의 사조 아담에게는 한 아내만이 주어졌다. 아담이 만일 그녀를 버린다면, 다시금 결혼할 상대자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결혼의 관계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천사는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지 않았다. 천사들은 그 종족을 번식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눅 20:34-36).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지음을 받았는데 이는 그 종류가 번식하고 그 종족이 계속하기 위함이다. 이 낮은 세계의 광명인 불과 촛불을 타서 없어져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태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의 빛들을 그렇지 않다. 별들은 서로 다른 별들을 불태우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는 모든 인간 종족들이 스스로 그들이 한 피로 지음을 받은 것과 또 한 줄기에서 가지쳐 내려 온 것을 알게 하며, 따라서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맡은 바 본질을 후손들에게 전달 할 수 있도록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셨다.

1. 거대한 유산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땅에 충만하라" 고 하셨다. 그들은 "온 땅에 거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다(행 27:26). 이 땅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등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종이 되며 이 우주의 하나의 예지가 되게 하신 곳이다. 또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도 받아 누리기는 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간은 알고 받아들이며, 나가서 이 낮은 세상의 모든 찬양을 모아 하늘의 창고에 돌려 보내드리는 자가 되게 하신 곳이다(시 145:10). 그리고 끝으로 이 땅은 보다 좋은 곳으로 들어가기 위한 훈련생으로 수련을 쌓는 곳이기도 하다.

2. 수많은 영속하는 가족들을 주시어, 이 유산을 누리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축복을 내리어, 그 축복으로 그들의 자손들이 땅 끝까지 번지게 하시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게 하셨다. 생육과 번식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벳에돔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덟 아들들을 두었다(대상 26:5).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축복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한 세대가 지나가면 또한 세대가 온다."

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하등 피조물들, 곧 바다의 고기와 공주의 새들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인간은 비록 준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데도 양자를 다스릴 권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아가서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세" 를 받았다. 땅에 움직이는 생물은 보다 더 인간의 손 가까이 있으면서 인간의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영광을 주시려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그의 의무를 강하게 깨닫게 하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권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소멸되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해서 인류의 후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피로 인하여 그들이 상실하였던 것보다 더 좋고,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그들의 칭호를 주셨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3:22).

 

1:27 없음.

 

1:28 없음.

 

1:29

식물(食物)의 창조(창세기 1:29-30)

여기에는 여섯째 날의 활동의 셋째 부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어떤 새로운 창조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모든 육체에 대해 은혜로써 식물을 마련하여 주신 것(시 136:25)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과 짐승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그들을 보호하신다(시 36:6).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식물(食物)을 마련하여 주셨다(29절). 곡식과 땅의 모든 소산물을 포함 채소와 열매들이 그들을 위한 식물이었다. 이것들만은 그들이 먹을 수 있었는데 홍수 시대까지는 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여 주시지 않으셨던 것으로 보여진다(9:3). 그리고 땅이 홍수를 만나고 더욱이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기 전에는 땅에서 나오는 열매들이 오늘날 임금의 상에 오르는 음식들이나 골수, 그리고 기름기 흐르는 음식들보다 훨씬 입맛에 좋고 몸을 튼튼케 하였으며 많은 영양을 공급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의 것들을 볼 수 있다.

1.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흙에서 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다. 꼭 한 번 인간은 천사들의 음식 곧 하늘의 떡을 먹은 일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죽었다(요 6:49). 그것이 그들에게 주여졌을 때 땅에서 나온 소산(시 104:14)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음식이 있는데 그것은 주께서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2. 그것은 우리를 감사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돌봐 주신다. 그에게서 우리는 이 생명이 지탱해 나가며 위로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만 우리의 필요를 위한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과 호화로운 삶을 위해 풍부하고 풍족하며 호사스럽고도 다양하게 그 모든 것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록 있는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할 것인가!

3.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절제 있게 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분수에 만족하게 한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물고기와 새들을 다스리게 하셨지만 그의 식물은 채소와 열매로만 한정시키시었다. 아담은 결코 이런 사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 후에 비록 아담이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 금단의 열매를 탐냈지마는 금단의 고기를 탐냈다는 기사는 읽어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위해 식물을 주셨다면, 우리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탐욕을 위해 음식을 구하지 말자(시 78:18; 단 1:15 참조).

Ⅱ. 하나님은 짐승들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여 주셨다(30절). "하나님께서는 소들을 위하여서도 염려하시는가?"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기 편한 음식물을 마련하여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사용되며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는 소들 만을 위해서 음식물을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 사자 새끼나 갈가마귀 새끼들을 위해서도 그의 섭리 가운데서 돌봐 주신다. 그것들도 먹을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한 것을 얻는다. 하등 피조물들도 날마다 먹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 하나님은 위대하신 가장이시며, 부자요 모든 것이 넉넉하신 분으로서 모든 생물들의 요구를 채워 주신다.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염려를 주께 맡기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도록 하자. 아담으로 하여금 염려 없도록 돌봐 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모든 피조물들이 염려하지 않도록 돌봐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마 6:26).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굶기지 않으실 것이다.

 

1:30 없음.

 

1:31

창조에 관한 회고와 찬미(창세기 1:31)

여기에는 창조의 전체 활동에 관한 찬미와 결론이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일을 완전하게 행하신다. 섭리와 은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창조의 활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완전히 끝내신다.

Ⅰ. 하나님은 그가 하신 일을 회고하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는데, 모든 것이 그의 돌보심 아래 있다. 모든 것을 지으신 그분은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시며, 우리를 지으신 그분은 우리를 보시고 계신다(시 139:1-16). 전지(全知)는 전능(全能)과 통한다. "하나남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그에게 익히 알려져 있다(행 15:18).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정신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의 지혜의 사본(寫本)과 그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소산 위에 비춰진 엄숙한 반영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들의 활동을 반성하도록 하나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길을 보며(렘 2:23),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기를(시 119:59) 기대하신다. 하루의 일을 끝마치고, 밤의 안식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그 날 하루 동안 우리가 한일이 어떤 것인가를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생각하며 반성하여야 한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한 주간 동안의 일을 마치고 안식일의 휴식에 들어갈 때에도, 우리의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의 일을 마치고 무덤 속의 안식에 들어갈 때는 그 때가 바로 회개하는 가운데서 죽으며, 회개하는 가운데 생을 작별하여야 하는 때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Ⅱ.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만족하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여 놓은 일을 돌이켜볼 때 부끄러움을 느끼고 매우 잘못된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을 돌이켜 보셨을 때는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보시기 전에 좋았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에 대해 확실히 듣기 전에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창조의 활동은 매우 좋은 활동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모두 잘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결점도 또 어떤 단점도 있을 수 없다.

1. 그것은 보시기에 좋았다. 그것은 창조자의 마음에 꼭 들어맞으며, 그가 원하신 바 그대로 되었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다. 옮겨 베낀 것이 위대한 원본과 대조해 볼 때 정확하며, 오자가 없고 하나도 잘못 찍힌 점이 없었다. 또 그것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며, 원래의 시도대로 되었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눈에 보이는 피조물의 영주로 삼으신 인간에 대해 그를 잘 섬길 수 있도록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보시기에 좋았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시기에 좋았다.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또 완전하심을 드러내 주며, 인간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게 하는 신앙심을 품게 하여 준다.

2. 그것은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 (둘째 날을 재고하는) 모든 하루의 창조 활동에 대해 "보시기에 좋았다" 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1) 이번에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창조의 모든 과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것은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눈에 보이는 형상과 그리고 그를 찬양하는 입으로 만들고자 계획되어진 존재이다.

(2) 이제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 모든 부분들은 그것들대로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전체를 보실 때에는 매우 좋았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있어서의 그의 활동의 영광과 선하심, 아름다움과 조화를 창조 활동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그것들이 완성될 때 가장 선한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머릿돌이 놓여질 때마다 우리는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지어다" 라고 외칠 것이다(슥 4:7).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Ⅲ. 창조의 활동이 마감되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 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순식간에 창조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생기게 했던" 하나님은 "세계가 있으라"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이며, 부활 때와 같이 "순식간에 홀연히" (고전 15:25) 세계가 생겨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그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은 당신의 일을 당신의 방법에 따라 당신의 시간에 행하시는 자율자(free-agent)이심을 보이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을 보다 명확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것은 우리에게 엿새 동안 일하고 명상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또 이것은 우리에게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되는 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 4 계명의 근거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의 시간 배정을 이처럼 주의 깊게 책정하셨으니 만큼 안식일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신앙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활동을 회고하셨으니 우리는 이제 창조에 관한 우리의 명상을 회고하여 보자.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명상이 불충분하고도 불완전하며 또 우리의 찬양마저도 보잘 것이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을 충동하여 우리의 있는 것을 만백성에게 전파된 영원한 복음의 근본 취지에 따라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게 하자" (계 14:6, 7).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그의 창조의 모든 소산물들이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너도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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