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성명과 같게 하리라. 여기서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가 처단한 450인의 바알 선지자들을 가리킨다(18:22, 40). 따라서 이 말에는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이세밸의 극심한 증오와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다. 그녀가 아합으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대하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처럼 더욱 완악해진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신들이 …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이세벨의 맹세 속에 담긴 이 말은 의미 심장하다. 특히 엘리야가 한 분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 것과 대조된다. 참신이신 한 분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이처럼 주위의 모든 것,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들을 신격화하게 된다. 어쨌든 인간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 따라서 한 분 하나님께 굳건히 헌신하든가 아니면 다른 모든 것에 굴복하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것이다.
생명을 위하여 … 브엘세바에 이르러. 이세벨의 단호한 경고를 받은 엘리야는 할 수 없이 도피길에 오른다. 이적과 능력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온 백성들에게 보였던 엘리야(18:30-46)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황망히 도피길에 오르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성정(性情)을 지닌 엘리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엘리야가 행한 이적적 권능이란 오직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한편 브엘세바(Beersheba)는 유다 네겝(Negeb) 지방의 한 성읍이다. 이곳은 팔레스타인 최남단 지역으로서 곧 헤브론 남서쪽 55 km 지점이다. 삼상 3:20 주석 참조. 따라서 엘리야는 이세벨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남 왕국 유다의 남쪽 국경 지대로 피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환을 … 머물게 하고. 엘리야가 행한 이 조치에서 당시 그가 얼마나 큰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가장 큰 승리 뒤에 찾아온 위협은 극도의 무력감과 허탈감을 낳는다.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되기 쉬운 극도의 고립감을 엘리야는 자신의 사환조차 동행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표출하고 있다(Lange).
하룻길.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거리를 나타내던 관용적 표현이다. 정확한 수치로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하룻길’은 약 32~40 km이다.
로뎀 나무. 로뎀 나무(broom tree, NIV, RSV)는 사막의 메마른 골짜기나 하상(河床)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목이다. 콩과의 식물로서 흰 꽃이나 연보라색 꽃을 피우는데 대개 1~2 m의 높이이다. 오늘날 아랍인들은 이 나무를 ‘금작화’(genista Retem 또는 genista Monosperma)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광야에서 바람과 햇볕을 잘 막아 주기 때문에 대상(隊商)들에게 매우 환영받는 나무이다. 그러나 사막에 거주하는 족속들은 이를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Lange, Robinson, Keil & Delitzsch).
여호와여 …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불(fire)과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18:30-46)가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하나님께 드린 적이 있지 않은가(욘 4:8)!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넉넉하오니. 이에 해당하는 원어 ‘라브’는 ‘충분하다’(enough)는 뜻이다. 그러나 본 절은 문자대로의 뜻과는 달리 희망을 상실한 사람의 체념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그러한 뜻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로 표현하였다.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낫다’에 해당하는 원어 ‘토브’는 보통 ‘선하다,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질이나 가치에 있어 상대적으로 우수한 경우를 가리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자신이 조상들에 비해 나을 바가 없다고 한 말은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가? 우선 본 절은 엘리야가 자신을 ‘못난 놈’으로 자조하는 비애 섞인 말임을 기억하라. 그 다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던 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런데 그 사명이 성공한 듯 보이는 순간에 닥친 위기(1, 2절)는 그로 하여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비탄속에서 이제 엘리야는 지금까지 조상들이 겪은 이스라엘 역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자신 역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했다는 실망을 말하고 있다.
어루만지며.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가’는 특별히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단 8:18, 10:16).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만지심은 상황을 변화시키며 새 힘을 주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또한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 대상이 자신에게 속한 존재라는 의미를 주기도 한다(7절).
하나님의 산 호렙. 호렙 산(Mount Horeb)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그 밑에서 장막을 쳤으며 모세가 여호와와 대화를 나누었던 신성한 시내 산(Mount Sinai)와 동일시된다(출 19장).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예벨 무사(Jebel Musa)가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3:1주석을 참조하라. 이제 엘리야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 실의에 빠진 채 도착하였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질문은 새로운 사실을 묻는 물음이 아니고 도리어 질문 받는 자를 일깨우는 물음이다. 즉 하나님은 엘리야의 실망과 체념을 이미 알고 계시면서 물으신 것이다. 바로 이 질문은 엘리야 자신을 냉정히 성찰케 하는 도전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종의 전환과 갱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또한 자신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Keil & Delitzsch).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 말(히, 칸느 키느티)은 ‘질투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카나’가 두 번 반복된 말이다. 즉 이는 ‘질투하고 질투하더니’라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작태에 엘리야가 심히 분노한 것을 가리킨다. 이때 그의 질투는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는 데서 나온 열정이다(출 20:5).
오직 나만 남았거늘. 원문은 ‘나, 나만 남았다’는 식의 표현이다. 이는 곧 엘리야의 탄식과 하소연이 그 호흡까지 느껴질 정도의 표현이다. 더구나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인 ‘바드’(alone)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개념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엘리야가 얼마만큼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다. 그 당시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오바댜가 숨겨 놓은 100명의 선지자(18:4)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7천 명의 순결한 자가 남아 있었다(18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출 33:19). 즉 이는 여호와께서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한 방편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지나가다’는 뜻의 원어 ‘아바르’는 움직임의 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사물을 관찰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이는 마치 바람은 그 움직임을 볼 수 있으되 형상을 볼 수는 없는 것과도 같다(요 3:8).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수중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포하신다.
강한 바람 … 지진. 비단 이것들 뿐 아니라 다음 절에 나오는 ‘불’ 등은 여호와께서 현현(顯現)하실때 일반적으로 수반되는 현상이다(출 19:16-20). 그러나 정작 본 절에선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셨다. 그러기에 바람, 지진, 불 따위는 표적을 구하는 종교가들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굉장한 증거임에 틀림없겠지만 선지자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엘리야의 마음을 압도한 것은 그러한 현상들 다음에 들려온 ‘세미한 소리’(12절)였다. 즉 이것이야말로 엘리야에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다. 오늘날 우리들도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그 세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시 119:105).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하사엘은 본래 아람 왕 벤하닷의 군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벤하닷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이후 자주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힌다(왕하 8:13-29, 13:1-3). 그러므로 본 절은 하나님께서 하사엘을 이스라엘 징계의 채찍으로 사용하실 계획을 알리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엘리야가 언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실상 16절까지에서 언급되는 하사엘, 예후, 엘리사 중 그 누구도 엘리야의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왕하 8:12-15, 9:1-10). 그러나 이 난점은 ‘기름 부음’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폭넓게 해석할 때 해결된다. 즉 여기서 ‘기름 붓다’라는 말은 꼭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어떤 사명을 부여하는 것(시 105:15, 사 45:1)이나 따로 구별하는 것(출 30:26)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벨므홀라. 이 지명의 뜻은 ‘춤추는 초장’이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벧산 남쪽 16 km 지점의 한 유적지를 아벨므홀라로 추정한다. 삿 7:22 주석 참조.
엘리사. ‘엘리사’란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농부였지만 상당한 재산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열두 겨리 소를 부릴 수 있었던 그는 엘리야의 부름에 즉각 응하여 선지자가 되었다(19-21절). 그리하여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왕하 2장) 엘리사는 약 50년간(B.C. 848-797년경) 북 왕국에서 활약하게 된다. 한편 학자들은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이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고 본다(Stek).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이 말 역시 열두째 쌍의 소를 부린다는 뜻일 수도 있고 열두째 밭을 맡아 간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절 초반을 참고할 때 열두 번째 쌍의 소를 맡아 부렸다는 뜻이 옳은 것 같다.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보통 겉옷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엘리야의 경우 그의 외모와 함께 특이한 복장은 항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엘리야가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매우 상징적이고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었다(Hammond, Keil & Delitzsch). 그러기에 엘리사 역시 이 동작에 담긴 의미를 즉각 알아 차렸다(20, 21절).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입맞춤’은 이스라엘인들의 일상적 인사법이다. 본 절에서의 엘리사의 청원은 눅 9:59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눅 9:59에 나오는 사람은, 부친의 생존 기간 동안은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식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면에 엘리사는 자신을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께 응당 드려야 할 인사를 드리려 한 것이다.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혹자는 이 말을 약간 힐난조의 말로 본다(Rawlinson, Wordsworth).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이 말은 긍정의 뜻이다. 즉 이는 ‘안 될 이유가 뭐 있겠느냐’는 뜻이다. 사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행한 것은 선지자적 직무에의 초대이다. 그런데 이 초대는 곧 부모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모에게 입맞추고 오겠다는 엘리사의 요청은 어떤 주저함도 아니다. 도리어 이는 부모와의 영원한 이별을 감지하고 그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단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엘리야 역시 수락한 것이다(Lange).
소의 기구를 불살라.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구를 불사른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여기서 ‘백성’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웃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열왕기에서는 엘리야→엘리사의 계승을 모세→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Stek). 본 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수종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수종을 든 것이다(출 24:13, 수 1:1). 한편 왕하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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