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백성들이 지도자들의 말을 따라 기꺼이 헌신하여 전투에 참가한 것을 가리킨다. 이는 바락이 군사를 모집하자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만 명이 지원한 것(4:10)과 그외 여러 지파도 적극 조력한 사실(4, 15절)에서 잘 나타난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본 시(本詩) 전체의 내용은 언뜻 볼 때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헌신과 용기 그리고 연합에 대하여 노래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배후에서 친히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3, 5, 11, 13절).
내가 …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기서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자마르’는 ‘연주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단순히 노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여 찬송하는 것을 가리킨다(시 33:2, 71:22, 98:5, 147:7, 149:3). 이스라엘인들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찬앙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그에 화답하여 노래 부르는 예배법이 발달되어 있었다(출 15:20, 삼하 6:5).
세일 … 에돔 들. 둘 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 지나온 사해 남동쪽의 에돔인의 산지를 가리킨다. 신 33:2 주석 참조.
땅이 진동하고. 출애굽 당시에 나타난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권능과 기이하신 역사를 가리키는 말이다(Matthew Henry). 이와 같이 드보라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권위 앞에 모든 피조물들이 두려워하며 떨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백하였다(삼하 22:8, 시 68:8, 77:18, 나 1:5, 합 3:6).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진 것을 뜻하는 시적 표현이다. 이는 노아 홍수를 연상케 한다. 즉 노아 홍수 때에도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땅의 샘이 터져 40주야 비가 쏟아졌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창 7:11-12). 이처럼 드보라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능력을 찬양함에 있어서 과거 실제적으로 발생했던 사건들을 중심으로 노래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함을 더해주고 있다.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당시 이스라엘의 황폐상을 표현한 것이다. 즉 당시에는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가 극심하여 상거래도 없었으며 법질서도 마비되어 있었기에 노상에서 약탈 행위가 빈번히 자행되었다. 때문에 약탈, 폭행 등을 피하여 행인들은 큰 길로 다니지 않고 작은 길로 다녀야 할 형편에 처해 있었다. 다시 말해 블레셋족과 야빈의 압제 하에서 이스라엘은 경제가 핍절되었으며, 무법 천지가 되어 백성들에게 평안이 없었다.
나 드보라가 …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야빈의 학정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었는데, 드보라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 ‘어머니’라는 표현은 욥이 자기에게 의탁하던 자들과 관련하여 스스로를 ‘빈궁한 자의 아버지’(욥 29:16)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낸 ‘보호자’란 의미를 지닌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다만 드보라는 자신이 여성이므로 ‘어머니’란 표현을 사용했으며, 욥은 자신이 남성이므로 ‘아버지’란 표현을 사용했을 따름이다.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드보라는 대적들이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곧 공략하려 드는 일촉 즉발의 위기 상황을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에겐 적을 방어하거나 공격할 무기가 시원찮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철 병거를 지닌 하솔 군을 격멸시켰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권능을 베풀어 이스라엘을 도우셨기 때문이다(4:12-16, 23-24). 따라서 드보라가 당시 이스라엘에 무기가 있었느냐고 반문한 것은 역설적으로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사만 명. 시스라와의 싸움을 위해 출전하였던 이스라엘의 주력군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군사 일만 명이었다(4:10).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사만 명’은 어떻게 된 것인가? 아마 이는 이들 주력군을 도와 같이 전쟁에 참전하였던 이스라엘 여러 지파의 병력을 합한 대략적 수효일 것이다. 즉 14-15절을 보면 시스라와의 싸움에는 비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 뿐 아니라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반, 잇사갈 지파 등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 사모함은. 이처럼 드보라가 이스라엘 방백들을 사모하였다는 말에 대하여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를 다음과 같은 뜻으로 보았다.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존경한다. 그들은 영원토록 내 마음을 차지하였다. 나는 결단코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즉 이는 곧 이스라엘의 방백과 두령들이 자신을 도와 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솔선 수범한 것에 대하여 드보라가 깊이 감사하고 있는 말이다.
양탄자에 앉은 자들. ‘양탄자’는 오늘날에도 평민들이 구하기 힘든 귀하고 비싼 물건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부유하고 여유 있는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길에 행하는 자들. 일반 평민 또는 행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압제자의 시대에는 마음놓고 길을 갈 수 없었으나(6절), 하나님께서 그 대적들을 격파하셨으니(4:12-24) 이제 안전하게 길을 갈 수 있었다. 한편 이상과 같은 흰 나귀 탄 자, 양탄자에 앉은 자, 길에 행하는 자들이란 결국 이스라엘 모든 계층,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파할지어다. 본문에는 어떤 사실을 선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다만 다음에 이어지는 드보라의 노래 중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11절)이 언급되어 있으므로, 드보라는 백성들에게 압제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라고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
물 긷는 곳에서도 … 전하라. 여기서 ‘물 긷는 곳’이란 우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보통 고대 근동 지역의 우물은 마을 어귀에 있었다(요 4:5-8, 28). 그래서 이스라엘이 적의 압제 하에 있을 때에는 마음놓고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적들을 분쇄해 주셨으니 안심하고 물을 길으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고대 사회에서 성문은 백성들의 주요 회합 장소였다. 그곳에선 비단 상거래 뿐 아니라 공식 재판, 중요 사항 공지, 친교 등이 이루어졌다(창 19:1, 신 21:19, 느 13:19).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와 전쟁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회합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4:12-24) 다시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백성들은 생활의 주요 무대인 성문으로 모여들 수 있게 되었다.
바락이여 …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여기서 ‘사로잡은 자’란 바락이 시스라군을 진멸할 때 생포한 포로들을 가리킨다. 드보라는 바락에게 이제 그들을 끌고서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가라 하였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Lange, Matthew Henry).
여호와께서 …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여기서 ‘용사’란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와 그의 군사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시기 위해 나서신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적들을 패퇴시키며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가리킨다(4:15).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본 절을 통해 볼 때 베냐민 사람들은 일개 지파의 자격으로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들은 여러 지파들 틈에 섞여 개인적으로 참전했던 것 같다. 이는 아마 그들이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북부 지역의 지파들과는 달리 야빈의 압제를 덜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야빈과의 전쟁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자연히 일부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전쟁에 참여했을 것이다.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다(창 50:23). 그런데 이 ‘마길’의 자손, 곧 므낫세 지파 중 절반은 요단 동쪽에 정착하였으며(수 13:29-31) 나머지는 요단 서쪽에 들어갔다(수 17:1-13). 따라서 본 절에서 ‘마길’이라는 표현은 이 중 요단 서쪽에 거한 므낫세 반 지파만을 의미한다. 이 지파는 아셀, 스불론 그리고 잇사갈 지파와 북쪽 경계를 이루며 살았으므로 잇사갈 지파의 경내에 있는 다볼 산(4:12)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다스리는 자들’이란 군대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이는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군 지휘관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왔음을 알려 준다.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 ‘대장군’에 해당하는 원어 ‘소페르’는 ‘계수하는 자’ 또는 ‘서기관’ 등의 뜻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었다(Keil). 그런데 ‘대장군의 지팡이’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공동번역 등은 모두 개역 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으나 KJV에서만은 ‘작가의 붓’(pen of the writer)으로 번역하고 있다. 혹자는 KJV의 번역을 지지하여, 스불론 사람들은 시돈 사람들처럼 상업에 능하고 장사를 전문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도 전쟁 경비를 계산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고 주장한다(P. Cassel). 그러나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서기관’은 전시에 국민을 모으는 일도 맡아 보았으니(왕하 25:19, 렘 52:25), 스불론 지파는 그 전쟁에 있어서 서기관의 직무를 담당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잇사갈 지파가 바락의 군사와 더불어 시스라 군대를 치기 위해 다볼 산에서 기손 강가로 내려간 것을 의미한다(4:14-15).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르우벤 지파가 차지한 요단 동쪽 땅에는 시내가 많이 있었고, 그에 따라 목초지가 널려 있었다(수 13:15-23). 따라서 드보라가 르우벤 지파의 지경을 가리켜 ‘르우벤 시냇가’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한편 본 절에 의거하면 르우벤 지파는 타지파로부터 전쟁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큰 결심’이란 표현은 16절의 ‘큰 결심’이란 표현과 함께 그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에 대하여 많은 토론이 있었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기록에 의하면 르우벤 지파는 갓 지파와 더불어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서도 특히 많은 가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민 32:1). 그들이 요단 서쪽 땅에서 기업을 차지하지 않고 요단 동쪽의 모압 북방 지역을 기업으로 차지한 까닭도 그 때문으로서, 그곳은 목축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목축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을 터인데, 본 절은 바로 이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 이는 곧 르우벤 지파가 한가로운 목가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즉 그들은 요단 강 건너편의 소식과는 무관한 채 목자들이 가축을 치면서 부는 피리 소리나 들을 정도로 평안을 구가하셨던 것이다.
큰 결심이 있었도다. 공동번역은 이를 ‘끝도 없이 토론이나 벌이는구나’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15절의 ‘큰 결심이 있었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이 표현은 단 지파도 르우벤 지파나 갓, 므낫세 반 지파와 같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기적인 생활을 즐기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특히 ‘배에 머무르다’라는 표현은 단 지파가 뱃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베니게 사람들과 함께 욥바에서(수 19:46) 무역을 했다는 의미이다(Goslinga). 이것으로 보아 단 지파는 이때까지는 아모리족에 밀려 팔레스타인 최북방의 라이스 지방으로 쫓겨나지 않은 것 같다(18장).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여기서 ‘해변’과 ‘항만’은 지중해변을 가리킨다. ‘아셀 지파’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야빈의 압제가 가장 심했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연접해 있었다(수 19:24-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 동족들의 전투에 무관심하며 자기들의 생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므깃도 물 가 다아낙. ‘므깃도 물 가’는 므깃도와 남쪽 산지 사이, 즉 므깃도 후방의 분지로 흘러 들어가는 마른 계곡인 ‘와디’(Wadi)를 가리킨다. 이곳은 우기때 비가 와야만 물이 흐른다. 이러한 사실은 14세기의 유대인 학자 에쉬토리 하파리(Eshtori Haparhi)에 의해서 밝혀졌다. 따라서 ‘므깃도 물가’는 기손 강(4:7)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7, 15 주석 참조. 한편 ‘다아낙’은 ‘므깃도’에서 불과 8 km도 채 안 되는 이스르엘 계곡의 남쪽에 위치한 성읍이었다(수 12:21). 기손 강은 평지를 지나 므깃도와 다아낙의 북부로 흘러 들어갔다.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은’에 해당하는 ‘케세프’는 구약 시대 당시 화폐로 통용되었던 ‘은’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쟁시 취하는 전리품이나 노획물 따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Keil, Lange). 즉, 시스라와 그 동맹군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고자 하였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진멸당하고 말았다(4:15-16, 23-24).
기손 강은 옛 강이라. 이처럼 드보라가 ‘기손 강’을 ‘옛 강’이라 부른 이유에 대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오래 전부터 고대 역사가들이나 시인들이 그곳을 찬양해 왔거나 아니면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시스라군을 멸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주장한다(Matthew Henry). 그리고 어떤 학자는 그 강 가에서 옛부터 무수한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강이 옛날부터 유명해진 탓으로 추정한다(Gosinga, Hervey). 그밖에 단지 기손 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흘러 내려온 오래된 강이기 때문에 ‘옛 강’으로 불리웠다는 주장도 있다(Keil). 이상과 같은 견해를 종합해 볼 때 기손 강은 드보라 시대에 이미 옛날의 어떤 사건들과 연관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본 절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개역 성경과 KJV, 그리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밟았다’고 해석한 공동번역 등은 본 절을 시스라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전한 승리(4:12-24)를 노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밟았도다’에 해당하는 원어 ‘티드레키’가 명령형인 점에 근거, 다른 영역본들은 이를 달리 번역하고 있다. 즉 RSV, NIV, Living Bible 등은 본 절을 ‘내 영혼아 힘차게 진군하라’(March on, my soul, be strong!)로 번역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시스라와의 전쟁 당시 드보라가 힘차게 이스라엘군을 격려했던 사실을 노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본 절은 시스라와의 전투에서 용맹히 싸웠던 백성들을 치하하는 것이므로, 양 견해 중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하다.
메로스를 저주하라 … 치지 아니함이니라. ‘메로스’란 지명은 성경에서 본 절에만 언급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아 마땅한 메로스의 죄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에 근거해 볼 때 ‘메로스’는 기손 강 부근에 위치해 있었던 마을임에는 분명하다. 혹자는 이를 사마리아 북방 약 20 km지점에 위치한 ‘메루스’(Merrus)일 것으로 추정한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또 다른 이는 다볼 산 남방에 위치한 ‘케플 무슬’(Kefr Musr)일 것으로도 추정한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아무튼 메로스 거민은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받고자 싸우는 이스라엘을 도와줄 의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메로스의 주민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아니하므로 간집적이나마 폐해를 끼쳤다.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메로스를 저주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운 탓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야엘(24-27절)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야엘에 대한 축복은 ‘메로스에 대한 저주’와 완전이 대조된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압제자와 사귀고 있었고 자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4:11)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야엘의 행동에 대하여서는 앞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4:17-22).
관자놀이. 사람 얼굴의 귀와 눈 사이에 태양혈(太陽穴)이 있는 부분 즉 ‘관자놀이’(temple)를 가리킨다.
창살. 원어 ‘에쉬나브’는 ‘틈을 남기다’라는 말에서 온 단어로 좁은 나무나 쇠창살을 사이사이에 박아 만든 창문을 가리킨다. KJV는 이를 ‘격자창’(lattice)으로 번역하였다.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처음에 시스라의 어머니는 승전의 소식을 담은 아들의 병거가 늦게 오는 것에 대하여 이러한 말로 불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라의 귀환이 한없이 늦어지자 그녀의 불평은 오히려 불안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전쟁시 여인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노예로 삼거나 아니면 첩으로 삼는 경우는 고대에 흔히 있던 일이다(신 21:10-14). 그런데 시스라의 모든 병사들이 제각기 한두 명의 여인을 포로로 얻지 못하였겠느냐는 말은 곧 시스라군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굉장한 전과를 올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 ‘채색 옷’에 해당하는 ‘리크마’는 다앙한 색깔의 자수품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옷감의 안팎을 손이나 베틀로 수 놓아 만든 옷을 가리키는데 고대에는 매우 값비싸 주로 상류 계층 사람들만 입었다(창 37:3).
노략한 자의 목. 혹자는 ‘노략한 자’에 해당하는 ‘샤랄’이 ‘여왕’이라는 뜻을 지닌 ‘쉐갈’에 대한 필사자의 실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략한 자의 목’이란 ‘시스라 아내의 목’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Ewald).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원본을 뚜렷한 이유 없이 바꾸어 버린 것으로 타당치 않다. 한편 또 다른 이는 ‘노략한 자’를 ‘노략물’로 해석하여 시스라가 각 노략물 곧 낙타나 나귀, 말 등과 같은 짐승에 채색 옷을 두른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ervey).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전후 문맥상 잘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노략한 자’는 시스라를 가리키며 그가 승리를 기념하여 채색 옷을 감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이것은 전쟁의 결과를 요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기간은 전쟁 이후 드보라가 살았던 기간이며(비교 2:1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았던 기간을 지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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