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삼 개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때로부터 석 달째 되는 달을 가리킨다. 일명 ‘시완월’이라고 하는데 양력으로는 5-6월에 해당된다.
되던 날. 70인역(LXX)과 유대 전승에는 이때가 제3월의 첫째날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영역본(KJV)은 이 말을 ‘the same day’로 번역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라암셋을 출발한 첫달 15일과 같은 날로 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도착한 날은 3월 15일로서, 그들이 애굽을 떠난 지 만 2개월이 되는 날이었다(L. Wood). 그 기간 동안 백성들은 대부분 엘림과 르비딤 지역에서 진을 치고 보냈을 것이다(J. P. Lange).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라암셋에서 출애굽한 후 숙곳(12:37)→에담(13:20)→엘림(15:27)→신 광야(16:2)→르비암(17:2, 3)을 거쳐 이제 이곳 시내 광야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정식으로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아울러 신정 국가의 초석이 되는 율법을 수여받았으니(5-8절, 22장 이하) 그 의미가 자못 크다.
19:2 산 앞에. 여기서의 산은 아랍인들이 보통 ‘예벨 무사’(Jebel Musa, 모세의 산)로 부르고 있는 시내 산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수에즈 만과 아카바 만 사이의 V자형 반도 남단에 위치해 있는데 해발 2,291m이다(3:1).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친 시내 광야의 위치에 대해서 크게 학자들 간에 양분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시내 산 북쪽에서 북서쪽으로 널리 뻗어있는 에르 라하(Er rahah) 평지라고 보는 견해와, 시내 산 남동쪽으로 약 8 km 가량 뻗어 있는 세바예(Sebayeh) 평지라고 보는 견해가 그것인데, 최근에는 후자가 더 타당하다는 설이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에르 라하 평지는 당시 약 200만의 백성들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비좁은 장소로서 본 절의 산 앞에 진을 쳤다는 성경적 묘사나, 시내 산을 백성들이나 가축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한 34:1-3과 비교해 볼 때 그 타당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Stanley).
19: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하나님께서 호렙 산 떨기나무 사이에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모세를 부르신 후 그에게 주셨던 예언이 성취되는 첫 번째 단계이다(3:4-12).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이곳 시내 산에서 자신을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잊지 않은 모세는 시내 산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갔는데,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것인지를 계시받기 위함이었다.
본 절부터 모세가 시내 산에 오르내리는 기록이 시작되며, 총 8번 오르내린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32:1의 주석을 참고하라.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여기에서 ‘말하고’와 ‘말하라’는 말은 각각 히브리어의 ‘아마르’와 ‘나가드’로서 ‘너는 말해야 한다’와 ‘너는 알려야 한다’는 뜻의 강한 명령형 동사이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하여 알려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히브리 민족의 이름이 애굽에 내려간 히브리 민족의 직접적 조상인 야곱 족속과 그 야곱의 언약적 칭호인 이스라엘 자손(창 32:24-28)이라는 두가지 칭호로 사용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실로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을 맺고 구원하시되 그 때그 때마다 무계획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세우신 당신의 의지와 공의에 따라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것이다.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거치면서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애굽의 군대가 홍해 바다에 몰사한 사건까지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그 놀라운 사건들을 생생히 두 눈으로 목도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율법을 베풀기 전, 그 구원 사건을 상기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이다(사 43:3-7).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사랑의 팔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 인도하시는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Keil). 독수리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신 32:10-12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이 말은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소유권 주장이며 선포이다. 여기서 특별히 이 말을 한 이유는 여호와가 단지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그러한 지역신이나 나라신(國神)이 아니라는 뜻이다(Keil). 그리고 나아가 그러한 전우주적 신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음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언약. 창 6:18 주석을 참고하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여기에서 ‘소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굴라’는 평범한 소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소유물, 즉 ‘아주 귀중한 소유물’ 또는 ‘매우 값진 소유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그들은 세상 민족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19:6 제사장 나라가 되며. 70인역은 이구절을 ‘왕 같은 제사장직’(바실레이온 히에라튜마)이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민족으로서(4:22) 하나님과 열방 사이를 중재하는 제사장이 됨과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그 특권을 상실하였으며(롬 11:20) 오늘날 이 특권은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을 믿는 성도(집합적으로는 ‘교회’) 모두에게 주어졌다(벧전 2:9).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다른 세상 민족들과는 구별되는, 택함받은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의 뜻을 수행하는 성민(聖民)이 되리라는 뜻이다.
19:7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을 언약 관계를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언약에 대한 말씀을 백성의 장로들에게 전함으로써 언약의 당사자가 될 그들에게 동의를 얻었다. 즉 모세는 계약의 필요 요건을 충실히 구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장로’에 해당하는 ‘자켄’은 ‘연장자’, ‘우두머리’란 뜻인데 백성들 중 나이도 많고 인품도 높아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들의 의사는 곧 백성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셈이 된다.
그들 앞에 진술하니. ‘진술하다’의 히브리어 ‘슘’은 ‘(그대로)두다’, ‘놓다’, ‘전해 주다’, ‘부치다’라는 뜻이다. 즉 모세는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의 개입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의 장로들은 그 말씀을 듣고 스스로 그들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목회 일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자신의 판단과 의사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
19:8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모세의 말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곧 자신들의 순종 의사, 즉 하나님과의 복된 언약 관계의 수립에 적극 찬성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생각할 때 당연한 결론이다.
다 행하리이다. 고대 근동의 계약법 개념을 적용시킬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일종의 쌍무(雙務) 언약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義)를 행동으로 충족시켜 드려야 할 의무가 있었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에 대한 긍휼을 잃지 않으시고 언약을 새롭게 갱신시켜 주셨는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편무적(片務的) 은혜 언약이었다. 이러한 은혜 언약은 그 대상을 유대인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혈통적 조건이 없는 보편적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롬 1:16).
19:9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빛에 거하신다(시 104:2, 딤전 6:16). 만약 인간이 그 빛에 가까이 가면 그는 견딜 수 없으며 때로 육체적으로 손상을 입게 된다(행 9:3-9).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시내 산에 임하기 위해서는(이때부터 3일 후에, 16절) 자신의 광채를 짙은 구름으로 가리워야만 했다.
네게 임함은 … 믿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임재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도 모세와 말할 수 있었다(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신의 임재 모습을 나타내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하고 귀로 생생히 듣게 함으로써 분명한 증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을 확실히 믿게 하려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또한 순종하게 하려 함이었다.
19:10 성결하게 하며. 죄악된 인간이 성결함이 없이는 결코 거룩한 하나님께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교육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즉 내적(內的) 성결을 위하여 외적(外的) 성결까지도 유지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과 내일’ 즉 이틀 동안 몸을 씻고, 옷을 빠는 등 최대한의 성결을 유지해야 했다.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구약 시대에 취해진 이러한 외적 성결의 행위(레 11:25, 15:5)는 내적 성결을 의미하는 의식적(儀式的)인 행위로서, 상징적인 의미로는 장차 어린 양의 피에 그 마음의 옷을 빨아야만(계 7:14)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행위였다.
19: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틀 동안 준비하게 하신 것은 그들과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기에 앞서 다시 한번 그 일이 갖는 의미와 중대성을 깨우쳐 주며, 또한 그들이 스스로 삼가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19:12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어느 곳이든지 거룩한 처소가 된다. 따라서 그곳에는 어떠한 부정한 것이나 죄악도 틈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임재하신 곳에 접근치 못하도록 명하신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인데 비록 백성들이 자신을 성결케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본성에 있어 죄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3:5, 수 5:15). 하지만 이처럼 구약 시대에 강조된 하나님과 인간간의 근본적 차이와 거리감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전히 해결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 피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히, 그리고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마 27:51, 히 4:16).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거룩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처소를 침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범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심판을 면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필연적으로 신(神)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중보를 요청하는 것이었다(히 8:6, 7). 따라서 그 예표적 행위로 지금 여기서는 모세가 그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19:13 손을 대지 말고. 구약 시대의 의식상 시체를 만진 자 역시 부정한 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민 19:11). 이것은 죽음은 곧 죄의 결과라는 성경의 독특한 사상에 그 배경을 두고 있다(롬 6:23).
화살로 쏘아. 곧 화살과 같은 날카로운 기구에 관통 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짐승이나 사람. 짐승이나 사람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던 인간 타락 후 무심한 짐승까지도 죄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거역하는 존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피조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책임을 알게 해준다(롬 8:18-22).
19:15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여기서 여인이란 아내(KJV, wives)를 말하며, ‘가까이 말라’는 ‘함께 눕다’는 뜻의 ‘나가쉬’에 부정어 ‘알’이 붙은 말로 ‘부부관계를 갖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의식을 목전에 둔 백성들로 하여금 경성하며, 쾌락에 탐닉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 결코 부부간의 정당한 성관계를 죄악시한 것은 아니다. 특별히 거룩한 의식을 앞두고 몸을 절제하던 이와 비슷한 관습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Herodotus), 후일 바울도 특별한 경우에는 부부간에 얼마동안은 분방(分房)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7:5).
19:16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 우레와 번개는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과 그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현상들로서 큰 뇌성(시 77:18, 104:7)과 번쩍이는 빛(마 4:16, 행 9:3, 딤전 6:16)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런 표현은 종종 인간의 연약함과 대조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계시할 때에 사용되었다(시 77:18, 97:4, 계 4:5, 11:19). 즉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무형의 존재이지만 시내 산에 임재할 때 우레와 번개 따위를 동반하고 나타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내 보이셨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빽빽한 구름’이 히 12:18에서는 ‘침침함과 흑암’으로 묘사되었다.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대개 천사들에 의해 들려졌다(계 8:6-8, 10, 12, 9:1, 13, 11:15). 이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시공(時空) 속에 당신께서 친히 개입하시는 것을 위엄스럽게 선포하는 수단으로써, 당신의 종들인 천사들로 하여금 나팔을 불도록 하셨을 것이다(Knobel). 동시에 이 나팔 소리는 감추어진 뜻을 이제 밝혀 계시할 것이라는 일종의 예고 행위이기도 했다. 한편 성경은 예수께서도 장차 재림하실 때에 천사와 함께 하나님의 나팔 소리 가운데 이 세상에 임재하실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호언 장담으로 대답하였다(8절).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위엄을 목격하자 겁과 두려움에 사로 잡혔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 타락 이후 본성적으로 죄인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그 앞에서 다 죽은 자처럼 비참하게 떨지않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사 6:5, 단 10:8, 계 1:17).
19:17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여기서 산 기슭은 시내 산 밑, 침범 불가의 경계선 바깥으로부터 백성들의 진(陣) 사이를 가리킨다.
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시내 산 전체가 온통 연기로 뒤덮였음을 뜻한다. 즉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임하셨으므로 초자연적인 연기가 나타나 시내 산을 덮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마치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같이 온 산에 충만히 퍼져 있었다고 묘사하였다(신 4:11).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히 12:29에서는 이 구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묘사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신 4:24). 불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사실을 느끼고 깨달았을 것이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히 12:26에서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게 하였’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음성이나(19, 20절) 후에 율법을 전하실 때의 음성으로 말미암은 진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강림과 더불어 수반된 직접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Kalisch).
19:19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혹자는 여기서의 하나님의 음성이 뇌성 속에서 나는 큰 소리로서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고 모세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한다(Moor). 그러나 이와 관련된 여러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20:19, 신 4:33, 5:4) 다른 백성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9:20 여호와께서 …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이는 이방 종교와 여호와 종교와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즉 이방 종교에서는 먼저 인간이 신을 애타게 찾음으로써 신과 인간 간의 관계가 성립되는 반면, 여호와의 종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인간을 부르시고 찾아 주심으로써 양자간의 교제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대표하여 모세를 중재자로 부르심으로써 그들과의 교제를 속개하고 있는 것이다.
19:21 경고하라. 기본 동사 ‘우드’는 ‘(반복하여) 훈계하다’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단단히 일러서 경고하라’는 뜻이다.
많이 죽을까 하노라. 구약 시대에는 거룩한 장소나 물건을 하나님께서 정한 규례를 범할 경우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민 4:20, 레 10:1, 2). 후일 거룩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것 때문에 벧세메스 사람 (오만)칠십 인이 죽음을 당한 사건은 그 좋은 예이다(삼상 6:19-21).
19:22 제사장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제사장을 임명하는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이후에 생겨난 제도이다(28:1). 따라서 여기서 제사장들이란 율법 제도에 의해 임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을 기존에 맡았던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들을 칠까 하노라. 이 표현은 거룩한 신적 본성을 가지신 여호와께서 인간의 불의한 죄악에 대해 당신의 공의에 근거하여 즉각적인 진노를 쏟아 부으시는 것을 의미한다(레 10:1, 2, 삼하 6:6, 7).
19:23 하셨사온즉 … 못하리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한번 경고한 것(14절)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나님을 안심시키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으니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19:2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현명한 제안이라 착각했던 모세의 생각을 일축하셨다. 그리고 애써 산에 올라온 모세에게 내려가서 다시 한번 백성들과 제사장들에게 엄한 경고를 하라고 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에 의하여 당신의 뜻이나 계획을 변경시키는 분이 아니다. 그는 오직 당신의 전지 전능하신 신성에 따라 주권적으로 행동하시는 완전자(完全者)이시다.
19:25 모세가 … 알리니라. 모세는 하나님의 견책에 자신의 신분과 모습을 즉각 깨닫고는 순종하여 백성의 진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실을 다시 한번 백성들에게 단단히 알렸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인간적인 부족함을 갖고 있지만, 실수를 깨닫고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모세의 지도자적 자질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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