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심하고. [히, 카베드] ‘맹렬한’(출 9:24), ‘무거운’(시 38:4)이란 뜻으로써 도무지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의미한다.
43:2 다시 가서. 야곱은 아들들의 애굽행에 필요한 준비, 곧 베냐민을 동행시켜야 한다는 사실(42:20, 34)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들의 애굽행을 명령한 것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상황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애굽행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존, 번창시키기 위해 곡창 애굽 땅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몰았던 것이다.
양식을 조금 사오라. ‘조금’은 적은 양 곧 70여 명의 야곱 가족이 섭취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분량이라는 말인 동시에 상당 분량을 가리키는 동양식 의례적 표현으로 ‘양식을 좀 사 오너라’의 뜻(18:4-5, 43:11)이기도 하다.
43:3 유다가 아버지에게 말하여 이르되. 앞서 르우벤의 간청(42:37)이 거절당했으므로 이제는 유다가 야곱에게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으나 맏아들인 르우벤의 간청이 거절당하고, 둘째 아들인 시므온은 애굽에 억류되었으며, 셋째 아들인 레위는 세겜인 살륙 사건을 주도하여(34:25) 야곱에게 신용을 잃었으므로 유다가 나선 것 같다. 전에 유다는 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에 그들의 잔인한 행동을 막는(37:35-28) 일을 했으므로 양심적인 거리낌 없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유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구속사 전면에 주도적 인물로 부각되다가 출애굽과 왕정시대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주도적 역할이 절정을 이룬다.
43:6 이스라엘. 전장과는 달리(42:36, 38) 본 장에서는 야곱이란 옛이름 대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적 내용이 담긴 이스라엘이란 새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6, 8, 11절), 그 이유는 본 장에서부터 전개되는 베냐민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되었다기 보다는 선택받은 민족 전체의 애굽 이주(移住) 문제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 책 기자 모세는 애굽 이주가 인간(야곱)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스라엘)의 거룩한 섭리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르되. [히, 아말] 원뜻은 ‘한탄하다’(Living Bible, moaned)이다. 야곱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아들들에게 항변조로 말을 시작하였다.
괴롭게. 야곱은 기근으로 인한 전가족의 위기보다는 베냐민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짜증스럽게 말을 하고 있다.
43:7 그들이 이르되. 지금까지는 르우벤과 유다만이 야곱에게 이야기했으나 이제는 모든 아들들이 그들의 요구가 정당함을 이야기한다.
너희 아버지가 … 아우가 있느냐. 이러한 요셉의 질문은 그가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에 대한 관심에서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묻는 말에 따라. 이 말은 ‘조목조목 자세히’란 뜻이다. 즉 요셉이 그들에게 자세하고 치밀하게 질문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음을 타당성있게 변명하고 있다.
43:8 유다가 …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유다는 베냐민을 ‘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아이’(나아르)란 ‘고함치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써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사람을 통칭한다. 여기서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일컫는다. 당시 베냐민은 이십 세가 넘었지만 40세가 넘은 유다 자신에게는 역시 보호의 대상이 된 것이다.
43:9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그는 베냐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담보로 내놓으면서까지 어떤 피해도 베냐민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평생을 아버지 앞에 죄인으로 살면서 아버지가 부여하는 어떠한 형벌도 달게 받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야곱 가문에서 추방당한다든가 합당한 상속권의 박탈, 마지막 유언시의 저주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발언은 결국 모든 일이 선하게 끝났을 때 야곱의 큰 축복으로 보상받는다(49:8-12).
43:10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당시 야곱 가족의 거주지가 정확하진 않으나, 남부 가나안 지방에서 애굽 교역지와의 거리는 대부분 열흘 길 정도였다. 따라서 하루 속히 애굽행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짐직할 수 있다.
43:11 그러할진대. 문자적으로 ‘만약 지금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면’이다. KJV는 이러한 원어의 뜻을 살린 반면에(If it must be so now), Living Bible은 ‘만약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If it can’t be avoided)으로 의역하였다. 여하튼 야곱이 고심한 후에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이와같은 결정을 하였다.
이렇게 하라. 야곱은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책을 세운다. 야곱은 그의 연륜과 경험을 살려 지혜로운 지시를 하였다.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 예물로 드릴지니.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힘쓰는 야곱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일찍이 에서를 만나러 갈 때에도 이렇게 예물을 보냈었다(33:8). 야곱이 보낸 선물들은 애굽에서 생산되지 않는 가나안 토산물들이다. 혹자(Bohlen)는 야곱의 예물 준비는 기근이라는 상황에서 전혀 격에 맞지 않는 것으로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야곱이 준비한 예물은 기근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일 뿐 아니라 가뭄때 더 맛을 내는 과일 종류들이란 점에서 위의 주장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
유향. 유향목의 진액을 짜내 말린 고급 향료이다.
꿀. 벌꿀이 아니라 신선한 포도즙을 졸인 진한 시럽(syrub)이다. 오늘날도 헤브론의 주산물이라 한다.
향품. 고무(Lange. RSV) 또는 향료(KJV)로 보고 있다. 아마 흰 수지질(樹脂質)의 약제인 것 같다.
몰약. 감람과의 관목 줄기에서 채취한 즙으로 진한 향기의 약재(방부제 등에 사용)이다.
유향나무 열매. 여기서 나는 기름은 식용, 등화용. 가구용, 살충제용 등 다양하게 사용되어 팔레스타인에서는 인기 있는 상품 중 하나이다.
감복숭아. 아몬드(Almond) 나무이다. 애굽에 흔치 않아 상품적 가치가 높다.
43:12 갑절의 돈을 가지고. 지난번에 곡식을 사기 위해 가져갔던 돈의 두 배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난번 그냥 먹은 식량값과 다시 사고자 하는 양곡의 값에 해당하는 돈을 함께 갖고 갈 것을 의미한다.
잘못. [히, 미쉬게] ‘허물되다’(욥 19:4), ‘실수하다’(사 28:7), ‘범죄하다’(민 15:22)는 ‘샤가’에서 파생한 말로 실수로 인한 뚜렷한 허물을 뜻한다. 야곱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곡물을 관리하던 애굽 관리들의 실수로 또는 자신의 아들들이 너무 급해서 경황중에 돈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번의 돈이 다시 자루 속에 담겨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3:14 전능하신 하나님. [히,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특별한 명칭으로써(출 6:3) 천지의 주재이시며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강조한 호칭이다. 야곱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난관을 능히 해결해 주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여기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밈’이다. 성경에서 이 말은 특히 불타는 심정으로 긍휼을 호소할 때(신 13:17)와 ‘죄를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출 34:6, 시 51:3, 39:8, 마 7:19). 이렇게 볼 때 여기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야곱의 심정이 재판장 앞에 선 죄인의 심정과 같았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한 신뢰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자포자기적 표현이 아니라 그후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절대적 신뢰감을 토로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그 결과를 자신의 신앙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문학적 표현이다(왕하 7:1, 에 4:16).
43:15 갑절의 돈을 … 가지고. 이것은 곡식을 두 배로 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날의 돈을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해서였다.
43:16 베냐민이 … 있음을 보고. 애굽으로 팔려오기 전 요셉이 베냐민을 마지막 본 때는 22년 전 헤브론에서 유아 때(1살 정도)였다. 따라서 한 눈에 베냐민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인 듯하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제외하고 처음 방문 때 안보였던 젊은 청년이 베냐민인 줄 짐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요셉은 자신의 집을 맡고 있는 청지기에게 그의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집은 성의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 어떤 학자는 당시 애굽의 상류층 인사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결코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 구절의 역사성을 의심한다(Bohlen).그러나 황소(Apis)나 매(Horus) 등 신상으로 숭배되던 짐승들을 제외하고는 각종 조류나 짐승을 식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Wikinson).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황소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Kalisch).
정오에 … 먹을 것이니라. 정오는 애굽인들의 일반적인 식사 시간이었다.
43:18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요셉의 형제들은 총리대신 집으로 인도될 때 형벌을 받게 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 일개 양식 구입차 방문한 외방 사람들을 애굽의 총리 집에 모셔들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1차 방문시 자신들을 첩자로 알아 투옥시키려 했던 사건(42:12-16)과 물건 구입비가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던 일(42:27, 28)을 생각하고 불안해 하였던 것이다(욥 30:14, 시 22:8, 잠 16:8).
우리를 억류하고 …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신변과 소유물에 큰 위험이 닥쳐온 것이라 확신했다. 그들이 이처럼 두려워한 데는 여호와 신앙에 대한 결여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뿌리 깊은 죄의식이 그들을 짓누른 까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은 곧 바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충분한 반성의 기회를 준 다음 구원의 기쁨을 주려고 했다. 이처럼 하나님도 죄인들이 깊이 뉘우치고 회개할 때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주신다.
43:21 돈이 전액 그대로 … 있기로.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자루에서 발견된 돈에 대하여 요셉의 청지기에게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여관에서는 정작 한 사람의 자루만 풀어 보았으나(42:27)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여관에서 짐을 풀어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전번에 왔을 때 정탐꾼이란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결백을 과장해서 이야기한 것 같다(42:16).
43:23 너희 하나님 … 주신 것이니라. 요셉의 청지기도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요셉이 자신의 집을 여호와 신앙으로 철저히 훈련했다는 암시가 된다(Murphy). 또한 청지기의 말은 이 사건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요셉의 명령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지만(42:25) 이것은 그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도우려는 친절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요셉의 집에 혼자 남아 있던 그(42:24)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요셉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요셉이 형제들로 하여금 시므온을 만나게 한 것은 먼저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시므온이 매우 평안한 생활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43:24 발을 씻게 하며. 당시 손님을 접대하던 일반적인 관례였다(18:4, 24:32). 이일로 인하여 형제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지만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죄인의 마음에는 참된 평안이 있을 수 없다.
43:25 예물을 정돈하고. ‘정돈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쿤’은 ‘확실하게 하다’, ‘예비하다’는 뜻으로 성의를 다하여 준비한 예물을 더욱 돋보이게 가지런히 놓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행위는 청지기의 정중한 예우, 시므온의 무사한 출옥(23절), 오찬 예고 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든 요셉의 호의를 사려고 애쓰고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
43:26 땅에 엎드려 절하니. 요셉이 17세 때에 꾼 꿈이 성취되는 순간이다(37:2, 5-9). 요셉의 꿈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그 꿈을 무산시키려고 획책했던 형들의 간계(37:18-20)가 이처럼 그 꿈을 성취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1) 인간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사 55:8, 9). (2)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약속은 비록 더디 성취되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합 2:3).
43:27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전히 숨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관심만은 숨기지 못하는 장면이다. 즉 요셉은 연로한 아버지, 또한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 야곱이 기근의 어려움 중에 무슨 변고가 없는지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그의 효성은 이미 어릴 적부터 지극했었다(37:13).
43:28 주의 종 우리 아버지. 요셉의 두 번째 꿈(37:9)이 성취되는 순간이다. 즉 야곱이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경배하지는 아니하였지만 형제들이 야곱을 가리켜 요셉의 ‘종’이라고 칭한 것은 간접적으로 경배한 것과 다름없는 의미를 지닌다. 이외에도 야곱은 그의 노후를 요셉에게 의지하였으니 실제적으로 꿈의 내용을 성취시켜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47:11-12).
43:29 소자. [히, 벤] 문자적인 뜻은 ‘아들’ 또는 ‘조카’이나 예외적으로 손아래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시 34:11). 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이자 친동생인 베냐민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30절)에 겨워 자연스레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43:30 마음이 복받쳐. 이 말의 히브리어 ‘마하르’는 ‘액체가 되다’는 뜻으로 너무도 마음이 군급(窘急)하여 심장이 녹아 내릴 정도를 가리킨다. 이는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애정과 흥분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또 다른 성품을 잘 보여준다. 즉 지도자로서의 요셉은 냉철한 판단력과 통솔력을 지닌 이지적인 자였지만(47:23-26) 형제에 대해서는 역시 진솔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급히 … 들어가서 울고. 요셉은 베냐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복받쳐 올랐기 때문에 급히 자리를 피하여 울었다. 이것은 요셉이 감정을 견디지 못하여 운 두 번째 사건이다. 처음은 그의 형제들이 자신에 대한 잔인성을 이야기할 때였다(42:24). 이 사건은 또한 요셉의 지도자적 면모와 풍부한 인간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즉 요셉은 풍부한 정서를 갖고 있었으나 그것에 지배되지 않고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굳은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43:32 따로 차리고. 이처럼 요셉의 시종들이 세 개의 상을 각기 따로 차린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1) 형제들과는 구별되는 애굽 총리 요셉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2) 애굽 종교를 숭상하지 않는 이방인, 특히 히브리인과는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는 애굽의 규례 때문이었다(Aalders).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물신(物神) 숭배 사상에 젖어 소를 신성시 여기던 애굽인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이 소를 제물이나 식용으로 삼은 데(신 12:20-28)서 비롯된 풍습인 듯하다. 아무튼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사육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한 도구나 식기조차 사용치 않았다(Herodotus).
43:33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형제들은 이러한 배열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자신들의 가정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암암리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 한 요셉의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은 아직까지도 미처 동생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점을 잘 치는 자(44:15) 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 정도로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43:34 다섯 배나 주매. 특별한 손님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고대 근동의 상징적인 풍습일뿐 실제로 정량보다 더 많은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삼상 9:22-24). 특히 애굽인들의 숫자 개념에서 ‘5’는 ‘완전함’, ‘충만함’을 뜻한다(45:22, 사 19:18). 한편 요셉은 이 일을 통하여 형들이 아직도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특정인에 대하여 시기하는 버릇이 남아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Pulpit).
함께 즐거워 하였더라. 가정에서의 편애(42:38)는 물론 가장 어린 자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은 전날 요셉에게 보였던 시기심(37:4) 같은 것을 전혀 보이지 않고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의 일(37:31-35) 이후 그들이 많이 회개했고(42:21, 22) 또한 그들의 인격이 성숙하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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