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뱀. [נָחָשׁ 나하쉬] 본래 이 단어는 파충류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낱말이나 성경에서는 모두 ‘뱀’으로 번역된다(사 27:1, 렘 8:17, 미 7:17). 한편 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사나움을 강조하는 ‘사라프’(민 21:8, 사 30:6)와 ‘용’(욥 7:12, 시 74:13, 사 27:1, 렘 51:34)으로도 번역되며 특히 큰 뱀을 가리키는 ‘탄닌’(출 7:9, 신 32:33) 등이 있으나, 여기서 사용된 ‘나하쉬’는 사람을 꾀며 미혹하는 능력을 지닌 뱀의 교활함을 특히 강조하는 명칭이다.
본 장은 “뱀”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뱀이 맨 앞에 나오므로 그 문장 전체에서 가장 강조되었다. 게다가, 이 문장에는 정관사가 포함되어 “그 뱀”이라고 쓰여 있는데 “그”라는 단어가 함께 쓰여 있다는 것은 이 뱀이 이미 잘 알려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독자들이 이 존재가 누구임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존재의 실체가 3장의 첫 단어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성경은 뱀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언급하면서(사 27:1) 분명하게 그를 ‘마귀 그리고 사탄’(계 12:9)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 지방에서 뱀은 악의 세력을 상징했다.
“사탄은 눈치채이지 않게 그의 계략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기의 기만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잘 맞는 변장물 즉 뱀을 매개로 사용하기로 선택하였다. 당시 뱀은 지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동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날개가 있었는데, 공중으로 날 때에는 금빛 광택이 나는 눈부신 모습을 나타냈다”(엘렌 화잇, 부조와 선지자, 53).
마귀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건 간에, 마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성경은 그저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목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든, 성경은 마귀를 악이나 인류의 어두운 면을 묘사하는 단순한 상징이나 개념 정도로 표현하지 않는다. 마귀는 구체적으로 실제 존재한다.
또한 뱀은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말하며 심지어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뱀의 첫 등장에서부터 그가 하나님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약의 기록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한다(마 4:6).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가 나타나서 유혹할 것을 아담과 하와는 미리 경고 받아 알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창 2:15의 ‘지키게 하시고’의 주석을 참고하라.
간교하니라. [עָרוּם 아룸] 좋은 의미에서는 ‘영리하고 신중한 것’(잠 12:16, 22:3)을, 나쁜 의미에서는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욥 5:12, 15:5)을 뜻한다. 뱀은 본래 영특하게 창조되었으나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자 그 지혜는 사악한 것으로 전락하였다.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사탄이 하와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연약하고 또한 쉽게 미혹당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벧전 3:7). 또한, 뱀이 여자에게 자기 주장을 대뜸 펼치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 보라.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자신도 믿는 척 하면서 질문을 한다. “하나님이 참으로…하시더냐?” 우리는 첫 시작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교활하고 기만적인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이런 작전은 먹혀 들었다.
하나님. [אֱלֹהִים 엘로힘] 뱀이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명칭인 ‘여호와 하나님’(2:4)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지고자’(至高者)를 뜻하는 ‘엘로힘’(1:1)을 사용한 것은 아담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다.
참으로. ‘진실로’(truly), ‘정녕’(indeed)이란 뜻으로 어떤 사실에 대한 강한 놀라움을 나타내는 의문사이다.
먹지 말라 하시더냐. 원문의 정확한 번역은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이다. 사탄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몰랐을리 만무한데도 이처럼 물은 것은 (1)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2) 그분에 대한 철저한 불신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1) 하나님께선 사람이 아니시므로 식언하거나 변개(變改)치 않으신다는 점(삼상 15:29)과 (2)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의무이자 복된 길임(신 6:4-9, 28:1-6)을 기억해야 한다.
3:2 말하되. [אָמַר 아마르] ‘대답하다’, ‘이야기하다’, ‘명령하다’, ‘선언하다’ 등과 같이 의사 소통의 수단을 포괄하는 다양한 뜻을 지닌다. 한편 뱀과 여자가 서로 의사(意思)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범죄하기 이전 인류는 오늘날과 같은 언어 이상의 언어로 동물과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 (2) 언어는 인간 고유의 기능이므로 당시 뱀이 여자와 의사 소통한 것은 사탄이 뱀의 입을 빌어 여자와 이야기한 것이다. 이 중 전자는 언어 분열 현상(11:1-9)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였다는 점에 부합되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존재로 지으셨다는 점에 부합된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입각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하다.
먹을 수 있으나. [נֹאכֵל 노켈] ‘אָכַל 아칼’(먹다, 소비하다, 삼키다)의 미완료형으로 현재 뿐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허용적 의미이다. 만일 아담이 범죄치 아니하였더면 오늘날의 인류도 각종 과실과 함께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22절).
3:3 만지지도 말라. 하나님의 금지 명령과는 차이가 있는(2:17) 과장된 표현이다. 이는 (1) 하나님의 명령이 하와에게 있어선 너무 엄격한 것으로 비쳤다는 점과 (2)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와 사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드러내 준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직역하면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앞 구절과는 달리 하나님의 절대 명령(2:7)을 약화시킨 표현이다. 이처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녀가 악의 유혹에 넘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마 14:27-32).
3:4 결코. 2:17의 ‘정녕’(surely)과 동일한 말로 불변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 명령을 절대적인 거짓으로 맞바꾸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사탄의 거짓된 속성을 살펴볼 수 있다(요 8:44).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בְּיֹום אֲכָלְכֶם 베욤 아칼르켐] 여기선 ‘יוֹם 욤’(날)이 ‘순간’, ‘때’란 의미로 사용되어 ‘너희가 그것을 먹자 마자’, ‘너희가 그것을 먹는 순간에’란 뜻이다. 이것은 하와의 욕망을 충동질하는 강한 유혹의 말이다.
너희 눈이 밝아. 문자적 의미는 ‘너희 눈이 열려’(your eyes shall be opened). 구약에서 이러한 표현은 대개 이상(異常)을 보거나 진리를 아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21:19, 민 22:31, 사 35:5). 그런데 여기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획득하게 됨을 뜻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지고한 신성’(Supreme Deity)을 획득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거짓말에 불과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오히려 그들의 순전했던 영안(靈眼)이 어두워졌을 뿐이다(7절).
사탄의 공격은 두 가지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죽음과 선악에 관한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분명히 죽게 될 것이라고 확실히 강조하여 말씀하셨지만(2:17), 사탄은 그와 반대로 그들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4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셨지만(창 2:17), 사탄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그 열매를 먹으라고 부추겼다(창 3:5).
그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그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두 주장이 하와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금지된 열매를 먹기로 결심한 순간, 하와는 마치 하나님이 더 이상 존재하시지 않으시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인 양 행동했다. 하와에게 일어난 이러한 변화를 성경은 하와가 하나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하와에게 금지된 열매는 “본즉…좋았”다(NKJV, 창 3:6).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창 1:4).
이와 같은 두 가지 유혹(죽지 않는 것과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종교가 가지고 있던 불멸이라는 개념의 뿌리이다. 그들은 불멸을 신의 속성이라고 이해하고,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 신의 위치에 오르기를 원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유대-그리스도교 문화에 서서히 스며 들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심이니라. [יֹדֵעַ 요데아] ‘יָדַע 야다’(알다, 이해하다, 탐지하다)의 완료 분사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알고 계셨다는 의미이다.
3:6 먹음직도 하고 …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선악과가 원래 이러했다기 보다는 하와가 경계심을 늦추고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보암직도 하고. ‘눈이 추구하는’이란 의미로 육체의 안목과 정욕(벧전 2:11)에 사로 잡혀 허상을 보고, 느낀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죄악에 빠지는 것을 엄히 경계하셨다(마 5:28, 29).
그도 먹은지라.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직접 들은 자로서(2:16, 17) 여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토록 이끌 책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받아 먹은 것은 (1) 그의 자의로 여자의 범죄에 동참하였다는 곳과 (2) 죄는 놀라운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증언해 준다(롬 7:11).
3:7 밝아져. [פָּקחַ 파카흐] 문자적 뜻은 ‘개안(開眼)되다’. 그러나 이것은 시력이 항상 더 잘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혹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벗은 줄을 알고. 타락 전과는 달리 수치심을 느낀 까닭은 창조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던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마를 사용해 몸을 가리울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수치는 가리울 수 없었다.
3:8 바람이 불 때. 개역한글판에는 "서늘할 때에"로 번역되어 있지만 직역하면 ‘바람이 부는 때에’이다. 이때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가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들의 행위를 뒤돌아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 곁을 떠난 범죄 하였지만 하나님께선 그들을 포기할 수 없으셨기에 적절한 시점에 그들을 찾아오셨다.
소리. [קוֹל 콜] 사람의 ‘목소리’나 일반적인 ‘소리’를 모두 뜻하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찾아오실 때 난 기척인 듯하다.
낯. [פָּנִים 파님] 문자적 뜻은 ‘얼굴’, ‘앞’이나 여기선 대유법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전존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뜻한다. 한편 시 105:4에선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는 것을 ‘그의 얼굴을 구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숨은지라. ‘스스로를 숨기다’란 뜻이다. 그들은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10절) 때문에 스스로를 숨겼다.
3:9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물으신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는 훗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던지실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창 4:9).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유익을 위해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을 통해 그들의 잘못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는 동시에 그들을 회개와 구원의 자리로 이끌고자 하셨다. 인간이 죄를 지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과 구속을 위해 일하고 계셨다.
이 모든 시나리오는 재판관이 최종 판결 전에 피고를 준비시키기 위해(창 3:14~19) 범인을 심문하는(창 3:9) 조사심판의 개념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구원으로 인도하는(창 3:15)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이 과정을 거치신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주제이다.
이 구절에는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파악키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토로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처럼 잃어버린 양을 애타게 찾으신다(눅 15:3-7).
3:10 듣고. [שָׁמַעְתִּי 샤마에티] ‘שָׁמַע 샤마’(주의깊게 듣다, 이해하다)의 완료형으로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그 즉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다.
벗었으므로. ‘완전 나체’란 뜻. 그러나 이는 (1)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된 근본 원인(8절)이 아니며 (2) 또한 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치부를 가리우고 있었으므로(7절) 잘못된 답변이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선용치 못하고 도리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는데, 그 결과는 가중되는 죄악(12절)과 그에 마땅한 준엄한 형벌일 수밖에 없었다(17-19절, 약 1:15). 용서받는 첫 걸음은 지은 죄를 자복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신다(시 34:18, 51:17).
3:11 누가. [מִי 미] ‘무엇이’ 또는 ‘어떤 자가’란 뜻.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된 원인이 아담 스스로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반어문이다.
알렸느냐. 원뜻은 ‘반대편에 서다.’ 여기서부터 ‘기밀을 누설하다’, ‘죄악을 고발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수 2:20, 에 6:2, 렘 20:10). 본 절 전체에서 이 말의 의미는 ‘누가 너의 벗은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더냐’이다.
네가 먹었느냐. 아담의 잘못이 어떠한 것인지를 지적함과 동시에 아담이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를 애타게 원하시는 거듭된 반문이다.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당신이 내 곁에 두신 여자’란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의 질문에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여자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와는 자신을 속인 뱀의 잘못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담은 자기에게 열매를 건네준 여자에게 책임을 떠 넘겼고(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와는 자기를 속인 뱀에게 책임을 떠 넘겼다(이 또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가 죄인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하와에 대한 사랑에서 고의로 하나님의 승인과 낙원에 있는 자기의 집과 영원한 기쁨의 생활을 포기하기로 선택했었던 그는 범죄한 지금에는 그의 아내와 심지어 창조주 자신에게까지 범죄의 책임을 씌우려고 하였다. … ‘왜 당신께서 뱀을 창조하셨습니까?’ ‘왜 뱀이 에덴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셨습니까?’ 이것들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한 변명 가운데 암시된 질문이었다. 이처럼 그 여자도 아담과 같이 그들의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렸다”(엘렌 화잇, 부조와 선지자, 58).
3:13 어찌하여. [מָה 마] ‘어떻게’(how) 또는 ‘왜’(why)라는 뜻이 아닌 ‘무엇 때문에’(what)라는 물음이다. 하와의 죄악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악한 교만과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지적해 준다(5, 6절).
꾀므로. ‘잘못 인도하다’라는 뜻의 말이다. 히브리어 동사 나샤(נָשָׁא)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희망을 줌으로 그들이 하는 행동이 옳은 일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왕하 19:10, 사 37:10, 렘 49:16). 또한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막고서 그릇된 길로 이끌다는 뜻이다. 하와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도 잘못을 시인치 않고 책임 전가에만 급급하였다.
3:14 하나님께서는 뱀에게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신다. 뱀으로부터 이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뱀은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유일한 존재이다.
모든 짐승보다. ‘모든 짐승 가운데서’, ‘모든 짐승들로부터’란 뜻이다. 즉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뱀은 이후 짐승들로부터 조차 경멸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배로 다니고. 천박하고 미천한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음을 나타내 주는 구체적 사례 중의 하나이다. 후일 모세 율법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는데(레 11:41-44), 이제 뱀은 그러한 부정하고 추악한 것의 대명사로 손뽑히게 되었다. 이처럼 뱀이 배로 기어다니게 된 것은 분명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저주받기 이전의 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동했을 것이다(Luther. Josephus, Lange).
엘렌 지 화잇은 “당시 뱀은 지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동물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날개가 있었는데, 공중으로 날 때에는 금빛 광택이 나는 눈부신 모습을 나타냈다.”(부조와 선지자, 53)고 언급하였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아담과 하와를 꾄 죄로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게 된 뱀은 (1) 땅(사탄)에 속한 모든 멸망의 후손들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2) 그 머리가 낮은 땅에 있음으로 해서 비록 그리스도의 발꿈치는 상하게 할지언정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머리가 결정적으로 쉽게 상할 필연적인 처지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15절, 마 4:1-11).
살아 있는 동안. 직역하면 ‘너의 생명의 모든 날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시간, 즉 날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히브리인들의 사상이 투영되어 있는 관용적 표현이다.
흙을 먹을지니라. 뱀이 배로 기어다닐 때 그 입으로 흙이 들어간다는 것을 근거로 이 말의 문자적인 뜻을 주장하기도 하나, 실제 뱀은 흙을 음식으로 먹지 않기 때문에 문자적 뜻보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 징계받은 피조물이 종신토록 멸시와 굴욕 가운데 처하는 것을 종종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시 72:9, 사 49:23, 애 3:29, 미 7:17). 한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와는 달리 이처럼 뱀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전혀 허용치 않고 곧바로 저주를 선포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인간은 뱀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존재로서(1:27)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입은 존재이다. (2) 사탄과 그의 하수인은 하나님께서 달리 구제할 방도가 없을 만큼 이미 완전 타락한 자들이다.
3:15 너로. 본 절의 ‘너’는 ‘뱀’을 가리키며, 예언적으로 ‘사탄’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에는 그를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라고 하였다.
여자. ‘여자’는 일차적으로 하와를 가리키지만, 상징적으로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는 성경에서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아 6:10)로, 해를 옷 입고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쓰고 있는 여자(계 12:1)로 묘사된다.
원수. [אֵיבָה 에바] ‘적대감’, ‘증오감’이란 뜻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 갖게 될 악한 감정을 의미한다(요 15:18, 19).
네 후손. 뱀의 후손 즉 사탄을 추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여자의 후손. 일차적으로 교회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예언의 최종적인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머리’(רֹאשׁ 로쉬)는 신체상의 ‘머리’ 뿐 아니라(48:14, 신 21:12) 지위나 장소에 있어 ‘최고 높은 것’(대하 13:12, 애 1:5)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머리’는 이어서 나오는 ‘발꿈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지적이고 영적이며 고유의 생명을 가진 전인(全人)으로서의 ‘영혼’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상하게 하다”(שׁוּף 슈프)라는 말은 ‘분쇄하다’의 뜻이 있다. 따라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전 존재를 회복 불가능하게 멸망시킨다는 뜻이다.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발꿈치’(עָקֵב 아케브)는 ‘끝부분’으로 신체 기능면에서든지, 지위면에서든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과는 다르게 회복 가능한 상처이다. 이것은 또한 ‘머리’와는 대조되는 개념으로 ‘육신’을 가리킨다. 이것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상처에서 회복되었다. 무덤에서 일어나신 것이다. 사탄은 십자가 형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었다. 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한다.
구속의 경륜[계획]과 메시아 예언. 그리스도교 해석사의 수세기 동안, 창 3:15은 문자적인 해석에서 상징적인 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인간과 뱀의 투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다른 이들은 왜 인간이 뱀을 두려워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뱀이 기어다니며 흙을 먹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가톨릭교회의 해석자들은 이 본문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처녀 탄생의 개념을 읽어내, 그녀가 다른 인간 존재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마르틴 루터는 처음으로 창 3:15을 ‘프로테방겔리움’(Protevangelium) 곧 “최초의 복음”이라고 불렀다(Ojewole, Afolarim Olutunde, ”The Seed in Genesis 3:15, An Exegetical and Intertextual Study” (Ph.D. dissertation, Andrews University, 2002)).
메시아의 씨[후손]. 히브리어 용어 ‘톨레도트’(계보, 사적, 후예)와 더불어 ‘제라’(씨, 후손)는 창세기의 구조적인 틀을 이룬다. 창세기는 3:15에 약속된 메시아의 후손[씨]을 생산하기 위해 선택된 가계의 족보 추적을 기록하고 있다. 메시아의 계보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셋을 거처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에 이른다. 유다는 다윗 왕의 조상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선조가 되었다(창 49:8-12, 눅 3:23-34).
집단적 복수에서 개인적 단수로. 집단적 복수로써의 씨(제라)에서 대표적 단수로써의 씨로 좁혀져 가는 것은 메시아 본문의 지표(指標)이다. 창 22:17-18, 24:60, 민 23-24장, 삼하 7:12-15 등은 집단적 복수에서 개인적 단수로의 유사한 이동을 나타내 보여 준다. 이것은 메시아 본문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이다. 따라서 신약은 집단적 씨(롬 16:20, 갈 3:29, 계 12:17)를 언급하고, 그것이 결국 예수의 인격 안에서 특정한 단수 개인으로서의 ‘씨’로 좁혀지며(갈 3:16, 19), 그가 마침내는 구체적으로 사탄 곧 마귀로 밝혀진 뱀을 이긴다(계 12:9).
창 3:15에서 이러한 좁혀짐은 서로 원수 관계에 있는 뱀(단수)과 여자(단수) 양편에 다 나타난다(창 3:15b). 적대감이 증가하여 뱀의 모든 씨[집단적]와 여자의 씨[집단적]로 번져간다(15c). 그런 후 드라마는 좁혀져서 뱀(단수)과 여자의 대표적 씨(단수)의 투쟁에서 절정을 이룬다(15d, 15e). 그러므로 창 3:15의 ‘제라’(씨)는 단수만도 아니고 복수만도 아니다. 창 3:15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고 그 단계가 나눠질 수 있다.
15a “그리고 내(하나님)가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다(하나님의 개입)”
15b “너(뱀, 사탄, 단수)와 여자(하와, 단수) 사이에”
15c 그리고 “너의 씨(집단적 복수, 사탄의 모든 추종자들)와 여자의 씨(집단적 복수, 그리스도의 모든 추종자들) 사이에”
15d “그(대표 단수로써의 여자의 씨, 그리스도)가 네(단수, 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15e “그리고 너(단수, 사탄)는 그(단수, 그리스도)의 발꿈침을 상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 구절(15e)의 첫 날말인 접속사 ‘그리고’는 뱀(주어)의 집단적 씨로부터 단수인 뱀(주어)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뱀과 여자 간의 원수 관계는 수세대를 통하여 그의 씨(후손)들을 통하여 계속된다. 그러므로 창 3:15은 예언적이며 종말론적이다. 이 원수 관계는 사탄과 그리스도의 간의 운명적인 격돌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거기서 사탄과 그의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한다. 여자의 특별한 씨인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사탄의 치명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그는 종과 같은 구속주요, 은혜로운 구주요, 대제사장이시다. 이는 대속적인 견지에서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맨발로 밟으신 것과 같다. 이것이 구속의 경륜[계획]이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루시퍼의 반역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멸망시킬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다함 없는 사랑의 표현으로써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계획을 세우셨다. 이와 같은 “구원의 계획”은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고(엡 1:3, 4, 딤후 1:9, 딛 1:2, 계 13:8), 타락 직 후 에덴에서 인류에게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이 계획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 제도(출 25장)를 통해 더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마침내 그 완전한 모습이 주어졌다(참조, 롬 5장).
구원의 계획의 중심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제공하신 위대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 전이나 후에나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결코 행함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우리가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 안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포함하여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며, 오직 그분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3:16 뱀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저주로 밝혀진 것과 달리(14절),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지 않았다. “저주”라는 단어가 유일하게 다시 언급되는 곳은 그 단어가 “땅”에게 적용될 때이다(17절).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뱀과는 달리 남자와 여자에게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뱀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소망이 주어졌다.
여자의 죄가 뱀과 가까이 한 결과였기 때문에 여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뱀에게 내려진 심판과 연관이 있다. 본 절은 15절의 말씀 바로 뒤에 이어질 뿐 아니라, 두 예언 사이에 나타나는 연관성은 여자와 관련된 본 절의 예언을 15절의 메시아 예언과 연결해 이해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출산을 포함한 여자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이라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비교, 딤전 2:14, 15).
고통. [עִצָּבוֹן 이차본] ‘עָצַב 아차브’(새기다, 각성시키다)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즉 (1) 그 같은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치욕스럽고도 중대한 것이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2) 인간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심적 고통 역시 여인이 겪는 해산 고통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주지 시키기 위함이다.
수고하고. ‘슬픔 가운데’, ‘고통 중에’란 뜻. 해산 때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힘들 것임을 시사해 준다.
원하고. [תְּשׁוּקָה 테슈카] ‘שׁוּק 슈크’(~을 따르다, 원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의뢰하다, 기대다’란 뜻. 그러나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남편의 권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엡 5:22, 23).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그가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하도록 계획하지 않으시고, 모든 면에서 그와 동등하게 되도록 계획하셨다.…그러나 하와의 범죄 이후, 그녀가 첫 번째 범죄자이므로, 주님께서는 아담이 그녀를 다스려야 한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으며, 그것은 저주의 일부였다. 많은 경우에 그 저주는 여성의 운명을 매우 괴로운 것이 되게 했고, 그녀의 생애를 짐이 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남성에게 부여하신 우월성은 남성이 여러 면에서 독재적인 힘을 행사함으로 그것을 남용하게 하였다. 무한하신 지혜자께서는 인류에게 또 다른 시련의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에게 두 번째의 은혜의 기간을 허락하는 구속의 경륜을 고안하셨다”(엘렌 화잇, 교회증언 3권, 484).
3:17 남자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대신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이었기 때문에, 남자가 창조될 때 사용된 땅이 저주를 받았다. 그 결과, 남자는 땀 흘려 일해야 할 것이었으며(17~19절), 결국 그가 왔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19절). 이와 같은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던 일이었으며, 이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본래의 계획이 아니었다.
네 아내의 말을 듣고. 하와를 주관하여 선한 길로 이끌어야 할 아담이 오히려 아내의 권유를 따른 것(6절)을 책망한다.
수고하여야. ‘땀흘려 가며 일하는 노동’이나 그에 수반되는 ‘고생스러움’을 의미한다. 물론 타락 전에도 아담은 노동을 했었다(1:28). 그러나 그것은 자기 성취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복된 성격의 것이었지 결코 생계 유지의 수고스러운 방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만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 자체가 신성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며 (2)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1:28)은 이미 인간 타락 전에 주어진 것으로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18 밭의 채소. ‘밭’(שָׂדֶה 사데)은 창 2:5의 ‘밭’과 ‘들’과 히브리어로 같은 말로써 ‘밭, 들, 토지’ 등을 뜻하며, 드넓은 벌판이라기 보다는 경작하기 적당한 땅을 의미한다. ‘채소’는 히브리어로 ‘에세브’인데 ‘식물(植物)’을 뜻한다. ‘밭의 채소’는 히브리어로 ‘에세브 핫사데’인데, 본 절과 창 2:5에만 나온다. ‘채소’(עֶשֶׂב 에세브)라는 말은 범죄 전인 창 1:12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창 3:18-19을 보면 ‘밭의 채소’는 범죄 전의 ‘채소’와 다른 것이다. 창 3:19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겠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먹을 것’은 ‘빵’(לֶחֶם 레헴: bread)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곡류 곧 밀과 보리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 절의 ‘밭의 채소’는 범죄 후에 밭에서 땀을 흘리며 경작해야 먹을 수 있는 곡류였고, 범죄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3:19 얼굴. [אַף 아프] ‘פָּנִים 파님’(얼굴, 8절 주석 참조)과는 다른 말로 원뜻은 ‘코’, ‘콧구멍’(7:22, 사 2:22, 겔 8:17)이다. 코가 얼굴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안면 부위란 점에서 ‘얼굴’이란 뜻이 새로 파생되었다(삼상 25:41, 대하 7:3, 느 8:6).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여기의 ‘먹을 것’은 ‘빵’(לֶחֶם 레헴: bread)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창 3:18의 “밭의 채소’는 빵을 만들 수 있는 곡류 곧 밀과 보리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돌아갈 것이니라. [תָּשׁוּב 타슈브] ‘שׁוּב 슈브’(되돌아가다, 물러가다)의 미래 완료형으로 장차 어느 순간에는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해 있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3:20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선고를 받게 된 아담이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그녀의 해산을 통해 생명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담은 그가 받은 사형 선고 가운데서 생명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모든 부모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오직 좋은 것만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악한 것을 알게 된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부터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실 것이었다. 참된 낙원에서 살고 있던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불순종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심판 가운데서도 인류의 첫 부모를 위한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산 자. 본래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뜻한다(1:24). 그러나 여기서는 넓은 의미에서 뱀의 후손과는 구분되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의미한다(15절).
3:21 지어. [עָשָׂה 아사] ‘만들다’는 뜻 외에 ‘지정하다’는 뜻도 지닌다(24:14, 시 104:19). 따라서 이는 (1)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처럼 직접 옷을 만드신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영감을 주셔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미가 있다. (1) 이것은 인간 죄를 속하기 위한 첫 번째 희생이자 구약 속죄제사의 원형이다(레 4:13-221). (2) 이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원시적 사건이다(롬 3:25).
3:22 보라. [הֵן 헨] 기본 불변사로 대개 놀람이나 당혹감을 나타내는 말이나(출 8:26) 여기선 탄식하는 말로 쓰였다.
하나 같이 되었으니.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좁힐 수 없는 근원적 차이가 있다(사 55:8, 9). 따라서 이 말은 (1) 인간이 선악을 인식할 수 있는 영악한 도덕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며 (2) 인간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범죄 행위를 한탄하는 풍자적인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할까 하시고. [פֵּן 펜] ‘ … 하지 않도록’, ‘ … 하지 않기 위하여’란 뜻. 이 말은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영원한 육체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을 제공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는 타락 이전엔 애초부터 죽음이란 것을 알지 못했던 인간과 하나님 간의 정상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음을 선언한다.
3:23 내보내어.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단절성을 강조한다.
3:24 쫓아내시고. 강권적인 힘을 사용하여 밖으로 몰아내거나 다른 곳으로 추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황급히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 내신 것은 단순한 형벌의 의미만이 아니라 심오한 구원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비참한 상태에서 만일 인간이 동산의 생명 과실을 따먹게 된다면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 이상의 영벌(永罰)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과 하와를 급히 동산으로부터 쫓아 내신 후 새로운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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