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 하자) 말씀(* ,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2:2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벧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벧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벧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2:3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2:5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2:6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려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2: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2:8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2: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 )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 )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2: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2:11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57:15).
=====2:12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으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교만한'(* , 게에), '거만한'(* , 람), '자고한'(* ,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2:13-16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꼴개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2: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2:19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20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2:21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2:22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한다.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본서 전체에 대한 총론(요약)의 성격을 가진 1장은 유다의 배역(背逆)에 대한 하
나님의 책망과 심판 선언이 주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반면에 2-4장은 대조적으로 심
판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의 성취가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현재의 수치스
런 모습을 미래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조시킴으로 현재의 수치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
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견지하기 위하여 본장의 전반부(1-5절)에는 시온의 영
광스러운 현재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장은 (1)
표제(1절), (2)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2-5절), (3)시온의 죄악상(6-9절), (4)시온에
임할 심판-여호와의 날(10-17절), (5)우상들의 무능함(18-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영광스러운 미래를 얻게 될 시온이 하
나님의 진리의 도를 떠나 타락한 사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본장에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
속의 은혜성을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2-5절은 미가 4:1-3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이사여와 미가 중 누가 이 구절의 진정한
원저자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시기에 남
유다를 향한 예언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미가와 이사야의 메시지는 당연히 동일한 내
용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일 두 선지자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의 메시지
를 인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실 이사야서와 미가서를 함께 살펴보면 서로 독립된 예언의 내용과 함께 서로
공유하고 있는 듯한 공통된 예언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죽, 남은 자 사상, 지도
자의 죄에 대한 책망, 시온의 영광스런 미래, 바벧론에서의 귀환, 메시야 예언, 여
호와의 날등의 주제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미가와 이사야는 한 하나님이 남유
다에 보내신 두 메신저(messenger)이기에 이들의 예언은 서로 유사하거나 동일한 내
용을 함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본장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요호와의 날'(2,12절 ; 7:18 ; 10:3 ;
13:6,9 ; 22:5 ; 34:8 등)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존말론적인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로 호칭한다. 이 날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속에 이미 작정되어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 드러나는 심판과 구원의 날로서, 요엘 시대(B.C. 9세기) 이래로 거의
모든 선지서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호와의 날은 이중적 형
태(double aspect)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고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
는 사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로, 돌이켜 회개하고 믿는 자(남은자)들에게는 '
축복(구원)의 날'로 드러나는 것이다(3:10,11 ; 말 4:1,2).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미래
의 날을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아야 할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의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수치가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장을
몇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2:1-5)
유다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는 전
장(1장)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앞 부분과 대조적으로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장엄
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도래로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평화롭
고 이상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표제(1절), (2)메시야 왕국의 모습(2-4절), (3)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초대(5절) 등
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본 단락은 앞장(1장)과 직접적으로는 연관성이 없다. 이런 사실은 1절의
표제어가 2-5장까지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반면에 1:1의 표제어
는 이사야 전체의 총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중요한 사상을 몇 가지
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본 단락에서 언급하는 영광스러운 시기는 '메시야 시대', 즉 메시야의 통치의
결과로 되어질 종말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행 2:16-21 ; 히 1:2). 그런데 왕국의 영
광스러움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재림 이후로
보면 너무 거리가 먼 경향이 있으므로, 오순절 성령 강령을 기점으로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는 시기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눅 24:47 ; 행 1:8).
(2)이 시기에는 복음이 시온을 중심으로 확산될 것이다(마 28:18-20 ; 막 16:15 ;
눅 24:47 ; 행 1:8).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모든 신다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복음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사야는 열
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모여든다고 말한다(2절 ; 슥 8:3,20-23). 왜냐하면 시온으로부
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요 4:22).
(3)또한 평화가 도래하게 된다. 여호와의 진리의 도로써 열방을 통치하게 됨으로
참된'평화의 왕국'이 건설된다. 그래서 모든 민족이 칼, 창등의 전쟁용파괴의 병기들
을 가지고 낫,괭이,전전용 가위 등의 평화적 건설 기구를 만들 것이다(4절). 이 시대
이전에는 정반대로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었다(욜 3:9,10).
물론 전쟁과 고통이 없는 완전한 평화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이다.
(4)이상과 같은 평화의 시대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위이며(창 12:1-3)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온 세계가
통치될 때 가능하다.만약 하나님의 도를 무시하고 방종한다면 엄청난 심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사야는 본 단랑의 마지막에서, 여호와께서 계시
해 주신 빛 가운데 행하자고 초청하는 것이다(5절).
2.시온의 죄악된 현 상태(2:6-22)
앞에서(1-5절) 시온의 영광스런 미래상을 묘사한 선지자는 본 단락에서 분위기를
급격히 전환하여 버림받은 시온의 모습을 지적한다. 이러한 첨예한 대조를 통하여 선
지자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매래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본 단락을 내용상 세 부분으
로 나누어 핵심적인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1)시온의 죄악상(6-9절) 시온의 현 상태는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
다"(6절)는 함축적인 어휘속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
씀을 떠나 이방인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정치,경제,군사,종교적인 면에서 혼
합주의(syncretism)로 경도된 유다를 떠나신 것이다. 당시 시온은 동방 풍속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심지어 우상 앞에서 장래를 확인하는 점술이 유행하고 있었다(왕하
1:2). 이러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계시된 말씀에서 떠
나 이방의 우상 숭배와 미신적 행위 차원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방 풍습을 따
르지 말것을 경고하셨었다(출 23:31-33 ; 34:12-15).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우
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정치적,경제적,종교적 교류를 갖게 되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이
러한 우호적인 태도와 교류는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은금,보화에 대한 탐욕(신
17:17b)과 마필과 병거의 숫자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햐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신
17:16 ; 시 20:7), 우상 숭배를 통한 직접적인 배역의 죄를 범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
방인과의 교류를 통해 세속화되고, 변질된 이스라엘은 계층의 구별없이 하나님 대신
경제력, 군사력을 구하게 되었으며 그 영적 빈곤을 거짓 신들, 우상으로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들의 전적
부패를 목격하면서 용서하지 말도록 탄원하는 것이다(9절).
(2)시온에 임할 심판-여호와의 날(10-17절):유다의 심각한 죄악을 적나라하게 묘
사한 선지자는 이제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예언한다. 유다의 죄로 인해 닥쳐올
심판은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고 오직 여호와만 홀로 높임을 받게 만든다. 이런 관점
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화의 단계를 넘어 회복과 구원까지 담고 있는 것이다. 일
반적으로 B.C 8세기 이전의 심판선언은 이스라엘의 약속 위반에 대한 징계로서의 의
미가 있으나, B.C 8세기 이후 선지자들의 심판 선언은 징계를 뛰어 넘어 궁극적 심
판(신자에게 있어서는 정화->회복->구원에 이르는 의미의 심판, 불신자데게는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종말적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날'로 일컬어진
다.
(3)우상들의 무능함(18-22절)-시온의 범죄로 인하여 선포된 심판은 하나님을 대적
하는 모든 존재들을 멸절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만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
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우상과 그 숭배자들의 처단을 동반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우상들의 형상, 그 이름에 대한 기억, 그에 대
한 경배 행위가 다 없어져버리고 말 것이다(미 5:12-14 ; 슥 13: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에 우상의 무능함과 아울러 우상 숭배의 무익성을
드러낼 것이다(18절). 그때에 비로소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의 무기력성
을 절감하고, 역겨움을 느껴 우상들을 어둡고 불쾌한 세계에 사는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져버릴것이다(20절). 그러므로 선지자는 최종적으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
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금언 형식의 교훈을 첨가한다(시 118:8,9 ; 146:3 ; 렘 17:5).
하나님 백성들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권세 있는 자나 우상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의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이상과 같은 본장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범죄의 심각성과 그 최종적 결과를 알게 되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도 당시의 유다 백성처럼 세속화되어서 헛된 물질과 지식과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더욱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사야가 받은 바...말씀이라 - 문자적으로는 '이사야가 본(* , 하자) 말씀(* , 하다바르)이라'이다. 이런 표현은 매우 드물다. 보다 더 일반적인 표현은 '주의 말씀이 ...에게'이다(렘 14:1;겔 13:1;호 1:1;욜 1:1;욘 1:1;미 1:1;습 1:1 등).아모스만이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쓰고 있다(암 1:1).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 이외에도 '사건', '사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것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미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사건이며, 사건은 곧 그의 말씀인 것이다.
=====2:2
말일에 -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 , 베아하리트 하야밈)이다. 이 말은 본서에서 단 한번 나온다. 그것은 창 49:1;민 24:14;신 4:30;31:29 등에서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LXX)은 이 말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 히 1:2)로 번역하였다. 율법 학자들은 그날을 메시야의 날로, 라이트푸트(Lightfoot)는 옛 세대의 끝으로 보았으며, 오늘날 많은 주경 학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에 이르는 신약 시대로 이해한다. 여호와의 전의 산이...뛰어나리니 - '여호와의 전의 산'은 '시온'을 가리킨다(시 2:6;3:4;24:3;렘 31:23;욜 2:1;3:17 등). 고래(古來)로 산들은 그 높이와 위엄에서 사람들의 찬탄을 받아왔으며 신들이 거주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숭배되어 왔다(예컨대, 희랍의 올림푸스 산 등). 그러나 실제로 시온은 전혀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바산의 산들이 이 낮고 하찮은 하나님의 산을 내려다본다고 말하였던 것이다(시 68:16). 그러나 종말에는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날에 시온은 가장 높아질 것이요, 그 영광 앞에서 다른 모든 산들은 평지나 다름 없어질 것이다(슥 14:10).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 '모여든다'(* , 나하루)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흐른다'(stream)는 뜻이다. 그 옛날 범죄의 절정을 상징하였던 바벧탑에서 각처로 분산되었던 인류는(창 11:1-9)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다시 시온 산으로 물밀듯이 몰려들 것이다. 인류의 범죄와 구원의 역사는 '바벧탑에서 시온 산으로'(from the Babel to the Zion)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시온 산이 '하나님이 세운 구원의 높이'를 상징한다면, 바벧탑은 '인간이 세운 죄악의 높이'를 상징한다.
=====2:3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나올 것임이니라 - 백성들이 그처럼 시온에 오고자 한 것은 거기에만 율법, 즉 여호와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율법은 '참된 종교'(Alexander) 혹은 '시내 산의 토라와 대조적인 의미에서 시온의 토라라 할 수 있는 복음'(Delitzsch)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본문의 강조점은 '시온에서부터'에 놓는다. 이는 구원의 길이 시온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요 4:22).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판결하시리니 - 앞에서 율법의 수여자 혹은 인생의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는 참된 교사로 그려졌던 여호와가 본문에서는 민족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며 판단하시는 재판관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판결과 중재가 가능한 것은 열방들이 율법의 말씀으로써 삶의 지침을 삼고 그 뜻에 기꺼이 복종하려 하기 때문이다. '판단하다'(* , 솨파트)는 '다스리다', '왕노릇하다'(Calvin)나 '징벌하다'(Cocceius)는 뜻보다는 '중재하다'(Alexander)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만들 것이며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때 전쟁도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그날에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파괴적인 목적을 위해 제작하였던 칼과 창을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꾸게 될 것이다(슥 9:10). '보습들'(* , 이팀)은 당을 갈아서 흙덩이를 일으키는 도구이며, '낫들'(* , 마즈메로트)은 쓸데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전지용(剪枝用) 가위이다.
=====2:5
야곱 족속아 오라 - 문자적으로는 '야곱의 집이여, 오라'이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의 선택된 가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다(8:17;10:20;14:1;29:22 등). 앞절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는 교묘한 대조가 숨어 있다. 즉 율법에 무지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은 오히려 뒤로만 물러간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이바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고상한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선교적 동기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롬 11:14).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Delitzsch) 혹은 '여호와께서 계시해주신 진리의 말씀인 성경'(Alexander)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은 타민족이 갖지 못한 이 빛을 특권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달리 빛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으며 단지 그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암흑 가운데서 방황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야만 되었다.
=====2:6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 원문대로 읽으면 '가득 채워졌다(* , 말레우), 동방으로부터(* , 미케뎀)'이다. 여기서 '동방'은 지리적으로 팔레스틴 동쪽 특히 앗수르, 아람, 바벨론 등을 가리킨다. 고대 근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이들 나라로부터 수입되어 온 이방 풍속들로 온 이스라엘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으로 더불어...언약하였음이라 - 본문은 려러 가지로 해석된다. (1) '이방인의 자녀들에게서 만족을 취하였다'(Luzzatto). (2) '이방인들과 결혼함으로 인해 연합되었다'(LXX, Targum). (3) '이방인들과 상업적 계약을 체결하였다'(Cheyne). 심지어 제롬(Jerom)은 여기서 남색(男色)과 같은 성적(性的)범죄를 발견하기도 한다. 문맥과 관련하여 이 말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측면에서 이스라엘과 이방들과의 교류가 확대되어 결과적으로 성별된 여호와의 백성과 거룩하지 못한 태생의 이방인들 간의 구별이 폐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문은 앞절과 관련하여 대조적이다. 즉 말일에 시온으로부터 여오화의 빛이 이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에 반해, 오히려 이방의 악한 풍습들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온 것이다.
=====2: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마필(馬匹)이 가득하고 - 이방과의 자유로운 교섭의 결과, 이스라엘 땅에 경제적 부(富)를 상징하는 은금과 군사적 힘을 상징하는 마필 역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일찍이 모세에 의해 강력하게 공고된 것들이었다(신 17:16, 17). 그러나 자기 의지의 수단으로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왕상 10:26-11:8), 웃시야 왕 때에는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되었다(대하 26:6-15). 여기에도 앞 구절(4절)과 비교해 볼 때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 즉, 말일에 전쟁 무기가 평화의 도구로 바뀌어지는 것과 이와는 반대로 마필로 힘을 과시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교해보라.
=====2:8
우상도 가득하므로 - '가득하다'(* , 말라)는 동사가 계속해서 문두(文頭)에 나온다. 본서에서 우상과 관련한 구절들로는 40:18-20;41:6, 7, 29;44:9-20;45:16-20; 46:1, 2, 5-7 등이 있다. 종말의 풍경과 이스라엘의 현재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가 여기까지 이어진다. 이방인들 사이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지만 정작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에는 우상만이 가득하다.
=====2: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 이러한 우상 숭배는 천한 자와 귀한 자, 즉 사회 각 계층에 편만히 퍼져 있었다. '천한 자'로 번역된 '아담'(* )과 '귀한 자'로 번역된 '이쉬'(* )는 구약에서 인간에 대한 대표적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전자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후자는 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된다(5:15).
=====2:10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 이 후렴구의 변형이 19절과 21절에 나온다.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사람들은 바위 구멍 속에 몸을 피하거나(삿 6:2;삼상 13:6) 얼굴을 땅속에 묻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에 임할 재앙이 너무도 크고 두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동방에서 계절풍을 피하거나 사막을 통과하는 지독한 열풍을 피하는 관례적인 습관에서 착안된 표현이라고 추정한다(Leupold).
=====2:11
눈이 높은 자가...굴복되고 - '눈이 높은'(* , 에네 가브후트)은 마음의 내적 교만이 나타내는 외적 몸짓을 가리키는 것이다(시 101:5, Calvin). 본문에서 '높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 ('가브후트'와 '룸')와 '낮음'을 나타내는 두 단어('솨펠'과 '솨흐')가 평행한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극명하다. 우리가 여호와를 높이면 그가 우리를 높이시려니와, 우리가 여호와를 낮추면 그도 우리를 낮추신다(57:15).
=====2:12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 - 문자적으로는 '만군의 여호와에게 있는 한 날'이다. 그날은 (1) 만군으 여호와의 날이다. 이 칭호는 그가 전우주적인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Leupold). 또한 (2) 여호와의 생각 속에 영원한 비밀로 존재하다가 지정된 때가 이르렀을 때 역사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날이다(Delitzsch). (3) 반드시 하루일 필요는 없다. 주께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시 90:4;벧후 3:8, Lange). 마지막으로 (4) 두려운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계속되는 전치사 '알'(* , agains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날은 이미 많은 선지자들로부터 예고된 최후의 날이다(13:6;욜 1:15;2:1, 11, 31;암 5:18, 20;습 1:7, 14;슥 14:1 등).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自高)한 자에게 - 심판의 날에 이르러 파멸의 운명에 처해질 대상들이 먼저 열거되었다. 이를 '사람'(everyone)의 의미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인 '모든 것'(everything)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낫다(Vitringa, Gesenius, Alexander). '높음'을 나타내는 세 개의 형용사-'교만한'(* , 게에), '거만한'(* , 람), '자고한'(* , 니사)-는 동의어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뒤에 나오는 자연들과 결부시켜 '장엄하고 인상적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리고 높이 들린 모든 것들에 대하여'로 해석하기도 하고(Leupold),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창 3:5, J. Watts).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Lange).
=====2:13-16
여호와의 심판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일시에 넘어뜨리는, 지진을 동반한 무서운 폭풍으로 형상화된다. 그 폭풍은 북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바다로 향한다(Kaiser, Leupold). 이 방향은 이스라엘의 적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방향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레바논의...백향목과 바산의...상수리나무 - 레바논은 '흰 산'이란 뜻인데, 그 산의 꼴개기가 1년 중 거의 절반이 눈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팔레스틴과 시리아 접경에 위치한다. 그곳의 자랑인 백향목은 성경에서 종종 위엄과 능력의 상징으로 취해졌으며(삿 9:15;왕상 4:33;왕하 14:9;시 92:12;104:16), 세속적인 교만의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시 29:5, 6;렘 22:6;슥 11:1, 2). 바산은 요르단 동쪽에 자리하고 길르앗 북쪽에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는 야르묵 강이 흐르는 고원 지대이다. 지금은 엔-누크라(en-Nuqra)라고 불리며 가축을 키우기 좋은 목축지가 있다. 황소와 상수리나무로 유명하다(시 22:12;겔 27:5, 6;39:18;암 4:1). 주석가들은 이것들이 유다의 높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Jerome, Vitringa, Gesenius). 이 나무들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올 때 군사용 목적으로 벌목되어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37:24).
=====2: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 약간 변형된 11절의 반복이다. '눈이 높은 사람'(* , 에네 가브후트 아담)이 '스스로 높은 사람'(* , 가브후트 하아담)으로 바뀌었을 뿐, 그 의미는 11절과 동일하다. 이런 반복은 이전의 상세한 시각적 묘사로부터 다시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진술로 환원하기 위한 것이거나 혹은 시의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 선지자의 시선은 여호와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대상인 우상으로 옮긴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본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 엘릴림)처럼, 완전한 무(naught)로 화할 것이다(슥 13:2). 랑게(Lange)는 13-16절이 7절에 관계되듯이, 본절 이하는 8절에 관계된다고 주장한다.
=====2:19
사람들이 암혈(巖穴)과 토굴로 들어가서 - 10절의 경고가 여기서 직접적인 예언으로 바뀐다. 심판의 날에 우상들은 그 숭배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따라서 우상들이 무로 화하듯이, 그 숭배자들은 여호와의 진노를 피해 암혈과 토굴에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2:20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 70인역(LXX)은 이 구절에 착안하여 그들이 동물 숭배에 빠졌다는 의미로 이해하였다(Luzzatto, Malbim). 그러나 두더지와 박쥐는 우상 숭배자들이 몸을 피할 '암혈'과 '토굴'과 연관하여 취해진 것이다. 즉, 그들은 두더지와 박쥐들이 서식하고 있던 어둡고 음습한 동굴에 금과 은의 형상들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행동은 '역겨움에서'(Leupold), 혹은 '심판자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Delitzsch) 취해질 것이다.
=====2:21
본문은 우상에 대하여 언급할 때마다 뒤따라 나오는 후렴구이다(10, 19절). 이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임할 수치와 파멸이 어느 정도로 극심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하여 후렴구로 반복되는 것 같다.
=====2:22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후기의 삽입으로 간주되었으며(Diestel, Cheyne), 어떤 곳에서는 아예 빠져 있다(LXX). 그러나 바르게 이해한다면 본절은 앞에서 논의된(5절 이하) 내용의 결론이며, 동시에 3;1 이하에서 새로 이어질 내용의 도입부로 작용한다.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 인생의 유한함이 창 2:7을 연상시키는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이 붙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기자는 그 허망함을 이렇게 노래했다:"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이와 관련된 구절들로는 욥 7:7;34:14, 15;시 78:39;90:36-6;104:29 등이 있다.
본서 전체에 대한 총론(요약)의 성격을 가진 1장은 유다의 배역(背逆)에 대한 하
나님의 책망과 심판 선언이 주도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반면에 2-4장은 대조적으로 심
판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의 성취가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현재의 수치스
런 모습을 미래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조시킴으로 현재의 수치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
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견지하기 위하여 본장의 전반부(1-5절)에는 시온의 영
광스러운 현재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배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본장은 (1)
표제(1절), (2)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2-5절), (3)시온의 죄악상(6-9절), (4)시온에
임할 심판-여호와의 날(10-17절), (5)우상들의 무능함(18-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영광스러운 미래를 얻게 될 시온이 하
나님의 진리의 도를 떠나 타락한 사실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본장에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
속의 은혜성을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2-5절은 미가 4:1-3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이사여와 미가 중 누가 이 구절의 진정한
원저자인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시기에 남
유다를 향한 예언 사역에 부르심을 받은 미가와 이사야의 메시지는 당연히 동일한 내
용을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만일 두 선지자 중에 하나가 다른 사람의 메시지
를 인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사실 이사야서와 미가서를 함께 살펴보면 서로 독립된 예언의 내용과 함께 서로
공유하고 있는 듯한 공통된 예언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죽, 남은 자 사상, 지도
자의 죄에 대한 책망, 시온의 영광스런 미래, 바벧론에서의 귀환, 메시야 예언, 여
호와의 날등의 주제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미가와 이사야는 한 하나님이 남유
다에 보내신 두 메신저(messenger)이기에 이들의 예언은 서로 유사하거나 동일한 내
용을 함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본장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요호와의 날'(2,12절 ; 7:18 ; 10:3 ;
13:6,9 ; 22:5 ; 34:8 등)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존말론적인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로 호칭한다. 이 날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속에 이미 작정되어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 드러나는 심판과 구원의 날로서, 요엘 시대(B.C. 9세기) 이래로 거의
모든 선지서의 공통된 주제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호와의 날은 이중적 형
태(double aspect)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심판 선언을 듣고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
는 사악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로, 돌이켜 회개하고 믿는 자(남은자)들에게는 '
축복(구원)의 날'로 드러나는 것이다(3:10,11 ; 말 4:1,2).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미래
의 날을 맞이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아야 할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의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수치가 대조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본장을
몇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2:1-5)
유다의 종교적,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단호히 선포하고 있는 전
장(1장)에 이어지는 본 단락은 앞 부분과 대조적으로 시온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장엄
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도래로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평화롭
고 이상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표제(1절), (2)메시야 왕국의 모습(2-4절), (3)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초대(5절) 등
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본 단락은 앞장(1장)과 직접적으로는 연관성이 없다. 이런 사실은 1절의
표제어가 2-5장까지에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반면에 1:1의 표제어
는 이사야 전체의 총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본문에 드러난 중요한 사상을 몇 가지
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본 단락에서 언급하는 영광스러운 시기는 '메시야 시대', 즉 메시야의 통치의
결과로 되어질 종말 세계의 모습을 의미한다(행 2:16-21 ; 히 1:2). 그런데 왕국의 영
광스러움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재림 이후로
보면 너무 거리가 먼 경향이 있으므로, 오순절 성령 강령을 기점으로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는 시기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눅 24:47 ; 행 1:8).
(2)이 시기에는 복음이 시온을 중심으로 확산될 것이다(마 28:18-20 ; 막 16:15 ;
눅 24:47 ; 행 1:8).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모든 신다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
함으로써 복음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사야는 열
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모여든다고 말한다(2절 ; 슥 8:3,20-23). 왜냐하면 시온으로부
터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요 4:22).
(3)또한 평화가 도래하게 된다. 여호와의 진리의 도로써 열방을 통치하게 됨으로
참된'평화의 왕국'이 건설된다. 그래서 모든 민족이 칼, 창등의 전쟁용파괴의 병기들
을 가지고 낫,괭이,전전용 가위 등의 평화적 건설 기구를 만들 것이다(4절). 이 시대
이전에는 정반대로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었다(욜 3:9,10).
물론 전쟁과 고통이 없는 완전한 평화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이다.
(4)이상과 같은 평화의 시대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위이며(창 12:1-3)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의해 온 세계가
통치될 때 가능하다.만약 하나님의 도를 무시하고 방종한다면 엄청난 심판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사야는 본 단랑의 마지막에서, 여호와께서 계시
해 주신 빛 가운데 행하자고 초청하는 것이다(5절).
2.시온의 죄악된 현 상태(2:6-22)
앞에서(1-5절) 시온의 영광스런 미래상을 묘사한 선지자는 본 단락에서 분위기를
급격히 전환하여 버림받은 시온의 모습을 지적한다. 이러한 첨예한 대조를 통하여 선
지자는 시온의 영광스러운 매래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본 단락을 내용상 세 부분으
로 나누어 핵심적인 사항을 살펴보고자 한다.
(1)시온의 죄악상(6-9절) 시온의 현 상태는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
다"(6절)는 함축적인 어휘속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
씀을 떠나 이방인의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정치,경제,군사,종교적인 면에서 혼
합주의(syncretism)로 경도된 유다를 떠나신 것이다. 당시 시온은 동방 풍속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다. 심지어 우상 앞에서 장래를 확인하는 점술이 유행하고 있었다(왕하
1:2). 이러한 사실은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계시된 말씀에서 떠
나 이방의 우상 숭배와 미신적 행위 차원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방 풍습을 따
르지 말것을 경고하셨었다(출 23:31-33 ; 34:12-15).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우
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정치적,경제적,종교적 교류를 갖게 되었다. 이방인들에 대한 이
러한 우호적인 태도와 교류는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은금,보화에 대한 탐욕(신
17:17b)과 마필과 병거의 숫자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햐려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신
17:16 ; 시 20:7), 우상 숭배를 통한 직접적인 배역의 죄를 범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
방인과의 교류를 통해 세속화되고, 변질된 이스라엘은 계층의 구별없이 하나님 대신
경제력, 군사력을 구하게 되었으며 그 영적 빈곤을 거짓 신들, 우상으로 가득 채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들의 전적
부패를 목격하면서 용서하지 말도록 탄원하는 것이다(9절).
(2)시온에 임할 심판-여호와의 날(10-17절):유다의 심각한 죄악을 적나라하게 묘
사한 선지자는 이제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을 예언한다. 유다의 죄로 인해 닥쳐올
심판은 교만한 자들을 굴복시키고 오직 여호와만 홀로 높임을 받게 만든다. 이런 관점
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정화의 단계를 넘어 회복과 구원까지 담고 있는 것이다. 일
반적으로 B.C 8세기 이전의 심판선언은 이스라엘의 약속 위반에 대한 징계로서의 의
미가 있으나, B.C 8세기 이후 선지자들의 심판 선언은 징계를 뛰어 넘어 궁극적 심
판(신자에게 있어서는 정화->회복->구원에 이르는 의미의 심판, 불신자데게는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종말적 심판의 날은 '여호와의 날'로 일컬어진
다.
(3)우상들의 무능함(18-22절)-시온의 범죄로 인하여 선포된 심판은 하나님을 대적
하는 모든 존재들을 멸절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만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
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우상과 그 숭배자들의 처단을 동반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우상들의 형상, 그 이름에 대한 기억, 그에 대
한 경배 행위가 다 없어져버리고 말 것이다(미 5:12-14 ; 슥 13: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에 우상의 무능함과 아울러 우상 숭배의 무익성을
드러낼 것이다(18절). 그때에 비로소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의 무기력성
을 절감하고, 역겨움을 느껴 우상들을 어둡고 불쾌한 세계에 사는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져버릴것이다(20절). 그러므로 선지자는 최종적으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
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금언 형식의 교훈을 첨가한다(시 118:8,9 ; 146:3 ; 렘 17:5).
하나님 백성들이 의지할 유일한 대상은 권세 있는 자나 우상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의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시다.
이상과 같은 본장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범죄의 심각성과 그 최종적 결과를 알게 되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도 당시의 유다 백성처럼 세속화되어서 헛된 물질과 지식과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재림의 날을 고대하며 더욱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