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엘리후가...가로되 -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고 있다. 첫 번째 연설(33장)에서 고난의 의의를 '정화의 수단'으로 제시하면서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 할 인간(욥)의 결함이 교만(33:17)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두 번째 연설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전지하심, 사랑, 그리고 교만한 자를 고통에 처하게 하시는 사실로써 논박한다(N.H.Ridderbos). 결국 엘리후의 두번째 연설의 의도는 욥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원망이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4:2
지혜있는 자들아...지식있는 자들아 - 여기 언급된 자들에 관해서는 (1)욥이나 세 친구들이 아닌 주위에 몰려있었을 부락민들을 가리킨다는 견해(Habel, Lange), (2)욥은 아니고 단지 세 친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Hahn)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엘리후가 그들을 지혜자와 지식자로 호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욥이나 세 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부적절하다(32:9,12). 그렇다면 이들은 역시 세상의 지혜자들을 두루 통칭한 말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34:3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 정상적인 사람들(어쩌면 지혜자들에게만으로 제한된)에게는 진리의 여부를 조사하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판단을 기대하고 있다(Lange). 한편 본절은 일종의 격언적인 표현이며, 욥 또한 이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12:11).
=====34:4
옳은...선한가...알아보자 - 엘리후는 그들에게 고난의 문제와 관련해 욥의 입장과 자신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고(* , 미쉬파트, 보통 '공의'로 번역되는 법정 용어임), 선한(* ,토브, 도덕적인 뉘앙스를 가짐) 것인지를 판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우리끼리'라는 말은 판단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가능하다는 제한을 암암리에 시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엘리후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사람을 내심 의중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4:5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 실제로 욥은 이러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다(27:2). 본장에서는 엘리후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욥의 말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욥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34:6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 '내 상처'(* ,히치)는 문자적으로 '나의 화살'이다. 이는 욥이 한탄해 마지 않았던 바(6:4), '자신에게 꽂힌 화살' 즉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로서, 하나님이 욥에게 허용하신 재난과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물론 욥은 이것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이며,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무자비한 공격자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Hartley).
=====34:7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 여기서 욥이 훼방했다는 대상이란 하나님의 공의이다(Lange). 이 표현은 아주 회화적인 것으로,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물을 발견하고서는 거침없이 들이키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는 욥의 극심한 난폭 행위를 빗댄 것이다. 하캄(Hakam)은 이 구절을 마치 거친 물살이 소용돌이치듯 욥의 입이 '비난과 욕설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비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훼방하기를'의 '라아그'(* )는 '비웃다', '조롱하다'의 뜻을 가진다. 한편 본문과 같은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익히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인들은 매일 당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던 바, 예컨대 사나운 바람을 만났을 때 '강한 바람을 마셨다'로 흔히 표현하였다고 한다.
=====34:8
함께 다니면서(* , 랄레케트)는 앞절의 행위가 계속되어 이어지는 '웨'(* ,and)로 시작되고 있다. 이 단어는 '걷다', '배회하다', '여행하다'의 뜻을 가진 '얄라크'(* )의 파생형이며, 본절에서는 욥이 악한 범죄자들과 동료를 삼아 무리지어 다니면서 같이 악행을 하는 계속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34:9
사람이...무익하다 -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구나'(Lange)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전체 문맥에 합당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후대의 삽입으로 보았다(Budde, Holscher). 그러나 이는 엘리후가 욥을 반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듯하기에 문맥에 적합한 것이다(Hartley). 엘리후는, 욥이 이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으나 죄인의 무리들과 떼지어 다니며 악행하는 것은 곧 이런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욥이 이와 비슷한 투의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9:22-35;21:7-34;24장).
=====34:10
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마친 엘리후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얼마나의로우시고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함으로써 욥의 행위를 반박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총명한 자들아(* , 아나쉐이 레바브) - '레바브'는 '심장', '마음','이해', '정신' 혹은 '양심'등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을수 있는 능력'이란 뜻으로 쓰였다. 엘리후의 이런 외침은 누구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음의 말을 옳다고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니하시고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은...과는 거리가 멀다'이다. 엘리후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불과하다. 그는 이러한 원칙론적 지식에 입각해서 사람들에게 욥의 불경건한 태도가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모순되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34:11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람의 길에 따라 그로 하여금 그 길을 찾게 하신다'(Pope)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생을 통해 걸어온 길에 따라 정확히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각자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보응은 구약 성경 중 특히 지혜 문학에(룻 2:12;시 62:12;잠 12:14;19:17) 빈번히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Hartley). 엘리후는 아마도 욥이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원리를 추상화하고 왜곡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성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를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Habel).
=====34:12
진실로(* - , 아프 옴남) - 유사한 의미의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어 뜻을 강조한다. 즉 이는 '이뿐 아니라', '참으로'의 뜻인 '아프'(* )와, '확증하다', '지탱하다', '확신하다'의 '아만'(* )에서 파생된 '참으로', '진실로'의 뜻을 가진 '옴남'(* )의 합성어로서, '더구나(정말) 그렇고 말고'라는 의미이다. 이 말이 유도하는 다음 구절은 11절에서의 주장을 다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Delitzsch).
=====34:13
12절에 이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들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있다.
누가...맡겼느냐 -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그분께 이 땅을 돌보라는 임무를 부여했느냐?'로서,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의'의 개념 간의 상호 관련성에 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가장 궁극적인 기반은 당신이 만유의 주(主)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34:14
본절은 하나님의 영과 호흡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심을 밝히면서, 그것이 제하여졌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아울러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은 결코 '자기만 생각하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시는 관용과 공의의 창조주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4:15
본절에서는 14절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혈기 있는 자(* , 바사르)는 '육신'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에서 273회나 사용된 이 '바사르'(* )는 보통 히브리어에서 기본적으로 동물의 근육 조직을 지칭하며,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인간의 몸, 혈연 관계, 인류, 생물 등 피조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뜻하며 후반부의 '사람'과 구분된다.
일체로 망하고 - 사람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본절 후반부), 모든 생명체 또한 멸절하게 된다. 여기서 '망하고'는 추상적인 의미의 존재 가치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을 뜻하는 완전한 소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그 사상이 자주 나타나듯이 모든 생명의 존재는 '하나님의 신과 기운'으로 인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34:16
만일 총명이 있거든 - '총명'은 10절의 그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으니 곧 '이해력'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동사가 단수형이므로, 이어지는 17절의 질문은 욥에게 직접 물은 것으로 이해된다(Anderson, Hartley).
=====34:17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 수사학적 의문문으로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공의를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주관자가 되신다'이다. 이말은 아마도 욥이 9:24에서 한 말을 반박하기 위한 것인 듯하며, 공의가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가 된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 잘 언급되고 있다(시 96:4-13).
의롭고 전능하신 자 - 문자적으로는 '의로우신 분', '전능하신 분'이다. 이처럼 두 개의 형용사를 계속 사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랍어에서 흔히 쓰인다(Delitzsch). 한편 본문의 표현은 '의로우신 전능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호의 하나를 의미한다.
=====34:18
비루하다(* , 벧리알)는 '노쇠하다', '낡다'의 뜻인 '발라'(* )의 파생형으로, 본절에서는 '무가치함'(NIV, RSV, worthless)을 뜻한다. 한편 여기에다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불한당', '악당'(scoundrel)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Habel).
=====34:19
왕족을...취치 아니하시며 - '취하다'(* , 나사)는 '올리다', '운반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가 '페네'(* , 얼굴)와 연결될 때는 종종 '누구의 얼굴을 들어주다'가 되어 '그 사람을 높여주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어떤 사람의 낯을 봐서 불공평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더 생각하지(* , 니카르)는 '알아보다', '인정하다', '존경하다'라는 뜻인 '나카르'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편애하다', '호의를 갖다'라는 뜻을 지닌다. 왕족과 부자들이 불의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편애를 받을 만한 자들일지 모르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결코 그들을 편애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 하반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34:20
백성(* ,암)은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건대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 계층을 의미한다고 본다(Hartley, Pope).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손이 아닌 힘으로' 이다. 이처럼 손을 대지도 않고 세력있는 자를 제하신다는 표현 속에는 그 배후에 더 강한 힘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Lange).
=====34:21
앞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는 불공평이 없음을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론하였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함을 언급함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 문자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 위에 두었다'이다. 앞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너무도 엄격하게 살피고 징책하신다고 불평조로 말한 바 있다(7:17-20).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공의로운 통치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Habel).
=====34:22
악을 행한 자는...없느니라 - 하나님을 거역한 범죄자들에게는 몸을 숨길 만한 어떤 장소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감찰하시는 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 139:7-12;렘 23:24;암 9:2-4). 이러한 사실은 욥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31:4).
=====34:23,24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그 판단의 즉각성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부분이다.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 '꺾으시고'(* , 야로아)는 '깨뜨리다', '부숴뜨리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라아'(* )의 파생형으로, 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사 24:19;렘 11:16). 본절에서는 사실 여부에 대해 굳이 조사할 것 없이 심판하실 정도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아시며, 그 심판은 공의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34:25
밤 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 - 하나님의 심판의 급작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연기하실 수 있다(벧전 3:9). 하지만 한번 심판을 작정하시면 마치 한밤중에 도적이 뚫고 들어오듯이 신속하고도 창졸간에 임하신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때는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또한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권력자들을 뒤엎으심으로 그들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그들이 권좌에 복귀할 수 없게 됨을 뜻하는 말이다(Hartley).
=====34:26
사람의 목전에서 -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보는 곳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공개적인 장소에서'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공식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공식적으로, 법적인 의의을 가지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공적 징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되는 의미도 갖는다.
=====34:27
그의 모든 길 - 하나님이 정하시고 명하신 법도와 원칙 또는 교훈을 뜻한다.
무관히 여김이라(* , 로 히스킬루) - 직역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관심을 두지 않다'이다. 여기서 '히스킬루'(* )의 원형인 '사칼'(* )은 '현명하다', '이해하다', '번영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주로 이성적인 지식과 관련이 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죄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28절이다.
=====34:28
가난한 자의...들리게 하느니라 - 엘리후는 박해자요 폭군으로서의 저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저들은 권력을 사용해서 도와주고 보살펴야 할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도리어 핍박하므로 그 원성과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게 하였다. 그 소리는 곧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신원이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절규와 신음 소리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들으신다(사 1:24;3:12-15;암 5:11,12;미 3:1-4;합 1:13).
=====34:29
평강을 주실 때에 - 문자적으로는 '그가 침묵을 지키시다'(KJV, NIV, RSV)이다. 이 침묵은 가난한 자들의 신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시는 '효과적인 침묵'을 뜻한다.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 직역하면 '누가 감히 비난하겠느냐'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야르시아'(* )는 '불의', '악', '죄'라는 뜻의 명사 '레솨'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원형 '라솨'(* )는 '악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범법자로 몰아 붙이는 가증스러운 행동을 뜻한다.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 '하나님의 얼굴'은 법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악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저들에게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길에 버려두시는 것이다.
=====34:30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 직역하면 '불경건한 사람의 통치로부터'이다. 즉 악한 자들,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무시하고 짓밟는(27절) 사람들의 폭정으로부터 무고한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34:31
내가...아니하겠나이다 - 혹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는 의미로 해석한다(Ewald). 즉, 자신들은 무엇을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지 모르겠으니 그것을 설명해 달라는 교만한 항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본문을 참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Delitzsch).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욥에 대한 간접적인 권유로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징계를 받는 자들 중에 뉘우침으로 그의 진노를 돌이킨 자가 없었으나, 욥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으라는 엘리후의 은근한 암시가 담겨 있다(Rawlinson).
=====34:32
내게 가르치소서 - 죄에 대한 고백 뒤에는 간절한 청원이 이어진다. 즉, '제가 행한 범죄 중에 제가 깨닫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이다. 엘리후가 욥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혹시 욥 자신도 모르고 있는 죄악과 범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34:33
네 뜻대로...싫어하느냐 - 본절은 진행되어 온 문맥 중에서 그 뜻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먼저 이 구절은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벌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거부하고 반대를 표현하는 욥에게 하나의 수사학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가 네 뜻대로 되어져야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됨이 자연스럽다(KJV, Should it be according to thy mind?).
내가 할 것이 아니니 - '내가'는 인칭의 변화가 일어난 표현으로 그 지칭은 '하나님'이다. 이런 변경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발견된다(예컨대 시 23편에는 '그'가 '당신'으로 변경됨). 이렇듯 3인칭의 신격을 1인칭으로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변하고 그 주장을 말하고자 함을 강력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 엘리후는 여기서 욥에게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방법에 애매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욥 자신이 알고 있는 보응의 참다운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요구한다. 물론 이는 욥을 공박하는 수사학적인 제안이다.
=====34:34
필연 내게 이르기를 - 만약 욥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을 경우, 청중들(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이라는 예상을 유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엘리후는 그들의 판단이 욥을 정죄하는 자신의 그것과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34:35
무식하게(* , 로 베다아트) - 근원적이고 체험적인 지식, 앎을 의미하는 '야다'(* )에 부정사 '로'(* )가 연결된 표현이다. 즉, 욥의 제안은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상식)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없다(* , 로 베하스케일) - 전반부와 유사한 연결로, 부정사 '로'(* )와 '현명하다', '이해하다'의 뜻을 가진 '사칼'(* )의 파생형으로 이루어졌다. '사칼'(* )은 이성적인 판단, 심사 숙고한 결과, 사려 깊고 신중한 행동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시 14:2;잠 19:14;단 9:22). 또한 이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욥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엘리후 자신만이 아니라 욥의 말을 들은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그 반박에 동의하여 욥의 진술에 올바른 지혜가 없음을 지적할 것이라는 뜻이다.
=====34:36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오, 욥이 계속 시험을 받았으면'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원문이다(Lange). 한편 원문의 '아비'(* )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상당한 난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나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Wordsworth) 청년 엘리후가 욥을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 바로 욥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부적합한 해석이다(Lange).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견해도 배경이 구약 시대라는 점에서 볼때 어색한 추측이다. 비록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나의 아버지'라는 해석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반면에 듐(Duhm)은 '아아'(alas)하는 감탄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돔(Dhorme)은 70인역(LXX)과 수리아역을 따라 '그러나'(but)로 번역한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의 근원을 '아바'(* )로 보고 그 뜻을 '바라다', '원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Driver, Gordis, Gray, Pope). 이 모든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아비'(* )를 일종의 기원문의 형식을 가지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엘리후의 이러한 강경한 기원 속에서 우리는 욥의 회개를 권고하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31,32절).
=====34:37
손뼉을 치며(* , 이스포크)는 '살짝 때리다', '손뼉을 치다'라는 뜻의 '사파크'(* )의 파생형이다. 26절에서도 쓰인 이 단어는 본절에서는 '조롱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엘리후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욥의 행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편 아람어에서 이 단어는 '의심하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는 그 사역 형태로서 '의심해 보다'는 뜻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Pope, Dhorme)도 있다.
엘리후가...가로되 - 엘리후의 두 번째 연설이 시작되고 있다. 첫 번째 연설(33장)에서 고난의 의의를 '정화의 수단'으로 제시하면서 고난을 통해 정화되어야 할 인간(욥)의 결함이 교만(33:17)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두 번째 연설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말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전지하심, 사랑, 그리고 교만한 자를 고통에 처하게 하시는 사실로써 논박한다(N.H.Ridderbos). 결국 엘리후의 두번째 연설의 의도는 욥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원망이 하나님 앞에 죄악된 것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시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4:2
지혜있는 자들아...지식있는 자들아 - 여기 언급된 자들에 관해서는 (1)욥이나 세 친구들이 아닌 주위에 몰려있었을 부락민들을 가리킨다는 견해(Habel, Lange), (2)욥은 아니고 단지 세 친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견해(Hahn)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엘리후가 그들을 지혜자와 지식자로 호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욥이나 세 친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부적절하다(32:9,12). 그렇다면 이들은 역시 세상의 지혜자들을 두루 통칭한 말로 이해됨이 무난하다.
=====34:3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 정상적인 사람들(어쩌면 지혜자들에게만으로 제한된)에게는 진리의 여부를 조사하는 자연적인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판단을 기대하고 있다(Lange). 한편 본절은 일종의 격언적인 표현이며, 욥 또한 이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12:11).
=====34:4
옳은...선한가...알아보자 - 엘리후는 그들에게 고난의 문제와 관련해 욥의 입장과 자신의 견해 중 어느 것이 옳고(* , 미쉬파트, 보통 '공의'로 번역되는 법정 용어임), 선한(* ,토브, 도덕적인 뉘앙스를 가짐) 것인지를 판결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우리끼리'라는 말은 판단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가능하다는 제한을 암암리에 시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엘리후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사람을 내심 의중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4:5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 - 실제로 욥은 이러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다(27:2). 본장에서는 엘리후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욥의 말들을 집중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욥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34:6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 '내 상처'(* ,히치)는 문자적으로 '나의 화살'이다. 이는 욥이 한탄해 마지 않았던 바(6:4), '자신에게 꽂힌 화살' 즉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로서, 하나님이 욥에게 허용하신 재난과 고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Delitzsch). 물론 욥은 이것이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처이며,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무자비한 공격자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Hartley).
=====34:7
훼방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 여기서 욥이 훼방했다는 대상이란 하나님의 공의이다(Lange). 이 표현은 아주 회화적인 것으로,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람이 물을 발견하고서는 거침없이 들이키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이는 욥의 극심한 난폭 행위를 빗댄 것이다. 하캄(Hakam)은 이 구절을 마치 거친 물살이 소용돌이치듯 욥의 입이 '비난과 욕설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비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훼방하기를'의 '라아그'(* )는 '비웃다', '조롱하다'의 뜻을 가진다. 한편 본문과 같은 표현은 고대 근동에서 익히 사용되었다. 고대 근동인들은 매일 당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먹고 마신다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던 바, 예컨대 사나운 바람을 만났을 때 '강한 바람을 마셨다'로 흔히 표현하였다고 한다.
=====34:8
함께 다니면서(* , 랄레케트)는 앞절의 행위가 계속되어 이어지는 '웨'(* ,and)로 시작되고 있다. 이 단어는 '걷다', '배회하다', '여행하다'의 뜻을 가진 '얄라크'(* )의 파생형이며, 본절에서는 욥이 악한 범죄자들과 동료를 삼아 무리지어 다니면서 같이 악행을 하는 계속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34:9
사람이...무익하다 -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구나'(Lange)이다. 혹자는 이 구절이 전체 문맥에 합당치 않다는 이유를 들어 후대의 삽입으로 보았다(Budde, Holscher). 그러나 이는 엘리후가 욥을 반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한 듯하기에 문맥에 적합한 것이다(Hartley). 엘리후는, 욥이 이런 말을 직접 하지 않았으나 죄인의 무리들과 떼지어 다니며 악행하는 것은 곧 이런 말을 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욥이 이와 비슷한 투의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9:22-35;21:7-34;24장).
=====34:10
욥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마친 엘리후는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이 얼마나의로우시고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함으로써 욥의 행위를 반박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욥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총명한 자들아(* , 아나쉐이 레바브) - '레바브'는 '심장', '마음','이해', '정신' 혹은 '양심'등을 의미한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을수 있는 능력'이란 뜻으로 쓰였다. 엘리후의 이런 외침은 누구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음의 말을 옳다고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아니하시고 -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은...과는 거리가 멀다'이다. 엘리후가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에불과하다. 그는 이러한 원칙론적 지식에 입각해서 사람들에게 욥의 불경건한 태도가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모순되는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34:11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람의 길에 따라 그로 하여금 그 길을 찾게 하신다'(Pope)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일생을 통해 걸어온 길에 따라 정확히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각자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보응은 구약 성경 중 특히 지혜 문학에(룻 2:12;시 62:12;잠 12:14;19:17) 빈번히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이다(Hartley). 엘리후는 아마도 욥이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원리를 추상화하고 왜곡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성에 정면 도전하는 행위를 저질렀다고 본 것이다(Habel).
=====34:12
진실로(* - , 아프 옴남) - 유사한 의미의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어 뜻을 강조한다. 즉 이는 '이뿐 아니라', '참으로'의 뜻인 '아프'(* )와, '확증하다', '지탱하다', '확신하다'의 '아만'(* )에서 파생된 '참으로', '진실로'의 뜻을 가진 '옴남'(* )의 합성어로서, '더구나(정말) 그렇고 말고'라는 의미이다. 이 말이 유도하는 다음 구절은 11절에서의 주장을 다만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Delitzsch).
=====34:13
12절에 이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들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고 있다.
누가...맡겼느냐 -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그분께 이 땅을 돌보라는 임무를 부여했느냐?'로서,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드러내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주권'과 '의'의 개념 간의 상호 관련성에 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하는 가장 궁극적인 기반은 당신이 만유의 주(主)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34:14
본절은 하나님의 영과 호흡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되심을 밝히면서, 그것이 제하여졌을 때의 결과를 예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아울러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은 결코 '자기만 생각하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만물을 사랑하시는 관용과 공의의 창조주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4:15
본절에서는 14절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혈기 있는 자(* , 바사르)는 '육신'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에서 273회나 사용된 이 '바사르'(* )는 보통 히브리어에서 기본적으로 동물의 근육 조직을 지칭하며,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인간의 몸, 혈연 관계, 인류, 생물 등 피조된 생명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모든 생명체'를 뜻하며 후반부의 '사람'과 구분된다.
일체로 망하고 - 사람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본절 후반부), 모든 생명체 또한 멸절하게 된다. 여기서 '망하고'는 추상적인 의미의 존재 가치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멸절되는 것을 뜻하는 완전한 소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그 사상이 자주 나타나듯이 모든 생명의 존재는 '하나님의 신과 기운'으로 인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34:16
만일 총명이 있거든 - '총명'은 10절의 그것과 같은 뜻으로 쓰였으니 곧 '이해력'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의 동사가 단수형이므로, 이어지는 17절의 질문은 욥에게 직접 물은 것으로 이해된다(Anderson, Hartley).
=====34:17
공의를 미워하는 자시면 어찌 치리하시겠느냐 - 수사학적 의문문으로서,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공의를 귀중히 여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주관자가 되신다'이다. 이말은 아마도 욥이 9:24에서 한 말을 반박하기 위한 것인 듯하며, 공의가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가 된다는 사상은 구약 성경에 잘 언급되고 있다(시 96:4-13).
의롭고 전능하신 자 - 문자적으로는 '의로우신 분', '전능하신 분'이다. 이처럼 두 개의 형용사를 계속 사용하여 하나의 복합적인 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랍어에서 흔히 쓰인다(Delitzsch). 한편 본문의 표현은 '의로우신 전능자'라고 하는 하나님의 칭호의 하나를 의미한다.
=====34:18
비루하다(* , 벧리알)는 '노쇠하다', '낡다'의 뜻인 '발라'(* )의 파생형으로, 본절에서는 '무가치함'(NIV, RSV, worthless)을 뜻한다. 한편 여기에다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불한당', '악당'(scoundrel)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Habel).
=====34:19
왕족을...취치 아니하시며 - '취하다'(* , 나사)는 '올리다', '운반하다'의 뜻이다. 이 단어가 '페네'(* , 얼굴)와 연결될 때는 종종 '누구의 얼굴을 들어주다'가 되어 '그 사람을 높여주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어떤 사람의 낯을 봐서 불공평하게 대우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더 생각하지(* , 니카르)는 '알아보다', '인정하다', '존경하다'라는 뜻인 '나카르'의 파생형이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히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편애하다', '호의를 갖다'라는 뜻을 지닌다. 왕족과 부자들이 불의한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편애를 받을 만한 자들일지 모르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결코 그들을 편애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본절 하반절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34:20
백성(* ,암)은 전후 문맥에 비추어 보건대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 계층을 의미한다고 본다(Hartley, Pope).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손이 아닌 힘으로' 이다. 이처럼 손을 대지도 않고 세력있는 자를 제하신다는 표현 속에는 그 배후에 더 강한 힘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이 작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Lange).
=====34:21
앞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는 불공평이 없음을 언급함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론하였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함을 언급함으로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 문자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눈을 사람의 길 위에 두었다'이다. 앞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너무도 엄격하게 살피고 징책하신다고 불평조로 말한 바 있다(7:17-20). 그러나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공의로운 통치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다(Habel).
=====34:22
악을 행한 자는...없느니라 - 하나님을 거역한 범죄자들에게는 몸을 숨길 만한 어떤 장소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그 감찰하시는 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시 139:7-12;렘 23:24;암 9:2-4). 이러한 사실은 욥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31:4).
=====34:23,24
하나님의 심판의 공정성과 그 판단의 즉각성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부분이다.
조사할 것 없이 꺾으시고 - '꺾으시고'(* , 야로아)는 '깨뜨리다', '부숴뜨리다', '멸망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라아'(* )의 파생형으로, 주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사 24:19;렘 11:16). 본절에서는 사실 여부에 대해 굳이 조사할 것 없이 심판하실 정도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아시며, 그 심판은 공의의 결과임을 나타낸다.
=====34:25
밤 사이에 엎으신즉 멸망하나니 - 하나님의 심판의 급작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연기하실 수 있다(벧전 3:9). 하지만 한번 심판을 작정하시면 마치 한밤중에 도적이 뚫고 들어오듯이 신속하고도 창졸간에 임하신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때는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또한 모든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권력자들을 뒤엎으심으로 그들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그들이 권좌에 복귀할 수 없게 됨을 뜻하는 말이다(Hartley).
=====34:26
사람의 목전에서 - 문자적으로는 '그들이 보는 곳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공개적인 장소에서'라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공식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하나님께서 그 악인들을 공식적으로, 법적인 의의을 가지고 벌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공적 징계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되는 의미도 갖는다.
=====34:27
그의 모든 길 - 하나님이 정하시고 명하신 법도와 원칙 또는 교훈을 뜻한다.
무관히 여김이라(* , 로 히스킬루) - 직역하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 '관심을 두지 않다'이다. 여기서 '히스킬루'(* )의 원형인 '사칼'(* )은 '현명하다', '이해하다', '번영하다'의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주로 이성적인 지식과 관련이 있다. 결국 본절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죄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들의 죄악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28절이다.
=====34:28
가난한 자의...들리게 하느니라 - 엘리후는 박해자요 폭군으로서의 저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저들은 권력을 사용해서 도와주고 보살펴야 할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도리어 핍박하므로 그 원성과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게 하였다. 그 소리는 곧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신원이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은 압제당하는 자들의 절규와 신음 소리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들으신다(사 1:24;3:12-15;암 5:11,12;미 3:1-4;합 1:13).
=====34:29
평강을 주실 때에 - 문자적으로는 '그가 침묵을 지키시다'(KJV, NIV, RSV)이다. 이 침묵은 가난한 자들의 신원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시는 '효과적인 침묵'을 뜻한다.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 직역하면 '누가 감히 비난하겠느냐'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야르시아'(* )는 '불의', '악', '죄'라는 뜻의 명사 '레솨'에서 파생된 것으로, 그 원형 '라솨'(* )는 '악하게 행동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을 범법자로 몰아 붙이는 가증스러운 행동을 뜻한다.
자기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 '하나님의 얼굴'은 법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악한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은 저들에게 어떠한 은혜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길에 버려두시는 것이다.
=====34:30
사특한 자로 권세를 잡아 - 직역하면 '불경건한 사람의 통치로부터'이다. 즉 악한 자들,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무시하고 짓밟는(27절) 사람들의 폭정으로부터 무고한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34:31
내가...아니하겠나이다 - 혹자는 이 구절을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는 의미로 해석한다(Ewald). 즉, 자신들은 무엇을 잘못해서 징계를 받는지 모르겠으니 그것을 설명해 달라는 교만한 항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본문을 참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Delitzsch). 이렇게 보면 이 구절은 욥에 대한 간접적인 권유로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징계를 받는 자들 중에 뉘우침으로 그의 진노를 돌이킨 자가 없었으나, 욥은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죄를 고백하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감당하여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으라는 엘리후의 은근한 암시가 담겨 있다(Rawlinson).
=====34:32
내게 가르치소서 - 죄에 대한 고백 뒤에는 간절한 청원이 이어진다. 즉, '제가 행한 범죄 중에 제가 깨닫고 있는 것 이외의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이다. 엘리후가 욥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혹시 욥 자신도 모르고 있는 죄악과 범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34:33
네 뜻대로...싫어하느냐 - 본절은 진행되어 온 문맥 중에서 그 뜻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먼저 이 구절은 엘리후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형벌의 방법과 의미에 대해 거부하고 반대를 표현하는 욥에게 하나의 수사학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가 네 뜻대로 되어져야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됨이 자연스럽다(KJV, Should it be according to thy mind?).
내가 할 것이 아니니 - '내가'는 인칭의 변화가 일어난 표현으로 그 지칭은 '하나님'이다. 이런 변경은 구약 성경에서 종종 발견된다(예컨대 시 23편에는 '그'가 '당신'으로 변경됨). 이렇듯 3인칭의 신격을 1인칭으로 변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변하고 그 주장을 말하고자 함을 강력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너는 아는 대로 말하라 - 엘리후는 여기서 욥에게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방법에 애매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욥 자신이 알고 있는 보응의 참다운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요구한다. 물론 이는 욥을 공박하는 수사학적인 제안이다.
=====34:34
필연 내게 이르기를 - 만약 욥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했을 경우, 청중들(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의 반응이 어떠할 것이라는 예상을 유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엘리후는 그들의 판단이 욥을 정죄하는 자신의 그것과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자신감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34:35
무식하게(* , 로 베다아트) - 근원적이고 체험적인 지식, 앎을 의미하는 '야다'(* )에 부정사 '로'(* )가 연결된 표현이다. 즉, 욥의 제안은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지식(상식)도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지혜없다(* , 로 베하스케일) - 전반부와 유사한 연결로, 부정사 '로'(* )와 '현명하다', '이해하다'의 뜻을 가진 '사칼'(* )의 파생형으로 이루어졌다. '사칼'(* )은 이성적인 판단, 심사 숙고한 결과, 사려 깊고 신중한 행동 등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시 14:2;잠 19:14;단 9:22). 또한 이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불평하는 욥의 말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적은 엘리후 자신만이 아니라 욥의 말을 들은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지 그 반박에 동의하여 욥의 진술에 올바른 지혜가 없음을 지적할 것이라는 뜻이다.
=====34:36
끝까지 시험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오, 욥이 계속 시험을 받았으면'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원문이다(Lange). 한편 원문의 '아비'(* )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는 상당한 난제에 속한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나의 아버지'로 이해하는 견해에 따르면(Wordsworth) 청년 엘리후가 욥을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후에 바로 욥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는 부적합한 해석이다(Lange). 또한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견해도 배경이 구약 시대라는 점에서 볼때 어색한 추측이다. 비록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지만, '나의 아버지'라는 해석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반면에 듐(Duhm)은 '아아'(alas)하는 감탄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돔(Dhorme)은 70인역(LXX)과 수리아역을 따라 '그러나'(but)로 번역한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의 근원을 '아바'(* )로 보고 그 뜻을 '바라다', '원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Driver, Gordis, Gray, Pope). 이 모든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아비'(* )를 일종의 기원문의 형식을 가지는 뜻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엘리후의 이러한 강경한 기원 속에서 우리는 욥의 회개를 권고하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31,32절).
=====34:37
손뼉을 치며(* , 이스포크)는 '살짝 때리다', '손뼉을 치다'라는 뜻의 '사파크'(* )의 파생형이다. 26절에서도 쓰인 이 단어는 본절에서는 '조롱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엘리후는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욥의 행동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편 아람어에서 이 단어는 '의심하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는 그 사역 형태로서 '의심해 보다'는 뜻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Pope, Dhorme)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