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 나아마 사람 소발의 욥에 대한 첫 번째 변론이다. 여기에서 `나아마'는 수 15:41에 나오는 곳과 또다른 곳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북 아라비아의 헤자즈(Hejaz)와 동일한 장소로 간주된다. 한편 `소발'이란 `수다 떠는 자', `지저귀는 작은 새'라는 뜻으로서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제일 나중에 변론하며 그것도 다른 두 친구들과는 달리 두 번만 변론한 것으로 보아 세 친구 중 제일 연소자인 것 같다. 그는 일반적으로 볼 때 성격이 가장 성급하며 열렬한 것으로 보이나(Delitzsch). 그의 변론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이고 그 논리의 근거를 정통성(正統性)에 두고 있다.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얻겠느냐 - 본문에서 소발은 죄 때문에 고난 당한다고 주장하는 앞의 두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욥을 책망하여 조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지혜서에서는 말이 많은 것을 어리석은 것, 또는 허물을 면키 어려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바(잠 10:19; 전 5;2, 3), 본문에서도 소발이 욥을 말이 많은 자로 규정한 것은 그를 우둔한 자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겠다. 한편 본문의 `입이 부푼 사람'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쉬 세파타임'(* )으로서 `입술의 사람'(man of lips)을 뜻한다(M. H. Pope, J.E. Hartley).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말한 바 `의롭다함을 얻겠느냐'란 욥의 말한 바 6:29; 10:2 등에 빗대어 한 말이다.
=====11:3
자랑하는 말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드'(* )는 `허풍', `잡담', `거짓말'(사 16:6; 렘 48:30) 등의 뜻을 지닌다(KJV, lies; NIV, idle talk, ; RSV, babble).이로써 소발이 자신의 무죄를 고집하는 욥의 말(6:24-30; 10:2-11)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잠잠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고대에서 흔히 논쟁에서 잠잠하는 것은 상대방의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는 바, 소발이 결코 욥의 뜻에 수긍하지 않으며 오히려 욥의 말을 반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J. E. Hartley).
=====11:4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깨끗하다 하는구나 - 본절의 `내 도'를 70인역(LXX)에서는 `토이스 에르고이스'(* , 나의 행동)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드라이버(Driver)나 그레이(Gray)등도 이 의미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그 원형이 `레카흐'(* )로서 본래 `받아들여진 것'(what is recieved), 더 나아가 `지식', `학식', `교훈', `가르침'등을 뜻한다(사 29:24, J.E. Hartley). 본문에서는 욥이 앞에서 증거한 말, 특히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징계하고 계신다고 말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 H. Pope). 한편 `주의 목전에'라는 말이 맛로라 사본에 의하면 `너의(당신의) 목전에'(in your eyes)로 번역된다. 그러나 `내 도는...깨끗하다'를 직접 화법으로 바꾸어 보면 `너의'(당신의)란 곧 하나님을 지칭한것이 된다. 70인역에는 `그의 앞에'(* )로 되어 있으며, 영역본 RSV는 이를 `하나님의 목전에'(in God's eyes)로 번역하였다.
=====11: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입을 여시고 - 이는 욥이 현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소발의 확신을 보여준다.
=====11: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광대하심이라 - 여기에서 `오묘'란 문자적으로는 `타알루마'(* )로서 `비밀', `숨겨진 것'등을 뜻한다. 한편 본문 전반절은 욥이 현재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15:2). 그리고 본문 후반절의 `광대하심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플라임'(* )은 `이중의', `두 배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은 양면(兩面), 즉 보여지는 면과 보여지지 않는 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현재 욥이 하나님의 지식의 보이지 않는 깊은 면을 알고 있지 못함을 은근히 나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벌하심이...경하니라 -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이(너를 위해) 너의 불의(의 일부분)를 잊어버리신다'(NIV,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 NASB,God forgets a part of your iniquity)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모두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분에 대해서만 징벌하고 계신다는 점을 의미한다.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온전히 알겠느냐 - `오묘'란 원어상으로 `심사 숙고', `깊은 것'(RSV, the deep thing)등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오묘'란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깊은 뜻을 가리킨다. 그리고 `측량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차'(* )는 `발견하다'(RSV, find out; NASB, discover)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 전반절은 욥과 같이 말이 많고(2절) 어리석은 자가 결코 하나님의 깊은 뜻과 비밀들을 발견할 수도 깨달아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네가 전능자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RSV, Can you find out the limit of the Almighty)의 뜻이다. 즉, 본문 후반절의 `온전히 알겠느냐'의 히브리 원어는 전반절의 `측량하며'(* , 팀차)란 말과 같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후자의 `팀차'(* )를 `네가 도달하다'(you reach)로 수정 번역한다(Driver & Gray). 그러나 본문은 동일 어휘의 반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다.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음부보다 깊으시니 - 본절과 다음 절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있었던,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영역(하늘, 음부, 땅, 바다)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Anderson). 특히 본문의 `어찌하겠으며'란 문자적으로는 `마 티팔'(* )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NASB, RSV, N IV, What can you do)를 뜻한다. 이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욥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한편 흔히 피조 세계의 광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네 개의 서로 다른 측량 단위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높이', `깊이', `길이', `넓이'등이다. 이중 `높이'와 `깊이'는 `하늘'과 `음부'와 관련되어 사용되며(시 139:8; 롬 10:6, 7), `길이'와 `넓이'란 `땅'과 `바다'와 관련되어 쓰인다(11:9; 37:10; 애 2:13).
=====11: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 `도량'이란 그 원형이 `마드'(* )로서 `규모'(measure)를 뜻한다. 그리고 영역본들 중 대부분은 이 단어의 주어를 비인칭(NASB, RSV, Its)을 사용하여 옮기고 있다. 이럴 경우 그 주어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깊으신 뜻 등을 가리키는 셈이다. 결국 본절 역시 앞절(8절)처럼 하나님 지혜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능히 막을소냐 - 이는 8,9절에 암시된 초월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시공(時空)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땅 끝 이곳 저곳을 다니시사(욥과 같이)어리석고 범죄한 자들을 잡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그 어느 누구도 막거나 제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정하시면'의 히브리어 `카할' (* )은 죄인들을 정죄 또는 심판 할 목적으로 `회중을 모으다', `소집하다'(NASB,calls an assembley; NIV, convene a court)는 뜻이다(잠 5:14; 겔 16:40). 이와같이 욥의 고난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뜻이 본절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키'(* ; For , RSV, NASB, KJV, For ; NIV, Surely)라는 연결사가 있다. 이것은 소발이 본문을 근거로 그의 주장을 강하게 변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허망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으'(* )는 `헛된'(NJV, vain), `아무것도 아닌'(of nothingness)의 뜻이다. 이는 본서에서 욥의 친구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즉 그 속에 지혜, 진리가 없고 거짓으로 가득찬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새끼 같으니라 - 여기에서 `허망한'이란 원문상으로 `나바브'(* )로서 11절의 `허망한'이란 말과 어휘가 다르나 그 의미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리고 본문 전반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허망한 사람의 지각있게 될 것이다'(KJV, Vain man would be Wise ; RSV, a stupid man will get understanding ; NASB, an idiot will become interllingent)의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는 후반절과 연결될 때 그 뜻이 더욱 확연해진다.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분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영역 본 RSV 나 NASB 등은 각각 이것을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때'(When a wild ass's colt is born an man ; When the wild ass is born tame)란 뜻으로, 그리고 하틀리(J. E. Hartley)는 `들나귀가 나귀로 태어날 수 있음 같이'(as a wild ass can be born a donkey)란 의미로 이해한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본문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의미는 결국 본문 후반절의 내용이 불가능한 것처럼 전반절의 내용, 즉 허망한 자가 지각이 있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욥과 같이 어리석고 속이 빈 허망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오묘하신 깊은 뜻, 지혜를 깨달아 알게 될 수가 없으리라는 소발의 단정을 보여준다.
=====11:13
마음을 바로 정하고...손을 들 때에 - `마음을 바로 정하고'란 마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확고히 하고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삼상 7:3). 그리고 이는 과거의 죄악된 곁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따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본문 후반절의 `손을 들때에'란 지난 과거의 죄악된 길에서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겠다(시 28:2; 63:4; 134:2; 141:2; 사 1:15; 애 2:19; 3:41). 한편 본문의 `손'(* , 카프)이란 문자적으로는 `손바닥'을 의미 하는데, 본문에서는 쫙 펴고 높이 든 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J. E. Hartley).
=====11:14
욥으로 하여금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새롭게 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여기서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웬'(* )은 일반적으로 여러 죄악들을 포괄하며 특히 사회적 강자가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 후반절은 욥의 가정에 불의가 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로서, 이는 욥의 재산이 빼앗기고 그 아들들이 죽임당한 사실과 연관시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1:15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 이는 소발이 욥의 말한 바 10:15 내용을 빗대어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언급은 욥이 죄 때문에 고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주어진 것이다. 한편 얼굴을 들게 된다는 것은 욥이 이전에 가졌던 사회적 지위와 권위, 명성 등을(29:4-25) 회복하는 것을 암시한다.
두려움이 없으리니 - 이는 욥이 현재 고난받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9:28).
=====11:16
환난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 )은 3:10에서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시련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소발은 욥이 회개할 경우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흘러가버린 물처럼 그것(환난)을 기억할 뿐일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그의 당하는 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서 그 모든 고난을 아득한 옛일처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11:17
네 생명의 날이...될 것이요 -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레드'(* )는 장수(長壽)의 측면에 강조점을 둔 단어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애에 빛이 비췬다는 것은 그 생애에 따뜻함과 생기 발랄함 혹은 풍요로움이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본문은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그의 생애가 더욱 왕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어두움이...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란 욥의 현재 처지가 암울하고 환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이것들이 사라지고 밝고 활기찬 삶이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이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라고 노래한 싯귀를 연상시킨다(사 58:10). 결국 소발은 여기서, 욥이 이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해 암울한 상태로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빗대어 말하고 있는 셈이다(10:21, 22).
=====11:18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안전히 쉬리니 - 17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욥이 회개하면 장차 현재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왕성하고 풍요로운 장래를 누리게 되리라는 소발의 주장이 점철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 28:1)라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욥은 계속 이어지는 고난과 질병으로 인하여 소망이 끊겨졌다고 탄식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처하게 된다(13:15; 14:17; 17:13,15,16; 19:10)
=====11:19
누워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츠'(* )는 주로 네 발 가진 짐승에게 적용된다(창 49:9; 사 11:6; 17:2, M. H. Pope, J. E. Hartley). 그러나 상징적으로 사람이 편안히 누워 쉬는 것에도 적용되는데(시 23:2) 본문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리고 첨을 드리리라 - 는 `얼굴을 기쁘게 할 것이다'(Would make sweet your face, M. H. Pope), 또는 `쓰다듬어 얼굴을 부드럽게 하다'(to make the face smooth through s troking)는 의미를 지닌다(J. E. Hartley). 다시 말하면 이는 `잘 대해 주다', `호의를 베풀다', `달래다' 등의 뜻을 시사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께 대해 적용되었으나(출 32:11; 왕상 13:6; 대하 33:12; 렘 26:9; 슥 8:21; 말 1:9)종종 사람에 대해서 언급되어지기도 한다(시 45:12; 잠 19:6). 소발의 이와 같은 언급은, 만약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예전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권위를 회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를 따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5절; 29:2-25)
=====11:20
그러나 악한 자는...끊침이리라 - 소발은 본문에서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묘사함으로 욥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앞절들(15-19절)에 묘사된 회개한 자의 형통과 대조를 이룬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 나아마 사람 소발의 욥에 대한 첫 번째 변론이다. 여기에서 `나아마'는 수 15:41에 나오는 곳과 또다른 곳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북 아라비아의 헤자즈(Hejaz)와 동일한 장소로 간주된다. 한편 `소발'이란 `수다 떠는 자', `지저귀는 작은 새'라는 뜻으로서 욥의 세 친구 가운데 제일 나중에 변론하며 그것도 다른 두 친구들과는 달리 두 번만 변론한 것으로 보아 세 친구 중 제일 연소자인 것 같다. 그는 일반적으로 볼 때 성격이 가장 성급하며 열렬한 것으로 보이나(Delitzsch). 그의 변론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이고 그 논리의 근거를 정통성(正統性)에 두고 있다.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얻겠느냐 - 본문에서 소발은 죄 때문에 고난 당한다고 주장하는 앞의 두 친구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는 욥을 책망하여 조롱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의 지혜서에서는 말이 많은 것을 어리석은 것, 또는 허물을 면키 어려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바(잠 10:19; 전 5;2, 3), 본문에서도 소발이 욥을 말이 많은 자로 규정한 것은 그를 우둔한 자로 취급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하겠다. 한편 본문의 `입이 부푼 사람'이란 문자적으로는 `이쉬 세파타임'(* )으로서 `입술의 사람'(man of lips)을 뜻한다(M. H. Pope, J.E. Hartley).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말한 바 `의롭다함을 얻겠느냐'란 욥의 말한 바 6:29; 10:2 등에 빗대어 한 말이다.
=====11:3
자랑하는 말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드'(* )는 `허풍', `잡담', `거짓말'(사 16:6; 렘 48:30) 등의 뜻을 지닌다(KJV, lies; NIV, idle talk, ; RSV, babble).이로써 소발이 자신의 무죄를 고집하는 욥의 말(6:24-30; 10:2-11)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문에서 소발이 잠잠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고대에서 흔히 논쟁에서 잠잠하는 것은 상대방의 뜻에 동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는 바, 소발이 결코 욥의 뜻에 수긍하지 않으며 오히려 욥의 말을 반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J. E. Hartley).
=====11:4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깨끗하다 하는구나 - 본절의 `내 도'를 70인역(LXX)에서는 `토이스 에르고이스'(* , 나의 행동)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드라이버(Driver)나 그레이(Gray)등도 이 의미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그 원형이 `레카흐'(* )로서 본래 `받아들여진 것'(what is recieved), 더 나아가 `지식', `학식', `교훈', `가르침'등을 뜻한다(사 29:24, J.E. Hartley). 본문에서는 욥이 앞에서 증거한 말, 특히 그 자신은 의롭고 하나님이 그런 자신을 징계하고 계신다고 말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 H. Pope). 한편 `주의 목전에'라는 말이 맛로라 사본에 의하면 `너의(당신의) 목전에'(in your eyes)로 번역된다. 그러나 `내 도는...깨끗하다'를 직접 화법으로 바꾸어 보면 `너의'(당신의)란 곧 하나님을 지칭한것이 된다. 70인역에는 `그의 앞에'(* )로 되어 있으며, 영역본 RSV는 이를 `하나님의 목전에'(in God's eyes)로 번역하였다.
=====11: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입을 여시고 - 이는 욥이 현재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소발의 확신을 보여준다.
=====11: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광대하심이라 - 여기에서 `오묘'란 문자적으로는 `타알루마'(* )로서 `비밀', `숨겨진 것'등을 뜻한다. 한편 본문 전반절은 욥이 현재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15:2). 그리고 본문 후반절의 `광대하심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플라임'(* )은 `이중의', `두 배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지식은 양면(兩面), 즉 보여지는 면과 보여지지 않는 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현재 욥이 하나님의 지식의 보이지 않는 깊은 면을 알고 있지 못함을 은근히 나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벌하심이...경하니라 -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이(너를 위해) 너의 불의(의 일부분)를 잊어버리신다'(NIV, God has even forgotten some of your sin ; NASB,God forgets a part of your iniquity)의 뜻이다. 이는 하나님이 욥의 불의를 모두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중 일부분에 대해서만 징벌하고 계신다는 점을 의미한다.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온전히 알겠느냐 - `오묘'란 원어상으로 `심사 숙고', `깊은 것'(RSV, the deep thing)등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오묘'란 하나님의 깊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깊은 뜻을 가리킨다. 그리고 `측량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차'(* )는 `발견하다'(RSV, find out; NASB, discover)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 전반절은 욥과 같이 말이 많고(2절) 어리석은 자가 결코 하나님의 깊은 뜻과 비밀들을 발견할 수도 깨달아 알 수도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네가 전능자의 한계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RSV, Can you find out the limit of the Almighty)의 뜻이다. 즉, 본문 후반절의 `온전히 알겠느냐'의 히브리 원어는 전반절의 `측량하며'(* , 팀차)란 말과 같은 잘못된 것으로 보고 후자의 `팀차'(* )를 `네가 도달하다'(you reach)로 수정 번역한다(Driver & Gray). 그러나 본문은 동일 어휘의 반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강화시키고 있다고 봄이 무난하다.
=====11:8
하늘보다 높으시니...음부보다 깊으시니 - 본절과 다음 절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있었던,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영역(하늘, 음부, 땅, 바다)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Anderson). 특히 본문의 `어찌하겠으며'란 문자적으로는 `마 티팔'(* )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NASB, RSV, N IV, What can you do)를 뜻한다. 이것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지혜를 욥으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한편 흔히 피조 세계의 광대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네 개의 서로 다른 측량 단위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높이', `깊이', `길이', `넓이'등이다. 이중 `높이'와 `깊이'는 `하늘'과 `음부'와 관련되어 사용되며(시 139:8; 롬 10:6, 7), `길이'와 `넓이'란 `땅'과 `바다'와 관련되어 쓰인다(11:9; 37:10; 애 2:13).
=====11:9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 `도량'이란 그 원형이 `마드'(* )로서 `규모'(measure)를 뜻한다. 그리고 영역본들 중 대부분은 이 단어의 주어를 비인칭(NASB, RSV, Its)을 사용하여 옮기고 있다. 이럴 경우 그 주어는 하나님의 지혜, 또는 깊으신 뜻 등을 가리키는 셈이다. 결국 본절 역시 앞절(8절)처럼 하나님 지혜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능히 막을소냐 - 이는 8,9절에 암시된 초월적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시공(時空)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땅 끝 이곳 저곳을 다니시사(욥과 같이)어리석고 범죄한 자들을 잡아 심판하시고자 하실 때 그 어느 누구도 막거나 제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정하시면'의 히브리어 `카할' (* )은 죄인들을 정죄 또는 심판 할 목적으로 `회중을 모으다', `소집하다'(NASB,calls an assembley; NIV, convene a court)는 뜻이다(잠 5:14; 겔 16:40). 이와같이 욥의 고난이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뜻이 본절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 원문에 의하면 본문 서두에는 `키'(* ; For , RSV, NASB, KJV, For ; NIV, Surely)라는 연결사가 있다. 이것은 소발이 본문을 근거로 그의 주장을 강하게 변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허망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으'(* )는 `헛된'(NJV, vain), `아무것도 아닌'(of nothingness)의 뜻이다. 이는 본서에서 욥의 친구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악한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인다. 즉 그 속에 지혜, 진리가 없고 거짓으로 가득찬 사람을 묘사하는 말이다.
=====11:12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새끼 같으니라 - 여기에서 `허망한'이란 원문상으로 `나바브'(* )로서 11절의 `허망한'이란 말과 어휘가 다르나 그 의미 면에서는 유사하다. 그리고 본문 전반절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허망한 사람의 지각있게 될 것이다'(KJV, Vain man would be Wise ; RSV, a stupid man will get understanding ; NASB, an idiot will become interllingent)의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는 후반절과 연결될 때 그 뜻이 더욱 확연해진다.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분별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영역 본 RSV 나 NASB 등은 각각 이것을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때'(When a wild ass's colt is born an man ; When the wild ass is born tame)란 뜻으로, 그리고 하틀리(J. E. Hartley)는 `들나귀가 나귀로 태어날 수 있음 같이'(as a wild ass can be born a donkey)란 의미로 이해한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본문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 의미는 결국 본문 후반절의 내용이 불가능한 것처럼 전반절의 내용, 즉 허망한 자가 지각이 있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욥과 같이 어리석고 속이 빈 허망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오묘하신 깊은 뜻, 지혜를 깨달아 알게 될 수가 없으리라는 소발의 단정을 보여준다.
=====11:13
마음을 바로 정하고...손을 들 때에 - `마음을 바로 정하고'란 마음을 하나님께 대하여 확고히 하고 다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삼상 7:3). 그리고 이는 과거의 죄악된 곁길에서 떠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따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본문 후반절의 `손을 들때에'란 지난 과거의 죄악된 길에서 떠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것을 나타낸다 하겠다(시 28:2; 63:4; 134:2; 141:2; 사 1:15; 애 2:19; 3:41). 한편 본문의 `손'(* , 카프)이란 문자적으로는 `손바닥'을 의미 하는데, 본문에서는 쫙 펴고 높이 든 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J. E. Hartley).
=====11:14
욥으로 하여금 죄악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새롭게 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여기서 `죄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웬'(* )은 일반적으로 여러 죄악들을 포괄하며 특히 사회적 강자가 약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문 후반절은 욥의 가정에 불의가 거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로서, 이는 욥의 재산이 빼앗기고 그 아들들이 죽임당한 사실과 연관시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1:15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 이는 소발이 욥의 말한 바 10:15 내용을 빗대어 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러한 언급은 욥이 죄 때문에 고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주어진 것이다. 한편 얼굴을 들게 된다는 것은 욥이 이전에 가졌던 사회적 지위와 권위, 명성 등을(29:4-25) 회복하는 것을 암시한다.
두려움이 없으리니 - 이는 욥이 현재 고난받고 질병으로 시달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9:28).
=====11:16
환난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 )은 3:10에서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시련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문에서 소발은 욥이 회개할 경우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새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본문 후반절의 문자적 의미는 `흘러가버린 물처럼 그것(환난)을 기억할 뿐일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그의 당하는 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서 그 모든 고난을 아득한 옛일처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11:17
네 생명의 날이...될 것이요 - `생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레드'(* )는 장수(長壽)의 측면에 강조점을 둔 단어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생애에 빛이 비췬다는 것은 그 생애에 따뜻함과 생기 발랄함 혹은 풍요로움이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본문은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그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그의 생애가 더욱 왕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특히 `어두움이...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란 욥의 현재 처지가 암울하고 환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 이것들이 사라지고 밝고 활기찬 삶이 도래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윗이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6)라고 노래한 싯귀를 연상시킨다(사 58:10). 결국 소발은 여기서, 욥이 이전에 자신의 생애에 대해 암울한 상태로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염두에 두고 빗대어 말하고 있는 셈이다(10:21, 22).
=====11:18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안전히 쉬리니 - 17절에 이어 본절에서도 욥이 회개하면 장차 현재 당하는 고통과 고난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왕성하고 풍요로운 장래를 누리게 되리라는 소발의 주장이 점철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잠 28:1)라는 말씀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욥은 계속 이어지는 고난과 질병으로 인하여 소망이 끊겨졌다고 탄식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처하게 된다(13:15; 14:17; 17:13,15,16; 19:10)
=====11:19
누워도 -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바츠'(* )는 주로 네 발 가진 짐승에게 적용된다(창 49:9; 사 11:6; 17:2, M. H. Pope, J. E. Hartley). 그러나 상징적으로 사람이 편안히 누워 쉬는 것에도 적용되는데(시 23:2) 본문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그리고 첨을 드리리라 - 는 `얼굴을 기쁘게 할 것이다'(Would make sweet your face, M. H. Pope), 또는 `쓰다듬어 얼굴을 부드럽게 하다'(to make the face smooth through s troking)는 의미를 지닌다(J. E. Hartley). 다시 말하면 이는 `잘 대해 주다', `호의를 베풀다', `달래다' 등의 뜻을 시사한다. `이 말은 구약에서 주로 하나님께 대해 적용되었으나(출 32:11; 왕상 13:6; 대하 33:12; 렘 26:9; 슥 8:21; 말 1:9)종종 사람에 대해서 언급되어지기도 한다(시 45:12; 잠 19:6). 소발의 이와 같은 언급은, 만약 욥이 그의 죄악을 회개하고 불의한 길에서 돌이킬 경우 예전의 사회적 지위와 명성, 권위를 회복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시 그를 따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15절; 29:2-25)
=====11:20
그러나 악한 자는...끊침이리라 - 소발은 본문에서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묘사함으로 욥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앞절들(15-19절)에 묘사된 회개한 자의 형통과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