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느헤미야는 인구 재정착 작업을 마친후 (11장), 이스라엘의 존재 기반인 여호와 신앙의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의 가계를 조사한다.
스룹바벨과 및 예수아 - 이들은 바벨론으로 부터의 제1차 귀환을 주도했던 정치적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였다(스 2:2). 따라서 본절부터 7절까지에 언급되는 제사장 가문은 모두 최초의 귀환 대열에 속했었다. 한편, 1-7절 외에 12-21절과(느헤미야 초기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 10:2-8(느헤미야후기 시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에도제사장 목록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들의 차이에 관해서 는 주제 강해, '세 가지 제사장 계보 명단 비교'를 참조하라.
스라야 - 대상 9:11에는 '아사랴'로 나온다.
예레미야 - 이 가문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다.
에스라 -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자들은 이 '에스라'가 10:2의 '아사랴'의 축약형이라고 주장한다(Kidner).
=====12:2
아마랴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의 뜻이다.
말룩 - 14절의 '말루기'와 동일한 듯하다. '통치하는'의 뜻이다.
핫두스 - '대적자'의 뜻이다.
=====12:3
스가랴 - 14절 및 10:4과 같이 '스바냐'로 고쳐야 할 것이다(Rawlinson).
르훔(* ) - '하림'(* )의 오류로 추정된다(Rawlinson, Kidner, 10:5;스2:39).
므레못(* ) - 15절의 '므라욧'(* )의 바른 이름이다. '높은곳들'의 의미이다.
=====12:4
잇도(* ) - 10:5의 '오바댜'(* )의 바른 이름이다. 보다 후대의 제사장 가문의 명단(12-21절)에도 '잇도'(16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오바댜'는 필사자의 잘못인것 같다(Rawlinson).
긴느도이(* ) - '긴느돈'(* )의 오류인 듯하다(Rawlinson, 16절;10:6).
아비야 -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바로 이 제사장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다(눅 1:5).
=====12:5
미야민 - '운이 좋은'의 뜻이다.
마아댜(* ) - 이것은 17절의 '모아댜'(* )와 동일한 듯하다(10:8). '여호와의 장식품'의 뜻이다.
빌가 - 10:8의 '빌개'와 동일하다.
=====12:6
스마야 - 18절과 10:8에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요야립 - 이 '요야립' 앞에만 '그리고'의 의미를 갖는 접속사 '와우'(* )가 있다.본서의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스마야'까지와 여기의 '요야립'부터를 확연히구분하려고 시도한다(19절). 추측컨대 이는 '요야립' 가문부터, 어떤 원인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언약에 인을 치지 못했던 때문인 것 같다(Rawlinson). 이와 같은 주장은, '요야립'이하의 가문명들이 10장의 인친 가문의 명단중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한편, '요야립'은 '여호와께서 아심'의 뜻이다.
여다야 - '여다야'라고 불리위지던 대제사장 가문의 일족(一族)이다(스 2:36). '여호와께서 알고계시다'의 의미이다.
=====12:7
살루 - 조절의 '살래'와 동일한 듯하다. '무게를 단'의 의미이다.
아목 - 조절에서도 다시 언급된다. '깊은'의 의미이다.
힐기야 - '여호와의 분깃'의 뜻이다.
여다야 - 6절의 '여다야'처럼 대제사장 가문 출신일 것이다. 한편, 다윗 시대에는제사장들이 24반차로 구분되어 번갈아가며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규정된 바 있으나(대상 24:1-19), 1-7절에 열거된 제사장들의 수효는 22명이다. 그렇다고 느헤미야 시대에와서 22반차로 의도적으로 재구성했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1-7절에서는 24반차 중 2개의 명단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12:8,9
본절의 명단들은 가계명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비록 귀환 당시에는 '예수아'와'갓미엘' 자손밖에 없었지만(스 2:40) (1)약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레위 사람들의인구가 증가하였고, (2)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바벨론에서 데려왔기(스 8:15-20) 때문에 이처럼 가문의 숫자도 늘어났을 것이다.
=====12:10
본절과 다음 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활동했던 대제사장의 계대를 보여주고 있다.따라서 이것은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 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의 대제사장족보의 연장이다. 물론 포로 기간, 즉 B.C. 586년부터 B.C. 538년까지는 대제사장이없었다.
예수아 - 스룹바벨과 함께 최초로 귀환했던 인물이다(스 2:2). 그는 B.C. 520년 경의 성전 재건 공사를 재개하는 데 참여했음이 분명하다(스 5:2). 그러나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살아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스 8:15-18).
요야김 - 예수아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역할을 했다(12,26절).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것이다'의 뜻이다.
엘리아십 - 이 사람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해인 B.C.458년 이전에 이미 대제사장이 되어 있었다(스 10:6). 그런데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적극 방해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내통하는 등의 이적(利敵) 행위를 하기도 했다(13:4,5,28).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이다'이다.
요야다 - 이 사람은 느헤미야의 후기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의아들 하나는 사마리아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됐었다(13;28).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이다. 한편,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유월절 기략'(thePaschal Chronicle)이라는 유대 문헌에 따르면 그의 재직 기간은 삼십 육 년으로 되어있다(Rawlinson).
=====12:11
요나단 - 22,23절의 요하난과 동일 인물인 듯하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요하난'이 페르시아 총독 바고아스의 환심을 사서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동생 예수아를 살해하였던 인물이라고 말한다(Rawlinson, Fensham). 또한 '요하난'은 애굽에서 발견된 B.C. 410년 경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그이름이 언급된다(Fensham).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의 총애하심'이다.
얏두아 -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얏두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당시의 대제사장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예루살렘 입성이B.C.332년이었으므로, 본서가 B.C.5세기후반 (421-400년 경)에 기록됐었다는 입장은손상을 입게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10,11절의 족보가 후대의 어떤 인물에 의해 가필(加筆)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12:12
여기서부터 21절까지에서는 제사장 21반열의 이름 각각과 그 각각의 우두머리 이름이 나열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제사장 체계가 새로 정비되고, 성전 제사가 엄정히 드려졌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Rawlinson). 사실 요야김이 대제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기는, 성전이 재건된(B.C. 516년) 직후였으므로 당연히 성전 제사가 철저히 드려졌을 것이다.
요야김 때 - 에스라나 느혜미야가 귀환하기 얼마 전의 시기를 가리킬 것이다. 분명치는 않지만 예수아의 대제사장 재직이 B.C. 490년까지였다면(B.T. Dahlbaerg). 요야김은 에스라의 도착(B. C. 458년)직전까기 대제사장에 있었을 것이다.
스라야 족속 - 1절의 '스라야'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므라야 - '모반'의 뜻이다.
예레미야 족속 - 알려진 바가 없다.
하나냐 - '여호와께서 은총을 베푸셨다'의 뜻이다.
=====12:13
에스라 족속 - 1절의 '에스라'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므술람 - '동맹한'의 뜻이다.
아마랴 족속 - 2절 주석 참조하라.
여호하난 - '여호와는 은혜로우심'의 뜻이다.
=====12:14
말루기 족속 - 2절의 '말룩'과 동일하다.
요나단 -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이다.
스바냐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요셉 - '그가 더할 것이다'의 뜻이다.
=====12:15
하림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아드나 - '즐거움'의 뜻이다.
므라욧 족속 - 3절 주석을 참조하라.
헬개 - '할당된'의 뜻이다.
=====12:16
잇도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스가랴 -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의 뜻이다.
긴느돈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12:17
아비야 족속 -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시그리 - '기억할만한'의 뜻이다.
미냐민 곧 모아댜 족속 - 이 두 이름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아마 필사자의 오류로 '미냐민 족속'의 우두머리 이름이 누락됐을 것이다(5절). 한편'모아댜 족속'에 대해서는 5절 주석을 참조하라.
빌대 - '구출된'의 뜻이다.
=====12:18
빌가 족속 - 5절의 '빌가'와 동일하다.
삼무아 - '소문' 혹은 '풍문'의 뜻이다.
스마야 족속 - 6절을 참조하라.
여호나단 - '여호와께서 주셨다'의 뜻이다.
=====12:19
요야립 족속 - 본 제사장 가문 명단중 유일하게 이 앞에만 '그리고'의 뜻인 접속사'와우'(* )가 있다. 그이유에 대해서는 6절 주석을 참조하라.
맛드내 - '자유로운'의 뜻이다.
여다야 족속 - 6절 주석을 참조하라.
웃시 - '힘센'의 뜻이다.
=====12:20
살래 족속 - 7절의 '살루'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갈래 -'경솔한'의 뜻이다.
아목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에벨 - '건너편'의 뜻이다.
=====12:21
힐기야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하사뱌 - '여호와께서 생각하셨다'의 뜻이다.
여다야 족속 - 7절 주석을 참조하라.
느다넬 -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이다.
=====12:22
본절과 23절도 10,11절처럼 후대의 삽입인 듯하다.
엘리아십...요야다...요하난...얏두아 - 10,11절 주석을 참조하라.
바사 왕 다리오 - 다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페르시아 역사상 세 명 등장한다.그러나 문맥상 본문의 다리오는 유다의 대제사장 '얏두아'와 동시대 사람인 다리오 3세(B.C. 335-331년)를 가리킨다고 봄이 무난하다.
=====12:23
역대 지략 - 여러 가지 명단과 기록을담은 공식적인 성전 연대기로 추측된다(EdwinYamauchi). 한편, 성경에 언급된 자료나 문서들에 관해서는 대하 35:26,27의 도표를참조하라. 요하난은 약B.C.400년까지 대제사장직에 있었다. 최후의 선지자 말라기도 바로 이시대에 활동했었다.
=====12:24
본절과 다음 절의 레위 사람들의 명단은 개인의 이름이 아닌 가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
하사뱌 - 포로 귀환 후 생긴 레위 사람의 가문일 것이다(8,21절).
세레뱌 - '하사뱌'와 마찬가지이다.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 - '아들'(* , 벤 )은 '빈누'* )의 오류임이 분명하다(Kidner, 8절).
그형제의 맞은편에 있어 - 레위 성가대가 교송(交頌) 형식으로 찬양을 드렸음을 의미한다(9절;스 3:11). 즉, 두 파트로 나뉘어 서로 마주보며 찬양하였던 셈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찬양하며 감사하고 -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이신정 왕국 이라엘의 예배 체계를 신실하게 확립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사용한 용어인 듯하다(대하 8:14). 다윗이 노래하는 자들의 반차를 정한 것은 대상 25장에서 언급되고 있다.
=====12:25
'노래하는 자'(11:17)들이 '문지기기'의 역활도 병행했었다는 추측은 불필요한 듯하다(Fensham). 따라서 우리는 '오바댜' 까지의 세 사람을 24절의 후미에 붙여야 할것이다(Kidner). 그렇게 할 경우, '맛다냐'와 '박부갸' 사이에만 유일하게 있는 접속사 '와우'(* )를 '오바댜'와 '므술람'사이로 옮기면 '노래하는 자'와 '문지기' 사이의 구별이 뚜렸 해진다. 6절의 '요야립'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면, 이 같은 구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므술람과 달몬과 악굽 - '므술람'(* )은 대상 9:17절 및 스 2:42 등을 볼때, '살룸'(* )의 오류임이 분명하다(Schultz).
문 안의 곳간 - '문지기'들이 지켰던 '곳간'은 성전에 부속되어 있던 '곳간'들을가리킨다(Schults, 10:38,39).
=====12:26
모든 사람은 요사닥의 손자 예수아 - '요사닥'은 바벨론에 붙들려간 '여호사닥'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며(대상 6:15), '예수아'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대제사장(스2:2)이다.
요야김과...느헤미야와...에스라때 - 이것은 여기의 세 사람이 모두 동시대(同時代)의 사람들임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의 '요야김'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귀환한B.C.458년 이전에 죽었을 것이다. 즉, 에스라가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요야김'의 아들 '엘리아십'이 대제사장의 직책에 올라 있었다(스 10:6).
=====12:27
여기서 문제가 되는 바는,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성곽 봉헌식 행사가 언제 실시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 성곽 공사가 준공된 직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udolph), (2) 예루살렘으로의 인구 재정착 사업을 끝마친 후에 봉헌식이있었다는 견해(Fensham, Keil, Myers), (3)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다녀온 직후인B.C.432년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견해(Rawlinson) 등으로 견해가 엇갈린다. 원래 봉헌식이라는 것은 집이든 성곽이든 준공 직후에 시행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보편적 관습이었으나(스 6:1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시급한 예루살렘 성의 방비 문제(7:4)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기쁨으로 봉헌식을 실시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落成)되니. - 6:15에서 언급되고 있다.
각처에서 레위사람을 찾아 -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혹은 내용상 당시에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의 징수 등의 목적으로 유다와 베냐민의 각 성읍에 거주하고있었다는11:36의내용과 바로 연결된다. 그들은 평소에는 자신들에게 배당된 성읍에서 살았지만, 자신들의 봉사 순서가 돌아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야만 했다(대하 23:2).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봉헌식을 행하려 - 이것은 성전 봉헌식 때 솔로몬이 사용했던 방식의 답습이다(대하 5:12,13). '제금'(* ,메칠타임)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잘 보여주듯이, 마치 솥뚜껑처럼 생긴 한 쌍의 금속을 부딪혀 소리내는 악기로서 현대의 심벌즈와 유사하다.
비파(* ,네벨) - 요세푸스는 이 악기의 현(絃)이 열 둘임을 중언하고 있다(Ant.VLL,xii,3).
수금(* , 키누르) - 현이 셋밖에 없는 것으로 부터 열 둘 되는것까지 다양했었다. 특별히 귀족들에 의해서 많이 사용된 고급 악기였던 관계로, 은 혹은 상아,심지어는 금으로 장식되었다고 한다. 앞의 비파 보다는 크기가 작았다.
=====12:28
예루살렘 사방 들 - 여기의'들'(* , 키카르)은 때때로 평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루살렘 둘레에는 말 그대로의 '들'은 없다는 점에서. 본 문구는 다만 '예루살렘 일대의주변'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Myers).
느도바 사람의 동네 - 베들레헴의 동남쪽 가까이 위치했던 작은 마을인 것 같다(Fensham,schults).
=====12:29
벧길갈 - 예루살렘 동북쪽 약 26km지점의 '길갈'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
게바 - 11:31 주석을 참조하라.
아스마웽 들 - 예루살렘 북동쪽 약 8km지점 베냐민 지경(스 2:24)을 말한다.
노래하는 자들은...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 '노래하는 자들'이 이같이 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봉사에 쉽사리 참여하기 위함이었다(Rawlinson). 아무튼이 문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앞절과 본절의 전반부 처럼 쉽사리 예루살렘에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12:30
성벽 봉헌식에 앞서 정결례를 행함 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추는 내용이다. '정결케 하다'의 뜻인 히브리어 '타헤르'(* )는 구약 성경에서 94회 나오며 거의 의식적 혹은 윤리적 정결과 관련 하여사용된다. 특히 부정했던자를 다시 회복시켜 의식 절차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주는 정결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가장 흔히 사용되었다 (레 22:4-7).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하고 - 금식, 성적 욕구의 절제, 속죄제를드리는것 등을 가리킨다.
백성...정결케 하니라 - 일반 백성들은 옷의 세탁(출 19:10,14), 목욕 및 물을 뿌림(민 8:7;19:12) 등을 통해 정결케했을 것이다.
성문과 성 - 이것들 또한 '정결케'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는 성벽 재건 도중 성벽에 부정한 것들이 접촉되었거나 혹은 거기서 부정한 일들이 저질러졌을 것을 염려한때문이었을 것이다(Myers, 신 23:14). 그것들을 정결케 하는방법은, 개인의 가옥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우슬초로 새의 피를 거기에 뿌리는 방식이었음이 분명하다(레 14:49-53).
=====12:31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 느헤미야의 이 같은 조처는 서쪽 성곽의중앙부 곧 골짜기 문(2:13)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Rawlinson). 이같이 볼 수있는 까닭은, 느헤미야가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온 직후 성벽의 파괴 정도를 관찰하기 위한 경로를 바로이 '골짜기 문'부터 잡았기 때문이다(Schultz).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 레위 사람들 중 아삽 자손들을 가리킨다(27-29절;11:17).
성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 이러한 독특한 의식적(儀式的) 행동은, 그 성벽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인도에 따라서 재건 되었음을 감사및 고백하는 데(27절)그 목적이 있었다(Kidner,시 48:12-14). 물론 거기에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하나님께온전히 의뢰한다는 의미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糞門)을 향하여 가게 하니 - 이 대열은 '골짜기 문'(2:13)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약 450km 떨어져 있던 '분문'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서론의 '성벽모형도' 참조). 이대열의 인도자는 '학사 에스라'였고(36절). 선두에는 찬송하는 레위인들이 위치했다.
=====12:32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 - '호세야'가 '유다 방백'의 선두에 섰었음을 암시하는듯하다(Schultz), 한편, 여기의 유다 방백'은 반드시 유다 지파의 방백만을 가리키지않으며 지파를 막론한 '이스라렘 백성'들의 방백을 가리킬 것이다.
=====12:33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 - 이들을 방백들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Schultz), 성벽 봉헌식에 있어 레위인과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는 본문 전후의 문맥을 고려해볼 때 레위인 혹은 제사장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Rawlinson).
=====12:34
유다와 베냐민 - 이것은 평민들의 집단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스마야와 예레미야 - 두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다(12,18절).
=====12:35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 '나팔'은 레위 사람들에 의해서 간혹 사용되었을 뿐(대상 16:42), 주로 제사장들에 의해서 다뤼지던 악기였다. 이 악기는 특별한 종교적행사 혹은 사건의 축하를 위하여 사용되었다(삼하 6:15;대하 7:6;29:26-28).한편, '잡았으니'라는 번역은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그다음에 나오는 이름들이 '나팔'을 잡은 사람의 구체적 명단인 양 착각케 한다는 점에서. '잡았고'라고 해야 보다 타당하다. 물론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은, 원문상 본 문구와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단어인'스가랴' 사이에 '그리고'를 뜻하는 접속사 '와우'(* )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본 문구 뒤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레위 사람들이 분명한 이상,'잡았고'로 고쳐 번역함이 보다 자연스럽다(Rawlinson, Myers, Williamson).
맛다냐 -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했던 레위 지파의 아삽 자손이었다(11:17).
아삽의 육 대 손 스가랴 -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찬송의 책임을 부여받았던 레위 사람이었다(대상 16:4-7;대하 5:12). 한편, '스가랴'는 느헤미야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약 50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여기의 '육 대 손'이라는 번역은 적절치 않다. 차라리 '자손'으로 번역함이 무리가 없다.
=====12:36
그 형제 - 다음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이 앞절의 '스가랴'처럼 아삽 자손들이라는사실을 시사해준다.
아사렐 - '하나님께서 도우심'의 뜻이다.
밀랄래 - '말이 많은'의 의미이다.
느다넬 -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의 뜻이다.
하나니 - '은혜로움'의 뜻이다.
다윗의 악기 - 레위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 곧 제금, 수금, 비파 등을 가리킨다(27절;대상 15:16,19-21). 이처럼 '제금'. '수금', '비파'를 '다윗의 악기'라고한 까닭은, 그 악기의 사용이 다윗에 의하여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된 것이기 때문이었다(대상 15:16).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 그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에스라'라는 인물이 차지하던 비중을 잘 보여준다. 비록 그는 느헤미야와 같은 정치적 권세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각성이 그의 종교적 역량에 힘입은 바가 컸음을 감안한다면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8:1-12).
=====12:37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 성벽을 타고 행진하던 에스라 일행이 일단 성벽에서 내려왔음을 전제로한다. 사실 에스라의 일행은'샘문'이 가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성벽에서 일단내려왔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반대쪽의 성벽 으로 올라가야만 했다.
다윗 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 이 '다윗 성의 층계'는 샘문을 통하여 성의 안쪽으로들어가는 길목이 되었었다. 바로 이계단을 통하여 에스라의 일행은 성의 안쪽으로 들어갔음이 분명하다(Schultz).
다윗의 궁 윗길 - 여기의 '길'(* ,호마)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호마'는 '성벽'의 뜻이 있을 뿐이다(출 14:22;신 3:5;렘 1:18).
동향(東向)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 이것은 에스라의 일행이 샘문 북쪽의 성벽 끝을출발하여 그 성벽을 따라 계속 진행했었음을 가리킨다. 한편, 본문의 수문이 느헤미야당시에 재건된 성벽의 바깥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 문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1) 느헤미야가 포로 이전시대의 수문과는 별도의 수문을만들었으리라는 견해. 그러나 그러한 언급이 3장에 나오지 않으며 또 3:26의 수문과본문의 수문이 동일한 지점을 가리킨다고 봄이 더 무난하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2) 에스라 일행이 새로 재건된 성벽을 벗어나 그 바깥쪽으로 돌았으리라는 견해. 하지만 에스라 일행은 특별한 경우만 성벽 안쪽으로 돈 것을 제외하면줄곧 성벽 위로 돌았음에 분명하다. (3) 본문의 '수문'을 3:26에서처럼 '수문과 마주대한 곳'으로 해석하는 견해. 여러 측면에서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본다(Will-iamson).
=====12:38
저희들 마주 진행하는데 - 여기의 '마주'(* ,레모올)는 '반대로'의 의미이다(NIV). 따라서 이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는(36절) 한 대열이 성을 따라 우추으로돈 데 반해, 또 다른 한 대열은 좌측, 즉 북쪽으로 돈 것을 가리킨다.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 비록 느헤미야가 그 대열의 인도자였지만, 그 대열의 선두에는 아삽 자손의 노래하는 자들이 위치했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순서는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대열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 여기의 '풀무 망대 윗길'은 '다윗의 궁윗길'과 마찬가지로 '풀무 망대에 이르는 성벽'으로 번역되어야 한다(37절 주석 참조). 한편, 이 '풀무 망대 윗길로'와 다음의 '성 넓은 곳에 이르고'사이에는 '경유하여'(* , 메알)라는 단어가 삽입되어야 한다. '성 넓은 곳'에 대해서는 3:8주석을참조하라.
=====12:39
에브라임 문 - 북쪽 성벽의 서쪽 부분에 있던 '하나넬 망대'(3:1)와 '함메아 망대'사이의 '문'이다.
옛 문 - 3:6절 주석을 참조하라.
어문 - 3:3 주석을 참조하라.
하나넬 망대와함메아 망대...양문 - 3:1 주석을 참조하라.
감옥문 - 이것은 수문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느지점에 위치했을 것이다(Rawlinson).
=====12:40
본절은 '감사 찬송하는 두 떼는 하나님의 전에 섰고 나를 포함한 민장(民長)의 반은 나와 함께 있었다'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성전에서의 봉헌식을 주관하던성직 계급과 평신도들의 분리되는 모습이 생생히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Fensham).결국 에스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과 느헤미야에 의해 인도된 무리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서 성전에서 서로 만났다고 볼 수 있다.
민장 - 32절에서 언급되는 '방백'과 본질상 동일할 것이다(Rawlinson).
=====12:41
본절부터 43절까지에서는 성벽 봉헌식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본절에 언급되는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임이 분명하다(Rawlinson). 만일 이것이 가문의 이름이라면 제사장 가문 목록에 실려있어야 했을 것이다(12-11절;10:2-8).
나팔를 잡았고 - 35절 주석을 참조하라.
=====12:43
마아세야...에셀이 함께 있으며 - 원문에는 '함께 있으며'에 해당되는 말이 없다.아무튼 '마아세야...에셀' 등도 41절의 제사장처럼 나팔을 불던 제사장이었음이 분명하다(Fensham).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 이는 반드시 노래만 했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이 '찬송'하는 무리 속에는 악기를 잡은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36절). 따라서 이 봉헌식에는 (1) 느헤미야가 인도하던 대열만이 참여하였고,(2) 그래서 악기를 사용하는 레위인들은 없고 다만 '노래하는 자들'만이 있었다는 롤린슨(Rawlinson)의 주장은 결코 타당치 못하다.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 - 이 '예스라히야'는 '노래하는 자'와 '악기를 잡은 자'모두에 대한 지휘자였던 것 같다.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 여기서'제사'(* , 제바힘)는 주로 감사의화목제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출 24:5;29:28;레 3:3;7:20;민 6:17;왕상 8:63). 그때 백성들은 제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불살라서 바친 후(레 3:11). 그 나머지의부분 중 일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레 7:29-34),그 잔여분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을것이다(신 12:17,18).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벽을 성공적으로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신 일(6:15,16)로 인하여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음을 가리킨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줄거워하였으므로 - 성경은 여자들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모습에대해서는 자주 언급하고 있으나(삿 11:40;렘 31:15;49:3;욜 1:8), 기뻐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본절의 언급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쁨이 너무나도컸음을 더욱 확연히 보여준다(Rawlinson).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는 소리가매우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백성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연상할수 있을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성전 지대가 놓여졌을 때도 백성들의 소리가 무척이나 컸었지만,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분별되지 못했었다(스3:13).
=====12:44
본절부터 47절까지에 언급된 사실은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된 이후 나타났던 바람직한 결과였다.
그 날에 - 봉헌식이 있었던 직후의 어느 시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 헌물의 수령 및 관리를 담당할 사람을 임명한 것을가리킨다. 전에 느헤미야는 '곳간'을 담당하는 레위 사람과 입회인 자격의 제사장에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10:38).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 '제사장들'은 처음 난 가축이나 과일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 등을 백성들로부터 받았다(10:35-37). 그리고 '레위 사람들'은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으며(10:38) 그 십일조의 십분지 일은 제사장에게 다시돌려졌었다(민 18:26).
거제물(擧祭物)과 처음 익은 것 - 10:35-47을 참조하라.
유다사람이...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 이것은 백성들이 봉헌식을 통하여서 성직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깨달았던 연고일 것이다. 한편, '유다 사람'은 지파를 막론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곧 평민들을 가리킨다.
=====12:45
본절에서는 희생 제사 등과 관련된 봉사를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 모두 그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말할나위없이 백성들이 성직자들을 물질로 뒷받침한 결과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 '섬기는 일'(* , 미쉬메레트)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직무' 혹은 '직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 제사장 및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담당하던 제반사(諸般事)를 가리킨다(민 3:7;대상 23:32;대하 7:6;겔44:8).
결례(潔禮)의 일 - '결례'(* , 타하라)는 성전 봉사와 관련하여 자신들의부정(不淨)을 정결케 하는 노력을 가리킨다(Myers, 대하 30:19;겔 44:26). 자신 뿐만아니라 '성물'을 정결케 하는일도 포함될 것이다(대상 23:28).
다윗과...솔로몬의 명을 좇아 - 이것은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 뿐만 아니라앞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문구이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의 봉사도 '다윗'과 '솔로몬'이 정한 규례대로 시행되어졌던 것이다.
=====12:46
본절은 '노래하는 자들'이 '다윗'과 '솔로몬'의 규례대로 봉사했다는 45절 후반부의 언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기록된 듯하다. 본절 초두에 있는 '왜냐하면'의뜻인 접속사 '키'(* )는 본절이 45절 후반부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느헤미야는 '노래하는 자들'이 규례에 따라 봉사했다는 사실이 역사적 합법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것이다.
노래하는 자의 두목 - '두목'(* , 라쉐이)은 복수이다. 이것은 다윗 당시에'아삽'을 포함한 세사람의 '두목'이 있었다는 사실과 잘 합치된다(대상 6:33,39,44;15:17). 그 나머지 둘은 '헤만'과 '에단'이었다.
찬송...감사하는 노래 - '찬송'과 '감사'는 신구약을 막론한 모든 성도들의 찬양에담겨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주제일 것이다.
=====12:47
본절은 포로 귀환 시대에 성직자들이 특별히 존중되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 - 이것은 곧 포로 귀환 시대 전(全)기간을 가리킨다.
날마다 쓸 것...그 구별한 것 -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즉, 이들은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표현일 뿐이다.
노래하는자들...문지기들...레위 사람들 - 구약 시대에 있어서 이들은 모두 레위지파의 후손, 즉 레위인들이었으며, 그래서 모두 기업을 갖고 있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주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십일조 제도가 세워진 모세 시대심지어는 사울 시대까지 레위인들 중 '노래하는자들'과 '문지기들'은 구별되지 않았었다.
레위 사람들은...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십일조 중 십분지 일을 '제사장'에게 준 것을 가리킨다(10:38;민 18:26).
포로 귀환 이후 느헤미야 따자시에 이스라엘이 직면해 있던 경제 문제(5장), 예루
살렘 성안의 공동화 문제(7,11장), 그리고 백성들의 영적 문제(8-10장)에 대해 해결한
사실을 증거하는 앞부분에 이어지는 본장은 완성된 성벽(6:15-19)을 하나님께 봉헌하
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즉, 본장은 예루살렘 성벽을 완공한 후 현실적으로 노출
된 성안의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 종교적으로 대처해(8-10장) 성공을 거둔 후 (11장)
에 있었던, 성벽의 봉헌 사실에 관해 증거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장은 그 내용상 (1)낙성식을 위해 종교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을 언
급한 전반부(1-26절), (2)낙성식이 성대히 진해되는 과정을 묘사한 중반부(27-43절),
그리고 (3)낙성식에 이어진 레위 족속을 위한 제도 보완 사실을 기술한 후반부(44-47
절)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같은 본장에서 느헤미야는 성벼의 낙성식을 전후로 하여 제
사장 및 레위인 에 개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는 이 같
은 진술을 통하여 백성들의 종교적 관심을 한층 북돋우어 이끌어낸 후(8-10장) 성전을
위해 봉사하는 자들의 실질적 문제를 해결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예
루살렘은 이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도성답게 회복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들의
신앙적 영광을 회복하에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느헤미야는 이 같이 성벽의 봉
헌과 레위인들의 문제까지 해결하였음을 밝혀 가시저이고(성벽의 재건), 제도저으로
(레위 족속을 위한 십일조 제도 정비)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가 이스라엘에 회복되었음
을 밝히는 것이다.
사실 성벽 낙성식은 성벽 완성(7:1) 직후에 거행됨이 당연하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이 거의 공동화(空洞化)되어, 성읍 자체를 방어할 백성이 없는 상황에서의 성벽 낙성
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벽 낙성식은 인구 재배치가 이루어져서
성읍을 방어할 백성의 수효가 충분해진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어느 정도 일단락된 후에 느헤미야는 낙성식을 거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성벽 낙성식을 거의 성전 봉헌식(스 6:16-18)의 차원에서 생각한 듯하
다. 왜냐하면 성벽의 낙성식을 위해 느헤미야는 제사장 및 레위인들이 가계를 조사함
으로써 종교적으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예루살렘 성벽이 갖는 그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던 사실과 계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중앙 성
소로서의 역할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일성을 유지시켜 주었다고 한다면, 성벽은 그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가졌던 성전을 보호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
헤미야는 이같은 성대한 낙성식을 통하여 성벽을 완공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그 성벽을 도구로 삼으로셔서 거룩한 도성(11:1) 예루살렘을 끝까지 보호하여 주
시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본장에는 역대서 기자
가 가졌던 '역사에 대한 제사장적 관점'이 분명히 나타난다. 이는 본장에 제사장과 레
위인들의 명단이 언급된 것과 함께 그들의 생활 문제를 위해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 제
도를 보완한 사실을 기록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성벽의 낙성
식 과정에서도 레위 족속이 담당했던 역할과 그들이 한 일에 대해 자세히 언급함으로
써 느헤미야가 가졌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에 대한 관심은 더욱 드러난다.
우리는 이 같은 본장을 통하여 (1)만사(萬事)에는 때가 있다는 사실(전 3;10과 함
께, (2)성도들은 어려움을 통과했거나 혹은 형통케 되었을 때 마음을 통한 내면적 감
사와 더불어 행위를 통한 외면적 감사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창 8;20;마
6:21)을 깨닫게 된다.
1. 낙성식을 위한 종교적 준비(12:1-26)
예루살렘 성곽을 하나님께 봉헌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본장에서 그 전반부에 해
당되는 본문은 낙성식의 거행을 위해 종교적으로 준비한 사항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다. 즉, 본무은 예루살렘 성벽의 봉헌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과느헤미야가 먼저 제사
장들과 레위인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계보를 살펴서 기볼한 부분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1)스룹바벧과 예수아때 함께 귀환한 제사장(1-7절)과 레위 사람들(8-11절)의
명단을 기술한 전반부, (2)요야김때에 제사장으로 족장이 된 자의 명단(12-21절)과 레
위 사람으로서 족장이 된 자의 이름(22-26절)을 언급한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
한 계보를 파악함으로써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
사장과 레위인드을 선별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표면상 예루살렘에로의 재
정착이 끝난 후(11:3-24) 앞으로 이어질 본격적인 개혁을 위한 전(前) 단계로서 종교
적 체제 확립을 위한 기초 작업이 실시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실 느헤미야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을 작성하면서, 제사장과 레위인 모두
가 자신들의 고유한 반차에 속하여 성전 봉사에 온전히 임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을 것
이다. 물론 느헤미야는 엄밀히 말하여 종교 지도자는 아니었다. 하지가 출중한 종교
지도자가 없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느헤미야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제사장
과 레위인의 반차 체계를 정비하여 온전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느헤미야는 종
교 체제를 정비하는 복잡한 과정을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종교 체제를 정비해댜 할 절대적 필요성을 느낀 것은 성직자들의 반차가 외적으로 정
비되고 그들 자신이 내적으로 헌신되어야만 성벽 낙성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
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느헤미야의 관점은 그의 결벽성 혹은 소심성를 반영하는 것이 결코 아니
다. 느헤미야는 다만 성경적인 신앙의 원리에 따라서 자신들의 성벽 낙성식이 하나님
께 온전히 바쳐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성벽 낙성식을 성벽 재
건의 결과에 이어지는 단순한 요식(要式) 행위로 여겼다면, 종교 체제의 정비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의식 절차를 의미있게 생각
하였기에 철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한편, 제사장은 그 직무의 원활한 숭행을 위해서 24반열로 나누어져 있었다(대상
25:8-31). 그런데 1-7절의 이름에 22개의 가문명만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두 명단이 누
락된 득하다. 그리고 1-7절에 언급된 이름들은 핫두스를 제외하고 요야김 당시 각 족
속을 대표한 자들의 개이명으로 다시 기술된다(12-21절). 또한 10, 11절에는 대제사장
의 족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대상 6:3-15에 나타난 아론으로부터 바벧론 포로 때
까지의 족보의 연장인 듯하다. 그런데 대상 6장에 언급된 족보가 몇몇의 이름을 생략
한 것과 같이 본문에서도 또한 그렇게 생략된 듯하다.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1)준비
되고 정성된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일 수 있으며(창 4;3-5), (2)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게 맡겨진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심 성의껏 수행해야 한다(창 39:4,5;골 3:22, 23)
는 것이다. 그리고 (3)종교적인 지도자들은 회중들의 요구나 상황에 얽매이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원리에 귀기울여야 함(갈 1:10)을 더불어 깨닫게 된다.
*세 가지의 제사장 계보. 본서에는, 본장에 둘 그리고 10장에서 하나 등 모두
가지으 제사장 계보가 제시되어 있다. 이 세가지를 대조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
| 12: 1-7 | 12:12-21 | 10:2-8 |
| (1) 최초 귀환 제사장 |(2)에스라 귀환 전의 제사장|(3)느헤미야 시대의 제사장|
+----------------------+--------------------------+-------------------------+
| 스 라 야 | 스 라 야 | 스 라 야 |
| 에 레 미 야 | 에 레 미 야 | 에 레 미 야 |
| 에 스 라 | 에 스 라 | 에 스 라 |
| 아 마 랴 | 아 마 랴 | 아 마 랴 |
| 말 룩 | 말 룩 | 말 룩 |
| 핫 두 스 | | 핫 두 스 |
| 스 가 냐 | 스 바 냐 | 스 바 냐 |
| 르 훔 | 하 림 | 하 림 |
| 므 레 못 | 므 라 욧 | 므 레 못 |
| 잇 도 | 잇 도 | |
| 긴 느 도 이 | 긴 느 돈 | 간 느 돈 |
| 아 비 야 | 아 비 야 | 아 비 야 |
| 미 야 민 | 미 야 민 | 미 야 민 |
| 마 야 민 | 마 야 민 | 마 야 민 |
| 빌 가 | 빌 가 | 마 아 시 야 |
| 스 마 야 | 스 마 야 | 빌 개 |
| 요 야 립 | 요 야 립 | 스 마 야 |
| 여 다 야 | 여 다 야 | |
| 살 루 | 살 루 | |
| 아 목 | 아 목 | |
| 힐 기 야 | 힐 기 야 | |
| 여 다 야 | 여 다 야 | |
| | | 바 스 홀* |
| | | 말 기 야* |
| | | 오 바 댜* |
| | | 다 니 엘* |
| | | 바 룩* |
| | | 므 술 람* |
+----------------------+--------------------------+-------------------------+
우리는 이 같은 대조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2)의 계보에는 제사장 가문의 이름 하나가 생락되어 나타난다.
둘째, 세 가지 계보에는 동일한 가문명이 약간씩 다르게 표기된 경우도 있다.
세째, (3)의 계보에는 몇 제사장 가문의 이름이 바뀐 형태(*표)로 나타난다.
*성경의 가필(加筆). 우리는 성경, 특히 구약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읽다가 당혹
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럿은 곧 성경 그 분의 저자가 자신의 죽음을 진술하
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세가 기록한 신명기의 마지막 부부 34:5은 모세의 사망 사
실을 말한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록한 책 여호수아의 끝 부분 24:29도 여호수아의
사망 사실을 말한다. 또한 이와는 그 경우가 약간 드르지만, 본서 12:11에는 보서 저
자인 느헤미야 사후(死後)의 제사장 두 사람 이름이 나온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비펼주의자들은 신명기와 여호수아 그리고 느헤미야의 저작 연대를 휠씬 후대로 본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 때문에, 더 분명한 근거도 없이 전통적이 견해들이 배척되어
야 할 이유는 없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나 대제사장 엘
르아살을 시켜 모세의 사망 사실을 덧붙이게 함으로써 신명기의 자연스런 마무리를 도
모하셨다고 보아야 한다. 마찬기지로 여호수아의 끝부분에도 대제사장 비느하스를 시
켜서 여호수아의 사망 사실을 덧붙이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
께서는, 느헤미야의 사후(死後) 당신의 사람을 감동시켜 대제사장 계보를 완성케 하신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가필들이 인간의 자의적 시도였다고 한다면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있
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가필의 과정에도 그 세 책들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느헤미야에게 내려주셨던 영감과 동일하게 영감을 주션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은 뻔하다. 즉, 원래의 기로자와 나중의 부분적 가필자는 서로 다르지
만, 오늘날 우리 독자들이 대하고 있는 신명기와 여호수아 그리고 느헤미야의 원저자
가 성령이시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신앙적 이해를 통해여 성경에 관한 모든 정통적 견해들을 무너뜨리
지 말아야 할 것이다.
2. 낙성식의 거행(12:27-43)
본장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본문은 이미 완공된 성벽을 하
나님께 봉헌하는 장면을 그린 대목이다. 즉, 본문은 B.C. 444년 6월 25일에 완공된 성
벽(6:15)을 예루살렘 성이 당시 직면한 성의 공동화 현상에 대해 적절히 조처한 후 하
나님께 드리는 모습을 세밀히 묘사한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은 (1)낙성식을 위해 소집
된 레위인의 명단(27-29절)과 식을 위해 정결케 한 사실(30절)을 기술한 전반부와 (2)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의 참여자들과 그들이 순회한 성벽의 지형을 언급한 중반부
(31-39절), 그리고 (3)봉헌식 때 드려진 제사와 그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후술한 대목
(4043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당시의 행사
를 자세히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그 낙성식의 목적,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그
의미가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본문의 앞 부분에 성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 까닭은 낙성식의 주요 부분은 역시 성직자에 의해서 주도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
이다. 그리고 본문의 전반부에서 주로 노래하는 레위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까닭은,
본 낙성식이 감사와 찬송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대표들과 함께 성 위로 올라가서 해렬을
지어간것은, 그 성벽을 통한 하나님의 보로를 의뢰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이 같은 백
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의뢰는 너무니도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온갖 정성을 들여
서 건축한 성벽이 있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이방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시 127:1).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
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으 도우심을 받지 못함으로써 성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멸망
당했던 쓰라린 역사(대하 36:19)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 있기를 싸우너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낙성시게 임
했던 것이다.
이 낙성식은 하나님께 화목 제물을 드리는 제사 의식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43
절). 그들은 제사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량없는 기쁜을 체험할 수 있었
다. 이 같은 기쁨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와 함께하심을 분명히 깨달은 결과였다. 즉, 백
성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제
자신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써(고후 8:5)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께서 주
시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었단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한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특성이 내포되어 있는 바 이를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는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담당했던 역할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느헤미야의 관심과 그의 제사장적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
냐하면 이러한 것은 본문뿐만 아니라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하고 레윙다들이 해석한 장
면(8:1-12), 성벽을 재건한 자들의 명단 가운데 나타난 레위 족속들의 행적(3장), 1차
위환자들의 명단 뒤에 레위 족속을 특별히 강조해서 기술한 사실(7:73) 등에도 나타나
기 때문이다.
둘째 본문에는 성벽 재건한 사실을 언급할 경우(3장)와 같이 예루살렘 성벽의 지리
적 문제에 대해서 세밀히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감사 찬송하는 무리
들이 성벽을 도는 모습을 묘사하는 대목에 나타나는 바(31, 37-29절) 이는 본서 저자
느헤미야가 본서를 기록하였기에 당시의 모습 속에 자신이 주도한 봉헌식을 자세히 기
록한 것으로 사료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또한 강조되어 있다(43절), 이러한 언급은 익히 앞부분
(4;15;7:5)에서도 나타난 것인데 느헤미야는 자신을 통해 성벽을 중수케 하시고 백성
을 신앙적으로 부흥케 하심이 시종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보서 저자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임과 동시
에 자신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택함받은 도구임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음을 드러
낸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1)하나님이 배제된 인간의 노력은 결국 헛수고
일 수밖에 없기에(창 11:1-8; 잠 3:6) 전적으로 여호와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과 (2)하
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얻는 진정한 비결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일임(왕상
3;4-14)을 깨닫게 된다.
3. 레위 족속을 위한 십일조 제도 정비(12:4-47)
종교적으로 철저히 준비한 뒤(1-26절) 성대히 거행된 성벽 낙성식(27-43절)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본서 저자는 이제 그 후 발생한 십일조 제도 보완 및 정화 운동에 관한
사실을 언급한다. 즉, 느헤미야는 성벽 봉헌식 이후에 있는 레위인을 위한 제도 보완
사실과 이교도와의 교제 단절 사건을 언급해 가시적으로 회복한 이스라엘이 이제는 영
적으로 회복되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본서 기자는 본문과 다음 장의 첫 단
락(13:1-3)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와 주제
의 흐름 가운자데 그 전반부에 해당하는 본문은 본장의 끝임과 동시에 다음 장의 주제
와 연걸되는 도입부, 혹은 전반부이다.
이 같은 내용의 전개 과정에서 레위 사람들의 생활 문제를 위시한 성전 예배의 당
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지원한 사실을 언급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이 구
성되어 있다. 즉, (1)십일조 제도를 확립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언급한 구절(44절),
(2)레위 사람들의 사역 소개를 통해 암시한 제도 확립의 석들을 드러낸 부분(45, 46
절), 그리고 (3)십일조의 분배 기준으로 그 분배의 과정으로 기술한 대목(47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구조를 통해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성벽의 봉헌 후 확
립된 십일조 제도에 대해 소개함과 더불어 이상적으로 재건된 예루살렘 안에서 온전한
제사를 위해 애썼음을 나타내고 있다.
사실 십일조는 여호와의 종교를 유지하는 데 있어 불가결의 요소였다. 왜냐하면 십
일조가 바쳐지지 않을 경우 다른 백성들과는 달리 오직 십일조만을 수입원으로 삼고
있던 레위 사람들 및 제사장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성전 봉사를 초기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희생 제사는 중지되고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어 영적인 기갈 상태에 빠져버리게 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중앙 성소에서의 제사가 중단될 경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족 동질성이 깨어지는 결과는 더 큰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지난날의 신앙적 나태를 청산하고,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 같이 십일조를 바치게 된 까닭 중의 하나는 그들이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은 성벽 낙성식으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었고(43절) 그에 따라서 성직자들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아무튼 성벽 낙성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은, 영적으로 생기가 넘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성전 제사는 원활히 드려졌을 것이며,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깊어져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중앙 성소에서의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민조적 동질성을 확고히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섬긴 사실을 통해(44절)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여러 사역자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협조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갈 6:6,7). (2)느헤미야가 강조한 십일조 제도 확립에 대해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실행한 사실을 통해 오늘날의 성도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철저히 지키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3)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했던 것(45, 46절)과 같이 우리 역시 하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사명 감당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다(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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