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열왕기하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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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 '아달랴'라는 이름은 '크게 일어나다', '존귀케 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아탈'(* )과 '여호와'(Yahweh)라는 신의 이름이 합성되어진 것이다(Hobbs).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여호와는 존귀하시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벧의 딸인 그녀가 이러한 의미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대단히 모순된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이 갖는 의미와 그녀의 실제적인 행동은 전혀 정반대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아달랴가 유다의 여호람과 결혼하게 된 것은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남유다 왕 여호사밧이 군사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세운 혼인 정책 때문(왕상 22:2-4; 대하 18:1)이었을 것이다. 그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쿰'(* )은 군사 용어로서 '어떤 행동을 개시하는 것'을 뜻한다(7:12). 지금까지 세기의 악녀 이세벧과 같이 자기 남편 호람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8:18; 대하 21:5, 11) 아들 아하시야를 조종하여(8;27; 대하 22:3)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과 아들이 잇다른 죽음(8:24; 9:27)은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하시야가 통치하던 때에는 아달랴가 남유다 아히시야 왕의 태후로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었다. 한편 아달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태후 또는 '왕후'(* , 게비라)가 왕보다 더 실질적인 세력을 가진 때(왕상 15:2; 렘 13:18; 29:2)가 종종 있었는데(Bahr) 그 여자들은 때때로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예를 들면, 밧세바, 마아가, 아달랴, 이세벧). 그런데 이제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었으니 자연히 그녀의 손자들 중에 하나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태후의 자리도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달랴는 자신의 권좌를 계속 누리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 본 표현에 나타난 '씨'는 히브리어 '제라'(* )를 번역한 말인데 이는 '씨를 뿌리다', '퍼뜨리다', '낳다'를 의미하는 '자라'(* )에서 온 용어이다. 특히 이 말은 '열매', '자손', '후손'이라는 뜻도 지녀 본절에서 '왕의 씨'라고 함은 왕위를 계승할 권리가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과 친척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왕의 씨는 아달랴가 집권하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아하시야의 친척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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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 왕의 딸...여호세바가. - 여기서 요람 왕은 유다의 여호람 왕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절의 여호세바 - 는 여호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로서 대하 22:11에는 여호사브앗으로 나오는데 그녀는 제사장 여호야단의 아내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달랴가 왕위에 오를 만한 모든 정적들을 제거시키려고 한 시도는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침실에 숨겨 6년 동안 몰래 키움으로써 실패하였다. 그리고 아달랴가 행한 처사는 여호와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는 극악한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윗 왕통을 계속하여 유지시키려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한편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여호세바를 '요사베테'라고 하는데 그녀는 후궁 소생인 요람의 딸이라고 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에대한 구체적인 다른 자료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침실에 숨겨. - 여기서 '침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다르 함미토트'(* )의 해석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성전에 딸린 제사장들의 공동 침실이라는 견해(Luther, Clericus, Vatablus, Hobbs)와 2) 침실로 쓰여지지는 않으나 요나 이불이 있는 궁궐 내의 한 방(Keil, Bahr)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여호세바는 모두 죽이기로 작정되어 있는 왕자들 가운데에서 요아스를 훔쳐냈기 때문에 제사장들의 숙소까지 옮기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두 번째 견해가 더욱 타장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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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가 저와 함께. - 여기서 성전에 숨겨 있었던 사람은 요아스와 그를 위한 유모이다. 왜냐하면 요아스는 당시 갓난 아이였기 때문이다(Wycliffe). 한편 요아스와 함께 한 사람이 여호세바라고 혹자는 주장하나(Thenius) 여호세바가 그곳에서 6년 동안 요아스를 돌보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니다(Bahr). 그리고 그들이 숨어 있었던 곳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하여 성전에 딸려 있었던 방이었기 때문에(왕상 6:5-8; 느 13:5-9) 성전 마당 한 곳에 있는 대제사장의 집, 즉 여호세바의 집에 그들이 숨어 있었다는 카일(Keil)의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성전 마당에 있는 어떤 건물 속에서도 대제사장과 그의 가족이 함께 살았다는 성경 기사가 기록된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에 이를 더욱 뒷바침해준다(Bahr).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 왕자인 요아스가 6년 동안이나 숨어서 살아야 했다는 것은 아달랴가 왕의 씨를 멸하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극악하게 애써왔는가를 보여 준다. 그래도 요아스와 그 유모는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살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차례 아달랴가 성전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대하 24:7)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보존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한편 요아스가 아달랴의 눈을 피해 성전에서 6년 동안 양육받았던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1) 다윗의 씨가 보전됨: 요아스는 다윗의 왕통을 이어야 할 자이다. 그리고 다윗의 왕통이 끊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단은 아달랴를 통해서 다윗의 왕통인 요아스를 죽여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시켜 버리려는 어마어마한 흉계를 꾸몄다. 이러한 사단의 흉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계속되었다(마 2:13-23).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언약의 자녀들에게도(고전 10:16; 11:25; 히 13:20) 사단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어약적인 사랑에서 성도들을 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택함 받은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아무도 없음으로(롬 8:13-39)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승리 하여야 한다. 2) 종교 개혁을 위한 예비 교육: 요아스는 여호와의 전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아(12:2) 여호와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각성을 쌓아갈수 있었을 것이다(12:4-6). 여기서 우리는 교회 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기게 된다(딤후 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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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칠 년에. - 레 25:3-5에 따르면 7년째는 안식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여기서 칠년이란 말은 어떤 사건의 결정을 이루는 해를 가리킨다(F. R. McCurley,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p. 93). 즉 이는 여호야다가 지금까지 준비하고 계획한 요아스의 왕좌 복권 운동의 절정의 시점을 말한다. 이와같이 7일, 7주, 7년이란 기간에서 7은 종종 어떤 사건에 있어서 위기의 정점을 나타낸다(J. van Goudoever). 한편 혹자는 이 칠년에 해당되는 때가 유대인의 삼대 절기, 즉 유월절(출 12:1-28), 맥추절(민 28:26-31; 신 16:9-12), 장막절(레 23:33-43; 슥 14:16-19) 중의 하나라고 이해한다(Wycliffe). 그러나 평행 구절인 대하 23:1-3에서의 '레위 사람과 이스라엘 족장들을 모았다'고 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 중 하나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삼대 절기 기간에는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대성회로 지켰기 때문에 에위 사람과 족장들을 모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호야다. - 이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Yahweh)와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다'(* )가 합성된 것으로서 '여호와께서 아신다'라는 뜻이다. 한편 본절에서 여호야다가 주체가 되어 모든 거사(擧事)를 진행하고 지휘한 것으로 보아 그가 요아스의 왕위 복권 운동의 핵심이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가리 사람들의 백부장들과. - 여기서 가리 사람은 그렛 사람과 동일한 민족이다(대상 18:17). 그런데 이들은 가나안의 서방에 있던 정착민들로 (삼상 30:14) 아도니야의 반역 음모에서 솔로몬을 보호했던 사람들이다(왕상 1:37, 38). 또한 이들은 브니야의 관할하에서 다윗의 심복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삼하 8:18) 일명 블레셋 사람이라고 칭해지기도 했다(겔 25:16). 한편 그레이(Gray)와 몽고메리(Montgomery)의 견해에 따르면 가리 사람들은 왕실을 경호하는 용병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역대기 사가(史家)는 여호야다의 왕정 복고 운동이 순수한 유다의 힘으로 성공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으나(대하 23:3, 4)본서 기자는 이방인이 세력이 혁명군으로 가담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당시의 백부장이라는 지위는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백부장 위에는 천부장이 있었다(삼하 18:1). 호위병.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침'(* )으로서 '달리다'라는 뜻의 동사 '라츠'(*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삼하 15:1; 왕상 1:5).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왕상 14:27절에 개
본다. 1) 이것은 하나님과 다윗 간에 세운 언약에 대한 재다짐이다(삼하 7:11-16). 실제로 7세된 요아스가 죽었더라면 다윗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서운 아달랴의 학살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씨를 보전하셨기 때문에 여호야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움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이처럼 적극적으로 시도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여호야다가 요아스의 정체를 밝히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가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한편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에 대한 사단의 파괴 공작은 아담에게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쉴새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언약에 성실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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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행할 것. - 여호야다는 두 곳에서 군사권을 장악하는 계략을 세웠다. 즉 성전과 왕궁이 바로 이곳인데 전자는 어린 요아스가 거하는 거처일 뿐만 아니라 왕관을 쓰고 기름부름을 받은 곳이기 때문이고 후자는 요아스가 앉을 왕의 보좌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Bahr). 이러한 두 가지 임무는 본문(5-8절) 뿐만 아니라 대하 23:4-7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 여기서 '입번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보'(* )로서 '들어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호위 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시 호위병들은 당번(當番)과 비번(非番)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당번이 근무를 위해서 출근하는 것을 '입번한다'고 하고 비번이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것을 '출번하다'(7절)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왕실 호위대는 각각 100명씩 다섯 부대로 나뉘어져 있었는데(대하 23:1) 이들은 백부장에 의해 지휘 되었다. 한편 안식일의 호위 임무를 위해 들어가는 부대는 이 중에서 세 부대이며 그 나머지 두 부대는 백성들의 치안을 돌보거나 성전을 지켰다(Rawilinson). 따라서 5, 6절은 안식일에 입번한 세 부대에 대한 여호야다의 지시 사항으로 왕궁, 수르 문, 그리고 호위대 뒷문에 각각 1개 부대씩 배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이와같이 왕궁을 수호하게 한 것은 아달랴를 사로잡으려는 의도에서라기 보다는 이제 곧 왕위에 오를 요아스를 위해 왕의 보좌가 있는 왕궁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Rawlinson, Bahr). 이처럼 여호야다가 당시의 이러한 관례를 이용하여 성정에 많은 병력이 배치되는 안식일을 거사일로 잡은 것은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했는지를 알게 한다.

=====11:6
수르 문. - 이 문에 대해서 특별히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수르'(* )라는 말이 '쫓아 버리다', '길에서 벗어나다'란 의미의 어근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장소는 '출구'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왕궁 사이에 있는 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대하 23:5에서는 스르문 대신에 이곳을 '기초문'이라고 적고 있다. 호위대 뒤에 있는 문. - 19절에서는 이곳을 '호위병의 문'아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은 왕궁 동편에 있어서 성전과 마주 대하기 때문에 새 왕의 대관식 때에 왕궁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곳을 매우 중요하게 지키는 장소였다(Bahr). 왕궁을 주의하여 지켜 방어하고. - 여기서 '방어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싸흐'(* )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주장하는 학자에 따라서 다양하다. F. Brown, S. R. Driver, and C. A. 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of the Old Tesament 사전에는 이 단어가 '밀어내다', '찢어내다'라는 뜻의 '나싸흐'(* )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견해를 보이고 있는 데이비슨(Davidson) 사전에도 이 단어의 뜻이 부사적으로 호위병들이 교대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루터의 주장 같이 이 단어가 '방어'를 의미한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Bahr).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지킨다'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다(Ewald, Keil, Furst).

=====11:7
안식일에 출번하는 너희 중 두 대는. - 평일에는 왕궁이 세 부대가 배치되고 성전에 두 부대가 배치되기 때문에 안식일에 출번하는 부대는 두 대나 된다. 한편 이들의 주 임무는 성전에 있는 어린 왕 요아스를 돌보는 것이며 누구든지 그 왕을 해치려 할 때는 즉각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하 23:7에는 유다각 고을에서 모여든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본절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역대기에는 입번한 자들에 관한 언급은 있으나(대하 23:4, 5) 출번한 자들의 언급은 없다. 그래서 본문과 불일치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에 따라 모두 다르다. 1) 혹자는 왕궁 수비에 들어갈 세 부대의 구성원들이 모두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조직되어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출번한 자들이 두 대를 역대기에서는 단지 '모든 백성들'이라고만 밝혔을 뿐이라는 것이다(Keil). 2) 또 다른 주석가는 입번한 세 부대에 관한 본문의 언급은 군인들에만 관한 것이며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Bahr, Rawilnson). 그래서 여호야다의 계획에 다섯 백부장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은(4; 대하 23:1) 모든 호위병들이 전부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 호위병들이 모두 본 계획에 가담하지 않고서는 이 일이 성공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역대기의 기록과 본장의 기록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역대기가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의 움직임을 그 중심으로 기록하였다고 볼 수 있는 반면 본장은 전체적인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Bahr).

=====11:8
왕을 호위하며. - 호위병은 왕의 앞과 뒤에서 호위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본문의 '호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둘러싸다', '부딪히다'라는 의미의 '나카프'(* )에서 온'힉카프템'(* )을 쓴 것이다. 왕의 출입 할 때에 시위할지니라. - 이것은 요아스 왕이 어디를 가든지 그를 둘러싸고 보호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 요아스가 유년의 나이이기에 호기심이 많아 어디든지 가고 싶어했기 때문일 것이다(Rawilnson). 그러나 혹자는 이것이 요아스의 행동 전부에 대해 호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왕이 성전에서 왕궁으로 들어가기까지를 호위하는 것이라고 한다(Bahr, Thenius).

=====11:9
본절에서는 백부장들이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아달랴를 보호하고 그 모든 일에 경호했던 그들이 이제는 요아스를 참된 왕으로 섬기기 위하여 제사장 여호야다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안식일에 입번할 자와 출번할 자' - 란 호위병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엄격히 말해서 호위병들의 다섯 부대 가운데서 두 부대 만을 말하는 것이다(7절).

=====11:10
다윗 왕의 창과 방패. - 이것은 다윗이 직접 사용한 무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전쟁에서 노획한 것들로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성전에 제물로 드린 것이다(삼하 8:7-12). 특히 본절에서 여호야다가 하닷에셀의 신복들에게서 빼앗은 '금방패'(삼하 8:7)를 자신의 의도에 동참한 백부장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다윗 가문을 재건시키는 일을 성취시키자하는 의도'(Ewald, Thenius)에서였다. 따라서 약 300여년 전에 언약의 왕조를 일으켰던 다윗 왕에 의해서 드려진 본 무기를 지급받은 백부장들은 사기가 충천했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하려는 일은 요아스를 통해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야다의 말에 더욱 충성하였을 것이다.

=====11:11
호위병이 각각 송에 병기를 잡고. - 여호야다로부터 다윗의 창과 방패를 받은 백부장들은 다시 그 무기들을 호위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 '호위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침'(* )은 '달리는 자들' 혹은 '경주자들'이라는 뜻으로 전형적인 군사 용어이다. 따라서 이 호위병들이 레위인들과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카일(Keil)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다. 단과 전 곁에 서고. - 여기서 말하는 단은 성전 안에 있는 향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마당 중앙에 놓여 있는 번제단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제사장들과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민 18;3, 7; 대하 23:6).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전은 곧 성전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호위대는 제단과 성전 현관 바로 앞 부분인 뜰의 가장 윗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11:12
면류관을 씌우며. - 삼하 1:10을 보면 이스라엘 왕들은 항상 면류관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면류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젤'(* )은 '멀리 떨어져 있다', '헌신하다', '봉헌하다'란 어근의 '나자르'(* )에서 온 말로 '구별된 어떤 것', '왕관', '화관'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곧 제사장이나 나실인의 헌신, 또는 왕권을 상징하는 왕관을 나타내는 것으로 왕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진 자라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책을 주고. - 여기서 말하는 율법책은 모세 오경 전부가 아닌 십계명만을 가리킨다(Bahr). 그리고 '증거판'(출 16:34; 25:16, 21)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이 십계명은 왕이 왕좌에 오른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주어지기도 하였다(신 17:18, 19). 또한 이것은 왕의 독단적인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백성들을 치리하여야 함을 뜻한다(G. von Rod. "The Royal Ritual in Judah", The Problem of the Hexateuch, p. 222-232). 기름을 부어. - 히브리어 원문에는 여기에 기록된 동사의 주어가 복수 형태로 나타나 있는데 병행구절인 대하 23:11에 따르면 여호야다와 그 아들들이 함께 기름을 부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이유는 여호야다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 열왕기서에서 왕의 등극에 대한 백성들의 기쁨을 표현한 곳은 솔로몬시대 이후(왕상 1:39) 여기가 처음이다. 이것은 요아스로 인하여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새롭게 되었음을 백성들이 공통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혹자는 백성들이 박수하며 만세를 부른 것이 요아스에 대한 왕으로서의 승인과 인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Wycliffe).

=====11:13
호위병과 백성의 수리를 듣고. - 히브리 원문에는 '호위병'과 '백성'이라는 단어 사이에 '그리고'라는 뜻의 접속사 '와우'(* )가 없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필사자의 오류로 실수하여 빠뜨린 것으로 본다(Keil, Bahr, Rawilnson). 그러나 호위병들도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속에 포함된 사람이므로 두 단어를 동격이라고 본다면 접속사 '와우'(* )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Ehrlich, Hobbs). 그리고 이것은 14절의 '온국민'이라는 말과 동일어 일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 아달랴는 바알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였기 때문에 안식일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날에도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 성전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오자 불안한 마음이 생겨 성전으로 달려갔던 것이다(Rawilnson).

=====11:14
본절과 13절에서 묘사된 아달랴의 반응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열왕기서 기자는 여기서 요아스 왕의 대관식과 아달랴의 당황함을 대조적으로 묘사하면서 참왕의 당당함과 거짓 통치자의 패망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이 도래함으로 혼비 백산하는 사단의 모습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 규례대로 대 위에 섰고. - 여기서 '대'로 번역된 '암무드'(* )는 '서다'(stand)라는 뜻의 '아마드'(* )에서 파생된 단어로 집을 떠받치는 '기둥', '두 놋쇠 기둥'등을 뜻한다(삿 16:25, 26, 29; 출 27:10, 11, 17; 왕상 7:15). 한편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알'(* )이 '위'쪽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옆'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루터는 이 부분을 '기둥 옆'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을 전통적으로 지정된 어떤 장소로서 왕을 위하여 특별히 만든 '사열대 위' 혹은 '관람석'(suggestus)이라고 생각한다(Keil, Bahr, Rawilnson). 그에 대한 실증적인 예로 대하 6:13을 보면 솔로몬이 놋으로 대를 만들어 그위에 섰다고 한다. 그리고 본절의 '규례대로'라는 말은 이와 같은 해석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왕이 당시의 규례대로, 즉 왕이 성전을 방문 하였을 대 취하는 습관이나 규범대로 그렇까 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아스 왕은 성전 제단 뜰 한가운데 있는 높은 대 위에 서서 아달랴가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관들. - 4, 9, 10절에 나타난 호위대의 백부장들, 또는 대장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모여든 그 외의 두령들을 포함해서 지칭하는 말이다. 나팔수. - 이것은 '노래부르는 자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솨림'(* )과는 달리 '하사림'(* )의 번역어이다. 이 말은 벌게이트(Vulgate)역에는 '노래 부르는 자들'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분명히 나팔을 부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관리들을 가리킨다(9:13; 민 10:2; 삼하 15:10). 즉 이들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로서 양각 나팔을 불었던 악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Bahr). 옷을 찢으며. - 이는 요람과 같이 큰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취한 행동(6:30)이 아니라 분노와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옷을 찢은 것이다. 반역이로다 하매. - 여기서 사용된 '반역'(* , 케쉐르)이라는 단어는 예후가 사용했던 것으로(10:9) 여호야다가 사용한 '언약'(베리트, * )이라는 말관느 정반대의 것이다. 그리고 아달랴의 이러한

=====11:15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 여호야다가 아달랴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을 반열 밖으로 몰아낸 것은 우상 숭배자요 살인자인 그들의 피로 성전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Rawilnson, Keil & Delitzsch). 한편 '몰아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은 '호치우'(* )인데 이는 '튀어 나오다', '도망가다', '실패하다'란 뜻의 '야차'(* )에서 온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곧 다시 근접할 수 없도록 패퇴시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16
말 다니는 길로 통과하다가. - 성전에서 왕궁으로 통하는 길은 여호야다의 호위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5, 6절) 아달랴는 왕의 말 마굿간으로 통하는 길로 달아났다. 그런데 이것은 느 3:28에서 말하는 '말문'과는 다른 길이다. 즉, 본절의 '말문'은 성전 내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왕궁으로 들어가기가 쉬웠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길은 말을 타고 동편에서 성으로 들어오는 성의 외곽에 있는 문으로서 궁전의 마굿간으로 통하게 되기 때문에 (렘 31:40) 호위병에 의해 제지를 받을 염려가 없다고 아달랴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아달랴는 말이 다니는 길에서 수치스럽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Hobbs).

=====11:17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 여기서 언급한 '언약'은 4절에서 언급한 '언약', 즉 인간 사이에서 그 증표로 나타내기 위해 세운 언약과는 내용상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히브리어 원문에는 정관사 '헤'(* )를 동반하여 '그 언약'이리고 기록하고 있어서 본절의 언약이 모세의 언약이나 다윗의 언약에 대한 새로운 갱신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본절에 기록된 언약은 두 가지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수직적인 언약으로서 여호와의 왕과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둘째는 수평적인 언약으로서 왕과 백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수직적인 언약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출 24:3-8)을 가리키는 것인데 왕과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과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말한다(신 4:20; 27:9, 10). 그리고 수평적인 언약은 왕이 백성을 율법에 따라 다스릴것와 백성은 하나님이 임명하는 왕을 섬기며 순종해야하는 것을 서약하는 행위를 가리킨다(삼하 5:3).

=====11:18
온 국민. -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호야다 제사장을 돕기 위해 유다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말한다(대하 23:2). 바알의 당. - 유다에도 이스라엘과 같이 바알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그러나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 바알 신전은 여호람과 아달랴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여호람의 악행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역대기서에서(대하 21:1-20)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Rawilnson). 한편 혹자는 이 바알 신전이 모리아 산에 있었다고 주장하나(Bahr), 그 정확한 위치를 확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단서는 없다. 그리고 당시 바알의 신전이 여호와의 성전안에 있었다고 하는 견해(Thenius)는 대하 24:7이나 본절을 볼 때 가능치가 않다(Keil & Delitzsch, Vol. 3, p. 363-364). 한편 본절에서 '깨뜨리고'란 말은 히브리어 '쇠바르'(* )를 역한 것인데 그 원뜻은 '산산히 부서지다', '파열하다'란 의미이다. 이는 형체가 없어질 정도로 완전히 으스러뜨림을 가리키는 것이다(레 26:13; 나 1:13). 바알의 제사장 맛단. - '맛단'은 페니키아(두로와 시돈)식 이름으로 그뜻은 '선물'이라는 의미로 추측된다. 이에 대한 완전한 이름은 '맛단 바알', 즉 '바알의 선물'이란 뜻인데 바알의 제사장에게 아주 걸맞는 이름이다. 한편 이것은 페니키아 비문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며 히브리어로 유다의 마지막 왕인 '맛다니야'(24:17)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 여호야다가 성전에 문지기를 세운 것은 1) 율법대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는가를 감독하고(Keil & Delitzsch), 2) 부정한 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대하 23:18, 19; Thenius, Ewald). 이것은 아달랴의 통치기간 동안 정상적인 성전 예배를 드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칫 율법을 범하기 쉬웠기 때문인 듯하다(Rawilnson). 그리고 이 때가 왕의 대관식이 진행되는 중이었으므로(19절) 바알 숭배자들의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목적도 함께 있었음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Bahr).

=====11:19
호위병의 문 길. - 이것은 6절에 있는 "호위대 뒤에 있는 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Rawilnson). 당시 성전은 시온 산에 있었으므로 요아스 왕은 시온 산에서부터 다윗 성까지 호위병들이 경호를 받으며 왕궁 보좌에 이르게 된것이다. 그리고 이미 왕궁에 배치된 3개 부대(5, 6절)는 입궁하는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한편 역대기서에는 본절의 '가리 사람과 호위병' 대신에 '존귀한 자들과 백성의 방백들'이라고 표현해(대하 23:20) 왕을 옹위한 범위를 좀더 구체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Keil & Delitzsch).

=====11:20
즐거워하고...평온하더라. 본절은 아달랴의 학정과 종교적 부패, 그리고 비리 등으로 그 동안 백성들이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백성들이 이 고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기쁨과 평온을 얻었음은 새로운 왕권이 상당히 안정되었다는 것을 반영해 준다. 참으로 불안한 지도자, 불안한 정책하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 역시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미래를 두고서 불안에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요컨데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게 마련이다(잠 29:2).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정의가 넘치고 의인이 대접받을 수 있게 되도록 노력하는 보다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소지해야 하겠다. 한편 여기서 '평온'이란 말은 '조용하다'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싸움이나 전쟁이 없는 안정적인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수 11:23; 14:15; 대하 14:5). 왕궁에서 칼로 북였었더라. - 외형상 본절의 의미가 16절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나 둘 다 왕궁 근처에서 무리가 아달랴를 죽였음을 뜻한다. 열왕기서 기자가 다시 한번 아달랴가 왕궁 근처에서 죽임당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성중의 평온함과 대조시켜서 지금까지 유다를 혼란케 한 장본인이 바로 아달랴임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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