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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엡 6:1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 "주안에서 순종하라" 함은 주님의 뜻에 합의한 한에서 부모의 뜻을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맹목적 순종이 아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부모의 옳지 않은 말을 따를지 못할 때에도 공손한 태도로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렇기에 다음 귀절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지를 공경하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옳으니라 - 옳다고 간단하게 잘라 말한 것은, (1) 부모를 순종함은 므슨 이유를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인류가 직관적(直觀的)으로 옳은 줄 알만하기 때문이며, (2)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 곧, 성경에 부모를 순종하라는 교훈이 많기 때문이다. 출 20:12,21:15-17;레20:9;신 5:16,21:18;잠 1:8,6:20,30:17; 말 1:6; 마15:4-6,19:19;막 7:10-13,10:19;골 3:20 참조.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에게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모든 책임 이행을 총칭한다(Calvin).부모는 어떤 의미에서 그 자녀의 육체적 근원이고(히 12:9),연령과 경험으로도 그들보다 노숙하고 또한 그들의 양육자이나 마큼 존경 받아야 한다. 동양 도덕에도 부모를 공경함에 대하여 양시적으로 어느 정도 옳게 말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미워하면 자녀된 자는 두려워할 뿐이고 부모를 원망하지 말 것이라( 曾子). 간 할 때에 공손히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고, 들어주지 않아도 공경하면서 효도하고, 그의 마음을 얻은 후에 다시 간할 것이다(內則). 세 번 간해도 부모가 듣지 않을 경우에는 자녀된 자는 울면서 부모를 따라 다녀야 된다"고 하였다(原本小學之二)
 위의 동양 도덕은 부모 공경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친다. 다만 그 도덕이 하나님과 관계 없이 가르친 점에 있어서 잘못되었다. 성경은 성경은 신본주의 효행(新本主義孝行)을 말하면서,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2절). 여기 이른 바 "첫계명"(* )이 란 말은 '중요한 계명'이란 뜻이다. 그것에 결부된 약속은 3절이 말해준다. 이것은 모세의 10계명 중 5계명을 말함이다.

 엡 6:3
 잘 되고 -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잘 살게 됨을 가리킨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는 방탕하지 않고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는 고로 하나님께로부터 자연적 축복을 받는다.
 장수하리라 - 효자는 유리방황하지 않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잠 30:17) 그의 수명이 길 것을 가리킨다. 이것도 물론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이다.그러면,효자는 모두 장수의 복을 받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효자도 장수하지 못한 실례가 있다. 우리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의인에게 여러가지 상급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친히 실시 하시는데 그는 그 약속을 기계적으로 이루어가시기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더 좋은 것(예컨대 내세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 장수의 약속(현세의 육의 복)은 이루어 주시기 않는 경우도 있다. 사57:1-2 참조.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러가지 상급의 약속들을 성경에 받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상급보다도 그 모든 약속을 주시고 실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급 약속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분리싶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인격적인 기계적 법칙을 대하듯이 대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주신 종교는 인격대 인격의 종교이다. 우리는 그 어느때나 그 무엇에서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그리해야 된다.

 엡 6:4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 부모된 자들이 그 "자녀를 노엽게"하는 원인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부모들이 자녀를 훈계하되 자기들의 권위와 자기들의 방법, 자기들의 표준을 고집하다가 그 자녀들이 잘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는 혈기와 울분에 끌려서 악담이나 폭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격분케 하는 데 이른다. 부모가 그 자녀에에 자기들의 권리를 남용하여 지도하는 때에는 필연적으로 이런 실패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그 자녀를 교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만이 권위를 가지시도록 해야 된다. 그들은 겸손히 그리스도의 주신 훈계를 그 자녀에게 전해주는 종의 역활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년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을 일체 주님께 의뢰하여 혹시 그 자녀가 불순종하는 때에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온유하게 지도해야 한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녀를 징계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잠언에 말하기를, "책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고 하였다. 잠 13:24 참조. 물론 여기 이른 바 "채찍"은 징계를 비유한다 징계는 하필 구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 다른 방법이 있다. 물론 그것이 사랑과 권위로 규율 있게 실행되어야 하고, 문란과 악독과 혈기로 하면 역효과를 가져온다. 잠19:18참조.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신학 체계가 다른 바르트(Barth)의 견해를 참고하여 보자. 그는 잠언 저자가 말한 "채찍"을 여자적(如字的)으로 간주하고, 신약 시대에는 그런 처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말하였다. 곧, "예수님이 초림하신 시대에 자녀들에게 대한
부모의 할 일은 주로 복음을 증거함이고, 율법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Kirchikche Dogmatik, / 4, 19951, s. 317).바르트의 이말은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에 한 것처럼 자녀들을 율법적으로 엄하게 다스릴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리가 있는 말이니 우리로서 참고할 만하다. 그러나 잠언의 "채찍"이란 말을 비유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그것이 무법한 구타를 의미하지 않는 것이니만큼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문제될 것 없다.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 바울은 그 당시의 노예제도에 대하여 그것의 폐지론을 주장하지 않았고, 다만 노주 간 (奴主間)의 도덕을 고조하였을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 그대로 바로 나타낸 교훈방법이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로 된 인간 사회에는 주관하는 자도 있고 주관함을 받는 자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재능과 천연적 형편에 따라서 피할 수 없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남녀 간의 관계로 보아도 한편은 주장하고 다른 한편은 주장함을 받게 된 것이다(청 3:16). 정당한 의미의 노주 간의 관계도 역시 그런 원칙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상전과 종 사이의 도덕이 개정된다면 노예제도는 자연적으로 개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둘 사이의 도덕을 개정하기 위하여 이 귀절에 가르친다.

 엡 6:6,7
 이 귀절들은 종이 상전을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취할 정당한 심리와 태도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세 가지로 나뉘어 있다.
 (1) "두려워하고 떨며" - 순종할 것(5절). 기독신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는 위에 있는 권위를 무시하거나 책임을 경시하는 육체적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복음적 자유를 오해하고 마땅히 높일 자를 높아지 않는 폐단이 종종 있다.
 (2) "성실한 마음으로" - 할 것(5절). "성실한 마음"이란 말(* )은 단순한 마음을 의미한다. 단순치 못한 마음은 6절에 있는 "눈가림만 하여"란 말이 알여준다. 상전의 "눈가림만"하는 종의 행동은 거짓되거나 아첨하는 행동일 것이다. 재하자(在下者)는 주인의 일을 할 때에 성의 없이 하기 쉽다.
 (3)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 - 는 태도로 할 것(6절). 곧, 무슨 일을 하든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귀한 일인 줄 알고, 중심에서부터 "단 마음으로"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이상과 같은 원칙으로 노력하는 자는 그 수고를 그의 주인이 몰라 주거나 혹은 오해하여도 결코 상심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계속 단 마음으로 노력한다. 그는 장차 주님 앞에서 자기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게 된다는 상급을 바라보므로 역경 중에서도 침묵 정진(沈默精進 )한다.

 엡 6:9
 이 귀절은 상전들도 그 종들을 학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 "이와 같이"란 말(* )은 "그 같은 일들"이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 문구의 의미는 종들이 그 상전의 일을 할 때에 그 행한 대로 주님 앞에서 갚음 받을 줄 알고 행함과 같이, 상전들은 종들에게 대하여 역시 그렇게 행하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 함은 사람의 용모가 잘나고 못난 관계, 권세나 배경이 있고 없는 관계,기타 어떤 육체적 조건에 의지하여 판단함이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 같은 그릇된 판단을 하시지 않느다. 이 세상에서 종들을 부리던 권세 많은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별 수 없이 적나라하게 그 행한 대로만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권세나 지식이나 그 무슨 배경이든지, 사람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을 약하게 하지 못한다.

 엡 6:10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우리 자신에게는 마귀를 이길 힘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해로운 독소들만 가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힘(성령님의 힘)의 공급을 받아야 될 줄 알고 그리스도만 의지해야 한다. "주 안에"는 확실히 승리하게 하는 영력이 있는데, 우리는 대적 앞에서 외축(畏縮)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병통은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음이다. 우리가 주님만 믿으면 언제나 승리한다. 벧전 5:7-9참조

 엡 6:11
 마귀 - "마귀"는 무엇인가? 유 1:6을 보면,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다(H. Bavink, Gereformeerde Dogmatick, , 1910, p.11). 그런데로 바르트는 "마귀는 천사로 있었던 적이 전연 없었다"고 잘못 말하였다(Church Dogmatics 3, s. 531) . 바르트는 또 다음과 같이 잘못 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요소가 이 세계에 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das nichtige)이라고 이름 불리운다....그것은 창조 질서(創造 秩序)안에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 창조 때에 혼돈과 공허 그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는 경역(境域)이다. 그것이 존재는 이 경역 뿐이다. 하나님의 하시지 않는 점(nonwilling)이 바로 그것의 존재 근거이다"라고 하였다(Dogmatics, , 3, ss. 289-353). 마귀에 대한 바르트의 이런 견해는 성경이 밝히 말하는 마귀의 인격성을 부정할 것이다. 성경을 보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창 3:4),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마귀의 궤계 - 여기 '궤계"라고 번역된 헬라어(* )는 간교한 방법을 의미하는데 마귀의 역사는 언제나 그렇다. 예를 들면, 거짓과 참을 섞어 주장함으로 거짓도 통과시키려는 수단(창 3:4-5,22), 성경을 잘못된 뜻으로 인용하여 어떤 주장을 세우려는 행동(마 4:6), 그리스도의 사자처럼 위장(僞裝)하는 것(고후 11:13), 하나님으로 위장함(살후 2:4)과 같은 것이다.(Hendriksen).
 하나님의 전신갑주 - 이 말에 대하여는 13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엡 6:12
 이 귀절은 기독신자의 대적이 무엇임을 밝혀준다. 전쟁에 승리하려면 먼저 그 대적의 내막을 알아서 거기에 대비하여 전략도 세우고, 무기와 기타 여러가지로 전쟁 준비를 해야 된다. 기독신자의 대적은 마귀이다. 그사실을 알아야 (1) 그 대적이 사람보다 강한 줄 알고 영전(靈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며, (2) 보이는 데서보다 보이지 않는 데서 더욱 전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전투는 기도하는 것과 의를 행함에 있어서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마귀가 피할 정도로 심각하게, 진실하게, 또 뿌리 깊이 행하는 것이다.
 혈과 육 - 이것은 인간을 의미한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 이것들은 별명들이다. 이 명칭들을 보면, 마귀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 가를 알 수 있다.마귀의 무리들이 최후 심판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을 한다(요 14:30). 계20:1-3참조. 그놈들의 이름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인 것 만큼 인간계에서 마음껏 악으로 통치하는 일이 어떤 한도까지는 성립되고 있다. 그 동안에 기독신자도 답답함을 느끼며 승리하기 어려울 듯이 느낀다. 그러나
그놈들의 통치는 끝나는 날이 있다. 그 뿐 아니라, 그놈들의 이름이 "악의 영들"이라고 한 것만큼 인간으로서 그놈들을 대적하기 어렵다. 보이는 대적은 파하기 쉬워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원수들을 파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이런 대적들 앞에서 자기의 미약한 인간적 능력으로 싸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 6:13
 하나님의 전신갑주 -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갑옷'이란 뜻이나, 그 갑옷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다.
 악한 날 - 이 말은 이 세상에 관하여 말한다. "악"하다고 한 것은 신자들을 경성시키는 말이다. 그들도 이 세상의 평안에 미혹되어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기 쉬운 것이다.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여기 "능히"란 말과 "행한 후"란 말은 그 영전(靈戰)의 필승 전망(必勝展望)을 보여준다. 신자가 참여한 영전은 자기 힘으로 해야 되는 소망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힘으로 반드시 승리할 기쁜 전쟁이다. 영전에 있어서 신자가 실패하는 원인은 그가 싸우지 않는 데 있다. 그가 마귀로 더불어 화친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면 이기는 법이다. 이 점이 이 세상에 속한 전쟁과 다르다.

 엡 6:14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 "진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하나, 복음은 15절에 있으니 여기서 같은 말이 거듭 나올 리는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복음의 진리로 발생된 신자의 마음의 '진실성'을 가리킨다. "띠"는 옷을 몸에 붙이는 작용을 한다. 그처럼 신자의 진실성은 그 자신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연결시키는 작용을 한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많을지라도 신자의 신앙이 진실하지 못하면 그 많은 선물이 그의 것이 못된다. 사람이 자기를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솔직하게 평가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진실한 행동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의의 흉배 - 여기 "의"는 하나님의 의(義)곧, 칭의(稱義)의 의니, 그것을 흉부로(심장으로)신뢰하는 자는 "흉배"(가슴을 감싸는 갑옷)을 입은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은 자를 정죄할 자는 없다(롬 8:33). 그리스도의 군병된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살전 5:8)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를 신뢰함과 사랑함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군병이라고 할 수 없다.

 엡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 "평안의 복음"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복음'이란 뜻이다. "예비한 것"이란 말은 복음을 진실히 믿는 자의 마음에 평화가 임하므로 그가 복음을 전하려고 갈 때에 험한 길일지라도 문제 없이 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엡 6:16
 모든 것 위에 - 곧, '이상과 같이 복장한 위에'란 의미이다.
 믿음의 방패 -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함이니,그것은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받아 누리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무적(無敵)의
"방패"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믿음으로 그 사건에 대처해야 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가 난제를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로운 길에 서는 것과 우리 자신이 깊이 회개하며 주님의 긍휼을 의지함이다.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 여기 이른 바 "악한 자"는 '마귀'를 가리킨다. 그리고 "화전"은 불에 달군 화살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모든 맹렬한 시험을 비유한다. 이것은 의심, 정욕, 탐심, 허영심,시기 등인데 이것들을 신자를 뜨겁세 찌른다.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이런 화전 같은 시험들을 능히 이기고 범죄하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게 된다.

 엡 6:17
 구원의 투구 - 여기 "구원"은 내세에 완성될 영광스러운 구원을 가리킨다. 그것으로 "투구"를 삼는다는 것은 그것을 소망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소망은 위를 향하여 앙망하는 것이니 머리에 쓰는 투구의 위치에 맞는다. 이 소망은 난공 불락(難攻不落)의 천적(天敵) 안정보장으로 된 것이니, 마귀의 화살이 어찌할 수 없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는 이유는,
(1)그것이 사람의 심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판단하는 까닭이고(히4:12-13)
(2) 그것으로써 마귀를 전멸시키는 까닭이다(계19:21).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가지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모든 일을 바로 분석하면서 전진하는 운동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워나가는 운동이다.

 엡 6:18,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 10-17절에 신자들의 영적 전쟁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되었고, 18절에서는 그 전쟁의 승리가 기도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기도도 전투적으로 빙상한 노력이 동원되옥 있음을 보여준다.
 (1) 총동원한 기도. 18절에 "모든 기도"."모든 기회"("무시"란 말의 헬라어의 뜻),"모든 성도"("여러 성도"란 말의 헬라어의 뜻)란 문구들이 있다. 이것은 보통 때와 다른 전시의 총동원을 생각케 한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결사적으로 기도를 힘써야 된다는 것이 알려진다.
 (2)정미로운 기도 - "성령 안에서 기도함"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기도이고(롬 8:26), "깨어 구함"도 무성의한 것과 반대된다. 그리고 "향상 힘쓰며"라고 한 것은 태만과 방심을 경계하는 말이다. 이런 기도는 정미로운 기도이다.
 (3) 봉공(奉公)의 기도 18절에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부탁도 있고, 19절에 '바울'을 위한 기도 부탁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사욕(私慾)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봉공의 기도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자가 자기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도자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도한 실례들이 많으니, 바울의 기도(고후 12:8), 야곱의 기도(창 28:18-22), 히스기야의 기도(왕하 20:2-3),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 다윗의 기도(시 13:1,22:1), 이 밖에 모든 참된 신자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깊이 하여 왔음을 우리는 안다.

 엡 6: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여 하심이니라 - "쇠사슬에 매인"복음의 "사신"은 겁약해질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담대히" 복음을 증거해야 될 것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쇠사슬에 매인 처지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행 23:11, 27:24). 그러니만큼 에베소교회 신자들의 기도의 원조는 필요하였다.

 엡 6:21,22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 "사랑을 받은 형제."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받은 두기고를 가리킨다. "두기고"의 이름은 행 20:4; 딤후 4:12에도 나왔다. 그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것만큼, 그의 방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기쁨과 힘을 줄 것이며, 더우기 복음을 인하여 쇠사슬에 매인 바울때문에 근심에 잠겨 있는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었다. 바울이 두기고를 그들에게 보낸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이다. 바울의 모든 하는 일이 교회를 위한 것인 만큼, 그에게 대한 그들의 관심은 컷고 또 긴장되어 있었다. 참된 교역자와 영적 교통을 가지는 교회는 언제나 위로와 힘을 얻으며, 피차간 기쁨을 얻게 된다.

 엡 6:23
 믿음을 겸한 사랑 -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라을 믿는 데서 나온(요일 4:10-11)것이니, 기독자의 영적 건전성(靈的健全性)이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에 결핍하기 쉽고, 사랑을 고조하노라고 하다가 인본주의로 흘러서 신앙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를 겸전한 은혜는 귀하다. 사도는 에베소교회의 영적 평안을 비는 동시에, 그들에게 이 두 가지가 겸전되기를 기구(祈求)한 것이다.

 엡 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업이 사랑하는 모든 자 - 이것은 언제든지 하나님만 사랑함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마 22:37). 여기서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나자신이 문제이고 내 가족도 문제이다. '나'란 존재는 하나님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고, 내 '가족'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해도 좋다. 그 사랑이 참 사랑(내 영혼 구원을 위한 사랑)이라면 그것이 하나님만 사랑하는데 방해는 안된다. 내가 죽도록 기도하는 것이 나를 참으로 사랑함이고(욥 27:10),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이 역시 나를 참 사랑함이다(요 14:21). 이런 사랑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내용을 가진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가족도 참으로 사랑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가 가족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정절을 바치는 데 방해가 아니고 도리어 유익하다. 그 기도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든지 이루어지지 않든지 그들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긴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 제일주의이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것도 하나님께 정절(貞節)을 지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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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1장
69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2장
68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3장
67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4장
66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5장
65 디모데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전서 06장
64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1장
63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2장
62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3장
61 디모데후서 박윤선 주석, 디모데후서 04장
60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1장
59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2장
58 디도서 박윤선 주석, 디도서 03장
57 빌레몬서 박윤선 주석, 빌레몬서 01장
56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1장
55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2장
54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3장
53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4장
52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5장
51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6장
50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7장
49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8장
48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09장
47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0장
46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1장
45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2장
44 히브리서 박윤선 주석, 히브리서 13장
43 야고보서 박윤선 주석, 야고보서 0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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