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0:1
칠십인.- 어떤 유력한 사본들(B,D,M,R)은 '72인'이라고 하였다. 즈안(Zahn)은 이
것을 지지했다. 유명한 사본 학자 스크리브너(Scrivener)는 이것을 받지 않고 우리의
한역과 같잇시어있는 사본들 (* ,A,C,L)의 사구를 택하였다.
눅 10:2
마 9:37,38 의 해석을 참조하라.
눅 10:3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마10:16해석 참조.
'이리 가운데로 보냄' 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엔 메소 뤼콘(* )이
니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말 뜻이, '이것은 이리 가운데로 향하여 보냄이 아니
고 벌써 이리 가운데 처한 그들을 보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상히 깨어 있
어야 하겠고 큰 각오를미리 가지고 나가야 된다.'(Zij worden naae,maae verkeeren
reeds te midden van wolven. Dus moeten zij uiterst waakzaam zijn onverzwakt en
steeds met de grootste behoedzaamheid en vooruitziendheid werfzaam zijn.Lucas
l.p.463) 라고 하였다.
눅 10: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마10:9,10의 해석 참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 이 말씀의 뜻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인사 관게의 일로 이곳
저곳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클로스텔만(klostermann)도 말하기를
이것은, '목적지에 가기 전에 복을 전도보다 덜 중요한 일로 인하여 머물러 있지 말라
는 뜻이다.(Lasst euch nicht vor dem Ziel durch irgend etwas minder Wuchtiges
aufgalten.-A.W.S.115)라고 했다. 그러나 바이스(J.Weuss)는 이 말씀의 뜻이, '복음을
전하려고 목적지에 향하여 가는 도중에 전도하느라고 체재하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난 이것은 적합한 해석이 아니다.
눅 10:5,6
이 귀절들의 말씀은, 마 10:12,13의 내용과 같으니 참고.
눅 10:7,8
마10:9,10 해석 참조
눅 10:9
마 4:17 해석 참조
눅 10:10,11
마10:14해석 참조.
눅 10:12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니라.- '저날'은 대심판의 날을 이름이다.
소돔은 옛날부터 악한 도시의 표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는
곳은 그곳 소돔보다 더 악하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는 죄를 고집함이 얼
마나 무서운 죄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예수님의복음을 배척하는 것이 무서운 죄가
되는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이다.(요 3:16; 히10:28,29. 2:2,3)
눅 10:14
마10:21 해석 참조
눅 10:15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이것은, 주님
의 많은권능을 본 가버나움의 교만을 꾸짖는 동시에 그 곳의 슬픈 장래를 탄식하심이
다.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란 말은 그 교만한 태도가 하늘에 닿았다는 뜻이다. 그렇
게 교만한 자는 음부 곧, 죽음과 멸망의 곳으로 떨어지낟. 풀러머(Plum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지금에 있어서 그 도시들의부근 각처가 아주 황폐해졌고 그 도시
들이 있었던 자리들도 알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예언 성취의 한 부분으로 있
다.'(The desolation of the whole neighbourhood and the difficulty of identifying
even the sites of these flourishing towns, is part of the fulfilment of this
Prophecy. The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p.277)고 하였다.
눅 10:16
마 10:40해석 참조
눅 10:17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귀시능마
쫓아낸 일을 가장 큰 권능으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이 말씀이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은, 그들이 귀신을 내어쫓는 거싱 그들의히미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
(권능)으로 되어졌다는 것이다.
눅 10:18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
은 몇가지 있다.
(1)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므로 사단을 이기실 일을 미리 내어다 보시
고 하신 말씀이다. (요12:30-33; 계12:7-9)
(2)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이란 말에 대하여, 데오도레 즈안
(Theodore Zahn)은 말하되, '이것은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할 때에 사단이 인
간을 해하는 권세의 자리에서 떨어짐을 의미한다.(Einen sturz Satans aus seuner
fruher zum Schaden der Menschkeit behauptelen Herrscherstellung.- A.W.S. 420)라
고 하였다.
(3) 칼빈은 말하였으되, '이것은 그 때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 결과에 대하여 비유로
말한 것이다' (Calvuhn oordeelt, dat de heere met dit vers en beeld doelt op
zekere vrucht der Evangelieprediking.- Greuhdanus.Lucas l.p.479)라고 하였다.
우리는 생각컨대, 주님의 마음에는 위의 세 의견이 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눅 10:19
본절은 몸보다 영혼의 생명이, 사단이 주는 모든 앙화에서 놓이게 될 것을 이름이
다. 그러나 그 때의 전도자들은 몸도 그처럼 기적적으로 보호 받은 일들이 많았다. 예
컨데 바울은 독사에게 물렸어도 죽지 않았고 (행28:5-6),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옥에서
나오게 되었다.(행12:7-11)
눅 10:20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 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1) 신자들은 권능으로 귀신이 축출되는
것과 같은 외부적 기사로 기뻐함보다 영혼의 중생, 회개, 신앙과 같은 내부적 기사로
기뻐해야 될 것을 가르친다. 외부적 기사도 무시할 바는 아니나 내부적 기사는 거기에
비교할 수 없이 요긴하다.(2) 신자가, 자기의 전도 사업의성취를 보고 그것을 기쁘가
의 이유로 삼지만, 그것보다 자기 자신의 구원받은 사실 곧,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일
로 인하여 기뻐해야 된다.
눅 10:22
내 아버지께서 모든것을 내게 주셨으니,-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만
을만유의 중보로 삼으사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가 생기게 하셨다. 하
나님께서 모든것을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니 만큼 모든 것은 그리스도에게 직속하고 그
리스도 만이 하나님에게 직속하셨다(고전3:23). 그러므로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만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눅 10:23,24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그 때 제자들이 그(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게 된 것이 얼
마나 복된 것을 말씀하여 주신다. 그는, 하나님 아들이시니 유일하신 중보자시요 구약
시대의 선지자와 임금이 사모하던 분이었다.(벧전1:10-12)
눅 10:25
율법사가 일어나 - '율법사'는 교법사니 율법을 가르치는 학자이다. 일어나 - 이
는 그가 앉았던 좌석에서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이 질문은 그가 예
수님의 종교적 지식을 알아 보려는 교만한 질문이다. 그 질문자는 '무엇을 하여야 영
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으니, 그것은 그 때에 바리새인의 율법관 그대로의 표현이
다. 바리새 종교에 대하여 권위있는 학자 빌레벡(P.Billerbeck)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곧 ' 바리새교에서는 은혜의 원리는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
람과를 양편으로 하고, 사람이 행한 업적을 하나님께서 정가하시는 관계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Dieze officielle Lohnlehre der alten Synagoge lasst naturlich keinen
Raum fureinen Gnadenlohn. Gott ind Mensch dtehen hier als zwei gleichberechtigte
Parteien nebeneinander:der Mensch Prasentiert seine verdienstliche Leisteng, und
Gott erkennt sie an und zahlt den Lihn.-A.W.LV.l.S.491) 라고 하였다.
율법사는, 바리새교의 율법관에 기초한 영생의 도리를 물음에 있어서, 은혜로 되는 길
을 알지도 못하였고, 다만 행위의 값으로 얻는 길을 물은 것이다. 이런 물음에 있어서
수님도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관은 위에 마란 율법사
의 그것과 다르다. 그가 율법의 원리 대로 대답하심은 인간이 융법을 행한 값으로 영
생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며, 혹은 인간이 자력으로 완전히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
도 아니다. 다만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행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그 율
법사더러 율법을 행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하여 책임감이 없는
자는 죄감이 없고, 죄감이 없으면 회개가 없고,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
죄에 대한 신앙이 없다. 신앙이 없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질문
자인 율법사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할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율법을 못지키는 죄인이라는
것을 또한 절실히 체험해야 된다. 그렇게 되기전에는 그는 은혜로 받는 구원을 이해하
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더러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다.
눅 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것
은 신6:5말씀이다. 여기 '다하며'란 말은 진정한 경건의 표준점을 표시한다. 하나님을
서믹는 자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섬겨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 그
렇게 하지않으면 하나님 밖에 다른 것을 위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렇게 죄를 범한
자는 회개의 태도와 행동을 가져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
'마음'이란 것은 인간의 애정의원전이고 '목숨'이란 것은 영혼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
다.'힘'이란 것은 모든 능력과 소유까지도 포괄하는데 '깨달음'혹은 '사상'을 가리킨
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여기 '네몸'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세아우톤(*
)이니 '네 자신' 이란 말이다. 이것은 레 19:18의 말씀이다. 사람을 사랑
함에 있어서 표준은,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무제한의
사랑에서 산출되는제한 있는 사랑의 최대급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모든것을 다 하여야 한다. 그것은 무제한의 사랑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사랑이며 경배
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을위하여 하며 또
'나 자신과 같이' 하여야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 중심하고 자타를 동일시 한 참된 평등
주의의 사랑이다. 자아만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타아 세계의 진리성을 무
시하는 큰 어두움이요, 타아만 사랑하노라 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아를 자포자기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로 말미암아 나타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말살 시키
는 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남을나 자
신 같이 사랑하는 일이 어떤 때에는 나 자신이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로 이루어 진
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남을 위하여 희생하면 자신에게도 유익하고 남에게도 유익한
것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예수님은 율법
을 행하므로 영생을 얻을 줄 아는 그 율법사에게 율법의 원리로 답하셨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사더러 '이(율법)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인간이 자력으
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가능성이 있다고생각하신 까닭이 아니고 다만 인간이 율법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음을 생각하신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더러 그것을 행하라고 하
신 것 뿐이다. 인간은 율법을 행할 책임이 있는 줄을 알아야 자기의 죄책을 깨닫고,
또 죄책을 깨달아야 회개하며 주님을 신앙하여 영생에 이른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것은 그 율법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죄감을 느끼기는 커녕 도리어 자기가 옳은 사람인 듯이 자처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는
마땅히 죄감을 느끼고 질문을 그쳐야 할터인데 뻣뻣하게 질문을 계속한 것이다. 그러
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우대 사람들은 이방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이죽게 되는 때에 그를 구원할 책임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다.(Lightfoot)
눅 10:30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여리고' 는 예루살렘에서 20
여리쯤 되는데 그 길이 험하여 도적이 많다고 한다. 설 헤니커(Sir.F.Henniker)씨도
이 길에서 죽임이 되었다.(Plummer, Commente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Luke,p.286)
눅 10:31,32
피하여 지나가고.-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자비를 일삼는 지위에 있는 자로서
어찌하여 그들은 저 불쌍한 자를 그냥 지나갔는가? 그것은 인간은, 무엇에나 익어지면
그것에 대하여 열심이 없어지는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긍휼의 길 곧, 참된 종교
를 면대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실행할 열심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교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천단한 인간의 근성으로 흘렀다.
하나님의 종교는 너무 깊어서 그것에대하여 우리가 익히 접촉할 수록 거기에서 생소한
방면이 더욱 더욱 발견된다.
눅 10:33
사마리아 인은....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 사랑은 그 출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시작되는 법이다.
눅 10: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이것은, 그가 그에게
있던 비품을 다 내어 봉사한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봉사
를 행해야만 사랑이 되는 줄로 알면 잘못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다하여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사랑하면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눅 10:35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데나리온'은 로마의 돈 이름이니 노동자의 하루
품 값이다. 이 귀절의 말씀은 , 그 사람의 지구성있는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그
강도에게 맞은 자를 구조할 장례의 대책까지 확립하였다.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 - 이웃은 거주하는 장소의 근접으로 성립되는 것
이 아니며 반드시 혈통의 인연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웃의 성립 요소는 오직 사랑
이다. 우리가 누구든지 참된 사랑으로 사랑하면 거기에 이웃 인연이 생기는 법이다.
눅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지금
에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있었다.(눅9:51). 여기 말한 '한촌'은 확실히 '베다
니'란 촌을 가리킨 것이다. 바이스(Weiss)란 학자는 말하되, '이 역사담을 여기 놓는
이유는, 이 윗기사가 가르친 이웃 사랑보다 예수님의 말씀듣는 거싱 더욱 중요함을 가
르치려는 까닭이다.(Well sie in Gegensatz zu der vorigen Erzahlung, welche die
Nachtstenliebe empfiehlt, alles Gewich auf des Horen des Wortes Jesu
legt.-D.Neue Test. I.S.357)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는, 이 기사를 비유라고 하여 마
로다는 유대인 기독교를 가리키고 마리아는 이방인 기독교를 상징한다고 한다.(A
Loisy, Judeochristianisme et hellenochristianisme, selon leur caractere et dans
leur rapport mutuel. qui font pas deux partis ennemis.-L.Ev.sel. Luc.1924,p.310)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의 본문을 비유로만 보는 그릇된 견해이다.
눅 10:39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리아가 아
무런 육신적 수고는 하는 것도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있는 것은, 아무런 봉사
도 안하는가증스러운 태도와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귀한 태도이다. 예
수님은 무엇보다도 그의 말씀을 잘 청취하여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요구해야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없으면 사람은 멸망이다.
눅 10:40
마르다는 영적으로 은혜받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사무에만(비록 봉사하는 사역이지만)치중하다가 그 심령이 고로운 지경에 빠져 불평하는데 이르렀다.
눅 10:42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르다는, 많은 일
하는 것이 장한 줄로 알고 다사 주의를 취한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
하는 것이 많고 적은 것을 생각하심보다 사람들이 각각 그 직분을 지킴에
분명해야 할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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