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1:1,2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 여기 "회막" 이란 말의 히브리어
(* )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는 장막"이란 뜻이다. 이 일에 있어서 주동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제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모든 진리를 계시(啓示)하셨다. 그가 이 때에 모세를 부르셨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역시 기독교의 계시 성격을 보여준다. 기독교의 계시 성격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만큼 객관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뜻 밖에 하나님께서 그 종들을 불러 주신 결과이고, 인간의 명상(冥想)이나 연구에서 생긴 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절대로 믿을 만하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 여기 "예물"이란 말의 히브리어(* )는
보통 예물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말함이다.(S.R. Hirsch).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무슨 예물이든지 가지고 나오도록 되어 있다.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 우리는 여기서 구약의 제사법에
있어서 제물의 성격이 이렇게 유순한 것으로 성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소나 양은
인류에게 가장 많은 봉사를 할 뿐 아니라, 그 성질이 극히 선량하다. 이것들은
그리스도를 비유한 것이다. 엡 5:2에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탄생하신 곳은 생축이 거처하는 외양간이었다(눅 2:7). 그는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낮아지셨다. 구약 시대에 짐승을 잡아 피를 제물로 바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제도였다. 특별히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게 각각 제물을 드렸다. 이 일에 있어서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悅納)되었으나 가인의 것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결과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성경의 말씀으로 밝힐 수 밖에 없다. 히 11:4을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바쳤다는 것이 그 열납된 원인이지만, 겸하여 더 나은 제사(제물)를 드린 점이 역시 그 원인이기도 하다. "더 나은 제사"(제물)란 것은 믿음의 태도만을 말함이 아니고, 제물의 합당한 성격을 가리킨다. 그러면 제사 드림에 있어서 신앙만이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객관적인 예배 방법도 필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믿되 옳게 믿어야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
그러면 생축으로 제물을 삼는 제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제정된 것은 확실함(시 50:5). 그 제사의 의미에 대하여 옛적 사람들의 이해 정도보다 그 제사 제도를 성립시킨 언약 성격이 더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권위를 배경하고 생기는 법이고, 또 그 효력을 발생한다. 시편에서 종종 강조하는 것은 참 제사의 외부적 의식보다 신자의 내부적 신종(新種)이다(시 50:9-15).
(2)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는 예전적(禮典的) 성격(Sacramental Character)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음. 육신을 입은 인간은 영적 사실들에 대하여(또는 미래의 사실들에 대하여) 예전적 성격 있는 것으로야 취급 할 수 있다. 예전은 상징에 의하여 영적 사실들을 표현시키는 하나님의 제도를 말함이다. 포울 틸리키(Paul Tillich)는 존재론 신학자이면서도 이 점을 강조하여 말하기를, "개신교는 종교의 예전적 성격을 심각하게 취급해야 된다. 종교에 예전적 성격이 없어진다면, 보이는 교회도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The Protestant Era, Chicago, 1948, p. 94). 구약에 포함된 제사 제도는 예전적 의의(意義)를 가진다. 히 9:9에 말한대로,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라고 한 말씀이 이 뜻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의 제사 제도를 가리켜 "육체의 예법"이라고 하며, 그것을 신약의 영적 제도에 대한 표호라고 하였다. 그는 구약의 제도와 다르게 신약의 제도는 양심적 또는 영적 성격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신약이 구약과 달리 내부적 성격 있는 것임을 지적하는 표현들이다(롬 7:14; 히 9:1, 8:2). 다음에 나오는 표현들도 구약의 예전적 성격을 표시한다. 곧, 시온산(하늘산)에 대조되는 "만질 만한 산"(히 12:18, 22), 은혜에 대조로 "식물"(히 13:9), 생축에 대조로 "입술의 열매"(히 13:15), 육체와 상관된 계명의 법에 대조로 "무궁한 생명의 능력"(히 7:16) 등이다.
레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 구약 시대에 이렇게 하나님 앞에 봉사한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을 예표한 것이다. 히 8:5에 말하기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하였고, 히 9:10에는 말하기를,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고 하였다. "번제"란 말의 히브리어(* )는 "올라감"(上昇)을 의미한다. 이 제사의 특징은 그 제물된 생축(양, 염소)을 제단 위에서 완전히 태우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전적으로 희생되실 것을 비유한다(엡 5:2). "흠 없는 수컷"은 제물의 완전성을 가리킨 것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비유하는 생축은 이렇게 완전해야 될 것이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이 부패하여 불완전한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따(말 1:6-8, 13-14).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에는 완전한 예물, 곧, 흠 없는 수컷으로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려야 한다.
출 1:4,5
여기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된 소를 친히 죽여야 될 것을 말해준다.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 그가 그 희생의 머리에 안수한 것은, 자기의
죄악을 그 짐승에게 전가(轉嫁)시킴을 의미한다(16:21). 특별히 여기 "안수"란 말
(* )은, "그의 손을 단단히 누른다"는 뜻이다. 이렇게 그의 무거운 죄악은 전적으로 희생 제물(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에게 실리운 것이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 하나님께 제사하는 자가 이렇게 친히 제물된 생축을 죽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도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으니,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으므로 결국 우리가 그를 죽인 셈이다. 히 6:6 참조
레 1:5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
제물은 제사 드리는 자가 예비하였으나, 제사를 집행하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고 제사장이다. 이렇게 죄인은 하나님께 직접 접촉할 수 없었다.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仲保者)가 절대 필요하다. 우리의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제물 드리는 일을 집행하여 주셨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님을 절대로 신뢰해야 된다. "피를...사면에 뿌린"것은, 제물 드리는 일도 피 공로를 앞세우고야 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 때에 생축의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했다. 히 9:22에 말하기를,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레 1:6-9
여기 "단 위에 불"은 하나님의 공의(公醫)를 비유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의 죄값을 요구하며, 또한 그 요구를 채우므로 만족함이 되어야 한다. 그 불이 제물을 태운 것이 그 뜻이다.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 "화제"란 말은 "불로 태우는 제사"란 뜻이다. 그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함은 비유적 언사이다. 엡 5:2 참조. "향기로운 냄새"란 말의 히브리어(* )는, "안식의 냄새"란 뜻이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진노가 만족함이 되어서 안정된 상태를 말함이다.
레 1:10-13
"양이나 염소"가 제물로 채택된 이유에 대하여는 위의 2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흠
없는 수컷"에 대하여는 3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 생축을 잡는 곳으로 "단북편"을 택한 것은 편리를 위하여 그리한 것이다.
레 1:14-17
새의 번제 - "새"를 번제물로 바치는 자는 극빈자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도 그
생활 정도에서 가능한대로 제물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 사람의 생활 정도에 따라 제물을 배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고 각기 그 정도대로 즐거이 바치는 것을 기뻐하심이다(고후 8:12, 9:7). 비둘기도 그리스도의 사역 성격을 비유한다. 눅 2:24 참조. 이렇게 제물로 택함이 된 동물들은 인간의 지배 아래 있는 유순한 것들에 국한되어 있다. 맹수(猛獸)들은 제물이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제물을 택한 원리는 신령한 뜻을 가지고 있다. 제물로 택함 받은 생축들이나 새둘은 모두 유순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덕을 상징한다.
그 머리를 비틀어 끊고 - 이것은 폭력으로 비참스럽게 살해(殺害)함을 말한다. 이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참할 것을 예표한 것이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