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증언 (요한 1서 1:1-4)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히브리서 저자의 경우와 같이) 이것은 아마도 자신의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수신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려는 것보다 기록되어진 내용의 명백함과 중요성으로 독자들이 감동받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아래와 같이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Ⅰ. 사도는 중보자의 인격의 특이성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가장 큰 주제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와 목적이 되며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키는 유일한 접착제와 시멘트가 된다. 그는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분이시며 또한 이 세상에 이미 나타나신 분이시다.
1. 그는 "생명의 말씀이시다"(1절). 복음서 안에서는 생명과 말씀이 구별되어 기록되었다. 즉 먼저 "말씀"이라고 일컬은 다음에 "이지적인" 생명임을 암시하면서 "생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유효하게 또는 목적에 합당하도록) 사람들의 빛이었다."(요 1:4). 여기에서 말씀과 생명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즉 "생명의 말씀"이라고 결합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다른 사람의 말씀이 됨을 뜻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곧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말은 말하는 이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혹은 단어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구변)임이 확실한 것같이(비록 동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말씀이 되시는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소리 혹은 텅빈 logoj proforikoj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이심이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다.2. 그러므로 그는 "영원한 생명"이시다(2절). 그의 존속 기간은 그의 탁월성을 나타낸다. 그는 영원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성서에 나타낸 대로 없어서는 안 될 본질적 혹은 비피조물적(uncreated) 생명체이시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본문에서 말하였다. 또 그가 "영원으로부터"란 말로 표현한 것을 보아 그리스도가 태초에 또는 태초로부터 있었음을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로 그 때는 세상의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또한 그리스도의 현현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을 그 때를 말한다(요 1:2, 3).
3. "이 생명이 나타난 바" 되었다(2절). 다시 말해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영원한 생명은 인성을 지니고 또한 살과 피를 입고(완전한 인간성) 우리 중에 거하시며 우리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요 1:14). 영원한 생명(영원한 본질적인 생명을 지니신 분)이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과 함께 화해하기 위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찾아 오셔야만 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참된 복종과 사랑이 있다.
Ⅱ. 사도 요한은 자신과 그의 형제들이 이 세상에서 중보자가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증과 확실한 확신을 가지고 본 서신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임재의 실재성과 자신을 계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탁월성과 권위를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생명" "생명의 말씀" 또는 "영원한 생명"과 같은 이러한 것들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또는 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타나진 생명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생명은 육신을 입음으로, 격하된 인간의 모습과 기질을 취하게 되었고, 또한 생명의 존재와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 주었다. 거룩한 생명 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났으며, 또한 제자들의 오관을 통해 그 자신을 명확히 보여 주셨다.
1. 그들은 그에게서 직접 들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들은 바"라고 했다(1,3절). 사도들은 단순히 그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이르신 모든 말씀을 친히 듣고 이해하고 있었다. 삼년 이상을 그의 전도 여행에 함께 동참하여, 그의 설교와 강해(집안에서 그들에게 행하여진)의 청취자가 되었고, 이전에 어느 누구도 말한 바가 없었던 그의 말씀에 크게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거룩한 말씀은 귀를 동원시켰으며 그 귀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데 헌신할 수 있었다.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대행자들이며, 또한 그를 본받는 자들인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지녀야 한다.2. 그들은 눈으로 보았다. 즉 그들의 "눈으로 본 바"다(1-3절).말씀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말씀에 의해 나타나는 바 모든 것을 원근각처에서 공개적으로 혹은 비공개적으로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보았다. 즉 변화 산상의 사건, 십자가에 달리심, 피 흘리심, 죽으심과 또한 무덤을 깨시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을 우리는 보았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귀로들은 증인일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본 증인이기도 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1, 22)고 하였고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고 하였다.
3. 그들은 내적인 감각, 즉 심령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한 바"라고 하는 구절은 이런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바 "눈으로 본 바"와는 구별된다. 이는 사도가 그의 복음서(요 1:14) 가운데서 "우리가 영광을 보니(eqra umrqa)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한 경우를 들어 말할 수 있다. 말씀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본 바를 이성적으로 추리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너희에게 전한 이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 인식하고, 깊이 생각한 것이요, 그리고 주시한 바니라." 오관은 마음의 통보자가 되어야 한다.
4. 그들은 손으로 그를 만졌다. "곧 생명의 말씀은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만지고 느낀 바)니라." 이것은 주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몸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몸의 성질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사도에게 나타내었음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심은 아마도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만지도록 허락하시기 위함인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마가 자신의 입은 상처와 흔적을 보고 또한 만져 보기 전까지는 즉 그의 불신앙과 형식적인 결단으로는 믿음에 이르지 못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 다음 모임 석상에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불신앙적인 도마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 것 같다. 이 사실은 "우리의 손으로 생명의 말씀을 만진 바라"고 한 말을 보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생명과 말씀은 결코 감각의 증거를 무시하지 않는다. 감각은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바 또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실 때 사용하시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우리 주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온 세상에 더욱 열심히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의 모든 사도들의 감각을(될 수 있는 대로) 충족시키는데 관심을 가지셨다. 복음을 듣는데만 치중하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언급되어진 놀라운 사건의 다양성과 그 표현과 반복, 즉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3절)이라고 한 반복에 대한 이유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언급된 표현의 타당성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사도들은 그러나 달콤한 감각에만 도취하여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감각을 통하여 지각의 깨우침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들의 이성과 판단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독교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감각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4:14).
Ⅲ. 사도는 기독교의 진리와 교리에 대한 확실한 반응과 확증을 가지고 본문을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의 대목을 위해 증거를 제시하였다. 즉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였으며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하였다"(2,3절)고 하는 확신 있는 말이다. 사도들은 세상에 기독교의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확신한 바를 제자들에게 전하기에 이르렀다.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의 교리가 단순히 개인의 공상의 산물이나 또는 간교하게 속임수로 꾸며진 이야기가 아님을 그들로 하여금 증거 하도록 강요하였다. 확실한 진리는 그들의 입을 열게 하였으며, 또한 공개적인 신앙 고백을 강요했다.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 이것은 이미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제자들이 충분하게 확신할 수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제자들은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체 높은 신앙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확신은 빛을 두려워하거나 또는 가장 슬기로운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확신은 마음과 양심에 합리적인 확신과 확고한 신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1, 2).
Ⅳ. 사도는 이 거룩한 신앙을 요약하여 그들에게 전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함으로 본서를 시작하고 있다.
첫째,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과 함께(사도를 자신과 함께) 동일한 축복을 나눌 수 있는 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는 하려 함이라(3절)." 사도는 교회 안에서의 개인적인 교제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차간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으나 그 가운데서 지속될 수 있는 교제와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곧 그것은 하늘나라와의 교통으로, 내세에서 오며 또한 내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너희로 하여금 우리의 특권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이것을 전하며 증거하노라." 복음의 정신은(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모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과 친교가 있음을 안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차이와 특이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사도로부터 가장 이름 없는 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에게 속하는 친교(혹은 특권과 유업에 대한 일반적인 참여)가 있다.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이 있는 것과 같이 그 믿음을 위엄 있게 하며 또한 영화롭게 할 동일한 보배로운 약속과, 이러한 약속을 풍요하게 하며 성취케 할 축복과 영광이 있다. 지금 신도들이 이러한 친교를 사모하도록 하기 위해 친교의 수단이 되는 믿음을 굳게 잡고 이를 유지하도록 하며, 또한 사도들 자신이 친교와 사랑의 진보를 위해 과연 친교란 무엇이며, 그 친교는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우리의 사귐(친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다"(3절).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복된 관계 안에서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축복과 그들과 함께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또한 아버지의 아들과 함께(요한 2서 3절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나누는 친교가 있다. 우리는 앞으로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며, 하늘의 영광 가운데 그들과 함께 즐길 수 있을 전조 또는 증거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다. 지금 계시된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세상을 떠나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함께 복된 친교를 나누도록 하려는 것임을 알자. 영원한 생명이 육신을 입은 궁극적 목적은 우리로 아버지와 또한 아들과 더불어 친교를 나눔으로써 영생을 얻는데 이르도록 하려 함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거룩한 직분의 크나큰 위엄과 권능을 행사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 사는 자들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신령하고 복된 친교를 나누지 못할 수밖에 없다.
둘째, 신자들의 거룩한 기쁨이 충만되고 더욱 증진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것을 말함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4절). 복음이 주는 것은 공포나 슬픔 또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과 기쁨이다. 공포와 놀라움이 시내산에 넘칠 것이나 시온산에는 우리 안에 이룩된 "영원한 말씀"과 "영원한 생명"으로 찬양과 기쁨이 가득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인간에게 기쁨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찾아 구원하려 오신 것과 그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충분한 속제물이 되어 주신 것, 죄와 죽음과 지옥을 정복하여 주신 그가 아버지께 우리의 중재자와 대변자가 되어 주신 것, 더욱이 그의 고난받는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오심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 계시의 능력과 목적에서 벗어나 사는 자들은 모두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상속자로서 하나님과 복된 관계에 있으며 사랑받는 그리스도의 지체와 상속인으로서 아버지의 아들과 복된 관계에 있으며, 또한 죄의 용서함, 성품의 성화, 그의 택하심 그리고 하늘로부터 주님이 재림하실 때 나타나게 될 은혜와 영광에 대한 소망으로 기뻐해야 한다. 자기들의 경건한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면 누구나 다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행 13:52).
빛 되신 하나님 (요한 1서 1:5-7)
복음의 창시자에 대한 진실성과 위엄을 선포한 후 사도는 신앙 고백자들이나 이 영광의 복음을 공공연히 기쁨으로 수락하는 자들을 위한 참고와 확신을 위해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내게 하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와 기사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Ⅰ. 여기에 사도가 주 예수로부터 온 것이라고 확언하는 바 메시지와 기사 내용이 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들은 소식이다"(5절). 사도들과 사도적 사명을 지닌 목회자들은 주 예수를 위한 전령들이다. 주 예수의 정신과 메시지(소식)를 세상과 교회에 전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영광이 된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주께서 메시지를 선포하신다는 것은 예수가 지니신 지혜의 섭리의 결과이다. 인간성을 지닌 그는 흙으로 지어진 그릇을 영화롭게 하셨다. 사도들의 소망은 신실해지는 것이며 또한 그들이 부여받은 사명과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받은 것은 꼭 나누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즉 "우리가 저희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라." 생명의 말씀과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비롯된 소식은 기쁨으로 받아야만 할 소식이다. 뚜렷한 하나의 사실은 (우리들이 섬기고 있고 또한 열심을 다해 사귀기를 열망하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조금도 어두움이 없으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빛으로 말미암아 나타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완전함의 모든 것이 된다. 그는 순수한 열성과 결백과 지혜와 거룩, 그리고 영광의 본체이시다. 한편 그의 탁월성과 완전성은 절대적이며 또한 완전무결한 것이다. 결함이나 불완전함이 없으며 가장 탁월한 것에서 이완되었거나 이에 상반되는 것으로 혼합된 것도 없으며 가변적인 것이나 또는 어떠한 부패의 수용도 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5절). 이는 우리들이 모방하고 있는 혹은 복음의 역사로 우리에게 보다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도덕적 성품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그는 거룩한 성품과 절대 순수한 뜻, 통찰력 있는 지혜(특별히 심령을 보시는), 그리고 보다 밝고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경계하며 공의를 실천하신다. 이 어두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순수하고 전한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헤아릴 길이 없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본체를 완전히 우리에게 일깨워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오직 주 예수뿐이다. 곧 "아버지의 품속에 있고, 또한 그가 나타내신 바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성의 빛에 가장 부합되며 세상 최고의 관리자와 통치자와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명에 가장 부합하고 보다 고상하며 합리적인 설명을 해 주는 것이 기독교 계시의 특이한 점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는 말보다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해 보다 부합하며 함축적인 표현이 또 어디 있겠는가?
Ⅱ. 이 메시지와 기사 내용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된 결론, 즉 신앙 고백 자들이나 이 복음을 공공연히 기쁨으로 수락하는 자들의 참고가 되며 확신을 주기 위한 올바른 결론이 있다. 이 결론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하나님과 참된 사귐이 없는 신앙 고백자에게 대한 결론은 이러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 것이다." 성서적인 근거에서 볼 때 행한다는 것은 그 삶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는 한 도덕적인 인생의 길을 설립하고 걸어갈 수 있음을 말한다. 어두움에 행하는 것은 거룩한 종교와 반대되는 삶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참된 신앙의 경지에 도달하여 기쁨을 누리는 자처럼 자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비신앙적이며 비도덕적이며, 또한 불결하다. "사도는 이러한 자들의 거짓을 밝히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곧 그들은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들과는 거룩한 사귐이나 교제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빛이 어두움과 함께 사귈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들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수도 없고 또한 그에게 접근할 수도 없다. 그들의 고백이나 행실에 진실이란 없으며 그들의 행실은 그들의 고백과 구실이 거짓임을 폭로하며 또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허위성을 드러낸다.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에게 확신과 위로를 주기 위해 제시된 결론은 아래와 같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는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다." 축복의 하나님이 영원한 빛이며, 그로부터 온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상의 빛인 것처럼 성도들은 우리의 주위에 나타나 온 세계를 두루 비치는 큰 발광체가 된다. 믿음과 행실이 일치된 생활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자들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고 성령을 받았으며 그들의 심령에 거룩한 표나 형상이 찍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게 되는데, 그들은 우리와 함께,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한 그들과 우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교제 중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다. 우리에게 이루신 아름다운 교제 중 하나는 그의 아들의 피와 죽음이 우리를 위한 것이 되었다는 것 즉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 곧 영원한 아들은 육신과 피를 지니시고 인간이 되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또한 그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기 위하여 죽었다. 그의 피가 우리의 모든 원죄와 자범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우리는 의인으로 서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죄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그의 피가 우리를 위해 거룩한 능력을 행하셨다(갈 3:13, 14).
자백과 용서 (요한 1서 1:8-10)
Ⅰ. 이러한 거룩한 영적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 그들에게는 죄가 있다고 사도 요한은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계속 정당화하며 죄를 부인하는 자들이 당할 무서운 두 가지 결과를 말하고 있다.
1.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다"(8절).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부인하거나 변명하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들은 구속의 은총을 더욱 높이 평가하며 또한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인임을 거부하면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아니하다. " 즉 그러한 부정(죄인임을 거부하는 것은 거짓을 말함이다.)에는 죄에 상반되는 진리나 혹은 믿음의 진리나 그 어느 것이든 우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종교는 이러한 죄를 지은 자 또는 아직도 다소의 죄가 그들 안에 거하고 있는 자들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 회개하며 죄에 대한 수치심과 감사의 생활이며, 구세주에 대한 사랑과 신자들이 종국에 가서 충만하게 주어질 축복과 죄가 영원히 사멸될 구원의 날에 대한 희망찬 기대 속에서 사는 생활이다.2.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10절). 죄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충분하리 만큼 세상 죄를 들어내었고 또한 그 죄에 대해 혹독한 심판을 가하였다. "그리고 주께서 자기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자기 스스로 이렇게 결정했다). 인간들을 위하여 나는 또 다시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그가 그 후에 행한 것과 같이)고 하셨다. 그 이유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창 8: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계속적으로 고백하며 또한 희생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든지 또한 죄를 행치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우리의 마음속에 꼭 지녀야 하며 또한 우리의 심령에 놀라운 변화를 이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게 된다.
Ⅱ. 사도 요한은 죄의 계속적인 용서를 받는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
1. 용서를 받기 위해 행해야 할 바 의무는 우리가 죄를 자백하는(9절) 일이다. 죄를 통회 자복하며 또한 그 죄를 인정함은 신도의 임무요, 죄에서부터 구원을 받는 수단이 된다.2. 그렇게 하면 축복된 결과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다. 기쁨과 희망은 성도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진실과 의로움 그리고 자비하심이다.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9절). 하나님은 그의 언약과 말씀을 이행하심에 신실하시다. 이로써 하나님은 회개하며 믿고자 하는 신앙 고백자들에게 대한 용서를 약속하셨다. 희생제를 준비하신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또는 자신의 영광에 대해서도 의로우신 분이다. 이로 인해 그의 의로우심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에서 나타났다. 이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보내 주셨을 뿐 아니라, 그를 통하여 오는 자마다 다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바 그의 아들에 대해서 의로우시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사 53:11)는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그는 심히 통회 자복하는 자에 대해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그의 죄를 사해 주시며, 모든 불의에서 그를 깨끗게 하시며 또한 때가 이르면 죄의 권세와 행실로부터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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