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골로새서 1:1,2)
Ⅰ. 이 서신의 서론은 다른 서신들과 대부분 같다. 이 서신만의 특징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부른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수상과 같은 그는 직접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으며 그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주어진다. 그의 직임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공적, 힘, 혹은 재능에 의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그의 선한 뜻에 의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사도로서 그의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가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2. 그는 자신이 위임받은 일에 디모데를 참여케 하였다. 이 일면은 그의 겸손의 또 다른 실례이다. 그리고 그가 다른 곳에서는 그를 그의 아들이라고 불렀지만(딤후 2:1) 여기에서 그는 그를 그의 형제라고 부른다. 이것은 나이 먹고 탁월한 사역자들이 자기들보다 젊고 알려지지 않은 사역자들을 그들이 형제로서 대하며 그리고 친절과 존경으로써 그들을 대하라는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다.
3. 그는 골로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모든 선한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서로 형제들이다. 그들은 서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에 대하여 그들은 성도다워야 한다. 즉 그에게 존귀를 돌려야 하며, 그리고 그의 은혜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로서 그리고 인간 관계는 형제로서 대함에 있어서 그들은 신실해야 한다. 신실성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징이어야 하며 그들의 제반 관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야 한다. 신실성은 그리스도인 모두의 면류관이며 영광이다.
Ⅱ. 사도적인 축복은 여타의 서신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오직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는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 즉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그리고 그것을 모든 복된 열매들이 있기를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온갖 영적 축복이 그에게 있기를 기원한다. 이러한 영적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의 서신에서 보았듯이 혹은 각각으로부터 따로 주어지기도 한다.
바울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감사와 기도(골로새서 1:3-8)
본문에서 그는 본 서신의 주제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본론은 그가 그들에 관해서 들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림으로 시작한다. 비록 그가 그들과 개별적인 안면이 전혀 없었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보고에 의해서 그들의 상태와 성격을 알 뿐이었지만 그는, 그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1. 그는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즉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그들을 위한 기도에서 그는 그들로 인하여 감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감사는 모든 기도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뻐할 일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이 우리의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1. 그가 감사를 드린 대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우리의 감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모든 것이 주어지는 하나님으로서(그는 기도는 물론 감사의 대상이시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바라 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는 물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가 그를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로서 또한 그의 하나님인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남께 아뢰일 때에 우리에게 힘이 되는 사실인 것이다(요 20:17).
2.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임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라"(4,5절). 믿음,소망,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세 가지 주요한 은혜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는 우리의 기조와 감사에 중대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1)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즉 그들이 그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자기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또한 예수 사업에 그들의 영혼을 투여하게 된 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2) 그들의 사랑에 대해 감사했다. 모든 사람에게 당연한 일반적인 사랑 이외에, 그들에게는 성도들 혹은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이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사랑이 있었다(벧전 2:17). 우리는 사소한 차이점들과 많은 실질적인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고 모든 선한 자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사랑을 베풀고, 선한 의도를 가져야 한다. 어떤 이들은 본문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궁핍한 성도들에 대한 자선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한 지엽이요, 한 가지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3) 그들의 소망에 대하여 감사했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5절) 때문이라 하였다. 하늘 나라의 행복이 그들의 소망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행복은 복된 소망이기 때문이다(딛 2:13).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저축되는 것은 더욱 많다. 우리에게는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하늘의 소망이나 장래의 영광에 대한 그들의 기초가 잘 되어진 기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리가 저 세상에서의 상으로의 보상에 우리의 소망을 확고히 할수록 우리는 선을 행할 모든 거리마다. 우리의 땅의 보화에 대하여는 더욱 구애되지 않고 가볍게 여기게 될 것이다.
Ⅱ. 이들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후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은혜의 매개체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매개체는 복음의 진리였다. 그러므로 그는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었느니라"(5절)고 하였다. 그들은 복음 진리의 말씀 가운데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이 소망"에 대하여 들었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은 진리의 말씀이며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게 우리의 불명의 영혼을 내 맡길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복음은 진리의 하나님과 진리의 영에게서 나온 것이며 또한 신실한 말씀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진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말씀"(6절)이리고 부른다.2. 이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큰 긍휼이다. 왜냐하면, 그것에서 우리가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영생은 복음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다(딤후 1:10). 그들은 복음의 진리의 말씀에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에 대하여 들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란다(6절). 즉 이 복음은 타 민족들 가운데서도 전파되고 열매맺었고 그것이 또한 가서 모두 족속에게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위탁에 따라 온 세상에 이른 것같이 너희에게도 이르렀도다"라고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에 순종하며 그것에 따라 그들의 삶과 생활 규칙을 형성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는 가르침이 처음에 전파되었고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말씀하셨다.
(2) 복음이 이르는 곳은 어디서나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에 이르는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이 "너희 중에서와 같이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6절)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복음의 위로와 은혜를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복음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면 그와 같이 그것은 다른 이들 속에서도 열매를 맺는 것이다.
Ⅲ. 그는 그들을 믿게 한 사역자에 대하여 또한 말씀한다(7,8절).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니라." 바울은 그들이 그를 사랑하게 하고자 에바브라를 크게 존경하여 말한다.
1. 그는 에바브라를 함께 종된 자라고 부른다. 이 말은 자신과 그가 다 같은 주인을 섬길 뿐만 아니라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사도요 다른 한 사람은 일반 사역자였지만 그들은 주의 일에 동역자들이라는 점에서 같았다.2. 그는 에바브라를 함께 종된 사랑하는 자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의 모든 종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같은 섬김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할 만한 뜻깊은 일이다.
3. 그는 에바브라를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성된 사역자의 하나로서, 또한 바울이 신뢰하며 더욱 그들 주에서 바울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자로서 표현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당연한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사역자들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는 에바브라를 그들의 사역자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말하였다. 사역자됨은 주님의 권위와 임명에 의해서인 것이다.
4. 그는 에바브라를 그들에게 좋은 말을 전하는 자로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8절)고 하였다. 그는 에바브라로부터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에게 속한 무리들에 대한 사랑을 듣고 그들에게 에바브라를 사랑할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교우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그들 안에 이루어진 것이요, 신실한 사역자들은 그들이 회중을 칭찬할 수 있는 것을 기뻐한다.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골로새서 1:9-11)
사도는 본문에서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그는 그들이 훌륭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더욱 진보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그들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9절)고 말한다. 그는 그들에 대하여 자주 소식을 들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그들이 지식으로 채워지기를 간구한"것이었다. 그가 하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간구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Ⅰ. 그는 그들이 지식있고 총명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본문에서 기도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1. 우리의 의무에 대한 지식이 최선의 지식이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 할지라도 개념에 불과한 지식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뜻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항상 실제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그것을 알아야 한다.2. 우리의 지식이 지혜 안에서 활용되고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을 실제의 경우에 적응시키는 방법과 그것을 모든 긴박한 사태에 적용시키는 방법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지식은 실제로 축복이 된다.
3.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으로 자신을 채우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알며,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야 하며"(10절에서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Ⅱ. 그들이 선한 생활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선한 생활이 없는 선한 지식은 유익이 없다. 우리가 깨달은 것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현시킬 때 비로소 그것은 진정한 영적인 깨달음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도록"(10절) 하라고 하였다. 즉 우리가 그와 맺은 관계와 또 그에 대하여 행한 신앙 고백에 부끄럽지 않게 행하라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는 선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 선한 사람들도 기쁘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고 기도 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목적해야 하는 것이다.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들은 아무런 힘도 없다.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풍성해야 한다. 쉽고 자기에게 맞으며 안전한 경우에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 가운데서도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뜻에는 변칙적인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일에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알게 되리라"(요 7:17)고 하였다.
Ⅲ. 그들이 강건하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고"(11절)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탄의 유혹들에 대적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의 모든 의무를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는 이가 능력의 즉 영광의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며 영적 생활이 있는 곳에는 영적 힘 즉, 영적 생활을 활력있게 하는 힘이 또한 필요하다. 강건하게 된다는 것은 모든 선행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는다는 말이요, 그리고 모든 악한 일에 대적할 수 있도록 은혜에 의하여 강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를 행할 수 있게 하며, 그리고 우리의 완전함을 굳게 붙잡을 수 있게 해 준다. 복되신 성령이 이 힘의 공급자이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케 되었기"때문이다(엡 3:16). 하나님의 말씀은 이 힘의 매개체이다. 성령은 이 말씀에 의해서 힘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사도가 충분한 은혜를 얻은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영적 힘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해서 약속들이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 자신의 소망들이나 갈구함에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그는 그들이 능력으로 강하게 되기를 기도했다. "능력으로 강하게"란 말은 같은 말을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의미하고자 한 것은 그들이 강력한 함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고 서로의 능력을 합하여 강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2. 또한 그는 "모든 능력으로"그들을 능하게 하시기를 위해 기도했다. 피조물이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은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조물이 전능하게 된다는 말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능력은 우리도 소지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로 우리의 의무를 감당하게 하며, 우리의 순수성을 보존케 해 주는 그러한 능력이었다. 이 능력의 은혜는 우리로 생의 온갖 시련을 견디게 하며 궁핍한 때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에 충분한 은혜이다.
3.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서"란 말은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가 말한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서란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라는 의미와도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들의 마음 안에 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리고 이 능력 안에는 영광이 있다. 그것은 고상하고 충분한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그 힘을 받아야 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좇아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전달된다. 하나님이 주실 때 그는 자신의 형상과 같은 것을 주시며 그리고 그가 강하게 하실 때는 그 자신과 같이 강하게 하신다.
4. 이 힘을 고난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특별히 유용하다. 그러므로 사도는 "모든 능력으로 너희를 능하게 하사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를"(11절) 간구 하였다. 그는 그들이 곤란을 견뎌낼 수 있기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교통에 직면하여 강건하기를 기도하였다. 이로 보아 이 세상에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강하게 된 자들은 다음 사실들에 대해서 강하게 된다.
(1) 모든 견디는 일에 강하여진다. 우리가 "인내를 온전히 이른다는 것은"(약 1:4) 우리가 강건하여져 무엇이든 참을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곤란을 참을성 있게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들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 고난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하여서"라고 하였다(빌 1:29). 우리의 어려움이 너무나 많고 그 고통의 상황들이 더욱 악화될지라도 우리가 그것들을 잘 감당할 때 우리가 모든 인내로 그것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당한 것이 정당하다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말한 "모든 견딤"은 모든 종류의 견딤을 포함한다. 즉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뿐만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인내까지 포함된다.
(2)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 우리에게 임한 능력은 우리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한동안의 곤란을 견디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계속하기를 기뻐하시는 한도까지 그것을 견딜 수 있게 한다.
(3) 또한 그 능력은 우리를 기쁨으로 함께 하신다. 즉 환난 중에도 기뻐하게 하며, 물질이 손해가 나도 기쁘게 하며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받을 가치가 있는 자로 여겨졌다는 것을 기뻐하게 하며, 그리고 생활의 곤경 속에서 인내는 물론 기쁨을 갖게 하신다.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자신의 어떤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강하게 될 때 비로소 할 수 있다.
바울의 기독론(골로새서 1:12-29)
본문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우리의 구원의 위대한 사업에 관한 복음의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이 내용은 본문에서는 설교의 형태로써가 아니고 감사의 형태로 취급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에게 풍성한 감사의 조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버지께 감사케 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고 하였다. 그는 구원의 역사를 논리적인 순서에 의거하여 강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구원의 역사를 논리적으로 논하려 했다면 먼저 구원의 획득을 논하고 나서 다음 그것의 구체적 적용을 논해야 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순서를 뒤집는다. 왜냐하면 구속을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구속의 실제적인 적용이 그 획득 과정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마음 속에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고 그런 다음 구원의 역사의 근본 원천이 어디 있는가를 관심하게 된다. 그 사도의 강론의 순서와 배열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Ⅰ. 그는 우리에게 대한 은혜의 성령의 활동에 관하여 말한다. 우리는 그 활동에 관하여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활동들에 의해서 우리가 아들의 중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받게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버지께 감사드리기를 원하노라"(12,13절)고 하였다. 그 이유는 성령의 활동은 아버지의 일로써 얘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은혜의 영은 곧 아버지의 영이시며 그리고 아버지께서 그의 영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은혜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들은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의 위로를 받았다면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영광을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구원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졌는가를 살펴 보자
1.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기 때문이다"(13절) 그는 우리를 어두움인 죄의 지배에서(요일 1:6), 어두움의 임금인 사탄의 지배에서 (엡 6:12) 그리고 어둡기가 비교할 수 없는 지옥 형벌의 저주에서(마 25:30) 구원하셨다. 또한 그들은 그를 통해 "어두움에서 불러냄을 받은 것이다"(벧전 2:9).2. "그가 우리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 복음의 빛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셨고 빛과 정결의 나라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전에는 어두움이러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엡 5:8)고 하였고 또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벧전 2:9)고 하였다. 사탄의 종들이었던 그들을 그가 그리스도의 종들로 삼으셨다. 죄인의 회개는 그의 영혼이 악마의 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기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죄의 세력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배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세력은 사라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지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들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한다. 또한 그가 우리를 옮기신 나라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혹은 그의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 그의 아끼는 아들(마 3:17)그리고 특별히 사랑받는 자(엡 1:6)의 왕국이다.
3. "그는 이 일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다"(12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를 뽑아 약속된 땅을 나눈 것같이 그는 우리에게 하늘의 영원한 복을 위하여 준비시키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에의 보증과 확신을 주신다." 그가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을 먼저 언급한 것은 그것이 장래 축복의 최초의 표시이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와 영광"을 주신다. 그리고 본문에는 이 두가지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되고 있다.
(1) 그 때의 영광의 본체에 대해서. 이 영광은 "광명의 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상속"이다. 그것은 유산으로 자녀로서의 그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이 영광은 그들에게 최대로 보장된 것이요 영원토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서도 "만일 자녀라면 상속자이다"(롬 8:17)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의 유산인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화된 영혼들의 유산이다. 땅 위의 성도들이 아닌 자들은 결코 나라에서 주어지는 유산이다. 즉 자신이 빛이시오, 또한 모든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의하여 완전한 지식과 거룩함과 기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약 1:17; 요일 1:5)
(2) 이 은혜의 본체 대해서. 이 은혜는 상속에 필요한 구비 조건이다. 이 은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가 우리를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다. 즉 우리의 영혼을 하늘 나라에 타당한 기질과 습관으로 교정하사 알맞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그의 성령의 강력한 영향에 의하여 그의 나라에 합당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하늘 나라에 합당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다. 이것이 곧 은혜이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이후에 천국을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지금 천국을 위하여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성화되지 못하고 살거나 또는 죽은 자들이 세상을 떠날 ? 지옥으로 가게 되듯이 성화되고 거듭난 자들은 세상을 떠날 ? 천국으로 가게 된다. 아들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은 또한 아들됨을 위한 교육과 성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롬 8:15). 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하였다. 이 천국에 합당한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이것은 지불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전액 지불을 보증해 주는 것이다. 거룩하게 된 자들은 영광을 받을 것이다(롬 8:30).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빛을 지고 있는 것이다.
Ⅱ. 구원자의 품성에 관하여 그는 말씀한다. 그가 영광스러운 성품을 지니셨음이 본문에서 말씀된다. 복된 바울은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구속자에 대하여 영광되게 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중재자로서 분류하여 말한다.
1. 사도는 하나님으로서의 구원자에 대하여 말한다(15-17절).(1)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의 "하나님의 형상"됨은 인간이 지음을 받았을 때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시다(히 1:3). 아들아 그의 아버지의 형상인 것과 같이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그는 아버지와 본질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를 본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였고 그리고 그의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하였다(요 1:14; 14:9).
(2) 그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다." 이 말은 그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prwto,tokoj pa,shj ktoewj-즉 만물보다 먼저 혹은 만물이 지어지기 전에 난바 되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란 말은 영원을 나타내는 성서의 표현 방법이다. 다음의 인용귀 가운데서도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의 영원성이 우리에게 표현된다. "내가 만세전부터, 상고(上古)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입었고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하나님이 아직 땅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 내가 세움을 입었다"(잠 8:23-26)고 하였다. 따라서 이 말씀의 본의는 만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의미하고자 한 데 있는 것이다. 한 가정의 장자가 모든 것의 상속자이며 주인인 것처럼 그는 "만물의 상속자시라는 말이다"(히 1:2). 본문의 처음난 자(prwto,tokoj)는 다만 액센트를 변화시키기만 하면 prwto,okoj-즉 만물을 처음 나게 한 자 혹은 만물의 생산자란 뜻으로 된다. 사실 다음의 16절의 내용을 살펴 보면 그의 창조자로서 역할을 보게 된다.
(3) 그는 피조물이라기 보다는 창조자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고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16절). 땅에 있는 인간은 물론 하늘에 있는 가장 높은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그는 무에서 만드셨다. 그는 세상을 즉 천상의 세계와 낮은 세계를 그리고 거기에 모든 거주하는 것들을 만드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는 본문에서 천사들에게 여러 계층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본문에서 그는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16절)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들은 고귀함의 정도나 직위와 직분의 차이를 의미함이 틀림 없는 것 같다. 베드로 전서에도 보면,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벧전 3:22)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시며 세계는 이 지혜로 만들어졌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으로 세계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여호와의 팔"이고 세계는 그 팔로 만들어졌다. di; auvtou, kaiv eivj auvto,n-즉 만물은 그에 의해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은 그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만물은 그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그는 만물의 원인인 동시에 목적이시다. 그러므로 eivj auvton ta.pa,nta-즉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고 하였다.
(4)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17절).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그러니까 태고적부터 존재하셨다. 지혜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고 그리고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그는 나를 가지셨다"(잠 8:22)고 했다. 그리고 태초에 그는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리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그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기 전에 존재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에 앞서 그는 존재하시었다.
(5) 또한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된다"(역주:공동 번역 참조)(17절). 그에 의하여 그들은 존재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서와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한다. 그는 그들은 모두 처음에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서 그들은 또한 지탱한다(히 1:3).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에 의해서 함께 유지되며, 그리고 적당한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에 의하여 만물은 혼란 속에 빠지고 해체되어 버릴 위험으로부터 보전된다.
2. 다음 사도는 중개자로서의 구속자를 나타낸다(18,19절).
(1)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다." 그는 왕이 국가의 우두머리로 법률을 제정할 권리를 갖는 것처럼 교회의 통치의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에서 머리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처럼 그는 교회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모든 은혜와 힘이 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몸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가 충만하신 곳이다"(엡 1:22, 23)
(2)그는 또한 avrch, prwto,tokoj-즉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다. 즉 그는 먼저 나셨음은 물론 우리 부활의 효시가 되신다.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쁨은 우리 구원의 주관자이신 그에게서 기원을 갖는다. 물론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난 처음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난 처음 사람이며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물의 주"라고 선포된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머리시며 우리에게는 죽은 자 가운데서의 우리 부활의 증거와 모범이 되신다. 그는 "처음 열매로서" 부활하셨다(고전 15:20).
(3) 그는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신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그가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갖는 것이며" 그가 천사들과 하늘에 있는 모든 권세보다 뛰어나게 되는 것이며(그는 "저희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 히 1:4)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으뜸이 되시는 것이다. 그는 세상과 육체를 초월하시어 그의 백성의 마음 가운데서 으뜸이 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으뜸되는 자리를 돌림으로써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된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다"(요 5:23).
(4) 모든 충만이 그의 안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19절). 그는 자신을 위하여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그의 공적을 쌓으신다. 의, 힘, 은혜의 충만함이 우리에게 흘러 넘쳐 온다. 머리가 동물들의 사고의 통제기관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 대한 모든 은혜의 근원과 동인이 되신다. 모든 충만함이 그의 안에 있는 것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였다." 이같이 그에게 충만함이 있으므로 우리가 필요를 느낄 때마다. 온갖 은혜를 사모하여 그에게 자유로이 찾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은혜를 중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장중에 그 은혜를 보관하신 분으로 그가 직접 우리에게 그것을 분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가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리라"(요 1:16)고 하였다. 우리 안에 있는 은혜는 그의 안에 있는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것이다"(엡 1:23).
Ⅲ. 구속의 사업에 관하여 그는 말씀한다. 그는 구원의 본성에 대해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속은 획득되는 것이다.
1. 구속의 본질. 그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 진다.(1) 구속은 죄에 대한 용서이다. 그러므로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14절)고 하였다. 우리를 판 것은 죄이며 우리를 노예로 만든 것도 죄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는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구속은 용서에 의해서 혹은 벌칙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한 것이다.
(2) 구속은 하나님과 화해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20절). 그런데 주님은 화해의 중재자이시다. 그리고 그는 죄인들을 위해 용서는 물론 평화를 획득해 주시며, 이 세상에서는 그들로 우정과 은혜를 나누게 하시며 그리고 모든 거룩한 피조물들, 즉 인간은 물론 천사들까지 마침내 한 영화롭고 복된 사회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화목케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anakeflaiw,sas ai-즉 그가 모든 것들을 한 머리 아래 있게 하실 것이다. "약한 행실로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던" 이방인들을 "이제는 그가 화목케 하셨다"(21절). 본문을 통하여 이방인의 본질적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이방인으로서의 형편 즉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하게 되고,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그들의 상태가 묘사되고 있다(21절). 그러나 이 증오는 제거되고 그리고 이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화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해를 위해 기초를 놓으셨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의 대가를 지불하셨고 그러므로 화해에 대한 약속과 그 제공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예언자로서 선포하고 그것을 왕의 입장에서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신다.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자.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에게 도전을 해 오는 하나님의 최대의 원수들도 그들 자신의 허물이 벗겨지면 화해될 수 있는 것이다.
2. 구원이 획득되어지는 방법. 그것은 "그의 피를 통해서이다"(14절). 그는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20절).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22절). "대속을 하는 것은 피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히 9:22). 그리스도의 피에는 이러한 효력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신 대가로 하나님은 인간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사 그들을 은혜의 계약 아래로 데려오셨고 그리고 "그를 인하여"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으심을 생각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을 용납하시며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Ⅳ. 이 구속의 전파에 관하여 그는 말씀한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구원이 전파된 대상. 그것은 "천하 만민에게"다(23절). 즉 구속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도록 명령되었던 것이다(막 16:15). 그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그들 스스로 복음을 배척하지 않는 한 아무도 배척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속은 어느 정도 모든 족속에서 전파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더욱 전파될 것이다. 비록 많은 자들이 복음의 빛을 무시하므로 범죄하였고 아마도 그중의 얼마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2. 복음을 전파한 사역자.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고 하였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다. 그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역자가 되는 것은 최고의 명예로운 직책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직무에 대해 말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롬 11:13). 그리고 다시 그는 25절에서 "내가 교회의 일군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바울이 사역을 하게 된 이유. 본문에 의하면 그가 사도가 된 것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였다"(25절). 즉 하나님의 경륜 혹은 지혜로운 배려에 따라 사도가 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였고 건축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강탈한 것도 또 스스로 그것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써 받았으며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은혜로 여겼다.
(2) 그가 위하여 사역을 하는 대상. "그것은 너희를 위해서 즉 저희 유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노라"(고후 4:5). 그리고 우리는 너희가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유익을 얻은 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즉 그것을 충분케 전파하기 위하여) 그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보다 많이 성취할수록 또는 그 일을 빈틈없이 감당할수록 그 백성의 유익이 더욱 클 것이다. 그들이 더욱 많이 지식으로 채워질 것이고 그리고 섬길 수 있는 자세가 확립될 것이다."
(3) 설교자 바울의 모습. 본문에서 이 사실이 특별히 묘사되고 있다.
[1] 그는 고난의 설교자였다. 그는 본문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한다"(24절)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선한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았으므로 그는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었다. 그는"그가 고난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기뻐하고" 그리고 그것을 그에게 존귀로 여겼다.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에게 존귀로 여겼다. 그리고 더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우려 하였다(24절). 바울이나 다른 이들이 받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러했듯이 죄에 대한 보상으로써의 고난은 아니었다. 이들 사도들에게는 결핍된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채워질" 필요가 있는 것도 없다. 그들은 고난의 의도에 순응하는 것으로 충분한 보람을 느꼈고 또 그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채워드리는 것으로 보람을 느꼈다. 반면 바울과 다른 선한 일군들의 고난은 그의 백성들로 그리스도의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받으신 예수의 뒤를 따랐다. 또한 그들은 인장이 찍혀진 후 그것을 봉인하기 위하여 채워지는 밀납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말은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은 본문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남은 것을 채웠다"고 하겠다.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과된 일정한 비율의 고난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이 미리 작정한 것이었기에 그는 뒤에 남은 고난 혹은 그의 몫으로 주어진 남은 고난을 더욱 자기 안에 채우려고 하였다.
[2] 그는 사람을 잘 사귀는 설교자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개인마다 전파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쳤다"(28절)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경고받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를 다 갖고 있는 법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안받는 것을 각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경고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더 선해지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경고와 가르침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둘?, 사람들은 모든 지혜의 경고를 받고 또 그것에 대해 가르침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택해서 또한 가장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며 또한 우리가 관계를 갖게 될 사람들의 상이한 여러 환경과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그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목적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다. 본문의 "telei/oj"란 그리스도 가르침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의 온전함이든지("그러므로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니"라는 말씀을 통해 보면 이런 의미가 강조된 것같이 보인다. 빌 3:15; 딤후 3:17) 또는 주님께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실 때"(엡 5:27) 그리고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을" 자기 앞으로 모으실 때인 심판날에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그들을 관 씌우실 때의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든지일 것이다. 사역자들은 그들에게 말씀을 듣는 모든 개개인들의 진보와 구원을 목적으로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세째, 그는 부지런한 설교자였다. 그리고 그는 인내의 설교자였다. 그는 게으름장이가 아니었고 또는 자기 일을 소홀하게 하지도 않았다(29절). 그러므로 그는 "이를 위하여 나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재와 그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그는 수고하며 싸웠고 부지런하였으며 그리고 많은 어려움들과 맞서서 대적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드려 많은 신을 행하였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안에서 보다 효과있게 활동하시는 이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주의 일에 보다 많이 수고할수록 우리는 그 수고에 있어서 주께로부터의 보다 더 큰 도움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라고 그는 말했다.
3. 전파된 복음. 이것에 대한 설명이 주어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사도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음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26,27절)고 하였다. 다음의 사실들을 생각해 보자.
(1) 복음의 비밀은 오래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대로 즉 구약의 경륜 아래에서의 구약 교회의 여러 세대를 거쳐 숨겨져 있었다.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소수의 상태에 있었으며 그리고 보다 완전한 시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그 시대가 왔었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후 3:13).
(2) 시간이 찼으므로 이제 이 비밀이 성도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명료하게 드러나고 분명하게 밝혀졌다. 이제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배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었다(고후 3:14). 그리하여 복음 아래 있는 가장 비천한 성도가 율법 아래 있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그들보다 더 크게 되었다. "다른 세대에서는 사랑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던 그리스도의 비밀이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에 의하여 나타났다"(엡 3:4, 5). 그러면 이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이다. 복음의 특별한 가르침은 이전에 숨겨졌던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제 나타나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서 언급되고 있는 이 큰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리고 이방인 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며 그리고 이전에 무지와 우상 숭배의 처지에 있던 자들이 복음의 특권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이리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다"(엡 3:6). 또한 이와 같이 알려진 이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영광의 희망 곧 그리스도"이시다.(혹은 너희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 소망의 근거는 말씀 안에 계신 그리스도며, 구속을 얻는 방법과 그 구속의 본질을 선포하는 복음의 계시이다. 우리 소망의 증거는 우리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또는 영혼의 성화요, 그리고 하늘 나라의 영광을 위한 영혼의 준비다.
4. 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 자들의 의무. 이에 대하여 사도는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였다(23절). 우리는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어떤 유혹에 의해서도 그것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견고하고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고전 15:58) 그리고 "우리의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히 10:23).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그것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설 때라야 우리는 믿음의 복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릎에 빠질 자가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히 10:39). 우리는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충성해야만이 우리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으며 그리고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된다"(벧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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