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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신 그리스도(누가복음 23:1-12)

우리 주 예수께서는 종교적인 법정에서 "모독자"로 정죄받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법정이 의도하는 대로하기엔 너무도 "악한 범죄"였다. 그들이 그를 "정죄"하였으나 그들이 그를 "사형에 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래서 다른 방도를 구하였다.

Ⅰ. 그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고소하였다. 더 이상 자기들의 법정에서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무리가 다 일어나," 그 날은 재판하는 날도, 심문하는 날도 아닌데도 "그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모독자가 아닌(그런 죄목으로 빌라도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정권에 불만을 가진 자로 고소하며 그를 심판할 것을 요구하였다. 설혹 예수가 그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겐 그것이 죄가 될 수 없었으며 그것이 죄라 할진대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그와 같은 죄로 심판 받을 입장이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악의를 교묘하게 숨기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파멸시키기 위하여 로마의 권세를 이용하는 이 "꾸며진 음모"야말로 "진짜" 음모로 로마 권세가 머지않아 그들을 파멸시킬 것이었음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에 대한 고소 내용(2절). 그리스도를 고소하며 그들은 빌라도의 마음에 들도록 아첨하며 가이사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행위는 예수를 헤하려는 "음모"외엔 전혀 다른 뜻이 없었다. 그들은 그를 거짓 증언하였다.

(1) 백성들로 "가이사에게 반역하도록" 했다고 증언했다. 로마 통치 밑에 있던 백성들에겐 불만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그들은 단지 로마 정권이 무너지는 것 외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며 빌라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이와 같은 불만을 자극해 반란을 일으키려던 자가 바로 그 앞에 있는 예수임을 믿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규명한다면 그들이 오히려 백성들의 불만을 조성하고 야기 시키는 자들임이 밝혀질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백성을 미혹하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돌아오게 한 것을 마치 정치적인 통치에 반역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사실은 백성들을 선한 종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신실된 일군으로 삼으려는 것 이상의 다른 뜻은 없었다. 그리스도는 특히 백성들 가운데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거부하려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 것처럼 억울한 고소를 당하고 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중상에 대항할 수 없다.

(2) 그가 "가이사와 대적"하려고 했다고 거짓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배척하고 그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히려 그가 세상적인 권능과 위엄을 지니고 나타나지 않았고, 이 세상의 임금으로 등극하지도 않았으며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고 말하며 이런 죄목으로 씌우고 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또는 "왕"이라고 칭하였으나 이것은 가이사에게 타격을 줄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함으로 만약 그가 가이사와 싸울 태세만 갖춘다면 가이사라도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지만,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할 때(요 6:15) 그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2. 고소 내용에 대한 변론.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 "네 말이 옳도다." 즉, "네가 말한 그대로이다. 나는 유대 민족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문제에 있어 백성들을 탄압하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적하는 왕권이지, 정치적인 관심에만 집중하는 가이사의 통치에 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써 가이사의 통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또는 "네 말이 옳도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무슨 증거가 있는가?"란 의미도 담겨져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가이사의 최고 권력에 반대하며, 혹은 가이사가 보낸 통치자들에 반역하려고 "유대인의 왕"처럼 꾸민 적이 전혀 없음을,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고 있었다.

3.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5절).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그 재판을 방청하고 있던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가 너희 법의 어느 조항을 어겨 죄를 지었는가, 나는 알 바 아니지만 내가 보니 그는 내 법정에서 재판받을 만한 죄를 찾아 볼 수 없도다."

4. 박해하는 자들의 끈질긴 요구와 소란(5절). 빌라도가 그의 무죄를 선포함으로 이성을 되찾아 그들이 죄없는 자의 피를 흘리게 하려고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으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격노하여 "굳세게" 고집부렸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도 없이, 증명할 충분한 증거도 없이 고집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소란과 배짱을 가지고 증거도 없이 소리쳤다.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가이사에게 반역하라고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 그가 백성을 소동케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인위적이고 난동을 피우려는 것이 아니었고 고결하고 찬양할 만한 모든 일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가르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공공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정권을 위협하거나 미워하라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은 이상 그들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 될 수 없었다.

Ⅱ. 그들은 헤롯 앞에서 그를 고소하였다.

1. 빌라도는 그를 헤롯의 법정으로 넘겼다. 이는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갈릴리란 말을 언급하였기 때문이었다. 갈릴리는 가나안 북부 지방에 속하였다. 빌라도는 "그가 그 지방 출신이냐?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예, 그곳이 그의 주거지입니다. 그는 거기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읍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그를 헤롯에게 보내자. 헤롯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으니 이 문제는 그가 맡는 것이 타당하다. 이 죄인은 그의 관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이 사건에 식상(食傷)하였고 어떻게 하든 이것에서 손을 떼고자 하였다. 이것이 그를 헤롯에게 보내는 진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성서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게 성취하시려고 이런 과정을 겪게 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4장 26, 27절에 나타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한 다윗의 말씀(시 2:2)은 헤롯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

2. 헤롯은 그를 시험하고 싶어했다(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헤롯은 예수를 죄인으로 보게 되어, 자기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더 기뻤을 것이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갈릴리에서 행한 기사 이적으로 그곳 사람들 사이엔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보고자 한지 오래였다." 그의 교훈에 대한 감동 때문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보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되면 그가 사는 날까지 그의 이름도 오래 입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그는 "여러 말로 물어" 그가 그의 권능을 보일 수 있는 무슨 일이든 하도록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아마 그는 "비밀"에 속한 것, "장차 될 일," 혹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재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도 대답하시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적을 행함으로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시려 하지도 않았다. "가련하디 가련한 걸인이 빈곤에서 해방되기 위해 기적을 요구할 때엔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단지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에서 기적을 요구하는 자만한 왕의 요청은 거부하셨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놀라운 행적을 볼 기회가 많이 있었으나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가 보고자 하였으나 "볼 수 없었다"는 표현은 타당한 말이다. 기적은 그의 눈에 가리워졌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방문 날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생각하기를, 이제 그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적을 "명령할" 수 있겠다 하였으나 기적은 값싸게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권세가라도 전능하신 분을 그의 손으로 좌우할 수는 없다.

3. 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헤롯 앞에서도 그를 비난하였다. 그들은 지금 핍박하는 일에 눈코 뜰새 없었다. "그들이 서서 힘써 고소하더라"(10절). 말 그대로 뻔뻔스럽고 기고만장하여 떠들어댔다. 그들은 헤롯으로 하여금 그가 치안을 방해한 죄인을 구금하고 있다는 사실로 믿게 하려고 애썼다. 정치적인 권세에 대해 현실적이며 유익한 친구가 되는 선한 사람이나 선한 목회자들이 권세에 대적하며 선동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로 어이없는 고소를 당하는 것이 새삼스런 일이 아님을 주목하자.

4. 헤롯은 그를 대단히 "못살게" 굴었다. 그는 그 "군병들"과 그의 신하들과 시종들, 고급 관리들과 함께 그를 "업신여겼다." 그들은 그를 "무시했다." 말 그대로이다. 무서운 죄악이다. "만물을 만드신 분을 업신여기다니," 그들은 그를 바보처럼 희롱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겐 친절하게도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해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자신을 위해서 한 가지 정도 못할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그는 자기 능력을 잃고 이젠 보통 사람들과 같게 되었다고 희롱하였을 것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헤롯은 빌라도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을 것인데도 빌라도보다 더 그를 "못살게 굴었다." 왜냐하면 은혜가 없는 지식은 사람을 "더 교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헤롯은 그리스도에게 마치 가짜 왕에게 하듯 "빛난 옷," 번지르르하게 칠한 의복을 입혔다. 그리고 빌라도의 군인들에게도 그를 계속 이런 식으로 대접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심술에는 주모자였다.

5. 헤롯은 그를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이것은 그들의 친교를 다지는 기회로 삼았다. 이전의 얼마 동안 그들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었다. 헤롯은 기적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를 범죄자로 정죄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를 빌라도에게 도로 보냈다"(11절). 이처럼 죄인을 그에게 보냄으로 빌라도에게 충성과 존경을 표시하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그들 사이에 서로 오고 간 서신과 상호 연락을 통하여 그들의 지금까지의 관계를 보다 친분 있는 관계로 만들 수 있었다(12절). 그들은 "전에는 원수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 헤롯의 관할인(눅 13:1) 갈릴리인들을 빌라도가 학살한데서 비롯되었거나 아니면 고급 관리들 사이에 늘 일어날 수 있는 어떤 논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싸우던 자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로 다시 연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이는 마치 그발, 암몬과 아말렉 등이 서로 불목하다가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대적할 때엔 연합하는 것과 같다(시 83:7).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이다. 빌라도나 헤롯은 그의 무죄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 점에 그들이 서로 동의함으로 그들은 다른 일에서도 서로 화해하게 된 것이다.

 

23: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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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보다 바라바를(누가복음 23:13-25)

우리는 여기서 군중들에 의해 쇠약해지실 대로 지셨고, 소란과 야유 속에 십자가를 지라는 외침을 들으셨고, 공중 권세의 대행자로서 "대제사장"들의 간교한 음모에 의해 세우심을 받은 예수를 보게 된다.

Ⅰ.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이나 구금을 당할 만한 죄는 저지른 것이 없음을 믿는다고 솔직하게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를 즉시 "석방"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오합지졸 무리들의 분노로부터 그를 "보호"하며, 그들의 이와 같은 무례한 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선한 행실을 할 수 있기까지 그들을 구금하고 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나쁜 인간이었으므로 그는 그리스도에게 추호도 친절을 베풀지 않았으며, 다른 일로 이미 그가 미움을 받고 있었으므로 그는 황제나 백성들을 불쾌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중립성을 잃고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들"을 불러(그는 마땅히 그들이 "선동하여 소란을 피우는" 무리이므로 그들을 해산시키고 자기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나 듣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마음속까지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4절).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존중하는 고로 너희 앞에서 사실하며 그를 대적하는 너희의 모든 말을 들었으나 나로선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너희는 너희가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증거를 대지 못하였다."

Ⅱ. 빌라도는 예수에 대한 일에 헤롯을 끄집어냈다(15절). "내가 저를 그에게 보냈더니, 그는 나보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을까 함이라. 그런데 그는 아무 죄도 찾지 못한 채, 어떤 불쾌한 표시도 없이 저를 우리에게 돌려 보냈도다. 그의 견해로도 그의 죄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저를 향해 약한 자로 조롱하였지 위험한 자로 경계하지는 않았다." 그는 타이번(Tyburn; 런던에 있는 사형장. 역주) 보다는 베드렘(Bedlan; 런던에 있는 정신병자 수용소. 역주)이 그에게 더 적합한 장소라고 여겼다.

Ⅲ. 그는 그들이 허락을 한다면 그를 풀어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그들에게 묻지 말고 그대로 행했어야 했다. Fiat justisia ruat coelum-즉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정의는 제 길을 가게 하라. 그러나 인간의 공포는 많은 사람에게 덫을 만들어,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 운행하며, 정의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때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양심을 거역하면서 불의한 일을 하게 만든다. 빌라도는 그가 무죄라고 선언하였고 그를 석방할 마음도 있었으나, 백성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조처를 취하였다.

1. 그는 박해자들의 이해를 얻어 그를 석방시키려 하였다. 왜냐하면 "반드시 한 사람들 놓아주어야 했기 때문이다"(17절). 그래서 예수는 마땅히 누구의 덕분으로도 아닌 단지 "정의의 행위"로 놓임을 받아야 했음에도 그는 예수를 "자비의 행위"로 놓아주어 그 일로 백성들에게 신세지는 일이 없게 되기를 꾀했던 것이다.

2. 그는 그를 "때려서" 놓을 예정이었다.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그를 때릴 이유가 무엇인가? 죄 없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못지 않게 죄 없는 자를 매질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하며, 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있는 그를 연민의 대상으로 만든다고 그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선을 위하여 악을 행할 수는 없다.

Ⅳ. 백성들은 오히려 흉악범 바라바를 풀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자신은 그들의 호의를 받을 생각조차 없었고 백성들은 다만 그의 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는 "성중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을 인하여(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갇혔는데 이는 그리스도보다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18절). 그런 자가 이와 같은 무리의 사랑을 받고 환영받는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그는 애국심에서 민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반란을 일으킨 자인데 민란을 일으킨 자라고 엉뚱하게 고소 당하였던 자였다.

Ⅴ. 빌라도가 두 번째로 그리스도를 놓아주겠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고 외쳤다(20, 21절). 그들은 그를 죽이려 했을 뿐 아니라 아주 잔인한 죽음을 맛보게 하려 하였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 말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를 못박으소서, 그를 못박으소서."

Ⅵ. 빌라도가 세 번째로 백성들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이해시키려고 말하자 그들은 더 큰소리로 외쳤다(22절).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 그의 죄명을 말해 보라. 나는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다. 너희도 너희가 주장하는 대로 그를 죽여야 할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계속 그 말만 되풀이하니 나로선 그를 때리고 놓아주겠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란 부드럽게 대해 주면 줄수록 더 거세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큰 소란과 소동을 일으키며 "큰소리로 재촉하여" 청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다." 그들이 마치 명절에 죄인은 놓아주고 죄 없는 사람을 못박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요구하였다.

Ⅶ. 빌라도는 마침내 그들의 고집에 꺾이고 말았다. 백성과 "대제사장"의 소리가 "이겼다." 그들의 외침은 빌라도에겐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들은 빌라도를 꺾어 자기 신념과 의향을 거역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파도와 같이 밀려드는 군중을 이길 만한 강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저희의 구하는 대로하기를 언도하였다"(24절). 여기에 군중의 분노가 두려워 "사실을 외면한 심판이, 제길을 벗어난 정의"가 있다.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려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사 59:14). "그들에게 공평을 바랐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랐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7). 이와 같은 오류는 25절에서 바라바를 석방시키는 어처구니없는 행위로 되풀이된다.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이것을 계기로 바라바는 더욱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며 더 못된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마찬가지로 악한 백성들이 "그를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였다." 그를 "더할 나위 없이 미워하며 잔인하게 자선을 베푸는" 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도록 버려 둔 것이야말로 빌라도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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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6

십자가(누가복음 23:26-31)

우리는 이제 거룩한 예수님, 하나님의 어린양께서 제물로 "희생되려는 어린 양"처럼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그가 재판을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이런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평상시의 일을 하던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날이 새자 대제사장들 앞에 끌려나갔고(22:66) 그후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헤롯에게, 그리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왔다. 그리고 빌라도와 백성들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조롱 당하고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갖은 모욕을 당하였는데 이 모은 일이 너댓 시간, 길어야 여섯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9시에서 12시 사이에 십자가에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결박한 자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하였다. 왜냐하면 성의 다른 끝에 있던 그의 동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려고 달려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처럼 "세상에서 내쫓김을 당한 자"도 없었다. 그 자신도 "잠시동안 너희는 나를 못 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잠시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를 처형시키려 끌고 나갔다. 도중에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Ⅰ. "십자가를 진" 한 사람.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는 아마 그리스도의 친구였거나 친구로 알려졌던 자인 것 같다. 이 때문에 그에게 화가 미쳤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 하였다(26절).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 밑에서 기절하거나 숨을 거두어 그들이 꾸민 음모에 차질이 생기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이처럼 쉼을 주는 것도 자비였으나 그것은 "잔인한 자비"였다.

Ⅱ. "슬피 우는" 큰 무리. 진심에서 "슬피 우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그의 친구나 지지자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동정하고 있는 적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명성을 들었고,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가 알고 있었으며 그가 아무 죄도 없이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뒤를 따르는 무리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평소에도 사형 집행이 있을 때엔 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이와 같이 유별난 죄수의 사형집행엔 더 많은 무리가 뒤를 따르기 마련이었다.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특히 그들 가운데엔 여자가 많았다(27절). 측은해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고 호기심에서 따라오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그의 각별한 친구나 친지들처럼)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그를 욕하고 저주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를 인정하고, 그를 측은히 여기며, 그를 보고 안타까와하고, 그의 고난을 함께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주 예수께서 기진맥진하여 가시는 모습을 보고 낯선 자들도 동정심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그를 위해 울었으며 그를 전혀 사랑하지 않던 자들도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지금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을 것이라고 누군가 생각이 들겠지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보실 시간과 마음을 지니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슬픔으로 기진맥진하였으나" 그들의 눈물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계셨다. 그는 "돌이켜 그들을 향하였다." 그들이 낯선 자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그들의 슬픔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켰다.

1. 그는 그들에게 슬픈 울음에 대한 일반적인 지시를 하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그를 위하여 울었다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들의 마음은 사실 굳어질 대로 굳어져 그렇고 그런 사람의 그렇고 그런 고통을 보고는 좀체로 동정을 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위해서 울 것이 아니라(그들이 그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에 다가오는 멸망의 날을 보면서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분부하셨다. 그들 중에는 살아서 그 멸망의 광경을 보게 될 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필히 그것을 보게 될 것이므로 그들에겐 이 자녀들이 문제꺼리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볼 때 우리는 그를 위해서 울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함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가 측은히 여기는 한 평범한 사람의 죽음으로 우리도 같이 그 죽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우리의 친구의 죽음으로 보아선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그의 적들에 대한 승리이며 성공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해방이며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의 값을 치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되, 그를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우리 자신의 죄, 우리 자녀의 죄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그리고(여기에 언급된 눈물처럼) 우리가 유대 백성들처럼 그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의 은혜를 거부할 때 유대 백성들에게 앞서 말했던 멸망의 날이 닥치듯 우리에게 닥칠 불행의 날로 인하여 울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친족이나 형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해 울 필요가 없다. 그는 이제 육체의 짐을 벗어버리고 성결함으로 완전을 입고서 완전한 쉼과 기쁨의 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죄악의 세상, 슬픔과 근심의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2.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고 계신다. "보라, 슬픈 때가 너희 성읍에 임하고 있다. 너희 성읍은 무너질 것이고 너희는 그 멸망 가운데 거하게 되리라."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서로 헤어지면서 제자들이 "하늘나라에 속한 일"로 울 때 그는 제자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며 "다시 보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뻐하라"고 말씀해 주셨다(요 16:22). 그러나 이 "예루살렘의" 딸들이 "세상적인" 슬픔으로 "그를 위하여 울" 때 그는 그들의 눈물을 다른 데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다른 슬픔거리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셨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약 4:9). 그리스도는 얼마 전에 예루살렘 때문에 우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이 때문에 울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를 울게 만든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는 시온의 딸들아, 그 안에서 기뻐하라. 그가 너희를 구하러 오시리라. 그러나 그를 위하여 울면서도 그를 자기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그가 너희를 심판하러 오심을 기억하고 그로 인하여 슬피 울지어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두 가지 암시적인 단어를 통하여 예언되었는데, 그 말이 그들에게 적시에 먹혀 들어가 그들에겐 공포의 말로 들렸으며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무자식(無子息)과 생매장 되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1) 그들은 무자식 팔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라헬이 레아를 부러워하듯, 자식이 없는 자가 자식 있는 자를 부러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때에는 자식을 가진 자들은 도망치는데 자식이 짐이 되며 자식이 "굶어 죽거나 칼로"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얻게 되어 그들은 자식이 없는 자들을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며 "살인자에게 내어 줄" 자식과 손에서 "빼앗길" 자식이 없는 자는 복되도다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마 24:19) 그때에 아이를 키우거나 젖먹이고 있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 뿐만 아니라 이미 옛날에 자식을 출산하고 젖 먹여서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화가 미칠 것이다(호 9:11-14 참조). 피조물의 덧없음과 그 위로의 불안함을 명심하라. 우리에 대한 하늘의 섭리가 이처럼 변하여 우리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주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우리에게 더없이 큰짐이 되고 걱정과 슬픔이 되고 만다.

(2) 그들은 "생매장"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에 사람이 산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이 말씀은 호세아 10장 8절에 있는 예언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재앙의 소란을 피하기 위하여 깊은 굴속에서 숨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 지방이라도 가서 그곳에 거하려 하겠지만 그곳도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 것이다. 이것은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권세 있는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일 것이다(계 6:16). 그리스도에게 피신해 그의 보호하심 안에 거하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은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할 것이나 그것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수난을 통해 이와 같은 멸망이 예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여 주신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어떤 주석자는 이 말씀은 에스겔 20장 47절에 있는 말씀. "내가 너희 가운데 불을 일으켜 모든 푸른 나무와 모든 마른나무를 멸하리니"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1) 좀 특별한 의미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서 이에 대해 말씀하셨으며 유대인들이 그를 죽임으로 그들에게 닥칠 멸망인 것이다.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들)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죄 없고 뛰어난 인물을 다만 선을 행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을 주거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악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하실까 생각해 보라. 그는 이미 그들을 마른나무로, 패역하고 거짓된 세대로, 아무 일에도 쓸모없는 자들로 만드셨지 않았는가? 이것이 그들의 죄일진대 그들에게 내릴 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잖겠는가?" 혹은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로마인들, (로마 심판관들과 그들의 군사들이) 그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 나를, 그들에게는 푸른 나무로 여겨질 나를 이처럼 박해하니,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은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고도 남지 않겠느냐? 유대 민족은 그들에게 반역하여 스스로 마른나무가 되어 그들의 원한을 불지를 불쏘시개가 되어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이같은 고난을 내게 내리도록 하시거늘, 종종 베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책망 받았던 썩은 고무들인 너희들에게 내릴 형벌은 어떤 것일까?"(마 3:10; 7:19)

(2) 죄인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신 말씀으로 볼 수 있다. "내가 죄로 인하여 희생 제물이 된 이유로 이와 같은 고난에 맡겨 두신 하나님께서 죄인들 자신에겐 어떻게 하시겠는가?"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 열매가 풍성한 나무였다. 그러한 그가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하심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중재하지" 않았던들 온인류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것이며,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모든 조건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계속 마른나무인 채로 남아 있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릴 진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그가 지신 죄 때문에 이처럼 하시거늘, 죄로 물든 진노의 세대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 푸른 나무에 대해서도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아버지께서 마른나무라고 진노를 참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께서 받으신 쓰라린 고난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정의를 발견하고 그 앞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완전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나무"에 불과하다. 그가 고난을 받으셨는데 어찌 그들이라고 고난받지 않겠다는 보장을 얻을 수 있으랴? 더구나 죄인들이 받아야 할 진노의 저주는 어떠할 것인가?

 

23:27 없음.

 

23:28 없음.

 

23:29 없음.

 

23:30 없음.

 

23:31 없음.

 

23:32

십자가의 처형(1) (누가복음 23:32-43)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읽게 된다.

Ⅰ. 앞의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마찬가지의 여러 가지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

1.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갔다." 아마도 그들은 전에 사형 선고를 받고 이 날에 처형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수고를 덜기 위해 그들은 부랴부랴 예수도 함께 처형시키려고 서두른 것 같다.

2. 그는 Krani,on -즉 해골 그리이스 말로 골고다─ 즉 해골의 곳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의 수난에 수치를 더하기 위해 선택된 수모의 장소였지만 오히려 그곳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곳이 마치 자기 보금자리인 양 그곳에서 죽음을 물리치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 십자가를 땅에 뉘여 놓고 그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그것을 세워 땅 속에 박았거나 혹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에 묻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3. 그는 "두 행악자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렸는데 마치 그가 가장 악한 흉악자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범죄자로 취급당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로 취급당하였다.

4. 사형 집행에 종사하던 군인들이 그의 옷을 자기들의 일당으로 나꿔채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을쌔." 서로 옷을 나누다보니 이제 더 이상 나누면 아무 쓸모 없는 천조각이 될 것 같아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았다.

5. 그가 십자가에 달려 "세워질" 때, 그는 갖은 욕설과 저주로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인간 본성에 그와 같은 잔인함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그 광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즐기는 마음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관원들도," 그들의 직분으로 볼 때 누구나 지각과 명예를 지닌 자들이라고 인정해 줄 만한 그들도 무리들 가운데 서서 "비웃어," 그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게 하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그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지어다"고 떠들어대었다. 이처럼 그는 자기가 행한 선한 일로 인하여, 그것이 마치 지금 그를 "못박은 자들을 위해" 한 것처럼 그들로부터 조롱 받고 있다. 당시 그는 정복자 이상의 상태에 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그를 정복한 것인 양 그를 조롱하였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 있을 때, 그들은 그에게 자신을 구하라고 독촉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그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며,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오신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임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로서 로마로부터 우리 민족을 구해내려 한다면(그들은 메시야란 말을 이렇게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를 묶고 있는 로마인들의 손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할지어다." 이처럼 유대 "관리들"은 그가 로마인들을 굴복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들에게 굴복 당한 것으로 보고 그를 조소하였다. "로마 군병들"도 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였다. "그 왕에 그 백성이고, 그 백성에 그 왕이로구나." 그들도 그를 "희롱하였다"(36, 37절). 그들은 그를 가지고 놀았다. 희롱하면서 그의 고통을 더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런 때엔 늘 그들에게 내려지는 지독하게 신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들은 그에게 기고만장하여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자고, 그들과 함께 마시자고 떠들어대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떠들었다. 유대인들이 그를 자칭 메시야라는 죄목으로 핍박하듯 그들은 그를 자칭 왕이란 죄목으로 핍박하였다.

6. 그의 죄명을 밝히는 머리 위에 박힌 명패엔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여져 있었다(38절). 그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사칭한 죄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래서 그렇게 써넣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비록 그가 이처럼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지만 실지로 그가 "유대인의 왕"이며 교회의 왕이다. 그의 십자가는 그의 면류관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이 말은 세 개의 고등 언어,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배운 자야말로 가장 뛰어난 학식을 소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읽고 알게 하기 위해 이 말은 세 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선 이렇게 기록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민족에게 퍼지게 하실 계획이었다. 이방의 철학은 희랍어를 주로 이용하며 로마의 법과 정치는 주로 라틴어를, 히브리어는 구약을 기록함으로 이 모든 언어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 세 가지 언어 때문에 고심하고 있는 어린 학생들은 이 언어들을 습득함으로 그리스도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Ⅱ. 다른 복음서에선 읽을 수 없던 두 가지 특별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다. 이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그의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기도(34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가지 유명한 말씀 중 이것이 첫 번째 말씀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최후로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게 되어 그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훈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서둘러 그로 십자가에 매달 때, 혹은 그를 못박을 때 그는 이와 같은 기도를 하였다. 이제 그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1) 간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여, 저들을 멸하소서. 주께서 보고 계시니 그대로 갚아주소서" 하고 기도할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죄는 용서받지 못할 성질의 것이며 또한 응분의 보상이란 명목으로 보아도 자비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런데 특히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여기서 그는 이미 예언한 대로(사 53:12) 죄인을 위하여 중재하였으며 하늘에서도 그가 중재한다는 완전한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중보 기도를(요 17장) 하시는 것이다. 후자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라면 전자는 죄인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제 보듯이 고난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서 하신 말씀은 그 의미하는 바가 보다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중보의 간구이며 그의 죽음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는 말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 뿐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자들도 사하여 주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명목으로 그들의 죄가 사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여, 내가 지금 고난받고 죽는 것은 오직 이것을 위함이니, 가련한 죄인들이 사함 받기를 위함이니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팔리시고 넘겨져 죽으신 중요한 목적은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다.

[2] 그러므로 그의 속량의 덕으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이 일을 하신 것이다. 그의 피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있다.

[3]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개하면 자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비록 그를 박해하고 죽인자들 일지라도 그는 "아버지여, 그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2) 변명.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만약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그의 영광과 그들의 머리엔 두꺼운 막이 덮여 있었다. 그러니 무슨 수로 두 개나 되는 막을 뚫고 바로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과 자기들의 자녀에게 그의 피가 흘려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다시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명심하자.

[1]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독교를 헐뜯는 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헐뜯게 된다. 알려고 하지 않으려는 것이 그 이유이다.

[2] 부분적으로나마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성질의 무지(無知)가 있다. 교육을 못 받았거나 부주의한 성격으로 지식을 얻을 기회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무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를 못박은 자들이 지배자들로 인해 무지 속에 갇혀 그에 대해선 나쁜 선입관이 박혀 있고 그것이 더욱 확산되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거역하여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요 16:2). 그런 자들은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기도는 얼마가지 않아 응답받았다. 그를 죽이는데 손을 잡았던 그들이 베드로의 설교로 상당수 회개하였던 것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를 위한 모본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첫째,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리고 자녀가 아버지께 하듯 우리는 경외심과 신뢰로써 그에게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의 사하심이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우리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며 우리 자신에게 하듯 그들의 범죄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다시 말해 실수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 또한 우리는 그들의 죄, 우리를 대적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명령(마 5:44, 45,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이로써 그 명령을 준행하게 밀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원수들을 사랑하고 위해 기도하셨으니 우리가 어떤 원수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 이것은 세상의 권세자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정복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특이한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그 영향은 사람의 자녀들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그들에겐 복음의 전도를 통하여 그 영향에 "더욱 가까이" 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행악자였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생명을 더하는 생기"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죽음을 더하는" 것이 된다. 멸망할 사람들에겐 어리석음이 되지만 구원받을 자들에겐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1) 그곳엔 "끝까지 고집을 부린" 행악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있으면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비방하였다"(39절). "네가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 역시 고통과 고뇌 속에서 죽음의 그늘에 가리운 골짜기를 헤매면서도 교만한 마음은 꺾이지 않고 자기와 함께 고난받고 있는 동료에게조차도 부드러운 말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바보를 몰타르 속에 넣고 짓밟더라도 우둔함은 걸러낼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엔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누구나 당연히 "억제해야" 된다고 생각되는 망발을 "유발시키곤" 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그 자신과 그들을 구원하라"고 대들고 있다. 다음 사실을 유의하자. 그리스도를 비방하려는 건방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를 통해 구원 얻을까 기대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점을 유의하자.

(2) "마지막 순간에 가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도 있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그 "강도들이 그와 함께 못 박혔으면서도 그를 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그들 중 "한 강도"에게만 적용되는 사실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또 다른 주석가들은 처음엔 그들 모두가 그를 "욕했다가" 그 중에 한 사람은 마음이 변하여 갑자기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으로 풀이한다. 사탄의 손아귀 안에 떨어질 찰라에 있던 이 행악자는 불 속에서 타는 나뭇등걸을 건져내듯 하늘의 자비와 은총의 힘으로 구함을 얻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탄은 먹이를 잃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임종의 순간까지 회개를 연기하거나 그때에 가서도 자비를 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들에겐 구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아무리 늦더라도 상관할 바 아니지만 늦게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회개할 시간은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강도의 예처럼 자기에게도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강도의 예는 전혀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에는 그리스도의 자비나 은총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였다. 그는 단지 그가 "연약하게 십자가에 못박힌"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권능의 한 예를 보이기 위하여 마련된 섭리의 한 부분이었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건지심으로 사탄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자신이 할 마음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표시로서 이 행악자를 회개시킴으로 다시 사탄을 정복하여 승리의 트로피를 세우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면 이 사건이 예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1]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예외적인 은총의 역사. 이것은 그가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2] 이와 같이 짧은 시간 안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그에게 내려진 은총의 변화를 여기에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그가 다른 행악자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40, 41절).

a. 그는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자기 동료를 꾸짖었다.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신앙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소치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다른 무리와 함께 휩쓸려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임을 이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두렵다. 그래서 감히 그렇게는 못하겠다. 너도 그래야 되지 않겠니?" 그들의 눈을 뜨게 한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은 생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악하디 악한 마음속에도 깨닫게 된 것이다. "네 속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너와 같이 수난 받는 동료에게 그처럼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이 악한 백성들이야 무슨 짓을 하든 너 역시 죽어 가는 사람이므로 너조차 죽어 가는 사람을 학대하는 것은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b. 그는 자신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우리는 이에 당연하거니와" 그들은 모두 같은 한 가지 죄목으로 고난을 받고 있었음으로 그는 자신 있게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라고 덧붙여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남달리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게 된다. 이 둘은 죄악과 고통으로는 동료였으나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은 "파멸을 당하였다." 이제까지는 모든 행동을 함께 해왔던 둘이었지만 이후로는 "한 사람은 택함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되었다." 그는 "너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는 당연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에 대해선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하나님께선 "정당하게 행하시나" 우리는 "악하게 행하였다."

c.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믿었다. 비록 그가 두 군데 법정에서 정죄를 받고 가장 악한 범죄자처럼 취급당하였으나 이 회심한 강도는 그가 고통 중에 하는 행위를 보고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 Ouvde.n a;topon -즉 그릇되거나 그의 성품에 흠이 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은 그를 행악자들 "가운데" 못박게 하여 마치 그를 "그들과 같은 무리"로 여기게 하였다. 그러나 이 강도는 그들보다는 그래도 양심이 있어 그는 "그들과 같은 자"가 아니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그가 전에 그리스도나 그의 놀라운 행적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은혜의 성령께서 이 사실을 그에게 깨우쳐 주어 그는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우리 주 예수께 한 말을 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이것은 "죽어가는 죄인이 죽어가는 구세주"에게 드린 기도였다. 이처럼 십자가 위에서 비난받고 조롱 당하면서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듣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 "이처럼 기도"하게 된 것은 강도로서는 행운이었다. 아마 전에는 한 번도 기도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 생명이 있는 한에서 희망은 있는 것이며 희망이 있는 한에서 기도할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a. 이 기도를 통하여 그의 믿음을 살펴 보라.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41절)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였으며" 이 회개를 통하여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였으며, 주님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주인이며 지금 그 나라로 들어가고 계시며 그분만이 이 나라의 통치권을 소유하실 분으로서 그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생명이 있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는 지금 치욕의 늪에서 제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같은 백성으로부터 모욕을 당하며 자기의 아버지도 구하지 못하는 위선자는 조롱당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하고 백부장들을 경악하게 만든 신기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이와 같은 고백을 하였다. "진실로 우리는 이스라엘에서조차 그와 같은 믿음을 찾아보지 못하였다." 그는 이 생명이 끝난 후 있을 다른 생활을 믿었고 그 생활에서 행복해지길 바랐으며 다른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서 구원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모든 고통이 끝난 후 참된 복을 얻게 되기를 바랐다.

b. 이와 같은 기도에 나타난 그의 겸손을 살펴보자.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한 것이 그가 요구한 모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쓴잔을 함께 마시며 그의 오른손이나 왼손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 중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영광을 얻고 있었음에도 그는 "나를 먼저 택하소서" 하지 않았다. 당시 제자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는 오히려 제자들이 그의 나라에서 좌편에 혹은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던 것과 같은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마 20:21). 고난 중에 인정받는 것은 때로 이와 같은 유익을 얻게 해 준다(렘 52:31, 32).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가 구한 것은 다만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였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든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 이는 마치 "요셉이 관원에게" "나를 생각하소서"하고 부탁한 것과 같은 것으로(창 40:14) 이렇게 한 것이 오히려 더 빠른 효과를 얻게 되었다. 관원은 "요셉을 잊었으나" 그리스도는 이 강도를 기억하셨다.

c. 이 기도 속엔 끈질긴 요구와 열의가 담겨져 있다. 그는 당연히 이 기도 속에 자신의 온 영혼을 쏟았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나를 당신의 손으로 거두소서." 지금은 그의 나라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기억됨이야말로 우리가 마땅히 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임을 명심하자.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복된 삶과 죽음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나라에 계시면서"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나를 위하여 간구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당신의 성령으로 나를 통치하소서." 그는 그곳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계신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소서. 죽음의 때에 나를 기억하시고 부활의 때에도 나를 기억하소서"(욥 14:13 참조).



[3] 강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외적인 자비. 그의 기도에 대하여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인 내가 진실된 증인이 된 내가 네 기도에 아멘하여 그 기도를 인정하리니, 오히려 네가 요구한 것 이상으로 네게 허락하리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 이 말씀의 대상에 대하여. 이 말씀은 회개한 강도에서 한것이지 그의 친구에겐 해당없는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와 같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심판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저주와 함께 떠나갔지만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 다른 한 사람은 축복을 얻게 되었다. 비록 자신도 극심한 고통 중에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위로의 말씀을 하여 주셨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낙원에 있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히 9:15). 이와 같은 사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높이며 반역자와 행악자들이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이처럼 택함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이 말씀을 "한 분"은 누구인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또다른 중보의 말씀으로써 특별한 경우에 하신 말씀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수난의 근본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이 깃들어 있다. 즉 그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용서"의 값을 치루시기 위하여 죽으셨으며(34절) 나아가서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사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회개하고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열어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a.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가 지금 "하데스-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그의 인간 영혼은 육을 떠난 영혼들이 머무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주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축복받은 영혼들이 머무는 곳, 즉 낙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완성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낙원으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앞에 놓여진 기쁨의 시작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 위로를 얻게 되었다. 그는 십자가를 짐으로 면류관을 얻게 되었으므로 우리 역시 고통을 겪지 않고 다른 방도로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 될 것이다.

b. 그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믿게 된 모든 이들은 죽은 후에 그와 함께 그곳에 있게 될 것을 믿게 되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이처럼 복된 은혜를 값 주고 사셨으며 왕으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때엔 언제든 그 은총을 내리도록 마련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이 우리 앞에 제공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a) 그곳은 "낙원"이다. 에덴 동산에 비유되는 "하나님의 낙원(계 2:7), 기쁨의 동산이다. 우리의 최초 조상은 죄를 짓기 전에 그 에덴 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두 번째 아담을 인하여 우리는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하여 잃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세상적인 기쁨이 아닌 하늘의 낙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b) 그곳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뵙고, 그리스도와 함께 앉으며, 그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서 얻을 행복이다(요 17:24).

(c) 그것은 죽음 직후에 얻게 된다. 오늘 밤, 내일이 오기 전, "오늘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신앙이 깊었던 자들의 영혼은 육체의 짐을 벗은 후에 즉시 기쁨과 행복 안에 거하게 된다." 의로운 자들의 정신은 즉시 "완전하게 된다." 나사로도 세상을 떠나자마자 "위로"를 받았다. 바울도 떠나자마자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었다(빌 1:23).

 

23:33 없음.

 

23:34 없음.

 

23:35 없음.

 

23:36 없음.

 

23:37 없음.

 

23:38 없음.

 

23:39 없음.

 

23:40 없음.

 

23:41 없음.

 

23:42 없음.

 

23:43 없음.

 

23:44

십자가 처형(2) (누가복음 23:44-49)

이 부분에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Ⅰ.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 때에 "기이한 현상들"이 함께 일어남으로 그의 죽음에 "특별한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여기에선 두 가지밖에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우린 앞서 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1.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함." 때는 "제 육시쯤" 되었다고 하니 우리의 시간 계산대로라면 한낮 정오 무렵인 셈이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 땅이 어두움에 덮혀 있었다"고 했다. 해가 빛을 잃게 되었고 동시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이게 되어 이 칠흑 같은 어둠을 더하게 하였다. 이 어두움은 애굽의 경우와 같이 "사흘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2. "성서의 휘장이 찢어짐." 앞의 징조는 "하늘"에 나타난 것이고 이번 것은 "성전"에서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이처럼 치욕을 당하는데 그들로서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처럼 그 슬픔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막이 찢어진 것은 형식적인 율법을 폐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와 같은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장벽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골칫거리였다. 이제 그 막이 찢어졌으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로 당당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Ⅱ.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르짖으신 말씀으로 그의 죽으심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고 말씀하실 때엔 큰 소리로 "외치셨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도 이와 같이 큰 소리로 외치셨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또한 무리들도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고 외치셨다.

1. 그는 그의 조상 다윗으로부터 이 말씀을 빌려왔다(시 31:5). 입으로 옮길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말을 씀으로써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증언하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성취시키려 오셨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으로 성서의 말씀을 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이처럼 그는 우리도 하나님께 호소할 때 성서의 말로 할 것을 보여 주셨다.

2.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 속에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자신이 버림을 당했다고 실망하였을 때엔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으나 이제 두려웠던 영혼의 고뇌가 가시는 것을 알았을 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버리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통하여 자녀의 직분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중보자이심을 보이시기 위한 특별한 의미로 이 말을 쓰게 되었다. 그는 이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하나님께 드려"(히 9:14)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마 20:28)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사 53:10). 그는 자신이 제사장이며 동시에 속제물이었다. 우리의 영혼은 죄의 값으로 상실되었으니 그의 영혼으로 그 잃은 것을 회복시켜야만 하였다.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당사자이신 하나님의 "손에" 그 보상을 드려야만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만족할 만한 내용의 보상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는 "제물로 드리고" 명실공히 제사의 모든 일을 마치시고 모든 것을 내맡기셨다. "ti,qhmi -즉 나는 손을 뗍니다. 당신의 손에 모든 것을 바칩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을 대신하여 나의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animus offerentis-즉 바치는 자의 선한 뜻이야말로 제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저하시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실 뜻을 밝히셨다(히 10:9, 10). "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행하리이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거룩함을 입겠나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그의 영혼과 육체가 재결합하는 부활이 아버지에게 달려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아버지의 손에 맡겨져, 즉 낙원에 "받아들여졌다가" 사흘만에 "되돌아오게" 되기를 부탁하였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도 "진짜 몸"을 가지셨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마음도 역시 가지고 계셨으며 그것은 육체와 구별된 상태로 있으므로 다른 형제들과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육체가 부패하기 전에, 그 육체와 "떨어진 상태로" "하데스"에 버려지지 않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안심하고 아버지의 손에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다.

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한 본을 보여 주셨는데 이는 다윗의 말씀을 죽어 가는 성도들에게 일러 주셨으며 그 말씀을 그렇게 씀으로 거룩한 말씀으로 삼으신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 우리가 가장 걱정할 것은 당연히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한 것이다. 우리로서는 영혼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어 그의 성령과 은혜로 거룩하게 되고 지배받으며 죽음의 순간 하나님의 손안으로 들어가 완전한 성결과 행복을 이루게 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우리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보여 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생이 끝난 뒤 다른 생이 있음을 확신하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말을 함으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Ⅲ.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생기게 됨.

1. 군사들을 지휘하던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다(47절). 그는 로마인이며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입장이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전에 이와 같이 놀랍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곳에서 그 된 일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찬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자에 대해 증언하였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도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통하여 영광 돌리게 하신 것은 그가 흠없는 인물임을 들어내는 자연스런 증거라 하겠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선 그의 증언이 더 계속되고 있다.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있어선 이 한 마디로 똑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가 "의인"이었다면 그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한 그 말이 아주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말엔 자신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언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의인"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그 무관심했던 구경꾼들도 관심을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른 복음서에는 언급이 없다(48절). 그런 일이 있을 때엔 의례 모여드는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한동안 심각해져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1)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죄 없는 그를 죽인 것이 참으로 악한 짓이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내리든 그들 민족 위에 내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아마 이들일 바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던 그 무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암흑과 지진으로 놀랄 대로 놀란 데다 비범한 그의 운명 장면을 목격한 후로 열린 입이 닫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한 일에 대해 후회하며 양심이 떨리게 되었다. 그들은 세금 징수원처럼 자신이 치욕스런 일을 당한 것같이 "자기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어떤 주석가는 이들이 양심에 찔림을 받은 후에 그에게 지워질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한 축복의 첫 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행 2:37).

(2)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곧 사라졌다고 보아야 될 것 같다.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의 표시를 더 이상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기색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사건을 금방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못 박히신 것을 알게 되는 자들은 많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질 못한다. 그들은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돌아간다. 그들은 성례전의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를 찬양하지만 결국 그들은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은 채,"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고 만다.

3.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아는 자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고 슬금슬금 다가왔다(49절). "예수의 아는 자들," 그를 직접 알거나 누구에게 들어서 아는 자들은 "다 멀리 서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면 그의 추종자라고 체포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욥 19:13).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시편 88편 18절 참조. 그리고 "갈릴리로부터" 함께 "그를 따라온 여자들도 이 일을 보았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몰랐으며 이 일들이 부활의 확실한 전조가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서 있었다.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시몬의 말처럼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 되었다"(눅 2:34, 35).

 

23:45 없음.

 

23:46 없음.

 

23:47 없음.

 

23:48 없음.

 

23:49 없음.

 

23:50

무덤에 묻힌 그리스도(누가복음 23:50-56)

이제 그리스도의 장사지내는 내용을 읽게 되었다. 그는 죽어야 하였을 뿐 아니라"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명령에 따라(창 3:19) 사망의 진토에 묻힘을 당해야만 하였다.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Ⅰ. 묻은 사람에 대하여. 그를 아는 자들은 "멀리 서서 보고 있었다." 그들에겐 "장사치를" 돈도 없었을 뿐더러 그를 정중하게 묻어 줌으로 받는 "비난"을 견딜 용기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돈과 용기로 겸비한 자를 세우셨으니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었다(50절). 그의 성품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선하고 의로운 자"였으며, 덕행으로나 자비로움에 있어 누가 되는 점이 없었던 자로서 누구에게나 "의로왔고" 그의 도움을 요구하는 자에겐 언제나 선했던 자였다(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로써 "죽은 자를 묻어 주는" 배려를 보임으로 그의 선함과 너그러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높은 지위에 있던 자였고, 행정가이며 의원이고 산헤드린의 회원이고 유대교 장로였다. 그에 대해서 이처럼 말했다 하더라도 여기에 덧붙여 말할 것이 있었다. 즉 그가 비록 그리스도를 죽이게 만든 무리들 중에 하나였지만 그는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可)하다 아니한 자"였다는 사실이다(51절). 비록 대중에 이끌려 사건은 진행되었지만 그는 그것에 반대하여 제동을 걸었고 악을 행하는 일에 대중을 따라 행하지 않았다. 우리가 따라서 안 될 악한 교사나 행위로 우리의 행동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과는 비밀로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믿고 있었으며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 예수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자로 그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었다. 세상엔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음을 명심하자. 그런 이들은 그 사실을 밖으로 알려 과시하지는 않지만 기회만 있으면 오히려 크게 소란을 떨며 재던 자들 보다 진심으로 헌신하는 일에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Ⅱ. 그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한 일들에 대하여.

1. 그는 그리스도를 정죄한 재판관 "빌라도에게 갔다." 그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폭력을 써서라도 시체를 가져 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하가 있었지만 그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 평화스럽게 그 일을 추진하였다.

2. 그는 자기 손으로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애들을 "배내 옷"으로 싸두듯이 유대인들의 풍습은 죽은 시체를 "싸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절엔 깨끗한 세마포단을 원단으로 샀다가 시체를 싸기 위해 그가 여러 조각을 내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요한 복음 11장 44절에 라사로의 모습에 대해서도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라고 묘사되어 있다. 성도들에게는 "수의"(壽衣)는 "배내 옷"과 같은 것이어서 그들이 "완전한 사람에 이르게" 되면 헤어져 버리게 될 것들이다.

Ⅲ. 장사지낸 곳에 대하여. "바위에 판 무덤에." 무덤은 누구도 침입할 수 없도록 견고하였을 것이다. 이는 교회가 "판 바위로 갇혀" 어둠 속에 묶이게 된 경우와 같다. 그러나 그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이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아무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무덤에 묻힌 이유는 단지 그가 자신의 권능으로 3일만에 부활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죽음을 정복함으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성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Ⅳ. 장사지낸 시기에 대하여. "이 날은 예배일이요 안식일이 기의 되었더라"(54절). 여기서 그들이 왜 그렇게 장사지내는 일을 서둘렀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다른 일에 손을 써야 되었으며, 안식일을 준비하고 맞이하기 위해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눈물로 씨앗을 대신할 수 없음을 유의하자.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한편으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에 신경을 써야만 되었다. 그리고 안식일이 다가오자 "준비"를 서둘러야만 하였다. 우리가 하는 세상적인 일들도 이런 식으로 명심하여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종교적인 마음을 늘 염두에 두어 차질이 없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Ⅴ. 장례에 참여한 자들에 대하여.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다만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만" 있었다(55절). 그들은 그가 십자가에 달리는 동안 그 곁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그를 "따라왔고" 무덤이 어디인지, 어느 길로 가는지, "어떻게 묻혔는지" "지켜 본 것"이 틀림없다. 호기심으로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주 예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 온 것이다. 그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한 것"이어서 "아무리 물로 씻기지 않을 것"이었다.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그다지 장엄한 장례식은 아니었으나 "이후로 시작될 그의 앞날은 영광스런 것이었다."

Ⅵ. 장사지낸 후 그의 시체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에 대하여(56절).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이것은 그들의 신앙의 증거라기보다는 사랑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가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리라"고 수차 그들에게 한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거나 믿었더라면" 그처럼 "값비싼 향유"를 준비하기보다는 얼마 안 있어 그의 부활의 영광으로 그의 육신에 보다 큰 향기가 나게 될 것을 믿음으로 그와 같은 "낭비"나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준비로 바빴을 터이지만 그들은 "안식일에 쉬었다." 아무도 이 일을 위하여 안식일에 뛰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 민족의 습관에 따를 뿐 아니라 시대는 바뀌더라도 그 능력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행한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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