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튜 헨리 주석, 시편 1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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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겸비(시편 113:1-9)

이 시편에서는 다음을 볼 수 있다.

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는 권고이다.

1. 그 초대는 매우 절실한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그리고 반복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왜냐하면 그는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1-3절).

이것은



(1)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는 것이 필연적이며 가장 고상한 의무라는 사실을 의미해 준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2)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할 의무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것을 자주 사용해야 하며, 크게 선양해야 할 것이다.

(3) 그것은 우리가 소홀히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따라서, 법도를 따라서 참여해야 하며, 분기되어야 한다.

(4)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은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권한다. 왜냐하면 그 일의 중대성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마음을 다하고 열심을 기울여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희의 모든 동료들과 함께 그 모든 기쁨을 나누기를 원한다.

2. 그 초청은 매우 광범위하다.

(1)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자들, 즉 그의 백성을 관찰해 보라.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 소명에 응답할 것이다.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그들은 그를 찬양해야 할 가장 큰 이유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종으로서 그에게 수종드는 자는 그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그의 총애를 받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이다. 그것은 그의 종에게 요청되는 일이다. 주인에 대해서 찬송하는 것과 그에게 할 수 있는 명예를 돌리는 것은 쉽고도 즐거운 일이다. 그들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레위인이 그것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그리하여 "저희를 불러내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천사들은 여호와의 종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요청을 받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잘 찬양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위로가 된다.

(2) 그를 찬양해야 할 자들을 관찰해 보라.

[1] 모든 세대들이다(2절). "이제부터 영원까지." 이 일은 우리와 함께 사라질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에서도 행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뒤에 오는 모든 자들도 이 일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후손으로 하여금 퇴보하게끔 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세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도록 해야 한다. 단지 현세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시편 기자와 같이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여호와를 찬양해야 할 것이다.



[2] 모든 곳으로부터이다.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모든 거주가 가능한 세계에 걸쳐서이다. 해 돋는 은택을 기뻐하는 모든 자는(그리고 또한 해가 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뻐하는 자는) 빛의 아버지에게 빛에 대해서 감사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그 이름이 열방에서 찬양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곳에, 동으로부터 서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혜와 권능과 인자하심의 명백한 증거와 결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류의 대다수가 그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슬퍼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찬양을 다른 것들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거기에는 그 이상이 것이 있을 것이다. 앞 에나온 구절들이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로다"라고 가르치면서 영광의 나라의 섬광을 보여 주었듯이, 이 시편의 구절들은 그에 대한 복음의 섭리 가운데서 은혜의 나라의 섬광을 보여 주고 있다. 교회는 유대 나라에만 한정되지 않고 스스로 전세계에 퍼질 것이다. "각처에서 우리의 하나님께 영적인 분향이 제물로 드려질 때"(말 1:11)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Ⅱ. 우리는 여기에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지시를 받고 있다.

1.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영광이 천상 세계에서 얼마나 높은가를 보게 되며, 그 높은 영광을 말하게 된다(4,5절). 우리는 찬양할 때 그의 이름을 높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높으시며, 그의 영광 또한 높으시기 때문이다.

(1)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저들의 왕들이 아무리 성대하다고 할지라도, 저희의 백성이 아무리 창대하다고 할지라도 그들보다 높으시다. 지상의 왕이 major singulis - 즉 개인들보다는 크며, minor universis - 즉 전체 보다는 작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의 왕이 왕 중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열방을 모두 함께 모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계신다. 그들은 그 앞에서 "통의 한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과 같다"(사 40:15, 17).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으시다고 생각하며 말하게 하라.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모든 것 위에 높이 계시기 때문이다.

(2)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그의 영광의 보좌는 가장 높은 하늘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그를 찬양하도록 일으켜 준다(애 3:41).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즉 천사를 위에 높으시도다. 그는 그들보다 높으시다. 왜냐하면 그들의 광명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행하는 것 위에 계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명령 아래에 있고 그의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그 경지를 초월하여 계신다. 그는 모든 송축과 찬양 위에 높으시며 우리 모두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 위에 초월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감탄으로 말해야 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세상의 열왕과 모든 주권자 중 누가 그와 같으리요? 세상에서 영리하고 축복받은 영혼 중 누가 그보다 높으리요? 아무도 그와 동등시될 수 없으며, 아무도 그와 비교될 수 없다. 하나님은 초월적으로, 비교될 수 없이, 무한하게 위대한 분으로서 찬양받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높은 위에 앉으셔서,"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며, 올바르게 그를 찬양하도록 모든 것을 이끄시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주위를 돌아본다면 그의 인자하이 지상 세계에서 얼마나 폭넓은 것인가를 보게 되며, 그의 찬양을 발하게 된다. 그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천지에서 스스로 낮추신"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문장이 전환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하늘에 높이 거하시며 땅을 살피시려고 낮아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우리가 이해한 것과 같이 매우 분명하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이시고 스스로 낮추신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일은 그 자신의 행위이다. 그가 자존(自存)하시는 것과 같이 그는 그의 명예의 원천이며 그의 은총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의 겸손한 인자가 다음과 같은 데서 나타난다.



(1) 그가 그 아래에 있는 세상을 용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이다. 그의 영광은 "모든 나라 위에, 모든 하늘 위에" 있는 것이지만, 아무 것도 그에 의해 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나 아무도 멸시치 아니하신다"(욥 36:5). 그는 그의 모든 피조물과 방백들을 "살피시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신다." 그러나 그는 그들보다 무한히 높이 계신다. 하나님의 본성의 무한한 완전과 충만과 미묘함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섭리의 생각과 그의 우주적인 섭리의 활동으로 하늘의 군사와 땅의 거민을 취하시기에 기뻐하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겸비의 행위로써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단 4:35). 그는 이러한 통치에서도 스스로 낮아지신다.

[1] 하늘에서 만물을 살피시며 생명을 보존하며 동작을 지휘하시며 천사들의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는 것 그에게 있어서는 겸비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에 의해서 은혜를 입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2] "땅에 있는 만물을 살피시며" 인자(人子)를 찾으며 그들을 보호하고 저희의 문제를 지배하며 다스리시고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것을 감찰하시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크나 큰 겸비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인자하심으로 땅을 충만케 하며, 인내로써 선을 행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며, 우리의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보살피시며 관심하시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살피시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겸비하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는 "잃은 자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 오신 사실은 놀라운 겸비인 것이다. 실로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비하하셨다.

(2) 그가 때때로 이 비천한 낮은 세상의 거민 중 가장 적고 낮은 자들에게 보이시는 특별한 은총에서이다. 그는 세상에 있는 큰 것들을 보실 뿐 아니라 가장 비천한 것과 또 위대한 자들이 대개 간과하는 것들을 보신다. 그는 단지 그들을 굽어보실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며, 섭리의 일반 통로 연속으로부터 매우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다. 이것은 세상이 자연의 과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편에서 항상 나타나는 자연의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는 것을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

[1] 오랫 동안 경멸의 대상이 되어온 자들이 때때로 갑자기 명예롭게 된다(7, 8절).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방백들과 함께 세우신다."

첫째, 하나님은 이와 같이 때때로 자신을 강하게 하시며, 그의 지혜와 권능과 주권을 확대하신다. 그가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려고 하실 때 보시기에 가장 비천한 것을 그 일에 사용하기 위하여 택하시며, 저희들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다. 기드온은 타작마당에서 나왔고, 사울은 당나귀를 찾는 일에서 불려왔고, 다윗은 양을 지키는 곳에서 진출했다. 그리고 사도들은 고기를 낚는 데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보내심을 받았다. 복음의 보화가 세상에 있는 인간에게 주어졌으며, 세상에 속한 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복음의 설교자로 선택되고,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이"(고전 1:27, 28) 부끄럽게 되었다. 그리하여 권세의 우월성이 하나님께 속한 것을 드러내고, 모든 자의 발단이 그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때때로 이와 같이 빈곤과 수치의 무거운 짐 아래서 오랫 동안 신음해온 그의 백성의 뛰어난 경건과 인내에 보응하신다. 요셉의 덕망이 증명되었을 때 감옥의 진토에서 일어나 "방백들과 함께" 세워졌다. 지혜 있는 자들은 그와 같은 섭리의 응답을 관찰해야 하며, 그로 인해 "여호와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사업에 적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부적당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가난에 떨어진 자들이 진토로부터 일어나고(유대 랍비들 중 한 사람은 그것을 은 자의 부활에 적용한다), 더욱이 죄의 더러운 무더기에서 일으킴을 받아 "방백들과 함께 세워지며" 천사들 가운데서 그 백성의 방백으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한나는 이러한 의미로 노래했다(삼상 2:6-8).



[2] 오랫동안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들이 때때로 갑자기 잉태하게 된다(9절). 이것은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 삼손의 모친을 회상케 하며, 엘리사벧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한 예는 많다. 하나님은 그의 하녀의 괴로움을 감찰하시고 저희의 불명예를 씻어 주셨다.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가정을 형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장(家長)들이 해야 할 일을 찾게 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하여야 하겠다. 가정의 안식을 취하는 자들은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는 일"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사실이다(딤전 5:14). 하나님께서 "자녀를 잉태케 하실 때" 그는 여자가 "그 집안을 보살피기를"(잠 31:27) 기대하신다. 그 여인은 '자녀의 즐거운 어미"라고 했다. 대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그 기쁨 때문에" 고통을 잃어버리게 된다. 리고 또한 오랫동안 무자(無子)한 자들에게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특별한 기쁨도 있다(눅 1:14 과 같이). 그러므로 거기에는 특별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떨며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슬픔의 어머니는 기뻐하게 될 수 있지만, 기쁨의 어머니는 그 자녀가 자기 품을 떠나거나 분노케 하면 다시 슬픔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방 가운데에 있는 복음의 교회에 적용되어져야 할 것이다(그 정초가 이와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사 54:1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노는 노래할지어다!" 갈 4:27 에도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이방의 죄인들이며 황폐된 자들의 자손인 우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말을 들어야 할 이유를 갖게 된다.

 

113: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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