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17:6에 이어 본서 기자는 여기서 또다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 간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앞서 17:6에서는 개개인의 종교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을 시사했었다. 반면 본 절에서는 자기 기업을 지키지 못하고 외세에 밀려나는 약한 지파를 왕정제도에 의해 강대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온전케 보존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6 주석을 참조하라.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을 분배 받았다(수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 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나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1:34). 한편 1:34에서 본서 기자는 단이 분배 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기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본래 단 지파는 여호수아 생존 시에 기업을 분배 받았다(수 19:40-46). 그러나 가나안 정착 초기에 분배 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 의해 쫓겨나 타 지파의 땅에 분산 거주하거나 새로운 정착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1:34). 한편 1:34에서 본서 기자는 단이 분배 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요셉 족속이나 유다 지파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암시했었다. 그런데 본 절에서는 그 이유를 왕이 없는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따라서 왕정 제도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은 단순히 본서 기자의 주석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견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삼손의 고향이자(13:2-5, 24) 단 지파의 기업이던 소라와 에스다올(수 19:41)은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경계 지역이다. 이 중 소라는 예루살렘 동쪽 약 65 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며 에스다올은 소라의 동북쪽 약 2.5 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이다. 한편 본래 이 소라와 에스다올은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는데(수 15:33) 훗날 기업을 재조정하면서 단 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단 지파는 이곳에 안주치 못하고 많은 수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하였는데(11절) 전술한 바와 같이 아모리족의 침입 때문이었다. 1:34 주석 참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수 2:1).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의구심 그대로 그들의 불순하고 패역한 상태는 본 장에 확실하게 기록되고 있다(5, 30절 등). 한편 단 지파의 북쪽 이주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는 수 19:47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단 지파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단 지파는 그들이 정착하기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그들의 씨족 가운데서 용맹한 다섯 사람을 미리 정탐꾼으로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마도 단 지파는 이러한 준비를 하면서 마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재현하는 듯한 꿈에 젖었는지도 모른다(수 2:1). 하지만 약속의 유업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자들이 신개척지를 얻는다 하여 거기서 신실한 언약 백성의 모습을 존속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강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의구심 그대로 그들의 불순하고 패역한 상태는 본 장에 확실하게 기록되고 있다(5, 30절 등). 한편 단 지파의 북쪽 이주에 대한 기사를 요약하고 있는 수 19:47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단 지파의 지경이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8:3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정탐꾼들은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북쪽으로 가던 도중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신당(17:1, 5)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레위 청년의 음성을 듣고 발을 멈추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레위 청년의 음성을 금방 알아들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다음 두 가지 경우로 추측해 볼 수 있다. (1) 이 레위 청년이 베들레헴을 떠날 때(17:8) 소라와 에스다올 지역을 지나 왔기 때문에 정탐꾼들과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Wycliffe, Matthew Henry). (2) 에브라임의 방언은 특색이 있는데(12:6) 이 청년은 에브라임 방언을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졌을 가능성도 있다(A.C. Hervey). 한편 이 밖에도 혹자는 단 사람들이 밤에 미가의 집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종소리(출 28:35)를 듣고 레위인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으로 추측한다(Cassel). 그러나 본 절은 분명히 단 사람들이 미가 집을 발견하고서 그곳에 유숙하러 가다가 레위 청년을 만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같은 추측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이 구절로 볼 때 단 사람들은 레위 청년이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청년을 금방 알아본 이유가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 준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이 구절로 볼 때 단 사람들은 레위 청년이 생계 수단을 구하기 위해 떠돌아 다녔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정탐꾼들이 레위 청년을 금방 알아본 이유가 이전에 이미 안면이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을 한층 짙게 해 준다.
18:4 나를 고용하여. 여기서 ‘고용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사카르’는 임금을 주고 고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 절에서 레위 청년은 자신이 삯을 받고서 제사장으로 고용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종교인들이 얼마나 부패했던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이다. 즉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받는 성직인데도 불구하고 레위 청년은 이에 대하여 천박한 직업 의식을 드러내었다. 한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 또한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복음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성스러운 일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있다(마 28:19, 벧전 2:9). 그리고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상업적 이해 관계가개입되어서는 아니되며, 다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피차의 부족함을 채우는 일이 요청된다(고후 8:14). 왜냐하면 성도들이 누리는 복음은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9:18). 특히 교회의 교역자들은 자칫 천박한 직업 의식에 빠져 거룩한 복음 사역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 봉사하기를 힘써야 한다(요 10:11-12). 그리고 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은 교역자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행 6:4).
18:5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1:1에서는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했는데 본 절에서는 단 사람들이 하나님(히, 엘로힘)께 신탁을 구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이 레위 청년이 에봇과 드라빔(17:5)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Cassel). 한편 단 사람들이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호칭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 레위인이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닌 가나안의 어떤 신인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Goslinga).
18:6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단 사람들과 달리 이 레위 청년은 ‘여호와’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간접적이나마 단 사람들에게 자신이 여호와께 신탁을 구할 자격이 있는 합법적인 제사장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가는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는 말은 여호와께서 그 길을 주장하고 계시니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Matthew Henry).
18:7 라이스에 이르러. 라이스 또는 레센(수 19:47)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오늘날의 ‘텔 엘 카디’(Tell el Qadi)에 해당된다. 팔레스타인 최북단에 위치한 이곳은 헬몬 산에 가려 아람과 단절되어 있고, 레바논 지역에 의해서 페니키아와도 단절되어 있어서 외부의 침략을 받을 염려가 거의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리고 요단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인하여 용수 또한 충분했기 때문에 힘이 약한 단 지파의 정착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더욱이 원주민들은 이러한 천연적인 조건에 익숙해져 외부의 침략에 대해 무방비 상태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빈약했으므로 단 지파가 정복하기에는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여기서 ‘평온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는 ‘풍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富)를 벌어 들여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 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Goslinga, Pulpit Commentary).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 가서 단 자손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28절).
시돈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평온하며. 여기서 ‘평온하다’에 해당하는 ‘쉐케트’는 ‘풍족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는 상태’를 의미한다. 실제로 시돈인들은 동서 교역의 중개지로서 또한 상아 제품 제조 산업 따위로 많은 부(富)를 벌어 들여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라이스 거민들이 이러한 시돈 사람 같은 경제 생활을 누렸다함은 그들이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음을 의미한다(Goslinga, Pulpit Commentary).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당시 라이스는 시돈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돈은 레바논 산맥의 장애로 인해 라이스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렸으므로 굳이 라이스에까지 간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따라서 라이스는 천연 방벽을 의지하여 사실상 독립된 생활을 누리고는 있었으나 자체 내의 방어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뒤에 가서 단 자손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28절).
18:9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 매우 좋더라. 본 절에서는 단 지파가 라이스를 공격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동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제시한 가나안 정벌의 신앙적 동기(민 14:6-9)와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외형적으로 보기에 좋기 때문에 그 땅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없는 자들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자신의 행동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18:10 평화로운 백성. 이에 해당하는 ‘암 보테하’는 ‘방심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는 라이스 거민들이 물질적 풍요와 천연적 방어벽을 과신하여 안이한 심경에 젖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1:2, 2:13, 수 2:24, 6:2, 10:8, 삼상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청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 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11절)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31절)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전 10:31).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갖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넘겨주게 될 것이다(고후 10:4).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일반적인 성전(聖戰)의 구호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을 ‘여호와’(1:2, 2:13, 수 2:24, 6:2, 10:8, 삼상 7:8)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단 사람들은 ‘엘로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 레위 청년에게 신탁을 구한 것과 관계 있을 것이다. 5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 절에 기록된 성전 구호는 단순히 형식만 따랐을 뿐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본래의 성전 구호와 비길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단 지파의 전쟁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전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기업으로 받은 땅을 저버리고(11절) 심지어 우상 숭배에 깊이 젖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0-31절) 마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한편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표어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원히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전 10:31). 그러나 현실의 복잡 다양한 제반 상황들에 적응하다 보면 그러한 표어가 한갖 공허한 추상적 원리로 머물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그와 전혀 상반되는 일을 하면서도 그 표어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 그러한 표어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 함께 하사 모든 대적들을 성도의 손에 넘겨주게 될 것이다(고후 10:4).
18:11 단 지파의 가족 중. 여기서 ‘지파’와 ‘가족’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 지파에는 오직 한 가족, 즉 ‘수함 가족’(민 26:42)만 있었기 때문이다. 13:2 주석 참조.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여기서 600명은 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서 이들 앞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21절). 따라서 현재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단 지파의 총 인원은 어림잡아 이, 삼천 명 정도였던 것 같다(Hervey). 이와 같이 단 지파의 인구 수가 과거 장정만 6만 여명 가량(민 1:39, 26:43)에서 이토록 현저히 줄어든 것은 아마 그동안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들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는 아직 소라나 에스다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구 수가 급격히 즐어들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심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더 타당성 있는 견해라 하겠다(Matthew Henry).
육백 명이 무기를 지니고. 여기서 600명은 무기를 가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정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어린 자녀들로서 이들 앞에 가도록 되어 있었다(21절). 따라서 현재 라이스 정복 길에 나선 단 지파의 총 인원은 어림잡아 이, 삼천 명 정도였던 것 같다(Hervey). 이와 같이 단 지파의 인구 수가 과거 장정만 6만 여명 가량(민 1:39, 26:43)에서 이토록 현저히 줄어든 것은 아마 그동안 아모리 족속과 블레셋 족속들의 압박에 의해 인원이 크게 축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이는 아직 소라나 에스다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구 수가 급격히 즐어들었다고 해도 그 차이가 심한 것으로 보아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보다 더 타당성 있는 견해라 하겠다(Matthew Henry).
18:12 유다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진 치니. 단 지파가 라이스를 향하여 북쪽으로 길을 떠난 뒤 처음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머문 곳은 예루살렘에서 몇 시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기럇여아림’이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도로상에서 약 14.4 km 떨어진 지점이다. 일찍이 이곳 기럇여아림은 교활한 간계로 여호수아와 동맹을 맺어 멸망을 피했던 기브온족의 네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수 9:17). 이 지역은 단 지파에 의해 ‘마하네단’, 즉 ‘단의 장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유다 지경 내에 위치한 이곳은 삼손이 처음 여호와의 신께 감동되었던 곳이기도 하다(13:25). 한편 혹자는 본 절과 관련 단 지파가 이곳에서 상당 기간 정착했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본 절 이후의 사건은 본 절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사건인 점에 비추어 볼 때 단 지파는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바로 라이스 정복길에 나선 것으로 보아야 한다.
18:13 거기서 떠나 에브라임 산지 미가의 집에 이르니라. 기럇여아림에서 미가의 집이 있는 에브라임까지는 약 20 km 정도의 거리이다. 이는 곧 걸어서 5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18:14 이 집에. 이에 해당하는 ‘바바팀’은 복수형이다. 그래서 KJV, NIV, RSV 등은 이를 ‘이 집들에’(in these house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미가의 집이 여러 건물들로 구성된 집이었음을 시사해 준다(Goslinga).
에봇과 … 부어 만든 신상. 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각종 우상들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3, 5 주석을 참조하라.
에봇과 … 부어 만든 신상. 미가가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각종 우상들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17:3, 5 주석을 참조하라.
18:15 청년 레위 사람의 집 … 이르러. 미가의 집 중에서도 레위 청년이 머물고 있던 집은 따로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곳은 아마 미가의 신당일 것이다(17:5). 본 절을 통해서 보더라도 미가의 집은 많은 건물들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있다.
문안하고.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청년을 만났었기 때문에(3-6절) 그의 건강을 묻는 등 우호적인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어 들어온 자신들 때문에(16, 17절) 레위 청년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켰을 것이다.
문안하고.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은 이전에 레위 청년을 만났었기 때문에(3-6절) 그의 건강을 묻는 등 우호적인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어 들어온 자신들 때문에(16, 17절) 레위 청년이 놀라지 않도록 안심시켰을 것이다.
18:16 문 입구에 서니라. 본 절에서 18절까지는 도적떼의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 준다. 문 입구에 선 무장한 600명의 단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그들의 동료들이 일을 마치고 미가의 집을 나올 때까지 파수하고 있었다. 한편 이로 볼 때 미가는 어느 정도 군사력이 있는 소부족의 부족장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22절에서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단 지파의 뒤를 좇았던 것도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18:17 그리로 들어가서. 다섯 사람의 정탐꾼들은 레위 청년을 잘 설득하여 동료들이 있는 문 밖으로 내보내어 함께 있게 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1절). 한편 여기서 ‘들어가서’에 해당되는 원어는 ‘알라’로서 ‘올라가다’라는 뜻이다. 왕하 23:12이나 렘 19:13을 보면 ‘아하스의 다락 지붕’에 제단이 있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미가의 신당도 다락방이나 2층 건물에 있었음이 분명하다(Keil, Hervey).
문 입구에 섰더니. 여기서 ‘섰더니’에 해당하는 원어 ‘나차브’는 ‘배치하다’라는 뜻도 지닌다. 이로 보아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 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문 입구에 섰더니. 여기서 ‘섰더니’에 해당하는 원어 ‘나차브’는 ‘배치하다’라는 뜻도 지닌다. 이로 보아 단 자손들은 미가의 우상을 강탈하기 위해 600명의 군사로 삼엄한 경계를 폈음이 분명하다.
18:18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단 사람이 신당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레위 청년이 자기 주인의 우상들을 다 집어내는 것을 보고서야 이제 놀라서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아마 이전까지는 단 사람들이 미가의 신을 경배하려고 신당에 들어간 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이에 대해 이 레위 청년은 돈으로 고용된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미가의 신상에 함부로 손 댄 것을 불경하게 여기지 않고 단지 도의적으로 주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탓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Cassel).
18:19 네 손을 입에 대라. ‘잠잠하다’는 말의 반복으로 ‘아무말도 하지 말라’(Don’t say a word, NIV)는 뜻이다.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본서 기자는 단 사람들의 이러한 제안을 기록하기 이전에 벌써 17절과 18절에서 레위 청년을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단 사람들이 레위 청년을 문안할 때부터(15절) 이미 그를 ‘제사장’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아버지’에 대해서는 17:10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본서 기자는 단 사람들의 이러한 제안을 기록하기 이전에 벌써 17절과 18절에서 레위 청년을 ‘제사장’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단 사람들이 레위 청년을 문안할 때부터(15절) 이미 그를 ‘제사장’으로 깍듯이 예우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아버지’에 대해서는 17:10 주석을 참조하라. 이는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어이다.
18:20 제사장이 마음에 기뻐하여. 여기서 레위 제사장의 타락한 본성을 또 다시 보게 된다. 처음에 그는 생계를 잇기조차 어려운 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던 미가의 제안에 감격하여 한 개인의 제사장으로도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이 레위 청년은 미가에게서 아들과 같은 사랑도 받았다(17:10-11). 그러나, 단 사람들의 새로운 제안은 단순히 경제적인 충족 뿐만 아니라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명예까지 부여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안을 기쁘게 수락했다. 이와 같이 한번 물질에 빠졌던 사람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자기 욕구를 더 잘 채워 줄 대상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이전의 은인까지도 배반한다.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 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버리고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을 훔친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31절).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이처럼 보다 나은 조건에 미혹된 제사장은 본래 주인과의 의리와 계약을 버리고 앞장서서 우상과 종교 기물들을 훔친다. 그리고 단 지파와 동행한다. 이렇게 하여 미가의 가정을 타락시켰던 이 제사장은 이제 한 지파 전체를 잘못된 우상 숭배의 길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30-31절).
18:21 그들이 돌이켜서 … 떠나더니. 단 지파는 다시 라이스 땅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물품을 앞에 두고 진행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미가와 그의 이웃들이 뒤에서 따라와 공격하는 것을 대비한 조치였을 것이다(22절).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 여기서 ‘어린 아이들’에 해당되는 ‘하타프’는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인들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값진 물건’에 해당되는 ‘케부다’는 시 45:13에서와 같이 ‘값진 것’ 또는 ‘영화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것을 ‘탈 것’(carriage)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 ‘케부다’라는 단어가 ‘무거운’, ‘힘든’이라는 뜻의 ‘카베드’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을 가리키기 보다는 무거운 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Cassel). 어쨌든, 이 물건들은 수레 같은 운반 수단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 여기서 ‘어린 아이들’에 해당되는 ‘하타프’는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여자와 노인들 그리고 보호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다음으로 ‘값진 물건’에 해당되는 ‘케부다’는 시 45:13에서와 같이 ‘값진 것’ 또는 ‘영화로운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KJV에서는 이것을 ‘탈 것’(carriage)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혹자는 ‘케부다’라는 단어가 ‘무거운’, ‘힘든’이라는 뜻의 ‘카베드’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귀중한 물건을 가리키기 보다는 무거운 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Cassel). 어쨌든, 이 물건들은 수레 같은 운반 수단에 의해 옮겨지고 있었을 것이다.
18:22 모여서 단 자손을 따라 붙어서. 미가는 제사장과 자기 신상이 없어진 것을 한참 후에 알고는 곧장 추격대를 조직하여 단 자손을 따라갔다. 배경은 다르지만 이 장면은 마치 라반이 야곱을 추격하는 장면(창 31장)과 유사하다. 특히 둘 다 가정의 수호신을 훔쳐갔다는 점(창 31:19)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미가는 추격길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단 사람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과 짐승들과 물건들로 인해(21절) 빨리 진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23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 여기서 ‘모아 가지고’에 해당하는 원어는 ‘도움을 호소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아크’의 수동태로서 ‘함께 부름을 받다’ 또는 ‘함께 모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라는 단 사람들의 질문의 뜻은 ‘우리가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고 너희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모여 왔느냐’라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이것은 미가가 자신들의 뒤를 추격해 온 이유를 잘 알면서도 단 사람들이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있음을 보여 준다.
18:24 내가 만든 신들. 이처럼 미가는 은으로 만든 신상과 에봇, 가정의 수호인이 드라빔(17:4-5)들을 가리켜 스스럼없이 ‘나의 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참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영적 무지의 발로로 볼 수 있다. 7:2-3 주석 참조.
18:25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여기서 ‘노한 자들’이란 새끼를 빼앗긴 곰처럼 금방이라도 공격해 올 것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삼하 17:8). 단 지파 사람들은 힘의 우위를 내세워 자신들이 미가의 소유물 뿐만 아니라 미가와 추격대 전원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18:26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본래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이 단지 자기 손으로 만든 신상을 소유하는 것에서 복을 받으리라고 기대했던 미가(17:13)였기때문에 이처럼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와 대적하면서까지 신상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현세적인 복에 몰두했던 미가로서는 자신의 목숨에 대해 남다른 애착심을 가졌을 것이다.
18:27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본서 기자는 라이스 거주민들에 대해서 거듭 이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아마도 이것은 본서 기자가 그러한 라이스 거민들을 습격한 단 지파의 잔인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그런 것 같다(Hervey). 한편 ‘ … 을 만나’에 해당되는 ‘보 알’은 어떤 사람을 갑자기 덮치는 것을 가리킨다(창 34:25).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수행하던 성전(聖戰)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수 6:4, 8:19, 11:11).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10절), 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수 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는 여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땅은 본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칼날로 그들을 치며 그 성읍을 불사르되.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수행하던 성전(聖戰)의 전형적인 표현이다(수 6:4, 8:19, 11:11). 단 지파는 처음 라이스를 향하여 출발할 때부터 이 전쟁을 ‘성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는데(10절), 라이스를 정복할 때도 철저히 그러한 의식으로 수행한 듯하다. 한편 이에 대하여 수 19:47에서는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서 기자는 여기서 어느 정도 부정적으로 적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라이스 땅은 본래 단 지파의 영토가 아니므로 그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자신의 본래 기업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약한 민족을 공격하는 침략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당시 단 지파의 타락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18:28 본 절에서 기자는 다시 라이스의 지형적 여건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라이스에 대한 단의 침략이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베드르홉’이란 지명의 뜻은 ‘르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인 훌레(Huleh)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게 된다.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베드르홉 가까운 골짜기에 있어서. ‘베드르홉’이란 지명의 뜻은 ‘르홉의 집’이다. 민 13:21과 삼하 10:6에 따르면 이 지명은 소바 왕 하닷에셀의 아비 르홉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아셀 지파의 지경인 훌레(Huleh) 평지 윗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골짜기를 통하여 흐르는 물은 요단 강에 이르게 된다.
상종하는 사람도 없음이었더라. 여기서 ‘상종하다’에 해당하는 ‘다바르’는 ‘친밀히 교제하다’는 뜻 외에도 ‘사업상 교류하다’는 뜻이 있다. 이로 보아 라이스 거민들은 지형상 외부와 격리되어 있어 국가간의 외교적 친선 도모나 경제적 교류 따위를 꾀하지 못했던 것 같다.
18:29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이곳 라이스는 가나안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7절 주석 참조. 그래서 이곳을 단이라고 칭한 이후 부터는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의 경계를 말할 때에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란 말을 쓰게 되었다(20:1). 여기서 ‘브엘세바’는 팔레스타인 최남단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기업이다(수 15:28). 한편 이때부터 실제로 단 지파는 단 지역의 사람과 소라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로 분리된 듯하다. 11절 주석 참조. 아무튼 이후로 성경에선 이들 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든데,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에 대해서는 한 명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Cassel). 그리고 요한계시록에도 열 두 지파 가운데 단 지파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장). 결국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고 이분(二分)되었던 단 지파는 영적인 이스라엘의 족보에서조차 사라진 셈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원인을 단 지파의 거족적인 우상 숭배 탓으로 이해한다.
18:30 본 절에서는 단이 라이스에 정착한 이후 독자적으로 행한 우상 숭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청년’(14-20절)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Wycliffe,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 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록 모세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을 삽입하여 ‘므나쉐’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 절을 ‘므낫세의 아들’(the son of Manasse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the son of Moses)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Keil).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 ‘눈’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Wycliffe).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본 절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자들간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왕하 15:29, 17:6, 25:8). 그러나 유대인 학자 데이빗 킴치(David Kimchi)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삼상 4:17)로 생각한다(Keil, Hervey, Lange).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 것으로(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삼상 1, 3장, 4:3) 사울 때에는 놉에(삼상 21장),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16:39, 21:29). (2)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Keil). 17:3 주석 참조. (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 여기서 ‘요나단’은 본래 미가의 집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단 지파의 제의를 받고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된 ‘레위 청년’(14-20절)이라는 데에는 학자들간에 이견이 없다(Wycliffe, Keil & Delitzsch). 그런데 그 외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세라는 이름을 ‘므낫세’로 읽도록 모세라는 히브리어 문자 사이에 작은 문자 ‘눈’을 삽입하여 ‘므나쉐’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JV에서는 본 절을 ‘므낫세의 아들’(the son of Manasseh)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탈무드나 70인역(LXX), 수리아역 등을 볼 때 이것은 분명히 ‘모세의 아들’(the son of Moses)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Keil). 한편 히브리어 성경 필경사들이 이와 같이 ‘모세’를 ‘므낫세’로 읽도록 ‘눈’을 첨가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1) 모세의 이름을 신성시하던 히브리인들이 ‘모세’란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명기함으로써 불경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이다(Wycliffe). (2) 단 지파를 우상 숭배죄로 몰고 간 요나단을 모세와 같은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본 절의 의미에 대하여는 학자들간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유수나 디글랏 빌레셀에 의한 앗수르 포로 유수로 생각한다(왕하 15:29, 17:6, 25:8). 그러나 유대인 학자 데이빗 킴치(David Kimchi)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엘리 시대 때 블레셋이 법궤를 탈취해 갈 때(삼상 4:17)로 생각한다(Keil, Hervey, Lange). 그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일리가 있다. (1) 31절에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라는 언급이 나오기 때문이다. 실로의 회막은 여호수아 때에 세워진 것으로(수 18:1) 사무엘 때까지 그곳에 있었고(삼상 1, 3장, 4:3) 사울 때에는 놉에(삼상 21장), 그리고 다윗 때에는 기브온에 있었다(대상 16:39, 21:29). (2) 미가의 새긴 우상이 앗수르의 침략 때까지 계속 해서 그곳에 있었다면 분열 왕국 시대에 여로보암이 그곳에 다시 금송아지를 세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세운 것은 어디까지나 미가의 전통을 따라 행한 것이다(Keil). 17:3 주석 참조. (3) 이스라엘의 기강이 바로 잡힌 사무엘, 다윗, 솔로몬 시대에까지 한 지파 전체가 그러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도록 용납되었다고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사로잡힌 날’이란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해 법궤가 빼앗기고 이스라엘이 내외적으로 연약해졌을 때를 가리킴에 분명하다.
18:31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이러한 본 절의 기록은 본서가 사무엘 시대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암시해 준다(Goslinga). 왜냐하면 회막이 엘리 시대까지는 실로에 있었으나 블레셋에 의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이후부터(삼상 4:21-22) 실로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사무엘에 의해 실로의 회막이 라마로 옮겨졌을 것이라 보고 있으나(삼상 7:17) 확실치는 않다(Hervey).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삼상 3:21).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수22:16).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는 성막이 보관되어 있던 실로였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정한 절기 때에나 기타 개인적으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실로에 모였다(삼상 3:21). 이러한 관습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것으로서, 모든 지파가 하나님의 동일한 언약 공동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될 때까지 실로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중심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단 자손이 단에 신상을 세우고 섬긴 것은 언약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매우 가증한 죄악이었다(수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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