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주석, 사사기 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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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본 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례(3:7, 10: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 숭배 죄를 범했을 것이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죄에 대하여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출 20:5) 징벌하리라고 경고하셨다.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블레셋이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것은 이미 이전에도 있던 일이다(3:31, 10:7).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 넘겨 본격적으로 고통당하게 하신 것은 이때부터이다. 한편 블레셋족속(Philistines)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해적 활동과 중계 무역을 하던 사람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사람을 잡아 애굽에 노예로 팔기도 했던 악한 집단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이들은 그레데(Crete)와 에게해의 섬들로부터 남부 팔레스타인 해안 지대로 이주해 와서는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러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다른 때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40년 기간은 정확히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이스라엘은 블레셋으로부터 괴롭힘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절). 그리고 블레셋 치하에서 삼손이 사사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20년 밖에 안 되며(15:20), 삼손 이후에도 블레셋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이다(삼상 4장, 17:1-5 삼하 5:17-25). 그러나 사무엘의 통치 말엽에 블레셋의 압제가 일시 소강 상태를 이루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까지의 기간을 대략 40년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도 블레셋은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다윗 왕이 저들을 정복함으로서(삼하 8:1) 마침내 블레셋의 압제는 끝이 난다(Pulpit Commentry).

 

13:2 소라 땅. 이곳은 처음에 유다 지파의 기업이었으나(수 15:33) 이후 단 지파에게로 넘어갔다(수 19:41). 그러나 왕국 시대에 이르러 유다의 세력이 강성해졌을 때 다시 그 땅은 유다 지파에게로 반환되었다(대하 11:10). 이처럼 소라 땅이 두 지파의 기업으로 왔다갔다한 이유는 아마 그곳이 두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사사시대 동안은 계속 단 지파의 기업으로 존재했다. 한편 이곳 소라(Zorah)는 현대의 ‘사라’(Sarah)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벧세메스 북쪽 그리고 예루살렘 서쪽 약 20 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Goslinga, Garstang, Cundall).

단 지파의 가족. 다른 지파와는 달리 이 단 지파에는 여러 가문이 없고 ‘수함 가족’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민 26:42-43). 그래서 ‘지파의 가족’이란 말이 사용되었을 것이다(Keil, Goslinga, Hervey).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본문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늙었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3절에 의할 때 마노아의 아내는 처음부터 불임 여성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마노아 부부는 일찍부터 자녀를 생산하는 것에 대한 소망을 단념한 것 같다(Golinga). 또한 그들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큰 수치와 슬픔 가운데 살았을 것이다(삼상 1:5-6). 그러나 그러한 때 하나님께서는 강권적,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사 마노아 아내의 태를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3절).

[ 마노아의 아내 ]
인류 역사에서 가장 힘센 사람, 그래서 청사(靑史)에 무적의 장사(壯士)와 최강의 역사(力士)로 이름을 남긴 남자는 삼손이다. 그런데 그런 그를 낳아서 키운 어머니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름을 알려면 성경 외의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
바벨론 포로 기간에 랍비들에 의하여 저술되어 내려오는 ‘바벨론 탈무드’에서는 랍비들이 삼손의 어머니요 마노아의 아내인 그 여인의 이름을 ‘츨렐포니’(Zlelponi) 또는 ‘츨렐포니트’(Zlelponith)라고 일컬었으며(Baba Bathra 91a), 이로부터 후대의 문서들은 이것을 그녀의 이름으로 전승하였다. 이 이름은 역대상 4장의 족보에 나오는 것으로서 유다 지파에 속하는 에담의 자손들 중에 포함되어 있다(대상 4:1~4). 그런데 여기서 유다 지파의 자손들을 “소라 사람의 족속”(2절)이라고 하였고, 여호수아 15장에서 유다 자손에게 배당된 지역들에도 ‘소라’가 포함되어 있다(수 15:33). 다른 한편으로 여호수아 19장에서는 단 지파의 자손들에게 배당한 기업에도 ‘소라’(수 19:41)가 언급된 것을 보면, 이 ‘소라’(‘에스다올’과 함께) 지역에는 유다 지파와 단 지파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등장하는 사사기 13장은 그를 “소라 땅에 [사는] 단 지판의 가족 중 마노아”(삿 13:2)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에 기초하여 랍비들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소라’에 사는 유다 지파의 남자였고, 그의 어머니 ‘하술렐보니’는 동일한 소라 지역에 사는 단 지파의 여자였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한국어 성경의 ‘하술렐보니’(대상 4:3)는 히브리어 ‘הַצְלֶלְפֹּונִי 하츨렐포니’를 대충 음역한 것이고, 이 단어의 맨 앞에 붙은 ‘הַ 하’는 정관사 또는 접두어이므로 실제의 이름은 ‘탈무드’에 나오는 것처럼 ‘צְלֶלפּוֹנִי 츨렐포니’ 또는 한국어 성경의 음역대로 한다면, ‘술렐보니’였을 것으로 보인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마노아와 ‘츨렐포니’ 사이에는 ‘니샨’(Nishyan) 또는 ‘나샨’(Nashyan)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도 있었다고 한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여성의 불임(不姙)은 안타깝고도 서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여자들의 잉태 불능은 더 큰 축복의 시발점이었고 전화위복의 계기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7명의 석녀(石女)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사라, 리브가, 라헬, 레아, 마노아의 아내, 한나, 그리고 시온이다. ‘시온’에 관해서는 시 113:9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이들은 모두 한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여 고통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난 여인들이다.
삼손의 어머니가 이와 같은 위대한 여인들의 반열에 든 것은 그녀가 그만큼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사기 13장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남편 마노아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 곧 천사는 마노아에게 나타나기 전에 먼저 그녀에게 나타났으며, 그녀를 통하여 삼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알려졌고, 삼손의 양육에 관한 세부적인 지시사항들도 모두 그녀에게 먼저 통고되었다(삿 13:3~5, 9). 삼손의 어머니 ‘츨렐포니’는 천사가 시킨 대로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느라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13:3 여호와의 사자. 사사 시대에는 주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지만(2:1-5, 6:11-24) 선지자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4:4, 6:8). 이러한 현상은 사사시대가 신의 현현(theophany) 시대에서 선지자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왕정 시대를 지나면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했는데,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언급된 ‘여호와의 사자’는 자주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이는 본 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러한 수태고지(受胎告知)는 삼손의 경우 외에 성경에서 4 번 더 있었다. 곧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창 17:19, 18:10,14), 한나(삼상 1:17), 엘리사벳(눅 1:13),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눅 1:31)에게 주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수태고지는 구속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수태고지를 통해 당신이 몸소 장차 태어날 아이의 출생을 관장하시며, 특별히 그 아이를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13:4 너는 삼가 … 먹지 말지니라. 마노아의 아내는 나실인이 아니다. 다만 그녀에게서 태어날 삼손만 나실인이다(5절). 그런데도 그녀에게 삼손에게 요구되는 것과 꼭 같은 규례가 요구된 것은 태아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서이다. 또한 그녀 역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루는 한 도구로 성별되었음을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포도주와 독주. 모든 ‘술’을 대표한 용어이다. 그러나 굳이 구별하자만 ‘포도주’에 해당하는 ‘야인’은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레 10:9, 사 22:13). 그리고 ‘독주’에 해당하는 ‘쉐칼’은 과실주나 곡주(穀酒)는 물론사람을 취하게 하는 도수 높은 술을 의미한다.

부정한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규정하신 부정한 짐승(레 11장)이나 시체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나실인 역시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접하지 못하도록 엄히 규제되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민 6장).

 

13:5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나실인으로 지내려면 그 기간 동안 머리를 깍을 수 없었다(민 6:5). 그러나 그가 다시 일반인의 신분으로 되돌아 갔을 때에는 머리를 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태중에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자는 평생 동안 머리털을 밀 수 없었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나실인’으로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본 절도 이처럼 삼손이 영원한 나실인이 될 것임을 뜻하는데 이에는 삼손 외에도 요한(눅 1:13-17)이 더 있다(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나실인. 이에 해당하는 원어 ‘나지르’는 ‘바치다’, ‘거룩하게 하다’, ‘구별하다’는 뜻의 동사 ‘나자르’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의미한다. 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을 출발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다(민 9:12). 그리고 ‘나실인’은 포도 나무에서 나는 것과 독주를 먹을 수 없으며, 머리를 깎지 말아야 하고, 시체를 가까이하여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도 안 되었다(민 6:1-21). 이러한 나실인의 규례는 구속사적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제사로 자신을 드려 헌신, 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가 …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은 다윗 왕이 블레셋의 모성(母城) 메덱암마를 쳐서 빼앗았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삼하 8:1). 따라서 삼손의 등장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완전히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서막에 불과했다(Wycliffe). 한편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압제한 기간인 40년의 마지막은 다윗 때가 아니라 사무엘 때였다(삼상 7:12-14). 1절 주석 참조.

 

13:6 하나님의 사람. 이 말은 ‘여호와의 사자’(3절) 란 용어와 다른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붙여진 명칭으로(Cundall, Millar) 모세나(신 33:1) 엘리사(왕하 4:9, 40)와 같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Keil, Goslinga). 따라서 삼손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사자’ 곧 하나님을 모세와 같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이해한 것 같다. 이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라고 말한 표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녀는 자신에게 나타나 놀라운 소식을 알려 준 장본인이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용모를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했을 뿐 하나님의 사자 그 자체로서는 믿지 못했다.

심히 두려우므로. 여기서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야레’는 어떤 공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경외심이나 도덕적인 숭배감 등을 의미한다(창 28:17).

 

13:7 죽는 날까지 … 나실인이 됨이라. 마노아의 아내가 ‘여호와의 사자’가 들려준 말을 정확히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즉 그녀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 나실인이 됨이라”(5절)는 말이 곧 ‘영원한 나실인’을 뜻하는 것으로 분명히 이해하였다. 5절 주석 참조.

 

13:8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마노아는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하나님의 사자가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아기의 양육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아마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했던 말이 너무도 심각하고 중요한 말이었기에 태어나게 될 아들을 어떻게 양육시킬 것인지 더욱 자세하게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알아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는 마노아의 돈독한 신앙을 잘 드러내 준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마노아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다. 과거 모세도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신실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출 2:1-10).

 

13:9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의미이다(Living Bible). 한편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호칭이 ‘여호와’(1, 8, 16, 23, 24, 25절)와 ‘하나님’(5, 7, 22절) 두 가지가 상호 교환되어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본 장의 내용이 마노아의 가정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 블레셋과도 관련되어 있으므로 협의의 의미인 ‘여호와’와 넓은 의미인 ‘하나님’이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된 것 갈다.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두 번씩이나 먼저 나타난 사실에 대해 혹자는 마노아보다 그의 아내가 진리를 깨닫는 지혜가 많은 것(22-23절)으로 추정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마노아가 그의 아내가 전해준 하나님의 사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인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점(8절)으로 미루어보아 이러한 추정은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13:10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마노아의 아내는 다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되자 급히 남편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머리속에는 순간적으로 남편이 간절히 기도하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며(8절) 그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9절). 그래서 그녀는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남편에게로 달려가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것을 알려준 것이다.

 

13:11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카일(Keil)은 이 말을 ‘3-5절에서 언급한 내용이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의 해석과 같은 내용이 다음 절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마노아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나타났었던 바로 그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해 본 것이다. 한편 이로 보아 마노아도 그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21절).

 

13:12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말은 단순한 소망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마노아가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말했던 것처럼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의 소식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Matthew Henry).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기르다’에 해당하는 ‘미쉬파트’는 ‘재판’, ‘관습’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 절은 문자적으로 ‘그 아이의 관습(규례)은 무엇이 된 것입니까?’ 란 의미이다. 즉 마노아는 태어날 아이에게 독특하게 적용될 생활방식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물은 것이다(Keil). 그는 아마 민 6:2-20에 언급된 나실인의 규례 외에 그 아이에게 적용될 자세한 내용을 더 알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까. 본 절은 문자적으로 ‘그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란 의미이다. 개역성경은 영역 성경 중 KJV의 번역에 따랐으나 원문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게 번역되었다. RSV와 NIV 그리고 공동번역 및 70인역(LXX) 등은 원문에 충실하게 ‘그의 일들이 무엇입니까?’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본 절의 의미는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서 어떠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노아 부부가 행할 일에 관해서는 이미 방금 앞에서 질문되었다.

 

13:13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 이는 마노아의 아내가 임신 중 금해야 할 것(4절)과 장차 태어날 아이가 금해야 할 것(5절) 모두를 가리킨다.

그가 다 삼가서. 이 것은 태어날 아기 곧 삼손의 어머니가 금지해야할 사항에 대한 말이다. 원문상으로도 본 절은 ‘그녀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라’로 나와 있다. 때문에 모든 영어 성경들은 ‘그’를 ‘그녀’(She)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자녀양육에 있어서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력을 많이 받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당시 어머니에 의해 주도된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13:14 포도 나무의 소산. 민수기 6장 3-4절에 따르면 이에는 포도주와 포도주의 초 그리고 포도즙, 생포도와 건포도 뿐만 아니라 포도씨와 껍질까지 포함된다. 보다시피 이중에는 취하게 하는 포도주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먹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포도주도 마시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것들도 금지한 것이다. 이는 곧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교훈의 선례이다(살전 5:22).

 

13:15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다음 절에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으로 미루어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아직까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염소를 대접하고자 한 것 같다. 아마 그는 염소를 잡아 자기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려 했을 것이다. 염소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한 재산이었으며(삼상 25:2, 눅 15:29), 염소를 잡는 것은 손님에 대한 후대의 표시였다.

 

13:16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기드온의 경우와 똑같은 사례이다. 즉 앞서 기드온에게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자도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을 먹지 않고 번제물을 불로 살랐다(6:19-21). 이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나 기드온이 바친 음식을 먹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깨우쳐 주려는 데 있었다. 즉 여호와의 사자는 근본 하나님이신 바 인간이 취하는 것과 같은 음식을 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혹자는 본 절을 근거로 마노아가 처음부터 마음속에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로 염소를 준비하려 의도했다고 주장한다(Augustine, Cundall). 그러나 사실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다만 기쁜 소식을 전해준데 대하여 감사의 예물로 염소 새끼를 드리려 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자는 그 소식으로 인해 자신이 감사 받기를 거절하면서 마노아에게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그 감사를 나타내라는 의미로 본 절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마노아가 미리 번제를 그 사람을 위해 준비하려고 의도했다면 그것은 경건한 그의 신앙과 모순된다.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이 말속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염소 새끼를 먼저 하나님께 바치라고 권면하고 있음이 잘 나타난다. 이로써 그는 자기가 전해준 기쁜 소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13:17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혹자는 마노아가 자기 앞에 서있는 사람의 신분을 알고 싶어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고 주장한다(Cundall). 그러나 이 말은 마노아가 하나님의 사자가 지닌 신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이름만을 물은 것이다. 즉 마노아는 아직까지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의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를 찾을 수 있거나 그에게 예물을 드리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빛나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물었을 뿐이다(Goslinga).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이 말 가운데 마노아가 자기를 방문한 사람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 그 사람의 신분이나 정체를 알고자 의도했던 것이 아님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마노아는 그 사람의 예언이 성취될 때 그 사람의 뛰어난 영적 능력을 자신뿐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널리 알려 존경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13:18 내 이름은 기묘자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을 ‘기묘자’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기묘자’에 해당하는 ‘필리’는 ‘기묘자’에 해당하는 ‘펠레’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NIV, beyond understanding)또는 ‘놀라운’(RSV, wonderful)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아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아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9:6).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히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13:19 염소 새끼 하나와 소제물. 일전에 기드온은 번제로 ‘염소 새끼 하나와 무교 전병과 국’(6:19)을 취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마노아가 바친 소제물도 아마 기드온이 바친 것과 유사한 종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제물로는 발효된 식품과 꿀이 섞인 것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레 2:11). 따라서 마노아의 소제물은 본문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화덕에 구은 무교병이나 기름 바른 무교 전병이었음에 틀림없다(레 2:4).

이적이 일어난지라. 여기 사용된 ‘이적’이라는 용어는 역시 앞 절의 ‘기묘자’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근을 지닌다. 따라서 본 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사자의 행동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할만큼 놀라웠다’가 된다. 이 이적의 내용은 20절에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이적은 임신하지 못하던 마노아의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24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또한 역사상의 이적에 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정녀 탄생(마 1:23), 하나님의 성육신(요 1:14), 그리스도의 부활(마 28:7, 고전 15:13) 등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문학적 비유 내지 신화가 아니라 엄연히 역사상으로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인 것이다. 오늘날 합리주의를 숭배하는 신학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초자연적 요소들을 제외시키고 다만 자유, 평화, 헌신 등과 같은 소위 ‘예수의 정신’만을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코자 하는 지극히 불순한 행위이다(롬 10:6-7).

 

13:20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혹자는 19절을 근거로 하여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으며 다만 하나님의 사자가 그 불꽃을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이라고 주장한다(Goslinga, Cundall). 그러나 19절에는 마노아가 번제물에 불을 붙였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따라서 기드온의 경우에서와 같이(6:21), 이번에도 하나님의 사자가 이적으로 번제물을 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Keil). 이때 나온 불은 더러운 것을 태우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을 암시한다(히 12:29). 또 이 불은 제물을 태우면서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불꽃을 타고서 여호와의 사자가 승천한 것은 그가 마노아 부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마치셨음과 또한 그 자신이 정작 하나님이셨음을 시사해 준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창 17:3, 수 5:14, 단 8:17, 겔 1:28, 3:23, 43:3, 44:4). 즉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제서야 자기들과 대화한 사람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심을 깨달았다.

 

13:21 여호아의 사자인 줄 알고. 마노아 부부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던 사람을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으로 인지한 것(22절)은 번제단 이적 사건으로 인해서이다(20절). 그런데 본 절은 마치 그 후 여호와의 사자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므로 인해 그 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후의 사실을 추가적으로 언급함으로써 더욱 더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이었음을 확증하는 구절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인식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3:22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죄악에 물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경우에는 죽을 수 밖에 없었다(출 33:20). 따라서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본 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으며(사 6:5),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기 때문에 죽을 줄로 생각하였다(6:22-23, 창 32:30).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6, 10:19-20).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예수께서는 그 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길을 터 놓으신 것이다(히 9:14-15).

 

13:23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본 절은 마노아의 아내가 상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공포심에 휩싸여 있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남편을 위로하였다. 그 위로의 내용인즉 여호와께서는 전혀 자신들을 죽일 의향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그녀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제물을 열납하셨으며, 이적을 베풀어 보이셨고, 자신들과 대화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다. 일전에 기드온도 하나님을 보았지만 죽지 않았다(6:22-23).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취하사 그 본체의 영광을 가리고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6:23 주석 참조. 따라서 마노아와 그 아내도 비록 하나님을 보았지만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일. 여호와의 사자가 친히 현현(顯現)하신 것(3, 9절)과 번제단 불꽃 이적(20절)을 행해 보이신 것 등을 가리킨다.

이런 말씀. 삼손의 탄생을 예고해 주신 것(3절) 및 마노아의 아내가 지켜야 할 일(4, 14절), 삼손의 양육법(5절) 등에 대하여 일러주신 것을 가리킨다.

 

13:24 삼손이라 하니라.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삼손’이란 이름이 ‘태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세메쉬’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Goslinga, Cassel, Cundall, Matteww Henry, Wycliffe). 만일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이는 삼손이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여 광명을 주기 시작하는 것과(5절) 연관이 있다. 그런데 혹자는 ‘삼손’이라는 이름이 ‘봉사하다’란 의미의 갈대아어 ‘쉐마쉬’에서 유래했다고도 주장한다(Hervey). 이 주장에 따르면 ‘삼손’이라는 이름은 그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사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도 배제될 수 없다. 한편 그밖에도 A.D.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나 카일(Keil)은 삼손이란 이름이 ‘강하다’ 또는 ‘귀하게 여기다’란 의미를 지닌 ‘쉬므쉠’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앞의 두 가지 주장보다 어원적, 역사적으로 그 근거가 빈약하다(Cassel).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삼손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서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사무엘이 성장할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았으며(삼상 2:26)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눅 2:52).

 

13:25 소라. 2절 주석 참조.

에스다올. 예루살렘 북서쪽 약 23 km 지점에 위치한 단 지파의 성읍이다(수 19:41).

마하네단. 문자적으로 ‘단의 진’이란 뜻이다. 이곳은 삼손이 활동하며 생활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그가 태어난 이후 그의 부모들이 이곳으로 이주한 것 같다(16:31). 이곳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부모들이 거주했던 ‘소라’(2절)와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며 조그마한 성읍일 것이다. 18:12에는 이곳이 기럇여아림 뒷편,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의 지역인 것으로 나와 있다.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더라. 성령께서 삼손에게 강하게 임한 것을 나타낸다(Goslinga). 삼손은 그 마음과 몸을 주장하시는 성령께 사로 잡힌 바 되어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개 성령의 감동은 지혜, 예언 등 다양하게 나타나나 특히 삼손에게는 영웅적인 힘으로 나타났다(14:6, 19, 15: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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