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병거와 백성. 이는 잘 훈련된 군사력과 풍부한 군수 물자, 그리고 조직적인 힘 등을 나타낸다(수 11:1-5). 대적들의 이러한 당당한 조건은 400여 년 간의 애굽 노예 생활, 더욱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로 인해 힘이 미약해진 이스라엘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9:2). 특히 ‘말과 병거’는 당시 군사력의 상징으로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정예 주력 부대였는데, 당시 애굽과 가나안 민족들은 이러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출 14:7, 수 17:16).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그러한 말과 병거가 없었다.
두려워 하지 말라 …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이 대적들의 군사력 때문에 낙심하지 않아도 될 충분 조건이다. 즉 숱한 이적적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일과 또한 200여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12:37)을 광야의 숱한 역경 중에서도 별다른 희생 없이 가나안 문턱(3:29)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승패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2:33, 출 14:10-31, 민 14:39-45).
제사장. 순수하게 제사직만을 수행하는 일반 제사장과는 달리 비느하스(민 31:6)처럼 군사들과 함께 전쟁터에 참여하는 제사장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군목(軍牧)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유대 랍비들은 이들을 가리켜 특별히 ‘전쟁을 위하여 기름 부음 받은 자’(메쉬아흐 함밀하마)라고 불렀으며, 대제사장 다음 가는 높은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Talmud, Keil). 이들의 일은 전쟁터에 나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3, 4절)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이었다(Pulpit Commentary).
낙성식. ‘봉헌하다’는 뜻의 ‘하나크’에서 온 말로, 장막이나 일반 가옥 및 성전 등을 완공한 후 이를 기념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식을 의미한다(대하 7:5, 9). 한편 요나단 탈굼(Jonathan Targum)을 인용하여 랍비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성식 때 중요한 예식으로 ‘쉐마 본문’(6:4-9)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원통 속에 넣어 그것을 문설주에 달아매는 순서가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Pentateuch, Vol.I-iii, p. 401).
집으로 돌아갈지니. 즉 병역 면제에 관한 규정이다. 그런데 유대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면제 혜택의 경우는 단지 이스라엘이 멀리 떨어진 타성읍을 공격하기 위해서 징집할 경우에만 허용되었고,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투 등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반드시 치러야 할 전쟁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 p. 806). 여하튼 전쟁 수행시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새 집을 건축하고 미처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5절), (2) 포도원을 만들고 미처 그 소산을 먹어 보지 못한 자(6절), (3) 여자와 약혼하고 미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못한 자(7절) 등이다. 그리고 겁이나 두려움이 많은 자들은 아예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8절). 한마디로 이들 모두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여호와의 전쟁을 위해 온전히 쏟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전쟁에서 제외되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수효의 다소(多小)에 관계 없이 온전한 자원자들로만 구성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첫째, 여호와의 공의를 실현하는 여호와의 전쟁에는 몸과 마음이 동참하는 ‘온전한 헌신’이 요청된다는 사실과 둘째,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이다.
타인이 … 행할까 하노라. 새 집을 건축한 지 얼마 안 있어 집을 떠나 전쟁에 참전케 된 자는 집 걱정 때문에 마음이 나뉘어 전쟁에 전심전력하지 못하게 될 것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타 유사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6-7절). 한편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런 자들은 1년 동안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24:5).
먹지. [히, 할랄] 여기서 ‘먹다’의 문자적 뜻은 ‘시작하다’(3:24), ‘파하다’(시 89:31), ‘범하다’이다. 이는 곧 과실의 껍질조차 ‘벗기지’ 못한 상태임을 강조해준다.
형제들의 마음도 … 낙실될까 하노라. 흔히 부정적인 것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두려움에 떨면 다른 사람들도 그에 영향을 받고, 더 나아가 군대 전체의 사기가 저하될 우려가 충분히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두려움과 겁에 질린 자들을 사전에 군대 편성에서 제외시켜야 했다.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어떤 성읍에 대하여 무조건 선전 포고하기에 앞서, 먼저 화친을 제의하여 평화적으로 항복을 받아 내라는 말이다(삿 21:13). 이는 하나님의 섭리하에 수행되는 전쟁에 있어서도 가능한 한 피흘리는 일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악인이라 할지라도 죽지 않고 돌이켜 사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준다(겔 18:23). 오늘날 죄인인 인간이 멸망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인데,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참된 평화의 사절로 파송하셨다(요 3:16).
공. [히, 마스] 원뜻은 사람을 기진 맥진하게 만드는 ‘짐’을 가리키나 점차 ‘강제 노동 형태의 세금’, ‘조공’ 등을 가리키게 되었다. 즉 이는 정복자가 전쟁에서 취하는 전리품이 아니라, 공식 계약 관계를 통하여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바치던 일정량의 상납품을 가리킨다.
남자를 다 쳐죽이고. 여기서 ‘남자’는 군대에 나갈 만한 성인(成人)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은 한 가정의 기력(21:17)이자 나라의 힘으로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멸절시키라는 것은 곧 그 족속을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이스라엘이 획득한 전리품(戰利品)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정당한 재산으로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나아가 당신이 주신 일종의 선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들에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는 말씀을 생각케 해준다. 즉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간의 결국은 이와 같이 극명한 차이로 나타나게 된다.
이 민족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가리킨다(17절, 7:1).
호흡 있는 자. [히, 네샤마] 원래 의미로는 ‘바람’, ‘생명의 호흡’, ‘영혼’, ‘신적 영감’ 등의 다양한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이처럼 오직 가나안 족속에 대해서는 다른 이방 족속들에게 적용하던 전쟁의 법칙(10-14절)을 적용하지 말도록 금하고 있는 까닭은 다음 몇가지 이유에서이다. (1) 가나안 족속은 갖가지 극심한 죄악으로 인하여, 이미 오래 전부터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작정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9:4-5, 창 15:16). (2) 가나안 족속은 특히 가증한 우상 숭배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가나안 땅에 남겨 둘 경우,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3) 가나안 땅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신정국가(神政國家)를 세우기로 작정한 성별(聖別)된 곳으로서, 그곳에는 그 어떠한 죄악의 요소도 ‘절대 그리고 조금이라도’ 남겨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화친을 제의함 없이 가나안 족속들을 모조리 멸절시키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진멸하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열국들을 진멸하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가축과 호흡 있는 모든 것은 물론이고 남녀노소 모두를 진멸하라고 지시하셨는가?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품성과 조화될 수 있는가?
이 구절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은 공의와 따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공의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동기를 아신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죄를 근절해야 할 때가 온다. 하나님의 공의가 홍수 때에 나타났고(창 6-9장), 악인이 파멸될 역사의 마지막(계 21-22장)에 있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그분의 공의와 신실한 자들을 위한 사랑으로 악을 근절하여 인류가 함께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지시들은 역사에서 일어난 그 사건들의 상황 및 가나안 사람들의 더 광범위한 역사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로부터 야곱이 애굽에 들어갈 때까지 200 년 넘게 부족장들과 그들의 족속들은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나타냈으나 가나안의 거민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들의 파멸은 하나님을 거절하기로 한 자신들의 선택과 온갖 종류의 죄악에 빠져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데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가 400 년 동안 유배되어 압제를 받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예언되었다. 그렇게 오래 지체한 이유가 창 15:13-16에 설명되어 있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창 15:16). 가나안 민족들이 자신들의 악한 행실로 멸망의 잔을 서서히 채우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을 참으셨다.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것과 소위 신성한 매출을 포함한 우상숭배의 행습을 묘사하는 가나안의 문서들을 보면 그들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가나안 사람들을 몰아낸 것은 이스라엘이 더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신 9:5).
가증한 일. 7:26, 레 18:22 주석 참조.
본받게 하여 … 범죄하게 할까.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B.C. 1405-1390) 이후부터 바벨론 포수와 회복기(B.C. 586-400)까지의 구약 전 역사를 통하여 우상 숭배 여부에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받기도 하고 축복을 받기도 하였다. 즉 여호와를 섬기느냐 아니면 우상을 섬기느냐 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11:26-25, 왕상 14:9-10). 따라서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미혹되어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엄히 경계하여야 했는데, 그 근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택함받은 백성들의 첫째 가는 의무였기 때문이다(출 20:3, 말 2:2).
들의 수목. ‘들’에 해당하는 ‘사데’는 ‘들’, ‘거친 땅’, ‘흙’ 등과 같은 의미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본 절을 ‘들에 서 있는 나무’로 번역하였다. 아마 이는 들판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를 가리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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