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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모압 평지는 요단 강 건너편(동편)에 위치한 초목 지대로서 곧 사해 북쪽에서 얍복 강 근처까지 형성된 거대한 평원(plain)을 가리킨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머문 최종 지점이다. 이스라엘은 수 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동안 이곳에서 제2차 인구 조사를 실시(26장)하였으며, 군대를 재검열하고 율법을 거듭 선포하였으며(신 1:1-3), 가나안 정복을 위해 여호수아를 차기(次期) 지도자로 임명하였고(신 34:9),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죽었다(신 34장). 그리고 신명기 전체의 기록은 이곳에서 행한 모세의 설교이다.

여리고. 요단 강 서쪽 약 8 km 지점과 예루살렘 동북 약 29 km 지점에 위치한 큰 성읍으로,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이 최초로 점령한 가나안의 성읍이다(수 6:21).

 

22:2 십볼의 아들 발락. ‘발락’은 ‘약탈자’, ‘파괴자’란 뜻으로 당시 모압의 왕이었다(삿 11:25).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 곧 이스라엘 군대가 아모리 남 왕국 ‘시혼’의 모든 성읍과 아모리 북 왕국 ‘옥’의 모든 성읍을 멸망시킨 일을 가리킨다(21:24, 35).

 

22:3 모압이 심히 두려워하였으니. 모압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정복했던 강력한 아모리 왕 시혼이 이스라엘을 쉽게 섬멸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이스라엘이 아모리를 여지없이 무찌르고 요단 강변까지 전진해 온 것을 보고, 모압은 이스라엘의 위세에 눌려 큰 두려움에 휩싸였고,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무찌를 묘책 찾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형제 민족이란 점에서 모압에게는 아무런 적대 감정이나 살의(殺意)도 갖고 있지 않았다(신 2:9).

이스라엘 백성이 많음으로 말미암아. 비평가들은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이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가 많았다는 것에 의심을 품고, 본 기록을 왕정 시대의 작품으로 돌린다(B. Gray).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200만명 가량의 인구 중 군대에 참가한 수가 60만명 이상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전체 백성 중 대략 1/3 가량이 군대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모압 왕으로부터 이러한 말이 나왔을 법 한 것이다. 아울러 이 말은 반드시 인구의 수효가 많다는 점 외에도, 그 위세가 등등한 점을 묘사한 말이라 할 수 있다.

 

22:4 미디안 장로들에게 이르되.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넷째 아들이다(창 25:1-4). 따라서 그의 후예들이 후일 미디안 족속을 형성하였는데, 주요 거주지는 시내 반도 일대였다(출 2:15, 16, 3:1, 민 10:29, 30). 그러나 그들 중 일부 족속은 모압과 암몬의 동편 경계 지대에서도 살고 있었다(창 36:35). 이들의 주요 생계 수단은 대상(隊商)을 통한 무역이었으나, 때로 유목 생활도 하였다. 그리고 미디안 장로들은 고대 족장 체제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각 부족의 지도자급 인사들로서, 그들 중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는 ‘왕’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31:8, 수 13:21). 한편 당시 발락은 이스라엘 대군을(3절) 군사력으로는 무찌를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백방으로 묘안을 찾던 중 이처럼 아카바 만 동북쪽 아라비아에 살고 있던 ‘미디안 장로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추측컨데 이 장로들은 모압 왕실에 고용되어 각종 문제들에 조언을 해주던 마술사 혹은 복술가이었거나 아니면 왕실을 드나들며 외방의 정보와 문물을 전해주던 유력한 대상(caravan)들이었을 것이다. 즉 교역 여행을 통해 해박한 정보를 가진 미디안 장로들이었기에, 위경에 처한 발락은 그들의 지혜를 빌리기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술사(術士) 발람을 왕에게 추천했다(7절, 수 13:22).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자신들의 영토가 초토화되고 자신들 역시 멸절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다. 이러한 모압 왕 발락의 비유는 당시 유목 생활에 익숙한 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위협을 알리기에 매우 적절했다. 아울러 실제 유목 생활을 하던 미디안 족속들에게도 조만간 거친 소 이스라엘이 밀어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암시하여 그들도 모압과 공동의 운명임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공동대처해야 할 위급 사항임을 권면한 말이라 할 수 있다.

 

22:5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 강 가 브돌. 여기서 ‘강 가’란 고대 근동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유프라테스 강 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브돌’(Pethor, 앗시리아 자료에는 Pitru로 나옴)은 유프라테스 상류 서안(西岸)에 위치해 번창했던 메소포타미아의 한 성읍으로서, 갈그미스(Carchemish) 남쪽 약 19 km 지점에 있었다(따라서 이스라엘이 진 친 모압 평지로 부터는 대략 640 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은 그 당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종교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많은 마술사들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Strabo). 한편 ‘브올’(Beor)은 ‘멸망시키다’는 뜻의 ‘베올’에서 유래한 이름이며, ‘발람’(Balaam)은 ‘탐닉하는 자’,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란 뜻의 이름으로서, 묘하게도 물질에 현혹되어 이스라엘을 전멸시키려 했던 그의 성격 및 행적과 조화를 이룬다.

한편 발람이 어떤 인물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발람을 단순히 이방의 거짓 우상숭배자로 보아,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Philo, Ambrose, Augustine). 또 혹자는 그가 본래는 참선지자였으나, 다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 모압을 위해 일했다고 보기도 한다(Turtullian, Jerome). 그리고 또 다른 이는 그가 본래는 바벨론의 제사장이었으나, 후에 이스라엘 종교로 개종하였다가 결국 모압 왕에게로 넘어간 자라고 하기도 한다(Albright). 또한 발람이 단지 이방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복술가(卜術家)라고 하기도 한다(Keil & Delitzsch, op. cit. pp. 158-159).

또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발람’(혹자는 이 자를 창 36:32의 에돔 왕 ‘벨라’와 동일시하나 근거가 없다)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발람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복술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왔었기에, 모압 왕 발락이 그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치려 했던 것은 당연했다. 한편 발람은 거듭되는 여호와의 경책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발락의 요청을 이루려 하다가 마침내 이스라엘을 음행케 하여 몇몇을 멸망시켰고(25:1-5), 결국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31:8). 이 일로 인해 그는 ‘불의의 삯을 탐낸 탐욕의 선지자’, ‘거짓 선지자’, ‘음행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던 선지자’ 등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벧후 2:1-22, 계 2:14).

“일찍이 발람은 선량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배도하고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종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사자들이 그에게 온 용건을 말했을 때에 그는 발락의 보상을 거절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내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발람은 위험하게도 감히 유혹과 장난하려고 하였으며, 여호와의 권고를 듣기까지는 아무런 결정적인 대답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자들에게 그 밤을 자기와 함께 유하도록 간청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39).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발람의 거처 브돌과 모압과의 거리는 무려 400마일(약 640 km)이나 떨어져 있는 먼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 발락이 메소포타미아의 술사 발람을 부르러 미디안 장로들을 보낸 것은 (1) 이스라엘에 대한 모압 왕의 조급한 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고, (2) 아울러 당대에 술사(術士)로서 발람의 명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22:6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그 당시 고대인들은 복술가(卜術家)나 마법사들의 주술적(呪術的)인 주문(呪文)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상대방이 저주를 받고 큰 피해를 입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Egyptian Excration Text). 따라서 그러한 복술가들의 영적 힘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발락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을 멸하려 했다.

복을 받고 … 저주를 받을 줄. 성경은 결코 사탄의 권세와 능력을 부인하지 않는다(엡 6:12). 오히려 그 세력에 대하여 ‘공중 권세 잡은 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엡 2:2). 따라서 이교의 각종 점술가, 마법사, 박수, 복술가 등도 나름대로 사탄의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복술가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22:7 복채. [히, 케사밈] 이는 ‘분배하다’, ‘점을 치다’란 뜻의 ‘케삼’에서 유래한 말로서, 점을 쳐 준 값으로 점쟁이에게 주는 돈인 복채(卜債)을 가리킨다(벧후 2:15).

 

22:8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행자에 대한 호의(好意)라기 보다 장로들이 가져온 복채에 마음이 있어 그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만일 발람이 여호와의 참선지자였다면, 이때 그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는 저들을 오히려 저주하면서 여지없이 되돌려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한 자였다(벧전 2:15, 16). 한편 밤 사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발람에게 임한 것으로 보아 그 계시 수단은 필시 ‘꿈’이었을 것이다(Matthew Henry).

 

22:9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되. 하나님은 발람에게 초월적으로 강림하셔서 그의 비뚤어진 인격과 계획을 바로 잡고자 하셨다. 이는 멸망받을 발람을(신 18:11, 12) 위해서이기도 하였겠지만 그보다 선민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인격을 주관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성취해 가신다(행 9:1-6).

이 사람들이 누구냐. 이는 물질에 마음이 뺏긴 발람을 질책하시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질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발람의 혼탁한 영혼과 양심을 깨우치고자 하셨다(Hengstenberg).

 

22:10 없음.

 

22:11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당시 애굽과 바벨론 두 강대국의 세력이 쇠퇴해 가던 상황인지라 곳곳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출몰하던 때였다. 따라서 발락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역시 흔히 있는 민족 간의 사소한 갈등 정도로 이해했던 것 같다(5절).

 

22:12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간에게는 그 자체가 큰 복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며(신 30:19), 시여자(施與者)가 되시기 때문이다(6:23-26).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복 받은 민족이었으며, 특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 민족을 세상을 향한 ‘복의 전달자’(창 12:1-3)로 삼으셨다. 비록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 동안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만 백성 중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 받은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모압 왕 발락의 기대(6절)와는 반대로 이스라엘은 결코 저주 받을 수 없는 민족이었다.

 

22:13 여호와께서 …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발람은 여호와의 영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의 사악한 계획과 의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으로서(롬 11:36) 온 인격을 관할하신다. 한편, 발람의 이 완곡한 거절은 오히려 이 일에 대해 발락의 분발을 더 촉구했다(15절). 그러므로 혹자는 여호와를 핑계 댄 발람의 이 말을 더 좋은 조건을 위한 일종의 계략으로 보기도 한다(Hengstenberg).

 

22:14 없음.

 

22:15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사절단의 보고를 통해 물질에 약한 발람의 마음을(7, 8절) 간파한 발락은 지난번 보다 더 강하게 유혹하기 위해 더 높은 인사와 더 많은 물질(17절)을 발람에게 보냈다. 결국 발람은 탐욕에 찬 본성을 억제치 못하고 끝내 발락의 제의에 순응하게 된다(21절, 벧후 2:15, 유 1:11).

 

22:16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 오라. 이 부분을 좀더 의역하면 ‘제발 네가 내게로 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를 바란다’(KJV)로 할 수 있다. 즉 발락은 발람이 자기에게 오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방해 때문임을 깨닫고, 발람에게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뜻에 동조하라고 종용했다. 아울러 발락의 이 말 속에는 만일 오게 되면, 발람에게 원하는 모든 부와 명예를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17절).

 

22:17 없음.

 

22:18 은금을 … 내게 줄지라도 … 못하겠노라. 17절의 발락의 유혹에 대한 발람의 대답이지만 19절로 미뤄 볼 때 이 대답은 진실치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 발람은 물질에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으나, 사신(使臣)들 앞에서 자신의 탐욕스런 마음을 감추고 동시에 하나님을 속이기 위해 위선적인 대답을 한 것이다.

 

22:19 여호와께서 …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하나님의 뜻은 이미 12절에 분명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또 한 번의 기회를 살피고자 한 것을 보면 지금 그가 얼마나 물질에 연연해 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발락에게 갈 수 있는 가능성과 어떤 변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22:20 일어나 함께 가라. 이는 12절의 ‘가지 말라’는 말씀과 모순된다. 이 문제에 대해 칼뱅(Calvin)은 ‘이같은 하나님의 허락은 풍자적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나머지 허락하신 것이 아니고,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듭 거역하고 가기를 소원했기 때문에, 그의 자유 의지에 따라 거역하는 상태를 그대로 방임하신 것이다’란 말로써 적절히 해석하고 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방임한다고 해서 당신의 주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발람을, 당신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그의 사악한 소원을 허용하셨다.

 

22: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람은 하나님의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신 줄로만 알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길을 떠났다.

 

22:22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기서 ‘감’(히, 홀레크)이란 ‘가고 있다’는 의미로 단순히 길을 가는 행위 뿐 아니라, 목적지 도착을 위한 의지에 불타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내포한 말이다. 즉 발람은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20절)고 하신 하나님의 지시에는 관심도 없고 오직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온 신경을 집중 시켜(벧후 2:15) 조급히 나귀를 몰았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발람을 경책하시고자 크게 진노하셨는데, 원문의 ‘진노하다’(히, 이하르 아프)란 말은 ‘분노가 불꽃처럼 타오르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발람의 그릇된 탐욕을 얼마나 싫어하셨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여호와의 사자. 하나님의 진노를 대행하는 천사이다. 20:16 주석 참조.

 

22:23 나귀가 … 보고. 이것은 동물의 타고난 감각적 특성으로 인해 나귀가 감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나귀의 눈을 밝히 여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 발람은 죄된 탐욕으로 말미암아 그의 눈이 스스로 닫혀 있었다.

발람이 나귀를 … 채찍질하니.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하찮은 미물(微物)에 불과한 나귀만 그 사자를 목격하고 피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탐욕에 눈이 멀어 영적으로 무감각해졌는지를 대변해 준다. 따라서 이런 자야 말로 멸망하는 짐승같은 존재이다(시 49:20, 전 3:19).

 

22:24 여호와의 사자는 … 좁은 길에 섰고. 여기서 ‘좁은 길’(히, 미쉐올)이란 협소하고 우묵하여 한 사람이 가까스로 지날 수 있는 좁다란 길을 뜻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을 궁지에 몰아 그의 그릇된 마음을 깨우치고 어두워진 그의 영안(靈眼)을 열어주려 했다.

 

22:25 발람의 발을 … 짓누르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의 진노의 칼을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주인의 발을 담벼락에 비비어 상하게 했다. 그러나 발람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나귀만을 탓하였다. 이처럼 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위경에 처해서도 타인의 실수만 책할 뿐 자신의 허물은 돌아보지 못한다(벧후 2:12).

 

22:26 여호와의 사자가 진노의 칼을 빼든 채 계속 나귀를 몰아가자 마침내 나귀는 더 이상 빠져나갈 데 없는 협착한 곳에 이르고 말았다. 나귀는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이러한 시실을 모르는 발람은 그만 화가 솟구처 필시 자신이 아꼈을 그 나귀를 자신의 지팡이로 사정없이 세 번이나 내리쳤다.

 

22:27 없음.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일부 학자들은 이를 실제 현상이 아닌 환청(幻聽)이라 한다. 혹은 발람이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낸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발람의 마음과 귀에 생생하게 들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사실(fact)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시 19:1-6), 각 피조계의 언어 기능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다(출 4:11, 12, 롬 11:36). 한편 그 당시 나귀의 말은 오직 발람에게만 들려진 것으로 보이는데(행 9:7), 즉 하나님께서는 혼탁한 발람의 마음과 귀를 열어 나귀의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주도하셨다(벧후 2:16). 아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동행인들은 이 사실을 복술가로서의 발람의 평소 습관(어떤 초월적인 존재들과 혼자서 대화를 나누던 버릇)으로 간주했을런지 모른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발람을 책망하지 않고, 나귀로 하여금 발람을 책망토록 한 이유는, 복술가로서의 자만에 빠져있는 발람에게 그의 초월적(영적) 통찰력이 한낱 미물인 나귀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히 깨우쳐 줌으로써,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려 함에 있었다(Calvin). 그리하여 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만 하도록(20절) 유도하려 했던 것이다.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발람은 자신의 직업이 항상 초월적인 어떤 기이한 세계와 교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귀의 말에 대해서도 크게 놀라는 기색없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극도의 분노로 인해 현 상황의 기이한 일에 대해 분별력을 상실했는지도 모른다(Pulpit Commentary).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 죽였으리라. 여기서 ‘거역하기’란 말은 ‘먼지 속에 뒹굴다’는 뜻의 ‘아라르’에서 파생된 말로 지독한 모욕을 제공하거나 조롱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너를 죽였으리라’(히, 하라게티크)란 말은 ‘내가 너를 죽였다’는 과거적 표현으로, 두 말할 것도 없이 반드시 너를 죽였을 것이라는 단정적인 말이다. 결국 발람은 나귀의 말을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였지,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돌아보는 교훈적 의미로 수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그는 무지할 뿐 아니라 잔인한 주인이었다(잠 12:10). 여기서도 볼 수 있듯이 탐심으로 인해 그 마음이 완악케 된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없다(시 18:27, 약 4:6).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발람과 나귀의 대화가 인간의 음성으로 서로 통했건, 아니면 영적 내면의 귀로 서로 통했건,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인간과 동물이 상호 대화를 주로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한낱 나귀를 유명한 복술가 발람의 선생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자만에 빠진 당대의 선지자 발람의 허영을 여지없이 응징했던 것이다(Nyssenus).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나귀의 자기 변호이다. 하나님은 나귀의 특별한 행동을 통하여 발람의 탐욕에 찬 마음을 깨우치시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자는 세상의 온갖 대소사(大小事)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줄 안다(벧후 2:16).

 

22:31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나귀의 입을 여셨던(28절) 하나님께서는 또한 발람의 어두워졌던 영의 눈, 곧 영적인 인지(認知) 능력을 밝히셨다. 타락 이후 죄로 그 기능이 상실된 인간의 영은 오직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어둠을 벗고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욥 42:5, 잠 20:27). 한편, 이 사실은 여호와께서 그 눈을 밝히신 발람과 나귀 외에 발람과 함께한 동행인들은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것은 후일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의 모습에 있어서 바울 외의 동행인들은 빛만 보았을 뿐(행 22:9) 예수의 형상은 보지 못하였고, 그 소리만 들었을 뿐(행 9:7) 그 말은 듣지 못한 사실과 비슷하다(Keil).

칼을 빼들고. 여기서 ‘칼’(히, 헤레브)은 ‘파멸시키다’, ‘죽이다’란 뜻의 동사 ‘하라브’에서 파생된 말로 주로 전쟁용 긴 칼(sword)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들었다는 사실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공의의 심판을 베풀겠다는 뜻을 지닌 생생한 회화적 표현이다(창 3:24).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이는 여호와의 사자의 실체를 목격했던 발람이 그 위용에 압도되어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다. 이와 같이 죄로 물든 영혼은 본능적으로 여호와의 위엄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창 3:10, 사 6:5).

 

22:32 사악하므로 … 막으려고. 여기서 ‘사악하므로’(히, 키 야라트)란 ‘성급하기 때문에’, ‘심히 왜곡되므로’, ‘거꾸로 가므로’라는 뜻으로서, 발람의 이번 여행이 하나님의 뜻에 정반대가 됨을 밝힌 말이다. 또한 ‘막으려고’(히, 레사탄)는 ‘원수가 되다’, ‘저항하다’란 의미로 하나님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급하게 행동하는 발람을 원수처럼 여기시며 그 길을 차단하시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

 

22:33 나귀가 만일 …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그가 노하여 때렸던 그 나귀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의 통찰력이 한낱 나귀의 그것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고, 행여 복 받은 민족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주할 생각일랑 갖지 말도록 단단히 주의를 시킨 것이다. 따라서 발람은 오직 여호와의 도구가 되어 여호와께서 그의 입에 주신 말씀만 순전한 마음으로 선포할 임무만 감당해야 될 것이었다(20, 35절), 그렇기에 지금 여호와의 사자는 그 점을 거듭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마지 못해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던 발람이 결국 자신의 사악한 꾀를 모압 왕에게 일러 줌으로써(31:16),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케 하였고(25:1-18), 그 결과 그는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고야 말았다(31:8).

 

22:34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돌아가겠나이다.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의 설명에야(33절) 비로소 자신이 절박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행동으로 볼 때(31:16), 이것은 참된 회개라 할 수 없고 다만 죽음에의 공포와 절대자 앞에서의 두려움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굴복에 불과했다.

 

22:35 여호와의 사자. 창 16:7 주석을 참조하라.

가라 … 말할지니라. 하나님은 20절과 동일한 허락을 하셨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발람이 발락에게 간 사실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발람이 발락에게 가고자 했던 근본 동인(動因), 곧 물질에 유혹된 그의 탐심 때문임을 알 수 있다.

 

22:36 모압 변경의 끝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까지. 모압의 최고 권력자인 발락이 발람을 영접키 위해 국경 지대까지(21:15) 마중 나간 것을 보면 그 당시 발락의 마음이 상당히 조급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발람에 대한 지극한 예우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르논 가에 있는 성읍. 아르논 강을 끼고 발달한 ‘아르’ 성읍을 언급하고 있는 말일 것이다(Pulpit Commentary). 카일(Keil)은 이 성읍이 한때는 모압의 도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아모리 왕 시혼(Sihon)에게 일단 빼앗기고 난 후에는 변방 성읍으로 전락되고 말았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대신 ‘아르’ 이남의 ‘랍바’를 새 도성으로 선정하고 있었다고 한다(Keil & Delitzsch, op. cit. p. 175).

 

22:37 내가 어찌 … 존귀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물질과 명예로 술사 발람을 유혹하는 모압 왕 발락의 간교한 말이다.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을 보면 발락은 이스라엘을 괴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주술을 통한 저주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이로 보면 발락은 수준 낮은 저급한 샤머니즘 사상의 소유자였다.

 

22:38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 이것은 얼마 전 ‘나귀 사건’의 교훈이 발람의 기억 속에 아직껏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나귀 사건’(22-35절)은 모압 여행의 마지막 때 쯤 일어난 사건으로 보인다(Keil). 그런고로 발람의 이 말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된 경외감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리고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계신다는 사실(12절)을 명확히 말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다는 점만을 강조했다. 즉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자신의 위치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마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자신의 한계를 말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발람은 여전히 발락의 제의에 부응할 만한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22:39 기럇후솟. ‘거리의 성읍’, ‘벌판의 성읍’이란 뜻으로, 그 위치는 정확치 않으나 바못바알(21:19, 20)과 아르논 강 근처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모압 영토내에서 군사, 정치적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던 곳으로 보인다.

 

22:40 대접하였더라. 이것은 단순히 발람 일행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 아니라, 발람의 신(神)에 대한 기원의 제물이었다(Keil). 이러한 것은 저주를 선포하기 전날 우양을 잡았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Hengstenberg). 즉 모압 왕 발락은 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가진 사고 방식대로 제물을 발람의 신(神) 여호와(모압 왕은 발람의 행위를 통해서 그렇게 간주했다)께 마침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그 신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애썼던 것이다.

 

22:41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 진 끝까지 보니라. 여기서 ‘바알의 산당’ (KJV, the high places of Baal)이란 ‘바못바알’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알’은 당시 모압과 아모리인들이 섬기던 남신(男神)으로서 태양을 상징한다. 한편 모압 왕 발락은 메소포타미아의 술사 발람을 이스라엘 진영의 끝 부분까지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이곳까지 인도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의 통상 생각에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저주가 그 효력을 보다 충분히 발휘하려면, 그 저주의 대상 및 방향을 반드시 보고, 향햐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Hengs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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