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히브리서 0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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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저자는 5:11-14에서 언급한 신앙상의 권면 즉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계속 권고한다. 그는 본절에서 더이상 독자들을 젖을 먹는 어린아이(5:13)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Lane). '그리스도 도의 초보'의 내용은 본절 하반절과 2절에 세개의 쌍으로 된 6가지 항목으로 상술되고 있다. 본서의 수신자들이 유대인 공동체였기에 '그리스도 도의초보'의 내용은 유대교 관습과 연관된 것이었다(Bruce, Morris, Lane).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죽은 행실'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생명을 주지 못하는 구약 시대 율법의 제사 의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9:10, Hewitt). (2)혹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의 실제적인 모든 악행을가리킨다고 주장한다(Bruce).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나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신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타당하다(Morris). 또한 죽을수밖에 없던지난날의 행실을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인 '회개'는 세례 요한이나(마3:2), 예수 그리스도(막1:15) 그리고 그의 제자들(행2:38)의 가르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한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상의 것으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시사한다(Morris).이러한 믿음은 참된 신앙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창15:6;합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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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들과 안수와 - '세례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스몬'(* )은 기독교의 '세례'(* , 밥티스마)를 의미하지 않고(롬6:4;엡4:5;골2:12) 유대교의 일반적인 정결 예식을 의미한다(레11-15장, Bruce, Morris).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죄 씻음을 받은 표징(表徵)을 세례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많았으며(요3:25;행19:1-5) 처음 믿는 개종자들은 이'세례들'에 관한 교훈에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안수'는 구약시대부터 널리시행되던 관습이었다(민8:10;신34:9).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개종자(행8:17)나 전도사역자(딤전4:14)에게 종종 안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행8:17-19). 본절의 '안수'는주로 개종자들에게 행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 - 이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관한 마지막 세번째 쌍으로서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중대 관심사인 종말론적 교리이다(사26:19;단7:9,10;12:2;눅20:37,38;행23:8;마카비2서 7장,Bruce). 이러한 교리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책임적 존재로서 마지막 때에 회계해야 함을 시사한다.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 '완전'의 헬라어 '텔레이오테타'(* )는 '성숙'이라는 의미로 공동체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Lane).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개종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그러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권한에 순종하기를 권면한다.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의 헬라어'에안페르 에피트레페 호 데오스'(* )에서 '...하시면'에해당하는 헬라어 '에안페르'는 '페르'(* , '참으로')를 접미어로 취한 형태로 '참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조건문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편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Moffatt, Hewitt). (2)혹자는 '완전한 데 나아가는 것'(2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Robertson, Morris, Bruce, Lane). 두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자의 것은 이미 버리라고 저자가 권면했기 때문이다(1절).그리스도인들이 완전 곧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1,7절,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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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 )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 )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 )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Morris).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 )는'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파라페손타스'(* )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파라피프토'(* )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절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생각해볼 수 있다. (1)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2)저자는 구약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의 '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십자가에 못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 )에서'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 )는 '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다.

=====6:7
 개역 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절과다음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5:1 이하의'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땅'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마13:18-23)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사44:3;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주신다(Hewitt, Morris, Lane).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 )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12:29).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의 헬라어 '아가페토이'(* )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어린 호칭이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 )는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Morris, Robertson).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의 헬라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 )에서 '에코메나'(* )는 '소유하다'라는 의미를지닌 '에코'(* )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Morris).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원하는'의 헬라어 '에피뒤무멘'(* )은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의 헬라어 '아크리 텔루스'(* )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9:28, Lane).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롬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10:22-24;롬5:2-5;고전13:13;갈5:5,6;골1:4,5;살전1:3;5:8;벧전1:21,22).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  )에서 '게으르지'의 헬라어 '노드로이'(* )는 5:11의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Lane).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Hewitt).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Bruce). 그런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Lane,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6: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할실 때에 -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할때 대부분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으며(행3:25;7:17;롬4:13;갈3:8,14,16,18) 본서에서도 아브라함을 예로 제시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13-15절;2:16;7:4-5;11:8-19).13-15절의 아브라함에 관한 서술은 믿음의 모범으로서 12절의 '본받으라'는 권면에 대한 내용이다.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 본절은 창22:16의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를 저자가 논리적인 부연 설명을 덧붙여인용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맹세'에는 약속에 대한 지연(遲延)이 암시되어 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즉시 약속을 이행하신다면 맹세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West-cott). 하나님은 자신을 세워 스스로 맹세하셨다(출32:13;사45:23;렘22:5;49:13).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대한 확실한 이행을 보증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가장 큰 보증이 되신다(Lane).

=====6: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 본절은 70인역의 창22:17을 다소 변형시킨 인용구이다.
70인역에는 '플레뒤노 토 스페르마 수'(* , '내가 너의 씨를번성케 하리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본절에서는 '플레뒤노 세'(* , '내가너를 번성케 하고')로 되어 있다. 두 구절의 의미는 동일한 것이나, 이렇게 저자가'너의 씨'를 '너'로 변경시켜 인용한 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브라함에게 집중시키기위함이다(Schroger). 또한 창22:17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의 번성뿐만 아니라 땅에 대한 소유까지도 포함하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자손에 대한 약속만을 언급한다. 이는 11:17-19의 내용 즉 약속을 성취받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인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까지 인내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Swetnam).

=====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믿음과 인내에 대해 엄격한 시험을 거친 후에 약속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창22:1,15-18). 약속의 성취는 이삭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삭마저도 제물로 바치려 하였다. 이것은 어떠한 절망 가운데서도하나님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약속을 기다리는 모든 자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였다(Lane). '약속을 받았느니라'는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과 손자인 에서와 야곱의 출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것은 약속의 완전한 성취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셨기때문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Morris).

=====6: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최후 확정이니라 -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17절) 당시 일반 사람들이 하던 맹세와 비교하여 설명한다(Cicero, Philo). 일반적으로 맹세는 발언한 것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구속력이 있는 확증이었다. 구약성경에서 맹세는 맹세하는 사람보다 더 크고 위대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되어졌으며(신6:13;10:20) 만일 맹세를 하고서 이를 어기면 그것은 십계명 중 제3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출20:7;신5:11;슥5:3,4). 실제로 맹세는 약속한 것의 명백한 진실성을 비준해 달라고 하나님을 엄숙히부르는 행위를 수반하였다(Philo). 저자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방인들과 다툼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 사실과 이러한 맹세는 최후 결정으로 더이상 변개(變改)할 수 없음을(창14:22;21:23-24;24:3) 염두에 두고 본절을 기록하였을 것이다(Lane).

=====6: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를 나타내는 것으로 창22:16-17에 대한 언급이다. 여기서 '맹세로 보증하셨나니'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특히 '보증하셨나니'의 헬라어 '에메시튜센'(* )은 '중재자'란 뜻의 '메시테스'(* )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재자가되다', '보증인이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은 맹세가 필요없으나 자신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한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그의 후손들을 시사하는 것으로 육체적인 후손이라기 보다는 영적인 후손 즉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Lane, Mo-rris).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확신을 고무(鼓舞)시켜 주는 말씀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적용된다(Michel, Spicq, Foerster).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하신하나님의 맹세는 자신의 약속이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6:18
 본절은 '히나'(* , '위하여')로 시작하는 목적절로 하나님께 맹세하신 목적을나타낸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 '이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13절과 1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가리킨다(Bruce, Michel, Kuss). '약속'은 모든 날 마지막에 나타난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1:2), 하나님께서 '맹세'하여 보증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통해 성취되었다(20절;히5:6,10;7:17,21,28;시110:4, Lane). 한편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뒤오 프라그마톤 아메타데톤 엔 호이스 아뒤나톤 프슈사스다이 데온'(*        )은 '이 두 가지 변할 수없는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므로'(by two unchangeable thingsin which it is impossible for God to lie, NIV)라는 의미로 이 두 가지 사실 즉 '약속'과 '맹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성경의단편적인 한 두 구절에서 유추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에 뿌리를둔 것이다(민23:19;삼상15:29;시89:35;사31:2).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소망'은 본서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 이룩되었으며 앞으로 완성되어질 구원을 나타낸다(Michel, Grasser,Glaube, Mora). 저자는 '앞에 있는 소망' 즉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구속의 소망이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사역으로 인해 이중의 보장을 받고 있음을 강조한다(Lane, Schierse). 이러한 소망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죄악을 피해가야 한다(Morris). 한편 '큰 안위'는 앞서 언급한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오는 '용기' 혹은 '위로'를 가리킨다(Robertson). 하나님은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 즉 자신이 행하신 약속과 맹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구속 사역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재 구원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인해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를소망하고 현재 지상의 삶 가운데서 위로를 받게 된다.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 본절에서 닻의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같은 비유는 오직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한편 본절의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스'(* )는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을 나타낸다(Morris).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출26:31-35;레16:2,12,15;21:23;24:3).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27:51;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들어가나니'의 헬라어 '에이세르코메넨'(* )은 '에이세르코마이'(* , '들어가다')의 현재분사로서 '닻'(* , 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Windisch,Kasemann, Grasser, Koster, Schroger).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Lane, Kuss, Michel, Spicq).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6:20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 '앞서 가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드로모스'(* )는 본절에서와 같이 단수로 사용된 용례가 고전에서나 헬라 문헌에는 거의나타나지 않는다. 이 단어의 복수 형태인 '프로드로모이'(* )는 주력 부대 앞에 나가있는 '첨병'이나(Herodotus, Polybius), '주력 함대를 앞서 인도하는 배들'(Alciphron), '처음 익은 열매'(민13:20;사28:4), 혹은 '전령'(Herodotus)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에 비추어 볼 때 본절의 '프로드로모스'는 '선구자', 혹은 '선두주자'라는 의미를 지니며 동시에 누군가가 '프로드로모스'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선구자(先驅者)로 멜기세덱과같은 대제사장직 수행을 위해 먼저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5:7-10). 즉 예수께서는자신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셨으며 그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백성들의 죄를 씻어 백성들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10:14, Lane).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구속을 힘입어 뒤따라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는 확증이 된다(Hewitt).

 

 

  전장(前章)에서 저자는 멜기세덱(창 14:17-24)과의 비교를 통해 예수의  대제사장적 탁월함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히브리인들의 영적 미성숙(5:11)이란 벽에 부딪혀 올바른 교리의 전파가 불가함을 깨닫게 된다. 이에 저자는 전장 뒷부분(5:11-14)과 본장 전체에서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영적 지식에로 자라갈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신앙의 열매 맺을 것을 촉구한다. 성장을 멈춘 식물은 죽은 것이듯, 영적 성장을 중단한 자 역시 죽은 그리스도인이란 점에서 이것은 당연한 권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본장은 우리에게 유약한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을  권면한다. 이를 위하여 성도들은 신앙적으로 부지런하여 더욱 심오한 영적 지식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신앙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저버림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저자는  본장에서 첫째, 영적 성숙은 배교를 방지하는 첩경이며 둘째, 성령의 열매는 신앙적 삶에 따르는 자연적 결과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렇게 배도에 대한 대책으로 성숙한 신앙  소유의 필요성을 역설한 저자는 9절 이하에서는 이제 그들의 구원이 멀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소망 중에 인내할 것을 당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본서에서 성도의 범죄 가능성에 대한 경고와 참된 소망의 부여 및 격려가 신자들의 교육과 신앙 유지에 있어서  필수적인 2대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장 전체의 이해를 위하여 저자의 의도, 본장의 개요와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저자의 의도. 본장은 여전히 젖을 먹는(5:12) 신앙의 어린이들에게(5:13)  주는 충고이다. 이 충고의 기본 내용은 히브리인들이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자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새 사람이 되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1절의 접속사 '그러므로'(      , 디오)는 사상과 논리에 있어서 앞 구절과의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본서의 저자는 앞장에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이 둔하다고 책망하였는데, 이는 그들의 영적 미성숙과 이해력과 분별력의  둔함이 현저히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는 그들을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게  하고 영적으로 활기찬 성인으로 나아가게 하며, 축복 대신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다.
  1절의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5:12의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와 상응한 말이며,  2절의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는 권면은 5:12,14의 '성숙한 자들'에  대한  언급과 관련이 있다. 즉 저자는 이제 5:11-14의 책망에서 암시되었던 도전으로써 그의 독자들을 공개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성숙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를 버려야 한다(1절). 여기서 '버리고'(  , 아펜테스)라고 하는 말은 '아주 없애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위치에서 다음을 향해 떠나라', 즉 '지금 위치에서 줄업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는 '신앙의 초보를 기초로 하여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초 단계를 벗어나야 함을 의미한다.  전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작할 때 받은 교리에서 벗어나 더 이상 어린 아이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단계로부터 '의의 말씀'(5:13)인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숙한 단계로 전진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유대인들이 어린 아이의 단계에 있는 줄 알고 있으면서도  저자가 그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이려고  결심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하면, 첫째 이유는 비록 유대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아직도 약한 단계에 있었으나 그들 중의 얼마는 보다 강한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다 성장한 사람에게는 그의 상태에 알맞는 것을 공급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초보적 진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야만 한다면, 반면에 약한 사람들도 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된 좀더 어렵고 신비한 진리를 기꺼이 들으려고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저자가 유대인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먹이려 한 두번째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강건해지고 성장하기를 저자가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그들이  단단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저자는 2절에서 다시 기초를  닦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처음 구원받았을 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기초는 이미 놓여졌기 때문에 그 기초를 다시 놓을 필요가 없다. 만일 달리는 사람이 경주 중에 넘어졌다면, 다시 경주를 시작하기 위해 되돌아갈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는 단지 다시 일어나서 달리면 되는 것이다.
  (2) 개요와 교훈. 본장에서 저자는 히브리인들에게 이전보다 더욱 신앙의 진보를 이루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진보를 이루는 것이 배교를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 저자는 배교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는 점과  그 죄의 끔찍한 결과를 진지한 어조로 전개하였다(1-8절). 그 다음 그는  그들이  믿음과 거룩함을 보존하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이  믿음과 거룩함을 보존할 것을 권면하였고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질 위로, 즉 그들의 의무와 축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9-20절).
  이러한 본장의 내용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을 주고 있다. 고작 '그리스도 도의 초보'만을 깨닫고서 '그리스도 도'를 완전히 이해한 줄 착각하고서는  교만과 안일에 빠져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잘못은 누구나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속지 말고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절)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의 성취와 축복을 우리의 기업으로 맏도록 해야 한다.
  한편 본장의 내용에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교훈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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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분  |         교                             훈          | 구  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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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보적 단계를 넘는 신앙인이 되라                | 1, 2절 |
| 1.성숙한       +----------------------------------------------------+--------+
|   신앙인이 되라|(2) 신앙의 과정에서 타락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라     | 3- 6절 |
|  ( 1 - 8 절 )  +----------------------------------------------------+--------+
|                |(3) 생활에서 좋은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라           | 7, 8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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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 좋은 구원이 가까와진 것을 확신하며 살아라    |  9 절  |
| 2. 확신하며    +----------------------------------------------------+--------+
|                |(2)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잊지 않음을 확신하며 살아라 | 10 절  |
|    살아라      +----------------------------------------------------+--------+
|                |(3) 소망의 풍성함에 대해 확신하며 살아라            | 11 절  |
|  ( 9 : 12 절 ) +----------------------------------------------------+--------+
|                |(4) 기업의 상속에 대해 확신하며 살아라              | 12 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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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축복의 약속이 있었다                            | 13,14절|
|                +----------------------------------------------------+--------+
|                |(2) 하나님의 뜻은 변치 않으신다.                    | 16,17절|
| 3. 더 큰 소망의+----------------------------------------------------+--------+
|                |(3)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 18 절  |
|    근거        +----------------------------------------------------+--------+
|                |(4) 하나님께서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신다         | 18 절  |
|  ( 12 - 20절 ) +----------------------------------------------------+--------+
|                |(5)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다   | 19 절  |
|                +----------------------------------------------------+--------+
|                |(6) 영원하신 예수께서 앞서 가셨다                   | 20 절  |
+----------------+----------------------------------------------------+--------+
                   
  1. 성숙한 신앙의 필요성(6:1-8)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5:14)라고 앞장을 맺은 저자는 무지가  그리스도인의 미성숙한 모습을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본문에서  먼저 성도는 그리스도의 초보적인 가르침에 확고하게 세워야 하며 그후에 기독교 교훈의 다른 측면들, 곧 단단한 식물(5:12)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본장의 초점은 '단단한 식물'과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기독교 진리에 관해 확고한 기반을 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한번만 잘 닦아놓으면 더 깊은 기반을 다시 다지는 것과 같은 과정은 반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본문의 순서대로 먼저 기독교 교훈의 기본적인 여섯 가지 요소들을 살펴본 후 성숙한 신앙, 즉 신앙에 있어서의 진보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1) 그리스도 도의 초보. 은혜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이다. 이것들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가 된다. 기초는 꼭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을 자꾸 놓아서는 안 된다. 기초가 놓여졌으면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성숙한 신앙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본문에 나타난 이 도의 초보는 6개의 제목 곧 회개,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으로 열거되어 있다. 이들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의 내용이요 특징이었다. 즉 성도는 회개했고. 믿었으며, 세례받았고, 안수도  하였다. 또한 성도는 부활할 것이며 장차 심판이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참된 신자가 아니며 여기에서부터 성도는 의의 말씀, 그분의 통치적인 말씀으로 전진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그때의 히브리인들처럼 의의  말씀은 고사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도 잘 모르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보요,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초인 여섯 가지 항목은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까) 회개.  '회개하라'는 교훈은 세례 요한, 예수 그리스도도  그리고  사도들이 가르친 교훈의 핵심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자 요한을 통해 교회에 마지막  말씀을 전하실 때에도 회개를 촉구하셨다. '회개'(                , 메타노이아)란 어떤  사람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 입장의 전환을 뜻하며 자기 위주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는 영광을 드리지 못한 죄에 대하여 슬퍼하면서  그분께로  돌아서는 것을 가리킨다. 이 회개는 죄인이 성부 하나님나게로 되돌아가는 길의  첫  단계이다. 사람은 '자신을 돌이킬' 때에(눅 15:17) 그때까지 자신이 추구해 온 길에서  돌이키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많은 문맥들은 개인적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회개하라'는 말은 그 유대적 배경으로 보아 죽은 행실,  곧  자기를 스스로 구원하려는 쓸데없는 시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을 뜻한다.
    (다) 신앙.  이것은 회개에 뒤따르는 신뢰 및 자기 헌신의 긍정적 행동을  가리킨다. 회개와 신앙은 불가분적으로 상호 보완하며, 화폐의 양면처럼 함께 하나를 구성한다. 즉 회개가 죽은 행실의 이전 삶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단순하게  죽은 행실에서 떠나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을 성취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매우 소극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신앙의 적극적인 면을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믿음은 항상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죽지 않는다(요 8:24). 따라서 믿음이 없다는 것은 회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은 인류로 하여금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부터 떠나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인 신뢰의 태도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며(요 14:6), 그리하여  우리  존재의 의미와 완전함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따) 세례들. 예수를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세번째로 중요한 것은 세례이다. 여기에서 '세례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된 것은 처음 입교할 때 받은 물 세례와 함께 여기에 수반되는 기초적 신앙 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교의 정결 의식과 구별하는 초대 교회의 노력을 시사한다.
  세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다는 표시이다(롬 6:3-5). 둘째, 죄에 대하여 씻음을 받았다는  표시이다(행 22:16). 셋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며 예수로  옷입었다는  표시이다(갈 3:26,27).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요단 강에서 친히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며(마 3:13-17), 제자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다.
  한편 본문 2절에서 주고 있는 세례에 대한 교훈은 역설적이다. 세례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이므로 '버려야'한다. 그러나 세례는 버릴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에선 다시 한번 '버리고'(              , 아펜테스)의 의미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즉 이 단어는 '무시하거나 없애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기초적 교훈과 경험에  머물지 말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하는 말씀에서 보여주는 완전한 뜻은 '세례는 한번만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앙의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이제 교회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그 신앙을 성숙시켜야만 한다.
    (마) 안수. 안수는 히브리인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상징적 태도의 한 형태로서, 초기 기독교 의식의 일부가 되었다. 레위기 4:4,15,24에 보면 죄를 대신 지고 죽을 제물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기 위한 안수가 있었다. 또한 창세기 48:14, 15;  마가복음 10:16; 사도행전 8:17; 19:6에는 축복과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한  안수가  나타나며 신명기 34:9; 사도행전 6:6; 13:3에는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한 안수가 있었다.  이러한 안수는 반드시 성령의 은사와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는데,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는 안수받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더 나은 데로 나아가 받는  자로서의  신앙 생활에서 나누어 주는 자의 신앙 생활로 성장하라는 것이다.
    (바) 죽은 자의 부활. 성경은 '부활이 없으면 복음 전파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다 죄 가운데 그대로 있고 모두 다 망한다'(고전 15:13-19)고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부활에 대한 교훈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본문은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부활에 대하여 보장을 받은 사람들이므로(고전 15:20;  고후 4:14) 부활에 대하여 다시 재론하지 말고 부활에 대한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세우면서 더욱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빠) 영원한 심판.  고린도후서 5:10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기 행한 대로 보상의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쳐 주며, 본서 9:27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한다. 부활과 심판은 예수의 가르침(요 5:26-29)과 초대 교회의 가르침(행 17:31)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견지에서 볼 때 종말은 이미 현존하며, 믿음은 종말이  보이는  창문임을 깨닫게 해준다. 특별히 심판은 모든 죄악에 대한 심판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을 포함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은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과 그의 은혜로운 주권적 공표의 성취인 것이다.
  (2) 진보의 필요성. 저자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진보(성장)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교사가 가르칠 때마다 초보부터 되풀이하기만 한다면 학생들은 발전하지  못한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들은 언제나 '초보'(          , 아르케스)에서 출발하되  그 '초보'를 버리고 항상 '완전'(                  , 텔레이오테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텔레이오테스'는 '완성'이나 '완전'으로 번역하기보다는 '성숙' 또는 '온전'으로 번역함이 좋다. 즉 단순히 지식의 완전함,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의 원숙함, 성숙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째로, '텔레이오테스'란 마음의 상태를 포함한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주체적인 사고력을 더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성숙한 신앙인이란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깊이 알고 기독교 신앙에 관한 사실들 뿐만 아니라 그의 의에 관해서도 깊이 통찰하는 힘을 지닌 자이다.
  둘째로, '텔레이오테스'는 인품 즉 전인격이 내포되는 원숙함이다. 우리들은 신앙적 연륜을 더해가면서 지식에서 뿐 아니라 삶 전체와 사람 전체로서 점차 그리스도와  닮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결점을 제거하고 새로운  덕을  몸에 지녀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본 기독교의 초보적인 교리인 여섯  가지 내용의 단계들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후 신앙 고백을 통하여 터를 닦으며 거쳐가야 한다. 그리고 육신이 자라듯 신앙 역시 자라서 원숙함을 갖추어 진리의 깊은  비밀을 깨닫고 경함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이요 교회일 것이다.

  * 구원받지 못할자.  본문의 4-6절은 역사상 유명한 난해 구절로 조심스럽게 해석하여야 한다. 본서의 저자는 비슷한 주제를 3:12; 10:26; 12:25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본문의 이 구절은 대략적으로 구원의 진리와 성령의 강력한 은사를 체험한 자도  끝내 배교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런 배교자는 완전히 멸망될 것임을 경고한다. 여기서'배교'란 현재 성령의 실체를 정확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성령과 구원의 도를 대적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자는 도저히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다. 왜냐하면 이런  자는 스스로 성령을 대적함으로써 회개할 가능성조차 없기 (마 12:31,32).
  그러나 이 구절을 우리가 읽을 때에는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편지가 박해의 시대에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박해 시대에 신앙으로부터 탈락한다는 것은 최대의 죄악이었다. 이때의 배신은 신앙보다 자신의 생명이나 혹은 안락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행동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타난 구원받지 못할 자, 배교의 내용, 배교의 결과, 본문의  강조점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원받지 못할 자. 본서의 저자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 맛보고 타락한  자들'(4-6절)은 다시금 회개케 할 수 없는자, 즉 죄사함 받을 수 없는 자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 자들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6절).
  여기서 '한번 비췸을 얻었다'는 말은 '복음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 그 뜻을 능히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고후 4:4, 6; 엡 1:18,19). 또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었다'는 말은 '성령의 장중(掌中)에 사로잡혀 사는 가운데 참된  마음의 화평, 기쁨 등과 같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다는 사실(시 19:10)을 체득하였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지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내세의 상급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영적 체험이 있고 성령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자들이 고의적으로 성령과  구원의 도에 대적하게 될 때 그들은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게 된다.
  (2) 배교의 내용. 위와 같은 불쌍한 배교자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본서는 이들의  두드러진 특색을 다음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첫째로, 배교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경멸하는 자들이다(4,5절). 이들에게는  한때 그리스도의 임재의 밝은 빛이 그들의 심령 속 어두운 부분들을 밝히 비추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부요케 하시는 섭리를 맛보고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스도 없는 삶을 선택하여 어두움으로 되돌아갔으며,  자신들이 지녔던 영적 보물들을 자기들의 발로 밟으며 무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포기하고, 그분의 진리를 멸시하며, 그분의 삶을 경멸한다. 베드로는  이런  자들을  가리켜 '차라리 의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벧후 2:21)이라고 애도하였다.
  둘째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한다. 전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서기만 하면 그들이 엄청난 죄를 범하였을지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놀라운 은혜로  용서애 주심을 발견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분을 부인할 뿐 아니라 저주하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3) 배교의 결과. 이렇게 배교하여 타락한 자들은 이전과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갖게 된다. 그 결과에 대해 다섯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로, 한번 믿은 후 타락한 자들은 다시금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  성도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다면 회개는 불가능한 것인데 배교자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떨어져나가 적대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배교자는 악을 발한다. 십자가의 교리를 버리기 때문에 그는 잘못된 교훈의 터를 닦아 그 잘못된 교훈대로 나아가며 그 열매는 가시와 엉겅퀴이다.
  셋째로, 열매 대신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배교자들은 결국 버림을 받는다. 버림받은 가지들은 불사리개가 되는데, 이는 그들이 환난 가운데 저주의 불길에 던져짐을  의미한다.
  넷째로, 배교자들은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조롱거리로 만들므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다섯째로, 배교자들은 결국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인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고  멸망당하게 된다.
  (4) 본 주제에 나타난 신학적 중요성. 역사상 난해한 구절로 해석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실적인 문제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배교의 위험은 사실이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확신을  잃고  지친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경기에서 떨어져나갈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이 그 경주와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내할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확고히 밝혔다.
  둘째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본 서신의 시대적, 사회적  특수  정황이다. 이 말씀은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처해 있던 1세기 상황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이 편지의 주요 목적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로 말미암아 그들이 가진 신앙을  버리고 유대적인 요소로 끌려 되돌아가지 말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이때 유대적 요소란 예수를 메시야로 보는 대신 신성 모독자로 보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거부하는 행위인 것이다.
  셋째로, 이 말씀에는 교회에 주는 심각한 경고가 있다. 여기의 배교자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표적과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한때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었고, 같은 신앙의 자세를 지닌 듯했으나 결국 그들은 가라지였다.  그러나 이 가라지는 추수 때가 되어야 식별된다. 모든 사람들이  '주여,주여'말하며  함께 시작했지만 어떤 자들은 유다, 데마, 시몬처럼 주(主)를 떠났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 마땅히 병적인 자기 반성에 빠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믿음에  있는가'  그리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난해한 구절일수록 이런 성격의 경고 구절을 잘 조화시켜가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원한 보증에 관한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강조하도록  해야  한다. 본서의 저자도 비록 이런 경고를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이보다 나은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9절).
 
  2. 소망의 근거와 특성(6:9-20)
  배도에 대한 대책으로 성숙한 신앙 소유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저자는  이제  그들이 구원이 멀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소망 중에 인내할 것을 당부한다. 영적 성장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시험은 인내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당시 성도들 중에는 극심한  기독교 박해의 상황 가운데서 영적 성숙은 커녕 오히려 배교의 위험에 처한 자들이 있었는데 이에 저자는 그들에게 낙심치 말고 조금만  더  인내함으로  하나님이  보증하시고(13-18절) 그리스도게서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저 천국의 안식(19,20절)에 들어갈 것을 촉구한다.
  (1) 소망의 근거. 저자는 교인들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경책하기는 하였지만, 그런 불순종과 배반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음을 확신하였고 본문에서 그  경고에서 전환하여 오히려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다. 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며, 또 당신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선하게 역사하시는가를 설명함으로써 믿는 이들의 소망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풍요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신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9,10절). 만일 하나님의 공의가 사람의 영적 배반을 무시하지 않는 그런 것이라면 또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해 봉사하는 사람을 간과치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저자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들이 장차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비록 사람들은 우리의 봉사를 몰라준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봉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소홀이 여겨 간과하실 만큼  불공정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의 소망은 풍요하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11-15절). 히브리 교회는 몹시 심한 적대감과 반대에 부딪혔다(10:32-34).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와 같은 위기 속에서 그 중요성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 안에서 그러한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서약하셨다. 따라서 그분의 약속은 그들로 하여금 이런 암울한 시절들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하였다. 즉 그들은  틀림없이  약속을 받았고 약속의 이루심을 얻었으며,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았다. 아브라함도 "내가  너를 축복하겠고 너를 창대케 하리라"(창 12:2)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믿었고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근거하여 소망을 지닌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하다. 또한 하나님의 본성은  신뢰할  만하며  그분께서는  식언치  않으신다(민 23:19; 말 3:6; 약 1:17). 그러므로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는 실망하게 되는  일이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하신 바를 이룬다. 그분은 당신의 공의로우심으로 우리의 사랑을 기억하시며, 당신의 풍요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상하시며, 신실하신 본성과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에 용기를 주며 우리의 소망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도와주신다.
  (2) 소망의 특성과 역할. 성도의 소망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가운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 부활고 승천을 통하여 중대하고도 영원한 승리를  얻으셨다. 즉 그분은 앞서 가신 자로서 거룩한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다.
  성도에게는 세 가지 소망이 있다. 그것은 약속하여 맹세로 보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소망이며, 하늘 나라에 대한 소망이고, 예수와 같이 될 소망이다. 성도의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휘장 안으로 들어가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언제든지 하나님께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신 데에 기초한다. 이제 성도는 휘장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장차 영생의 소망에 도달할 것이다.
  이때 성도들에게 있는 구원에 대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 여기서 '영혼'(        ,프쉬케)은 단지 사람의 영적 측면만을 뜻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까지 함축한다. 그러므로 19절의 말씀은 '소망은 인간 전생(全生)에  있어서의 닻과 같다'는 의미이다. 한편 '튼튼한'(             ,아스팔레)이란 말은 '외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요동치 않는 것'을 의미하며, '견고한'(              , 베바이안)이란 말은 '타고난 성질 자체가 굳건한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같은 소망이 하는 역할이란 성도들을 휘장, 곧 지성소 안으로 인도해  들이는 것이다. 지성소는 휘장으로 막혀 있는 성막의 맨 안쪽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이다(출 26:31-37). 이곳은 대제사장 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서(레 16장)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모형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원에 대한 소망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에로 성도를 넉넉히 인도해 들인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듯, 그 약속을 성취해 주실 분 역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특별히 저자는 '닻'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도 모두가 폭풍의 바다 위에 떠  있음을 암시한다. 성도는 폭풍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 안에 있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닻이 필요하다. 의심할 바 없이 성도가 피해야 할 안전 지대는 성도의 항구이다. 이 항구는 잠정적으로는, 성도의 영(靈)과 교회 생활 안에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주  예수께서 계신 곳인 하늘에 속한 지성소 안에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항구에 머물려면 닻이 필요하다. 그 닻은 우리의 소망으로서 변할 수 없는 것 즉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맹세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맹세에 의해 견고해졌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맹세는 그분의 최종 확정이다. 바뀔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의해 성도는 자기 영혼의 닻인 소망 안에서 생기는 믿음과 인내를 갖는다. 그러한 견고한 닻인 소망을 붙잡음으로 성도는 이제 지성소에 거할 수 있게 된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성도의 믿음은 파선하게 될 것이다(딤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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