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5:1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 "사랑을 입은"이란 말(* )은 '사랑함이 된'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택하시고 영원토록 그의 자녀로 삼으신 무궁한 사랑을 나타나셨다. 이는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시기까지 하신 희생으로 신자들을 사랑하셨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은 신약성경 중 여기에만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자르 본받아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비록 범죄한 인간이지만 신자이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이니만큼 이 권면을 받음이 합당하다(마 5:48). 곧,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앞장 끝의 사상을 계승하는 것임을 분명하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앞절에서는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하고,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속죄 제물이 되시는 희생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제물"이란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의미하고, "생축"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죽임이 된 제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이 되신 것은 하나의 순교(殉敎)가 아니고, 우리의 죄를 인하여 대신 드림이 되는 속죄 제물로서의 죽음이었다.
엡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 "더러운 것"은 범위가 넓은 말이니 음행과 기타 부당한 영리 행위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탐욕 - 이것은 세상의 것을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취하려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언제나 하나님보다 물욕(物慾)을 앞세우고 거기에 열중하는 고로 탐심은 우상 숭배와 같다(골 3:5)
엡 5:4
누추함...어리석은 말...희롱의 말 - 이 세지 말은 남에게 손해를 주는 언사다. "누추함"은 부끄러움을 의미하는 바 남에게 수욕을 주는 언행이고 "어리석은 말"은 남의 정지(情地)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련한 말이니 남에게 무례한 언사요,"희롱한 말"은 건덕에 필요한 좋은 농담(상대편을 존대하거나 함께 즐기는 정신을 보이는 농담)이 아니고 상대편을 무시하는 농락이다
감사하는 말을 하라 - 이것은 인간에게 보다 하나님께 감사라라는 말씀이다. 곧, 하나님께 계속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들과 대화해야 될 것자르 가리킨다.
엡 5: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 곧, 에베소 신자들이 이 아랫말이 가리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음행하는 자나 탐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 이것은 불신자의 회개하기 전 상태를 말한다.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이것은 그런 죄를 범한 자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한에 있어서 정죄르 받는다느 의미라고 하였다. 고전 6:11참조
"우상 숭배자" 이 말은 오지 그 위말("탐하는 자")과만 관련된 것이다. 골 3:5 참조. 이 귀절에 있는 죄목들의 의미에 대하여는 3절에 있는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내용이다.
엡 5: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 이 권면의 이유는, 그 당시에 어떤 거짓 스승들이 음행 같은 것은 죄가 아니라고 가르친 까닭이겠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 "이를 인하여" 이것은 '음행, 탐욕 등 죄로 인하여'란 말이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무리를 가리킨다.
엡 5:7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 이 말씀은 6절에 관절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5절에 기록된 조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같은 죄에 참여하면 같은 벌을 받는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 "어두움"(* )은 (1) 하나님를 모르는 무식이고, (2) 도덕적으로 부패하여진 우매이고, (3)육적, 영적 또는 영원한 불행을 의미한다. "주안에서 빛이라." 인간은 아담 때부터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태하였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원지고 하나님을 알며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이 여기서 "빛"으로 비유 되었는데 "빛"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 또는 참되고 영원한 행복을 상징한다.
엡 5:9
빛의 열매는 모든 참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 "빛의 열매"란 것은 빛에 합당한 행실을 의미한다. 복음 진리를 아는 자들은 다 빛의 자녀들이다. 이 자녀들은 그 아버지 하나님의 뜻 곧, 빛을 좇아 행하여야 축복을 받는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어두운 가운데 행하니 넘어질 수 밖에 없다."착함"은 사랑을 그 주요 속성으로 하고, "의로움"은 부정(不正)에 반대되는 것이고, "진실함"은 위선(僞善)과 외식(外食)에 정반대이다. 아무리 선이 있고 의가 있어도 진실이 없으면 그것은 조화(造化)와 같다. 그것은 장구 하지도 못하고 또 그 자체에 생명력이 없다. 선(사랑)만 있고 의(바름)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유약에 치우치게 되고, 의만 있고 선이 없는 사람은 사나운 태도에 흐른다. 그러므로 이 둘이 겸전(兼全)해야 각기 특색을 보존할 수 있고, 따라서 신앙 인격을 세운다. 이 같은 신앙 인격의 소유자는 그 언행 심사에 있어서 진실 일관한다.
엡 5:10
빛의 아들로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자기 자신에게도 복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시험하여 보라 -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고 내막을 알려준다. 마치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실험하면서 그 결과를 알아보듯이 신자는 그 모든 행위에 있어서 잠시라도 무관심하지 않는다. 그는 그 행위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부를 살펴본다.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 주님의 뜻(빛의 열매)을 행하는 걸음의 소극적 단계를 말한 것이니, 그것은 (1) "어두움의 일"(죄악)에 불참함이고, (2) 도리어 어두움의 일을 "책망"함이다. 불의를 책망하는 것의 행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할 일이다. 그 이유는, 그리함으로 "나" 자신도 더욱 책임감 있게 의를 힘쓰게 된다. 이렇게 불의를 책망함에 있어서 조심할 것이 있다. 곧, 그 책망을 혈기로 하지 말것이며, 상대방을 미워함으로 하지 말 것이며, 훼방으로 하지 말 것이며, 능욕으로도 하지 말 것이다.
엡 5:12,13
저희의 은밀한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 12-14절은 "어두움의 일"을 책망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1) 어두움의 일은 "말하기도 부끄러움"것이니만큼,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그 불의(不義)를 방지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이고(12절), (2)불의의 인하여 책망을 받는 자에게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다(13절). 곧,그사람이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됨으로 빛이 나타난다는 것이겠다. 책망을 받은 그 사람이 회개하여 않는 경우에도 그의 양심에는 어느 정도 빛이 전달되었을 것은 사실이다. 불의에 대하여 밝히 책망하는 일조차 없다면 그러한 인간 세계에는 도의(道義)에 대한 인식도 없을 터이니, 그렇게 무지한 세계는 지옥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엡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 이것은 사 60:1을 해석적으로 인용한 것이다.사 60:1은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여기 이른 바 "네 빛이 이르렀고"란 말씀은 여호와 곧, 그리스도께서 이르렀다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이다. 사 60:2 참조. 이것은 불신자들의 회개를 독촉하는 말씀이다.
엡 5:15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 중대한 일에는 실수가 있기 쉬우니 "자세히 주의하여"야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대한 일이다.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 여기 "지혜"란 것은 이론적 지식이 아니고 실제 생활오 적용시키는 슬기를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은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을 인도자로 모시는 것이 참 지혜"고 하였다. 주님의 뜻은 언제나 지혜이다. 10,17절 참조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 "세월을 아끼라"는 문구의 헬라어는 기회를 속구(贖救)해 내어옴 고드 '기회를 사서 내오라'는 의미이다. 기회는 처사 혹은 결단의 기틀인데, 그 앞에서는 심리의 긴장이 생긴다. 바울은 여기서 모든 시간(세월)을 기회로 본 것이다. 기회는 머물지 않고 계속 흘러 가므로 우리가 그것을 사서 내 것으로 삼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히 가고 만다. 그러면, 그 귀한 기회를 무엇으로 값주고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신자가 믿음, 회개, 기도의 결단에 의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17절)노력과 희생을 지불함으로 살수 있다. 곧, 우리가 노력과 희생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기회는 영원한 가치 있는 것으로 화하며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가 기회를 이렇게 구해내야 할 이유는, 이 세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그것을 사서 가지지 아니하면, 기회(시간)는 악한 데 사용되고 마는
까닭이다(딤전 6:17-19)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이 귀절은 위의 15절의 계속이다. 인간은 주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그 이유는 ,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생활은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 이것은 술 취하는 대신에 성령님에게 취하라는 말씀과 같다. 성령을 충만히 받는다 함은, (1) 술에 취한 자의 전신에 술이 감염된 것처럼, 성령님의 감화력이 신자의 심신(心身)에 가득한 것이겠으며, (2)술이 그 취한 자의 생각과 행위를 주관하듯이, 성령님께서 그 신자의 생각과 행위를 주관하시는 것이겠다. 사람은 누구나 다 허약(虛弱)한 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생을 가리켜 "겨와 같다"하였고 (시 1:4), "안개"라고 하였고(약 4:14), 또한 "삼오라기 같다"하였고 (사 1:31), "연기 같다"고 하였다(시 102:3). 그러므로 인생은 어떤 힘에 붙잡히우려고 애쓴다. 어떤 힘에 붙잡히우지 않고서는 이 세상의 모든 파란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의 약함을 이겨보려는 심리로 술에 취한다. 그러나 사람이 술에 취함은 자기를 빠뜨림이니 잘못된 행위이다. 사람은 성령에 충만해야 된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으니, 인간은 그 은혜를 반드시 받아야 된다. 하나님은 성령 주시기를 원하시는데(눅 11:13), 사람들은 이 선물 받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원하는 자는 이 선물을 받는다(계 22:17). 성령 충만한 자라야 이 괴로운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미쳤다고 한다(행 26:24 ;고후 5:13).
그러나 실상은 성령 충만해야 인생으로서의 정상적인 자가 된다. 성령 충만하지 못한 자는 다 허약한 자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쳤다. 그들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사 5:20)자들이다. 죄를 떡 먹듯하는 자들을 어찌 정상이라 하랴!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 "시"는 구약의 시편을 가리키고, "찬미"는 성도들이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서 지은 노래이고, "신령한 노래"는 이 두 가지를 총칭한 듯하다. "서로 화답하며." 곧, 서로 문답식으로 노래함이니 마음과 마음을 화홧시키는 데 힘있게 작용하는 노래의 방법이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모든 노래가 입술에서만 발생된 봉사(lip servi-ce)로 멎어져서는 외식이니 만큼 심령에서 나와야 될것이다. 그러니만큼 찬송은 심령에서 힘있게 솟아나는 일종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또한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따라서 찬송의 가사나 곡조가 심령을 움직이도록 잘 되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올바른 발성법으로 부르도록 성도들이 훈련도 받아야 된다.
엡 5:20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감사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신자들이 받은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니(롬 8:32)그 공로를 인정하는 의미의 감사가 요구된다. 이런 감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감사이다. 그뿐 아니라, (2)우리는 감사하는 말씀도 하나님께 접촉시킬 수 없는 무가치한 죄인이므로 그리스도의 중보(仲保)에 의뢰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한다.
신자들이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가? 그들은 과거에 받은 은혜와 현재에 받는 은혜와 미래에 받을 은혜(이것은 약속의 형태로 되어 있음)로 인해 감사해야 된다. 바울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환란도 은혜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롬 8:28 참조.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 이것은 교회에서 신자들끼리 서로 존대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비록 미약한 신자일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 받은 그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니만큼 그의 신분은 다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존귀하다. 시 16:3참조.
엡 5:22
이 귀절부터 6:9까지는 가정의 도덕을 말하였으니 곧, (1)부부(夫婦)의 도덕(22-33), (2)친자 간(親者間)의 도덕(6:1-4), (3)노주 간(奴主間)의 도덕(6:5-9)이다.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 24절 참조. 아내된 자가 그 남편에게 대하여 지킬 도덕 두 가지가 있으니, 복종과 경외이다(33절), 그런데, 이 도독을 지키는 방법은 "주께 하듯"하라는 것이나, 그것은 진실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을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한부분으로 알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 대접하는 일로서 그의 사람들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셨다, 말 10:42,25:40 참조.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 "이는"이란 말(* )은 윗말의 이유를 가리키는 접속사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는, "남편"이 그의 "머리" 곧, 주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창 3:16). 이 주장하는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장하시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둘의 서로 유사한 방면을 생각하면, (1)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장하심이 폭력으로 하시지 않고 모든 권위(權威)로 하시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그렇게 해야 하는 점과, (2)그리스도께서 교회로 더불어 일체된 관계에서 회생적 사랑과 감화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그렇게 다스려야 하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것이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 "남편"은 "아내"를 노예나 하인처럼 취급할 것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된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여자를 발뼈(천한 부분)로도 만들지 아니하시고, 두골(섬김을 받을 만한 높은 부분)로도 아니 하시고, 오직 갈빗대(애정의 부분)로 지으셨다"고 하였다.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할 그 사랑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희생적 사랑이다. 그것은 아내에게 영적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결코 본능적 교제를 위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그 아내에게 대하여 본능적(육체적)애정을 주는 데서 머무르는 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의 아내는신앙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그저 한 가정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이런 불행한 여자들의 사회는 영적(靈的)으로 진보하지 못한다.
엡 5:26,27
이 두 귀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신 결과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그 생명을 버리신 결과는 성령께서 오셔서 그 교회를 위하여 그 생명을 버리신 결과는 성령께서 오셔서 그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는 성례와 말씀을 통한 그의 성화(聖化)사역이다.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도 성례와 말씀의 사역도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결과로 교회가 거룩하여진느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희생하는 생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아내의 영적 생활이 거룩해져야 한다. 그런데 남녀가 결혼한 뒤에 신앙생활이 약해지는 일이 있음은 남편된 자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지 않은 원인에서 그렇게 된다.
이는 - 이 말은 윗절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결과를 보여준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 "물로 씻씀으로 깨끗하게" 하심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심을 말한다. 벧전 1:23 참조.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 여기 "세운다"함은 그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의 마음에 들도록 계속 성화시켜 마침내 영화롭게 하심을 가리킨다.
엡 5:28,29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 여기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여야 할 이유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원칙에 호소함은 이기주의를 찬성하는 의미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함이 꼭 이기주의는 아니다.이기주의는 남들을 무시하고 자기만 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는 동시에 '나'자신을 사랑함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엡 5:31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 이것은 부부가 결혼한 뒤에는 한 사람 같이 된 사실을 가리킨 것인데, 두 사람이 한 몸 같이 서로 사랑함을 의미한다.
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 곧, 윗절에 말한 "그 둘이 한 유체가 될지니"란 말씀을 염두에 둔다. 부부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그 교회와의 연합을 비유라는 것이니만큼 오묘하다. "비밀"이란 말은 '오묘'란 뜻이다 (1) 결혼은 큰 비밀임, 왜 결혼을 비밀이라고 하는가? 결혼하여 이룬 '가정'이란 천소는 내실(內室)이다. 거기서는 부부(夫婦)가 모든 허물도 털어 놓고 지내며, 그야말로 인생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다. 그렇게 함으로 참된 부부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위로와 힘을 거기서 얻는다. (2) 교회는 신비로눈 큰 비밀임. 사람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전에는 민족이 없다. 그런데 이 일도 실현되었다. 예수님은 내 인간성을 가지시고 하늘에 가셔서 영원히 계시고, 신자는 성령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예수님과 영원히 연합한다. 고전 6:17에 말하기를, "주와 합하는 자는 영이니라"고 하였다. 다시 말히면, 우리는 주님과 합함으로 주님 안에서 모든 허물도 털어놓고 그에게서 해결을 받으며, 주님이 영생하심과 같이 우리도 영생하며, 주님이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부활한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레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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