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이 문구의 의미는 갈1:1의 말씀이 더욱 밝히 보이는데 그 요점은 바울은 사도된 것은 자기의 욕구나 혹은 타인들이 세워줌으로 인하여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이 편지가 사도직(使徒織)의 권위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을 밝히려는 까닭이다. "사도"란 말(* )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이다. 이 직분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처음에 하나님에 세우시고 내어보내신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일반 교역자들보다 특별히 권위 있는 자들이다(고전 9:1). 사도는 기독교회의 기초 직원으로서 성경을 기록하였고, 표준적 기적(사도적 기적)을 행하였다. 갈 1:1의 해석참조.
에베소 - 터툴리안(Tertullian) 이라는 교부(敎父)의 증언에 의하면 말시온(Marcion)의 사본에는 이 어귀를 생략하고 책머리에 "라오디게아서"라고 하였다고 한다. 터툴리안은 말시온의 그 잘못을 꾸짖었다(Adversus Marcionem, V.17).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 - "성도"(* )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정결한 생활을 하는 자를 의미하고, "그리스도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실은 예수 믿는 사실로 증명한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신약적 의의(意義)는 구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수호자(守護者)인 국부(國父)를 의미하고, 신약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개인마다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롬 8:15), 또 성령을 받아 영적(靈的)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의미에서 내적(內的)으로도 자녀 의식(子女意識)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이다 자녀의식은 신앙이 진실한 자에게 분명해진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성경에서 다만 하나님에게 한하여 사용된다. 어순(語順)으로 보아 이 말은 문장 초두에 있으므로 강세(强勢)를 띤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구원의 영화(榮華)를 말하려 함에 있어서 먼저 송영의 정서(情緖)가 터진 것이다. 그것은 그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고전 1:30).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롬 8:15). 따라서 그들은 모든 구원의 은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받게 된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 "하늘에 속한"이란 말(* )이 여기서는 하늘의 장소적 의미로 쓰인 것이니(1:20,2:6,3:10,6:12), 그 "모든 신령한 복"은 하나님아버지께서 하늘에 계서서 내려 주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이 은혜는 양자됨, 성령의 열매 천국에 대한 약속, 부활 소망, 영생이다(Theodoret).
엡 1:4-6
택하사...예정하사 - 이 두 말은 이 문맥에 있어서 서로 유사한 내용을 가진다고 간주해도 과히 틀림이 없다.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예정"(혹은 선택)이다. 바울이 여기서 구원론을 말하면서 그 근거를 첫머리에 말한다. 그런데 이 예정, 혹은 선택은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었는가?
(1) 창세전에 - 되었음.이와 같은 선택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요 17:24). "창세 전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되었으니 우리가 아무 선이나 약으 마행하기 전에 벌써 우리는 선택되었다(롬 9:11). 그러므로 이 선택은 하나님의 임의적 행위이고, 인간의 아무런 조건도 참고하시지 아니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 되었음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를 보셔서 구원하시기로 택정하셨다는 의미이다(벧전 1:19-20).
(3) 사랑 안에서 - 되었음.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우리의 무슨 공로레 대한 보수라면 그것은 공의(公義)의 보상원칙(報償原則)에 속하는 것이고 사랑의 행위는 아니겠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런 공로가 엇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나 그것은 순전한 사랑리 원칙에 속한 것이다.
(4) 그 기쁘신 뜻대로 - 하셨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그것이 우리 인간 편에서 행할 것에 댜한 평가(評價)로 말미암아 행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임의적 행위라고 할 수 없다.
(5)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택하셨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6) 찬미하게 하려 - 고 선택되었음, 곧, 사언행(思言行)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며 섬기는 생활(이것이 "찬미"이다)을 하게 하려고 선택되었다.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함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택정하신 일의 목적이지만, 그보다도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게"하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만물의 존재의 이유는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려"는 까닭이다.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그렇다면 하나님은 순 이기주의자가 아닌가? "할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대답은 성경적이다. 곧,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사람은 그 피조물이다. 창조작가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셨음이 어찌하여 불의한 행위인가? "하고 할 것이다. 롬 9:15-23 참조
우리가 위의 해석과 같이 구원 받기로 예정된 방법을 보니, (1) 우리는 조금도 자만할 수 없다. 우리의 잘한 그 무엇이 이 선택을 성립 시킨 일이 있느가? (2)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할 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다.만일 유기(遺棄)된 자에게 어떤 공로가 있다면 그는 불평을 품을 만하다. 그러나 인간은 다 죄인이다(롬 3:10). (3)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것이니만큼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하여, 안전성을 느낀다. 우리의 구원이 우연적으로 된 것이고 하나님의 영원한 예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서은 위태로운 것이며 또 우연적으로 유실(遺失)될 염려 있는 것이겠다. 감사를 품게 된다. 우리에게는 구원 받을 공로가 전연 없고 도리어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을 거스리는 추악한 자들인데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그 얼마나 감사한가! 송구한 마음과 겸비를 가진다. 나도 남과 같이, 혹은 그 이상 죄인인데 주님께서 나를 특별히 돌아 보셨으니 만큼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많은 수고와 많은 봉사를 하려 한다.
엡 1:7
그의 피로 -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으심을 가리킨느 말인데 왜 그것을 "피"로 표시하는가? "피"는 생명을 대표하는 것이다(창 9:4). 구약 시대에 피는 속죄제(贖罪劑)의 희생(犧牲)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 희생의 피는 구약 시대에 오랜 세월 동안 제물로 드림이 되면서 후에 오실 그리스도의 피(이것은 실물임-힘 10:1)를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피"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을 연상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성취적 의의(成就的意義)를 지적 하는 귀한 말이다.
구속 - 이 말의 헬라어(* )는 종을 그 주인에게서 값 주고 풀어 내옴과 같이, 죄 값을 지불하고서 죄인을 그 받을 벌에서 풀어 내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죄 값을 무엇으로 냈는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다.(벧전 1:18-19)
엡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속죄의 은혜)를 복음 전파에 의하여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그것은 신자들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넘치게"하심이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리켜 "지혜"라고 한 것은 그때에 철학적 지식의 미혹을 받던 그들을 교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4:14). 골 2:8 참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도(道)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나타내신 지혜라고 성경은 말한다(고전 1:18-30)
엡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 여기 이른 바 "비밀"이란 말( )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복음이 비밀처럼 감취어져 있었으나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온 세상에 알려졌다. 이렇게 그것이 알려졌으도 성령을 받은 자 외에는 그 나타난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롬 16:25-26). 엡 3:3-4,9,6:19; 골 1:26-27참조.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 - 이것은 우리에세 알려진 "그 뜻의 비밀"이 무엇인지 밝혀준다. 이 문구의 의미를 좀 더 명백히 나타나도록 번역하면 "시대들의 성취에 대한 경륜을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자기 안에(누가 하게 한 것도 아니고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여 한 것도 아님) 예정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구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곧, 인류 역사가 있은 이래로 시대는 하나만이 아니었다. 구약 시대(예언 시대)도 있었고 신약 시대도 있다. 이렇게 한 시대가 지나가고 다른 시대가 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임의대로 우주의 구속통일을 이루시기 위하여(10절) 체변(替變)시키시는 "예정"의 실현이다. 하나님께서 시대를 예정하신 목적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인데, 이 시대들의 체변에 대한 "그 (주님)의 뜻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신자마다 그것을 알게 된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 이 귀절은 앞의 7절 이하에서 말한 구원 성취의 결과를 가리틴다. 그 결과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함이다. 여기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란 말(* )은 죄와 저주로 인하여 파상되어 이상적(理想的) 조화를 잃었던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서) 하나가 되게 하심을 가리틴다. 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운동이 완전히 실현될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한 말씀(사11:6-9)과 같이 될 것이다.
엡 1:11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 이 문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위의 4-6절의 해석을 참조하라.
우리. - 이것은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킨다(Van Leeuwen).
기업이 되었으니. - "기업"(* )은 천국의 기업 (하나님께서 그 자녀 된 자들에게 주시는 영생과 영광)을 의미하는데, 신자들이 천국의 기업을 누릴 자들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행 26:18;골1:12참조. 벴겔(Bengel)에 의하면, 이 문구는 신 자들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하나님의 소유한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라고 한다.
엡 1:12
전부터 바라던 우리. -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를 대망하여 오다가(행 3:25,26:6,22,28:20)그가 오셔서 구속해 주셨으므로 그의 영광과 찬송을 위한 존재가 되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영과의 찬송이 되게"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 )는 차라리 "그의 영광의 찬송을 위하여 존재하게"라고 직역함이 더욱 좋다. 우리가 구속을 받은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다.
엡 1:13
그 안에서. -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인데 본장에 많이 나타난다(3,4,6,7,9,10,11,12,13,15,20). 이 문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속 사업을 실시하심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조건들 곧,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 그의 공로, 우리와 그의 연합(우리의 대신이 되시며 대표가 되심)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소중하심이 마치 고기에게 있어서 물이 소중함과 같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구원 받게 하는 관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립시키는 것이다.
너희도. - 곧, "너희 이방인들도"란 의미이다.
진리의 말씀. - 이것은 그 아랫말이 설명해 줌과 같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복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왜 복음을 가리켜 "진리"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복음만이 (1) 참 하나님을 알려주는 까닭, (2) 참 인생관을 알게 해주는 까닭, (3) 참 우주관을 알려주는 까닭, (4) 따라서 그것이 세미(細微)한 사리(事理)들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바른 관찰과 바른 행동 원리를 주는 까닭이다.
약속의 성령. - 이것은, (1) 구약에 예언된(약속한) 대로 오신(행2:1-4) 성령이란 의미이고 (욜 2:28; 슥 12:10; 사 32:15,44:3; 겔 36:26,39:29; 눅24:49;행2:17-18; 갈 3:14), (2)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신실한 성령이시니, 그는 장래의 영광스러운 구원 성취도 약속하시는 (보증하시는) 성령자이란 말이다(갈 3:14).
인 치심을 받았으니. - 이것은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자녀격(養子意識-롬 8:15-16)과 그들이 천국의 기업에
참여할 것에 대해 확인하는 표이다.(행 19: 1-6; 고후 1:22;요일 3:24). 이 인표(印標)가 확인의 의의(意義)를 가짐은 다음 귀절의 "보증"이 되시는 성령이란 의미의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엡 1:14
보증이 되사. - "보증"이란 말의 헬라 원어 아라본(* )은 히브리 원어 에라본(* )의 음역(音譯)이다. 그 의미는 매매하는 일에 있어서 지불되는 계약금을 가리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寶血)로 우리를 사셔서 천국의 기업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확실히 주시고다는 계약의 의미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것은 위의 보증의 이중 목적이니, (1) 신자들이 내세(來世)의 완전한 구속을 얻음이고, (2)그 구속된 자들이 하나님을 사언행(思言行)으로 찬미(영화롭게 함-알고 감사하고 섬김)함이다. 여기 "그 얻으신 것"이란 말(* )은 그 소유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주고 사서 소유로 만드신) 백성을 가리킨다.
엡 1:15
이를 인하여. - 이 말은 우의 13-14절에 말한 대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을 인하여'란 의미이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전도를 받아 구원 얻게 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그는 이 아래에 더 자세히 감사의 이유를 밝혔다.
너희 믿음과 사랑을 나도 듣고, "믿음과 사랑"은 성도의 생활 전부를 가리킨다. "믿음"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받음이고, "사랑"은 구원 받은 자가 나타내는 모든 행실을 총괄적으로 가리킨다. 신자의 모든 행실은 사랑을 목적해야 된다. 사랑 없는 것은 선행(善行)이라도 진정한 선이 아니고, 덕행(德行)이라도 진정한 덕이 아니다.
엡 1: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 이 구절은 바울의 감사 생활에 있어서 두 가지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 남의 일로 인하여 감사한 것. 인간은 자기의 잘 된 일로써도 하나님께 감사 해야 하지만 남이 잘 되는 일로써도 감사해야 한다. 남의 잘 된 일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음은 큰 잘못이다. 누구든지 남의 잘 되는 일로 인하여 감사하면 그 감사하는 행위때문에 감사하는 그 자신도 복을 받는다. (2) 바울이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참으로 간절한 감사이다. 참되고 뜨거운 감사는 쉬지않고 감사함이다.
엡 1:17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 문구는, "하나님을 아는 너희의 지식에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라고 개역함이 옳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떤 증명에 의한 지식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이레네오(Irenaeus)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신앙을 주는 성령의 은혜는 마치 이슬과 비가 내려 곡식을 적셔서 결실하게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고요히 임한다고 하였고, 어거스틴(Augustinus)도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을 믿게 우리 심령에 영적 은혜가 임해야 된다고 하였다.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가 기독자에게 묻기를, '너는 왜 믿느냐?'라고 하면 기독자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 묻기를,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게 되는가?'하면 그는 다시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그렇게 믿도록 역사하여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이다"(H.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1,1967,p.550).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에베소 교인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다 된 것은 아니므로 그드리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더 받아야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야 그들의 마음눈이 밝아져서 그들이 장래의 소망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18-10).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반 영적 지식에서 더 밝은 영적 지식을 구해야 된다.
엡 1:18,19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 능력의 지극히 크심. - 여기 "소망"이란 것( )은 현재 우리가 가지는 소망심(그것이 바라보는 대상은 아님)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확실성 있는 것이어서 실패가 없다고 한다 (롬 5:5-11). 그러나 이 "소망"이란 것은 객관적인 소망의 대상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정당하다. 골 1:5; 딛 2:13; 히6:18 참조. 그 아랫 말 "기업의 영광"이란 것은 소망의 대상에 대한 해설이다. "능력"은 이 소망의 성취 방편을 말한다. 그러면 "소망"은 어떠한가? 그것은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가지는 명상(暝想)이 아니고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소 천적 보증(天的保證)을 받은 확실성 있는 것이다(1:13-14). 그것은 현재의 많은 고통도 그것 앞에 대조될 때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나게 할 지극히 큰 것이며(롬 8:18), 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벧전 1:4) 것이다. 이 소망이 이루어지게 할 능력은 어떠한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성령의 능력이다(20-21).
엡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을 믿는 자마다 자기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그에게 신앙을 줄 뿐 아니라, 그것을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여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하시며, 그의 장차 받을 몸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엡 1:21
정사, 권세, 능력, 주관하는 자. - 이것들은 천계(天界)의 천사들의 여러 직분들을 가리킨다.
엡 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 곧,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주관 아래 있게 하심을 가리킨다. 시8:6참조.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 그가 "만물 위에"계시니만큼 만물로써 교회에 유익하게 하실 수 있다. 또 그가 "교회의 머리"(주관자)로서 교회를 보호하신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 여기 "교회"란 말(* )은 불러냄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에서 불러냄이 되어 천국에 모인 자들의 단체를 가리킨다. "몸"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밀접함을 비유한다. 반류웬(Van Leeuwen)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는 언제나 파괴될 수 없다"고 하였다. 몸은 (1) 머리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고, (2) 머리가 받는 영광에 동참하며, (3) 머리와 연합하여 일체(一體)가 되어 있다. 쉴리에(Schlier)와 케이제만(Kasamann)등은 머리와 몸으로 비유된 사상이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영지주의 신화(神話)에 원인(原人=Oermens)이라는 것이 있는데 모든 인간들의 영혼들은 그에게 속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인(Oermens)을 머리라고 하면 모든 영혼들은 그 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와 "몸"으로 표현된 교회론이 여기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1) 바울의 신학은 유신론(有神論)인 반면에, 영지주의의 신화는 범신론(汎神論)인 까닭이고, (2) 바울의 신학은 실제 역사적 사건성을 가진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한 반면에, 영지주의의 신화는 역사성이 없는 인간의 상상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으로 비유된 바울의 교회론은 구약에 근거한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의하여 아담을 머리로 하고, 그의 안에 포괄된 온 인류를 그와 일체(一體)로 생각하였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생각하고(고전 15:47),그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백성을 그와 일체된 자로 생각하기도 하였다(롬 5:15-19).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이 문구의 의미는, 교회는 만물 안에(세계 안에) 내재(內在)하셔서 만물에 모든 은혜로 채워주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 "충만"(* )은 가득히 채워진 것을 의미하는바,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케 하시는 은혜를 전달하는 기관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충만히 보유(保有)한 그릇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교회가 현실에 있어서 그런 완전한 기관은 되지 못하나 마침내 그렇게 완성을 보게 될것이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한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사역과 구약시대 성전 사역의 차이점이다. 성전에서 이루어진 사역은 하나님께로 나아가 바치는 행사였으나, 신약 시대 교회의 사역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서 은혜와 구원을 나누어주는 운동이다. 교회의 사역 결과도 마침내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롬11:36). 현대 한국 교계에는 교회의 사역을 구약 시대의 성전 사역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예배 행위를 가리켜 제단을 쌓는다고 한다든가, 교직자를 구약 시대의 제사장격으로 착각하는 것 등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제단은 그 예표하였던 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히 7:23-25,13: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