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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다섯 번째 주요 부분은 예루살렘 안과 그 주변 안에서의 예수의 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들 특히 최후의 사자인 하나님의 아들을 거역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였다. 예수는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 민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다.

=====11:1상
예루살렘 남쪽 1마일 앞에는 벳바게 마을이 있었고 약 2마일 밖 감란산 동편에는 많은 감람나무로 유명한 약 2마일 정도 넓이의 베다니가 있었다. 예루살렘 여리고까지 사람이 살지 않고 위험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가에 있는 베다니에는 예수가 유대에 계실 때 대체로 예수의 숙소로 제공되었던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었다. 또한 베다니에는 문둥이 시몬의 집도 있었다.

====11:1하 - 3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맞은 편 마을로 보냈다. 거기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곧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귀를 풀어 예수께로 끌고 왔다. 마태는 그 나귀의 어미까지 언급하고 있다. 약 누가 외 이렇게 하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쓸 것이며 곧(지체없이) 다시 여기로 돌려보내리라 라고 말해야 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주 (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나귀 소유주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1:4 - 6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을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그의 예고가 자세하고도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2 - 3절 참조) 이것은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강조한 것인데 이 어린 나귀는 예수의 메시야적 표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 나귀의 주인과 미리 약속해 놓은 것인가? 아니면 이 사건이 그의 초자연적 지식을 나타내는 것인가?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아마 첫 번째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귀를 얻어 오는 마가의 상세한 묘사의 많은 부분을 볼 때 분명히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귀의 주인은 아마 예수와 사전에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마가가 기록한 많은 상세한 기사는 직접적인 목격자의 보고를 통하여 기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심부름에 보냄을 받은 두 제자 중의 하나가 아마 베드로 였을 것이다.

===========11:7 - 8
예수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등에 걸쳐 안장을 대신했다. 예수께서 전에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에 오르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즉시 그들의 겉옷을 먼지 투성이의 길 위에 깔고서는 환호했다. 또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싱싱하고 푸른 나뭇가지들(스티바스, 잎사귀들 혹은 우거진 가지들)을 깔았다. 종려나무 가지는 요한 복음 12:13에 언급되어 있다.

========11:9 - 10
이 구절들의 교차 대구 법적 배치는 두 그룹이 - 예수의 앞서 가는 그룹과 그 뒤를 따라 가는 그룹 - 서로 번갈아 노래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은 시편 118:25 - 26을 노래했다. 해마다 유월절 축제가 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기원을 나타내는 여섯 편의 순례 시를 노래하였다. 히브리어(호시아나)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음역한 호산나라는 말은 원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를 뜻하는 기도였다. 이후에 이 말은 큰 소리로 외치는 찬양으로 사용되었고 순례자들이나 유명한 랍비들을 열렬하게 환영할 때 사용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즉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소서 와 같은 의미이다. 여기서 이 말이 사용된 것은 군중들의 성겨 때문에 이런 모든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11:11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 가셨다. 그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성전이 바르게 사용되고 있는지 보기 위하여 성전 주위를 관찰하셨다. 이것이 다음 날 그의 행동을 유발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는 해질 무렵이어서 성문이 닫혀졌기 때문에 예수는 12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셔서 그날 밤을 지내셨다.

=======11:12 -13
다음날 이른 월요일 아침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떠나신 후 도중에서 시장하셨다. 멀리서 예수께서는 길가에 있는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셔서 나무에게 무슨 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쳐다보셨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무성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마가는 때가 무화과 철이 아니었더라 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 때는 니산월(4월) 중간인 유월절 절기 때였다. 팔레스틴에서는 3월에 무화과나무에 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열매가 열렸고 뒤이어 4월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다. 이러한 일찍 열리는 푸른 열매 가 지방 소작농을 위한 일반적인 식물이었다. 이러한 작은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낸다는 것을 그 해에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징조였다. 이러한 작은 열매들은 정상적으로 무화과가 열려서 무화과 철인 늦은 5월이나 6월에 익게 되면 마침내 떨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월절(4월중) 직전에 비록 그때가 무화과 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무화과나무에서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찾기를 기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1:14
그 무화과나무에 대해 예수께서 강하게 저주한 것은 예수께서 시장하셨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극적이고도 예고적으로 보여준 표징이었다. 잎은 많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총과 그들의 종교에 대한 외적인 인상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영적인 불모성을 상징한 것이었다.

======11:15 -16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바깥뜰인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어떤 이방인도 이 뜰을 넘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필요한 순결한 품목들을 그 곳에서 사고 팔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자리에는 돈을 바꾸는 일들이 성행했으며 그 돈에는 우상적인 모습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거래는 보통 강탈과 사기 속에서 행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물건을 싣고 성전을 두루 돌아 다녔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이곳 저곳을 다니기도 하였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이방인들이 사용하도록 구별해 놓은 성전 뜰을 무시하고 소란을 피웠기 때문에 노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둘러엎으시고 아무도 성전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1:17
예수의 이러한 대담한 행동은 사람들의 주의를 사로잡았고 그는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서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무감각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노하신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속이는 장사꾼들에 대한 예수의 거절이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대제사장들보다 성전에서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셨다.

=========11:18- 19
종교적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들었을 때 큰 소요 없이 예수를 잡아죽일 최선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군중들과 예수는 그를 체포하려는 유대인의 권위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다.

======11:20 - 21
이 구절은 12 - 14절의 계속이다 다음날 아침 즉 화요일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어제 그 무화과나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어 뿌리로부터 완전히 말라 시들어 있었다. 비록 예수께서 그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의 생생한 묘사였다고 믿고 있다.

===========11:22 - 24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무한히 선하심을 의심 없이 신뢰하는 것이다. 엄숙한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은 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 고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은 이스라엘의 부족한 신앙과 대조되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다.

=======11:15:26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태도는 기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서서 기도하다가 믿는 자들에게든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든지 누구에게든지 악의를 기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일단 그것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대한 관계는 서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는 하나의 결속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요구된다. 만약 그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11:27 - 28
화요일 아침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갔다. 성전 뜰에서 예수님은 산헤드린의 대표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이스라엘 종교 생활의 감시인인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1)너의 권세가 무엇이냐? (2)너의 권세는 근원이 누구이냐? 누가 너에게 이런 일을 할 권세를 주었느냐? 는 것이다.

=======11:29 - 30
랍비들의 일반적인 논쟁 기술인 예수의 반문은 그에 대한 대답을 그들 스스로 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그 자신의 권세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상대할 자가 없었던 요한의 권세와 출처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셨다. 요한에 관한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예수에 대한 결론도 달라지게 된다.

=======11:31 - 32
예수의 질문은 이러한 종교적 지도자들을 궁지에 빠지게 했다. 사람에게서 라는 후자의 대답이 그들에게는 더 타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두려워 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11:33
따라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시도로 변론을 했던 그들은 그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의 질문은 그의 권세가 요한처럼 하늘에서 왔음을 암시한 것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판단을 보류함으로써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요한과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본장에 이르러 예수의 사역을 또 한번의 전기(轉機)를 맞게 된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이 10장에서 끝나고, 이제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십자가 수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건들이 상세히 묘사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서 11-15장은 시간적으로는 불과 일주일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의 이야기지만, 수난받는 종의 기사 중 절정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마가복음 전체의 1/3의 분량에 해당한다. 본장에 수록된 구체적인 내용을 상고하기에 앞서 우리가 유의해 볼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 간의 공개적 충돌. 3:1에서 시작된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마찰은 본장을 기점으로하여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예수께서 대적들을 공공연하게 책망하고 나섰다는 점이다(15-18절). 앞에서도 예수께서는 대적들의 비방과 궤계에 허다하게 부딪쳤지만,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불필요한 수난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에 정면 충돌을 피하셨다(3:7;8:13등). 그러나 이제 정해진 십자가 수난의 때가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대적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그들의 허상과 죄악을 적나라하게 책망하시기에 이르렀다(12:38-40). 특히 마 23:13-36에는 소위 '일곱 가지의 화(禍)'를 통해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시키신 격렬한 저주가 수록되어 있다.
(2) 수난의 이미지가 보다 선명해짐.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일반 민중들을 선동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빼앗으려고 하는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 유대교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소식은 대적들에게는 커다란 도전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이미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고서(3:6)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거니와, 이제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살해 계획을 조속히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11:27-33;12:13-34;14:1, 2등). 이처럼 급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까닭에 다섯 장에 걸친 마지막 수난 기사는 매우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1. 예루살렘 입성(11:1-10)
본문은 예수께서 수난 주간 중 첫날(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내용이다.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정(旅程)은 마침내 막바지에 이르렀다. 팔레스틴 북부의 가이사랴 빌립보(Casearea Philippi) 지방에서부터 갈릴리와 유대 산지, 요단 건너편 그리고 여리고를 지나 감람산에 이른 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당도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마 21:1;눅 19:29)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서에도 수록되어 있어 이사건이 예수의 생애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여실히 뒷받침한다(요 12:12-19). 공관 복음은 주님의 갈릴리 사역을 워낙 강조하였기 때문에, 마치 주님이 예루살렘을 본문에서 처음 방문하고 계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예수의 유대 사역 또한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이번 입성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요 2:13;5:1;7:10).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예루살렘 방문 중에서도 특히 본문상의 방문이 예수의 생애와 나아가 구속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이미 마 21:1-11의 강해에서 설명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지니는 의미를 부각적으로 살펴보되 특히 입성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징에 초점을 맞춰 보도록 하자.
(1) 공개적 입성이었다. 예수는 당신을 환호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물론이고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아차릴 수 없게끔 공공연하게 입성하셨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중 많은 시간을 갈릴리의 외딴 지역에서 보내셨고 당신의 크신 권능을 베풀 때에도 그 일을 비밀로 해두도록 당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개선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서 입성하듯이 의도적으로 무리들의 환호를 받아가며 당당하게 들어오신 것이다. 당시 예수의 입성을 환호하기 위해 늘어선 무리들의 환호 소리는 예루살렘 곳곳을 울렸을 것이다. 더구나 유월절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고 있었고, 그들 또한 예수의 입성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리듯 당신의 입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신 이유는, 인류의 대속을 위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 당도하셨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유대 군중들과 관원들 및 유대교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로마인들가지 포함한 많은 중인들 앞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은 예수를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로 착각하고서 열광적으로 환호하였지만, 정작 주께서 사로잡혀 재판정에 섰을 때에는 도리어 냉소와 조롱을 보내었다.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처단함으로써 자기들이 승리를 거둔 것이라 확신하였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사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심으로써 진정한 승리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다(16장). 즉, 예루살렘 입성시에 보이셨던 예수의 당당한 승리자적 모습은 바로 부활과 나아가 재림시에 드러낼 영광과 승리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예수의 입성 광경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직접 목격한 자는 물론 간접적으로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자들도 예수의 재림시 백보좌(great white throne) 심판대에서 핑계 거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요 15:22). 왜냐하면 예수를 죽음에까지 몰고갔던 것은 다름 아닌 모든 사람들의 죄이기 때문이다.
(2) 겸손하신 입성이었다. 예수는 세상의 정복자들처럼 군마를 앞세우고 기치 창검(旗幟槍劍)을 번득이며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다. 더구나 그 나귀마저 빌린 것이었고 안장이 없어서 제자들이 겉옷을 깔았다. 이는 곧 슥 9:9의 성취로서 주께서 겸손하며 또한 평강의 왕이심을 나타낸다(사 9:6). 이는 몇 조각의 빵으로 수천명을 먹이신 주께서 스스로는 때때로 배고픔을 감수하신 일이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셨던 권능의 주께서 스스로는 죽음의 쓴 잔을 마다하지 않으신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비록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겸손한 왕이신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계셨다. 무력으로 일세를 풍미(風靡)했던 수많은 정복자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 서서히 묻혀버렸지만,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희생시킴으로써 온 세계를 정복하신 가장 강력한 정복자시다.
한편 나귀를 타신 예수의 입성은 곧 당신이 평화의 왕 메시야이심을 알리는 일종의 무언극(無言劇)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스스로는 자신이 왕이요 메시야이심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무언의 행동과 무리들의 찬미 소리가 당신의 입성의 의의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스도. 성전은 예수의 묘형이요 예표였다.
(1) 성전의 존재 의미. 성전 자체는 기본적으로 이 땅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전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적 위치로서 신앙의 확신과 경고를 주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성전은 결국 참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신 예수의 모형이요 예표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구속사 전개의 한시점에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라는 시간적 제한성과 아울러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방법과 절차를 엄정하게 제한함으로써 신약의 성도와 하나님의 직접적 교제와 비교해 볼 대 간접성이라는 제한성을 갖고 있다. 즉 성전은 그리시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였다.
(2) 성전의 역사. 성전의 역사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성막(Tabemacle)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막은 이동성을, 성전은 고착성을 갖는다는 점 외에는 양자는 그 의미가 완전동일하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상 실제로는 세 번 건립되었으나 성경에는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까지 합하여 네 개의 성전이 언급되어 있다. 성전의 순서는 솔로몬 성전, 스룹바벧 성전, 에스겔 성전, 그리고 신약의 헤롯 성전이다.
(3) 성전의 단계적 제한성의 의미. 첫째로 유대교가 가진 배타적 요소를 설명하되, 또한 둘째로 죄지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한다. 성전 건물 전체는 여섯 구획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구획마다 한 단계식 높은 위치를 차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성결의 정도를 강조한다.
(가) 이방인의 뜰. 이방인에게 허용한 유일한 장소로서, 성전 경내 바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다.
(나) 성전 벽. 90cm의 담으로서, 이방인들이 이를 넘어설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다) 여인의 뜰. 이방인의 뜰보다 90cm 높은 곳으로서, 유대 여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었으나,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었다.
(라) 이스라엘의 뜰. 유대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마) 제사장의 뜰. 성소와 지성소라는 두 개의 구획으로 분리되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정해진 때에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들어갔으며,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를 드렸다.
한편 성전에서 이방인들을 배제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으로 간주하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지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들은 뜰을 계급별로 나누고 출입을 금지하여 유대교 체제의 엄격한 신분 차별을 강조하였다.
일년에 단 하루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지성소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생각한 장소 가까이에 보통 사람들의 접근을 금한 여러 가지 경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인들로부터의 분리에 대해 가시적인 교훈을 주는 좋은 실례였다.
(4) 성전에서 교회시대로. 그러나 기독교는 새 시대로 접어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하나님과 회개한 인간 사이의 경계를 없애 주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는데(마 27:51), 이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히 10:19, 20). 이로써 예수 안에서 모든 신분의 차별이 사라지게 되었다. 즉 예전에는 그 차별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었고(롬 10:12),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었으며(갈 3:28), 제사장과 백성 사이에 있었으나(계 1:6)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철폐되어야 함을 뜻한다.

* 예수의 메시야적 직분. '메시야'(Messiah)란 '기름부음 받은 자'(the Anointed)란 뜻으로, 왕(삼상 12:3, 5)이나 제사장(레 8:30) 혹은 선지자(대상 16:22) 등에게 적용된 말이다. 그리고 기름을 붓는 것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뜻의 상징적 행위였다. 한편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수행하신 직분은 왕, 그리고 선지자 이 세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다.
(1) 왕적 직분.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영원한 왕으로 예언된 바 있다. 신구약 중간기에 '메시야'는 유일 무이한 구세주 혹은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는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의미를 지닌 말로서 강력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예수 당시의 대다수 유대인들도 이스라엘을 외세의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대망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께서 건설하신 메시야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었으며, 왕이신 예수는 온갖 죄의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 오셨다. 또한 예수는 무력 대신 공의와 사랑으로 영원히 통치하는 평강의 왕으로서의 직분을 완수하셨다.
(2) 제사장적 직분.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은 속죄를 위해 짐승들을 희생 제사로 드렸다. 그러나 그러한 제사는 불완전하여 늘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친히 당신의 피와 살을 희생 제사로 드리심으로써 구약의 모든 희생 제사를 마감시키셨다. 즉, 예수는 단 한번의 희생 제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제거하시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또한 예수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시사 긍휼이 여기시며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
(3) 선지자적 직분. 신 18:15는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예언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며 진리로써 교훈하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그릇된 종교적 병폐들을 엄중히 책망하신 참선지자이시다. 특히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다는 점에서 유일 무이하신 선지자이신 것이다.

2.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성전 숙정(11:11-18)
15-18절은 주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실과 관련된 두 기사(11-14절과 19-26절) 사이에 위치하여 시간의 경과를 암시하는 일종의 중간 삽화라 하겠으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11-14절과 19-26절은 둘 다 무화과나무를 소재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 (1) 11-14절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내용인 반면, 19-26절은 기도에 관한 교훈인 것이다. (2) 무화과나무가 형식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인 유대교를 비유한다는 점에서 11-14절은 성전 숙정 사건(15-18절)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된다.
한편, 성전 숙정의 배경과 교훈에 관해서는 마 21:12-22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할 때에는 두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로, 예수께서 단순히 배고프다는 이유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 리가 없다. 둘째로, 더구나 예수가 결실기보다 2, 3개월이나 빨리 무화과가 열리지 않았다고 하여 말라죽게끔 하는 억지스런 저주를 내렸을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유월절(Passover) 무렵인 4월 중순 경이었고, 무화과나무는 3월에 잎이 나기 시작하여 6월에 가서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와 같은 모순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본 기사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눅 13:6-9에 수록된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이 이야기의 근거를 찾는다. 즉, 본래는 비유였던 것이 사실적인 이야기로 꾸며졌다는 것이다. 비록 본문의 이야기가 난해하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그렇다고하여 무작정 이를 허구로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우리는 이 기사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는 성전 정화와 마찬가지로 심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성전에 대한 심판.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뒤에 이어지는 성전 숙정 기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성전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성전이란 곧, 의식과 형식주의에 급급하였던 유대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에 대한 심판 예고는(마 24:2) 성전을 발판으로 삼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던 당시 대제사장의 권위에 대한 정면 대결을 선포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을 예배할 때가 도래하였음을(요 4:23) 암시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요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심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특정한 장소(곧, 성전)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성전의 원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히 8:1-13;9:11-14).
(2)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호 9:10). 그러므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느라고 요란하게 떠들면서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던 당시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상징한다(마 15:8). 당시 유대인들은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다운 면모를 상실한 채, 선민으로서의 특권 의식에만 사로잡혀 이방인들에 대해 독선적(獨善的)이고 배타적(排他的)인 태도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당신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이 탄생할 영적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하셨다.
여기 수록된 심판 선언은 비단 당시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신앙인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모든 종교적 위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입술로 신앙 고백을 정확히 암송하되 그 고백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수반하지 않는 자들, 혹은 세례를 받고 성찬식(Eucharist)에 참예하며 또한 주일마다 빠짐 없이 교회에 출석하되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 보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실제적 삶 속에서 맺지도 않는 자들은 살아 있다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상은 죽은 자들이다(계 3:1).

3. 기도와 간구에 관한 교훈(11:19-26)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의 두번째 부분이지만 첫번째 부분(11-14절)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주님의 본래 의도를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단지 그 저주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사실에 대해 놀라와 할 뿐이었다. 그러자 예수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불신 상태를 바로잡으시려는 동기에서 본문과 같은 교훈으로 말머리를 돌리셨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는 마 17:20에도 나오지만 본문과는 다른 문맥에서 등장한다. 아마 예수는 이와 유사한 교훈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하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에는 얼핏 보기에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두 내용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23, 24절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내용이고 25절은 용서에 관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내용은 기도 내지는 간구라는 단일 주제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고 있다.
(1) 믿음과 간구. 본문은 예수의 이적적 권능이 제자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이다. 다만 이러한 권능을 체험하게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전제해야 할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곧 예수께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愚)를 범한다. 믿음의 간구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부패한 마음을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구하는 것이다(마 6:10).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으로써 주께 간구할 때 주님은 분명히 이 모든 간구를 낱낱이 이루어 주실 것이다(요일 5:14).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간구의 전형을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14:32-42). 너무도 고통스럽고 또한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서도 다만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주님의 피땀어린 기도 모습이야말로 믿음과 순종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용서와 기도. 또한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이전에 먼저 이웃과 화목할 것을 가르친다. 이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못지 않게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중요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주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나 다름없다(요일 4:20). 또한 기도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간구의 근거가 용서,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용서임을 암시한다. 만일 예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겠는가 ! (히 4:16) 한편, 예수는 그토록 엄청난 은혜를 거저 받고서도 여전히 형제들에게 인색하거나 심지어 형제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자들을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써 설명하셨다(마 18:23-35). 그리고 상호간의 용서를 강조하고자 하신 주님의
깊으신 의도는 주기도문에서 잘 나타나 있으며(마 6:12), 주기도문에 이은 말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마 6:14, 15).

* 믿음의 본질. 믿음 곧 신앙이란 성도의 삶에 있어 핵심적 요소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의 핵심적 본질을 파악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어려움의 여러 원인들 중 하나로서 믿음이란 개념의 포괄성을 들 수 있다. 즉, 믿음이란 한 마디 말로 그 본질을 다 드러낼 수 없는 폭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잇으며, 단순한 지적 인식(知的認識)의 차원을 넘어 삶 전체와 연관된 것이다. 여기서는 믿음의 본질을 사복음서와 바울 서신 등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간략히 정리해 보기로 하자.
(1)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히브리서 11:1은 믿음을'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믿음에는 합리적 이성(合理的異性)만으로는 또한 신앙을 뒷받침하는 필수적 요소이며 합리적 이성을 배격한 신앙은 맹목적 일 수밖에 없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감각만으로 세상 만물의 기원이나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인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은 더욱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복음은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신실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만 주어지는 것이다.
(2) 순종과 의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결연히 고향과 친지를 뒤로 하고 장차 기업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아간 것은, 그가 우주 만물의 창조주요, 개인과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격적으로 그의 모든것을 의탁했기 때문이다(히 11:8). 이를 통해 우리는 순종과 의탁이 믿음의 본질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순종과 의탁은 상대편의 인격에 대한 온전한 신뢰로써만 가능하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임을 확신하면 우리는 그분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마 7:11).
(3) 은혜의 수납. 믿음의 결과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되며(롬 8:16),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는 등 신령한 축복들을 얻는다(요일 3:14). 이러한 축복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령한 축복들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이며, 이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수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 할 수 있다(엡 2:8). 따라서 영육간의 축복들을 얻기 위해 신비주의적 황홀경(恍惚境)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돈독히 세운 정신적 확신 등은 믿음의 본질과 동떨어진 것이다.
(4) 구체적 결실. 서두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하여 삶 전체와 관련되어 생겨나고 발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단지 어떤 특출한 이적적 은사를 지녔다든지 종교적 열심이 남다르다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일상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향기를 드러내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에 바로 선 자는 가치관을 위시한 전인격(whole person)의 변화를 경험할 뿐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구체적인 결실을 맺게 마련이다(약 2:14-26, 주제 강해 '행함과 믿음' 참조).

4. 권세에 관한 논쟁(11:27-33)
여기서부터 14:11까지는 고난 주간 중 세째날(화요일)의 예수의 행적 및 가르침을 수록하고 있다. 하루 전날 예수께서는 성전 숙정 작업을 통해 대제사장의 권위와 정면으로 충돌하신 바 있다. 이에 본문에서는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 기관이었던 산헤드린(Sanhedrin)의 구성원들이 직접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죽일만한 근거를 잡고자 하다가 예수의 역질문에 의해 도리어 곤경에 처하고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드러난 예수의 탁월하신 지혜에 관해서는 마태복음 평행 부분(마 21:23-27)의 강해에서 다루었으니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 논쟁의 성격 및 대적들의 자기 모순적 실상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본 논쟁의 성격. 본문의 산헤드린 회원들이 제기한 질문은 예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공개하신 바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죄 사함의 권세를 지녔노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이에 대적들은 이것을 빌미로 예수께 신성 모독(blasphemy)의 죄명을 뒤집어 씌우고자 계교를 부렸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성모독은 극형(capital punishment)을 의미하였다. 진실로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인생이 풀어야 할 가장 중차대한 과업이다. 그러나 대적들은 '예수의 권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 ' 혹은 '예수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진실로 객관적인 자세로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살해 방침을 기정사실로 굳혀둔 채 단지 유대 군중들이 납득할 만한 증거 자료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요컨대, 본 논쟁은 여타 논쟁들과는 달리 예수의 신분 자체와 직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가오는 위기의 절정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2) 대적들의 자기 모순. 산헤드린 회원들은 예수께서 정식 교육 절차를 받은 적도 없고 유대교 내에서 지도자로 공인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에 마치 예수께서 기존의 유대교를 훼파(毁破)하고 새로운 이단적 당파를 결집시키려 하는 도전 세력으로 여겨졌고, 뿐만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것처럼 가장하는 참람(blasphemy)한 종교 사기극을 행하는 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를 향한 그들의 비방은 그들 자신에게 되돌아가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당시 산헤드린 회원들이야말로 로마의 권력에 빌붙어 동족인 유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교적. 정치적 임무를 수행하노라고 자처했지만, 실상은 교권주의 내지는 세속주의 빠져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껍질만 남은 종교적 타이틀을 내세워 이름도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과 그 권세를 이 땅에 드러내는 참목자들을 훼방하고 억누르는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허세는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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