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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지만 - 본절 초두(初頭)에는 `그리고'라는 뜻의`우'(* )가 있다. 이는 본서가 역대기를 쓴 동일 저자에 의하여 기록 되었음을 암시해준다(W. Rudolph).
바사왕 고레스 - `바사'는 B.C. 3000년 경까지는 셈족 계통의 엘람 사람들이 국민의 주종을 이뤘던 나라이다. 하지만 B.C. 2000년경 이후로는, 남부 러시아의 스탭 지역과 인더스강 서쪽에서 이동해 온 아리안족에 의하여 지배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이 나라의 명칭은 이란이며 이 같은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레자 샤 팔레비'(1925-1941)에 의해서였다. `고레스'는 동부 엘람의 소국(小國)인 안산(Anshan)의 왕이었던 캄비세스 1세(B.C. 600-539)의 아들로서 부친이 죽자 그 나라를 이어 받았다. 그는 왕에 오른 즉시 바사의 제국(諸國)들을 통합하였고, 얼마 후인 B.C. 539년에는 대국 바벨론까지 정복하였다(본장주제 강해, `고레스에 대하여' 참조).
원년에 - 이것은 분명히 B.C. 538년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가 바벨론을
정복한것은 B.C. 539년이지만 바벨론의 즉위 년도 계산 방식은 즉위 후 처음 맞이하는 니산월(1월)이 속한 년도를 원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바사의 왕이된 것은 훨씬 이전인 B.C. 559년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는 여기서 그가 바벨론을 정복한 때로부터의 즉위 첫 해를 계산하고 있다. 본서의 저자가 이같이 한 까닭은, 그해가명실공히 당대의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을 멸망시킨 때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 - 이것은 (1) 유대인들이 바벨론 땅에서70년 동안 포수(捕手) 생활을 하게되며(렘 25:11), (2) 그런 다음 반드시 팔레스틴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렘 29:10) 예언을 가리킨다(대하 36:22). 물론 이 예언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온갖 시련과 고초를 안겨줬던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될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다(렘 25:12)). 그 당시 예레미야가 이러한 예언을 한 것은, 바벨론의 무자비한 압박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던 유대인들을 위로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결코 낙망치 말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응하게 하시려고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 )는 원래 `마치다'(대하29:34), `진멸하다'(시 37:20; 겔 13:14)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통해서 예언된 내용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온세계의 하나님이심을 잘 보여주는 문구이다(대상 5:26; 대하 21:16; 36:22; 렘 51:11;학 1:14). 결국 이는 여호와께서 고레스가 정책 입안 과정에서 관용적 태도를 취하도록 성령의 감동을 통해 개입하셨음을 가리킨다(Fensham). 그때 고레스는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Leon Wood). 우리가 이같은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단 9:1-11) 다니엘이 고레스의 막료로 일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단 6:28). 그때 다니엘은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유화 정책을 취하도록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그의 영향력이 고레스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를 하나님의 `목자'라고 한 것은, 그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선한도구로 사용될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사 41:25; 43:14; 44:28; 45:1, 13). 한편, `마음'(* , 루아호)은 원래 `바람',`영', `숨', `호흡' 등의 의미로서, 사람과 관련해서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 요소인`영혼' 혹은 `심령'을 가리킨다(사 30:1, 2). 그리고 `감동시키시매'(* , 헤이르)는 `깨다', `분발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우르'(* )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당신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방인까지도 강권적으로 당신의 도구로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잘 보여준다.
저가...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 여기의 `공포도 하고'는 문자적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말로써 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조서도 내려'는 왕의 구두 명령이 진짜임을 확증해 줄 수 있는 명령문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와 조서가 별도의 절차로서 백성들에게 하달되었다고 봐서는 안된다.한 사자(使者)에 의해서 왕의 명령이 구두로 전달되고 아울러 그것을 문서화 시킨 명령문도 근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이다(Willianson, 왕하 19:9-14; 대하 17:9).

=====1:2
하늘의 신 여호와 - 이 같은 호칭은 고레스가 여호와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었음을 시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늘의 신'이란 표현은 이원론적 종교관을 갖고 있던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통상적이며 익숙한 호칭이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하늘의 신'은 흑암을 다스리는신 아리만(Ahr-iman)과 대조되는 광명의 신 오르무즈드(Ormuzd)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고레스는 오르무즈드 대신 여호와라고 함으로써, 피정복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유하려고했다.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 분명치는 않으나 다니엘의 영향을 받았을
듯한(1절)고레스는 자신에게 엄청난 승리가 주어진 것을 이사야 45:1 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여호와의 섭리로 이해했을 것이다(Rawlinson). 이 같은 고레스의 생각은, 그 당시의 페르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신관(神觀)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즉 `하늘의신' 오르무즈드는 세상의 왕들에게 권세를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고레스는 여호와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자신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따라 여호와를 이해했을 뿐이다.
나를 명하사 -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 왼문에는 본 구절 앞에 대명사 `그가'에 해당되는 `후'(* )가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이다(요 10:1) 한편 `명하사'(* , 파카드)는 `위임하다' 혹은 `임명하다'의 의미로 이해된다(창 39:4; 41:34; 레 6:4; 렘 40:11). 따라서 본 구절은 고레스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대리자로 임명받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이러한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다니엘의 영향이 일조(日照)를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강권적으로 감동시키신 결과였다(1절 주석 참조).
유다 예루살렘 - `유다'는 고레스 당시에 페르시아의 여러 `도'(Province) 중의 하나로서 회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의 `유다'는 옛적에 일개 국가로 존립했던 지역으로서의 유다로 이해함이 무난하다(Williamson). 그렇다고 본다면 고레스가 굳이`유다' 라는 호칭을 여기서 사용한 것은 그 지역이 대적에게 멸망되었던 슬픈 역사를상기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라 짐작된다. `예루샅렘'도 그 당시에는 여전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고레스에게 있어서 다른 민족들의 성전이나 제단등을 복구시켜 주는 일은 주된 통치 정책 중의 하나였다(Kidner). 그의 다신론 사상은 근래에 발견된 한 비문을 통해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의 주신(主神)이 그백성들에 의하여 섬겨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둑(Marduk) 이외의 다른 신들, 즉 `벨'과 `느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다고 한다(Kidner)그러나 우리는 고레스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할 필요성을 가졌던 사실을 다만 그의 일관된 통치 정책의 결과로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즉,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개재되어 있었고 고레스는 적어도 이사야 44:28의 예언이 자신에 대한 것으로 알고 그것에 대해 순종했을 수 있다(Schultz).

=====1:3
이스라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 문자적으로는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신 그 하나님이다'로 번역된다. 그러나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를 다른 지방신(local god)들과 구분되는 `참신'으로 인식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흠정역은`he is the God'라 옮겼다. 고레스가 진정 여호와를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길이 없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당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리라는 점이다.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 - `너희'는 고레스의 영토 안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가리키며 `그 백성 된 자' 는 반드시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지파와베냐민 지파 사람들 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B.C. 722년에 앗수르로끌려간 북국의 열 지파 사람들도 포함되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북쪽 지파 사람들이 끌려갔던 옛 앗수르의 고토(故土)도 역시 고레스의 정복지(征服地)였기 때문이다.더욱이 귀환시에 타국인인 노비들도 함께 팔레스틴에 왔음을 감안한다면, 북국의 열지파 사람들의 일부도 귀환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Rawlinson).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 `올라가서'(* ,야알)는 `알라'(* )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하여 올라가다'의 의미를 갖는다. 한편 고레스가 여기서 `알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바벨론보다 예루살렘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830m 높이에 위치해 있다.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 여호와의 전이 성공적으로 건축되기를 바라는 고레스의 염원이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염원 뿐 아니라 성전 건축에 필요한 지원까지도 아끼지 않겠다는 격려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1:4
무릇 그 남아있는 백성 - 이에 대해서는 (1) 본 구절을 본절 전체의 주어로 보고떠나지 않고 남아 있으려 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견해(Bickermann) 와(2) 본 구절을 본절 전체의 목적어로 보고 떠나도록 배려된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하는견해(Fensham)로 갈린다. 그러나 (1)은 유대인을 모두 보내라고 한 고레스의 조서와잘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2)의 견해가 보다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남아 있는 백성'이라고 한 까닭은, 그때 바벨론 땅에서 살고있던 유대인들이 모진 환란과 고초를 견디고 살아남게 되었음을 시사하기 위함인 듯하다(Fen-sham, 대하 36:20). 한편 `남아 있는'(* , 니쉐아르)은 `남다' 및 `잔류하다'의 의미를 갖는 `솨아르'의 수동형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에 따라 그분의 백성으로서, 또 그 백성답게 보존된 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Kidner,사 4:3; 10:20-22; 37:31; 겔 9:8; 17:21; 학 2:3).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 그 당시 유대인 포로들은 주로 유프라테스 강 하류 쪽의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서 살고 있었다(Aharoni).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외에도 페르시아 제국 내의 각처로 흩어져 살았던 것도 사실이다(Bickermann). 이러한 사실은 에스더와 모르드개 등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도 분명해진다(에 2:5)
그곳 사람들이 - 여기서도 앞의 `남아있는 백성'처럼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된다. 즉(1) 팔레스틴으로 돌아가지 않을 유대인이라는 견해(Grosheide) 와 (2) 팔레스틴으로 떠나려는 유대인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본토 사람들이라는 견해 (Brockington, NIV)등이 있다. 그런데 4 절 전체의 문맥상, (2) 의 견해가 보다 자연스럽다.
은과 금과...짐승으로 도와 주고 - 본문의 상황은 (1)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때의 상황(창 13:1,2),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때의 상황(출 12:35,36) 및(3)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 8)과 유사하다. 이 같은 여러 상황에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재물을 준 것은 고대중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즉, 그 당시에는 상대의 물건 혹은 사람을 잘못 취한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건 예물(삼상 6:4)을 피해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려던 유대인들에게 재물을 준것은
본토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그들은 타국의 백성 이스라엘인들을 불법으로 그들의 땅에 억류하고 있었던데 대한 보상의 의미에서, 본토로 돌아가려던 유대인들에게 재물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우리가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 할것은 비록 그런 관습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친히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톡 주관하셨다는 사실이다(출 12:36). 이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소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1:5
유다와 베냐민 - 이 둘은 바벨론에 함께 포로로 끌려간 지파들이다. 베냐민 지파는지리적으로 유다 지파와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관계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되었을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쪽 유다에 속하게 되었으며(왕상 12:21), 그 결과 베냐민지파는 유다 지파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족장(* , 로쉬). `머리'(창 3:15), `꼭대기'(창 11:4; 28:12; 민 23:28),`두령'(신 29:10; 33:5)등의 의미이다. 구체적으로는 지파 단위와 가족 단위 사이의중간 단위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Williamson).
제사장들 - 이들은 특별히 구별된 신분에 속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지파, 심지어는 레위 지파와도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둘이 구별되어 언급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팔레스틴으로 유대인들이 귀환하는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장의 직분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성전의 건축이기 때문이었다(2, 3절).
레위 사람들 - 성전에서의 봉사가 주된 임무인 이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팔래스틴으로의 귀환 대열에 끼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하는자 - 문맥상 이는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렇게 볼 경우에는, 위에 언급된 자들은 모두(자발적으로) 귀환 대열에 참여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보다는 본문을 앞의 내용과 동격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여, 앞에 언급된 자들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팔레스틴으로 행했다고 봄이 낫다(Batten)한편 `감동을 받고'(* , 헤이르)는 `일어나다', `일깨우다'의 의미를 갖는 `우르'(* )의 사역형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전적으로 성령의 강권적인 감화의 결과임을 잘
보여준다.
일어나니( , 쿰) - 이것은 성경의 여러 문맥에서 특별한 일을 실행하기로 결단하고 그를 위하여 적극적인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삼상 16:2; 왕하 3:24; 대하 22:10)

=====1:6
그 사면 사람들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팔래스틴으로 귀환하려던 유대인들 주위의바벨론 사람들을 가리킨다. 만일 이것이 귀환 의사가 없었던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본서의 저자는 `아헤이헴'(* ), 즉 `그들의 동포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것이다(Williamson). 이들이 유대인들에게 예물을 준 까닭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 그릇과 황금 - 칠십인역처럼 `은 그릇 과 금그룻'으로 번역함이 더 나을 듯하며(Grosheide, Brockington), `그릇'(* , 켈리)은 `패물' 로 번역함이 무난하겠다(출 3:22; 11:2).
기타 물건 - `물건'(* , 레코쉬)은 일반적 의미의 `재산' 혹은 `재물'을 뜻한다(창 12: 5; 14:11; 대하 20:25).
짐승(* , 베헤마) - 대개 물건을 운반키 위한 짐승과 희생 제사시의 제물로 쓸 짐승등 이었을 것이다.
보물 - 금.은 외의 귀금속을 통틀어 가리킨다(창 24:53; 대하 21:3; 32:23).
돕고(* , 하자크) - 원래 `강하게 하다', `격려하다'의 의미로서, 특별한 일을 앞둔 사람들로 하여금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행위를 나타낸다(겔 34:4;단 10:19; 호 7:15).
즐거이 드렸더라(* 히트나데브) - 이는 `자원하다'의 의미인 동사 `나다브'(* )의 재귀적 사역형로서 아무런 마음의 걸림이 없이 기꺼이 주는 행동을말한다. 특히 이 형태의 동사는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으로 예물을 드리는 행동을표현할때 사용되었다(출 35:21; 삿 5:2; 대상 29:9).

=====1:7
고레스 왕이 또 - `또'(* , 웨)는 일반적으로 `그리고'의 의미이다. 원문에는 이단어가 본절의 맨 앞부분에 놓여 있다. 개역 성경은 이같이 번역함으로써, 고레스 왕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행(善行)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 `여호와의 전 기명'은 성전 제사시에 활용되던 각종그릇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금으로 도금(鍍金)된 놋그릇들이었으나, 그중의 상당수는 바벨론 왕들에 의해서 도금된 금이 벗기워짐에 따라서 보통의 놋그룻이 되고 말았다(왕하 24:13). 한편, `꺼내니'(* , 호치이)는 `나오다', `빼내다'의 뜻인`야차'(* )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는 깊숙이 보관 되었던것을 명령을 통하여끄집어 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항은, 이 단어가구속 등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나 물건이 자유롭게 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는점이다(Fensham, 출 3:10).
옛적에 - 엄밀히 말하여, 이 말이 히브리 본문에는 없다. 문맥적 의미를 보강키 위해 번역자가 삽입한 것으로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은 세 차례였는데, 그 중 두 번째(B.C. 597)와 세 번째(B.C. 586) 때에 포로와 함께성전의 기명들을 가져갔다.
느부갓네살이...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의 제2차 함락 장면을 지켜보았다(왕하 24:10-12). 그러나 그는 제3차 예루살렘 함락 때에는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었다. 그때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성전의 기명을 앗아간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었다(왕하 25:8)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서 그 같은 일을했으므로 성전 기명을 가져간 것은 느부갓네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편, 느부갓네살이 성전의 기명을가져다가 신당에 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그 물건들에 대한 욕심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간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느부갓네살은 그것들을 신당에 보관해 두지 않고, 그것들을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들었을 것이다. 성전 기명들을 자신의 신당에 보관한 것은,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즉, 느부갓네살은 타민족이 섬기는 신들의 무력함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명을 자신의 신당에 둔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할 때, 고대 중근동 민족에 의해서 흔히 통용되던 관습이었다(Williamson, 삼상 5:2).

=====1:8
고지기 미드르닷 - `고지기'는 창고 및 재정 관리를 총괄하던 고위직이었다(Fensh-am).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 중 여기서 단 1회 사용되고 있다. 한편 `미드르닷'은 문자적으로 `미드라에계 주어진 바 된'의 의미로서, 고대 페르시아 인들에게는 매우 흔했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미드라'는 초기의 인도 아리안족들에 의해서 숭배되던 신의 이름이다(Fensham).
유다 목백 세스바살 - `목백'(* , 나시이)은 팔레스틴으로 옮겨질 유대인의새로운 공동체를 다스리도록 고레스에 의해서 임명된 총독과 같은 직분이다(Williams-on, Keil, 5:14). 이는 `오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나사'(* )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문자적으로는 `올려진 자'의 의미이다. 한편, `세스바살'(* )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샤마쉬(태양신)가 그 아들을 보호하신다' 혹은 `신(월신)이 그 아버지를 보호하신다'의 의미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1) 스룹바벨(3:2)과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Keil, Rawlinson, Schultz, Kidner). 와 스룹바벨과는 별개의 인물이라는견해(Williamson, Fensham, Meyer) 등으로 그 해석이 갈린다. 그러나 (1) 본문 이후로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2) 그토록 중요한 기명들은 귀환자들을 인솔하는 책임자에게 인계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첫번째 견해가 더 무난하리라 본다.

=====1:9
금반이 삼십 - `금반'의 `반', 즉 `접시'(* , 아가르텔레이) 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안나온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어의 음역임이 분명하다. 칠십인역은 그 단어를 `프쉬크테레스'(* ), 즉 `술 식히는 기구들'로 번역하였다(Rawlinson). 한편, 벌게이트역에서는 `피알라이'(Phialae), 즉 `항아리들'로 번역했다.
칼 - KJV 는 우리말 성경처럼 `칼'로 번역하였으나, 차라리 NIV 처럼 `냄비'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듯하다.

=====1:10
금대접 - `대접'(* , 케포레이)은 덮개가 있는 잔을 뜻한다(Keil,민 9:15).
그보다 차한 은대접 - '차한'(* , 미쉐님)은 `되풀이하다', `바꾸다'의의미인 `솨나'(*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2 등급'의 뜻이다.
기타 기명 - `기명'(* , 켈림)은 일반적 의미의 각종 '그릇' 혹은 `기구'를
가리킨다(민 4:14; 왕상 19:21; 왕하 4:3).

=====1:11
도합이 오천 사백 - 9, 10절에 나열된 것들의 실제 합계는 2,499 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혹자는 필사자가 각 기명들의 숫자를 잘못 기록했다든지 아니면 합계를 잘못 필사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본서 저자가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기명들만을 특별히 계수해 넣은 것이 2,499개이고 총 기명수는 약 5,400 정도였으리라봄이 더 무난하다(Edwin Yamauchi). 한편 외경 에스드라서는 그 합계를 5,469로 제시한다.
사로잡힌 자를...데리고 올 때에 - `데리고 올'(* , 헤알로트)은 `올라가다'의 의미인 `알라'(* )의 수동형이다. 이것의 주어는 `사로잡힌 자' 로서이는 유다 백성들이 세스바살에 의하여 팔레스틴을 향해 인도되어 가는 모습을 묘사한것이다. 한편, 위의 `알라'는 모세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때도사용된 단어이다(출 33:1). 여기서 본서의 저자가 바로 이 같은 단어를 특별히 사용한 까닭은, 저자가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려는 신학적 의도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Williamson)

 

 

 

   본서는 역대하의 끝부분(대하 36:22, 23)에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으로서 포로 귀한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렘 29: 10-14)이 어떻게 성위되는가를 보여 준다. 이러한 본서는 스룹바벧과 에스라에 의해 각각 주도된 두 차례의 포로 귀한 사건을 중심으로 묘사하는 바, 성전 재건에 관한 기사를 언급한 전반주(1-6장)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개혁운동에 대한 기술한 후반부(7-10장)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본서의 서두에 해당되는 본장은 2:70까지 그 내용이 진행되는 바, 스룹바벧이 인도한 제 1차 귀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본서 저자즌 본장을 (1) 유다 백성들이  귀한  하게되는 근원적(본질적) 동기(1절), (2) 그 동기에 의거한 직접적 원인(2-4절),  93)  그원인의 성취를 위해 실행된 사항(5-11절)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같은 본장을 통해 저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영적 지위가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본서의 핵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본서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본장은 내용별로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즉, (1)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내린 명령(1-3절), (2)배상 예물을 이스라에 백성들에게 주라고 바벧론 백성들에게 내린 명령(4-6절), (3)고지기에 대한 것으로 성전 기명(器名)을    세스바살에게 주라는 명령(7-11절)등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약육 강식이라는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가 팽배해 있던 중근동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베벧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토(故土)로 돌아 간다는 것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고대 중근동 지역을 제패했던 왕들은 하나같이 피정복민들을 철저하게 탄압하는 실로 야수적(野獸的)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로부터는 아무런 자비나 그휼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소수 민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신 7:7)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힘을 통해서 상대를 멸절시켜야만 그들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당시의 군사.정치적  시류(時流) 속에서, 강국(强國)들의 손아귀를 떠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서 자신들의 본향으로 돌아간다면, 이것은 실로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같은 기적이 현실로 나타났다. 즉, 이 기적적인 일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서 현실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왕은 앞서 중근동을 제패했던 다른  왕들과는  전혀 다른 통치 정책을 갖고 있었다. 즉, 그의 통치 정책은 (1) 피적복민들을 자신의  본토에 그대로 살게 하는 것, (2)피적복민의 종교를 최대한도로 보호하는 것 등으로  요약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레스의 통치 정책은 그 당시의 모든 약소국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고레스의 은총을 받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당시의 상황에서 상상키 어려웠던  민족적 해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과 섭리의  결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포로로 끌려가기 휠씬 이전인 B.C  8세기에  이미, 고레스라는 이름의 한 왕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차 있을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예언하셨기 때문이다(사 44:28;45:1).
   이렇게 볼 때 본장에서 주목할 점은 인류 역사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피족복임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페르시아라는  제국을 일으키신 것과 그 나라의 첫왕으로 고레스라는 인물을 세우신 것,  그리고  그렇게 실현되도록 역사의 무대에 깊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본장의 배경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장의 내용은 고렐스의 조서 내용(1-4절) 그 내용에 대한 반응(5-11절)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이는 성전 재건을 위해 나타난 구체적인 사건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서술 내용과 순서는 본서 저자의 본서 집필 의도가 충뭍히  반영 된 것으로서, 성전 재건을 위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나타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부흥하는 데 하나님의 어떤 섭리와 사람들의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선는  당신의 백성들을 선하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세속 국가를 멸망케도 하시고 또한 세우기도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본장에서 우리는 (1)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세속 국가를 도구로 사용하시며(롬 13:1-4), (2)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하심은 신실하게 애행됨(계 3:10)을 깨닫게 된다.

            1.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명령(1:1-3)
   여호와의 말씀이 고레스를 통해 실제적으로 구체화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본장에서 그 서두격인 본문은 고레스가 내린 세 가지의 칙령 내용 즉 그 첫 번째 것이다. 즉,고레스는 이스라에 백성들의 귀환에 대한 명령(1-3절)과, 그에 따른 바벨론 백성들이 취해야 할 일(4-6절), 그리고 성전 기명들에 관한(7-11절) 명령을 내렸는데 본문은 그중 첫 번째 명령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러한 것을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고레스가 칙령을 내리게 된 배경(1절)과 더불어 그 명령의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증언(2, 3절)하고 있는데 이는 본서 저자의 본서 집필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구체화된 칙령 내용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본문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1)하나님의 역사(1절) : 이미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서 여호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질 것 같은 영적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선택한 백성에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주관 하시는 그분의 섭리에 의해 그 영적 지위가 회복케 되었다(느 9:6;시75:6, 7; 행  17:26, 27; 갈 1: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멸망으로 인해, 또는 바벨론에서의 4차에   걸친 포로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이스라엘을 건지시기 위해 고레스를 통해 일하신  것이다.
   (2)여호와의 전 건축(2, 3절) :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야 할 중요한 목적이 성전 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고레스의이러한 태도는,   그가 훼파된 모든 피정복민들이 신당을 다시 복구토록 조처하는 등의 관용적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본서 저자는 고레스의 위와 같은 언급을 특별히 다룸으로써,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의 언약을 다시 갱신하려 하신다는 사실을 강력히 드러내려고   한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졌던 언약의  파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전 재건이 갖는 영적 의미는 자명해진다.   그런점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제2의 출애굽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은 가히 필수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본서.저자는 성전 재건을 이스라엘의 귀환 만큼이나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선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가운데 상징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장소이기 때문이다(출 25:8, 22;왕상 8:16, 19;9:3; 계 21:3).
   당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푼 것은 피정복민들에게 대한 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사(Persia)정부, 특히 고레스가 취한 이러한 태도는 너무나도 특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B.C.8세기에 중근동을 제패했던 앗수르와 B.C.7-6제시에 최강국이었던 바벨론, 그리고 바사에 이어 B.C. 4세기 이후 세계를 정복했던 헬라의 통치 정책은 한결같이 피정복민들을  강제로 타지역으로 이주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교 말살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이렇게 볼 때 바사의 고레스가 쓴 정책 이면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고레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하나님을 지칭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보다 회유적인 자세를 견지하려골 했던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표현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섭리의 흔적은 있을 법하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이루어지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사 44:28;45:1, 5)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12;29:10)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제왕들의 막료로 있었던 다니엘이 그러한 사실을 고레스에게 시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단 6:28;9:1, 2).
   이러한 내용의 본 단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1)말씀에 기록된 당신의 듯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씀의 역사를 사용하시며 (행 2:37;16:14), (2)당신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결코 파기치 않으신다(삿 2:1;시105:9, 10)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레스(Cyrus)에 대하여. 고레스는 페르시아 동부의 소국인 안산(Anshan)의 왕 캄비세스 1세인 부친과 메대 왕 아스타아게스(B.C.585-550)의 딸인   만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부와의 사망으로 왕이 되자 최초로 페르시아 민족의 통합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국내 문제가 해결되자 그는 곧 부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던 메대의 아스티아게스를 그의 수하 장수였던 하르피구스(Harpagus)의 도움을 얻어 축출하였다(B.C.560-546). 그리하여 그는 페르시아와 메대를 통합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은 결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목자로서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사 44:28).그는 바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토 부름을 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적은 바벨론 왕 나보니두스(B.C.556-539)였다. 왜냐하면 나보니두스는 고레스의 급속한 세력 팽창을 두려워한 나머지 애굽의 아마스스(B.C.568-526) 및 리디아의 크로이스스(B.C.560-546)와 동맹을 맺어 그를 대항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레스는 강력한 바벨론을 치기보다는 비교적 열약한 리디아를 먼저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낙타를 이용한 기발한 병법으로 상대의 병마를 무력화시켜, 크로이스스를 완전히 패배시켰다. 그러자 애굽의 아마시스는 잠잠해 졌드며, 이것을 호기로 삼아 그는 바벨론을 공격하여 패망시켰던 것이다. 만일 고레스의 이러한 군사적 활약이  없었다면, 바벨론은 계속 건재했을 거시며, 그에 따라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드리의 보토 귀환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때 비록 그는 거듭나지 못한 불신자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토로 돌려보내는 훌륭한 일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시야 선지자를  통해  200년 혹은 150년 전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의 이름을 거명하시면서까지 말씀하신 까닭도 바로 이와 같은 구속사적 의미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으로 깨닫는다. 즉, (1)세상 나라는 하나니므ㅢ 나라의  확장을 위한 도구일 분이며, (2)구속사에 근거하지 않은 보편사, 곧 세속사의 연구는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벨론 멸망의 구속사적 의의.  신 바벨론이 중근동 지역을제패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대의초강국 애굽(Egypt)을 완전 패퇴시켰던 갈그미스 전투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B.C.605). 왜냐하면 이 전쟁에서 바벨론이 승리함으로 그들의 영향력은 팔레스틴 전역에까지 미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남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B.C.605-562)에 의해 멸망당했는데(B.C.605년, 597년, 586년 582년)에 걸쳐 바벨론 땅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러나 남유다가 멸망한 것은 결코 유연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지 않은 유다 민족에 대한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따라서 바벨론은 유다의 심판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 동원된 일시적 도구였덕 것이다(렘 25:9;27:5-8).
   그러나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인식한 결과가 절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승전주의적인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바벨론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오래 전에 예레미야에 의해서 예언된 바였다(렘 21:1-7).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셔야 했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즉, 그것은 포로롤 바벨론에 잡혀온 유다 백성들을 다시 본토로 귀환시키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징계를 위하여 하나님에 으해 번성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멸망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1)모든 보편사는 구속사의 전개를 위하여 존재하며,  (2)
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2. 원주민들에 대한 명령(1:4-6)
  고레스가 내린 칙령 가운데 두 번째 명령을 담고 있는 본문은 귀환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직접저으로 연관되는 것을 언급하였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자신들의 보토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앞단락(1-3절)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곳의 원주민들, 다시 말해서 유다 백성들이 살았던 곳의 원주민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명령한 장면이다.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1)원주민들이 행해야 할 행동 방향에 대해 명령하는 대목(4절), (2)고레스의 칙령에 대해 귀환을 준비한 자들의 모습(5절), 그리고 (3)고레스의  명령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응(6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본서 저자는  이 같은  문맥의 흐름을 통해고레스의 칙령에 대해 당시 사람들, 즉 유다 백성이 살았던 곳의 원주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나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의 본문에 나타나 핵심 내용을 정리해 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구분된다.
   (1)유다 백성들에 대한 배상 문제(4, 6절) : 고레스는 유다 백성들이 거주지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7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적절한  대가로 배상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그 지역 백성들은유다 백성들에게 배상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주민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땅으로 귀환해서  생활뿐만 아니라 성전을 재건하는 데 여러 가지로 용이했을 것이다.
   한편, 바벨론 사람들에 대한 고레스의 명령은 고대 중근동의 풍습으로 볼 때  그들을 당혹시킬 만한 것은 못되었다. 왜냐하면 고대 중근동에서는 사람아니 물건을  불법적으로 취했을 경우 거기에 대한 변상의의무가 뒤따르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가해자 본인이 자신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을 그 전제로 한다. 이러한  관행들은 구약 성경의 몇 군데에서 발견될 정도로 그 당시에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창 13:2;출 12:35, 36;삼상 6:4). 그중에서 대표적인 예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매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법으로 억류하고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또한 피지배자들이 섬기는 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키려는 종교적 의도 때문에 배상 예물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애굽이나 바벨론 등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게 배상 예물을 준 것을 당시 풍습에 따른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 대 민족의차원에서 배상 예물을 주고 받는 일은, 물론 당시의 관행으로 볼대 적절하기는 하지만 역시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상황에서 그랬듯이(출 12:36), 바벨론에서의 해방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그 이방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심으로써, 그와 같은  기적을  창출하셨던  것이다.
   (2)유다 지도자들의 결단(5절) : 신앙적으로 늘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고 고국 땅으로 돌아가기를 위했던 유다의 종교 지도자들은 고레스의 칙령에 대해 신속히 대처하였다. 즉,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재건키 위해 일어났던 것이다. 당시 1차(B.C. 537, 2장), 2차(B.C. 485, 7:1-10), 3차(B.C.444, 느 2:9-11)에 걸쳐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과 숫자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그대에 유다 백성 자신들이 살던 곳에머무른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정치.경제. 군사적으로 회복하기를 바랬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버리고 과감히 일어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애용의 본 단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1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듯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문화도 선하게 이용하시며( 삼상 6:4-9), (2)이방인 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 아래 있으며(출 10:20), (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사실(롬 8:28,32)을 깨닫게 된다.

            3. 성전 기명에 대한 명령(1:7-11)
   바사 왕 고레스가 내린 세 가지 명령 중에서 그 마지막에 해당하는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 기명에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본문에 (1)성전 기명이 그곳에 있게 된 동기(7절), (2)성전 기명을 세스바살에게 넘기는 과정(8절), 그리고 (3)그에 대한 정확한 수효(9-11절)를 기술함으로 자신의 본문 기술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본서 저자는 본문에서 오직 성전 기명에 관계된 사실만을 언급함으로 성전 기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성전 재건에는 성전 기명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피정복민의 신당에서 사용되던 비품을 자신들이 섬기던 신의 신당에 넣어  보관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왜냐하면 정복자들은 이같이 함으로써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상대적 유월성을 만천하에 과시하며,더 나아가  피정복자들에게 민족적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보관되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지며 또한 그분께 속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성전 기명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서 원래 놓여 있던 위치로 옮겨 놓는 일은 너무나도 시급하며 또한 중대한 일이었다.
   한편 고레스가 왕위에 오르기 직전,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혹은 벨사루슬, B.C. 550-538)이 성전에서 사용되던 기명을 술좌석에서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멸 행위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것에 대애 엄중히 징벌하셨던 것이다(단 5:1-4, 30). 이같은 사실은 비록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행 17:24, 25)이시지만, 거룩히 구별되어 사용되어야 할 기명이 헛되게 사용되거나 다른 곳에 놓여지기를 결코 기버하지 않으심을 밝히 드러내 준다. 따라서 그 기명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남의 전으로 옮겨져야 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성전 기명은 성전 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점에서 본토로  돌려져야 했다. 특히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던 성전기명을 유다 땅으로 옮긴 행위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행위를 묘사할 때(출 12:36) 사용했던 '알라'(*      )라는 단어를 선택해 표현한다(11절).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성전 기명이 바벨론땅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지는 일 또한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일임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본 단락에서 하나님께서는 (1)본질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상징도 중시하시며(고전 11:29), (2)결코 당신의 이름이 모멸됨을 용납지 않으시는(갈6:7) 분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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