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 여기서 '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인정하다'는 뜻이다(왕상 21:29). 즉 비록 불완전한 존재이긴 하나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이를 그의 의(義)로 인정해 주셨다는 뜻이다(6:9). 한편,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것을 우리는 신학 용어로 '칭의'(稱義)라 한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인해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롬 5:1-9).
7:2
얼핏보아 6:19,20과 모순되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는 앞의 것이 개괄적인 지시였던데 반해 본절의 것은 세부적인 지시인데서 나타난 차이일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일주일 앞둔 시점(4절)에서 보다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지시를 내릴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정결한 짐승...부정한 것 - 당시는 짐승의 정,부정 규례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점이기에 짐승의 정결과 부정을 구분할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았겠으나 아마 제사 제물로서의 효용성(8:20)에 근거했던 것같다(1-12절강해).
암수 일곱씩 - 학자들에 따라 이견을 보이고 있는 구절이다 칼빈(Calvin)이나 랑게(Lange)같은 이는 '일곱씩'을 '세 쌍과 한 마리'로 보는 반면 70인역은 '일곱 쌍'으로 보고 있다. 만일 전자가 합당하다면 여분의 한 마리는 후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8:20).
7:3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 - 70인역이나 사마리아역 등은 '정한 새는 암수 일곱씩,부정한 새는 암수 둘씩'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비록 2절과 호 응을 이루긴 하지만 그러나 이처럼 개역할 원문상의 근거는 없다.
유전케 하라 - 하나나님께 있어선 심판보다 보존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생태계의 온전한 보존이란 측면(9:9-12)과 함께 홍수 이후 인간 생활을 돕기 위한 배려라는 의의(9:1-4)를 지니고 있다(1-12절 강해).
7:4
지금부터 칠 일이면 - 심판을 위한 준비가 최종 완료된 상태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최후 통첩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은 죄로 인해 마땅히 심판 당하여야 할 타락한 인간들에게 120년이란 긴 회개의 기간을 허락하시고서도(6:3)
이처럼 마지막 한 주간을 특별히 구별지어 인간을 경성시키셨다. 이는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인간이 심판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완악함 때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님을 확실히 증거해 준다(욘1:2). 아마도 노아는 이 7일 동안 더욱더 간곡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품인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쳤을 것이다.
사십주야 -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때때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데 그중 40은 특별히 '시련'과 '연단'의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간 방황(민14:33), 모세의 40년간 광야 생활(행7:30), 예수의 40일간 금식기도(눅4:1,2)등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련과 연단의 끝은 승리와 기쁨인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선을 행하는 성도들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궁극적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심오한 진리를 보여 준다(요 16:33).
생물(예쿰) - '쿰'(일어나다, 일어서다)에서 파생된 말로 '호흡하는 생명체'란 점을 강조하는 '네페쉬 하야'(생물, 1:20)와는 달리 생물의 '활동성'을 강조해 주는 단어이다(신 11:6).
7:5
명하신 대로 다 -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는 철저히 순종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순종은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의 열매이니(갈 5:22, 23)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히 11:7)라고 칭하였다(6:21,22).
7:6
홍수가 땅이 있을 때에 - '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는 '존재하다 '(31:5)는 뜻과 함께 '발생하다'(왕상 12:24)는 뜻도 갖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홍수가 땅에 발생했을 때에'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육백 세 - 4절에 나온 '40'과 더불어 성경상에서 '6'이란 숫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도 대체적으로 '혹독한 시련'과 '엄청난 고난'이다(계 6:12-17; 9:13-21; 16:12-16). 사실 노년에 이른 노아가 1년 동안이나 제한된 공간과 물 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같은 시련을
통과한 노아에게 새 인류의 원조로서 번성할 수 있는 축복이 주어진 점(9:1)은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라는 진리를 확신케 해준다.
7:7
노아가 아들들과...함께 - 본절은 6:18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이 말 속에는 두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라멕(4:19)과는 달리 노아 및 그의 아들들은 일부 일처제의 혼인을 준수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방주 안에 들어간 자의 수가 8명이었다는 베드로의 증거(벧전 3:20)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들은 중혼, 축첩등 당시의 타락한 사회상을 본받지 않았던 것이다.(2) 8명이 모두 방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가족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음 을 의미한다. 이는 후일 롯의 처와 사위들이 보여준 불신의 행동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19:14,26).
7:9,10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 일 후에 - 홍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충분하고도 안전하게 구원을 얻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후 심판시에 있어서도 성도들은 머리털 하나 상치 아니하고 다 구원받게 될 것인데(눅 21:18) 예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 중 한명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었다(요 18:9).
7:11
노아 육백 세...그 달 십 칠 일 - 이스라엘의 종교력은 훗날 출애굽 사건과 관련되어, 제정되었으니(출 12:1,2) 이 당시는 단순히 민간력으로 계산된 것일 것이다. 아뭏든 이처럼 홍수가 일어난 날짜를 분명하게 명기한 것은 그사건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이는 오늘날 많은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큰 깊음의 샘들 - 여기서 '깊음'에 해당하는 '테홈'(* )은 원래 지하수의 근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시 104:6; 욘2:5 에서는 '큰바다'를, 창 49:25에서는 '아래 원칙'을 가리키는 머리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은 대홍수 때 폭우와 함께 해일(海溢), 지하수의 범람까지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터지며 - 본래 땅은 물로 뒤덮여 있었으나(1:20) 창조 둘째 날 궁창으로 말미암아 궁창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구분되었다(1:7). 이어 창조 세째날 궁창 아래의 물로부터 물이 융기되어 나왔다(1:9). 따라서 지구는 물 가운데, 그리고 물 위에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히브인들은 이 모든 물들이 언제든지 땅을 덮치려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제어로 말미암아 그 경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였다(욥 26:10; 시104:9). 그러나 마침내 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제어의 재갈을 풀어 주자 일시에 엄청난 양의 물이 위.아래 할 것 없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현상을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지질학적으로 이 말은 깊은 바다 내에서나 혹은 지각에서 급격한 변화 현상이 일어남을 가리킨다(Lange).
하늘의 창들이 열려 - 여기서 '하늘의 창'이란 말은 고대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는 말인데, 즉 그들은 대기권너머 2층천에는 비, 우박, 눈등을 엄청나게 보관하고 있는 하늘 창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늘 창문을 통해 지상에 내려진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홍수는 이러한 하늘 창문들이 한꺼번에 열려진 것으로 생각했고 또 그렇게 묘사했다. 여하튼 본절은 댐의 열린 갑문을 통해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리듯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땅에 쏟아진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늘과 지상의 모든 물을 모두 동원, 일시에 지구를 물로 덮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이다(사51:10).
7:12
비(* ,게 쉠) - '가솽'(격렬하게 퍼붓다)에서 파생된 말로 보통의 비를 가리키는 '마타르'(신 11:14)와는 달리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를 의미한다(왕상 18:41). 그런데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묘사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된 점(출 16;4)으로 보아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루어지는 이적적인 현상을 강조하는 말인 것 같다.
7:13
들어갔고(* ,바) - '보'(가다, 오다, 들어가다)의 과거 완료형으로 노아의 가족들이 '그 날' 곧 홍수가 시작되던 날(11절) 이전에 이미 방주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날에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 들어가 있은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미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마 24:38,39). 그러나 노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최후의 한 주간 동안 방주 안 밖을 들락 날락거리면서 거듭 회개의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추측된다(4절).
7:14
모든 새 곧 각양의 새 - 원문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모든 종류의 새를 나타내고 있다.(1)'오프'(* ):날개를 지니고 있는 모든 생물을 뜻하는 포괄적 단어이다(6:7).(2)'치포르'(* ):주로 참새와 같이 몸집이 작은 들새를 가리킨다(시 84:3; 잠26:2).(3)'카나프'(* ):'오프'와 교호적으로 사용되긴 하나 주로 날개 달린 조그마한 곤충을 의미한다.
7:15
둘씩 - 정결한 짐승이든 부정한 짐승이든 둘씩만을 방주 안에 들여보냈다는 뜻이 아니다(2절). 이는 각종 짐승들이 '한쌍씩(공동 번역) 짝을 이루어 방주로 나아오는 모습을 묘사한 것일 뿐이다.
7:16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하면 '그 뒤에서 닫으셨다'. 즉 여호와께서 노아 및 그 가족, 생물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후 그 뒤에서 문을 닫으셨다는 뜻이다. 이는(1)하나님이 전적으로 방주를 주관하시며 그 속에 있는 생명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준다.(2)또한 이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은혜와 구원을 받을 시기(고후 6:2)가 지난 후 일단 문이 닫히고 나면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교훈해 준다(1-12절 강해).
7:17,18
40일간 계속되는 비로 말미암아 물이 점점 불어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창일하매(*가바르)의 원뜻은 '확립하다', '강하게 되다', '승(勝)하다' 등으로(출17:11; 삼하 11:23) 온 세상을 뒤덮을 때까지 물이 점점 더 불어 나도록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시사해 준다(시 147:17,18).
7:19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나니 - 노아 당시의 대홍수가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사건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9:11, 15은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이다(13-24절 강해, 부분 침수설). 따라서 일부 학자들(Poole, Murphy)의 주장처럼 본절을 목격자의 관점에서 기술한 수사학적 표현으로 이해하여,
'홍수의 부분 침수설'을 내세우는 것은 불합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 노아와의 언약(6:17; 7:4; 9:11,15)을 통해 거룩한 씨의 보존을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만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7:20
십 오 규빗이 오르매 - 무엇을 기준으로 한 말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 가장 높은 산을 덮고서도 물이 15규빗(약 6.84m)이나 더 불어났다는 뜻인 듯하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성을 강조해 주는데, 실제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그분의 진노의 낯을 피해 숨을 곳이라곤 아무데에도 없다(시 139:7-12).
7:21,22
홍수로 말미암아 땅 위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모두 멸절되었음을 간명하면 서도 분명하게 증거해 준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절되어 가는 절박한 순간에서도 노아 가족만은 하나님의 보호의 날개(신 32:11,12) 아래 에서 편해 쉴 수 있었는데(23절). 이는 성도가 어떠한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다(시23:4-6).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결코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기 때문이다(18:25).
7:23
홀로 노아와...자만 남았더라 - 사도 베드로는 이처럼 심판의 물만이 온 대지를 뒤덮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노아 가족이 구원받은 것을 '세례'에 비유하였는데(벧전 3:20,21) 이는 바울이 이스라엘의 홍해 도강(渡江) 사건을 가리켜 바다에서 세례받았다고 묘사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전 10:1,2).
7:24
일백 오십 일 - 혹자(murphy)는 이 기간을 비가 내렸던 40일을 제외한 그 이후의 기간으로만 본다. 그렇다면 물이 땅에 창일해 있던 기간은 총 190일이 된다.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Lange, Bush, Knobel)은 150일이란 기간안에 폭우가 쏟아졌던 40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8:3과도 조화를 잘 이룬다.
본장은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에 만연된 죄악의 부패성을 한탄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예고하셨던대로(13절) 마침내 대홍수로 심판을 집행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16절에서는 본격적인 홍수 심판이 시작되기 전,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준비가 완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즉 오랜 세월에 걸쳐 마련된 구원의 방주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다음 시대를 꽃피워 나갈 새 생명의 씨들을 긴급히 대피시켜 보호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 진정 원하는 것은 심판의 아픔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보존의 씨는 바로 메시야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역사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씨를 남겨 두었다(사 6:13). 이런 점에서 구약은 '남은 자의 역사'라 할 수 있다.
17-24절에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도구인 홍수가 전 지상을 뒤덮음으로써, 창조 이후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생생히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심판의 물 위로 두둥실 구원의 방주가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즉 세상의 죄악은 완전히 물에 잠겨 버렸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남게되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뜻에서 노아의 구원 사건을 '세례'에 비유한 바 이다(벧전 3:21).
홍수 사건의 표면은 드러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 죄악을 다스림이며, 그 본래 목적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사는 자는 결단코 심판의 물 아래 가라앉지 않고, 구원의 방주 속에 안전히 거할 수 있는 것이다.
1. 생명의 초대에 응한 노아 가족(7:1-16)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1절). 이는 하나님의 명령인 동시에 생명 잔치에의 초대이다. 본문은 홍수 시작 전, 바로 하나님께서 우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다음으로 동물들을 구원의 방주에로 초대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자들을 멸절시키기 위한 계획과 더불어 순결한 영혼을 보존하시고 그들로 인한 새 역사 창조의 계획을 수립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과 함께 의인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불타는 진노 중에라도 풍성한 긍휼을 잊지 않는다(합 3:2).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무한한 사랑 때문에 인류는 생존할 수 있으며 또한 진리와 소망을 간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죄로 찌들었다 할지라도 그속에 당신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무리를 남겨 두신다(사 6:13). 이 '남은 자'는 하나님의 생명 초대를 받아들인 자로서 새 역사 창조의 주역들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초대를 아무런 이견 없이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을 맛본 자가 항상 그러하듯이 가족을 구원했으며 이웃에게 의(義)를 전파했다(벧후 2:5). 하나님은 당신의 초대에 응한 무리가 방주에 들기 전까지 환난을 주지 않으셨다. 이는 생명의 초대에 응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배려이다. 그러나 초대 시간이 지나고 당신이 약속한 날짜가 차자 더 이상 지체치 않으시고 홍수를 내리셨다. 이는 생명의 초대를 거부한 자들에게 은혜의 문을 닫으시고 구원의 기회를 마감하셨음을 의미한다(마 25:10; 고후 6:2). 결국 동일한 하나님의 메시지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생명에의 초대가 되지만, 거부한 자에게는 심판의 선고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아 시대를 방불할 정도로 타락한 오늘날,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의 거처를 예비하시고 죄인들을 향하여 생명에의 초대를 하고 계신다. 실로 주 예수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서, 은혜의 문이 닫히기 전 그 초대에 응하는 지혜와 결단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마 25:1-13).
* 방주 안으로 들여진 동물들. - 인간이 자연계를 대표하고 다스리는 자란 측면에서 인간의 범죄는 인간의 고통과 더불어 자연계의 피폐를 가져왔다(3:18;롬 8:19-22). 즉 인간의 범죄로 자연계 전체가 죽음과 절망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의인 노아를 통한 인류 보존을 생각하셨을 때 그와 함께 자연계의 보존도 생각하셨다. 따라서 방주가 인간에게 개방되어 있었듯이 생명을 가진 동물들에게도 개방되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공중의 새와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쌍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두쌍씩 방주에 들이게 하셔서 생태계의 보존을 주도하셨다.
한편 여기에 제시된 정결과 부정의 근거는 레11장과 심14장에서처럼 음식물로서의 효용성이 아니라 제사 제물로서의 가치이다. 그런 관계로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의 숫자를 훨씬 많이 보존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떤 효용성에 따라 짐승의 수를 조절하기는 하셨으나, 생태계의 온전한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생물에 대한 동일한 관심을 보이셨던 것이다. 이러한 배려는 결국 온 피조 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만이 그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더욱이 이런한 생태계의 보존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인간 생활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제사 제물로서든(8:20), 식용으로서든(9:3) 인간과 자연계에 필수적인 짐승들을 보존하셨을 뿐 아니라, 그러한 생태계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당신의 창조 흔적과 영광을 보이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월등한 존재라는 사실, 즉 자연과 짐승에 대한 바른 인식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토테미즘(Totemism)을 근간으로 한 단군 신화 등의 민담(民譚)은 그것이 이야기거리로써 구비 문학적 관심이나 인류학적 소재가 될 수 있을 뿐 절대화된 신앙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연계의 보존을 주도하신 하나님의 근본 취지를 받들어 그것들을 선용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간의 질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해 가야 한다.
2. 온 세상이 물에 잠긴다(7:17-24)
본문은 죄악이 관영하던 세상 위에 오직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물만이 온 대지를 뒤덮고 있는 홍수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울러 그 결과로 지상 위의 모든 생물들이 멸절되어 가고 있는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사람 중에는 그분의 사랑이 절대적이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들어 인간의 심판과 파멸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수단을 동원하시더라도 한 생명도 놓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으로 확신한다. 그 결과 그들은 경건이나 절제나 순결 등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의 느슨한 삶에 전혀 개의치 않으시거나, 선악(善惡)과는 무관하게 그들을 맹목적으로 구원해 주시는 무책임한 존재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깊숙히 관여하셔서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심판주
이시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단호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 기사로서 특별히 '다 죽었더라'(21, 22절)는 말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이는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의지를 반영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의 물로 채워 호흡 있는 것들을 모두 쓸어버리실 만큼 죄를 싫어하신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이며, 인간과 자연을 피폐케 하는 것으로 죽음과 파괴의 원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오염된 인류를 멸절시키시되, 인간과 땅을 창조하신 당신의 계획을 중단하시지는 않으셨다. 즉 당신의 구원 초대를 받아들인 노아의 가족들을 홍수의 피해로부터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구상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홍수 심판 사건에 나타난 바, 이러한 죽음과 생명에의 이중적 사건을 세례에 비유함으로써(밸전 3:21) 죄로 인한 인간의 처절한 실패와,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승리를 가르치고 있다.
끝으로 홍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신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절대 죄를 간과하시지 않으심과 죄의 결국은 사망(롬 6:23)이라는 사실 그리고 인간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경건에 힘써야 하는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채 하나님의 사랑만을 맹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그릇된 신앙관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오늘의 세상을 향해서도 심판을 예비하고 계신다(마 24:3-25:46). 노아 홍수 심판을 거울삼아(눅 17:26, 27) 성도는 늘 깨어 근신하는 신앙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벧전 4:7).
* 부분 침수설. - 과학의 절대성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에 제시된 역사적 사실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창세기에 전개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하나의 가설 또는 설화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전능성을 격하시키려 든다. 이처럼 성경이 단순히 가공이나 억측으로 꾸며진 인간의 창작물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믿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부인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효용성과 사실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 과학적 법칙 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과학적 사고는 엄격히 거부하여야 한다.
한편 과학적 사고에 깊이 뿌리박힌 학자들 중에는 본문의 온세상 침수에 관한 사실성을 부인하며, 이것은 목격자의 제한된 시각에 의해 수사학적으로 묘사된 부분적 침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유프라테스나 중동 지역에 있는 어떤 큰 강의 범람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 침수설은 성경과 역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를 보존하고자 맺으셨던 노아와의 언약에서 모든 인류를 멸절시키고 단지 노아와 그 가족의 생존만을 허락하신 것과 홍수 사건이 지구 전체의 재앙이었다는 점(7:11)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창 6장-9장에 홍수의 완전 침수를 주장하는 기록이 30회 이상 나타난다는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배수량 2만t 급에 해당하는 방주의 적재 용량과 과거와 현재에 걸쳐 알려진 육지 동물의 종류 둘씩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다. 만일 부분 침수였다면, 다시는 그러한 홍수를 내리지 않겠다던 하나님의 약속(8:21; 9:11,15)은 수십번 깨진 셈이 된다.
성경은 오늘날 세계 모든 인간들이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퍼져 나갔다고 증거하고 있다.(9:1, 19). 무엇보다 재림시 세계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노아 홍수 사건을 예로 들으셨다(마 24:37-39; 눅 17:226,27). 이외에도 지질학적인 보고와 바벧로니아의 설형 문자 토판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 270여 가지에 달하는 세계 도처 홍수 전설의 산재 등을 보더라도 노아 홍수는 세계 전체에 미친 하나님의 대재앙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전체의 멸망에는 큰 관심과 두려움을 갖지만, 노아 홍수 사건과 같은 하나님의 초월적 심판 사건에는 등한히 하는 과학 일변도의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과학 이상의 진실인 성경의 권위를 깨우치도록 힘써야 한다.
* 홍수의 시기와 성경 계보. - 홍수의 시기를 알기 전, 우리는 먼저 홍수가 인간 창조 후 몇년만에 일어났는 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이것은 홍수가 땅에 있을 때 노아의 나이 600세였으므로(창 7:6),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노아 조상들의 수명을 각각 계수하여 합산하면 얻어질 수 있다. 즉 창 5:1-32에 나타난 아담의 계보를 살펴 보면, 창조로부터 노아가 홍수를 만날 때까지의 기간은 1,656년이 된다.
다음으로, 창 11:10-26에 나타난 셈의 계보를 근거로 홍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기간을 계수하면 292년이 된다. 그리고 이어, 성경에 나타난 연대를 기초로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를 산출하면 대략 2,05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계보에 기록된 인물들의 나이를 중심으로 연대를 산출하면, 홍수는 대략 B.C2,350년경 쯤에 있었고, 아담 창조는 대략 B.C4,000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Ussher).
그러나 이러한 성경 계보를 중심으로 산출된 홍수 시기 및 인간 창조 시기가 연대상 정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성경 계보는 오늘날의 족보 책처럼 조상과 조상을 세대적(世代的)으로 추적하는 완벽한 기록이 아니라, 단지 메시야 탄생을 핵(核)으로 역사속에서 '여인의 후손'(창 3:15)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 주는 구속사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계보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필요한 인물만을 선택하여 기록하는 '선택 기록설'을 취하고 있는데, 그러한 흔적은 성경에서 충분히 발견하고 있다.
즉 스 7:1-5과 대상 6:3-15의 족보를 비교해 보면, 전자의 족보는 후자의 족보에 기록된 여섯 인물을 아사랴와 므라욧 사이에서(스 7:3) 생략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사한 예가 마 1:1-16의 메시야 족보에서도 나타난다. 여시서는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마 1:8)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생략되어 있고, 또 눅 3:23-28과 비교해 볼 때 스룹 바벧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9명의 인물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바벧탑 사건(창 11:1-9)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뉘었던 벧렉 시대는 셈으로부터 4세대가 지난 시대로, 그때는 홍수 후 약 1세기가 조금 넘는 시대였다. 따라서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인류가 그토록 번창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또한 어셔(Ussher)의 견해대로 아브라함 시대를 대략 B.C2,000년대로 잡는 것은 그런대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홍수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기간을 성경 계보상의 연대를 따라(창 11:10-26) 단지 292년으로 산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고고학상,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소명받았을 때 거기에는 이미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있었고, 그가 가나안을 거쳐 애굽으로 갔을 때도 그곳에는 고도의 선진 문화가 있었다. 이러한 고도의 선진화된 문명,문화적 발달이 홍수로 전인류가 전멸된 후 약 300년 어간에 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존재하는 고대 근동 지역의 고고학적 기념물들을 탐구하면, 바벧론과 애굽의 역사는 B.C3,0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요약하면, 성경 계보에 나타난 인물들의 나이를 단순히 기계적으로 환산함으로 홍수 시기와 인간 창조 시기를 산출해 내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성경 계보의 기록 목적이 연대나 인물의 정확한 연대시적 기술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메시야가 선민 계열의 흐름을 타고 이 땅위에 탄생하는 사실 자체에 촛점을 맞추고, 또한 단지 그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데 계보 기록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위 진화론적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바, 인간 기원을 100만년 이상으로보는 터무니 없는 학설을 단호히 배격하는 동시에, 아울러 성경의 족보 서술에 근거하여 인간 기원을 B.C4,000년경으로 보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도 받아들이기에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세일하머
d.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7:1-5)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 주어졌으며 그것은 또한 성취되었다(6:22). 다음 장면은 홍수가 오기 전에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과 함께 시작된다. 이 부분은 방주로 가지고 들어갈 '정결한 짐승'들에 대한 특별한 예비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이전 부분과 동일한 형식을 따른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막 간축을 위한 예비와 증요한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서술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대한 서술과 평행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이 서술들은 방주나 성막으로 들어가는 것은 짐승의 희생과 함께 해야함을 강조한다. 성막 건축에 대한 묘사의 결론 부분에서(출35-39장) 성막의 완성이 기록되었을 때에(출 39:43) 그것이 세워져서 사용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출 40:1-33). 그것이 갖추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을 채웠을 때에(출 40:34-38) 성막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예비되었다(레 1장 이후). 그것은 곧 오직 '흠 없는' 짐승의 제물을 가지고서만 '접근' 할 수 있었다(1:3). 그러므로 오직 '흠 없는 짐승'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완성된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것은 그가 각각 '일곱쌍'의 정결한 짐승을 취한 것과 연결 된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정결한 짐승'들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아마도 그가 방주 안에 있는 동안에 성막 안에서의 요구와 같이(레 7:19-21) 오직 '정결한 고기'만을 먹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러한 평행은 저자가 임박한 '사십 주야' 동안의 홍수(7:4) 속에서 노아의 방주 안에 놓여 있는 구원과 임박한 광야에서의 '사십년' 동안에 성막의 임재 안에 놓여 있는 구원 사이를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다시 저자의 작업 뒤에 놓여 있는 언약 관계에 대한 개념의 중심 사상이 된다.
이러한 평행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저자가 홍수 기사의 결론 부분에서 이 짐승들이 사실상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줌으로써(8:20-21) 방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이들 '정결한 짐승들'의 제의적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 희생들을 받으신 것을 묘사함에 있어서(8:21) 저자는 레위기 1:17에서 사용된 특별한 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시 언약의 개념과 언결된다(9:8-11). 저자에 의해서 묘사된 홍수 서술에 있어서의 이러한 모형적 구성은 나중에 베드로전서 3:21에서의 이에 대한 해석과 매우 유사하다. 이 구절에서 방주는 신약의 세례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예시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e. 흥수 (7:6-24)
홍수의 시작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방주에 들어간 자들에 대하여 저자의 초점이 집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의 성급한 독자들의 눈은 방주에 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을 놓치고 있다. 노아의 나이, 비가 시작된 달과 날짜, 물의 근원, 짐승의 종류와 그 숫자 등-이 모든 것들은 만일 그것이 문학적 표현이 가능한한 독자 앞에 묘사하려고 하는 저자의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주시하도록 원하는 가장 첫째되는 중요한 것은 노아의 구원에 대한 이러한 묘사이다. 저자가 방주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시선을 돌리는 것은(7:21-23) 방주가 넘치는 홍수 속에서 가장 높은 산들 위로 안전하게 떠올라 머무른 때인 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홍수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그들에게 특별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흥미보다는(다 죽었더라 7:22) 왜 그들이 죽었는가에 대한 이유에 맞추어지고 있다: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7:23).
저자의 메시지는 반복을 통하여 가장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저자가 흥수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닙이 명하신대로' 행한 자들이었음을 네 번에 걸쳐서 반복했을 때에(6:22,7:5,9,16) 그의 초점은 명확하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곧 구원의 길이다. 여기에서 노아가 순종과 구원의 본보기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아브라함(창 21:4)과 이스라엘 백성들(출 12:28)과 같은 나중의 서술 속의 인물들도 이와 동일한 교훈을 위하여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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