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 본절부터 6절까지는 여생(餘生)을 세상 죄와 타협하지 말고, 그 불타협으로 인하여 오는 세상의 박해를 받으라는 교훈이다.
"육체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人性)으로 고난을 받으심과 죽으신 것을 가리킨다. "받으셨으니"란 헬라 원어(* )의 과거 시상은 우리의 주목할
바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놀라운 사건은 한낱 이상(理想)이 아니고 이미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곧, 주님 예수께서 세상(죄)과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니, 신자들도 죄와 타협함이 없이 마음을 갑옷처럼 든든히 가지고 세상과 싸우는 고난을 당하라는 말씀이다. "갑옷"은 견고하여 대적에게서 해를 받지 않게 한다. 그처럼 죄를 대적하는 정신이 있어야(히 12:4) 영혼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으며, 우리를 죄의 종되었던 자리에서 해방시키셨다. "그쳤음이니"란 말(* )은 현재 완료사이니, 그리스도께서 속죄하여 주신 결과가 영속(永續)하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 신자들의 구원을 완성하셨으니만큼, 신자들의 받는 고난("마음으로 갑옷을 삼음")도 승리를 가져온다. 이것이야말로 부전승(不戰勝)이다. 요 16:33 참조.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해 주신 사실을 믿은 후부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거룩히 살아야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욕심을 버리고 남은 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다(롬 6:1,23)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다. "음란과 정욕"은 성적 불결(性的不潔)의 모든 죄악들을 의미하고,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은 서로 동반되는 죄악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무서운 죄악들이다(딤후 3:4).
"무법한 우상숭배"란 말은 합법적 우상숭배도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우상숭배죄의 공통적인 불법성(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함)을 지적하는 것쁜이다. 위의 여섯 가지 죄악에 대한 헬라 원어들은 모두 다 복수 명사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런 범죄의 건수와 회수가 많았던 사실을 가리킨다.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란 말씀은 그들의 과거의 죄악생활이 정당하였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들의 과거의 죄악이 적지 않았던 사실을 저희에게 회상시켜 이제부터 절통(切通)한 회개와 새 생활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부드러운 위협이다.
벧전 4: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 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이러므로"란 말이 없다. 이 귀절의 뜻은 이렇다. 곧, 그들이 믿지 않을 때에는 죄악생활을 해온 고로, 이제 그렇게 아니함을 보는 불신 친구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회개하고 죄를 버리면, 전에 그와 함께 범죄하던 불신 동료(不信同僚)들이 비방과 핍박을 하게 됨은 고금(古今)이 일반이다.
벧전 4: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 곧, 그 핍박자들은 성도들을 해한 죄 값으로 장차 심판 때에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직고하리라"는 말(* )은 '보고한다'는 뜻이다. 끝까지 회개치 않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들도 심판 때에는 자기들의 죄를 숨길 수 없으니만큼 자진하여 자기들의 죄를 그리스도 앞에 고백하게 된다. 이렇게 악도들도 어찌할 수 없이 되는 때가 오고야 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현재에 박해자들을 승리자로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
"산 자와 죽은 자 심판"이란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오실 때에는 누구든지 심판을 안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곧, 장래 심판때에는 이미 죽었던 자들이니, 그 때까지 생존한 자들이 다 함께 심판을 면치 못한다.
벧전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곧, 말일(末日)에 심판이 있을 것을 위하여 지금(베드로가 이 말씀을 쓰던 그 때)죽은 사람들에게도 그 살았을 때에 이미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씀이다.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곧,그들이 그 가지고 있는 썩을 몸과 연약성은 인간이 당하는 법대로 사망하되(심판을 받으나), 그 중생된 속 생명, 곧 영(靈)은 영생하게 한다는 말씀이다. 신자들이 영으로는 몸이 죽은 뒤에도 산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있다. 이 삶은 물론 복된 영생을 가리킨다. 롬 8:10에 말하기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한다. 고후 5:8; 계 14:13 참조.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본절부터 11절은 여생(餘生)을 기도와 사랑과 봉사로 지내라는 권면이다.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곧, 말세의 종점이 접근해진 것을 의미한다. 말세(末世)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인데(행 2:17; 히 1:1), 그 종점 일시(日時)는 천사도 모르고, 인자(人子)도 모른다고 하셨다(마 24:36). 그러므로 말세의 경내(境內)에 처한 사도들은 이 종점의 접근감을 느낀 것이다. 본국을 멀리 떠난 사람이 귀국 도상(歸國途上)에서 해외의 여러 나라들을 지루하게 통과하고 본국의 경내에 들어 선 때의 감상은, 그 고향에 접근한 듯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그 고향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이 세상의 말세에 들어선 우리 신자들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와 오는 감상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짧은 시일 안에 온다고 단언하면 안된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정신을 차리고"란 말(* )은 사색(思索)에 있어서 잡념을 용납하지 않음을 말하고, "근신"이란 말(* )은 생활과 행위에 있어서 이 세상 것들에게 기울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위의 두 어귀는 서로 관련을 가졌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에 맞추어 건전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만 세상으로 기울어지며 취하기 쉽다. 그렇게 되
면 우리는 기도의 능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의 말씀(정신차리고 근신함)은 다음과 같은 실례로 설명된다.
(1)시험에 빠지지 않은 정신 상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
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의미하신 "시험"이란 것은 공포심에 사로잡힘이다. 위험한 때에는 하나님을 기억함이 올바른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고 공포는 하나님 앞에 허세이다.
(2)쾌락주의에 빠지지 않은 정신 상태.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고 하셨다. 여기서는 쾌락주의로 마음이 우둔해지지 않도록(눅 21:34)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쾌락주의자는 마음이 마비되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 "무엇보다도"란 말(* )은, 곧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을 가리킨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열심으로"란 말(* )은 열성뿐 아니라 지구성(持久性)도 의미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것은 잠 10:12의 인용인데, 사랑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발견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들의 나타난 과실(過失)에 대하여는 용서하고 또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잘못해도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잘하여도 불평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물질로 서로 돕는 것보다 용서로 돕는 것이 더 큰 사랑이다.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 이것은 위의 8절에 부탁한 사랑의 구체적 실행에 관계된 일이다. "서로 대접하라"함은 사랑이 한 편에서만 실행될 때에 그 사랑이 약해지기 쉬운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로 대접"하라고 한다. 누구든지 남의 사랑을 받기만 함이 공평하지 않다. "원망 없이 하고." 인간은 남을 도와 주면서도 원망하기 쉽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을 남에게 줄 때에 후히 주고 기쁘게 주어야 옳다(롬 12:8).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이기도 하다. 약 1:5 참조.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 이것은 특별히 영적 재능이나 은혜를 가지고 교회를 봉사함에 대하여 가르친다.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고." "청지기"(* )는 자주권(自主權)으로 일하는 자가 아니고,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주인의 뜻에 부합하게 일하는 자이다. 영적 은혜로 봉사하는 교역자들은 교회에 그 은혜를 나누어 줄 때 자세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것을 거저 받아 거저 주는 마음으로 줄 뿐이다. 주지 못하면 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화(禍)가 임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주어야 된다. 고전 9:16참조.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여기서는 윗절의 사상(思想)에 이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한다. 곧, 교역자가 가르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처지를 취하여 경외와 겸손과 충성을 가져야 된다. 자기 자신의 사상을 전해주는 자는 경외심이 없는 동시에 교만하게 되며 충성도 없을 것이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봉사"라는 것은 교인들을 위한 모든 수고를 총칭한다. 여기 이른 바, "같이"란 말(* )은 모방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을 받이 일하는 자로서의 자격을 여실히 가지라는 뜻이다.
벧전 4:12
사랑하는 자들이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불시험"이란 것은 신앙을 연단시키며 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낵 위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이 당할 핍박을 가리킨다. 신앙의 연단은 금속을 연단함과 같이 불순물 곧, 잠재(潛在)한 죄악을 뽑아버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의미에서 "불시험"(환난, 핍박)은 하나님의 집(교회)의 심판인 것이다(17절).
"이상히 여기지 말고"란 문구의 "이상히 여김"(* )은 '손님같이 여김'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소한 느낌을 가리킨다. 신자는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생소하게 여기지 말아야 된다. 이 세상에서 핍박받는 것은 성도의 몫에 태인 것이니(행 14:22 딤후 3:12), 그는 그것을 자기의 음식이요 자기의 옷이요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친우(親友)와 같이 간주해야 될 처지에 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의미한다. 여기 "고난"이란 말의 헬라 원어(* )는 복수(고난들)로 되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여러 모양인 것을 보여준다. "참예하는 것"(* ).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신자는 자기 혼자만 그것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케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는 자기보다 위대한 수난자들의 반열에 들어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도 된다. 행 5:41 참조.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워할 이유이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고난에 참여하였으니만큼, 주님이 그것을 알아주시고, 그들은 내세에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해야 된다. 마 5:10-12; 행 5:41; 딤후 2:11-14 참조.
벧전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위에 계심이라 - 본절도 역시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에서 기뻐할 이유를 보여준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의(義)를 위하여(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하셨다. 이것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대하여 주님께서 특수하게 가까이 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벧전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 그리스도 신자는 그 전생명(全生命)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인 만큼, 대소사 간에 주님을 위해야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 영광되지 않을 일에는(비록 육신의 일이라 하더라도)가담하지 않아야 된다. 그는 고난을 당할 바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다고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 여기 "그리스도인"(* )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 있는 라틴어풍(語風)의 명칭인데, 이방인들이 기독신자들을 능욕하면서 사용한 말이다(행 11:26,26:28). 유대인이 그리스도 신자를 능욕하는 명칭은 이와 다르게 "나사렛이단"이라는 것이었다(행 24:5).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 "그 이름으로"란 말(* )은 정역(正譯)하면 "이 이름으로"라고 해야된다. 이는, 곧 그 천대받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리킨다. 인간은 이 이름을 천히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귀히 보신다. 그 이유는, 이 이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대받는 자의 별명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이다.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 본절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난하는 자의 기빠할 이유를 보여준다. 헬라 원문에는 본절 첫머리에 호티(* -왜 그런고 하면)란 말이 있어서 윗절의 이유를 보여준다. 그런데, 본절이 말씀한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난하는 자가 기뻐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 그들의 수난이 그들에게 관한 심판을 대신하는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신앙 연단을 위한 호의적 심판이 있을 뿐이고 후일의 무서운 심판은 없다. 그들이 이것을 생각할 때에 그 수난 중에서도 기뻐할 만하다. (2) 그와 반면에, 악도들에게는 앞으로 진노의 심판이 있다. 그들의 장래는 영원한 흑암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사실을 생각 할 때에 그들이 현재에 받는 심한 고난도 고마운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이것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받는 핍박과 환난을 한 가지의 심판으로 보고 하는 말씀이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왜 심판의 의의를 가지는가? 그 이유는, 그것으로 인하여, (1) 하나님의 집 , 곧 교회가 성화되면서 거짓 신자들이 드러나 분별되기 때문이요, (2) 또한 참된 신도 그 전에 알지 못하던 죄를 깨닫고 그 자신이 다시 정화되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이는 앞으로 교회에 더 많은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예고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1) 그 고난은 그들에게 임한 천래의 심판이니만큼, 불가피한 것임을 알게 하고, (2) 그들의 수난은 겨우 초기의 것에 불과하니, 그렇게 문제시하지 않도록 하여, 앞으로의 더 많은 수난을 각오하게 한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며 이 말씀의 요점은, 먼저 란 말과 마지막 이란 말에 달려 있다. 곧, 성도들은 먼저 심판을 받는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모든 고난을 받지만, 내세에 들어갈 때엔 아무런 진노의 심판도 받지않는다. 그러나 악도들은 지금 자행자지하며 안일방종하지만, 마지막 진노의 심판 곧, 정죄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한 불행이다.
벧전 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에서 추론하여서 악도들의 장래 받을 고난을 상상케 한다. 이 상상은 수난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 현재 받는 고난도 가볍게 감상케 하여 도리어 감사하게 한다. "의인"은 신자를 가리키고,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끝까지 회개치 않을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여기 이른 바 "겨우"(* )란 말은 신자들이 구원의 길로 가는 데 많은 고난이
있음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1) 그 구원에 대한 안전 보장이 없다는 의미도 아니고, (2)그 구원의 길에 기쁨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 길이 험하지만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풍성하다. 요 16:22; 빌 4:4 참조.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이것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집 심판에 대한 결론적 진술이다. 여기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그 받는 고난이, (1) 하나님의 도덕적 성의에 부합한 의를 위한 것이고, (2)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임을 가리킨다.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 이것은 주님의 뜻대로 수난하는 자가 취할 태도를 보여준다. 곧, 그 영혼의 구원 문제를 조물주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기고, 낙심하지 말고 모든 당하는 일에 선을 힘써 행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