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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전 4:1

    종말로 - 이 말(*            )을 자역(字譯)하면 '나머지는'이란 뜻이다. 바울은
3장 끝까지 자기와 데살로니가신자들과의 관계를 말한 후, 이제부터 결론에  들어가려
고 하면서 그 초두에 이 말을 사용하였다.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  바울은  여기서
"주 예수 안에서"란 말로써 권유자(勸諭者)로서의 자기 배후 권위를 지적한다.  "구하
고 권면"한다는 말은 그의 겸비와 간절성을 표시한다. "구하고 권면"한다는 말에 대하
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인정과 겸비의 표시니, 목사들은 마땅히 이
것을 모본하여서 가급적 사람들을 인자하게 가르치고 무례하고 사나운 방법으로  하지
말 것이다"라고 하였다.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현재 잘하고
있음을 알아 줌으로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이다. 선량한 지도자는 지도 받는 자들을 사
랑하여 그들의 장점을 칭찬하여 용기를 준다. 데살로니가신자들은 사도에게서 교훈 받
은 것을 이미 실행하는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 실행이 더욱 완전하게 되기 위하여 힘
쓰라고 사도는 독촉한다.

 

 살전 4:2

    주 예수로 말미암아 - 이것은 바울이 앞절에 말한("우리에게 받았으니"란 말)  그
의 사도적 교훈의 권위가 어떠함을 밝힌 말이다. 그는 권위를 밝힘으로  독자의  주의
를 환기시킨다. 그 권위는 그 교훈이 "주 예수로 말미암아"(*                       
              )나온 데 있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란 말은 앞절의 "주 예수 안에서"
란 말과 거의 같은 것으로서, 양자(兩者)가 함께 사도의 교훈의  중대성을  가리킨다.
올솨우센(Olshaussen)과 볼네만(Bornemann)은 여기"주 예수로 말미암아"란 말을  다음
과 같이 설명하였다. "예수께서 사도와 교회의 중간에 계신 셈이고, 사도의 교훈은 예
수의 재가(栽可)를 통과하여 교회에 이르므로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쉐틀러
(Schettler)는 이 말이 원천적(源泉的)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즉, 사도의 교훈은  그
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의 감화로 주시는 것이라는 뜻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견해에
찬동한다.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무슨"이란 말(*          )이 헬라 원
문에서 역설체(力說體)이다. 이는 사도가 그들에게 지키라고 준 명령을 다시 힘  있게
지적함이다. 그리고 이 "무슨"에 대한 답은 3절에서 "이것이니"란 말에 의하여 소개된
다.

 

 살전 4:4

   거룩함과 존귀함 - 이것은 음행과 관련된 '더러움'이나 '부끄러움'에 대조되는 것
이다. 그 때에 이방의 부부 도덕은 문란하였다. 그것에 반대하여 바울은 여기에  성적
(性的)관계는 마땅히 "거룩"하게 실행되어야 하고 따라서 "존귀"롭게 여겨져야 할  것
을 가르친다(엡 5:25;히 13:4).
    자기의 아내 - "아내"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            )는 '그릇'을 의미하는
바 두가지  해석을  가진다.  (1)  "몸"을  가리킨다고  함(Tertullian,  Chrysostom,
Theodoret).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으로 보아 다음 해석만큼  적합하지  않다.  (2)
"아내"를 가리킨다고 함. 이 해석이 문맥상으로 적합하니, 그 이유는 이렇다. "자기의
그릇"이란 말의 "자기의"(*            )는 문법상으로 강세를 가진 소유격이다. 바울
이 이렇게 힘 주어 소유를 표시한 것은 6절에 암시된 다른 사람의 아내에  대조시키는
것이겠으니, '자기의 그릇'이란 말은 '자기의 아내'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사도  베드
로도 "그릇"이란 말로 아내를 의미하였다(벧전 3:7).
    취할 줄을 알고 - 여기 "취한다"는 말의 헬라 원어(*              )는 '취득함',
'소유함'을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둘째 뜻이 적합해 보인다. 이 말은  성  도덕(性道
德)에 대한 것인데, 이미 결혼한 자가 자기 아내 이외의 여자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자기의 아내와만 상관할 것을 가리킨다.
    


 살전 4:5

   하나님을 모르는 - 이것은 불신자의 특색이다(욥 18:21;시 79:6;렘 10:25;갈 4:8;
살후 1:8). 벴겔은 이 문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음란의 근원이
다(롬 1:24). 하늘의 청랑(晴朗)함을 보아라! 그리하면 너는 너의 불결한 정욕의 추함
을 깨닫게 되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바라보는 자는 자기  음란
의 추함을 깨닫게 되리라는 말이겠다.
    색욕을 좇지 말고 - 이 말은 불신 이방인들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타락된  현상을
정죄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면 부부 간의 성도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히
또는 존귀히 지킬 것이었다(4절 참조).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색욕의
충동대로 성적 행위(性的行爲)를 오용(誤用) 또는 남용한다.
    성 도덕에 있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과 불신자들의 차이는  이렇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는, (1)이 일에 거룩히 처신한다. 곧,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 일처(一夫一妻)
의 성경적 원리를 지키고, 상대자의 의지를 존중시 하며(골 3:19;벧전 3:7), 절제하며
남용하지 아니한다. (2) 따라서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존중히 여긴다(4절 참조).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은 그것을 죄되게 행하며(일부 일처의 정절을  지
키지 아니함, 상대자의 의지를 무시함, 절제가 없음), 따라서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

 

 살전 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 이것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지
말라고 함이라. 본절을 위의 말에서 따로 생각하여 이것을  분쟁으로  취리(取利)하지
말라는 뜻이라는 학자가 있다(Dibelius). 그러나 이 견해는 이 부분의 문맥을 잘 살피
지 못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7절의 "부정케 하심(음행에 관한 것)이 아니라"란  말은
분명히 본절의 결론이겠으니, 본절의 내용도 부정한 일 곧, 간음을  경계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여기 "이 일에"란 말은 위에서 말한 바 성적 교제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
심이라 - 여기 "미리 말하"였다는 것은 장래 심판이 이르기 전에 그가 경고한 것을 가
리킨다. "이 모든 일." 이것은 3-6절에  말한  음란한  죄들을  가리킨다.  "신원."시
94:1,98:9;미 5:15;나 1:2;롬 12:19 참조. 본절을 잠 6:27-35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
은 금생과 내세에 사람들의 죄를 그의 공의의 법대로 보응하신다.
    7-8. 이 귀절들은 범죄자가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확언한다. 거룩한 생활을 명령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거룩하지 못한 자는 곧 하나님께 범죄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범죄 사실이 사람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그것
을 벌하신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의 음행죄를 회개하며 말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
죄하여"라고 하였다(시 51:4). 다윗이 회개한 음행죄는 곧, 다른 사람의 아내와  간통
하고 또 그 남편을 죽인 사실이었는데 어찌하여 "주께만 범죄"했다고 하였는가?  그의
말은 얼른 보면 그릇된 말 같으나 원칙상으로는 이 말만이 참말이다. (1)  하나님만이
무죄자이시니 원칙상으로 말하면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정하시고 또한 형벌을  실시
할 수 있으며(Augustine), (2) 인간의 유죄(有罪)를 선고하는 참된 법률도 하나님에게
서 유래(由來)한 것이기 때문에 범법자는 원칙상으로 하나님만을 반역한 것이다.  (3)
예수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
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범죄자는  사람의 보응을 받음보다 결국 하나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니 두려운 일이
다. 히 10:31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하였
다.  

 

 살전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은 부정(不淨)을 행케 하기 위함이 아니요 성경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벧전 1:15에 말하기를,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다.

 

 살전 4: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
님을 저버림이니라 - 성결생활을 독촉한 사도의 권면을 "저버리는 자"는 사람인  사도
바울을 저버림이 아니라, 그들의 성결생활을 목적으로 하여 그들을  부르시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배척함이다.


 살전 4:9

   형제 사랑 - 이것은 불신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는 동족애를  가리키던  말이었으
나, 신약에서는 신자들끼리의 사랑을 가리킨다(롬 12:10;히  13:1;벧  1:22).3:12해석
참조.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 크리소스톰은 이 말을 바울의 교훈상 지혜있는 표현으로 보았다. 이 가은  데살로니
가신자들의 형제애를 인정하며 칭찬하는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더욱 권장하는 지혜로
운 말이다. 없는 미덕을 있는 것처럼 칭찬하는 것은 허위인 동시에 죄악일 것이다. 그
러나 어느 정도 덕행을 가진 자에게 적당히 칭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
그의 덕행을 더욱 장려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무엇을 의미한는가? 이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항상 내주(內住)하셔서 인도하심을 의미한다(빌 2:13;요일 2:27).
반 류웬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은 단순한 이론뿐만 아니
라 실제에 행동하도록 인도하심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신자들이 하나님의  성령
의 인도를 받은 결과로 형제애를 실행한 것이다.   

 

 살전 4: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 데살로니가교회의 그 형제애는 "온 마게도냐"지방 신자들에게 미쳤다.
아마 그들은 근처 교회 신자들에게 너그러운 물질적 원조를 행한 듯하다. 사도는 이것
을 칭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뿐이요 크게 이룬 것은 아니므로 계속하여  힘쓰라고
한다. 기독신자의 사랑은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거의 한도가 없어야 한다. 넓이로  말
하면, 세계의 전인류를 다 사랑했더라도 만족할 것 없고, 깊이로 말하면 한 친구를 위
해 목숨을 버리기까지(요 15:13)요구된다. 롬 13:8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
하는 일에 있어서 항상 계속적으로 "더 많이"실행하기를 힘써야 된다.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 본절은 윗절에 있는 사랑에 대한 권면의 연장이라는 견해가 있다(Theodoret). 이 해
석에 의하면, 나타(懶惰)하여 다른 사람들의 구제를 의뢰하고 사는 것은 사랑이  아니
라는 것이 여기에 암시되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않는 부자도  사랑없는
자이지만, 남을 늘 의지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이다. 그러나 위의 해석과 달리 본절의
훈시는 앞절의 그것과 관련 엊싸는 독립적 권면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Calvin,
Van Leeuwen, Dibelius).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이것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유할 때에 말한 교훈을 가
리킨 듯하다.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말을  하게
된 동기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리스도 재림을  건전한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고, 그것 때문에 현세의 노동과 직무를 등한시하는 고로  바울은
여기서 그들의 그릇된 태도를 개정하기 위하여 경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쨌든,
그 때에 처음 믿는 자들 중에는 인생관이 변동되자 혹 그릇된 생각으로 현세적 직무와
노동에 대하여 등한시하는 자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비울은 전도 시초부터 신자
가 천국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현세의 생활 책임과 업무를 등한히 해서는  암된다는
것을 가르쳐 왔을 것이다.
    이 귀절은 세 가지 미덕을 제시하였다.
    (1) "종용함."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하던 말을 그치고 침묵
하는 것(눅 14:4;행 21:14). 혹은 남들과 상관하던 일을 그치고 개인의 사생활에 충실
하는 것(Plato,Rep., VI,p.496)을 의미한다. 본절에 괸설된 자들은 게으른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방에 다니면서 누설하기를 기탄없이 하였을 것이고, 또한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했을 것이다(딤전 5:13). 그러므로 "종용하라"는 말은 이 두가지 의미
를 다 포함란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이 말이 무언주의
(無言主義)를 장려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일 없이 돌아다니면서 남의 말을 누설
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게으른 자들을 경계할 뿐이다. 사람이 말이 너무 많으면 거
짓과 훼방을산출하고, 말이 적으면 덕을 세우고, 말이 너무 없으면  자타에게  불화와
불쾌를 초래하기 쉽다.
    (2) "자기 일을 하고." 위에 말한 것과 같이 게으른 자는 무례히 다른 사람의  일
에 참견하여 방해를 주는 일이 있고, 공중 생활의 질서를 문란케 하는  실례가  많다.
여기서 바울은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지 결코 공사(公事)를 돌아보지 말고 자기의 일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공사를 위한 봉사의 첫걸음은 먼저 개인적 직책을 잘 알고  돌아
보아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 우선 공중 생활(公衆生活)
의 질서가 유지된다.
    (3) "손으로 일하기를 힘씀." 노동은 하나님께서 시조 아담을 창조하시고 제일 처
음으로 맡기신 것이다(창 2:15). 노동은 사람과 더불어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손수 노동하면서 이 권면을 하였으니 힘 있는  교훈이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이것은 천국 맛을 본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훈이다"라고 했
으니 과연 그렇다. 기독신자들이 흔히 받기 쉬운 유혹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리스도인이 영적(靈的)으로 천국에 속하지만, 그들은 가시밭 같은 현세를 개척하는 책
임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힘쓰라(*                          ) - 헬라 원문의 어원적 의미는  '대망(大望)
을 가짐'(to be ambitious)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힘껏 힘씀'을 가리킨다. 어순(語
順)대로는 이 말이 본절 첫머리에 있기 때문에 칼빈은 이것을 앞절에 포괄시켜 해석하
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이 말을 11절에 연락시켜 둠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살전 4:13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 죽은 자를 가리켜 "자는 자"라고 한 것은 구약과  신약에
흔히 나타난다(창 47:30;신 31:16;왕상 2:10;단 12:2;마 9:24,27:52;행 7:60). 이  말
은 주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하는  시기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Augustine).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두시고 이 말을 즐겨 사용하셨
다(마 9:24;요 11:11). 이것은 죽은 후에 영혼이 잠긴다는 뜻이 아니고, 신자의  영혼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고, 죽은 육신은 잠자듯이 티끌 속에 있다가(단
12:2) 장차 깨어 일어나듯이 부활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혼이 예수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별세하여 계속적으로 산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행 7:59-60에 보면,
스데반 집사는 임종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잔다고 하였다. 이 말
씀도 영혼은 떠나고 몸은 잠자듯이 평안히 무덤에 있음을 가리킨다. 눅 23:43 참조.
    우리는 신자들의 체험을 보고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할 것을  알
수있다. 예를 들면, 평남(平南) 개천(价川) 지방에서 목회하던 황구학 목사는 병에 걸
린 일도 없이 자기의 별세할 날과 시간을 미리 알고 교인들에게 광고하였다. 그  날이
이르러 종을 치고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가 별세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
자의 체험보다 성경을 믿는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영혼이  삶을  계속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중 몇가지를 들면,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그 시체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
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그 때에 그 아이의 혼(영혼)이 그의 몸으
로 돌아왔다(왕상 17:21-22). 여기 영혼의 동작이 진술되어 있으니 인간이 죽은  후에
그의 영혼이 잠자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별세를 가리켜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하였다(마 27:50).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 이 어투는 바울이 흔히 사용한  것으로서,
독자들이 가졌던 어떤 그릇된 의견이나 난제를 해명해 주려고 할 때에(롬  11:25;고전
10:1,12:1), 혹은 건절한 마음으로 자기 개인의 정형을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할  때에
(롬 1:13;고후 1:8;골 2:1)사용하였다.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 엡 2:12;히 2:15 참조. 이것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
내세의 소망을 가지지 못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당시 불신자들이 죽음에 대하여  어
떤 관념을 가졌는지, 카툴러스(Catullus)의 시귀(詩句)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짧
은 빛이 한 번 사라진 다음에도 졌던 해는 올라오지마는 끊임 없는 잠의 밤은 그냥 있
더라." 이것은 태양은 계속하여 출몰(出沒)하지만 사람은 한번 죽어지면 그만이라는
인생의 비극을 묘사하는 시(詩)이다. 동양의 시인도 사람이 죽어 그 시신이 장사된 것
을 보고 말하기를, "무덤을 이루고 사람들이 흩어진 뒤에 산들은 적적하고 달빛은  황
혼이더라"고 했다.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이것은 소망 없는 슬픔(부활을 믿지  않는  슬픔)을
금하는 것뿐이고, 정당한 슬픔을 금함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이 죽은  자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은 진리에 합당하고 유익하기도 하다. 전 7:2-4에 말하기를, "초상집에 가
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
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한
다.
    기독신자의 가정에서 부모의 상사가 났을 때에 자녀들이 우는 것은 유익하다.  그
울음이 인생관의 변동을 가져오는 회개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도한 슬픔은
내세를 믿지 않는 표현일 수 있다. 이것은 기독신자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살전 4: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바울은 본절에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곧, 이미 별세한 신자들도 주님의 재림 때에는 부활할 것을 확실히 설명한다. 그는 이
확신의 근거를 예수님의 부활하신 사실에 두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
기 때문에 그를 믿는 신자들도 그의 재림 때에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예
수님과 일체이기 때문에(롬 6:3;빌 3:9-11). 예수님의 부활은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시
킨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 문구가  조건문이지만  사실
아닌 것을 가정(假定)하는 것은 아니다. "진대"로 번역된 헬라 원어(*    )가  사실을
전제(前堤)하는 표시이므로 저자(바울)와 독자들(데살로니가 신자들)이  함께  주님의
부활을 믿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도  성립시킨다(요
14:19).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과 같이("이와 같이"란 뜻) 필연적으로 신자
의 부활도 사실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이 문구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다.  그
난해점은 특히 "예수 안에서"로 의역(意譯)된 헬라 원어(*                         )
에 걸려 있다. "예수 안에서" 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석가들은 이것을  여
러가지로 의역하였다. (1) 우리 한역과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이란 의역. 이것
은 예수를 믿는 신자로서 별세한 자들을 의미한다(Dobschutz).(2) "예수 때문에  자는
자들"이란 의역. 이것은 예수를 위하여 죽은 순교자를 가리킨다(Lake, The Earlier of
St. Paul,1911). (3) 번역상 어순을 달리하여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의
역. 이것은 한국 개역 성경의 각주(脚註)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 번역을 채택할  때에
본절 하반은, "자는 자들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가  
된다. 이대로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는 "자는 자들"이란 말을 수식하지 않고 절  끝
의 "데리고 오시리라"란 동사(動詞)를 수식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로 말미암아"는 그
아랫말 하나님께서 끝날에 신자들을 데리고 오시는 일에 있어서의  예수님의  중보(중
보)를 표시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하다. (4) "예수를  통하
여 자는 자들"이란 의역. 이것은 신자의 죽음은 예수를 통하여 잠드는 것  같은  복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어서 평화롭게 운명하고 깨어날(부활할)소망이 있음을  의미한다
(Lightfoot). 이상의 모든 해석들 중 네째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활시켜  예수님과  함께
오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어떤 학설에 여기 "데리고 오시리라"란 말의 헬라 원어 악세
이(*        )는 "인도하리라"라고 자역(字譯)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1) 부활시킨다는 의미의 말이거니와, (2) 천국의 영광에 참여케 한다는 의미이다. 보
스(Geerhardus Vos)는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악세이(*        )는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와 인도하심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해석은 위의 둘째  해석과
일치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위의 첫째 해석이 문맥에 더욱 부합한 것이다.

 

 살전 4:16

   이 귀절 말씀은 그리스도 재림의 영광스러운 광경에 대하여 가르친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 여기 "호령"을 발생한 주체는  누구인
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천사"라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나, 가
장 정당한 것은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다(Vos,  Pauline  Eschatology,p.139).  이
"호령"의 목적은 죽은 자들을 깨우려는 것이다(요 5:28-29). 여기 "천사장"은  미가엘
인데(유 1:9;계 12:7), 그는 특히 하나님을 위하여 사단을 대적하여 싸우는 천사이다.
그의 이름 "미가엘"의 뜻(누가 하나님과 같으리요)도 역시 하나님을 위한 전쟁 선언이
다. 주님의 재림은 사단을 멸하시는 것이므로 미가엘의 활동을 동반한다. 미가엘의 소
리 자체가 죽은 자들을 일깨우는 일에 상관됐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는,  죽은
자들을 깨우는 소리는 오직 인자의 소리이기 때문이다(요 5:19-29,11:43).  "하나님의
나팔"은 하나님의 명령을 모든 택한  자들에게  전달하여  회집하게  하는  것이다(사
28:23;마 24:31).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 사용되는 "나팔"이란 말
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 봉사에 사용되는 거문고를 "하나님의 거문고"라고  한  것(계
15:2)과 같다.
    먼저 일어나고 - 여기 "먼저"란 말은 다음 절 초두의 "그 후에"란 말과 서로 관련
되었다. 주님의 재림 때에 이미 죽은 신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거기에 이어서 그 당시
의 생존자들이 변화한다. 문법상으로 보아 죽은 신자들의 부활과 생존자들의 변화와의
사이에는 하등의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두 사건은  논리적으로
는 선후(先後)를 가지지만 실제적으로는 동시에 발생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살전 4:17

   그 후에 - 윗절 끝 해석 참조.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구름 속으로"란 말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장엄(莊嚴)을
표시하는 것이다(출13:21;왕상 8:10;시 18:11,97:2). "끌어 올려"간다(*            )
함은 초자연적으로 될 일이니 이 일이 있기 전에 먼저 몸의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부활한 성도들과 변화 받은 성도들을 공중에서 살도록 하기 위하여 끌어올린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영접하게"로 번역된 헬라 원어(*               )는  '만나게'(to
meet)란 뜻이다. 그들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곳은 땅위의  어느  지점
(地點)보다 높은 공중(空中)이다. 그를 만날 자들은 땅위의 어떤 한  지역 사람들만이
아니다. 보스(G.Vos)는 말하기를,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의의(意義)를 가진 그 장엄한
사건 곧,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행사에는 낮은 평지보다 높은 곳이 적합하다고 생
각된다"라고 하였다(The Pauline Eschatology,1930,p.136).  리델보스(H.N.Ridderbos)
도 이 사건에 관하여 말하기를, "공중에 머물거나 하늘로 되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
라,  주님의  지상  내림(地上來臨)에  따라  함께  있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Paulus,1966,pp.598-599). 세대주의자들은 대환란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들
을 공중으로 끌어올려 거기서 7년 동안 연회를 가지시고, 그동안에  땅에는  대환란이
있다고 한다. 이 학설은 성경의 말씀과 명백히 위반된다. 살후 2:8을 보면,  적기독의
활동(핍박행위)이 있은 후에 주님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는가? 더우기  계시록  13장을 보면, 적기독이 성도들을 핍박한다고 하였는데(5-8), 그의 무리가 그 후에 있을  주님의 재림 때에 패망할 것이라고 한다(9-10).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공중으로 끌어 올리운  성도들이 거기서 항상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때부터  영원토록 어디서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떠나는 일은 없다는 뜻이다.

 살전 4:18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 데살로니가신자들 중에 내세문제에 대하여  무식한 자들이 죽은 자들 때문에 과도히 슬퍼하였다(4:13). 그러므로 바울은 위에서 말한  부활 소망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한다. 신자들은 서로 위로함으로 낙심 중에도 힘을 얻는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함이 참된 위로를 주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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