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선 주석, 데살로니가전서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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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전 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 여기 "형제"란 말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
음을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소유하고(Chrysostom),
천국의 환난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계 1:9  참조).  "하나님의  일
군." 이것은 시내산사본(*  )의 사구(寫句)인데, 바티칸사본은  이것과  다르게  그저
"동사자"(同事者)라고 하였다. 바이스(Weiss)는 후자를 채택한다. 만일 바이스의 견해
가 옳다면, 바울이 디모데를 높이 천거한 것은, 그가 이런 유력한 일군을  데살로니가
로 보내고 홀로 아덴에 있음이 자기 편에서는 적지 않은 희생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데살로니가신자를  위한  그의  성의가  지극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힘이다(Van
Leeuwen). 그리고 디모데의 사명은 데살로니가신도들을 "굳게 하고...위로함으로"그들
의 신앙이 환난 중에 동요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 행 14:22,15:32 참조.

 

 살전 2: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중에  - 이는 데살로니가신도들과 바울이 최근에 경험한 바
요 현재에도 무시(無時)로 일어날 수 있는 박해를 의미한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 "요동"한다는 말(*                  )을 교부들은 한
역과 같이 '동요'의 의미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즈안(Zahn)과 밀리
간(Milligan)은 이 말의 고전적 의미인, '개가 꼬리를 흔든다'란 뜻에 근거하여 '아첨
한다'는 의미를 추론한다. 기독신자가 곤고를 당하는 때에, 사단은 그들로 하여금  죄
와 타협하여 편한 길고 가도록 하려고, 개가 꼬리를 치듯이 아첨한다. 그러므로  신자
들은 마귀의 아첨에 끌리지 않도록 주의함이 필요하다.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 여기 "세움"이란 말(*  
            )의 의미는 '작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그런 처지에 있게끔 되었다고 함과 같다"고 하였다. 곧,  기독
교인에게 고난은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란 말이다. 바울은 그 시대의 신자들이 반드시
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디벧리우스는 기독교인에게  고난이  반드시
따르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였으니, (1) 하늘 가는 길은 험하여 그 길로 가는  자마
다 그 험난(險難)을 겪지 않을 수 없으며(행 14:22), (2)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의 관
계가 밀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반드시 그(그리스도인)에게 있게 된다는  것
이다. "너희가 친히 알리라."그들이 기독신자로서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음을 각오한
다면, 그것은 그들이 인간 편에서는 환난 중에 동요되지 않을 장비이다. 데살로니가신
도들의 이 각오를 가지게 된 것은 사도의 예고와 그들의 경험이다.

 

 살전 3:4

   장차 받을 환난 - 여기 "장차 받을"이란 미래형은 단순히 미래의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닥쳐올 것을 가리킨다(Milligan).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환난
을 받도록 되어있다. 그는 고해(苦海)를 건너는 선부(船夫)와 같다. 선부가 폭풍을 만
나면 자기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배 안의 짐을 바다 가운데 내버리는 것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인도 그 영혼의 생명만을 위하여 모든 무거운 세욕(世慾)을  분
토와 같이 내버리고 가벼운 몸으로 달음질 하여야 할 것이다(히 12:1 참조).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 예언은 신자의
마음을 경성케 하여 앞날을 위해서 대비하게 한다. "미리 경고를 받으면 미리  무장한
다"(Edmunds). 데살로니가신도들은 환난이 반드시 있을 것을 예고 받았으니 만큼 미리
경성하고 있다가 그것이 올 때에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예언 성취는 그것을  보는
신자의 믿음을 크게 강화시켜 준다(요 13:19).

 

 살전 3: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 곧,  데살로니
가 교인들의 수난에 대하여 바울은 무관심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도 많은 근심을  가
진 고로 디모데를 파견하였다는 뜻이다. "너희 믿음 알기 위하여"란 말은 그가 그들의
신앙 생활을 알아 보려고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 "시
험하는 자"란 말의 헬라 원어(*                    )는 직역하면 "그 시험하는 자"란
말이다. 여기 "그"라는 관사가 있는 목적은, 천하의 모든 유혹을 맡아 공작하는  그놈
(사단)이라고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한다는 염려는 사단의
역사를 막는데 만전을 기한 바울의 지혜이다. "사단은 우리의 주위를  둘러   복병(伏
兵)하기를 쉬지 않는다"(Calvin). "원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에 어느덧 원수는  가까이
있을 때가 많다"(Bengel).

 

 살전 3: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 본절은 본서의 저작시기를 암시한다. 행 18:5을 보면, 본서는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돌아온 직후에 저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디모데의 보고  가운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과 사랑"을 가졌고, 또 바울 사도를 사모한다는 소식은 바울을  위안하
였다. "지금"이란 말(*        )은 '방금'을 의미하거나(마 9:18;고전  13:12),  혹은
'조금 전에'를 가리킨다(Lightfoot). 벴겔은 둘째 의미를 채택하여 말하기를, "디모데
가 돌아온지 바로 뒤에 바울은 새로운 기쁨과 애정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고 하였다.
"믿음과 사랑"이란 말은 진정한 경건의 총화(總和)를 간단히 보여준다(Calvin).  1:3;
딤전 1:14 해석 참조.
    "기쁜 소식을...전하고"란 말은 헬라 원문(*                              )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과 같다. 디모데가 가져온 데살로니가교회의 소식은 너무 기쁜  것
이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리키는 "복음"이란 말로써 그것을 말한 듯하다.  그러나
라틴역은 이 말을 단순히 '전한다'(adnuntiante)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으니 그것이  합
당하다고 볼 수 있다. 디벧리우스도 이 번역과 일치하는 견해를 가지고 말하기를, "이
말이 70인역(LXX)에서 흔히 '소식을 전한다'는 일반적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잘 생각하여"란 말은 친절히 기억한다는 뜻이고, "간절히 보고자"함은 신령한 은혜를
나누기 위한 것이다(롬 1:11).

 

 살전 3: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신앙이 확립됨을 보고 위안을 받은 고로, 그들이 지금부터 계속하여  확립하
면 그는 즐겁고 기쁘게 살겠다고 한다. "굳게 선"다는 것은 자력으로 선다는 말과  반
대되는 것으로서, 신앙으로 주님과 연합된 상태에서("주 안에"란 뜻)의 '확립'을 의미
한다. 따라서 이 '확립'은 견고하고 또 안전하여 모든 시련을 감당하기에  족한  것이
다."살리라"는 말은 생활상 행복과 희락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 없다. 바울은 그리스
도를 위하여 날마다 죽음을 대면하다시피 하였다(고전 15:31). 그러나 그는 그의 전도
를 받은 신도들의 신앙이 견고해진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참다운 생의  보람을  느낀
것이다. 그의 지상 생애의 의의는 온전히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조장시키는  데  있었던
것이다(빌 1:24).

 

 살전 3:9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어떠한  감사함으
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 본절은 윗절에서 말한 참다운 생의 실상을 묘사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신자들의 견고한 신앙을 인하여 중심에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서...기뻐"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육적인 기쁨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
며, 그 기쁨을 허락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Milligan) 그는 하나님 앞에 감사를  가
지는 것이다. "너희 중에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여기 "모든  기
쁨"이란 말은 기쁨의 많은 종류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강열성(强熱性)
을 가리키는 복수적(複數的)표현이다(Van Leeuwen). 바울은 모든 난관에 처하여도  오
히려 "모든 기쁨"을 가졌다. 그의 기쁨은 너무 커서 하나님 앞에 드릴 감사를 다 표현
할수 없었다.


 살전 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 - 눅 18:7;딤후 1:3;계 4:8 참조. 이 문구는 어떤 일정한  요
구를 위하여 계속 열렬히 간구함을 의미한다. 벴겔은 이 귀절 해석에 있어서 특히  야
간 기도에 착안(着眼)하여, 야간은 거룩한 생각이 일어나기 쉬운 때라고 말하였다. 시
77:2;막 6:46 참조.
    너희 얼굴을 보고 - 바울은 자기의 일터인 데살로니가교회가 선한 열매를 많이 맺
을 줄을 알게 됨에 따라, 자연히 그들을 대면하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는 마치 농
부가 그 심은 곡물이 잘 결실했다는 맘을 들을 때에 그 밭을 보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
함과 같다(Chrysostom). 그와 동시에, 그의 소원과 기도는 그들에게 찾아가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 것이 그 주요 목적이다.
    너희 믿음의 부족함 - 위의 6-8절을 읽어 보면 데살로니가신자들의 신앙이 건실하
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여기서는 그들의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표시되었는가?  이것은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믿음은 비록 우수하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 있어서 죽는 날까지 달음질하는 사람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빌 3:13-14). 데살로니가신자들의 신앙이 건실하다고 한 것은 상대적 의미에서  그러
하고 절대적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으나 신앙의 마
지막 완성에 이르려면 아직도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상  부족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본서 4-5장의 훈계에 암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1)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내세에 대한 지식이 분명치 않았고(4:13), (2)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결함이 있기도 하였다(4:2-6,11).
    온전케 하려 함 - 이 말의 헬라 원어(*                  )는 '수선함'(막 1:19),
'개정함', '완비함'을 의미하는바, 본절에서는 "완비함"을 의미한다는 것이 적합해 보
인다. 그들의 신앙이 비교적 건실하나 아직도 그들에게 결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
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더 돕고자 한 것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기독교의 스승
은 사람을 잠간 동안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시작한
믿음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전 3:11

   바울은 앞절에서 자기가 데살로니가신자들을 위하여 간구한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본절에서 정식으로 그 기도를 기록하였다.  크리
소스톰은 말하기를, "그는 데살로니가신자들을 위하여 혼자 기도 할 뿐 아니라,  그들
에게 보내는 서신에까지 그 기도를 표현했으니, 이것은 데살로니가신자들을 위한 그의
사랑의 지극한 표적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 헬라 원문에는 이 문구가 있기 전에 "그가"
라는 말 아우토스(*          )가 있어서 이 기도문의 초두를 시작한다. "그가"란  말
은 물론 그 아래 있는 "하나님...아버지"란 말을 강조한다. 얼핏 보면,  이  대명사는
쓸데 없는 부가어(附加語)인 것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기도 시작의  장엄
성(狀嚴性)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란 말 밑에 "우리 주  예
수"란 말을 첨부한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길을 열어 주신 이가 하나님 아버지이
시지만 그 은혜가 우리 주 예수님의 중보역(仲保役)을 통해서 임하는 것이다.
    직행하게 하옵시며 - 이것은 바울의 데살로니가 심방을 방해하는  장애물(2:18)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구함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간구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는 일보라도 성공의 걸음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살전 3:12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 이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준 사랑을 자랑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실행되는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말이다(1:6  하반  해석  참
조).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  "너희도"란
말은 헬라 원문에서 본절의 맨 처음에 있어서 어순상(語順上)  역설체로  되어  있다.
"피차간"이란 말은 '신자들끼리'란 뜻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불신자까지 포함하는
'일반인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실행상 순서를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
면, 그는 먼저 같은 신자들끼리 사랑하고, 다음으로 불신자들까지 의무를 가진다.  그
러나 이 순서는 결코 당파심이나 편견의 발로가 아니다. 사랑은 원수라도 사랑하는 것
이지만, 그 사랑의 구체적 행진에는 순서가 있다(갈 6:10).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질(質)에 있어서  원수까지
도 사랑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量)에 있어서는 그가 무한(無限)히 사랑의 빚
을 지고, 끝없이 계속해야 된다(마 5:44-48,18:21-22;롬 13:8-10). 이 위대한  사랑의
실행은 우리의 자력으로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서만 참되이 실
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사랑 실천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전적
으로 의지해야 된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으로 우리의 생활상  표
준을 지정함에 있어서 우리로서 하기 쉬운 것보다도 하기 어려운 것을 실행하라고  요
구하신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실행의 능력을 받도록 기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라
고 하였다.

 

 살전 3:13

   본절은 내세에 신도들의 구원이 마침내 완성될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말
한다. 바울이 그 교훈의 결론에 이르러 매번 내세를 바라보는 것은, 본서에 있어서 그
의 특색이다(1:10,2:19,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 이 말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안전감을  가리킨다.
곧, 앞절 끝에 말한 대로 그들의 사랑이 풍부해지면, 주님의 재림 때에 공포심이 없게
될것을 가리킨다. 이 해석은 요일 4:17의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란 말과 잘 통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 이 문구는 헬라 원문에
서는 본절 끝에 나온다. 여기 "성도"란 말(*          )은 그저 '거룩한 자'란 의미만
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해석상 문제가 따른다. 이 말이, (1) '영화(榮化)된  신
자들'을 가리킨다는 학자도 있고(Flatt), (2)  '천사들'을  의미한다는  학자도  있고
(Dibelius), (3) 이상 두 가지 의견을 합하여 '성도와 천사'를 겸하여 일컫는  것이라
고 말한 학자도 있다(Milligan). 제 1설은 '거룩한 자'란 말의 신약상 용법이  "성도"
를 가리킴에 국환된 사실(고전 1:2;살후 1:10)에 근거하였고, 제 2설은 살전  4:16;살
후 1:7과 합한다. 그리고 제 3설은 '거룩한 자'란말이 구약에서 천사를 가리켜 사용된 실례(단 4:13,23)가 있으니만큼, 여기서 이것을 성도의 의미(골 3:4)에 천사까지 포함한 말로 본다. 이상 세 가지 해석 중 제 1설이 일반적으로 채용된다. "강림"에 대하여는 1:10에 있는 말 해석을 참조하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가를 원하노라  -  "거룩함에
흠이 없게"됨도 역시 윗절 끝에서 발한 바 사랑 완성의 결과이다. 그 이유는,  "거룩"은 율법을 완전히 지킴을 말하고, 율법을 완전히 지킴은 사랑의 완성 그것이기 때문이다(롬 13:10;골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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