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 바울이 여기서 "사도"란 직명을 첨부하지 않고 단순
히 그의 이름만 소개한 이유는, 데살로니가 신도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Bengel).즈빙글리(Zwingle)에 의하면, 바울이 사도직 없는 동
반자 실루아노와 디모데를생각하여 겸손한 태도로 "사도"란 직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고후 1:1;골 1:1 때문에 성립될 수 없다. 뤼네만
(Lunemann)은 여기 "사도"란 직명이 생략된 것이, 본서가 바울의 전도 초기 곧, 그에
대한 원수들의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저작된 증거라고 본다. 곧, 전도 초기에 있어서
는 자기의 사도직의 진정성을 변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사도라는 직명은
생략한 것이라고 말한다.
"실루아노와 디모데." 여기 두 사람의 이름이 기입된 것은 그들이 바울을 수종하
여 그와 함께 일한 관계 때문이었다. "실루아노"는 사도 행전에 있는 "실라"이니, 유
대인(행 16:19-20)으로서 이방 전도에 많이 노력한 사람이다. 그는, (1) "신실한 형
제"로 알려졌고(벧전 5:12), (2) 사도 바울을 수종하여 전도하다가 투옥(投獄)된 일까
지 있었고(행 16:19,25,29,17:4,10,14), (3) 본래 예루살렘 교회 요인(要人)으로서 예
언자 중 하나였다(행 15:22,32). (4) 그가 바울과 동반하기는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진
후부터였고(행 15:40), (5)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같이 전도하다가 핍박을 받아
베뢰아에 가서 사역한 후 고린도에 이르러 바울과 함께 일하였는데, 그 때에 바울이
본서를 썼다(행 7:4,18:5).
"디모데"는 그의 부친이 헬라인이고, 모친이 유대 여자"유니게"로서 진실한 신자
였고(행 16:1), 그 외조모 "로이스"역시 경건한 신도였다(딤후 1:5). 그리고 그의 고
향은 루스드라인데,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때에 개종(改宗)한 듯하다(행 14:8). 그
는 바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요(고전 4:17;딤전 1:2,18;딤후 1:2),가장 신임할 만한
조사이다(빌 2:19).그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시에 동반하였고(행 17:14,18:5;살전
3:2), 제3차 전도 여행시에도 그리하였으며(행 19:22; 롬 16:21;고전 4:17;고후 1:1),
바울이 그 임종시에 그를 로마에 소환하였다. 이 본문에서 디모데가 실루아노 다음에
기입된 것은 그가 아직 젊은 까닭이겠다(딤전 4:12;딤후 2:22).
하나님 아버지 -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하는 개념은 구약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내용이 다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격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렘 31:9,20;호 11:1),신약에서는 하나
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성령으로 중생시켜서 양자로 삼으신 의미에서,
각 개인 신자의 아버지 되심을 가리킨다(요 1:12-13; 롬 8:15). 물론 창조주로서의 하
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일컬은 장절도 없지 아니하다(히 12:9;약 1:17).그러나
본절에서는 신자들을 성령으로 중생시키는 "아버지"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안에 있는 - 이 표현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것인데(2:14,3:8,4:16,5:12,18;롬
6:23,8:39,14:14;고전 15:31;엡 1:15,3:11;빌 2:19:살후 3:4), '주관하에 있다','보호
아래 있다','연합 되었다'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칼빈은 말하기를,"교회는 하나
님께서 주관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곳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은혜와 평강 - 이 축복은 기독신자의 신분으로 받는 영적축복의 내용을 총괄한 것
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아네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심이고,"평강"은 은혜 받은 결과로 얻은 행복이니, 하나님과 원수되어 심령의 평화
를 잃었던 자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강자르 누리게
됨이다. "은혜와 평강"은 이방식과 유대식의 혼합(混合)축사라고 말하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은혜"(* =카리스)란 말이 헬라인 서간문(書簡文)의 인삿말에 흔
희 나타나는 카이레인(* )이란 말에 해당한 것이라는 데 논거(論據)를둔
다. 그러나 카이레인은 은혜를 의미하지 않고 '기뻐할지어다'를 가리키는바, 구것은
"안락히 살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즉, 바울 서신의 인삿말에
나오는 "은혜"는 이방의 서한 문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존스톤(R.Johnstone)은
신약의 서한 문학의 인삿말은 구약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의 논거는 민
6:25-26에 있다. 곧,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
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고 한 말씀이
다. 고후 1:2 해석 참조.
살전 1:2
우리 - 이것은 사도 한 사람을 가리킨 것이라기보다(Koch,Pelt),실루아노와 디모
데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1:1,2:18;고후 1:19참조. 왜냐하면, 세 사람 연명(連名)직후
에 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Alford).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 사도가 데살로니가신자들의 미덕
(美德)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그들을 칭찬하는 말이라기보다 그들로 하
여금, (1) 그 소유한 미덕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식케 하여 하나님의 자녀
임을 확신케 하려 하는 동시에, (2) 겸손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게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다.
살전 1:3
믿음의 역사 - 이것을 직역하면 "믿음의 일"인데, 이 문구에 대하여 해석가들의
의견이 같지 않으나 가장 합당한 해석은 마이어(Meyer)의 것이다. 그는 "믿음의 일"이
란 말은 진정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산출한 선한 사행(事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
해석에 의하면, 믿음은 덕행자르 그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의 수고 - "수고"는 사랑의 특성이므로 여기서 "사랑의 수고"라고 하였다. 수
고로운 봉사를 기피하는 자는 진정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수고"는 사
랑의 진정성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 - 데살로니가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재
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다. "인내"는 소망의 필연적 산물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 함이니 - 이는 2절의 "항상 하나님께 감사
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이란 말과 서로 응한다.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 - 이 문구는 데살로니가신도들이 구원 받도록
선택된 사실을 포함한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포함된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
하심을 받은"자라고 말한 것은 롬 9:13("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에
도 계시되어 있다.
너희를 택히심을 아노라 - 디벧리우스(Dibelius)는 이 말이 데살로니가 사람에 관
한 하나님의 역사상 행동(歷史上 行動=Geshichtlichen Akt)곧, 그들이 회심(回心)하고
주님을 믿어 교회에 수용(受容)된 것을 반드시 하나님의 초역사적(超歷史的)행동이 포
함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그들이 창세
전에 구원 받기로 선택되었던 증거이지 선택 그것은 아니다.
살전 1:6
본절은 데살로니가신자들이 "선택"에 참가된 것을 알 수 있는 둘째 증거를 보여
주었으니 곧, 그들이 기쁨으로 복음을 받은 사실이다.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 데살로니가신자들의 받은 "환난"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은 핍박을 말한다(행 17:5-9;살전 2:14,3:3,5,7). 그들이
환난 가운데서 기쁨을 가지게 된 것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기"성령의
기쁨"이라고 한 말 뜻이 그것이다. 기독교의 고난관(苦難觀)은 스토익 철학의 그것과
판이(判異)한 것이다. 스토익 철학은 고난에 대하여 무관심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
은 고난을 고난으로 알면서도 그것은 신자가 으례 당해야 될 것과, 그것 가운데서 소
망을 품고 오히려 기쁨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마 5:11;행 14:22;벧전 4:13).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 - 데살로니가신도들이 사도 바울을 모본한 것은, 인간으로
서의 바울보다도 하나님의 사도로서의 바울을 모본한 것이다. 일반 교직자보다 사도를
순종하고 모본함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을 순종하며 모본하는 것이 되어진다. 그러
므로 사도가 여기서 "주를 본받은 자"란 말을 부가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신자들로서
사도와 그리스도를 모본한 일은 환난 가운데서 기쁨을 가진 사실이다.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 여기 "그
러므로"란 말(* )은 윗말의 결과를 보여주는 접속사이다. 데살로니가신자들이
다른 신자들에게 모본된 점은 그들이 사도와 그리스도를 본받아 환난 중에서도 기뻐한
생활이다. "마게도냐"는 로마 영(領)헬라 북부요, "아가야"는 그 남부였다.행 19:21;
롬 15:26 참조.
살전 1:8
헬라 원어에서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 있어서 앞
절에서 말한 칭찬의 이유를 설명한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들릴 뿐 아니라 - "들림"이라는 말의 헬라 원어(*
)는 뇌성이 발함과 같이 복음이 떨침자르 의미한다(Lightfoot). 데살로니가신자들에게
서 "주의 말씀"(복음을 가리킴)이 우뢰 소리와 같이 힘있게 전파되었으니, 그것은 그
들이 사도와 주를 행한 까닭이다(6절 참조).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생활은
그들이 많은 말로써 외치는 것보다 훨씬 힘있게 복음의 빛을 전함이 된다(마
5:13-16).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 - 여기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이란 말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이방신(異邦神)을 버리고 진정한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온 사실을 가리킨다
(Wohlenberg).
소문이 각 처에 퍼진 고로 - 데살로니가신자의 "믿음의 소문"을 각처에 전파한 매
개(媒介)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그리스도인 행상(行商)들이었을 것이라고, 디
웨테는 추측하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 소문이 이미 광포된 고로, 사도는 그들의 신
앙에 대한 칭찬을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 바울은 데살로니가 선교의 좋은 성과에
대하여 선전하기에 애쓸 필요가 없으니, 그 이유는, "저희가"(각처의신자들이)벌써 알
고서 자진하여 바울에게 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 바울은 데살로니가신자들이 개종(改宗)
상태 그것을 말하기 전에, 그 원인이 된 사도의 전도한 형편을 먼저 말한다. 그 전도
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5절).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 그들의 개종 회심은 우상으
로부터 참 신(神)에게의 전환(轉還)을 그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 그들의 이 전환에는
성령의 기쁨이 수반(隨伴)하였다(6절). "돌아와서"(* )는 오류
(誤謬)에서 진리로, 죄악 생활로부터 하나님께로 전환한 것을 의미한다. 회심
(conversion)이라는 신학적 술어의 기원은 성경에 여러 번 나타난 이 말("돌아온다"는
말)에 있다. 회심하여 하나님을 믿게 됨을 가리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말함은,
인류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자리에서 타락하여 우상 숭배와 죄악 생활의 미로
(迷路)에 떨어졌기 때문이다(창 6:1-3;롬 1:18).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 "하나님"은 우상과 반대된다. 우상은 생명이 없
고(시 135:17), 거짓된 것이다(레 19:4). 신 5:26;수 3:10;삼상 17:26;왕하 19:4;렘
10:10참조.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정의(定義)하여 "모든 존재들 중에 가장 참 되신 것"
(enssea lissimum)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정의이다. 하나님은 가장
참되신 존재이실 뿐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 신(personal living God)이시다. 하나님
은 이렇게 살아 계시고 참되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대상이 되시기에 적합하신 분이다.
살전 1:10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신앙의 특별한 방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열망(熱望)하는 것
이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 바울이 여기서 주님의 부활을 말한
것은 주님의 확실한 재림을 담보(擔保)하려고 그리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증거 곧,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
17:31)고 한 말을 보아서 알 수 있다(Lightfoot).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 -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데살로니가신자들의 신
앙생활의 두 가지 방면을 말하였으니, 그것은 (1)하나님을 섬기는 것(9절 끝)과, (2)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10절)이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주님을 기다리는 것
은 진정한 그리스도신자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으
로써 우리의 마음을 안정(安定)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Calvin).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함으로써만 우리의 심령을 안정시킬 수 있
다.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이는"이란 말은 헬라 원어에
없는 것을 보역(補譯)한 것이니, 상반절의 "그의 아들"에 대하여 관설하는 것이다. 예
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벌(永罰)을 면케 하는 구주이시다. 여기 "장래"란 말이 헬
라 원어에서는 현재 분사(* )로 되어서 얼핏 보면 장래 주님의 재림
을 의미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이 미래의 내림(來臨)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
용된 실례는 이 밖에도 있으며(요 14:3,18), 특히 급박(急迫)해 오는 미래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노하심"이란 말(* )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가리키는 바, 그것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회개치 않는 자들을 그
범죄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롬 1:18,24,26,28). (2)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들을
마침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다(계 6:17). 본절에서는 이 둘째 의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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