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6: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 여기 이른 바 "범죄"란 말은 계획적으
로 범한 범죄건이 아니고, 뜻밖에 범한 실수를 가리킨 것이다.(Ridderbos).
신령한 너희 - 이것은 성령을 받아 중생한 자들을 의미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 이것은 조급, 격동, 흥분, 단기, 경솔과 반대되는 미덕(美德)이
다. 교회가 범죄자를 온유하지 않게 대하면 교훈이 될 수 없으나, 온유하게 대하면 감
화를 줄 수 있다. 온유는 나약이 아니고 탄력 있고 포용력 있는 덕(德)이다. 하나님께
서는 범죄자를 귀정(歸正)시키심에 있어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신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 이 문구에는 윗 문구와 다르
게 돌연히 "너"(* )라는 단수 대명사가 나온다. 그것은 이 문구의 말씀이 각 개인
을 상대하고 주의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남의 범죄건에 너무 가혹하게 대하
다가는, 그 교만의 죄 값으로 자신이 어떤 시험을 받아 죄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
다. 그러므로 남의 범죄건을 교정시키는일에 겸손히 협력하는 것은 좋으나, 그 범죄를
업신여기거나 무법하게 비평하면 그것도 벌써 죄악이다.
갈 6:2
짐을 서로 지라 - 곧, 다른 형제가 범죄하면 그것을 냉소(冷笑)하지 말고, 내 지체
(肢體)가 그리한 것으로 여겨 그 범죄의 결과인 수치와 손해도 체휼(體恤)해야 된다.
그리스도의 법 - 이것은 사랑을 가리킨다.(5: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흴르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
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가"고 하셨다(요
113:34-35)
갈 6:3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 곧, 누구든지 남의 범죄한 것
을 보고 자기는 허물이 없는 듯이 생각하여 그사람을 냉소(冷笑)하기만 하면 그것은
"스스로 속음"이다. 그것은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한 어두움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연약하니 자기도 잘못하는 일이 있는 줄 알아야 자기를 바로 본 것이고 스스로 속지
않는다.
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기독신자는 남의 허물을 볼때에 자기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만족할 것이 아니다. 근근히 남의 허물과 같은 것이 그 자신에게 없다. 할지라
도 그런 허물에 가까운 것, 또는 다른 허물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역
시 죄인인 줄 알고 겸손해야 한다. 기독신자는 인격 표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한다. 그는 남의 허물을 쳐다보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살
펴야 한다. "살피라"는 말(* )은 '시험하라'는 의미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 표준으로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시험하여 보아야 한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있지 아니하리니 - 자기 반성을 잘
하는 자는 자기에게서 장점을 발견하는 때에도 자긍하지 않는다. 그는 그 장점으로 인
하여 홀로 기뻐할 뿐이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를 남에게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
문이다. 이것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다" 는 말씀의 의미이다. 곧, 자랑할 만한
것이라도 자기에게만 머물러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갈 6:5
각각 자기의짐을 질 것임이니라 - 헬라 원어에서 직역하면, 본절 초두에 "왜 그런
고 하면"이란 말(* )이 있다. 이것을 보면, 본절은 윗절 말씀의이유를 말해준다.
윗절에 말하기를, 신자의 자랑은 자기에게만 있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는
자기의 짐을 져야 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장점을 가지고 자기의 할 일을 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다.
"짐"이란 말 폴티온(* )은 2절에 있는 "짐"(바레=* )이란 말
과 다르다. 2절의 "짐"이란 말 밖에서 오는 무거운 짐을 의미하나, 본절의 "짐"은 신
자가 부담해야 할 책임을 의미한다(Light foot)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는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참된 자격 있는 교역자들을 도와
주어야 할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그의 시대에도 교회가 이런 교역자에 대하여 물질로
사례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 축복을 가
리킨다. "함께 하라"는 말은 서로 융통함을 의미한다.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리델보스(H. Ridderbos)는 이것이 전적으로 6절과 관련되었
다고 생각하지 않고, 인류의 생활 방법에 대한 일반적 원리를 말씀한다고 하였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Churches of Galatia, 1978, p.218)
그러면 무엇이 "스스로 속임"인가? 무엇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인가? 그것은 하
반절에 밝혀진 대로 사람이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무시함이겠다. 이렇게 해석되는
것은, 헬라 원문에는 하반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가르(* )
가 있기 때문이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 "육체를 위하
여"라는 말의뜻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만 상대하고 일함을 의미한다. 이런 일은 썩
어진 것을 거둘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1)이 세상이 헛된 것이고 썩은 것이니만큼,
그것을 목표하고 일한 결과는 썩은 것일 수밖에 없는 까닳이고, (2)이 세상을 목표하
고 하는일은 성령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닌 만큼, 그 일 자체가 썩은 것이기 때문이
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
함은, 신자가 성령에게서 받은 모든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 봉사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희새함이다.(Greijdanus) .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 함은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
암아 이루어지는 전인격(영혼과 몸)이 영생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귀절은 사람이 그의 선한 행실의 공로로 영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 듯이 보
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
각할 때에, 이 구절을 그렇게 잘못보게 된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믿음과 행위를 구
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 둘은 함께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의로
운 행실을 열매로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선(믿음으로 행해진 선)을 행하는
자기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선행이 영생얻는 공로라는 것은 아니지만)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선행은 사람이 마땅히 실행할 자기 책임만 행함이 아니고, 남들을 도와줌이다. 남들을
도와주는 일은 용이한 것이 아니다. 도움을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고 사람도 많고, 도
와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도 많고, 또한 돕는 일을 직접 방해하는 장애물도 많다.
그러므로 남들을 도와주는 자는 낙심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갈 6:10
기회 있는 대로 - 이것은 남들을 도와주기에 적합한 시기(時期)를 말한다. 농부는
밭가는 때도 있고 추수하는 때도 있다. 그와 같이 기독 신자는 남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가 있다. 만일 그 때에 남을 돕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아픈 후회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주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믿음의 가정들 - 이것은 믿는 가족들 곧, 신자들을 가리킨다.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 이 귀절의 뜻은 알기 어렵
다. 바울이 이때까지 대서자(大書者)의 손으로 갈라디아 서신을 기록하도록 하다가 여
기서부터는 자기의 친수로 쓰기 시작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큰 글자
로" 쓰게 된 목적이 이 편지가 자기의 글이라는 것을 인표하려는 것이다. 일설에, 그
가 이 편지 전체를 친수로 쓰면서 이 부분에 와서는 대자(大字)로 쓴다는 뜻이라고 한
다(Duncan).
바울이 이렇게 자기의 서신에 대하여 자기의 저작 권위를 주장한 것은, 그의 서신
이 일반적 통신이 아니고 특수한 영권(靈權)이 있는 것임을 지적함이다. 그의 영권은
곧 사도적 권위이다.
갈 6:12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느다고 하면서 할례를 주장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대중의 인기를 구하려고 아첨하면서 복음에 할
례를 더해 가지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령의 뜻이 아니고 육체의 소역대로 모양을 내
어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비루한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할 뿐이라 - 저 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
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라고 하지 않고 할례를 겸하여 주장하였
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들의 핍박을 두려워한 까닭이다(행
13:45,50,14:2,5,19)
갈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곧, 할례 받은 유대주의자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씀이다(마 23 장; 눅 11:46). 옛 글에도 말하기를,
"사람이 비록 몹시 미련하여도 남을 밝히 꾸짖는다"고 하였다(人난支愚청仁즉明)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한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유대주의자
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 받기를 원하는 목적은, 이방인 기독신자들이 할
례를 받기만 하면, 그것은 바울을 반대하는 그들의 승리인 동시에 그들의 자랑거리가
된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한다는 말의 뜻이 그것이다.
갈 6:14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이와 같
은 진리는 빌 3:7-9에도 나타났다. 고전 2:2 참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작가에 못 박히고 - 이 말씀은 윗 문구
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자랑의 이유를 가리킨다. 그것은 이렇다.
곧, 바울과 세상과의 관계가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끊어졌으니, 그 십자가는 바울에
게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와 세상과의 관계가 존속하였더라면, 그는 세상
과 함께 멸망할 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자랑거리요 모든
신자들의 자랑거리이다.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세상이 비록 신자에 대하여 긴밀한 결탁을
가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자 자신이 아직 세상에 대하여 사모하는자라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역시 세상에 대하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
가에 죽으신 사실을 믿음으로 되어진다.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 곧, 구약시대에 있었던 "할례"는 이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란 말씀이다. 신약시대의 기독신자들은 그리
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새 사람된 것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전부를 의미한
다. 고후 5:17 참조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 -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가 내세에 완전히 변화됨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으나(막
14:25;계 3:12,,21:1-5), 특별히 그가 현세에 이미 받은 새 생명을 의미한다. 누구나
이 새 생명만 받았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될 것 없다(롬 2:29)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란 것은 위에서 말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원칙"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14절)을 중심한 그 교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행하는 자"란 말은 기독신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 이것은 육체적으로만 이스라엘이라고 자세하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대조하여 말한 참된 이스라엘를 가리킨다. 곧, 이것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새로운 이스라엘(기독신자)에대한 명칭이다.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평강"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이 된 뒤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구원의 총원천이다. 그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에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갈 6:17
나를 괴롭게 말라 - 이것은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다. 그들의 방해운동은 바울에게 괴로움이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 바울이 유대주의의 거짓스승과 달라서 주님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으니,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참된 사도인 흔적 곧, 증표이다. 롬 8:17;고후 1:5,4:10;골 1:24 참조.
갈 6:18
형제들아 -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이라고 한 것을 보니, 그들이 아직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교훈에 완전히 빠지지 않은 것이 명백하다. 그는 이렇게 애정 깊은 명칭으로 그들을 부름으로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 자기의 말씀(복음진리)를 듣게 하고, 거짓 스승들을 멀리하게 하려고 한다.(Greijdanu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이 축도의 목적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심령(心靈)깊은 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그의 은혜에 참예하여 거기서 떠나지 않기를 위한 것이다(Greijdanus). 큰 은혜가 하늘에 쌓였을지라도 인간이 그 심령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그것을 받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무엇보다도 그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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