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1
본절부터 7 절까지는앞장의 계속이다. 곧, 하나님의기업을 받을 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대조하는 말씀이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
곧,(1)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약 시대에는 계시 지식(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에 유치하여 종과 같이 율법의 외부적 속박을 받고 있었다는 뜻. (2) 신약 시대
에도 신양이 유치한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적 자유를 못느리고 율법이나 도덕의
배 아래서 종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갈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 이것은 로마의 법률대로
부친이 사망한 뒤에 남아 있는 미성년을 위해 관리인을 세우는 제도를 가지고 비유로
말한 것이다. 그 제도는 미성년은 성인(成人)이 되기까지 보호자의 감시를 받도록 되
어 있다. 그처럼 기독 신자도 그가 진정한 신앙에 이르기 전에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
는 유치한 정도에 있고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견인"은 부친이 없는
미성년자에 대한 일반적 감시를 맡은 자요, "청지기"는 특별히 그 가정의 재정을 관할
하는 자이다.(Greijdanus,Ridderbos).
갈 4:3
우리도 - 이것은 유대인 신자들만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을 포함하는 말인데, 신자
들은 다 함께 한 몸이며, 한 교회이며, 한 백성을 이룬 사실을 반영한다.
이 세상 초등 학문 - 이 말(* )에 대하여 몇
가지 해석이 있는 중 그 중요한 것은 (1) 자연 종교를 가지느 이방인들의 일월 성신
(日月星辰)숭배를 가리킨다 하고, (2) 유대인들이 날과 절기를 중요시하여 지킴이라
하고(Lietzmann), (3) 의식적(儀式的)율법을 가리킨다 하고,(4) 율법 전부를 가리킨다
고도 한다. 위의 네가지 해석 중 끝의 것이 가장 적합한 해석이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 여기 "때가 차매"란 말의 헬라 원어(*
)를 직역하면, "그 때의 그 충만이 이르매"이다.
"그 충만"은 관사(* )가 있어서 특수한 "충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때의 그
충만"이란 것은 모든 시대들의 중심점으로서 의미심장한 그리스도 강림(初臨)의 시기
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모든 시대들은 각각 뜻 있는 토막들이며, 그것들은 또한 뜻 있게 연락되어 있다는
것. (2) 그 모든 시대들은 결국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업을 목표하고 흐른다는 것이
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이것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함이 아니고, 미천
하고 연약해진 주님의 출생르 가리킨다. 그의 낮아지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
다.(Lighrfoot).
율법 아래 나게 한신 것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본래 인간을 상대한 율법 아
래 계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를 위하여 그 위치에 오셨고, 또 그들
을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인류의 죄 값)를 지불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
다.
갈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 - 앞절의 같은 말 해석을 참조하라.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인생들을 의미한다. 율법은 하나님 자신(혹은 하나님의 아들)을 제재할 표준이 아니
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선(善)의 표준이시며, 모든 진리(眞理)의 표준이시다."율법"
아란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제재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소량하시고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엑사고라세(* )인데,'사서 자
유하게 했다' 는 뜻이다. 한역의 "속량"이란 말에 있어서도 "속"(贖)자는 '산다'는 뜻
이고 "량"(良)자은 '자유'라는 뜻이 있다.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자유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자유
는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지킬 책임이 있고, 율법을 지키는 그들의 심리는
노예적 공포심이아니요, 감사오 사랑을 포함하는 경외심(敬畏心)이다.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여 하심 - 이것은 앞에서 말한 "소량"의 결과들 중 첫째이
다. 여기 "아들의 명분"이란 말(* )은 '아들로 둠' 곧, 양자 삼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장차 천국 기업을 받을 법적 자격을 가리킨다. 이 말은 롬 8:15에
"양자"로 번역된 낱말과 같은 것이다.
갈 4:6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이것
은 앞절에서 말한 "속량"의 둘째 결과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적 자녀의 명분을 받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성품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벧후 1:4 하반).그러
나 이것은 결코 우리의 본질(本質)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은
영원히 있을 수 없다. 창조주는 언제나 창조주이시고, 피조물인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
다. 벧후 1:4의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성령을 주셔서 인간적인 정도에서 하나님의 성결을 닮아 가도록 하여 하나님 아버
지의 사랑을 느끼고 그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심을 의미산다. 부자(父子) 관
계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성립된다. 비록 친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에게 아버지 다운
사랑이 없다면 그의 아들은 그를 타인과 같이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가 되신 그 사랑은 그가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되며(롬 5:5), 우리는
거기서 기탄 없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롬 8:15). 우리가 법적
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격을 가진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황공함과 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질적 자녀격을 얻었으므로 영원토록 기탄 없이 하늘 영광을 누
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바 아버지"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압바 호 파텔(*'
)이라고 하는데, "압바"는 아이가 솔직하게 기탄 없이 그의 아버지
를 부르는 명칭이다.(Kittel). 그러므로 이 말은 기독 신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느끼고 기탄 없이 그를 찾는 명칭이다. 히 4:16 참조. "부르게"란 말(*
)은 튼 소리로 기쁘게 부르짖음을 말한다.(Greijdanus). 마 9:27;요 7:28,37;행
14:14;롬 9:27 참조
루터(Luther)는 롬 8:15의 "부르짖음"(* )이란 말을 해석하면서, 큰 소리
로 부름을 뜻있게 풀이하였다. 곧, "율법 앞에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며, 싫어하며, 도
피하며, 폭군을 대함같이 침묵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속제로 인하여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리를 높여 '아버지'라고 부르게 죈다"고 하였다
(Vorlesung ber den R merbrief 1515-1516, 1965, pp.272-274)
갈 4:7
네가 - 앞절 초두에서는 저자가 2인칭 복수("너희")로 말해오다가 여기서는 2인칭
단수 ("너")로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되는 축복이 단체를 상대하지 않고 참된
신자들 각 개인을 상대하여 분배되는 것임을 표시한다(Greijdanus, Kommentaar op Het
Nieuwe Testament, IX, Galaten, 1936, p. 264)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를 지니라 - 이것은 5절에서 말한 "속량"의 세째 결
과를 가리킨다. "유업을 이을 자"(* )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유업을 받는 자"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
으시고 그에게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하셨다(창 1:28). 이것이 범죄하기 전
인간으로 세상의 후사(세상을 유업으로 거저 받는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법이었
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한 후 이것을 잃었던 것인데(창 3:18),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
서 그의 대속적 죽음에 의하여 신자들로 후사의 자격자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은 하
나님이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와 그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혹,
기업)으로 받게 하신 것으로도 예표되었다. 이 처럼 신자들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세상의 후사(만물의후사)가 되는 것이다.(롬 4:11-17)."유업"을 얻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다는 말씀에 대하여 크레다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울은 이 말씀
을 기록하여 갈라디아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유업의 권리를
주시고 그것을 완전히 취득(取得)하게까지 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곧, 유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일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시고 갈라디아 사람이 아님을 알게 한
다." 그 때에 율법주의로 기울어져 가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이 말씀을 들음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는 것은 언제나 그의 은혜로 되며, 또 확실히 이루
어 진다.
갈 4:8
그 때에는 - 이것은 그들의 복음을 믿기 전 시기(時期)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란 말(* )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고로"라
고 직역될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들", 곧 사신 우상(似神偶像)을 섬기게
된이유는 그들이 참 하나님을 모른 까닭이었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진리 지식의
근본인 고로, 그를 모르는 자는 세상 학문을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진리 지식은 없는
자니 그는 우상을 섬긴다(롬 1:21-23 참조).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은 인간의
위조신(僞造神)이고 실질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종노릇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우상을 섬겨서 유익을 얻은 것은 없고, 다만 공포심
으로 떨며 수고하는 노예가 될 뿐이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이 하나님을 기쁨과 사랑을 포함한 경외(敬畏)로 섬기며 또 복을 받음과 반대되는 것
이다.
갈 4:9
이제는 - 이것은 앞절의 "그 때에는"이란 말에 대조적으로 나온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
역되어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을 알았다. 아니 그보다도 너희가 하나님의 아신 바 되
었다는데" 라고. 이 말씀은 갈라디아신자들이 하나님의 아신 바 된 것을 근본적으로
중요시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귀하고 복된 일이다. 그러나 그 안
다고 함이 참되지 못하고 형식적이거나 피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아
신바"된 자로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신지식(神知識)의 진정한 종류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은혜로 자긱에게 관계
시키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으셨다는 의미이다(Greijdanus)
악하고 천한 초등 학문 - "초등 학문"에 대하여는 4:3의 같은 말해석을 참조하라.
그것을 "약하다"고 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에게 구원을 줄 능력이 없는 까닭이다.(롬 8:3).
"천하다"는 말은 헬라 원어의 직역대로 '극히 가난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것이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갈 4:10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여기 이른바"날"(* )은 '안식일'
을 의미하고, "달"(* )은 유대인이 지켜 내려온 '월삭'(매달초하루)을 의미
하고, "절기"(* )는 '유월절','오순절','장막절'같은 것을 의미하고,
"해"(* )는 '회년'을 가리킨다. 이런 제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얻는 안식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으로 그것
들은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는 의미로 바울은 말한다. 롬14:5-6;골 2:16-17;히 9:9-10
참조. 그때 갈라디아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교훈을 따라 율법의 의식적 부분
을 중요시하여 그것을 힘써 글자대로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을 줄 알고 그대로
지킨 듯하다. 그들은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대로 제7일(토요일)을 지켜야 된다
고 한 듯하며, 그 밖에 모든 절기들(예컨대 유월절,장막절)도 지켜야 된다고 한 듯하
고,희년도 지켜야 된다고 한 듯하다. 사도 바울은 신약 시대에 그런 의식적 율법이 계
속한다는 교훈을 배척한 것이다.
갈 4:11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이고니온(행 14:1-2), 더베와 루스드라(행 14:6), 비시디아 안디옥(행 14:19)에 교회
들을 세우느라고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뿐 아니라, 그 교회들의 시험들과 기타 문제
로 염려하였다(고후 11:28).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갈 1:2)에 침입한 이단(異端)은,
사람이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이 된다는 근본 진리를 폐지시키는 그릇된
교훈이었다(3:1-6).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교훈을 따르는 한에 있어서는 바울의 해산
하듯한 수고(19절)는 헛될 것이었다.
갈 4:12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 곧,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유대
주의의 의식적 율법을 버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이다(고전 9:19-23).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울처럼 율법에
대하여는 자유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적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
하여 책임이 없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구원문제를 율법에 붙이지 말라는 것 뿐
이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바울은 여기서부터 16절까지에 갈라디
아 교인들의 변심을 통탄한다. 바울에게 대한 그들의 처음 사랑은 뜨거웠었다. 그 원
인은, 그들이 본래 받았던 복음에서 이탈한 까닭이었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전라의
사랑의 관계를 추억하도록 하여 그들을 돌이키려고 힘쓴다.
갈 4:13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 여기 이른 바 "육체의 약함이란 말에 대하여는 이때까지 확
실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받을 만한 해석은, 바울이 자신의 핍박 받은 사
실을 가리켰다고 한다. 고후 12:10에서 "약한 것"이란 말이 핍박을 가리키기도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이고니온, 루스드라)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다.(행 14:5,19),
그가 그렇게 핍박을 받으며 비참한 고난을 당할 때에 그 지방의 초신자들은 바울을
따르는 것을 위험시하는 시험에 빠질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도리어
바울을 천사같이, 그리스도 같이 대접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여기"육체의 약함"이란 것이 바울의 어떤 질병을 가리킨다
고 하며, 바울이 선교 여행 중 몸의 병으로 인하여 갈라디아에 체재하는 중 그곳 사람
들에게 전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병이 무슨 병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이는 그것이 안질(眼疾)이라고 하나(15절 참조)확실치 않다.
갈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 - 곧, 바울의 "약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반가운 것이 아니
었으니,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바울의 인격과 권위까지 박대하게 되기 쉬운 시험건
(試驗件)이었다는 말이었다는 말이다.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 복음
을 바로 전하는 자는 곧바로 하느님의 사자이니 "천사와 같"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바울을 천사와 같이 영접한 이유는, 그들이 그에게서 하나님의 복음을 그대로
보배롭게 받은 까닭이었다. 귀한 복음 때문에 그들이 바울을 그처럼 높이 영접하였으
니,그것은 곧바로 복음에 대한 그들의 높은 평가였다. 그리하였던 그들이 이제 복음에
서 떠나 율법으로 떨어지려 함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
였도다." 복음 을 바로 전하는 사도를 그리스도처럼 대우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순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눅 10:16 참조. 이런 대우는 사도를 그리스도 자신과 동
일시(同一視)하는 의미가 아니라. 사도를 그리스도으 사자로 알아 존중히 여김이다.그
러므로 그런 의미로 사도를 대우함은 곧 바로 사도 배후의 그리스도 자신을 대우함이
다. 이것은 그들이 바울을 그리스도처럼 숭배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갈 4:15
너희가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그곳에서 처음 전도할
때에 그것을 큰 행복으로 알고 기뻐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서 그 행복감이 사
라져버렸다.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을 문책한다.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 바울이 그 때에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
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갈라디아 신자들이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그에게 줄 마음
이 있었다는 뜻인 듯하다. 바울의 눈이 병약하였던 듯한 사실은 행23:5에 나타나 있
다. 어쨌든 눈을 빼어 줄 정도의 사랑은 지극하다.
갈 4:16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 사도 바울은 그가 "참된 말"
곧,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이 그것을 배척함은 웬 일인다 한다.미움이 진리에서 생산
되는 법은 없다. 다만 진리를 받지 않는 자들의 패역과 악독에서 나온다(Calvin). 진
리로 책망하는 자의 말은 "충성에서" 나오는 것인만큼(잠 27:6), 성도는 그것을 "머리
의 기름 같이"(큰 대접으로)여겨야 한다.(시 41:5). 갈라디아 신자들이 이제는 바울을
버리다시피 하고, 거짓스승들 (유대주의자들)을 영접하였으므로 바울은 그것을 책망한
다.
갈 4:17
저희 - 이것은 거짓스승들을 가리킨다.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저희를 대하여 열심네게 하
려 함이라 - "이간 붙여"(* )란 말은 "제외시켜"(shut out)라고 개
역되어댜 한다. 거짓스승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교훈권(敎訓圈)에서 제외되어
자기들에게 와서 열심히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들의 열심과 바울의 열심은 대조적이
다. 그들은 자기들 중심이었으나.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
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
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한다(고후 11:2)
갈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
제든지 좋으니라 - 이 귀절에 대한 해석을 몇 가지 소개한다. (1) 지펠트(Siefert)의
해석 . 원수들(유대주의자들)은 너희 갈라디아 교인들인 좋지 않은 일로 이끌려고 열
심낸다. 그러나 나 바울은 너희를 좋은 일로 이끌려고 열심내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좋다는 뜻(고후 11:2). (2)렌달(Rendall)의 해석. 원수들이 너희를 열심으로 사모한
다. 좋은 일로 인하여 사모된다면 나(사도 바울)이외의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너희
가 사모되어도 좋다는 뜻. (3)크레다너스(Greijdanus) 의 해석. 사람이 좋은 일로 인
하여 사모함이 됨은 좋으니, 나 바울이 너희 갈라디아교인들의 사모하는 대상이 됨은
좋다는 뜻. 이 해석이 적합하다.
갈 4:19
나의 자녀들 - 이것은 "형제들"이란 말보다 더욱 애정 깊게 나온 말이다. 바울은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냉대하지 않고 여전히 뜨거운 사랑으로
권면한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 기독 신자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룬"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레다너스는 말하기를,"기독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만 구원을 기대하며, 주님 안에서만 안식하며, 주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살며, 주님의
의(義)만을 신뢰하며 주님으로만 이루어지며, 그의 언행(言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결정되며, 그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주님을 근거하고 주님을 향하여 있다"라고 하였
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 수고"는 극도로 큰 고생
이니, 그 고생으로 인하여 죽는 일도 있다. 바울은 일찌기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느라
고 그런 고생을 하였던 것이다. 행 14장 참조 그런데 이제 그 교회가 그 믿던 복음을
떠나는 위험에 접근한 고로, 그는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다시 그런 고생을 하고 있다
고 한다. 교역자는 교회를 세우는 일만 책임진 것이 아니고, 그 교회가 이단의 해를
받지 않도록 해산의 수고와 같은 수고로 기도하며(사 26:17), 가르치며, 길러야 할 책
임도 지고 있다. 그는 해산하는 수고를 한 번만 아니라 거듭 당해야 된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분깃은 고난이다. 교회가 혼란해지고 교인들의 신앙이 이단으로 인하여 흔들
릴 때에 교역자가 정치적 방법으로만 그들을 단속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
음이라 - 곧, 이때까지는 바울이 그들에 대해 의심이 있었으므로 엄하게 말하였으나,
장차 그들을 심방하고 그들의 실정을 좀더 소상히 안 뒤에는 모성적(母性的)으로 이해
하며 유순하게 말하겠다고 함이다. 리츠만(Lietzmann)은 여기 "음성"이란 것이 글자대
로의 어성(語聲)을 가리키고 교훈의 내용 여하(如何)를 말함이 아니라고 한다.
갈 4:21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떠나 율법주의로 떨어
지려하므로 바울이 이렇게 문책한다. 그들이 완전히 율법주의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있었다.(1:6, 4:11,17)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 곧,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묻는 말이니, 율법에 기록된 대
로 율법의 성경이 어떠함을 들어 본 적이 없는가 한느 통탄의 질문이다.율법과 복음의
비교해 볼 때에 율법은 인간을 속박할 뿐이고 구원을 못준다. 비유컨대, 율법에 속한
자들은 종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율법책 (모세 오경 중 창세기 16장,
21장)이 자증(自證)한다. 사실이 그러한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찌하여 율법 아래 들
어가고자 하는지?
갈 4:22
기록된 바 - 이것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 브라함의 "두 아들"은 서자(庶子) 이스마엘(하갈의 아들), 친 아들 이삭(사라의 아
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이 밖에도 있었다.(창25:1-2). 여기서는 다만
"두 아들"을 들어서 율법과 복음을 비유한다.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육체를 따라났"다고 함은 , 이스마엘은 (1) 사람의 육체적 계책(計策)대로 아브라
함이 그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인 까닭이며(창 16:2), (2) 아브라함의 자연적 체
력(自然的體力)에서 난 아들인 까닭이다.(창 16:1-4). "약속으로 말미암아"났다고 함
은, 이삭이 (1)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생된 까닭이며(창 17:16,18:10,14), (2) 노
쇠한 아브라함의 몸에서 초자연적 능력(은혜)으로 출생된 까닭이다.(창 18:13-14,21-1
-2;히 11:11).
갈 4:24
이것은 비유니 - 여기 "비유"란 말(* )은, "풍유(風喩)
로 말함이 되는 것들"이라고 번역해야 된다. "풍유"는 무엇이가?
그것은 "비유"(* )와 다르다. "비유"는 그 내용의 주요한 부분들만이
어떤 신령한 뜻을 내포한 것이고, "풍유"는 그 내용의 전부가 각각 신령한 뜻을 나타
낸느 것이다. 아브라함의 가정의 두 여장엑서 되어지 역사적 사건은 본래 예언적인 풍
유로서 신령한 뜻을 가진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기사(記事)들은 어느 것이든지 다
풍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오리겐의 학설은 성립될 수 없다. 칼빈은 말하기를 ,
"아브라함의 가정은 그 당시의 참된 교회니 만큼,거기서 되어진 주여한 역사적 사건들
은 오늘 우리에게 신령한 모형이 된다"고 하였다.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 여기 이른 바 "언약"이란 말(* )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세우신 것인데, 그 하나는 '행위 언약'이고, 다른 하나
는 '은혜 언약'이다. 행위 언약은 아담에게 주셨던 것인데, 그 언약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다. 아담이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였지만 그것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속
말하며 우리를 정죄한다. 그러나 은혜 언약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의를 전가(轉嫁)시켜 주시는 제도가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주
며(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우리의 구원 문젤르 해결해 준다.
하나는 시내산으로 부터 종을 낳을 자니 곧 하기라 - 이것은 앞에 언급된 두 여자
의 풍유에 대한 해석인데, 아브라함의 첩 하가는 율법의 상징인 시내 산과 같다는 말
이다. "종을 낳은자."율법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종처럼 속박을
줄 뿐이고 영적 자유는 못주기 때문이다.
갈 4:25
지금 있는 예루 살렘 - 이것은 바울 당시의 예루살렘이니 곧, 율법주의자들의 중심
지이다.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 하가 자신이 그의 자식과 함께 종어었던 것
과 같이, 율법주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곧,유대교)로 대속(代贖)의 영적 자유를 못누
리며, 따라서 그 교훈을 받은 자들로 그러하다.
갈 4:26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위에 있는예루살렘"은 '하늘
에 있는 참된 교회"란 뜻이다. "하늘에 있다" 함은 그것이 땅에 있으면서도 여적으로
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가리킨다. 빌 3:20참조 "예루살렘"을 교회와 관련시킨 표현
은 제21:2,10에도 있다. 이 교회를 "자유자"라고 함은 참된 성도들이율법의 정좌에서
해방된 것을 가리킨다.
"어머니"(* )는 역시 '참된 교회'를 가리키는데, 그 단체에(1)복음을 참
되이 전하여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있고, (2)신자들을 하나님의 말
씀으로 잘 양육하는 역사도 있다.(벧전 2:2)
갈 4:27
본질은 사 54:1의 인용이다.
잉태치 못한 자...구로치 못한자...홀로 사는 자 - 이 세 가지 어귀는 동일한 내용
을 가리킨다. "홀로 사는 자"란 말의 뜻을 알면 그 위의 두 어귀의 뜻도 알게 된다.
"홀로 사는 자"란 말(* )은 '광야'를 말하는데, 이것은 자식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본절의 인용문은 선지자 이사야가 포로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두고 예언한 것
이다. 그 내용은 곧, 포로된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이 취급되었고,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백성으로 여김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그 포로된 자리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광
복(光復)의 시기가 있을 것이었다. 이사야는 그것을 내다보고 말하면서, 겸하여 장차
이방인들이 많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올 것도 포함시켜 예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
건은 이렇게 해석된다. 곧,하나님의 자녀들이 생기지 못하던 이방에서 앞으로는 수다
히 나오게 되어, 그 수효가 남편 있는 자(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신 이스라엘)의 자녀보
다 더 많겠다고 함이다. 위의 이사야의 예언은 켤국 신약의 교회를 가리킨 것이다. 바
울은 앞절에서 "우리 어머니"란 말로 이 예언의 성취를 생각한 것이다.
갈 4:29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 "육체를 따라
남"과 "성령을 따라 남"에 대하여 위의 23절 해석을 참조하라,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
박한 일은 창21:9에 암시되었다.
이제도 그러하도다 - 곧, 바울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의 복음을 믿는 신자들을 핍박
하고 있다는 말이다. 율법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선한 것이지만, 율법의 목적을 잘
못 알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자들을 핍박하였
다.
갈 4:30
계집종과 그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 이 말씀은 창 21:10,12을 인용한 것인데 몇 가지 사실을 포함한다. 곧, (1)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속박하지 못한다는 것. (2) 특별히 율법의 의식적 부분이 신약 시대에는 그대로 사용되지 않는 다는 것. (3) 율법을 잘못 알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천국의 기업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본절의 말씀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할 것을 지시한다.
갈 4:31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 기독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의 정죄를 면하고 영적 자유를 얻었으며 영원한 천국 기업을 누릴 자이다(요 8:35). 그러므로 그들은 "계집종"으로 상징된(24절)율법의 자녀(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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